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은 꽤나 많은 일에 익숙했다. 일반적으로 익숙할 것 같다고들 하는 빨래나 잡귀 퇴치부터, 일면식 없는 인간 추적하기나 요리까지. 아무래도 몇백 년 동안 유사-공무원 생활을 한 사람 형태의 비인간이라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불법적이고 합법적인 일들에는 전부. 너무나도 많이 반복했고, 너무나도 익숙했다. 하지만 그러한 익숙함이 한울의 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점이 있었다고 한다면, 한울을 절대로 자기 머리와 총구가 서로 로맨틱 프렌치 키스를 하는 상황에는 익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앞에 험악한 얼굴의 연합 요원이 있다면 말이다.
"다시 묻는다. 대답해."
총구가 조금 더 깊은 연애를 요구해 왔다. 관자놀이에 느껴지는 냉기에 한울은 다시금 눈을 떴다.
"여기 왜 왔나. 그거 좋은 질문이네."
"측신 잡으러 왔다."
곰보가 흥미로운 듯, 얼굴을 구겼다. 측신이라고 한다면 분명 저 건물 안에 있는 타입 블랙을 뜻한다. 아무래도 외보전원 쪽에서 한 말이 맞는 듯했다. 거기다 여기 드러누운 타입 그린. 말하는 투를 봐서는 적의는 없다. 연합과 똑같이 측신을 잡는 것만을 목표로 하나 보다.
"측신을 잡아? 저 몸뚱아리만 커다란 놈을 청산하겠다, 이거야?"
곰보는 하늘에 우뚝 선 측신의 몸체를 가리켰다. 미동도 없는 머리카락 덩어리. 저 거대한 몸체는 아직도 신력을 모으고 있는 모양인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어. 하지만, 살다 보니까… 요즘 시대도 좋더라고. 그래서 말이야."
한울은 그때의 대화를 떠올렸다. 빨래방에서 처음 측신과 싸웠을 때의 대화를. 이 세상을 다시 인간이 숭배하던 시대로 돌려놓을 것이라는 일방적인 선언— 그러나 한울은 이미 그 반례 속에서 살아왔다. 사람들도, 이상성도, 서로 경외하고 숭배할 필요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런 해원읍, 그 시민이던 한울에게 세상을 되감는다는 꿈은 너무나도 조악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막아야 한다.
"시대가 좋다 정도로 정해지는 목표가 아닐 건데. 자세한 이유를 말해."
곰보는 여전히 그 흥미롭다는 시선을 유지한 채로 입을 열었다.
"저놈의 목적이 뭔지 알고 있어?"
한울이 대답했다.
"측신의 목적은 인간 시대를 다시 이전으로 돌려놓는 거야. 가장 먼저 난동을 부리고 자길 신격화시켜서, 주변을 초토화하고 나아가는 거지. 결국에는 이 세상을 자길 포함한 신들에게 숭배하던 시대로 바꾸려는 계획이고."
"난 이 시대가 사라지는 게 싫어서 측신을 막으려고 하는 거고."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귀가 울릴 정도의 비웃음이었다.
"아, 웃겨. 오랜만이네. 이렇게 웃는 건. 너, 타입 그린이고 뭐고가 문제가 아니었구나?"
곰보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는 동안, 한울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생각했다. 곰보가 드디어 미친 것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기묘한 이유로 미치는 사람들은 꽤나 많이 봐왔으니까.
"저 타입 블랙은 애초에 신이 못 돼."
순간 한울의 인식에 번개가 친다. 신이 못 된다고? 그게 무슨 말이던가. 측신은 본디 더욱 강한 신이 되려고, 아니, 원래부터 신인 존재였을지언정, 범인이 아니었다. 마치 학교에서 학생이 졸업하면 학생이 된다고 하는 것과도 같은 상황. 아니다. 절대 말이 될 수 없었다.
"신이 못 된다고!? 거 연합… 요원 씨.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측신은 신이 되려고 하고 있어. 아니, 이미 신이야. 지금은 사람을 더 죽여서 신위를 높이려고 하고 있는 거고."
곰보가 쭈그려 앉았다. 한울을 지질한 것 정도로 생각한다는 인상이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한울을 바라본다. 나지막히 들리는 말소리.
"연합이 이번 작전 도중 돌린 스캔 결과야. 너도 결국 저 타입 블랙을 청산하려고 하는 것 같으니까 말해주지."
장신의 품 어딘가에서 하얀 종이가 튀어나온다. 한울은 꼬깃꼬깃 접혀있는 종이를 열어본다. ISCUT 신격연구소. 썩어도 연합 소속 연구기관이라는 말답게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한울은 능숙한 영어로 종이를 읽어 나간다. 몇 가지 쓸모없는 결괏값들을 지나서, 눈길이 원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믿을 수 없다. 다시 되읽어본다. 상동.
