杞東樓公者,夏后禹之後苗裔也。殷時或封或絕。周武王克殷紂,求禹之後,得東樓公,封之於杞,以奉夏后氏祀。
기나라의 동루공은 하후우의 후예이다. 상 시대에 제후에 봉해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였다. 주 무왕이 상 주왕을 무찌르고 우의 후예인 동루공을 찾아 기나라 제후에 봉하고 하후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기나라 사람들은 근심이 많았다. 그 근심은 아침에는 무엇을 먹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봄에 씨를 밭에 뿌리면서 가을에 잘 수확할 수 있을지 근심했고, 여름에 강둑을 지으면서 겨울에 그것이 얼음 때문에 갈라지지는 않을지 근심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오늘과 내일의 간격은 하루에서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한 해가 되었다. 이웃나라에서 도는 우스갯소리에서 기나라에서 태어난 아기는 늙어 죽을 것을 걱정한다고 했다.
그들은 살아가지 않고, 죽어갔다.
군사를 거느리며 행차에 나설 때, 저 멀리 밭에서 쟁기를 든 농부 몇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창과 칼이 쨍 소리를 내며 덜그럭거리고 수레가 구르는 소리 따위는 듣지도 못한 눈치였다. 손과 발에 흙이 잔뜩 묻은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광경은 이따금씩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때는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근심이란 존재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텅 빈 눈빛으로 해와 구름을 응시하는 그들의 모습은 단순한 근심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닌 듯했다.
한 나라의 태자로서 백성들을 도울 방법이 없지는 않음을 깨달은 때는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아버님,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어느 깊은 밤, 아버지께서 나를 긴히 부르더니 국정에 관한 문서와 선현의 저서를 보관하는 서고에 오게 했다. 등잔을 조심스럽게 들고 아버지를 따라가자 방의 천장까지 가득 쌓인 죽간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가끔씩 경전을 찾아 방 안으로 들어가곤 했지만, 이 어두운 심야에 등잔 하나에 의지하며 서고에 발을 내딛는 것은 처음이었다.
“태자야, 너는 이 상자를 열어본 적이 있느냐?”
아버지께서는 책장 아래에 은밀하게 보관되었던 나무 상자를 꺼내 나에게 보이셨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그 안에는 매우 작은 글씨로 알 수 없는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거북의 배껍데기가 있었다. 배껍데기의 곳곳에 원, 사각형, 삼각형 등 다양한 도형이 나타났지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얗게 말라붙고 금이 간 껍데기에 글자와 도형을 새겨 넣고 오목하게 파인 공간에 먹을 부은 것 같았다.
껍데기를 두 손으로 잡고 살며시, 이리저리 살펴보던 나는 궁금증에 겨워 아버지께 이것의 용도를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하늘과 땅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던 시절에 점을 치고자 거북의 배껍데기를 썼다고 말했다. 그 사실은 나도 익히 들은 바였기에 호기심은 오히려 더욱 커졌다.
“하지만 이 거북 껍데기는 점 치는 데 쓰였다고 하기에는 글씨가 너무 작고 껍데기 안쪽을 빽빽하게 채워 읽기가 어렵습니다. 단순한 물건은 아닌 듯싶습니다.”
“너의 눈이 예리하구나. 지금은 모두가 역(易)을 참고하며 점복을 살피지만, 아주 옛날에는 하늘의 흐름과 땅의 움직임 따위를 전부 이 거북의 껍데기를 불로 구워 알고자 했다. 우리의 선조이신 우(禹) 임금께서도 많이 찾으신 물건이지.”
“하늘의 흐름과 땅의 움직임은 한낱 사람이 알아내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자주 바뀌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이해한다는 말씀입니까?”
“성(成)아.”
아버지께서 미소를 지으며 나의 이름을 부르고, 껍데기와 등잔을 상 위에 나란히 놓았다. 그 후 손가락으로 껍데기에 적힌 글을 가리키며 그 내용을 천천히 읽어 주었다. 해와 달, 구름과 바다, 산과 들, 강과 내, 하루와 사철이 바뀌고 움직이며 나고 사라지는 이치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때로는 놀라워하며 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했다. 글자는 여전히 읽을 수 없었지만, 그것으로 적힌 문장이 담은 심오한 의미를 받아들이면서 살면서 처음 느낀 황홀감과 기쁨이 용솟음쳤다. 글자가 하나둘씩 읽히는 듯도 했다.
“놀랍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지식을 언제 모두 익히셨습니까?”
“익힌 것이 아니라, 그저 여기에 적힌 문장을 따라 읽었을 뿐이다. 잘 보거라, 오늘날 쓰이는 글자와 이 글자는 모양이 다를 뿐 같은 뜻을 품는다. 그 점을 유의하며 읽는다면 자연의 심오한 규칙을 완벽하게 익히지는 못하더라도 곧바로 떠올릴 수는 있게 된단다.”
“그런데 저에게 이것을 보여준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것으로써 나라를 지키거나 백성을 돌보는 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하늘과 땅은 아무렇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섭리에 따라 해와 달은 뜨고 지기를 반복하고 바다와 육지는 이쪽으로 저쪽으로 움직이기 바쁘지. 그런즉 그 섭리를 알아낸다면 천재지변이 언제 어디에서 닥쳐 올지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비와 눈이 내리는 시기나 가뭄과 홍수에 위험한 고을을 알아냄으로써 굶주리고 병드는 백성을 미리 구할 수 있으니, 어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아무 말을 하지 못한 채, 다만 숙고에 잠길 뿐이었다. 아버님의 말씀이 옳았다. 군주는 백성을 돌봐야 하고, 그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백성이 힘든 일을 겪기도 전에 피해를 예방하는 것. 그러나 언제나 희망은 현실이 되기 어렵다. 설령 군주가 위험을 예측하더라도 언제 만백성에게 그에 관한 사실을 널리 알리고, 피해를 줄일 방법을 재빨리 떠올릴 수 있을까?
고민에 빠진 나를 보던 아버지께서는 나의 두 어깨를 잡고 나지막히 말했다.
”성아, 너도 알다시피 선대왕이신 나의 형님께서 도읍을 옮기고 겨우 십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세 번째 천도(遷都)였지. 백성들의 삶은 부덕하고 힘없는 나로 인하여 날로 힘들어져 가고 있다. 이웃나라와 이민족의 침입으로 이제 백성들은 생계를 내던지고 하루하루를 근심에 빠져 살고만 있지. 이러다가는 모두가 심한 병을 앓아 기나라가 망하고 말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님께서 백성을 얼마나 생각하시는데…”
“저들을 그저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으로는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어. 나는 결심했다. 오래 전, 조상들이 이루어 낸 성과를 다시금 이 땅에 재현하겠노라고. 그리하여 우리 왕조에 대대로 전해지던 이 거북의 껍데기를 오랜만에 꺼낸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
아버지께서는 왼손으로 껍데기를 들고 나에게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숨죽여 그 말을 들었다.
“정(鼎)을 만들 것이다. 전국의 이름난 장인(匠人)을 한데 모아 하늘과 땅의 변화를 예축하고 대비하는 데 쓰일 정을 만들도록 할 것이다. 우 임금께서는 하(夏)를 건국하고 각 아홉 고을에서 청동을 구하여 구정(九鼎)을 주조하시었다. 천하의 사정을 왕궁에서 쉬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지. 복희에게서 받은 팔괘를 바탕으로 그 거대한 구정을 빚고 백성의 삶을 살피고자 하신 것이다.”
