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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웨이 박사는 바쁜 와중에도 제이미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일을 동료에게 맡기고 제이미를 따로 불러냈다. 그리고 도어락을 조작해 작은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제이미에게도 익숙했다. 박사는 이곳을 자신의 임시 사무실로 정한 모양이었다.
“몸은 멀쩡한가 보군. 어떻게 된 일인진 들었지?”
제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지웨이 박사는 피곤에 지친 눈으로 방 한 구석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이미도 등받이 없는 의자를 끌어다가 그의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넌 그래도 한산할 때 온 거야. 두 시간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 앉아있는 건 상상도 못했을 거다.”
“일이 그렇게 많아요?”
“말도 마라. 혼돈의 반란 자식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갖다 팬 건지…….”
리지웨이 박사는 갑자기 몸을 앞으로 하며 한 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런데 네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복도에 엎어져 있던 게 습격이 끝나고 하루 뒤에서야 발견됐다. 캐버너가 널 업고 온 건 기억할지 어떨지 모르겠는데.”
“캐버너? 그 자식이 저를요?”
“그래, 네가 아는 그 캐버너가 맞다. 소령이 널 들쳐 업고 병원에 들이닥쳤을 때를 본 사람들은 그야말로 기적이 눈앞에 펼쳐지기라도 한 듯한 반응이었지.”
리지웨이는 어쩐지 못마땅한 듯한 얼굴이었다.
“말도 안돼요. 자기 전과만 생각하기 바쁠 녀석이……. 기지가 붕괴될 위험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곳을 자진해서 뛰어 들어갔다고요? 얼떨떨한데요.”
“당연히 말도 안 되지. 보나마나 구출 팀이 데려오고 있는 걸 중간에 받아서 혼자 다 해먹은 양 데려온 거야. 캐버너가 정말 널 구했을 거라고 생각하냐?”
“뭐…….”
제이미는 그 기적보다도 옅은 가능성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았다. 박사는 박수를 두어 번 치고 다시 의자에 몸을 묻으며 화제를 바꿨다.
“자, 자. 뒷담화는 그만 하고. 이 시점에 여기까지 굳이 찾아올 만한 이유는 따로 있겠지?”
“귀신같네요. 맞아요, 아이작에 대한 거에요.”
“아이작?”
“아저씨, 'TP'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박사는 한숨 같은 탄성을 질렀다.
“아…… 역시 그거였나……. 그것 때문에 아이작이 그 고생을 한 거라고?”
“알고 계세요?”
“그래,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넌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냐? 기밀 프로젝트였을 텐데.”
“데이터베이스 해킹이 먹혀들어갔어요. 그런데 아저씨는 그걸 어떻게 아세요?”
리지웨이는 피식 웃었다.
“그래, 너도 궁금하겠지? 일개 변두리 기지 의사 나부랭이가 재단의 기밀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있다니 기절초풍할 따름이지. 사실 나도 이런 식으로 밝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비록 공식적이지는 않았지만 난 그 프로젝트의 바람잡이 역할이었다. 무슨 연구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투자자들에게 그럴 듯한 내용을 꾸며내고 사업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지.”
제이미는 갑자기 리지웨이 박사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놀라워하면서도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고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프로젝트를 손에 넣기 위해서 혼돈의 반란이 아이작을 납치한 것 같아요. 이번 습격 이후로 아이작이 사라졌다는 얘기, 아저씨도 아시죠? TP에 대해서 조사해보면 뭔가 알 수 있을 지도 몰라요. 아는 걸 모두 말씀해주세요.”
리지웨이 박사는 다시 한숨을 쉬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타임 패러독스’. 그게 ‘TP’의 풀네임이다. 시간을 역행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기밀 프로젝트, 그러니까 말하자면 타임머신을 연구하는 사업이었지.”
제이미는 그 즉시 미래에서 왔다는 자신의 모습을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연구를 진행하는 팀의 필두는 애로우 부부─, 바로 네 부모님이셨다.”
“뭐라고요?”
“벌써 11년 전이군. 네 부모님들은 신출내기였지만 천재 과학자들이었어. 재단에서는 떠오르는 샛별과도 같은 존재였지. 그들이 단독으로 처음 맡게 된 프로젝트가 TP였는데, 나하고는 연구가 이 기지에서 진행되기로 결정된 이후 처음 만났다. 그 때도 여전히 상시 거주 의사였지만, 관리자 등급을 제외하고 기지 최고참이었던 나는-별 볼일 없는 기지라서 대부분의 직원들은 경력 좀 쌓고 일찌감치 빠졌어- 예외적으로 프로젝트에 대해 기초적인 정보를 통보받은 뒤 응급 요원 구실을 했지. 딱히 내가 할 일은 없었어, 애로우 부부는 신중했거든.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새 투자자들을 접선하고 응대하는 역할로 대체됐지. 바로 여기 B동에서 말이다.”