… 정리하자면, KTE-1819-블랙-언터쳐블-블리트 개체는 신격독립체성 특성을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한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아키바 방사선의 급격한 하락은 위격의 상실이나 신위의 파괴를 의미한다.
현장에서 채집된 기록에서 기록된 아키바 방사선은 겨우 0.6ak 미만이며, 숭배성 척도 또한 최하치에 근접한다. 이는 위협존재가 휴면 상태에서 깨어나기 전보다 7.8ak 낮은 수치이다. 그렇기에, 상기한 도표 및 통계조사와 더불어, ISCUT 신격연구소는 KTE-1819-블랙-언터쳐블-블리트가 더 이상 신격독립체가 아님을 주장하는 바이다.
"저 녀석은 더 이상 신이 아니야. 강력한 타입 그린 정도지. 남아 있는 힘도 금방 닳아 없어질 거다. 아니면 연합이 지원 분대를 보내던지 했겠지. 안 그래?"
한울은 다시 측신의 기척을 읽어본다. 자신의 감은 여전하다. 측신은 아직 신이다. 자리는 부서지지 않았고, 신위도 단단하다. 그런데 인간들의 척도는 다르다. 측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니다. 앉던 왕좌도 산산히 부서졌다. 어째서?
"말도 안 돼. 아니, 하지만 어떻게—"
곰보가 다시 종이를 접어 슈트 안에 집어넣는다.
"어찌 됐든, 너도 저걸 청산하고 싶다 이거지?"
사람은 감각 적응 능력이 있다고들 하던가. 대화하느라 망각하고 있던 차가운 감각이 사라진다. 총구와의 연애가 끝나는 시간이었다.
"그래."
짧은 대답. 그러나 곰보의 수신기가 울리기 전에 대답하기에는 충분한 길이었다.
"마침 재단 쪽에서도 연락이 왔으니까. 같이 가보자고. 측신 잡으러."
"곰보라고 불러."
도리채는 수통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일고여덟 명 정도의 팀원들이 전부 인간형 개체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대로 대기하다가 연합 타격조와 함께 저 개체를 박살 내기만 한다면, 남은 혈맥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약하진 신격독립체를 사살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5분.
그리고 또 5분이 지났다.
무전기가 울렸다.
"수신. 재단 기특대 도리채."
"어, 연합 곰보다. 지금 지원 요청 받았다. 그쪽으로 즉시 가도록 하겠다."
"확인. 특이사항 있나요?"
"음…"
잠깐의 뜸 들임. 보통 이러면 무언가 어이없는 말이 오기 마련인데.
"협력자가 하나 더 생겼어."
"협… 력자?"
협력자. 현장 임무에서는 그리 익숙치 않은 단어이다. 그야 당연하게도 재단과 연합의 임무 목적— 대부분의 경우 변칙개체 확보 혹은 청산— 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과반수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임무 현장에서는 손이든 예술 테러리스트든 악질 심령이든 간에 서로 협업하여 더더욱 불공정한 여론이 형성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서 말하지. 어차피 같이 가게 될 것 같아."
"오는 데 얼마나 걸릴 예정인지요?"
"5분! 딱 5분만 기다려. 바로 가고 있으니까."
5분. 그래. 적당한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것 치고는 의외로 순탄하게 오는 듯했다. 혈맥은 적절히 파괴된 것이 분명하겠지. 이제 다시 몸을 움직일 때다. 연합 타격조가 오기 전에 적당히 개체만 손봐주면 될 상황이었으니까. 도리채는 콘크리트 가루로 점철된 바지를 털고 일어선다. 악취저감시설은 수많은 탱크로 이루어져 있어서, 쌓인 분진과 먼지들이 진득허니 옷에 묻어있는 것이었다. 상관없었다. 도리채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왜인지 모를 웃음. 먼지에 덮혀있지만, 확실한 웃음.
"전원, 무전 들리나요?"
부대원 8명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연결된다. 전부 듣고 있었다.
"수신. 부대장님, 잘 들립니다."
"좋아요, 연합 타격조가 오고 있습니다. 5분 정도 걸리는데. 그 전에 말이죠, 미리 저 변칙개체 힘을 좀 빼놔야 하는 상황이라서요."
주머니를 만져 피스톨을 꺼낸다. 사인탄. 무속학적 개체 대응을 위해, 사인검과 같은 제조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탄환. 모든 부대원의 권총에는 이러한 탄환이 수 개씩 장전되어 있었다. 재래식 무기는 통하지 않지만, 당연히 무속학적 무기는 통할 터였다.
