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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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진짜 죽이려고…" 클라이드가 말했다. 레이테는 반응하지 않은 채, 리볼버를 클라이드의 미간을 향해 똑바로 조준하곤 공이치기를 당겼다.

"다 손 머리 위로 올려! 불응하면 쏜다!"

그 순간, 총성과 함께 레이테의 동료 중 한 명이 무릎을 부여잡고 쓰러지더니, 누군가 레이테의 목을 팔꿈치로 강하게 끌어안고 총구를 그녀의 머리에 겨누었다. 슈판다우였다.

"자, 해머 제자리로 돌려 놔. 그렇지.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리고. 클라이드, 챙겨."

"아니, 어떻게 알고…?" 권총을 챙겨 일어난 클라이드가 물었다.

"여기서 총 소리가 들렸다면 일어났을 일은 뻔하니까." 슈판다우가 자동권총의 공이치기를 당기곤, 총구를 레이테에게 더욱 가깝게 들이대며 말했다.

"저 조명탄, 누구한테 줬어?"

"몰라요, 전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냥 여러 가지 물건들만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끔 계속 가져와 주면 된다 그랬어요!" 방금까지 클라이드를 향해 총구를 들이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시 무고한 민간인으로 돌아온 레이테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다른 물건들 다 어디 있는데?" 슈판다우가 묻자, 레이테는 말 없이 무대의 구석을 가리켰다. 클라이드가 보았던 금속제 트렁크가 있는 장소였다.

"좋아. 클라이드, 가서 뭐 있는지 좀 찾아봐. 뭐 특이한 거 있으면 말해."

슈판다우가 레이테 일행을 잡아두고 있는 사이, 클라이드는 무대 위로 기어 올라가 트렁크를 뒤졌다. 몇 개는 열려 있고, 몇 개는 잠겨 있었다.

"어?" 그러던 도중, 클라이드의 눈에 작은 꼬리표 하나가 달린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뭐라 쓰여 있는데요?"

"뭔데? 읽어 봐."

"사랑을 담아, 왼손잡이가." 클라이드가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또박또박 읽었다.

"왼손잡이가? 허 참…"

"안돼, 그건 오늘…" 레이테가 급히 뭐라 말하려는 듯 했지만, 슈판다우가 권총 손잡이로 뒤통수를 내리치자 도로 조용해졌다.

"오늘 뭐?"

"그러니까… 오늘 전달해줄 물건은 저거였단 말이에요…"

"그래. 언제 어디서 전달하기로 했는데?"

"그, 그러니까…"

"빨리 말해!" 슈판다우가 총구를 더욱 가까이 들이대며 소리쳤다.

"1시간 뒤 쯤에 '백색 오케스트라'에서요…"

"백색 오케스트라라, 그게 뭐하는 곳인데?"

"여기 근처 예니세이 광장 출구 쪽에 있는 카페요… 거기 2층 테라스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예니세이 광장이라, 좋아. 클라이드, 물건 챙겨."

"예."

"에? 아니 잠깐…" 레이테가 아연질색해하자, 슈판다우는 포박을 풀고 레이테를 땅바닥으로 밀쳐버린 뒤 권총을 겨누며 말했다. "방금 내가 쏜 너네 친구 죽어가는 거 안 보여? 어떻게든 걔를 데리고 도망가는 게 맞지 않을까?"

레이테가 머뭇거리자, 슈판다우가 덧붙였다. "아니면, 최후를 함께하겠다, 뭐 그런 건가?"

"…가자!" 레이테는 결정을 내렸다는 듯 단호히 말하곤 그녀의 멀쩡한 동료와 함께 총 맞은 동료를 들쳐업고 자리를 떴다.

"아니, 뭐가 어떻길래 그러시는 건지… 지금 상황 돌아가는 게 이해가 잘 안 가는데…"

"왼손잡이. 변칙적 범죄 도구를 제조하는 기술자다. 특히 무기를 만드는 데 전문가지. 앨리슨은 그걸로 누군가를 죽이려는 거야."

"아…" 클라이드가 놀라워했다.

"지금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려, 클라이드. 저들 대신, 우리가 앨리슨과 접선한다."

"예? 사전 준비 없이…?"

권총을 디코킹한 슈판다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슨… 그러니까 "검은 여왕"은 너와 초면이야. 적당히 둘러대."

"그걸로 되는 게 맞을지 잘…"

"시간 없어. 내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바로 지원하러 갈 테니."

"아으…"


"그래서, 니 이름이 클라이드인데, 걔네 대신 왔다고?"

"네." 클라이드가 잔뜩 위축된 상태로 말했다. 의아하다는 듯 일그러진 앨리슨의 얼굴이 이를 더욱더 심화시켰다.

"이상한데,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먼저 연락을 하지 않나?"

"가까운 누군가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서 그렇다는데 어쩔 수 없죠."

"흠. 뭐, 맞는 말이지."

클라이드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슈판다우의 10mm 권총은 생명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그 대상이 레이테 일행 중 한 명이었던 만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물건 좀 확인해 보실까?"

클라이드는 케이스를 앨리슨에게 건넸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앨리슨은 모르고 있을 테지만, 케이스의 바닥 면에는 위치 추적을 위한 발신기가 부착되어 있다. 앨리슨이 가는 곳에 따라서, 케이스 역시 위치가 옮겨질 테니 자취를 확실하게 쫓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담아… 이 분께선 참 사랑을 좋아하신단 말이지." 앨리슨이 꼬리표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경쾌한 탁 소리와 함께 꼬리표가 뜯어졌다. 그리고, 굳게 잠겨있던 케이스가 열렸다.

