여름과 사색과, 의뢰

정효린에게 여름이라는 단어는 범상한 계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시간을 떠올리면 언제나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두꺼운 채광이었다.

햇빛이 치밀어 오르면서 빛나는, 불투명한 유리 옆에 투명한 것. 찬란하게 빛나면서도 그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것. 그리운 것.

추적거리는 빗소리보다 더 끈적한 것.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 아스팔트 타는 냄새를 맡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고등학교 1학년 여름이었다. 가장 더운 여름이라고 뉴스의 기상캐스터가 말했다. 몇 년 만에 처음이라고, 더위를 조심해야 할 거라고.

효린이 느끼기에 오히려 다른 것들을 조심해야 할 시기였고, 매미들은 기운차게 울고 있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친구들. 양산 없이 햇살을 이겨내던 시절. 더워서 에어컨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바보들. 삶이란 게 뭐지, 내신이란 건 또 뭐지, 미래란 뭐지, 그런 시기들.

녹아서 바닥에 눌어붙은 사탕처럼 여름은 구분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들이 늘어나던 시기였다.

이번 여름은 그 시기의 여름과 무척 닮았었다. 일단 알 수 없는 게 많았다. 그리고 무척… 더웠다.

톨링 벨에 신형 에어컨을 도입해 둬서 망정이었지, 사장과 알바생 두 명이 동시에 온열질환으로 입원할 뻔했다. 알바생이자 살아 있는 권총인 창이는 퍽 버티기 어려워했다. 캐나다에서 오래 살아서 이런 더위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알바생이자 현직 소드마스터인 한소라 역시 어떤 이유에서든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질색할 정도였다. 아예 퇴근하기 싫어할 정도였으니. 밤도 낮만큼 더워서 문제라나.

결국 효린이 점장의 권한으로 24시간 내내 에어컨을 틀면서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졌다.

다이소에서 물건을 사 들고 온 효린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녹아내리는 소리를 내뱉었다.

"수고하셨어요."

"네, 오픈까지 얼마 안 남았네요."

톨링 벨은 클래식 바다. 효린이 점장이고, 창이와 소라가 종업원으로 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술집이지만 변칙적 인물들이 다수 드나드는, 일종의 회색지대랄까.

"이렇게 더워서 사람이 오려나 모르겠어요."

여름은 가열하게 끓고 있었다. 열대야가 계속되면서 밤에 몰리던 손님들도 차츰 줄어들었다. 장사에 사활이 걸린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던 손님들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쪽으로 오는 손님들은 오지 않을까요?"

"그것도 요즘은 딱히 건수가 없어서요."

톨링 벨은 기본적으로 바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저것 의뢰를 받아 해결해 주는 해결사 업무도 진행한다. 해결사라고는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해결사"스러운 업무는 아직까진 없었다. 그러니까 — 못 받은 돈 대신 받아드립니다 같은 류. 그건 이미 전문가들이 시중에 많아서 그런 걸까.

"오우, 사장님! 오픈 시간!"

소라가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효린이 다이소에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테이블을 정리 중이었는데, 금세 어딜 다녀온 모양이었다. 창고라도 정리한 걸까? 소라는 이마에서 땀을 훔치면서 당당하게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소라 씨, 지금까지 에어컨 밑에서 가부좌 틀고 있다가 화장실 다녀온 거에요."

의아한 효린의 표정을 읽었는지 창이가 금세 소라의 행적을 고해바쳤다.

"서운하네! 테이블 정리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놓고 설거지하려니까 화장실로 도망친 게 누군데요."

"…일단 오픈 준비 먼저 합시다."


손님은 효린의 예측처럼 적었다. 효린의 예측으로는 일시적인 감소였지만, 점장으로서는 텅 빈 테이블이 많을수록 가슴 한구석이 스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심심한데 무서운 이야기라도 할까!"

침묵을 깬 건 소라였다. 그나마 남은 손님 무리까지 나가고 가게가 비자, 소라가 바 테이블에 떡하니 앉았다. 쓴소리를 내뱉고 싶어 하는 얼굴의 창이였지만, 효린은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

"그럴까요?"

"점장님!"

"앗싸!"

신난 얼굴의 소라였지만, 금세 고민하는 얼굴로 바뀌었다.

"이렇게 금방 허락받을 거면 첫사랑 이야기부터 하자고 할 걸 그랬나?"

"네?"

이번에는 효린이 당황할 차례였다. 창이의 날카로운 일격이 소라에게 가해졌다.

