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옥상에서 떨어지는 꿈.
누군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앞으로 걸어가자. 한 걸음, 한 걸음. 발아래에 땅이 없어지고 나는 공중으로 추락한다. 모든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아주 당연한 명제. 하지만 날개가 있다 해도 하늘을 걸을 수 있을까?
그때 누가 내 손을 잡았더라?
***
짐을 수색하던 중에 무언가를 발견했다.
창턱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스케치북. 이걸 어디서 구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한 손으로 들어 보니 몇 장 들어 있지 않은 듯 두께가 얇아서, 세월이 흘러 주름이 진 표지를 장갑으로 가볍게 쓸어넘기고 장을 열어 본다.
속표지에는 볼펜으로 삐뚤삐뚤 적은 글씨의 흔적이 보인다. 2학년 3반 이민영, 관개자 외 출임 금지. 아직 철자를 다 떼지 못했을 시절이라 군데군데 오타가 보인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가 이 책의 주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떠올리자 입술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첫 번째 페이지. 서투르게 그려진 어린이 네 명이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커다란 글씨로 ‘술래잡기’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아이들 중에 한 명은 팔이 여섯 개 달려 있고, 다른 한 명은 목이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나 있다. 재단의 유치원이라면 이런 아이들도 어련히 있었겠지. 그다지 감명받지 않은 표정으로 넘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페이지. 그림의 주인은 벌써 지루해지기 시작했는지 크레파스의 색깔을 세 가지로 통일했다.


전 페이지에 나왔던 여섯 개 팔을 가진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한꺼번에 들어올리면서 놀아 주고 있다. 맞아, 재찬이는 항상 힘이 셌었지. 그 옆의 3페이지에는 공기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역시 넘긴다.
4페이지. 이건 다른 것과 다르게 장소를 그린 그림이다. 우리가 나고 자랐던 재단 직할 유치원.

흰 옷을 입은 키가 큰 사람들이 아이들을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다. 이때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무슨 테스트 같은 걸 했었나? 내 기억 역시 많이 희미해져서 진상을 가리기가 어렵다. 잠시 의문을 가진 채로 옆 페이지로 시선을 옯긴다. 그리고 멈춘다.
5페이지.

두 사람이 그려진 그림. 하나는 평범한 여자아이의 모습이다. 한 손에 인형이 쥐어져 있고, 다른 손으로는 상대의 손을 꼭 맞잡고 있다. 얼굴에는 특유의 과장된 미소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맞잡은 손의 주인은 귓가에 작은 날개가 달린, 조금 독특한 귀여운 여자아이다.
이를 악물고 장을 넘긴다. 6페이지와 7페이지. 이 스케치북의 마지막 그림이다. 이 뒤의 27페이지는 모두 흔적 없는 백지다.

6페이지. 이별의 장면. 인형을 손에 쥔 아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리고 7페이지는…

추아린, 내 이름.
나를 기억하라고 내가 그때 그렇게 말했지. 그것 때문이었나?
스케치북을 접어서 ‘증거 물품’이라는 견출지가 붙은 대형 지퍼백 안에 집어넣는다. 고개를 드니 다른 보안부 요원들도 수색을 대충 끝마친 상태다. 나는 지퍼백을 단단히 밀봉하고 나서 침실 밖으로 나온다.
“뭐 좀 찾았나?” 보스가 묻는다. 나는 손에 들린 지퍼백을 보여 준다.
“이게 있었습니다.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뭔데?”
“제 이름이요.” 보스는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는 듯 단박에 얼굴을 찌푸린다.
나는 귓가의 날개가 힘차게 날갯짓하는 것을 느끼며 말을 잇는다. 내 목을 스스로 조르는 것 같아 꺼림칙하지만, 이걸 숨겼다가 다른 이가 발견하는 순간 일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최대한 내 선에서 끝내야 해.
“용의자가 널 기억했다고.” 보스가 말한다. 의문문이 아니다. 이미 확신을 가진 듯이.