"개체의 기동력 파손, 신통력기관 손실을 목표로 대상을 공격할 겁니다. 공간이 좀 좁으니까 주의하세요. 알겠지요?"
"수신했습니다. 그렇다면 퇴역 절차… 시작하겠습니다."
두 사람, 정확히는 초자연적 독립체 살해를 업으로 하는 사람과 한 초자연적 독립체가 수자원처리시설을 거닐고 있었다. 몇 가지 예외사항이 있다면 아무래도 시설이 딱히 사람이 (그리고 초차연적 괴물이) 거닐 장소가 아니었다는 점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왜 그런다고 생각해?"
초자연적 독립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초자연적 독립체 살해자가 대답했다.
"측신, 신도 아니면서 왜 아직도 저러고 있는 걸까?"
곰보는 비어 있는 측신의 몸체를 바라봤다. 분명 처음 싸울 때는 거대한 몸체가 마구 움직였지만, 이제는 미동도 없이 튀어나오기만 한 상태였다. 확실히 무언가 이상했다. 자신이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난리를 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상식적으로, 연합이든 재단이든 이 사건 이전까지는 측신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신들의 시대가 끝날 때 같이 죽어버린 괴력난신일 뿐이었다. 하지만 왜?
"잘 생각해 봤는데, 이미 신이 아니게 된 이상 더 이상 전투를 끌 이유는 없단 말이지. 오히려 지금이라도 남은 신력과 신위를 보존하고 도망가는 게 이득이야."
한울도 동일한 생각이었다.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남아 있는 것은 천당의 노도를 더욱 증진시킬 뿐이었다.
"어쩌면…"
곰보가 말했다.
"어쩌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그냥 미쳐버렸거나. 타락한 무속학적 독립체들은 이미 질리도록 봤어."
악취정화시설 입구.
목적지다.
사인검이 거칠게 반원을 그렸다. 이런 전투는 오랜만이군, 하고 도리채는 생각했다. 사인검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해도 사라지던 원령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이 머리카락 덩어리는 자기 검을 튕겨내고 있었다. 재밌는 싸움이 될 것이다. 잠시 동안은.
부속지 역할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향해 날아온다. 뒤로 도약. 측면의 빈 자리에서 부대원들이 달려든다. 집단구타— 그보다는 집단자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만, 그것이 어떤 변칙적 독립체건 상대하기 가장 쉬운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누군가 비는 타이밍에는 다시 다른 쪽에서 검을 날린다. 그 쪽으로 반격하면 다시 그 반대쪽에서 검을 날린다. 인간을 초월한 괴물이 있다면 인간을 여러 명 데려오면 된다. 간단하다.
인간형 개체가 다리를 주춤하더니, 다시 빠진다. 사인검의 끝 날이 등을 가른다. 덩어리진 영성, 신통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바람 빠진 풍선과도 같은 광경에 도리채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쾅.
도리채는 뒤를 돌아본다. 시설 내 문이 열렸다. 역광 때문인가? 검은 실루엣만 보인다. 연합 기관복을 입은 여자 한 명과, 모던한복으로 몸을 감싼 남자 한 명.
반응할 새도 없이 붉은 오랏줄이 쏘아져 나오더니, 사람 모양 덩어리를 잡아 구긴다. 남자 쪽이 발사되어, 줄의 반동을 타고 덩어리의 얼굴 부분을 타격한다. 그리고 사격음. 조막만 한 납 덩어리가 활주로를 비상한다. 관통, 관통, 관통. 도리채는 다리를 바로잡고 다시 달린다. 발이 비틀어지는 그 순간, 검을 역수로 잡는다. 정확하고 빠르게, 재단 기동특무부대의 신조다. 보통 많은 상황에서 쓰일 수 있지만, 이때에는 아마도 도리채의 속도를 묘사하는 것에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독립체의 목은 꿰뚫렸다. 정확하고 빠르게.
"꽤나 늦었네요."
도리채가 두 사람 (상술하였듯, 사실 아니다.) 을 노려보며 말했다. 들어오는 바람에 두루마기가 펄럭였다.
"그래서 곰보 군, 저 남자가 자네가 말한 '협력자'… 군요?"