"그런 헛소리할 거면 일이나 똑바로 하든가!"

"왜! 선배도 점장님 첫사랑 궁금하지 않아?"

순간, 효린은 두 맹수 앞에 놓인 토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명과 한 자루의 시선이 그대로 효린에게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몸이 굳은 효린이 아무 말도 못하자, 소라와 창이는 서로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 순간, 무언의 합의가 진행된 듯했다.

"첫…첫사랑이라뇨."

그러나 저항은 불가했다.

결국 이야기가 시작됐다. 효린에게도 첫사랑이라는 게 존재하긴 했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었다. 이제는 아주 멀어진 듯한, 과거의 이야기였다.

"누구였어요? 친구?"

"한 학년 위 선배였어요."

오오, 하고 소라가 감탄했다. 창이는 관심 없는 척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지만, 물을 틀지 않고 효린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효린은 붉어진 얼굴을 감쌌다.

"우리 무서운 이야기하기로 하지 않았어요?"

"점장님 이야기 끝나면 하죠 뭐!"

효린은 한숨을 푹 내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앞으로 유구하게도 선배라고 부를 그 사람은 한 학년 위의 우등생이었다. 공부를 잘했고 특이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같은 동아리에서 만났고, 처음 보았을 때부터,

— 아, 큰일 났네.

싶었다. 그 뒤로는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3년이었다. 선배가 가는 곳에는 항상 효린이 같이 있었다. 물론 맨날 같이 다녔던 건 아니었고, 최대한 상황이 허락하는 한, 그리고 그 선배가 기껍게 여길 정도로만 그렇게 했다.

한 번은 <라라랜드>를 같이 보았다. 동아리 활동 중 하나였다. 불 끈 교실에서 모두 옹기종기 모여 영화를 보았다.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이 웃으면서 사랑을 느낄 때 효린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 앞에서 다른 학생들과 담요를 덮고 바닥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선배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효린은 고개를 애써 피했다.

"지금은 <라라랜드>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공포 영화가 됐죠."

"엥? 그건 로맨스 영화잖아요."

"적당히 이해하세요."

창이가 면박을 줬다.

고백은 선배의 수능이 끝나고 이행됐다. 선배는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저녁 늦게 선배가 효린을 불러냈다. 일상적인 시간이었다.

그 거리 끝에서 효린은, 말을 더듬고, 혀를 씹고, 우물쭈물거리고, 그렇지만 당당하게 몇 마디를 내뱉었다. 관계가 망가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뱉은 말이었다.

"어떻게 됐게요?"

"차였나?"

"입 좀 닫고 들으세요, 소라 씨."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웃었다. 같은 마음이었다고, 그가 수줍게 말했다.

손을 꽉 쥐었다가 서로 멀어졌다. 장거리 아닌 장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 남친이고, 여친이었다. 그게 무엇보다 즐거웠다.

선배는 먼저 대학교로 떠났다. 선배가 없는 학교에서 지겹도록 공부했다. 선배와 같은 학교에 가고 싶다, 그런 생각보다는 효린 입장에서도 대입은 중요한 문제였다. 고3이 되면서 세상은 날카로워졌다. 아니, 효린이 날카로워졌다. 앞뒤를 생각하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 스트레스로 점철된 시간은 점차 무거워졌다.

그땐 모든 게 무거웠다. 마치 종이를 얼굴에 얹고 누군가 자꾸 물을 붓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막혀서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방안의 모든 게 어질러져 있었다. 그런 삶이었다.

선배와의 시간은 겨울을 지났고, 봄을 지났고, 여름이 지났다. 여름 즈음에 효린과 선배는 시간을 가졌다. 표면상의 이유는 효린의 수능이었다. 그러나 둘 다 그 시간이 마지막이 될 것을 알았다.

선배의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은 건 효린의 수능이 끝나고 난 뒤였다.

1년 만에 나타난 선배는 더욱 아름다워졌다고, 친구들이 말했다. 그의 새 연애는 순조롭다고 했다. 선배는 효린과 같은 학년의 후배들을 불렀다. 선배가 자랑하는 새 남친은 선해 보였고 굳건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첫사랑이 끝이 났죠. 평범한 이야기예요."

"…생각보다 진짜 평범하네요?"

소라의 얼빠진 소리에 창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꼭 그렇게 헛소리를!"

"수능도 끝났는데, 다시 연락해 보진 않았어요?"

"하려면 할 수 있었겠죠.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효린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이제는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그 시간을 되짚는 게 아프진 않았다.