리지웨이는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방 안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하나 묻자. 이런 공간들이 기지에 왜 필요할까? 너도 예전부터 느꼈겠지만, B동은 다른 동들과 많이 달랐어. 보안이 그렇게 철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숨길 만한 비밀스러운 것도 없지. 왠만한 곳은 너도 다 출입할 수 있잖냐. SCP를 보관하지도 않고, 문서 자료실이나 그런 중요한 공간도 없다. 주거 시설도 거의 없다시피한 곳이고. 구성도 이상하지, 호텔처럼 중앙 로비에다 데스크도 있고 지금은 간이 병원으로 쓰고 있지만 원래라면 옆방도 커다란 탁자를 중앙에 떡하니 놓고 비즈니스 회의나 할 법한 공간으로 꾸며졌던 곳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봐라, 다른 건물에선 회의실 같은 중요한 방을 어디에 배치했는지. 적어도 이런 1층 외곽 끝자락 모퉁이는 아니었겠지. 여긴 정말로 숨겨진 부서 하나 없는 콘크리트 아파트에 불과해. 그럼 이 B동을 왜 만든 걸까? 하나 더 묻자. 너도 기억나겠지, 제이미? 기지를 밥 먹듯이 드나들던 어린 시절을.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그는 두 손을 무릎에 턱 소리 내며 갖다 붙였다. 제이미는 갑자기 이 익숙했던 공간에 대해 위화감이 들기 시작했다.
“여기 B동은 투자자들을 위한 응접실 같은 공간이라 민간인들도 꽤 자주 드나들 수 있었어. 그럴 듯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차피 보여주지도 않을 쓸 데 없는 공간들을 채우기 위해 칸을 마구 나눠서 방을 많이 만들었지. B동이 혼자 툭 떨어져있던 이유도 그거다. 덕분에 이번 습격에서는 피해가 적었지. 아이러니하지 않니? 타임 패러독스를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 타임 패러독스 때문에 일어난 사고에서 제일 적은 피해를 입다니…….”
제이미는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주변의 속사정에 대해 알게 되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어쨌든, 어느 날 애로우 부부의 친한 친구이자 잘나가는 갑부였던 투자자가 찾아왔다. 그래, 네 짐작대로 레인 부부였지. 비록 연구 내용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그들을 아낌없이 지원했어. 덕분에 연구는 빠르게 진행됐다. 실제로 시간 역행을 하는데 성공했다고 들었지만 사실인지는 나도 몰라. 분명한 건 연구는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었다는 거다.”
리지웨이 박사는 깍지를 끼고 제이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사고가 터졌다. 실험 도중에 뭐가 잘못됐는지 장치에 과부하가 걸려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지. 기묘한 폭발이었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무지막지한 충격파가 몰아쳤거든. 내 생에 그런 소리는 처음 들었다. 폭발 자체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지만, 그 충격파가 당시 피해의 80% 이상을 일으켰지. 그 때 네 부모님을 포함한 TP에 참가했던 모든 연구원들은 목숨을 잃었다. 때문에 원인도 규명하지 못했고, 더욱이 워낙 규모가 큰 사고였기 때문에 재단은 뒷수습만으로도 벅찼지. 이후 프로젝트는 영구적으로 폐쇄됐다.”
박사가 이마를 문질렀다. 제이미는 머리를 숙인 채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곱씹고 있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너도 알 거야. 그 날 우연히 찾아왔던 아이작이…… 후, 이걸 말할 필요는 없겠지. 졸지에 고아가 된 너는 레인 부부의 양자로 들어갔고.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입을 다물어서 진상 조사에서 빠졌어. 찝찝했거든. 질색이야, 기억 말소 같은 건. 애초에 내가 아는 게 없기도 했고 말이야. 물론 제대로 수사했다면 나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거라는 건 알 수 있었겠지만…… 조사 자체가 좀 설렁설렁했어. 그들도 주요 인물들은 모두 죽어버렸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 때 기지 관리자가 책임을 문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전출 당했으니, 이제 이 기지에서 TP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나 정도밖에 없을 거야.”
제이미는 연달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리지웨이는 모두 다 말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면 이제 분석할 시간이죠.”
“짚히는 거라도 있나보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글쎄, 우선 혼돈의 반란이 무엇을 원할 지를 알아내야겠죠. 제 생각에 놈들은 실험 데이터와 장치를 원할 것 같은데요.”