"좋아. 물건은 정확히 왔네." 앨리슨이 중얼대며 조심스레 케이스 속 물건을 꺼냈다. 내용물의 정체는 의외로 특별할 것 없지만, 여러모로 이색적으로 생긴 물건이었다. 일단 생김새는 권총에 가까웠지만, 권총보단 총탄을 격발시키는 도구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총열은 없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짧았고, 약실도 딱 총탄을 제 자리에 고정시킬 수 있을 정도로만 최소한의 프레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명탄 총…?" 클라이드의 입에서 무심코 새어나온 단어였다. 영 총처럼 생겼으면서 아닌 거 같은 그 생김새를 가장 잘 비유해주는 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앨리슨은 자신의 주문 제작품이 그런 식으로 폄하당하는 일이 영 달갑지 않아 보였다.

"말조심해라. 이래봬도 견딜 수 있는 약실 압력은 500만 PSI 이상이야. 이 압력을 온전히 쏘아낼 수 있고."

"그나저나 그런 걸 여기서 꺼내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됐어. 총알도 없는데 뭐 어때." 앨리슨이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케이스를 테이블 가장자리로 밀어 떨어뜨렸다. "물건은 잘 받았어."

"아니 잠깐, 케이스는 안 가지고 가나요?" 클라이드가 당황한 채 말했다. 만약 앨리슨이 케이스를 들고 가지 않는다면, 이 고생을 다시 한 번 해야 할 것이 자명했기에, 상당히 필사적인 질문이었다.

"거추장스럽게 왜? 누군가 케이스에 뭔 수작을 부려놓았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위험 부담을 할 필요가 없지. 위치 추적을 위한 발신기라도 누가 붙여놓았으면 어떡하려고?"

클라이드가 섬찟했다. "아… 그렇죠."

"그럼 뭐, 이따 계좌로 보낼게. 잘 있어."

자리를 뜨는 앨리슨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던 클라이드는, 전화기를 꺼내 연락했다. "케이스를 버리고 가는데, 지금 쫓아야 합니다. 눈치챈 거 같기도 해요."

"어디로 갔어?" 슈판다우가 물었다.

"카페 맞은편 골목으로 가고 있어요."

"당장 내려와. 쫒는다."

클라이드는 앨리슨을 따라 빠르게 광장으로 나왔고, 총부터 뽑아든 채 기다리던 슈판다우와 맞은편의 골목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니,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만…" 그러나, 얼마 못 가 이들의 발은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골목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클라이드와 슈판다우는 사람들과 부딪혀 가며 앨리슨을 계속해서 쫓았다.

"흠…" 앨리슨은 소란스러워지는 뒤를 돌아보았고, 슈판다우의 얼굴을 확인한 뒤 조용히 발리스틱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흑!" 슈판다우 앞의 민간인이 짧은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등에 박힌 번뜩이는 칼날이 먼지로 흩어져 사라지는 걸 본 슈판다우는, 권총을 들어 하늘로 두 발을 쏘았다.

"다들 비켜!" 울려퍼지는 총성과 함께, 골목은 아주 쉽고 간단하게 아비규환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혼란에 휘말려 서로 밀치고 밟히는 사람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총을 든 남자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했다.

"딱 붙어서 따라와!" 슈판다우 주변을 따라 생겨나는 빈 공간에 붙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클라이드를 본 앨리슨은 잠시 인상을 찌푸린 뒤, 먼지가 발리스틱 나이프의 칼날로 다시 뭉쳐지는 모습을 확인한 후 사람들 사이를 계속해서 비집고 들어갔다.

"거기 서라!" 그러나, 사정거리에 들어온 앨리슨에게 슈판다우의 10mm 권총탄이 날아들었다. 앨리슨은 기적사답게 발리스틱 나이프를 쏘아 권총탄을 공중에서 맞춰 막아내고, 나이프 손잡이를 던져 두 번째도 막아냈다.

이번에는 앨리슨이 주머니에서 오토매틱 나이프를 꺼내 슈판다우를 향해 던졌다. 슈판다우가 몸을 틀어서 피했고, 땅에 꽂힌 나이프를 클라이드가 뽑아들곤 다시 앨리슨을 향해 던졌다. 앨리슨은 다른 칼을 꺼내들어 클라이드의 비수를 튕겨냈지만, 그 빈틈을 노리고 날아온 10mm 풀 메탈 재킷은 피할 수 없었다.

"크흑!" 짧은 비명과 함께 앨리슨이 어깨를 부여잡으며 쓰러졌고, 손에는 피가 묻어나왔다.

"좋아. 이제…" 그 순간, 슈판다우와 클라이드, 그리고 앨리슨의 머리 위에 서치라이트가 비추어졌다.

"아." 머리카락 사이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고, 클라이드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UH-1 헬기 하나가 그들의 머리 위에 있었고, 서치라이트와 함께 도어건으로 설치된 기관총을 겨누고 있었다. 클라이드는 헬기의 문에 선명히 쓰여진 글자를 볼 수 있었다. "FBI UIU, 특이사건반…"

"당신들은 현재 FBI 특이사건반에 의해 구속되었다. 당신들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나, 그에 따른 법정 심문에서의 변호에 차질이 생길 수 있으며, 언급한 모든 발언들은 증거로 제출될 수 있다. 투항하라!"

"하이고 망했네." 슈판다우가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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