“네. 이유는 아직 불명확합니다만, 기억 소거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걸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용의자는…”
문장을 잇기가 어렵다. 그래도 해야 한다. 말이 꼬이지 않도록 심호흡을 하고 이어서 보고한다.
“용의자는, 이 책에 어떤 애착을 가진 듯합니다. 이게 창턱 위에 놓여 있었어요.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이 스케치북을 본 것 같습니다.”
“자살하기 직전에.” 보스가 정정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으로부터 13시간 전, 유아청소년부 직원 이민영은 자신의 숙소 창문의 안전장치를 부수고 뛰어내려 자살했다. 재단 데이터베이스 해킹 시도 혐의를 받고 체포되기 직전이었다.
재단은 그녀의 집에 외부 요주의 단체와 내통한 흔적이 있는지, 그리고 해킹 후 정보를 어떻게 할 심산이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우리를 파견해 그녀의 집을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보스가 첫 번째로 뽑은 사람이었다. 제202K기지에서 나고 자란 유일한 우리 부서 요원이자 사건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에.
그리고 나 역시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이기도 했었으니까.
다른 요원들이 그녀의 집을 속속들이 들춰내고 증거를 채집하고 있다. 그들을 막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이건 수사니까. 재단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최대한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 그래도 슬픔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민영아? 깨져 버린 창문을 보며 속으로 묻는다. 대답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협조 공문은 이미 기지 이사관한테 보내 놨어.”
보스가 시큰둥한 얼굴로 말한다. 우리는 증거품 조사를 끝낸 후 다 같이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까먹고 있다. 짧은 밤은 어느새 거의 끝나가고 있고, 저 산맥 너머로 옅은 햇빛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곧 허가가 떨어질 거야. 면담은 내일부터 시작하지. 인우, 데이터 추출은 끝났나?”
“거의요. 하지만 다는 추적 못해요.” 내 옆에 앉아 있는 깡마른 남자가 수박바를 한 입 베어물며 답한다.
“찾아보니 이 사람 꽤 오랫동안 골목길에 들락날락했었는데, 죽기 전에 자기 계정을 잠금 처리하고 갔어요. 자기 죽음을 어느 정도 예상한 모양이에요.”
“잠금을 풀 수 있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죠. 보스, 집 안에서 비번 같은 거 적힌 포스트잇 없었죠? 보통 그게 가장 쉬운 루트인데.”
“집은 깨끗해. 거실, 주방, 화장실, 싹 다 비었어. 책도 한 권 없는 마당에 그런 게 있을 리가.”
보스 옆에 앉아 있던 키 큰 여자가 끼어든다. 그녀는 자기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채로 서서히 녹아 가는 얼음을 응시하고 있다.
“뭐, 그럼 어려운 방법대로 가야겠네. 일단 통신 기록부터 싹 뒤집어 훑어볼게요, 보스.”
“그래. 그리고 진, 제202K기지 부검실이 준비되는 대로 시신의 부검 및 변칙성 확인을 실시해. 요주의 단체가 엮여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니까. 이상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한나절이면 끝날 거에요. 사망 진단서는 여기 기지에 제출할까요?”
“나한테 줘. 기지에는 나중에 내 이름으로 넣어 두지.” 진은 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던져 버린다. 인우는 그런 진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낸다.
“야, 음식 함부로 다루는 거 아니야. 게다가 저건 내가 사 온 거라고.”
“내 취향 아니면 다 쓰레기야. 그러니까 저것도 쓰레기지.” 진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코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다.
“먼저 갈게요, 보스. 포르말린 희석액 통을 차 트렁크에 놔두고 와서 부검실까지 제가 갖고 가야 해요. 이 기지는 도대체가 사람이 몇 명이길래 이런 거 도와줄 야간 경비원도 없는 건지…”
“그 이백이-케이 기지잖아. 건물이 안 무너지는 걸 기적으로 여겨.”
인우는 킬킬대며 말하다가 문득 내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문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한다. 제202K기지 출신 아이들은 자신의 출신지에 대한 푸대접에 상당히 익숙하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기도 하고.