껍데기를 상자에 담고 아버지는 나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나는 알 수 없는 흥분이 몸을 감도는 것을 느꼈다. 기대와 걱정이 한데 뒤섞였다.
“비록 하나라의 영광은 끝나버렸지만, 우리가 새롭게 이어갈 수 있다. 나와 너 모두 그 ‘증표’가 몸에 새겨져 있잖니? 그동안 비밀로 여겨 온 그 시절의 기술을 되살릴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어깨가 갑자기 차가웠다. 아버지의 오른손에 푸르른 옥빛 비늘이 덮히기 시작했다. 비늘로 덮힌 그 손은 날카롭고 다소 섬찟하게 보였지만, 나는 아버지가 일부러 우리 둘의 본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을 기억하게 했을 뿐임을 알아차렸다. 격정과 기묘한 희열로 점철된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기나라는 하나라의 뒤를 이었다. 하나라의 허망한 최후를 아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빌미로 기나라를 비웃기에 바빴다. 역대 선대왕들께서는 기나라가 고립무원에 처하지 않고자 하릴없이 하나라의 전통과 풍습을 백성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왕실에서는 여전히 용체(龍體)와 같은 전통이 겨우 맥을 잇고 있었다. 태자에 갓 책봉되었을 무렵, 나는 나의 새로운 진짜 모습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고, 아버지는 그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우리는 우의 후예라는 사실을.
“아버님……”
나는 다소 격양된 아버지의 모습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걱정되었다. 하나라가 멸망하고 수백 년이 지났다. 우리는 하나라가 무너진 빈 터에서 다시 시작했지만, 외세의 침입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과거의 흔적을 내던지고 도읍을 옮겨야만 했다. 그때의 영광을 기억에서 겨우 지워냈는데 또 다시 되살려도 괜찮을까?
두려움도 느꼈다. 우의 아버지 곤(鯀)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에 식양(息壤)으로 튼튼한 둑을 지었지만, 결국 둑이 무너진 데 책임을 지고 목이 잘렸다. 불경한 생각이겠으나, 아버지께서 이 과업에 실패한다면 신하과 만백성은 아버지와 이 왕조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될까?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거니와, 아버지의 말씀대로 나 역시 우의 후예였다. 그렇다면 설령 아버지가 실패하더라도 나의 힘을 보태어 그 과업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을 더 이상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나라를 부흥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금기에 가까우면서도 위대한 지식임이 틀림없는 그 자연의 섭리에 한 걸음 다가가고 싶었다.
“저는 아버님을 믿습니다. 제가 도울 것은 없겠습니까?”
杞國有人,憂天地崩墜,身亡所寄,廢寢食者。
기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과 땅이 무너지고 떨어져 몸 둘 곳이 없어질 것을 근심하여 침식을 폐하였다.
又有憂彼之所憂者,因往曉之,曰:「天,積氣耳,亡處亡氣。若屈伸呼吸,終日在天中行止,奈何憂崩墜乎?」
또 어떤 사람은 그가 근심하는 것을 근심하여 그를 찾아가 깨우치려고 이르되, “하늘은 기운이 쌓인 것이니 기운이 없는 곳이란 없소. 그대가 몸을 움직이고 숨을 쉬는 것은 종일 하늘 가운데에서 일어나고 그치는 일인데, 어찌하여 무너져 떨어질 것을 근심하오?”
其人曰:「天果積氣,日月星宿不當墜邪?」
근심하는 사람이 이르되, “하늘이 과연 기운이 쌓인 것이라면 해와 달과 별들이 떨어지기 마련 아니겠소?”
曉之者曰:「日月星宿,亦積氣中之有光耀者,只使墜,亦不能有所中傷。」
깨우치는 사람이 이르되, “해와 달과 별들은 기운이 쌓인 것 중에서 빛을 내는 것이오. 비록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맞아서 다치지는 않을 것이오.”
其人曰:「奈地壞何?」
그 사람이 이르되, “땅이 꺼지는 것은 어찌하오?”
曉者曰:「地積塊耳,充塞四虛,亡處亡塊。若躇步跐蹈,終日在地上行止,奈何憂其壞?」
깨우치는 사람이 이르되, “땅은 흙덩이가 쌓인 것이니 사방 빈 곳에 가득 차 있어 흙덩이가 없는 곳이란 없소. 어정거리며 걷고 밟으며 뛰는 것은 종일 땅 위에서 일어나고 그치는 일인데, 어찌하여 그것이 꺼질 것을 걱정하오?”
其人舍然大喜,曉之者亦舍然大喜。
걱정하는 사람은 마음이 환히 풀려 크게 기뻐하였고, 깨우치는 사람도 마음이 환히 풀려 크게 기뻐하였다.
平公十八年卒,子悼公成立。
평공이 즉위한 지 18년 만에 죽고 그 아들인 도공 성이 즉위하였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몸을 겨우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태자가 나의 손을 꼭 잡고 침상 옆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 의원이 걱정스런 얼굴로 약이 담긴 사발을 들었다. 태자는 소매로 눈물을 닦고 나에게 다급히 물었다.
“아버님, 괜찮사옵니까? 몸은 어떠사옵니까?”
“나는… 괜찮다. 이렇게 밤까지 새며 무리하게 내 곁에 있을 필요는 없다. 의원이 보기에 지금 나의 상태는 어떠한가?”
“약을 드시고 혈색이 잠시 돌아오신 것은 지극히 다행이오나, 언제 다시 쓰러지실지 모른즉 침상 밖으로 움직이심은 당분간 자제하여 주옵소서.”
“의원 말이 옳사옵니다. 아버님, 부디 옥체를 보존하옵소서. 더 이상 무리하게 거동하시면 큰일이 날지도 모르나이다.”
아버님이라.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그 자리를 물려받고 나의 다짐대로 아버지의 과업도 이어갔다. 작업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모든 장인이 각자 사명감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해 주었다. 시뻘건 쇳물을 거푸집에 붓고 다 식은 청동 조각을 망치로 연신 두들기던 그들의 열기에 멀리서 현장을 감독하던 나도 온몸이 달아올랐다. 아버지 및 신하들과 함께 정의 대략적인 모양을 설계하고, 그 작동 원리를 껍데기의 글귀에서 찾으려고 머리를 싸맸던 시절이 엊그제 같았다.
이제 내가 서고에서 자신의 각오를 말하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때 젖먹이였던 나의 맏아들 기(乞)는 어느덧 어엿한 성인이 되어 나를 보살피고 있었다. ‘아버님’이라는 말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겪었을 위태로운 시기를 이제 내가 겪는다고 생각하니 점점 그 호칭에 대한 낯선 기분이 사라졌다. 그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끝맺어야 할 것이 남았다. 나의 대에서 끝맺어야 할 과업이.
“정… 정은 어디까지… 완성되었느냐?”
“걱정하지 마소서. 이제 다 완성되었나이다. 그러니 얼른 병을 떨쳐 내시고 일어나 주소서.”