"저는 제가 굉장히 선하다고 생각했었는데요…"

효린은 잠시 닦던 컵을 들어서 불빛에 비춰 보였다.

"사실 그렇지 않았어요. 저는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인간이었죠.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닌 일로 그 사람을 아프게 만들었어요.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글쎄요, 한 번 잃은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효린 스스로도 알았다. 만일 그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 자체가 그를 괴롭게 만들었을 거라고.

"그래서 그렇게 끝났어요… 에이 참, 이 이야기 재미없어서 안 하려고 했는데."

세 명 모두 어색한 분위기를 길게 가져가고 싶진 않다는데 총의를 모았다. 세 사람은 금방 무서운 이야기로 선회했다. 소라는 독일에서 만난 괴생명체에 관한 이야기를 말했다. 효린은 군대에서 목격한 귀신 이야기를 했는데, 창이는 귀신보다는 군대에서 총기 다루는 꼴에 더 공포를 느낀 듯했다.

창이의 차례였다.

"음… 캐나다에서 겪은 일인데, 한동안 북부에서 살았어요. 유콘 쪽이었죠. 거긴 엄청 추운데, 사람도 얼마 없고 야생동물만 많았거든요."

"그런 곳에 왜 산 거야?"

"원래는 온타리오에서 살았는데, 거기서 알게 된 사람 부탁으로 갔었거든요. 단기로 집을 봐주게 되어서."

창이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그곳은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설경이 펼쳐진 곳이었다. 가장 가까운 인가가 30km 너머에 있고, 마트 같은 시설은 주도인 화이트호스로 나가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곰이 진짜 많은 동네였어요. 다들 엽총 하나쯤은 집에 두고 있었죠. 뭐…저도 그랬고."

어느 날 밤이었다. 눈보라가 치던 날이었다. 늘 하던 대로 집을 점검하고 잠을 청하려고 할 때였다.

"문을 누가 두들기는 거예요."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노크 소리가 이어졌고, 창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에 걸린 M24 SWS을 들었다. 당시로서는 신형 반열에 드는 모델이었다.

"외시경 같은 게 없어서 그대로 돌격하는 수밖에 없었죠. 천천히 문을 여는데…"

처음에는 예티라고 생각했다. 문을 열자 나타난 것은 거대한 형체에, 이족보행을 하는 무언가. 두툼한 외피를 두른 인간형 괴물.

"엄청 놀라서 바로 조준을 하니까…"

형체가 외쳤다. 사람이라고.

"사람이 거기 있었다고?"

"거기 왜 있었대요?"

소라와 효린의 질문이 터져 나왔다.

"남자가 말하기를…"

남자는 큰 키에 수척한 인상이었고, 눈보라를 뚫고 걸어온 모양인지 창백해 보였다. 오랫동안 씻지 못한 것인지 꽤나 꼬질꼬질해서 아시아인인지 원주민인지 한눈에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괴한 것은 그 인상으로, 분명 평범한 사내였으나 어쩐지 기이한 분위기가 풍겼다. 마치 피로 물들어 있는 듯한, 붉은 기운이 감도는 눈동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최근 이 근처를 서커스단이 지나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갑자기 웬 서커스단?"

"저도 황당했지만, 생각해 보니 시내에서 그런 공연을 하고 있다고 듣기는 했어요. 그렇지만 이런 외딴집에서는 아주 먼 거리였거든요."

창이는 처음에 남자를 일단 안으로 들여야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 않았다. 시내로 가서 묻는 게 아니라 이런 먼 곳에 온 이유가 무엇일까? 애초에, 이 남자가 사람은 맞을까? 자기가 죽은 걸 알지 못하는, 아주 먼 옛날의 유령이 나타난 게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남자는 거의 움푹 꺼진 눈에 마른 몸을 하고 있어, 창이가 들었던 웬디고의 모습과 아주 유사했다. 설마 남자의 정체는 아메리카의 괴물, 웬디고인 걸까? 눈보라가 치는 날 나타난다는 웬디고, 사람이 식인을 하면 되어버린다는 웬디고…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쏴버렸지?"

"아뇨, 그냥 집 안으로 안 들여보냈어요. 지금쯤 시내에서 공연하고 있을 거라고 말해주니까 그냥 어둠 속으로 쓱 사라지더라고요. 정말 기괴한 경험이었어요."

"그러게, 진짜 기괴한 경험이네."

"그쵸? 그… 으악!?"