“크흠, 아무튼 저도 가 보겠습니다, 보스. 여기 데이터 센터는 구멍이 얼마나 숭숭 뚫려 있을지 궁금하네요.”
“무전기는 항상 켜 놔. 저번처럼 또 까먹지 말고.” 보스가 경고한다. 인우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멀어진다. 이제 벤치에는 보스와 나만 앉아 있다.
“아린.” 보스가 나를 부른다. 언제나처럼 무감각하고 건조한 어조로.
“네.”
“용의자의 주변인들에게 탐문 수사를 진행하도록. 통신 기록이 필요하면 인우에게 연락해서 평소에 연락하고 다니던 이들의 명단을 받아내고, 용의자와 조금이라도 접점이 있었던 이들은 모두 조사해.”
“알겠습니다.”
“다 끝나면 연락하고. 그동안 난 이사관과 차 한 잔 하고 있을 거니까, 아마 오후쯤에는 시간이 빌 거야.”
“네. 다른 지시하실 임무 사항은 없나요?”
“없어. 네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해.” 보스와 나는 동시에 벤치에서 일어나서 바로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아이스크림 막대를 버린다. 약간의 단물만 남은 나무 막대는 가벼운 탕 소리와 함께 통 안으로 떨어진다.
나는 보스에게 경례하고 반대편으로 향한다. 처음 조사를 시작할 곳은 이미 알고 있다. 나를 재단으로 끌어들인 곳. 그리고 우리가 자랐던 곳. 내 발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올 일 없으리라 여겼던 곳. 이 기지의 유일한 부서. 유아청소년부.
대체 어떻게 나를 기억해 낸 거야, 이민영? 머릿속이 복잡해서 잘 돌아가지 않는다. 건물 옆에 쓸쓸하게 서 있는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뽑는다. 입천장이 까지도록 뜨거운 액체를 입김으로 후후 불어가며 한 모금, 한 모금씩 마신다.
부서 바깥에서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다른 동료 요원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우리와 가까이 지냈던 자들의 기억은 우리 스스로의 손에 의해 지워졌으니까. 그건 부서 면접 테스트의 마지막 단계였다. 유재찬, 홍서영, 심지혁, 김한주, 그리고… 이민영. 내 손으로 기억소거제 주사를 놓은 자들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 기지를 떠난 이후로 그들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이제 오랜만에 그들을 다시 보게 되겠군. 날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해가 하늘 위로 완전히 뜨고 하늘의 색은 점점 짙푸른색으로 변한다. 청소부들이 먼저 굽은 허리를 이끌고 바닥을 닦기 시작하고,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로비의 간이의자에 자리를 잡은 뒤 적당한 인물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다.
오래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들어온다. 특수 재단된 양복을 뚫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근육질의 여섯 쌍의 팔, 특유의 처진 눈썹과 기다란 얼굴.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다. 유재찬이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치고 나는 잠시 숨을 죽이지만 다행히 그는 이민영과 다르게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눈길은 나를 지나쳐 건물의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찾았다. 첫 번째 목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인다.
추아린: 안녕하세요.
유재찬: 어, 누구세요?
추아린: 보안부 요원 추아린입니다. 잠시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유재찬: 보안부요…? 아, 네. 그러시죠.
추아린: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유재찬의 사무실 탁상을 마주보고 앉는다. 유재찬은 추아린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유재찬: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나요?
추아린: 확인된 사실만 전달하겠습니다. 유아청소년부 소속 이민영 박사가 어젯밤 재단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하고, 자신의 보안 인가에 맞지 않는 정보를 탈취한 후 잠적하려고 했습니다. 그 전부터 이 박사가 상당한 기간 동안 골목길을 이용하며 요주의 단체와 접선했던 기록도 확보했고요.
유재찬: 아…
추아린: 저희는 현재 이민영과 평소 연락했던 지인들에게 정보를 구하고자 탐문 중입니다. 그러니 당황하지 않으셔도 돼요, 당신은 용의자 같은 게 아니니까요. 전 그저 몇 가지 질문만 하러 왔을 뿐입니다. 괜찮을까요?