“내가 말한 대로… 하였느냐…?“
”그렇사옵니다. 하오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아버님께서는 오로지 듣고 느끼기만 할 수만 있고, 그만두고 싶으셔도 그만두기 어렵게 되옵나이다. 대신에 저의 기억을 정에 넣어…“
”아니, 이건 나와… 선대왕이 맺은 약속이다. 희생은 나만 하는 것으로 족하다. 나의 기억으로 숨을 불어넣어 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 태어날 뿐이니라. 이로써 백성들이 더는 하늘과 땅을 보며 한숨을 쉴 필요가 없으리라. 선조의 지혜로써 이 나라가 태평성대를 맞이한다면 한이 없겠구나…“
어쩌면 허무맹랑한 바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진심으로 아버지의 뜻이 옳기를 바랐다. 잃어버렸던 선조의 빛나는 역사를 되살린 데 자부심도 있었다. 지금 걱정되는 것은 내가 세상을 떠난 후, 정에 담긴 본의가 잘 드러날지였다.
병 때문에 뼈만 간신히 남은 몸을 겨우 돌려 태자의 얼굴을 보았다. 앳된 얼굴에 벌써 각오와 어른다움이 느껴졌다. 선대왕을 닮아 총명하고 자애로운 사람인 만큼, 나의 뜻을 잘 헤아리고 백성을 돌보는 데 전념해 줄 것이다. 마지막 걱정이 서서히 흐려졌다. 의식도 함께 흐려졌다.
“태자야, 귀를 기울이거라.”
“예, 아버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라붙은 혀를 간신히 움직여 태자에게 몇 마디 유언을 남기고자 했다. 거센 들숨만 입에서 나오자 태자는 몸을 숙여 나에게 집중했다. 정신을 차린 나는 온 힘을 다하여 마지막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정의 이름은… 기우정(杞憂鼎)으로 하고… 그것으로 하늘과 땅의 변화를 잘 살피며… 백성을 돌보기를 바란다…”
“명심하겠나이다.”
“너의 동생 수(遂)를 아끼고… 가족끼리 항상 화목하며… 너와 나 모두 우의 후예임을 잊지 말거라…”
“아버님, 아버님!”
마지막 숨을 내뱉으며 눈이 서서히 감겼다. 나의 삶은 이렇게 마감되었다. 눈, 코, 입, 손끝이 점점 사라지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태자의 통곡과 신하들의 급한 말소리였다. 귀마저 잠잠해졌으니 이제 나의 몸뚱이는 염습을 거치고 관에 들어가 무덤에서 영원한 잠에 빠질 것이다. 이윽고 면류관을 쓰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태자는 끝내 완성된 정에 아버지와 나의 뜻을 기리는 글귀를 새겨 넣을 것이다.
새로운 임금은 즉위식을 마치고 걷바로 기우정을 만드는 장소를 찾아가 장인들을 격려하고, 완성된 정에 다가가 곳곳을 어루만지며 잠시 상념에 잠길 것이다. 그리고 정에 손을 댄 채 이렇게 물을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과업은 마침내 이루어졌는가?” 그는 곧바로 이러한 대답을 들을 것이다. “그러하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을 경하한다, 태자여.”
나의 새로운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悼公十二年卒,子隱公乞立。
도공이 즉위한 지 12년 만에 죽고 그 아들인 은공 기가 즉위하였다.
杞憂鼎始造於平公十年,成於平公十二年。察天之運行,觀地之動搖,而豫備之,乃造此鼎。八卦,本卜筮之具,蛇父伏羲氏憫上古先民之憂懼,而賜之。而幾百年之後,吾人殆忘其本義,僅追其遺跡,豈不歎哉?有德之君,憐民之苦,以八卦而成聖鼎。頌功德,宜告示後世。願天下蒼生,除憂而勤,安居樂業焉。
기우정은 평공 10년 만들어지기 시작되어 도공 12년 완성되었다. 하늘의 움직임과 땅의 흔들림을 살피고 대비하고자 이 정을 만드시었다. 팔괘는 본래 점 치는 도구로, 사부 복희께서 근심과 두려움에 떠는 선조를 불쌍히 여기시어 하사하신 것이다. 몇백 년이 흘러 우리는 그 본의를 거의 잊고 그 흔적만 좇고 있으니 어찌 탄식하지 아니하리오? 유덕하신 임금께서 백성을 안타깝게 여기시어 팔괘로써 성스러운 정을 만드시었다. 그 공덕을 칭송하며 마땅히 후세에 알리는 바이다. 천하의 모든 백성이 근심을 없애고 근면하며, 편안히 살고 즐겁게 일하기를 바라노라.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七月,隱公弟遂弒隱公自立,是為釐公。
7월에 은공의 동생 수가 은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니, 이가 희공이다.
“밤 사이 평안히 주무셨나이까? 아침 인사 드리옵니다.”
“무슨 낯으로 나를 보러 온 게냐?”
“아버님의 아들로서 도리를 다할 뿐이옵나이다. 앞으로 아버님의 뜻을 이어 이 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끌 것이옵니다.”
“… 한 나라의 주군을 살해한 죄가 그것으로 씻겨지더냐?”
“아버님, 형님의 방식은 틀렸습니다. 우리에게 막강한 힘이 주어진 만큼 건방진 이웃의 소국부터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성의 삶을 편안케 한다는 목적은 좋으나, 외부의 위험을 먼저 뿌리째 뽑아야 나라가 삽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내가 바란 세상의 모습은… 그렇게 피로 얼룩진 것이 아니었어… 앞으로 우리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는 무엇이 이 나라를 살릴 진정한 방법일지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버님…”
出公十二年卒,子簡公春立。立一年,楚惠王之四十四年,滅杞。
출공이 즉위한 지 12년 만에 죽고 그 아들인 간공 춘이 즉위하였다. 그가 즉위한 지 1년 만인 초 혜왕 44년, 기나라는 멸망하였다.
……
至禹,於周則杞,微甚,不足數也。
우를 이어 주 시대에 기나라가 있었지만, 너무 작아 손꼽을 만한 것이 없다.
하늘과 땅의 변화에 대한 우리의 근심은 정녕 헛된 것이었던가?
나의 존재는 그저 무의미했던가?
언제 잠에 빠져 있었지? 잠에 들기 전 마지막 기억이 흐릿했다. 온 정신을 집중하여 그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써 보았다. 목재가 불에 타는 소리와 누군가 발을 구르는 소리, 새까만 연기로 뒤덮인 하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던 무리가 나를 수레에 던져 놓고는 어디론가 이동하다가, 수레가 돌뿌리에 걸려 크게 요동칠 때 떨어져 진흙 웅덩이에 처박힌 기억.
그날따라 비가 오래도 내렸다. 분명 맑은 날이어야 했는데. 예측이 처음으로 틀렸다. 구름이 기묘한 모양새를 띠며 흐르던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러한 운명을 내포하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나라는 멸망하였다. 왕궁이 불살라지고 백성들은 오랑캐의 종으로 붙들렸다. 남은 왕족과 신하가 새로운 터전을 찾고 과거에 우리가 그러했듯이 기나라의 뒤를 잇는 나라를 세웠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러하더라도 나는 바깥 소식을 알 방법이 없었다. 내 주변의 흙더미가 미세하게 흔들리게 하는 것 말고는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졸지에 망국의 과정을 몸소 겪어 버렸으니, 여기에서 죽어 아버지를 볼 낯이 어디 있으랴. 태자가 걱정했던 대로 이제 나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저 어느 나그네가 나를 흙에서 꺼내 주고 대장장이에게 팔아넘겨 펄펄 끓는 용광로에 얼른 온 몸이 녹아내리기를 바라야 했다. 아니면 나를 꺼내 준 사람을 따라 전국이나 유람하고 싶었다. 족히 수백 년을 지났을 테니 수레바퀴를 만들거나 도로를 닦는 기술도 넉넉히 발전했으리라. 한평생 궁에 갇혀 살던 것이 가끔 지겹게 느껴지기는 했다.