창이가 대답하다가 놀라 펄쩍 뛰었다. 놀란 건 소라나 효린도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 은근슬쩍 바 테이블에, 그것도 세 명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이야기에 너무 집중한 탓이었을까?

손님은 숏컷을 한 여자로, 컴뱃셔츠와 유사한 상의를 걸쳤다. 근육질이었고, 소매 너머로 드러난 팔뚝에는 잦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시원시원한 눈매에, 입가에는 웃음기가 머금어져 있었는데 결코 긍정적인 의미의 웃음은 아닌 듯했다.

"마스터, 올드 패션드로 한 잔."

"네, 넵!"

효린이 재빠르게 칵테일 제조에 들어갔고, 소라도 은근슬쩍 청소를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 손님을 제외하곤 없다. 창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효린을 도우려고 했고,

"아가씨는 잠깐."

손이 툭, 하고 얹혀졌다.

"무슨… 일이시죠?"

"불쾌했으면 미안. 같은 입장에서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었거든."

여자가 씩 웃었다.

"아가씨가 창이, 맞지? 살아 있는 무기."


여자의 이름은 후미야마 겐이었다.

"확실히 시원시원해! 하하, 여기 종업원만 아니었어도 우리 조직에 포섭해 보는 거였는데."

효린의 필사적인 중재로 창이가 총구를 내리자 후미야마가 웃으며 말했다. 창이의 얼굴은 더욱 험악해졌지만, 분노보다는 후미야마의 용건을 듣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냥 칵테일만 드시러 온 건 아니겠죠."

"겸사겸사."

후미야마 겐은 문산회, 곧 후미야마카이(文山會)의 회장을 맡고 있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데, 뭐 사실 이름만 거창하지 아직 중소기업 정도라서. 변칙적 인간들을 규합해서 이것저것 하고 있지."

"…손님은 야쿠자인가요?"

"겸사겸사."

아무래도 후미야마의 말버릇은 겸사겸사인 모양이었다.

"창이 씨를 만나러 온 것만은 아냐. 톨링 벨의 이야기를 어디서 주워들었는데, 흥미롭더라고. 아, 칵테일 맛도 궁금했고."

후미야마는 효린이 막 건넨 올드 패션드를 한 입 마시고는 씩 웃었다.

"장인이로군."

"감사합니다."

효린은 석연찮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나 후미야마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품속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효린 앞에 건넸다.

"의뢰…로군요?"

"겸사겸사."

또 그놈의 겸사겸사였다. 창이는 질색을 하고 후미야마에게 쏘아붙였다.

"날 왜 만나러 왔는지, 그것부터 이야기하죠."

작년에 창이는 HEA 소속이자 왕하십삼검 중 한 명, 미라에게 자신과 유사한 존재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의뢰했다. 왕하십삼검은 자아를 가진 검들의 모임인데, 그 출신이 모호한 이들이었다. 그런 미라이니만큼 창이처럼 자아가 있는 무기에 대해서 더 잘 알아낼 거라 믿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 후미야마 겐이 그런 무기일까? 그러나 겐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무기라기보다는 지극히 인간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것이 느껴진다. 어딘가 익숙하고, 어딘가 아주 이질적인…

혹은 사취.

"나도 강제로 영혼이 주입당했다고. 물론… 보통 그게 다 내가 죽여서 나한테 들러붙은 원령이긴 하지만."

"…네?"

"그래서 같은 입장이라는 거지."

"그게 도대체 왜 같은—"

후미야마가 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죽어야 할 명줄이 다시 붙었으니, 그 굴레를 같이 짊어진 게 나와 창이 당신 아닌가."

창이의 머릿속에 처음 스친 생각은 지금이야말로 후미야마를 쏴야한다는 것이었으나, 말의 의미가 후에 따라왔다.

창이가 지금의 형태가 되기 전에, 총이 아니라 무언가였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지금 후미야마가 하고 있었다.

"내가 전에 몸담고 있었던 직장에서 그런 연구를 많이 했거든… 그래서 당신이 그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온 거야. 나도 엄밀히 말해서 전 직장의 창조물이니까…"

후미야마가 씩 웃었다. 문득 창이가 고개를 돌려 소라와 효린을 보자, 둘 다 안색이 창백했다. 소라는 늘 차고 다니던 기병도에 손이 올라가 있었고, 효린 역시 아래 숨겨둔 야구 배트에 몸을 가까이 대고 있었다. 후미야마의 기운을 알아차린 걸까?

아니었다. 그보다는 목격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어느샌가 후미야마의 손에 들린 작은 칼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작업 공간에서 가져간 듯했다.

