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전시회에서 세 명이나 죽었어."
침묵.
"아, 이 부분에서는 대꾸가 있어야지."
침묵.
"하."
침묵.
"그래, 내 전시회에서는 사람도 못 죽는다네. 죽이고 싶어도 못 죽이지. 왜냐하면 전시회를 못 여니까! 씨발!"
어지럽혀진 방 안. 거실에서는 물건들이 난장판이 되어 있고, 가끔 지직거리는 구형 텔레비전만 불빛을 번쩍인다. 한쪽 다리가 쪼개진 탁자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피자 박스.
그리고 한쪽 구석에 놓인 소파에 몸을 처박은 젊은 남자 하나.
얼굴에는 흰 분칠, 붉은 입술과 눈가에 그린 푸른 문양. 누가 보아도 광대 분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장. 그러나 지금은 그 분장이 군데군데 지워져 있고, 그 텅 빈 얼굴에는 온통 피로와 다크서클로 얼룩져 있다.
"내가 젊나?"
오늘까지는, 그리고 잠들었다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인생 한 번 좆같기도 하지."
오늘로 마흔두 번째.
마흔두 번째로 이 남자, 양지환이 세상에 자기를 들여보내달라고 요구했다가 드라마틱하게 걷어차인 날이었다. 더 정확하게 묘사할까.
<시대의 예술가, 가장 얇은 것이 가장 두껍다, 플라스틱 풍선의 귀재, 허먼 풀러랑 상관 없음, 사슴대의 광대, 풍선을 타고 날아오른 예술인> 양지환의 하루.
때는 지환이 마흔두 번째로 전시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했다가 정중하게 까인 날이었다. 세계 신기록 아닐까!
"지랄."
문제는 모두, 지환의 주 종목이 풍선 아트였다는 점이었다.
그래, 안다. 풍선 아트. 무슨 애들 생일파티에 불려 온 광대처럼 풍선을 불고 선물로 주는 그런 종목. 그래도 나름 엄청난 기술인데 말이지. 심지어 모국인 한국에서는, 그게 무슨 민간자격증으로까지 있다고!
"그런데 알아주느냐, 이 말이지."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변칙예술계도 다를 바 없다. 요새는 무슨, 이상한 AI 변칙예술이 유행하는 판국이라 요즘 평론가와 예술계의 관심은 온통 그쪽에 쏠려 있다. 그런 판국에 유화는 차치하고, 풍선 아트?
"진짜 인생 하고는…"
아주 어릴 적, 명천구에 입성했을 때. 그리고 명천구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와서 자유로워졌을 때. 스리포츠에 정착했을 때. 사슴대를 졸업했을 때. 그리고…
지금.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잘 풀릴 줄 알았다. 인생이 그렇게 낙관적으로 흘러가지만은 아님을 분명히 배웠는데도,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어떻게든 안 되는구나."
졸업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고, 이 버러지 같은 예술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이름을 알려야 했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변칙예술학부 학생들이 반은 어그로 유튜버가 되고 반은 문자 그대로 광인이 되는 것이 그런 이유였다.
"씨발."
일이 되는 게 없었다.
몇 년 사귀던 여친이랑은 헤어진 지 반년. 그 반년 내내 술만 퍼마시다, 작업 기한이 다가올 즈음에야 부랴부랴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기를 두세 번을 반복하다 보니, 몸은 작살이 나고 머리는 멍해졌다.
학업도 딱히 좋을 건 없었다. 학점이니 뭐니, 신경을 두고 살지를 않다 보니 성적은 날이 갈수록 처참해졌다.
지금이라도 취업을 노려야 하나? 그러나 지환을 써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뭘 보고 써준단 말인가.
"아… 진짜 지랄."
인생 한번 더럽게 안 풀렸다. 언제부터 이랬을까. 적어도 전 여자 친구랑 사귀고 있었을 때는 인생이 그래도 좀 꽃밭이었던 것 같은데. 난 왜 여기서 작살나 있지. 인생은 명확하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자꾸 안개가 꼈다. 그것도 아주 두껍고 무거워서, 떨쳐낼 수도 없는 축축한 안개가.
"씨발!"
"그래, 다 성질 냈어?"
"으악!"
아샤의 목소리에 지환은 소파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젊은 여자가 방 안에 있었다. 갈색 머리칼에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 안온한 인상에, 입가에는 미소.
방금 열어젖힌 듯,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문 너머로 바쁘게 돌아다니는 스리포츠 시내의 모습이 멀찍이 들어왔다.
"누나, 제발 부탁인데 인기척 좀 내고 다녀."
지환이 툴툴거렸다.
"넌 칼한테 인기척을 내라니."
"그럼 뭐, 내가 검기라도 내뿜어주라고 부탁하리?"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아샤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아샤는 수년 전, 지환이 아직 중학생일 때 명천구에서 같이 세상으로 나온 사람 중 하나였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아니었고, 에고소드라는 존재라고 했다. 의식을 가진 검, 사람으로 변하는 검. 별세계에서 떠돌다가 우리 차원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아샤에게는 묘한 특기가 몇 개 있었는데, 하나가 검으로 가끔 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불을 조정하는 능력이었다.