그렇게 희망과 체념을 수천 번은 반복하다가 나는 다시 잠에 들었다. 앞으로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에서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찾아올지 아닐지 모를 최후를 기다리며 깊은 잠에 빠졌다.
“어? 이게 뭐냐?”
무언가 나를 세게 두드리고 지나갔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매우 오랜만에 느끼는 감촉에 희미하게 흩어졌던 정신이 되살아났다. 밭을 갈다가 쟁기로 때린 것인가? 하지만 쟁기라기에는 감촉이 무척 단단했다. 돌이나 청동으로는 나타내기 어려운 단단함.
나를 쟁기로 때려 깨운 남자는 주변의 흙을 파 내고 땅속에 파묻힌 나의 겉에 묻은 흙을 손으로 털었다. 탄사만 내뱉던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나를 잡아 땅에서 꺼내려고 했다. 몇 번 힘을 쓰자 갑자기 진흙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와 그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남자는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서고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게 다 뭐냐? 커다란 솥이구먼. 누가 이런 데 버려 놓았데… 딱 봐도 옛날 귀족이 쓰던 비싼 물건 같은데.”
잠에 들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우선 남자의 말씨가 매우 낯설었다. 그가 오랑캐라고 하기에는 내가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자가 이 고을에 대대로 살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나에게 언어에 관한 재주도 있을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순간적으로 느낀 공기의 흐름이나 온도가 예전과 사뭇 달랐다. 먼지 낀 듯 공기에서 뿌연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 저 자에게 말을 건다면 분명 까무러칠지도 모르기에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남자는 나를 밭의 한 구석에 놓고 하루 종일 일에 매진하다가 까마귀가 울며 어디론가 날아갈 무렵에 나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노래를 썩 잘 부르지는 못했지만, 옛날에 연회에서 즐겨 듣던 노래가 떠올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녀왔어. 샤오전(小軫)은 어디 있어?”
“방에 누워 있어요. 친구들이 같이 놀자고 찾아왔는데, 오늘은 몸이 안 좋다고 학교에서 오자마자 누워만 있네요.”
“저런. 보양식이라도 먹여야 하나? 두꺼비라도 잡아 달여 즙이라도 먹이면…”
”아서요. 저번처럼 이상한 것 괜히 먹이지 말구… 그것보다, 당신 손에 들린 솥은 웬 것이예요?“
남자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나에 대하여 그에게 물었다. 남자는 껄껄 웃으며 값진 골동품을 밭에서 찾았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여자는 다소 못마땅한 말투로 그가 쟁기와 나를 창고에 놓고 오는 사이에 저녁밥을 내 오겠다고 쏘아붙였다. 아무래도 남자는 아내의 눈치를 많이 보는 듯싶었다.
그는 한편으로 하고 싶은 것은 몰래 다 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쟁기만 창고에 훌쩍 넣고는 나를 들고 재빨리 방에 들어가 이불 위에 누운 사내아이의 어깨를 건드렸다. 아이는 자리에서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감탄사를 잇따라 내뱉었다.
“우와, 아버지. 이거 어디서 구해 오신 거예요?”
“밭을 갈다가 우연히 이 녀석을 찾아냈지 뭐냐. 네 말대로 어제 비가 잔뜩 오면서 흙이 물렁해지니까 땅 위로 솟아오른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하니? 너는 역사에 해박하잖아.”
“음… 아무래도 춘추시대에 만든 정 같아요. 그리고 여기 보면, 용 두 마리가 서로 가로지르며 날아가고 있잖아요. 이걸 만든 사람들이 섬기던 신을 뜻하는 건 아닐까요?”
“히야, 할아버지 옆에서 옛날 책 읽던 보람이 있다야. 게다가 우리 마을에서 날씨 보는 것으로 으뜸가기까지 하니, 분명 중국을 빛낼 위인이 될 거야.”
”에이, 아니예요…”
“당신, 얼른 나와서 저녁 드셔요!”
이 ‘샤오전’이라는 아이는 나를 몇 번이고 어루만지며 감탄을 금치 않았다. 그 사이에는 샤오전의 아버지는 아내의 닦달을 이기지 못해 나를 방에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방에서 나와 그 아이, 샤오전이 마주보고 있었다. 샤오전은 나의 한 귀를 잡고 나지막히 물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을 것이다.
“너는 누구야? 누가 언제 만든 거야?“
샤오전에게는 별 특별한 의미는 없는 질문이었겠지만, 나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키고 싶지 않았다. 이 아이라면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무엇보다, 그 아이의 때묻지 않고 순수한 말투에 아들 성의 얼굴이 연상되었다. 이길 수 없는 충동을 수천 년 만에 마음껏 토해 내고 싶었다.
“나는 하후성. 한때 기나라의 군주였으며, 지금은 이 기우정과 하나된 이이니라.”
샤오전, 진짜 이름은 루전(鲁轸)인 이 아이는 날이 갈수록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아졌고, 배울 수 있는 것도 늘어났다. 크고 작은 전쟁의 화마 속에서 루 씨 가족은 온갖 궁리를 하며 해를 피한 끝에 무탈하게 ‘중화민족의 승리’와 ‘새로운 체제의 등장’을 맞이할 수 있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인 샤오전은 새로운 세상에서 대단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동무들처럼 사상이나 이념보다는 학문에 목이 마른 사람이었다.
루 씨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나는 샤오전의 스승이자 벗이자 제자가 되었다. 우리는 역사와 학문에 관한 이야기를 남몰래 펼치며 나는 그에게 기나라의 역사와 풍습을, 그는 나에게 언어와 현대 과학을 가르쳐 주었다. 샤오전은 유난히 자연, 특히 날씨에 관심이 많았다. 선천적으로 병약한 체질 때문에 그는 집에 홀로 지내며 해와 달이 뜨고 지고 비와 눈이 내리는 광경을 여러 번 보았다. 부모가 그 날씨에 고생하는 모습을 마주하며 미래의 날씨를 깨우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고 언젠가 나에게 고백했다.
나는 그를 애칭으로 ‘샤오전’이라고 불렀고, 그는 나를 존칭으로 ’하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임종 직전에 들은 ‘아버님’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어떤 계기로 이 정 안에 들어가게 되신 거예요?”
“선대왕이신 아버님과 약속했다. 자연의 변화를 꿰뚫어 보는 정을 만들어 낸다면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으니, 기꺼이 나의 의식을 그 대의를 위하여 희생하겠다고. 그 때문에 이러한 처지가 되었지만, 후회는 없다.”
“그러한 강력한 능력을 가지셨으면서 기나라는 왜… 아.”
샤오전은 당황한 듯 말을 끊었지만, 나에게는 아무 문제 없었다. 기나라의 흔적이 오늘날에는 완전히 사라졌음을 깨달은 후로는 마음을 거의 놓은 상태로 지냈다.