그러나 그 칼은 창이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자기 손목에, 거꾸로 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자해를 하려는 건가? 시위용으로 그런 짓을 할 사람 같진 않은데… 창이의 시선이 칼에 닿자, 후미야마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잽싸게 칼을 내려놓았다.

"싸우려고 온 거 아냐. 안심해. 그럼 이제, 의뢰를 좀 해도 되려나?"

경계하면서 창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후미야마는 효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효린은 쪽지를 펴서 읽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고, 후미야마 겐을 노려보았다.

"…왜 하필 저희 가게에서요?"

"믿을 만한 정보원이 말하길 이 바가 은근 재단의 종자들과 불화가 있다고 하던데."

"저희가 그 재단…이라는 단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건 사실입니다만."

"그래서 그걸 맡기려고 하는 거야."

"점장님, 의뢰 내용이 뭔데요?"

효린은 굳은 얼굴로 창이와 소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쪽지의 내용을 읽어내렸다.

"…‘재단의 이념에 반대하거나 재단에 증오를 가진 자들 중, 이 바에 드나드는 자들의 명단을 조사해서 내게 알려줄 것. 혹은, 그들에게 재단에 맞서 싸우려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릴 것. 그들이 내게 연락하도록 주선해 주길.‘"

쪽지를 내리면, 후미야마가 효린을 보고 씩 웃고 있었다.


후미야마 겐은 처음 왔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텅 빈 잔 옆에 값을 치르고 여자는 나가버렸다. 재빠른 오고나감에는 아마 여자 본인의 능력이 개입되어 있으리라.

"그냥 붙잡아서 심문해 볼 걸 그랬어. 너무 수상하잖아!"

소라가 아쉬운 듯 기병도를 툭툭 두들겼다.

효린은 쪽지의 뒷장에 적힌 여자의 이름과 연락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후미야마카이(文山會)의 후미야마 겐.

"아마 후미야마카이가 이 사람의 진짜 소속은 아닐 겁니다. 뭔가 더 큰 일을 꾸미는 곳에서 이 사람을 보냈을 거예요."

"아… 그냥 쏴버릴 걸 그랬나."

창이의 넋두리에 효린이 대꾸했다.

"창이 씨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랬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몰라요. 어쩌면 저 사람 능력이 공격당하는 것에 우위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죠. 아까 봤잖아요, 그 칼."

효린의 통찰력은 알아줄 만했다. 창이는 속으로 짧은 시간에 디테일까지 추론을 한 점장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효린의 말이 맞았다. 곧바로 공격했다면 효린이나 소라가 위험해졌을지도.

"근데 참 신기하네요."

"뭐가?"

"아까 그 사람…"

효린이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창이와 소라의 눈이 효린에게 몰렸다. 효린은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침묵이 길어지다가, 마침내 효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 아까 제가 말했던 그 첫사랑이랑 엄청 닮았어요."

순간적으로 창이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에이씨, 무슨 중요한 이야기인 줄 알았잖아!"

추론 능력은 개뿔. 창이는 성질을 내며 밖으로 쿵쿵 걸어 나갔다.

머리가 정리가 안 됐다. 효린의 첫사랑 이야기에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고, 갑자기 나타난 후미야마 겐은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내 정체는 어디서부터 알려진 거며, 대체 그 여자의 전 직장이 어디길래 나 같은 걸 많이 봤다는 건지.

해석하기 힘든 구석에 왔을 때 여자는 나가버렸고, 효린은 지 첫사랑이랑 닮았느니, 어쨌느니. 저걸 확 가서 한 대 쥐어박어? 창이는 혼자 성질을 내다가 더위에 지쳐 주저앉았다.

이 시간이 되어도 밤은 여전히 더웠다. 짜증스러운 열기에 창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쌍욕을 내뱉었다. 심란한 일만 가득한 날이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일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달은 허여멀겋게 빛나고 있었다.

먼 훗날, 창이는 그날 밤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밝은 달을 떠올렸다. 그나마 가장 마음 편했던 밤이었다고. 가장 속 편했던 시기였다고.

그날 만났던 인물이 재단에 대항하는 혼돈의 반란 하위 조직, 혼원대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속이 편하진 않았으리라고.

하지만 그날 밤의 창이는 혼란스러운 마음만을 가진 채, 혼자 욕설을 중얼거리며 새까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더 많은 일들이, 더 알 수 없는 일들이 다양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인물이 톨링 벨을 찾았고, 더 소란스러운 나날이 일상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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