유재찬: 제가 지인이라고요?
추아린: 그럼 첫 번째… 네?
유재찬: 아니, 그게. 저부터 찾아왔다는 게 좀 이해가 안 가서요. 그러니까… 말씀대로라면 이민영의 지인을 찾으러 왔다, 그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맞죠?
추아린: 그렇죠. 그 말씀은 혹시…
유재찬: 전 이민영과 최근 몇 년 동안 연락해 본 적이 없어요.
추아린: (잠시 침묵) 하지만 두 분 모두 유아청소년부에서 근무하시지 않나요? 이 기지에서?
유재찬: 같은 부서 사람이라고 모두 얼굴을 알 필요는 없죠. 그쪽도 모든 보안부 요원들을 알고 있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추아린: 그렇군요. 혹시, 어떤 이유로 사이가 틀어졌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유재찬: 뭐, 틀어졌다기보다는 그 쪽에서 저를 끊어낸 거에 가깝죠. 계속 연락해도 답장도 없었고, 절 의도적으로 피해 다녔으니까. 다른 직원들과는 여전히 잘 얘기했었어요. 어제만 해도 그랬고.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지만…
추아린: 무슨 일이 있었죠?
유재찬: 글쎄요, 저도 몇 번 고민해 봤지만 딱히 제가 뭔가 큰 실수를 했다거나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그냥 우리가 잘 안 맞았던 거겠죠. 아니면 이런 사람과 더는 친구를 하기가 싫었던 거거나.
(유재찬은 자신의 팔 세 쌍으로 팔짱을 세 개 끼고 어깨를 으쓱한다.)
유재찬: 전 이해해요. 이런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추아린: 원만한 직장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가 보네요.
유재찬: 변칙성을 가진 직원들이 다 그렇죠. 저 말고도 수두룩해요. 그나마 전 어릴 때부터 여기서 자랐으니 제 몸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나마 덜하긴 하지만, 이런 'SCP'들과 같이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아요.
추아린: 유아청소년부에서도요?
유재찬: 여긴 보수파가 더 많아요. 애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곳이니 이런 주제에 특히 더 민감하게 반응하죠. 저도 지긋지긋해서 가끔 제145K 같은 유연한 연구 방침을 지향하는 기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뭐, 나고 자란 곳을 등지기가 어디 쉽나요. 게다가 내 연구 경력도 변변찮고.
추아린: ……
유재찬: 선생님? 괜찮으세요?
추아린: 아, 네. 잠시 생각을 좀 하느라… 그럼 이민영 박사도 소위 보수파였던 걸까요?
유재찬: 글쎄요, 걔가 무슨 생각을 하고 다녔는진 저야 잘 모르죠. 말했듯이 우리는 몇 년 동안 교류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걔가 어울려 다녔던 사람들을 보면 뭐,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추아린: 감사합니다. 한 가지만 더, 혹시 평소에 이민영 박사와 자주 어울려 다니던 사람이 누군지 아시나요?
유재찬: 어… 유청부 내에서는 김호영 박사나, 홍서영 연구원 정도? 서영이는 저랑도 자주 얘기해서 보수파인지까지는 잘 모르겠고… 김호영 박사는 확실한 보수파에요. 그러니 면담할 때 부디 조심하세요.
(유재찬은 추아린의 귓가에 달린 날개를 가리킨다. 날개가 작게 날갯짓하며 추아린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추아린: 그렇군요. 면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먼저 일어나 볼게요.
유재찬: 살펴 가세요. 그리고 참…
추아린: 네?
유재찬: 민영이는, 지금 어떻게 됐나요?
추아린: (침묵) 죽었어요. 이민영 박사.
(추아린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이민영이 보수파가 되었다고?