“오만했지. 우리는 자연의 변화를 이해할 수만 있었을 뿐, 활용할 방법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주나라나 이웃 제후국과의 교류를 소홀히 여기며 홀로 살아남으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도 우리를 돕지 않고 오랑캐에게 짓밟히는 꼴을 지켜만 보았다. 차라리 그 힘으로 얻은 지식을 모두에게 널리 알렸다면 아무리 못해도 수십 년 동안의 짧은 평화를 누릴 수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샤오전은 고개를 끄덕이고 책상 위에서 읽던 책을 도로 덮었다. 그 옆의 책장에 가득 꽂힌 두꺼운 책들은 지구를 감싸는 대기가 흐르는 원리를 설명한다고 샤오전이 한때 이야기해 주었다. 선조께서 다소 뭉뚱그려 설명한 자연 현상을 그 책에서는 발생 이유와 영향까지 포함하여 자세하게 말해 주는 듯했다. 나에게 눈이 있었다면 샤오전의 도움이라도 받으며 그 안의 글자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읽기라도 했을 텐데, 눈이 없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컸다.
해가 흘러 샤오전은 베이징대학 지구물리학과를 다니는 대학생이 되었다. 중국 최고의 명문 대학이라는 명성에 온 마을 사람들이 루 씨 가족과 샤오전을 칭찬하고 축하하던 잔칫날이 기억난다. 지금은 여름 방학을 맞아 집에서 가족의 일을 도우며 지내고 있다. 짝을 찾는 매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이 방 안까지 진동했다.
“앞으로 졸업하면 무엇을 할지 많은 고민이 들었어요. 학위를 얻고자 대학원에서 더 많은 공부를 할지, 아니면 도시에서 사업을 할지… 가끔은 아버지 농사를 거들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너의 삶은 네가 결정해야 함이 옳다. 비록 가족이나 벗이 너에게 한 길로 나아가라고 가리켜도, 그것을 따르지 않을 권한도 너에게 있으니.”
“… 맞는 말이예요. 사실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돈이 문제예요. 저 대학 보내신다고 소까지 파셨는데, 앞으로 뭘 더 파실지 조금 두려워서요.”
”네가 정녕 그 길을 향하고 싶다면… 나를 팔아서라도 따라가야지.“
”그건 절대 안 해요! 선생님은 다른 사람한테 결코 안 넘겨요.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지, 누구한테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요.“
샤오전이 오랜만에 화내는 모습을 보였다. 찰딱서니 없던 꼬마가 의젓한 어른이 된 것 같아 내심 기뻤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눈앞에 놓고 갈등하는 모습은 보기에 심히 가슴 아팠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며 아버지와 내가 한 약속이 생각났다. 그것은 나의 진정한 꿈이었을까?
“하지만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각오는 해 뒀어요. 부모님 손에 의지하지 않고 저 스스로 학비를 벌면서라도 계속 공부할 거예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제 겨우 스물을 조금 넘긴 사람이 넘어서기에는 힘든 고민이었겠지만, 샤오전은 어떻게든 이를 넘어서겠다는 의지를 몸에 지니었다. 그럴 만한 위인이었고, 나도 나름 높이 평가하는 마음가짐의 사람이었다.
“샤오전! 내일 가지를 수레에 싣고 시장에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불지는 않겠지?”
“어, 잠깐만요. 선생님, 내일 날씨는 어떠할까요?”
루 씨 가족은 나의 존재를 모르지만, 샤오전이 날씨 예측에 능한다는 점은 잘 알아 샤오전이 역관(譯官) 노릇을 하며 나의 말을 대신 전해 주곤 했다. 그들은 샤오전이 어릴 적 상상 친구를 아직도 하나 남겨 둔 것처럼 여겼다.
“공기가 낮게 깔리고 구름이 거의 없으니 내일은 하늘이 맑을 듯하군. 시장이라고 했나? 이 곳에서 4리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아 날씨가 집 근처와 다를 바 없을 테니 나가기 전에 한 번 확인하는 것도 좋지.“
샤오전의 나의 말을 대강 요약하여 그 아버지에게 전하고, 그가 다시 방을 나갈 즈음에 샤오전이 아버지를 붙들어 매고 말했다.
“아버지, 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이야기? 드디어 진로를 정한 게냐?”
“저는… 저는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어요.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먼 미래에 관한 공부를요.”
샤오전의 아버지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눈빛으로 “알겠다. 이따가 네 어머니와도 의논하자.”라고 말했다. 아들이 내심 돈을 잘 버는 일자리를 찾기를 바란 것 같지만, 한때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는지 말릴 생각은 접은 모양이었다. 그도 샤오전이 품은 포부와 야망을 알고 있었을 터이다.
그리고 그때 샤오전의 눈은 기쁨으로 가득 차 환하게 빛났을 것이다.
창문이 덜컹거리며 가을 바람이 부는 모습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바람이 쌀쌀해진 것이 금방 느껴졌다. 날마다 늦더위와 이른 추위가 반복되어 날씨를 예측하기 무척이나 어려운 시기인 가을이 훌쩍 찾아왔다.
“지구가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이건 시급한 문제라고요.”
샤오잔은 교수실 소파에 앉고 탁자 위에 올린 나를 향하여 구구절절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지구물리학 박사 학위를 수료하고 여러 대학의 연구소를 돌아다니며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내놓은 끝에 산둥대학의 교수 자리를 얻었다. 도중에 문화대혁명과 같은 시대적 시련이 닥치기도 했지만, 샤오전은 그 과정에서 발생한 폐해를 지혜롭게 해결하고, 문제를 무시하지 않으러고 노력하면서 동료들의 신임을 크게 얻었다. 물론 나의 존재가 구습(舊習)으로 취급되어 부서지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인 셈이었다.
혼란스러웠던 정국이 차차 정리되면서도 자연 과학에 대한 국가의 투자가 전 세계를 통틀어 보면 상당히 적은 편이라고 샤오전이 거듭 강조하곤 했다. 특히 샤오전의 주 연구 분야인 대기과학은 매번 그림자에 갇혀 연구 예산과 신규 참여 인원이 부족했다. 나이가 마흔을 넘으며 샤오전의 기력이 다소 쇠한 것 같지만, 공부와 연구에 대한 열의는 여전했다. 마치 그 거북의 껍데기를 매일 밤 찾아보던 나처럼, 샤오전에게는 목표가 하나 있기 때문이었다.
“날씨가 인간 활동의 영향을 받는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바뀌겠어요? 사람들에게 얼른 알려 경각심을 일깨워야 해요.“
”잠깐만, 이해가 잘 안 되네. 사람들이 숨쉬고 뛰노는 행위가 하늘에 얼마나 영향을 미친다는 건가? 군주가 무능하면 하늘이 이에 감응하여 천재지변을 일으킨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류인가?”
