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째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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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구째 밤

살얼음으로 뒤덮인 수면에 돌메기가 곤두박칠쳤다. 놀란 고기들이 흩어지는 모양새에 누이가 무슨 것이 기리도 재미진지 깔깔거리며 우틉댔다. 물수제비는 커녕 물제비만도 못한 꼴이었지만, 누이가 기뻐하는 얼글을 보니 썩 괜치않았다.

“정순아, 생물고기 먹고 싶지 않던? 니 오라바이래 낚숫대 하나는 잘 놓구레.”

배꿉 속서부터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먼추지 않아서, 괜사리 누이를 졸랐다. 과연 누이는 애같지 않게 눈치가 다르다. 곧장 고객새를 끄덕이더니 돌메기를 주워들었다.

“얼든 다녀오시어요. 오라바이 배 곯는 소리 다 들었슴무다.”

누이는 키득거리며 냇갈에 돌메기를 튕겼다. 강물이 꽤 얼어붙었음에도 한 서너번 정도 돌이 튀어 올랐다. 아까지 내 꼴에 비교하자니 남사시러워서 발걸음이 날세졌다. 하여튼 기지배가 야무진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바이는 또 딧골 아제들과 술판을 벌이러 가시었는지, 집에는 오마이 홀루다가 벼케서 밥을 짓고 계셨다. 아구리에서 나는 냄시가 더욱 허기를 돋우었다. 구운 생물고기를 찔게로 더하면 안성맞춤이겠거니, 하는 생각에 군침이 입에 막 고였다.

장롱 빼람 속을 뒤엎을 정도로 헤쳐도 낚숫대가 뵈이질 않더니, 문지방을 박차고 나오자마자 이놈의 낚숫대는 골방 바까테 벽에 고스란히 세워져있었다. 나는 날세게 이를 낚아챘다. 냇갈로 향하는 길이 흥겹기만 했다.

나주왁이 되었는지,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날짐성이 고을까지 내려오진 않을 터여도, 누이가 오밤에 홀루 있는 꼴이 영 탐탁치가 않았다. 요 앞 냇갈이니 망정이지. 아바이가 아셨더라면 호통을 치시고도 모자랄 판이었다.

“오라바이과 낚숫대 개와서! 고기는 좀 보이던?”

누이는 가지 있던 곳에 그대로 서있었다. 기지배가 이레데레 돌을 던져놓았는지, 냇물 곳곳에 구녕이 뚫려있었다.

“거 왜 대답이 없던? 사람 민망하게끔.”

기제서야 누이가 몸을 돌렸다. 얼글이 한껏 벌게진 누이는 곧장 눈물을 흘릴 기색이었다. 대관절 무슨 일인지 의문이 일었다.

“오라바이…저기에….저기에요…”

누이의 손구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이 쏠렸다. 냇갈 건너편 숲 속,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웬 길다란 기림자 하나가 곧게 뻗어있었다. 우두커니 서있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길구 명백히, 이 쪽을 보고 있었다.

“웬 도죽놈이냐!”

큰 소리를 내어봐도 저 놈의 인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솟구쳤다. 나는 누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길구는 정신없이 집으로 달렸다.

온 몸떼이에 식은땀을 철철 흘리며 집안 대문짝을 열어제끼고, 마침 귀가하신 아바이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더니, 아주 노발대발 하시며 집을 박차고 나가셨다.

나중에 오마이께서 말씀해주시길, 아바이는 마을 아재들을 불러 모아서 온 숲을 샅샅히 뒤졌다고 한다. 허나, 수상한 발자국이 널려있는 걸 빼고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고, 그마저도 도중에, 마치 영영 사라지기라도 한 것 마냥 끊어져 있었다고 그랬다.

아훕째 밤

“오라바이, 빨리 들어가시라요. 아바이가 노흐워하시믄 어쩌시려고 그려요.

기껏 대여섯살 먹은 누이가 바지 적삼을 움켜쥐고 놓아줄 생각을 않았다. 뎟니도 체 안빠진 어린 것 주제에 걱덩하는 꼬라지가 아니꼬와서 입을 열었다.

“도만한 간나가 주뎅이만 살아서는. 제 오라비가 지학을 넘긴 줄도 모르던? 일 없으니 가 퍼 자라.

더 씨불일 틈도 주지 않고 몸떼이를 돌렸다. 가지 벌게진 얼글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눈이 세차게 내리어서 기런 것이겠지, 하며 울음소릴 애써 무시했다. 신겅 쓰기에는 맘이 여의치 않았다. 차고 걸리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도 며칠 내내씩. 나주왁이나 되어서 바까테 나선 이유였다.

그 미치괭이는 분명히 아직 이 근방에 있다. 불과 어젯밤에도 나는 놈과 직접 마주했다. 잠결에 깨어나 뒷간에 가던 도중, 그건 틀림 없이 놈이었다. 놈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집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했다. 놈은 우리 집 주위를 맴돌고 있고, 그 의도는 불명이지만, 결코 좋은 쪽은 아니겠거니 싶었다. 기런 예감이 강하게 일었다.