어릴 시절의 일들을 기억한다. 우리가 모두 고아원에 한데 모여 다 낡아빠진 장난감들과 물이 새는 지붕 아래에 갇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지의 바깥 세상을 궁금해하던 시절. 하루 종일 나랑 얘기하려고 하고, 자기 귓가에도 날개가 돋아나면 좋겠다고 속삭이고, 헤어지는 날 내 손을 잡고 울었던 이민영. 한 손에 항상 곰인형을 들고 있던 이민영. 내 이름을 기억하겠다고 흐느끼던…
상념은 그만. 이민영은 죽었다. 그리고 나는 내 일을 처리해야 한다.
다음으로 면담할 사람을 찾아 건물의 5층으로 올라간다. 김호영 박사의 연구실이 있는 곳이자 유청부의 최고층이기도 하다. 제202K기지는 가장 최신식 건물이 21년 전에 세워진 것이라, 다른 기지처럼 20층이 넘는 최신식 빌딩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그럴 만한 재원이 여기 투입될 이유도 없고.
하지만 여전히 사람은 남아 있다. 당연하지. 재단의 모든 자원 중에서 사람이 가장 대체하기 쉬우니까. 하지만 바깥으로 흘러나갔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것 역시 사람이다.
재단에서는 우리 모두가 한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지. 그들을 '가족'으로 만드는 게 우리의 임무다.
무전기가 울린다. 인우다. 수신 버튼을 누르고 짧게 암구호를 말한다.
"물범."
"약과."
"별일 없지, 아린? 이민영의 최근 3개월 동안의 통신 기록을 찾았어. 빈도가 잦은 순서대로 알려줄 테니까 받아 적을 준비해."
"알았어." 품에서 작은 노트와 펜을 꺼내고 적을 준비를 한다. 인우는 헛기침을 하고 말을 잇는다.
"가장 많이 연락했던 사람은 홍서영 박사야. 주에 몇 번씩 전화를 주고받고 카톡도 수시로 한 걸 보면 꽤 친했던 걸로 보여. 조사를 좀 해 보니 둘이 같은 고아원에서 자라기도 했고."
인우는 잠시 말을 멈춘다. 나는 그가 나 역시 한때 그들과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궁금하다. 내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 주듯이, 인우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그리고 김호영이라는 사람과도 꽤 자주 대화를 나눴어. 이쪽은 사무적인 연락이 주긴 하지만, 그래도 친한 직장 동료 정도는 되는 모양이던데. 이 둘 외에는 대부분 단순한 업무 관련 사담이었어. 특별히 친한 사람은 없었던 걸로 보이고."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면담해 볼게." 사실 이미 알고 있던 정보였지만 그래도 감사 인사를 한다. 크로스 체킹을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대로 통신을 끊으려는데 인우가 뭔가를 추가로 말한다.
"그리고 특이 사항이 하나 있는데."
"뭔데?"
"발신자 제한 번호가 몇 개 있어. 지금 추적 중인데, 아무래도 외부 회선에 기생한 대포폰인 것 같아. 어떤 요주의 단체와의 커넥션이 있는지 찾고 있긴 한데, 추적하려면 꽤 걸릴 거야."
단서. 가슴이 두근거리며 귓가의 날개가 왕복 운동을 시작한다. 달아오르는 심작 박동을 억누르고 그에게 고맙다고 대답한다. 인우는 별일 아니라고 말하고는 다시 일해야 할 시간이라며 통신을 끊는다. 나는 무전기를 품 안으로 넣는다.
……
요주의 단체라. 이민영은 재단을 정말 배신한 걸까? 이 계획은 언제부터 시작된 거지?
착잡함을 애써 감추고 김호영 박사의 연구실 문을 노크한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한 번 더 노크하고, 여전히 인기척이 없자 문고리를 비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안에는 안경을 쓴 남자가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옆에는 독서등이 켜져 있고, 창틀에 놓인 방향제에서는 레몬그라스 향기가 솔솔 풍긴다. 남자는 허가받지 않은 방문객을 흘긋 보더니 책을 내려놓고 독서등을 끈다. 그가 박수를 한 번 치자 연구실의 불이 자동으로 켜진다.