“아니오, 재이론(災異論)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으음, 현대 문명은 땅에서 얻은 자원을 태우고 끓임으로써 수레를 굴리거나 빛을 밝히는 데 필요한 힘을 얻는데, 거기에서 발생한 기체가 대기의 구성을 천천히 바꿔요. 아직 학계에서 확실하게 검증된 사실은 아니지만, 태양에서 출발하여 지구에 다다른 햇빛 속 열이 그 기체 때문에 대기에 갇혀 지구를 서서히 달군다는 겁니다.“
“매우 새로운 이야기로군. 네가 요즈음 진행하는 연구의 주제가 그로 인한 피해를 예상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렇긴 한데, 아직은 시행착오가 많습니다. 선행 연구가 그다지 없어 사실상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분야이고, 국가의 지원도 없다시피 하니까요. 낮에 길거리를 조금만 걸어가 보면 자동차랑 굴뚝에서 마구 솟아나는 매연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다는 걸 누구나 바로 알아차릴 텐데, 산둥성 인민정부에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게 말이나 되나요?”
샤오전은 울분을 토했다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한숨을 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현실과 부딪히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해 보고자 했지만, 그 동료나 제자들은 샤오전의 관심사에 영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나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다름아닌 나였다. 개인적으로는 샤오전이 부와 명예를 쥐어 편안히 살기를 바랐지만, 본인만의 뚝심을 지닌 이의 앞길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었다. 지난번에 그런 말을 했으면서 이제 와서 꿈을 저버리라고 할 수야 있겠는가?
“선생님?”
“아, 그래. 미안하네. 잠시 생각을 좀 하느라.”
“선생님도 고민이 많으시네요… 하아. 머릿속이 잔뜩 뒤엉켜서 무엇부터 해결해야 할지 갈피가 안 잡힙니다. 며칠 후면 어머니께서 수술을 받으시고, 아들놈이 곧 시험을 치르거든요. 학회 발표 준비도 슬슬 마쳐야 하는데. 선생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근심이 많구나. 근심이 많은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진중한 걱정, 자손이 살아갈 세상을 대하는 고민, 벗들과의 관계 유지처럼 사람은 살면서 수백 가지 근심을 마음에 품는다. 샤오전처럼 수백 년 후의 먼 미래를 바라보며 수십억 명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예상해야 할 책임을 지는 사람은 더 큰 근심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한 나라의 군주로 살 적에는 매일 신하와 백성의 하소연을 들으며 그에 대한 여러 해결책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내가 바라는 과정대로 문제가 잘 해결된 적은 드물었다. 그때 나는 상대의 입장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어 결점이 생길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 이 처지가 되기를 받아들인 것도 그저 객관적인 사실을 전하는 역할을 맡음으로도 매우 귀중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 옳았다. 객관적인 사실을 말해 줘야 한다.
“샤오전, 너는 미래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다. 너의 손자의 손자가 나고 자랄 세상이 어떨지 알고 싶어하지. 그만큼 마음에 지는 부담과 책임이 클 것이다. 근심이 많을 것임은 당연한 사실이고.”
“그렇게까지 대단한 연구는 아니에요. 단지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할 때 준비하고 싶은 겁니다. 제 다음 세대가 선생님과 편히 대화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랄 뿐이니까요. 공기 걱정도 없고, 해수면 걱정도 없고, 더위나 추위 걱정도 없는 날을 저들에게 하루라도 더 주고 싶습니다.”
“너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호수처럼 넓기 그지없구나. 그러니 기운 잃을 필요는 없다. 막중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해내는 과업이고, 그 자격은 누구나 갖지 못하지. 너는 특별하다. 역경을 이겨내는 힘을 언제나 가지니, 두려울 것 무엇 있으랴?”
샤오전이 피식 웃으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예전과 같은 말투로 말한 것 같았다. 그 시절 기억이 계속 떠올라서인가? 내가 다소 우스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샤오전의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해 마음만큼은 편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저도 그렇게 상대에게 도움 되는 말을 조리 있게 말하는 힘을 키우고 싶습니다. 저 대신에 즈밍(志明)한테 한 소리 해 주세요. 자기 증조할아버지 닮았는지, 아니면 저를 닮았는지 역사학을 배우고 싶다는데 성적이 영 안 나와 속상해 하더라구요.“
”허. 역사라. 그 분야는 내가 많이 도울 수 있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네 아들과 이야기도 여러 번 나누고 싶군.“
“고맙습니다. 뭐,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겨내고 나아갈 수밖에 없겠죠. 현실이 고되더라도 내일은 뭔가 다르지 않겠어요?”
샤오전과 나는 오랜만에 크게 웃어댔다. 내일은 다르긴 할 것이다. 좋은 쪽으로든, 안 좋은 쪽으로든 달라지겠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그것을 대비해야 했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을 수밖에 없었다.
흰 눈이 희미하게, 그러나 오랫동안 내렸다. 눈발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주름이 덮힌 손이 나의 한쪽 귀를 잡았다. 필시 샤오전의 손이었을 것이다.
또 긴 세월이 순식간에 우리를 스쳐갔다. 샤오전은 국내 대기과학계의 거물로서, 기후 변화의 위험성을 미리 예측한 몇 안 되는 선구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샤오전의 경고를 미리 귀담아 들은 이는 극히 드물었다. 푸르던 나무에는 잿빛 먼지가 자욱히 쌓여 검게 물들었고, 세상을 둘러보면 폭염, 홍수, 폭설, 태풍 따위의 재앙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상처를 남기고 갔다. 샤오전은 절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처럼 숨죽이고 지내지 않았다.
“선생님.”
다 쉰 목소리로 나를 힘겹게 부르는 목소리. 샤오전이었다. 이제 그를 샤오전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나 말고 없다. 그의 부모는 평안한 삶을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다른 가족은 그를 '숙부', '할아버지', '아버지', '당신' 등 여러 명칭으로 부를 뿐 '샤오전'으로 부르는 이는 없었다. 나도 그를 더 이상 샤오전이 아니라 '루 선생'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제보다 목소리가 명랑하군. 좋은 꿈이라도 꾸었나?”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에 들었나 봅니다. 어릴 적 꿈을 꿨어요.”
“옛날 추억을 다시 둘러보니 기분은 어떠하던가?”
“행복하네요. 이런 삶을 살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행복하다… 다행이로군.”
아직 샤오전의 정신이 온전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그보다 앞서 육신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것을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고민되었다. 그의 간에 큰 문제가 생겨 이 커다란 병원이라는 건물에 함께 머문 지 벌써 한 달을 넘겼다. 어제는 대학 교수 시절 동료와 제자, 중앙 정부에서 온 관리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만큼은 샤오전은 젊을 적의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그나저나 행복하다니. 샤오전의 삶은 어떻게 보면 고난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중국 공업의 고질적인 환경 문제를 지적했다가 어느 공장의 주인장 되는 자가 대학 기부금을 줄이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않나, 중국과학원 지학부(地学部)에 마침내 발을 내딛은 후에는 자신보다 우수한 동료들의 승진에 술을 기울이기도 했다. 청년 시절 아버지의 바람대로 사업에 나섰다면 분명 성공했을 위인인데, 샤오전은 그 길을 마다하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며 나아갔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루즈밍, 샤오전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학자라는 같은 직업을 택했다는 사실이 놀랍게 여겨지곤 했다. 물론 즈밍은 샤오전과 달리 역사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의 영향이 컸으리라.
“아버지, 몸은 좀 괜찮으세요? 오늘은 조금 일찍 왔어요. 병원 밥은 입에 맞으시고요?”
“으음. 아주 멀쩡해. 보라고, 몸에 기운이 날 때마다 산책도 하고 운동도 했더니 팔에 근육이 붙었지 뭐냐. 하하하.”