집 언저리를 몇 바퀴 돌았더니 어느새 달이 희끗 보일 정도로 날이 기울어있었다. 이에도 아랑곳않고 눈은 끝없이 쏟아져내렸다. 덕분에 빌어먹게도 몸떼이가 시려왔다. 하는 수 없이 발을 돌렸다. 꽤 오랫동안 바까테서 싸돌아다녀봤지만, 놈은 커녕 놈의 기림자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놈이 기림자 그 자체일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슬쩍 머릿속을 지나쳤다. 정녕 그 놈이 사람이라면, 키가 오 척을 훌쩍 넘기는 작자가 이리도 쉬이 몸을 감출 리가 없었다. 기림자 도깨비, 어둑시니 이야기는 잠자리에서 오마이가 수도 없이 해주신 이야기였다.

물론 기럴 리가 없겠지. 어쩌면 놈이 떠났을 수도 있다. 도죽놈이라면 이런 시굴 촌구석에서는 털 물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나, 미치괭이라면 벌써 얼어 죽었거나. 최소한 지금만큼은 눈 코빼기도 뵈이질 않았다.

쌓인 눈더미 위로 발자국이 찍히는 모습을 보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뽀득거리는 소리가 제법 흥겨웠다. 기러던 때에, 몸에 닭살이 쫙 돋았다. 아직 채 밟지도 않은 곳에, 먼저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인외의 것이라 여겨질 정도로 거대한 발자국은, 정확히 집 쪽을 향하고 있었다.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모든 신겅이 단번에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저 뛰었다. 뛰고 또 뛰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내리는 눈은 멈추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더웠다.

집안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누군가 반강제로 열어제친 느낌이 왕성했다. 나는 안방 문을 세차게 밀었다. 오마이, 누이, 아바이. 가심이 위 아래로 수도 없이 쿵쾅거린 나머지 아플 지경이었다.

가족들은 막 잠에서 깬 듯 놀란 얼글들을 하고선 나를 올려다봤다. 놀란 가심이 이제야 좀 가라앉았다. 서서히 다리에 힘이 풀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참 요상스럽게도 몸떼이에서 땀냄시가 심하게 났다. 아바이가 무어라 말씀하셨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숨 쉬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베찼다. 냄시가 점점 심해진다. 눈 앞이 어두워진다.

열두째 밤

며칠 분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잠들 수 없었다. 절루 잠들 수 없었다. 놈은 집 안에 있다. 서성이는 것이 느껴진다. 놈의 냄시가 온 사방에 가득했다. 벼께서부터 뒷간, 골방까지 놈의 냄시가 얕게 새겨져 있었다. 지봉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번까지 통틀어 아훕 번째다. 아바이는 도죽놈은 꼬빼기도 뵈이질 않으니 쥐새끼들이 내는 소리 일거라 여겼다.

아니, 아니야. 저건 걸음 소리다. 놈이 지봉 위를 노니는 소리. 놈은 도죽놈이나 미치괭이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더한 것이다. 길구 그 놈은 우리를 노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억지로 팔뚝을 꼬집었다. 잠들 면 안된다. 절루 잠들면 안된다.

집 바까테 나서야겠다. 찬바람을 좀 쐬면 나아질 테지. 잠을 깨야만 한다. 천천히 문을 열어 제쳤다. 부모님과 누이는 깊게 자고 있었다.

바깥 공기가 유난히 싸늘했다. 이상야릇한 냄시가 바람을 타고 코로 흘러 들어왔다. 썩은 짐성에서나 날 법한 역겨운 악취, 놈의 냄시였다.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오래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곧장 알아챘다.

드디어 놈과 마주했다.

놈이 점점 다가온다.

놈은 기림자가 아니었다.

놈은 사람이 아니었다.

놈이 나를 덥쳤다.

눈을 떠보니, 눈을 뜰 수 없었다. 떠서는 안됐다. 짙은 후회가 가심을 달구었다. 얕궂게도, 오줌보가 터짐과 동시에 속서부터 구역질이 밀려 올라왔다. 차마 부모님을 뵐 수 없었다.

놈이 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일어서려는 찰나 반쯤 꺾인 다리에 고통이 엄습했다.

놈은 도깨비, 어찌 보아도 도깨비다. 도깨비였다. 헐벗은 육체에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도드라진 등뼈, 오 척을 훌쩍 넘기는 키,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흑색의 눈동자, 거무죽죽한 니빨이 나를 보고 웃었다. 놈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내 얼글로 손을 뻗었다. 놈의 얼글이 나와 맞닿았다.

도무지 비명이 나오질 않았다. 콜록거리는 소리가 한계였다. 놈이 내 혀를 깨물었고, 아프다. 너무 아프다. 혀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입에서 피분수가 쏟아진다. 차라리 죽고 싶다.

무서웁다. 놈보다도 다음에 일어날 일이 무서웁다. 널부러진 오마이 아바이가 당한 일이 무서웁다. 누이, 누이는 어디있지? 누이? 빌어먹게도 놈은 더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발톱에 가까운 손톱이 나를 벗겨낸다. 꺽꺽거리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눈물이 앞을 흐렸다. 고통스러웠다. 그 때 나는 뵐 수 있었다.

누이. 누이가 달아나고 있다. 나는 놈을 힘껏 깨물었다.


20세기의 백야사태
위치 연도 사태의 상세
평안남도
신양군
1948년 12월 25일 둘째 아이(여아, 6세)를 제외한 일가족 몰살. 부모 및 첫째의 시체는 집 마당에서 발견됨. 모든 시체는 혀를 포함한 대부분의 장기가 제거되어 있었고, 각 부위 별로 토막내어져 나무에 장식되었음. 이 장식에는 그 외에도 다수의 장기들이 포함됨. 첫째의 시체는 유독 훼손의 정도가 심했으며, 유일하게 모든 치아가 뽑혀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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