두 번째 면담. 나는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귓가의 날개가 파르르 떨리며 바람이 느껴진다.
김호영: 전 들어오라고 한 적 없던 것 같은데요.
추아린: 미리 방문을 예약하지 않은 점은 죄송합니다. 긴급 상황이라서요.
김호영: 그래요, 뭐. 무슨 일이죠? 연구 관련으로 찾아오신 겁니까?
추아린: 아니요, 이민영 박사 관련입니다.
김호영: 흠? 그 분이 무슨 일을 저질렀나요?
추아린: 확인된 사실만 전달하죠. 저는 보안부 소속 추아린 요원입니다. 유아청소년부 소속 이민영 박사가 어젯밤 재단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하고, 자신의 보안 인가에 맞지 않는 정보를 탈취한 후 잠적하려고 했습니다. 그 전부터 이 박사가 상당한 기간 동안 골목길을 이용하며 요주의 단체와 접선했던 기록도 확보했고…
김호영: 근데요?
추아린: 그래서 저희는… 박사님, 잠시만요. 제가 말하고 있잖아요.
김호영: 아니, 그래서 이 방문의 요점이 뭐냐는 겁니다. 절 수사하게요?
추아린: 증언 청취라고 해 두죠. 이민영 박사와 평소 친분이 있던 자들의 말을 최대한 들어 보려고요.
김호영: 흥미롭네요. 저희가 공범 행위라도 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추아린: 아뇨.
김호영: 그럼 괜히 생사람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가서 이민영 박사나 심문하시죠. 절 계속 붙들고 있어 봤자 '그런 일을 할 사람이라곤 전혀 생각치 못했어요' 같은 답변밖에 줄 수 없으니까요.
추아린: 아시는 바가 전혀 없단 말씀이신가요?
김호영: 배신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알잖아요. 절대 주변인에게 틈을 보이지 않고 어떤 힌트도 남기지 않습니다. 테러리스트가 따로 없죠. 유청부에는 이런 자들이 나타나지 않길 바랬는데… 뭐, 모든 상황에 100퍼센트를 기대할 순 없죠.
추아린: 그렇군요. 본인을 신문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데는 저도 동의하지만, 안타깝게도 저희가 직접 이민영 박사를 수사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했거든요.
김호영: 아.
추아린: 그러니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을 내 주시죠. 박사님이 생각하신 이민영 박사에 대한 평소 이미지는 어땠나요? 차분한 사람이었나요? 아니면 활기찬 이미지? 평소 사고방식은 어땠죠?
김호영: …이 면담이 의미가 있긴 합니까?
추아린: 용의자의 평소 사회적 생활도 저희에겐 중요한 지표입니다. 증언은 많을수록 더 좋기도 하고요.
김호영: (한숨) 알았어요. 가능한 빨리 끝내도록 하죠. 이민영 박사는… 그래요,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확실히 정상인이라고는 부를 수 없었죠.
추아린: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김호영: 저랑 어울려 다녔으니까.
(김호영이 자신의 책상을 열고 안에 있는 작은 꾸러미를 꺼낸다. 얇은 검은 천으로 이뤄진 꾸러미는 매우 가벼워 그의 손짓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김호영: 이게 뭔지 아시나요?
추아린: 뭐죠?
김호영: 손톱입니다. 어린이들의 손톱.
(추아린이 얼굴을 찌푸린다.)
추아린: 연구에 쓰이는 재료인가요?
김호영: 개인적인 소장품에 가깝죠. 가끔 가루로 빻아서 먹기도 하고.
추아린: 박사님, 죄송하지만 이 자리는 당신의 변태적 취향을 드러내는 자리가 아닙니다. 게다가 그 어린이들의 손톱이 정당한 절차로 얻은 건지도 의심이 가기 시작하는데요. 혹시 이건 자백인가요?
김호영: 진정해요, 보안 요원. 완벽히 합법적이니까. 그리고 제게 그런 취향은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제202K기지에서 일어났던 사고를 기억하시나요?
추아린: 뭐죠?