샤오전은 소매를 걷어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앙상하지만 탄력 있는 팔뚝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즈밍은 아버지가 건강해서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옆의 탁자에 놓인 나의 귀를 잡고 나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께서도 괜찮으신가요?”
“자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면 항상 기분이 편안해진다네. 신경 써 줘서 고맙구나.”
“즈밍, 모셔야 할 아버지가 둘이나 있으니 많이 힘들지?”
샤오전이 짓궂은 농담을 말하자 우리 모두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때로는 마음 놓고 웃는 것이 몸에 좋을 것이다. 즈밍이 외투를 벗고 간병인이 앉던 의자에 앉았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샤오전에게 곧바로 물었다.
“아버지, 그래서 결정하셨다고요?”
“얼른 결정을 내려야지. 언제 갈 지 모르는데, 망설일 수만 있겠나.”
어제 늦은 밤에 샤오전이 간호사를 부르고 부탁하여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그 상대가 즈밍이었던 모양이다. 세상이 나날이 변하기는 하는 것 같았다. 세상은 과거 하나라가 이룩했던 문명을 다시금 재건해 갔다. 물론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부분도 많고, 하나라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이들이 이끄는 진보였다. 그래도 선조들께서 지금 세상을 보신다면 흡족한 마음이 크지 않았을까 싶었다.
파리 협정이 지난 12일 채택된 가운데, 천지닝(陈吉宁) 환경보호부장은 중국도 범세계적 기후 변화 대응 방안 모색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 밝혀…
병실 벽에 걸린 TV에서 아나운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TV라는 것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 안에서 내일과 모레의 날씨를 말하는 것은 자주 들었다. 나보다는 저들의 지식이 더 새롭고 풍부할 테니, 나의 존재가 오늘날에는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죽거든, 하후 선생님의 뜻을 따르거나, 하후 선생님이 살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이 하후 선생님을 만나게 하거라. 그때까지는 네가 선생님 곁에 있어 주렴.”
“그 말은 곧…”
“선생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대단한 역사를 기억하신 분이시야. 그런 분이 품은 뜻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잊힌다면 그거야말로 비극이지. 네가 믿을 만한 사람과 선생님을 만나게 하면 나는 더 걱정이 없다.“
샤오전은 묵묵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어 꺼냈다. 그의 바람을 들은 지 오래였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섭섭하기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샤오전이야말로 더 속상할 입장이었다. 마음속에 담은 말을 자유롭게 주고받던 사이의 벗을 떠나보내기란 쉽지 않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는가. 그것은 후회의 반복이었다. 더 잘 대해 주고 기쁘게 맞이해 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런 참혹한 살육을 맞닥뜨리지는 않았을 것이고, 무책임하게 숨어들 일도 없었을 터이다.
나는 샤오전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선생님께 미리 이야기는 하신 거죠?”
“당연하다마다. 다행히 선생님은 나를 이해해 주셨어. 너의 안목을 믿더구나. 칭화대학 사학부의 교수나 되는 사람을 믿어야지, 누굴 믿겠니?”
샤오전은 누군가를 칭찬하고 마음을 띄우는 데 재주가 뛰어났다. 하지만 즈밍은 이전과 달리 말을 좀처럼 잇지 못하고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버지. 갑자기 그런 생각을 품으신 이유가 뭔가요? 제 말은, 아버지가 선생님의 뜻이 빛을 발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아버지가 그 분의 뜻을 가장 잘 공감하던 사람 아닌가요?”
즈밍의 물음은 일리가 있었다. 수십 년 동안 함께 지낸 사람이 상대의 생각을 가장 잘 헤아리는 것은 당연하기에. 샤오전은 고민 섞인 날숨을 내쉬고 생각에 잠겼다. 나와 즈밍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를 지켜만 보았다. 결국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모든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어. 그중에는 선생님이 바라던 목표도 있었지.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며 근심해야 하는 까닭에 관한 답을 찾아내는 것.”
“답이라고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는 근심이라면 기우(杞憂)에 관한 고사에 나오는 그런 근심 말인가요?”
“그래. 그 고사가 나온 『열자』에서 열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니?”
나는 샤오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종종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자기 할아버지 방에 있는 고전에서 기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읽었는데, 그 부분이 매우 감명 깊었다고 말했었다.
“하늘과 땅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잘못이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잘못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으니 마음의 혼란을 버림이 좋다. 그렇게 나와 있었죠.”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나는 무한한 근심에 시달렸어. 나뿐만 아니라 미래의 후손까지 걱정하다 보니 둘 중 누구를 먼저 챙겨야 할지 많은 고민이 되었지. 그런 갈등에 시달릴 때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길은 내가 만드는 것이며, 길을 나아가며 걱정을 품음은 당연하다고. 그만큼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 오래 전에 한 말을 기억하는군.”
샤오전이 기침을 몇 번 하다가 물을 마시고 한숨을 토했다. 한참을 말없이 기다리다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이 나이를 먹어서야 마음의 근심이 풀리네요. 선생님의 근심은 어떠하십니까?”
“아직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나 보네. 네 뜻을 이어 줄 사람을 얼른 찾아야 하니. 정말 고생 많았네. 고생 많았어…”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테지… 수백 년 후에 보는 해도 지금과 같은 해였으면 좋겠는데.”
“제가 최선을 다해 좋은 사람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해 지내 주세요.”
즈밍이 샤오전의 손을 꼭 붙잡고 애원하듯이 말했다. 샤오전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그의 얼굴을 모르지만,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앳되고 순수한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지금은 그 얼굴이 많이 바뀌었겠지만, 다른 이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아들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어렸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나의 손을 잡아주던 기억. 수천 년 전 그때의 추억을 거의 다 잊었을지언정 그 아이만큼은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지나간 과거에 미련은 없을 줄 알았건만, 아니었나 보다. 마음 한 편이 울적해지면서도 새로운 무언가로 채워진 듯했다.
샤오전은 나를 어떤 이로 생각해 왔을까.
“나의 마지막 바람이자 결단이니, 꼭 이루어 주렴.”
子列子聞而笑曰:「言天地壞者亦謬,言天地不壞者亦謬。壞與不壞,吾所不能知也。雖然,彼一也,此一也。」
열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웃으면서 이르되, “하늘과 땅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잘못이지만, 하늘과 땅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잘못이다. 무너질지 무너지지 않을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비록 그렇지만 저리 되어도 한가지요, 이리 되어도 한가지일 것이다.”「故生不知死,死不知生;來不知去,去不知來。壞與不壞,吾何容心哉?」
“그러므로 태어날 때는 죽음을 알지 못하고, 죽을 때는 태어남을 알지 못한다. 올 때는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갈 때는 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무너지거나 무너지지 않는 것을 내 어찌 마음에 담아 두리오?”
“그 많던 하나라의 유적이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나도 그 경위는 자세히 모른다. 다만 나의 중시조께서 나라의 평안을 지키는 대(臺)를 관리하다가 난을 맞이하시고 정신을 차려 보니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 외에 아무도 옛날 일을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했다고 하니, 거기에 어떤 기이한 사건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를 다룬 사료나 다른 유물이 얼른 발견돼야 할 텐데요.“
올해는 칭화대학 교정 곳곳에 심긴 은행나무 이파리가 다소 늦은 시기에 노랗게 물들었다. 가을 날씨가 작년보다 눈에 띄게 더워졌다고 TV 속 아나운서가 거듭 강조했었다. 샤오전이 떠나고, 세상은 여전히 급속도로 변하며 옛 모습을 새 것으로 바꾸어 갔다. 샤오전에게 수많은 훈장과 칭송이 잇따랐고 그의 저서는 미래를 걱정한 한 인문학적 과학자의 고민이 담겼다는 홍보 아래 유명세를 치렀다.