곰보는 뻘쭘한 표정으로 한울을 가리켰다. 당연하지. 연합 데이터베이스에 있다면 재단에 등록되어 있지 않을 리가 없다. 설명하기엔 길었고, 시간은 짧았다. 도리채가 총부터 뽑는 성격이 아니었으면 좋았으련만…
"당신, 알고 있었습니다. 등록 번호 SCP-1381-KO-1. 해원읍에 빨래방 차리고 사는…"
한울은 입만 뻥끗하고 있었다. 설명이 다 맞긴 하다만, 그렇다고 더 말할 것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방금 전까지 자신과 비슷한 기운을 뿜던 존재를 난도질한 여자가 두렵기만 할 뿐이었다. 거기다 갑자기 반말까지. 재단이란 족속들은 원래 괴력난신의 말을 믿는다기보다는 편집증적으로 검증하는 성격이 있었으므로, 더 말을 했다가 저 호랑이 기운을 뿜는 총알들이 몸에 박혀도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신이란 족속들은 원래 다 이런가 보죠? 이중적이고. 한 놈은 지랄하고, 다른 놈은 도와준답시고 나타나고."
"그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 중, 가장 유명한 ≪신학대전≫ 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다.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 춤을 출 수 있는가?
슬프게도, 한울은 딱히 천사는 아니었다. 애초에, 재단이든 연합이든 천사보다는 악마와 가까운 것이 차가운 현실이기도 했고. 그리고 재단과 연합이 아는 한, 천사는 딱히 춤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신학부의 연구 주제 중에서는 그리 관심을 받지 못하는 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의 정답이란, 아무래도 "아무도 없다." 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저승사자라는 존재를 천사의 정의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그 정답은 달라진다. 아, 그리고 춤의 정의도 바꿔야 할 것이다. 여기서 춤이라는 것을 "몸(신체)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는 예술의 한 종류" (위키피디아) 가 아닌, 어떤 방식으로든 몸을 마구 떤다던가, 회전한다던가 하는 것이라고 하자. 그러면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 춤을 출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한 명." 이다.
한울은 바닥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야! 혈맥 파괴의 반동인가?"
아니다. 혈맥을 부쉈으면 약해졌을 것이다. 측신은 까마득하게 낮아져, 사람 몸조차 흔들 수 없어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강해졌다.
"그야 당연하지."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 한울은 뒤를 돌아본다.
붉은 파티드레스, 장발의 머리. 아니, 더 이상 인간의 형태가 아니다. 일종의 관념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사람이 걷는 것을 흘러내린다라고 표현할 수 없듯, 측신은 사람의 틀에서 벗어나 측간 자체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힘이 없다면 차원을 벗어날 수 없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신력은 이미 다 버렸을 것인데?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저 정도의 신위가 올라가던가?
"혈맥은 부서졌어. 난 죽었다. 아무런 힘도 없지. 내 몸뚱아리는 이미 사라지고 있지. 하지만 공교롭게도…"
아무도 움직일 수 없다. 신의 위계가 올라가는 과정은 눈을 빼어놓는 광경이기에…
"소별왕 자리가 비어 있어서 말이야."
뭐?
이승의 왕 자리가 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러했다. 측신은 이미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권능… 새로운 신격… 새로운 신위… 힘이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단 하나만을 의미했다. 첫째, 소별왕이 죽었거나, 없다. 둘째, 이 모든 학살은 미끼였다. 측신은 당장 끌어올린 신위를 전부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에 썼다. 셋째, 이승의 통치자가 바뀌려 하고 있다. 측신은 더 이상 세상에게 시대를 강제하는 위치가 아니었다. 세상이었다.
측신이 손바닥을 까딱한다. 더 이상 평면에 있지 않다. 한울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현실이 접히고 구부러지며 찢어진다. 한 무언가가 원하는 대로 다시 접착된다. 달려야 하지만 달릴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달린다는 것이 뭐였지? 도주라는 개념이, 저항이라는 것이, 근대와 어제와 내일과—
"언니!"
순간의 소란. 시설 입구를 박차고 한 소녀가 들어왔다. 앳되어 보이는 몸에 입은 무복이 기묘한 시너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기운은 곧바로 눈앞에 있는 신에게 밀려 전달되지 못했다. 신위를 바꾸는 것을 거의 끝낸 측신은 그 힘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 세상의 수억 수천, 모두가 활동하는 것 자체가 숭배 행위가 된다. 동전 짤랑이는 소리, 한 무리가 걸어가는 것, 누군가 우는 것, 무언가 자라는 것, 전부— 단지 질병과 재앙신으로서 받았던 숭배와는 차원이 달랐다.
"동토부적… 동토부적…"
팔이 점멸함과 동시에 무복에서 세 개의 평평한 종이가 튀어나왔다. 누런 종이, 괴황지, 고춧가루 냄새, 부적이다. 투척. 종이는 맹점을 지나서 다시 얼굴 옆으로, 그리고 측신에게 정확히 내려꽂힌다. 그와 동시에 스파크가 허공을 수놓기 시작한다. 강력한 아키바 반발이었다.
"약동포… 약동포 허가가 떨어졌어요! 빨리 나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