김호영: 흔한 SCP 격리 파기 사고였죠. 차이점이 있다면 그게 이 기지에 몇 안 되는 케테르급 SCP였다는 것과… 당시 그걸 격리하던 인원들 역시 변칙 개체였다는 사실뿐. 그건 직원들을 인질로 삼았죠.
(김호영은 추아린의 귓가에 돋아난 날개를 바라본다.)
김호영: 스크랜턴 닻은 쓰지 못했어요. 직원들까지 영향을 받아 심각한 육체적 피해를 입을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재래식 무기로 맞서야 했어요. 그 와중에 아이들은 대피하고, 연구원들은 안내를 받아 비상용 벙커로 갔죠. 이 기지가 그거 하나는 좋아요. 건물들이 남아돌아서 아무 빈 건물로 들어가면 그게 곧 벙커나 마찬가지에요.
김호영: 그때 참 여럿이 죽었죠. 보안 요원, 교육 중인 어린이들, 연구원들. 합동 장례도 크게 치뤘고. 그래도 대부분은 살아남았어요.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아세요?
추아린: 뭐죠?
김호영: 인질로 잡힌 직원들이, 사실 그 개체와 함께 기지를 탈출하려고 시도했다는 거에요. 재단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의적으로 격리 파기를 일으킨 거죠.
추아린: ……
김호영: 지금은 그들 모두 D계급으로 강등되서 다른 기지로 이송됐어요. 원래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고 해야 하나. 아, 재단 복지 정책에 위배되는 발언인 건 잘 알아요. 그러니 마음에 안 들면 신고하세요. 감봉 정도야 기꺼이 받아들일 테니.
추아린: 말씀의 요지가 뭔지 모르겠네요.
김호영: 재단은 이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평범한 인간에게도 그렇죠. 여기 정도로 한적한 기지의 유아청소년부라는 별 볼 일 없는 부서에서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안전사고가 일어납니다. 정상사회 평균 사망율의 두 배에요. 처음에 사명을 갖고 입사했든 돈에 눈이 멀어 들어왔든, 누구나 한 번은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김호영: 그런데 여기가 내가 스스로 선택한 직장조차 아니라면? 변칙 개체 직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재단 밖으로 평생 나가지 못해요. 기억 소거 후 사회로 방출이라는, 일반 직원들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조차 없습니다. 그들에게 재단은 직장이라는 탈을 쓴 감옥입니다. 당신도 잘 알겠죠.
추아린: 말씀을 삼가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김호영: 그런데 과연 그들이 순순히 재단에 복종해 줄까요? 평생 동안?
(김호영은 추아린을 노려본다. 추아린도 시선을 내리지 않는다.)
추아린: 모든 변칙 개체가 철창 너머에 갇혀서 죽을 때까지 감금되기를 바라는 박사님의 심정은 잘 이해하지만, 저는 그 주제에 대해 토론하러 온 게 아닙니다. 더불어 어린이들의 손톱을 왜 섭취하시는지는 궁금하지도 않고요. 이민영 박사의 행적에 대해서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김호영: 아, 그거요. 이건 그때 죽은 어린이들의 손톱입니다. 죽은 애들 중 몇몇은 제가 직접 가르쳤었거든요. 추모의 의미로 그 시체에서 그나마 멀쩡한 부분만 뽑아 왔었습니다.
추아린: 제가 궁금하지 않다고… 그럼 그걸 왜 먹죠?
김호영: 어린이의 손톱을 먹으면 젊어진다는 속설이 있거든요. 게다가 서랍 안에 계속 놔두면 자리만 차지하잖습니까.
추아린: 여러모로 박사답지 않으신 분이네요. 솔직히 정신병 환자랑 뭐가 다른지도 잘 모르겠고요. 저도 이게 재단 복지 정책에 위배되는 발언인 건 잘 아니까, 신고하든지 말든지 하세요.
김호영: 그래요, 뭐. 이제 제가 이민영 박사가 저랑 어울렸던 게 이상하다고 한 이유를 알겠죠? 그 사람은 유청부 내에서 꽤 평판이 좋았던 사람이었거든요.