리지웨이 박사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군, 그렇겠지. 아직 그것들이 남아있을 진 모르겠지만. 당시 실험은 D동에서 진행됐어. 재단에서는 혹시 이 동결된 프로젝트를 다시 써먹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D동을 정리하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폐쇄시켰었지. 그 이후로 쭉 거긴 출입 금지 상태였어. 가끔 시찰 나오는 본부 일행이나 ‘청정 작업’ 어쩌고 하는 방독면 팀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렇다면 첩자 놈의 아지트는 D동에 있을 거예요. 아…… 아저씨, 혹시 말인데, 이 근처에 가장 가까운 기억 재생 장치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기억 재생 장치? 글쎄, 정확히 아는 건 아닌데, 모델이 여러 개야. 사실 시약 형태로 쓰는 것도 있는데 너무 비싸서 지금은 거의 안 쓰고, 보통이라면 레기온 팀에서 개발한 걸 쓰는데. 큰 건 방 하나만 한 것도 있고…….”
“휴대용도 있어요?”
“음, 솔직히 휴대는 힘들지만 운반이 가능한 건 있지. 기지에 보급용으로 돌리는 게 있긴 해.”
“바로 그거에요! 스파이의 계정으로 기억 재생 장치 보급 요청이 있는 걸 제가 봤어요. 그렇다면 그걸 D동으로 옮겼겠군요. 그렇게 되면…… 아이작도 D동에 있을 거예요! 뒤가 구리니 뭐든 빠르게 진행하고 싶을 거고 한꺼번에 처리하려면 시간 역행 장치가 있는 곳 근처에 아이작을 숨겨놓는 게 당연하겠죠, 게다가 폐쇄 구역이니 비교적 안전하기도 하고.”
리지웨이 박사는 인상을 팍 썼다.
“좀…… 막 나가는 추측 같긴 한데 묘하게 설득되는군.”
“그래요! D동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요?”
“글쎄…… 제이미, 네가 오기 직전까지 나도 아이작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봤다. 솔직히 혼돈의 반란 첩자 얘기가 나온 이후 TP는 진작에 떠올렸지만 그 가능성은 최대한 배제하고 싶었어. 사실 일이 이 지경까지 된 이후에도 방금 네 말을 듣고서야 확신을 가질 수 있었지. 내가 왜 그렇게 이 시나리오를 기피했는지 짐작할까 모르겠는데, 바로 첩자들 때문이었다. 첩자‘들’ 말이다, 제이미. 이 정도로 판을 크게 벌리는 데 한두 명일 리가 없잖니? 무엇을 행동하든 이 기지에 있는 한 노출의 부담이 너무 커. 무작정 D동으로 간다고 해도 우리가 따로 지원을 받을 형편은 아니지 않을까하는데 말이다. 우리끼리는 너무 위험할 것 같구나.”
박사는 고개를 저으며 비관적인 말을 뱉어 냈다. 당장에라도 그와 함께 움직일 기대를 하고 있던 제이미는 풀이 죽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나도 아이작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려봐라, 제이미. 때가 알아서 올 거다.”
“…….”
제이미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다시금 되새겨보며 아이작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가만히 앉아 있던 제이미는 불현듯 생각해낸 것을 박사에게 물었다.
“아저씨, 해킹할 때 본 건데, SCP-222는 뭐죠?”
“222? ‘복제인간 관’ 말이로군. 말 그대로 복제 인간 만드는 관이야.”
리지웨이는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한 듯 했지만 스스럼없이 답했다. 제이미는 다시금 미래에서 왔다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미래라고? 이렇게 다른 선택지가 드러났는데 녀석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야 없지.’
제이미는 자신이 기절한 사이의 6일 간의 공백을 SCP-222와 연결 짓는데 성공했다. 혼돈의 반란이 나를 복제했을까? 어쩌면 녀석은 단순히 펠릭스와의 불화를 조장하는 혼돈의 반란의 또 다른 수족일 지도 모른다……. 이쯤 되니 그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도움은커녕 당장 펠릭스를 어떻게 대해야할 지도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는 문득 자칭 미래의 사나이가 선물했다는 것이 궁금해졌다. 그의 선물을 확인하면 아군인지 적인지 판별할 수 있지 않을까?
“아저씨, 혹시 제가 맡긴 거 없어요?”
“아, 잊고 있었군. 저기 밑에 있다. 비품 창고에서 빼내오긴 했는데, 쓸 데 없이 모험하려는 생각은 버려라. 섣불리 행동하지 마. 우리가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어. 다시 강조하지만, 인내심을 가져라.”
리지웨이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이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네 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이 문제를 상의해볼 사람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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