기후 변화, ESG, 탄소 포집, 지구공학… 즈밍이 신문이나 TV 뉴스에서 보도된 내용을 읽어주는 것을 들을수록 새로운 지식이 쌓여 좋았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즈밍은 때때로 오늘날 우리는 위대한 초인(超人)이 세상에 군림하여 고질적인 문제를 순식간에 해치워 주기만을 바라고 앉아 있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정작 그 초인이 실제로 찾아왔건만 세상은 그를 무시했다고 덧붙이면서.
부정할 수는 없었다. 샤오전은 뚜렷한 목표와 진정한 근심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뜻을, 진행력과 권위를 지닌 누군가 미리 알아주었다면 세상이 나쁘게 변하는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급격히 변하긴 하나 보네, 즈밍. 나의 감이 예전처럼 잘 맞아떨어지지 않으니. 쓸모가 없어지기 전에 나와 맞는 사람을 서둘러 찾아야겠어.”
“걱정 마십시오, 선생님.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요즈음 짚어 놓은 사람이 하나 있는데, 딱 한 가지 문제가 뭐냐면…”
그때 문을 경쾌하게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한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즈밍은 자세를 고쳐 앉고 여자를 반갑게 맞았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은 둘은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번에 류(刘) 양이 제출한 에세이 잘 읽었네. 그에 관하여 긴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지…”
즈밍이 ‘류 양’이라고 부른 여자는 즈밍의 제자인 듯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즈밍과 함께 지내며 즈밍은 자신이 눈여겨 본 제자를 직접 불러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자고 제안해 왔다. 물론 이를 바로 수락한 이는 없었고, 가끔씩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즈밍에게 연락을 건넨 사람만 몇 명 있을 뿐이었다. 샤오전과 다른 이유의 근심을 겪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진로는 결정해 뒀나?“
“아니오, 아직은요. 다만 지금 제가 전공하고 싶은 분야가 있으나, 확고하게 결정까지 내린 단계는 아니라…”
“그래… 아, 큰 부담 가지지는 말아라. 만약에 사학계에서 너의 재능을 더 꽃피우고 싶다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임을 알려 주고 싶어서 부른 거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저는 이미 저만의 목표와 향후 계획을 세운지라 조금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더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학문을 익히려고 합니다.”
즈밍은 연신 그에게 대학원에 진학함으로써 자신의 지도 아래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점을 강조했지만, ‘류 양’의 대답을 듣자하니 쉽게 결심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즈밍과 ‘류 양’ 둘 다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 험악한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지만, 어쩐지 ‘류 양’은 지금의 이 대화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다는 감정을 언뜻 내비쳤다.
길고 긴 설전 끝에 먼저 자신의 의견을 물린 쪽은 즈밍이었다.
“알겠네. 지금 당장 결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테니, 마음을 굳히면 그때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오게.“
”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의 자네 에세이 주제가 ‘설화 분석을 통한 고대사의 인류학적 탐구 가능성’이었지. 무척이나 흥미로운 글이었네. 민담 연구에 관심을 품은 계기가 특별히 있던가?“
”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 옛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습니다. 태곳적에 세상이 창조되고 문명이 건설되는 과정의 서사시를 들으며 전설과 역사의 구분이 어느 시기에 나타나는지 알고 싶었죠. 또 당대를 배경으로 한 설화나 문헌이 실제 역사를 내포하는 경우가 많으니, 아직 학계에서 발굴되지 않은 민간 설화를 채집하고 분석하면서 그 시절 민중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하, 역시 류 양다운 멋있는 답이야. 매번 에세이를 쓸 때 인상적인 주제를 들고 와서 자네가 그 분야로 나아가리라는 생각이 들었었지.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자네 의견이 그러하다면야. 내가 응원 말고 할 것이 더 있겠나?”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참 당돌한 사람이었으니,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할 수 있었다. 상대의 상황과 감정을 헤아리며 자신의 의견을 자연스럽게 밝히는 강점은 즈밍이 샤오전을 빼닮았다. 아니, 그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즈밍이 장갑을 낀 손으로 갑자기 나의 허리를 잡고는 나를 책상 위로 올려 놓았다. 무슨 생각을 품었는지 즈밍에게 여러 번 물었지만, 즈밍은 나를 무시하고 ‘류 양’에게 말했다.
”이 오래된 정은 춘추 시대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다. 다름아닌 기나라 왕실에서 제작한 특별한 물건이지.”
“즈밍,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하나? 내 말 들리나?”
“굉장히… 귀한 유물이네요. 아, 여기 옆면의 그림은… 두 마리의 용인가요? 하늘과 땅 사이로 날아가면서…”
“동시대에 제작된 다른 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이다. 『사기』에 나와 있듯 기나라가 하나라의 후예임이 사실이라면 고대 한족의 창조 신화가 반영된 상징일지도 모르지. 어때? 언젠가 나와 함께 이 정을 연구해 보고 싶지 않나?”
나를 빌미로 삼아 ‘류 양’을 어떻게든 대학원으로 끌고 가겠다는 모양이었다. 독한 녀석, 샤오전의 바람을 이런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루고 싶음은 알겠지만, 이미 상대의 제안을 고사한 사람이 갑자기 마음을 바꿀 도리가 있겠나?
“대단한 유물인걸요. 이렇게나 보존이 잘 된 점도 놀랍고, 여기 이 문양은 어디선가 본 것 같습니다. 얼리터우(二里頭) 문화 관련 유물에서는 아니고, 분명 본 적이 있는 그림인데…”
“가까이서 보게나. 장갑을 끼고 조심히 만져 봐도 좋네. 엇, 전화가…”
즈밍이 나를 장갑과 함께 ‘류 양’ 쪽으로 밀어 주었다. 그가 나의 표면에 특수한 유황 처리가 되어 있어 보존 상태가 우수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동안, ‘류 양’은 조심스럽게 나의 한쪽 귀를 잡고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매우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것이 진동으로 바뀌어 나에게는 선명하게 들렸다.
“음… 선진시대(先秦時代)의 하 문화 계승 양상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교수님한테 좀 더 오래 살필 수 있냐고 허락 받긴 힘드려나?”
즈밍이 동료에게 걸린 전화를 받으러 방 한쪽으로 자리를 옮긴 사이에 ‘류 양’이 나를 유심히 쳐다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드는 묘한 기분이었다. 수천 년 전 나의 첫번째 삶을 마칠 때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샤오전과 처음 마주할 때. 기나라의 군주였던 나는 이 정과 한 몸이 되어 기나긴 세월을 홀로 보냈고, 기나라가 남긴 뚜렷한 흔적은 이제 나뿐인 시대에서는 새로운 벗을 찾아 헤메고 있다. 외로움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품은 어느 뜻 때문에.
하늘의 흐름을 좇으며 예견하고자 했던 젊을 적의 추억과, 같은 뜻을 품은 샤오전에게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근심 때문에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난 류원시라고 하는데, 넌 누구냐?”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