추아린: 박사님은 그렇지 않았나 보군요. 그다지 놀랍진 않네요.
김호영: 뭐, 변칙 개체가 보안 요원을 하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야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긴 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추아린: 박사님의 그 하잘것없는 편견 때문에 제가 보안부에 적합하지 않아 보이실 수는 있겠지만, 저는 지금 재단 상부에서 공식적으로 수사를 위해 파견한 요원이거든요.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저는 박사님을 수사 비협조 및 비하 발언으로 징계위원회에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김호영: 이제는 권위를 앞세우는군요. 그래요, 그래요.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 말씀하시죠.
추아린: 이민영 박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만 간단하게 말씀해 주세요.
김호영: 유청부 내에서 잘 어울려 다녔어요. 몇몇을 제외하면 트러블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격은 뭐, 무난했고요. 가끔 같이 어울려 다녔지만, 그다지 모난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추아린: 성격이 정확히 어땠었죠?
김호영: 자기 주관을 따르기보다는 남들의 의견에 맞춰 줬었죠. 좀 충동적이었고, 감성적이었습니다. 제가 인간관계에 그다지 밝지 못한 편이라 감상이 피상적이라는 점은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추아린: 알겠습니다. (잠시 침묵) 유청부는 어떤 부서였나요?
김호영: 이것도 수사와 관계된 질문인가요?
추아린: 아니요.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김호영: 그렇군요. 그럼 굳이 답해 줄 의무는 없는 것 같네요.
(추아린은 진절머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김호영은 그녀를 비웃듯이 미소를 짓는다.)
김호영: 그래도 알려드리겠습니다.
추아린: 뭐요?
김호영: 유청부요. 유아청소년부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부서입니다. 이 목적 하나만큼은 모두가 똑같죠. 저처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변칙 개체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변칙적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그들과 보통 아이들을 같은 공간에서 교육하자는 진보파도 있죠. 마음은 다 똑같아요. 단지 방식에서 차이가 나고, 그것 때문에 파열음이 발생하는 것뿐입니다.
추아린: 알겠습니다.
그래, 예상대로 끔찍하군.
연구실 밖으로 나와서 기분 전환을 위해 커피를 한 잔 더 마신다. 빈속에 카페인이 축적되자 배에서 불쾌한 느낌이 들고 머리는 어지러워지기 시작한다. 의자에 앉아서 잠시 머리를 식힌다. 천천히 심호흡. 크게 들이쉬고, 다시 내쉬고.
김호영 박사와의 면담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민영 박사의 사생활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고 개소리만 잔뜩 지껄여 놓았으니까. 이런 케이스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신경을 살살 긁어 놓는 상대는 또 오랜만이었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보스에게 전수받은 선진 신문법의 정수를 보여줬을 텐데.
시간은 어느새 아침을 지나 느지막한 오전으로 향하고 있다.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곳곳에서 연구원들이 퀭한 얼굴로 밖으로 나와 구내식당으로 향하는 게 보인다. 나도 뭘 좀 먹을까. 굶주린 배에서 신호가 오자 짧게 고민한다.
아니야, 그래도 홍서영 박사까지는 면담을 끝마치고 먹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내 발은 이미 벤치에서 일어나 연구원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그런데 저 멀리 행렬의 끝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붉은 색에 짧게 친 머리칼,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옷. 뭐가 그리 좋은지 항상 싱글벙글해 있는 얼굴. 어릴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홍서영이다.
나는 걷는 속도를 높여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줄을 서는 데 성공한다. 서영의 근처 자리에서 밥을 먹으며 그녀가 뭐라도 꺼내는 얘기가 없는지 확인할 예정이다. 지금쯤이면 이민영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을 테니까, 홍서영도 이미 정보를 알고 있겠지. 가십거리나 뒷담 같은 거라도 좀 수집해 놓으면…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내게 시선을 맞추고서.
"안녕, 추아린?" 그리고 홍서영이 내게 인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