"무 하나 못 자르는 검."
"이 녀석이."
아샤가 손 끝에 불을 붙여 장난 투로 위협하자, 지환이 몸을 움츠렸다.
"사람 잡네."
지환이 다시 축 늘어지자, 아샤가 나직하게 물어왔다.
"오늘은 또 왜 그렇게 우울 모드야."
"그냥, 인생이 너무 험난하다고 생각이 드네."
한 번 착 가라앉은 목소리는 도통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포기하고 직장이나 알아볼 걸 그랬어. 어디 공학부라도 들어갔으면, 지금쯤 좀 더 괜찮은 동네에서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누나랑, 나랑."
평소처럼 놀리는 대신, 아샤는 조용히 의자를 끌고 지환의 옆에 앉았다. 한때 비평가로 불렸던 늙은 편집자가 애용한, 낡은 의자였다.
"너랑 헤어진 그 여자애 생각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고?"
"무어…"
지환이 얼굴을 찌푸렸다.
"한 삼십 퍼센트는."
"다행이네. 두 달 전에는 한 팔십 퍼센트였는데."
"고맙긴요."
"웃기시네."
아샤와 지환이 동시에 피식거렸다.
"지환아, 광대가 네게 예술을 하라고 한 이유가 뭔지 알아?"
"자기 이름 이어받으라고 그런 거지 뭐."
지환이 얼굴을 굳혔다. 살짝 당황한 탓이었다. 아샤가 지환의 앞에서 광대를 언급한 건 처음이었다.
수년 전, 명천구에서 둘은 광대라는 한 사내를 통해 만났다. 그는 방황하던 아샤를 명천구에서 자리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친척과 모조리 떨어져 명천구로 흘러 들어온 지환을 보살핀 것도 그 남자였다.
지환은 그가 자칭하던 '광대'라는 이름을 이었다. 그 이름을 잘 이었는지는, 스스로 자부할 수 없었지만.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야. 걔가 뭐, 조선시대 사람이니."
"그럼 뭔데?"
아샤가 잠시 침묵했다.
"지금까지 내가 사람들 사는 꼴을 봤잖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어."
"뭔데?"
"꼭 큰 힘은 없어도 큰 대가를 치르더라."
지환이 실실거렸다.
"우리 인간의 아픈 부분을 찌르셨군요, 검 양."
"그런데 그 대가를 조금 가볍게 하는 방법이 있었어."
아샤가 미소 지었다.
"사랑하는 걸 멈추지 않는 거야."
"멈추지 않는다, 라고…"
지환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아샤가 손을 뻗어 지환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네 말마따나 인생 한번 더럽게 안 풀리더라. 나도 너희 따라서 오래 살았다고, 인생이란 게 생겨서, 그게 참 더럽게 꼬이곤 하는 것 같아.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걸 멈추지 않으니까 조금은 덜어져, 그런 게."
변칙예술계의 떠오르는 거물, 아샤. 평론가로도, 큐레이터로도 가끔 활동한다고 들었고, 그게 지환이 아는 전부였다. 명천구를 떠난 뒤 둘은 가끔 이렇게 만나서 수다를 떨었다. 때로는 한 달에 한 번, 석 달에 한 번, 반년에 한 번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 옛날의 둘처럼. 두 남매처럼.
지환은 몸을 구부려서 아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전생처럼 느껴지는, 명천구의 어느 날 아침이 기억났다. 밤새 울다 잠들었던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다정하고도 조심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던 아샤의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러니까 지환아, 너도 멈추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자유로운 순간을 찾아. 그럼 살아져. 살게 되어 있어."
"그거 정말 좋은 말이다."
언젠가 도망쳐서 자유롭게 살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의 기척으로도 행복해졌던 순간이 있었다. 어떤 사람을 온전히 소유했다고 생각하고는, 그 사람을 인생의 가장 큰 목표로 세우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사람이 사라지면 거기 공간이 비어서, 그게 공허로 이어졌다.
그 공허가 너무 무거워서, 가끔은 눈을 감은 채 모든 게 끝나길 바란 적도 있었다. 다음 날이 무서웠던 밤을 영구히 걸었던 적도 있었다. 아침이 오길 바라지 않으면서, 나이를 먹지 않기를 바라면서, 모든 것이 불투명한 창 안에 갇혀 옴싹달싹하지 않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누나."
"응."
"다음에는 언제 와?"
"한동안 여기 있을 거라고 했잖아."
"응, 그렇지만 누나가 또 떠나고 나면, 또 언제 오느냐고."
지환은 눈을 감은 채 아샤의 손길을 느꼈다. 작고 강인한 손길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것을 느끼면서, 지환은 햇볕에 말린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금방."
"거짓말."
"미안."
"그래도 금방 와."
"그래."
"누나 오니까 정말 좋다."
"포기하지 마, 지환아."
"응."
한때 비평가였고, 한때 편집자였던 노인의 집에서 두 남매는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창밖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은 공간에서, 둘은 조용히 다가올 날들을 되새겼다.
굳건하지 않아도, 흘러내리진 않을, 어떤 단단한 조각의 다짐들을 생각했다.
기적을 꿈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