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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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아래, 끝 없는 초록색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헬기 차창 밖을 바라보면 이불을 구겨놓은 듯 한 땅 위는 나무들로 가득해서 마치 털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이따금 산봉우리에 가까워지면 솔이 로터 바람에 떨리며 잎을 잔뜩 흩트려 놓았다. 그 아래 골짜기에는 사람들이 갈라놓은 땅 사이로 납작한 집들이 흩어져 있었다. 지나는 이 하나 없는 실길, 그 옆을 흐르는 개울만이 가끔 반짝였다. 이 풍경을 즐기기에는 헬기의 울음소리가 너무 거친 것 같았다.

" 잘도 이런 곳으로 날 보냈군. "

헬리콥터 뒷좌석의 그가 웅얼거렸다. 조종사에게 들릴 턱도 없었지만 내심 듣고 다시 기수를 돌려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소망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이곳 영양에 도착한 건 2시간 전, 그전까지는 이 동네는 중학교 지리부도 속에 세 글자로만 적혀 있었을 뿐 관심을 끈 적도 없을 뿐더러 와본 적도 없었다. 부산의 02K 기지에서 일하던 그는 이사관의 한 마디 말과 함께 이곳으로 떠나왔다. 거창하게 가져갈 것도 없이 당장 쓸 짐을 넣은 가방 하나만 가지고 가라는 말에 영문도 모른 채 표를 끊었다.

부산에서 대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그는 내가 왜 그곳으로 가고 있는지 생각했다.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대구에서 버스에 오른 그는 점점 산속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더더욱 영문을 모르게 되었다. 그는 02K 기지에서 해양 수치해석 모델링과 관련하여 프로그래밍을 전문으로 하는 연구원이었고, 최근에는 35K 기지와 협력하여 1105-KO 주변 해류에 대한 변칙성을 연구하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연구실에서 자판과 씨름하며 보낸 세월이 허무하게, 진행하던 수십만 줄의 코드를 뒤로 하고 단 한마디로 어딘가 모를 전출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처음 와본 영양의 인상도 별로 좋지 않았다. 다 쓰러져 가는 판자 같은 건물들로 둘러싸인 정류소를 콜로세움처럼 가게들이 둘러싸고 그 앞에는 뭔지 모를 물건더미가 있었다. 양복 차림에 가방 하나 들고 버스에서 내린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쉰쯤 되어 보이는 남성이 피우던 담배를 던져버리곤 다가왔다.

" 성 박사님이시니껴? "

예 그런데요 하고 그가 대답했다. 적당한 환영의 인사말과 함께 남자는 그를 차로 안내했다. 차라는 것은 트럭으로 뒤쪽에는 뭔지 모를 상자가 실려있었다. 얼핏 봐서는 이 사람이 뭘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알 수 없는 말씨와 함께 그는 이끌리고 있었다. 자신을 박 씨라 소개한 남자는 그를 트럭에 태우고, 다시 시골길을 달려 한 소방서로 향했다. 그곳에는 꽤 큰 헬기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박 씨가 입을 열었다.

" 기지까지는 좀 먼데 이 헬기를 타믄 한 20분이면 가니더. 먼길 오잇지만 쪼금만 더 고생하시소. "

뭔지 모를 말투를 뒤로 하고, 박 씨는 조종사와 트럭 짐칸의 짐을 내려 싣기 시작했다. 잘 보니 과자나 생활용품 같은 게 들어있었다. 짐도 다 실은 뒤에는 헬기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프로펠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는 조종석에 뛰어가 '가보레' 하고 한마디를 외치고 트럭을 타고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헬리콥터도 떠오르기 시작해 북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적응이 안 되는 첫 만남이었다.

산 위의 기지는 그다지 크지 않아 보였다. 산마루 약간 아래를 깎아 만든 기지에는 건물이 몇 채 없었다. 꽤 평평한 풀밭 위에 직사각형 건물이 몇 채 서 있고 그사이는 길이 잇고 있었다. 작은 운동장 같은 것도 보이고, 그 옆에는 착륙장이 있었다. 헬리콥터 날개바람에 풀들이 휘날리고, 보안 요원이 경광봉을 흔들면서 유도를 시작했다. 덜컹하는 느낌과 함께 기체가 땅에 닿자, 기다리고 있던 요원 두 명이 분주히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 성 박사님이시죠? "

그의 눈앞에 연구원 복장의 한 여성이 나타났다. 목에는 김아현이라고 쓰인 이름표가 걸려 있었다. 둘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연구원의 말을 들어보니 앞으로 성 박사와 함께 일하게 될 인물인 듯했다. 검은 머리를 꽁지로 묶고 안경을 쓴 그녀는 밝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 먼 길 오시하느냐고생하셨어요. 57K 기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아닙니다. 부산에서인데요 뭘 "

" 그래도 이 시골까지 오시는 게 힘들잖아요? 같은 경상도여도 남쪽 끝에서 여기까지 오신 거잖아요. "

" 뭐 그렇죠. 짐은 어디다 풀면 되나요? "

" 아, 지금 방이 배정되어 있을 거예요. 관사로 안내해 드릴게요. "

애초에 기지가 작기도 하지만, 관사는 착륙장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는 운동장을 지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나무 그늘 아래서 연구원 한 명이 하늘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조금 옆 구석에는 두 요원이 발로 축구공을 굴리고 있었다. 마치 한적한 공원에 나온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오후 2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점심시간도 지난 시간에 다들 여유로워 보인다고 생각한 그는 관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관사는 평범했다. 3층짜리 건물은 복도식으로 10개 정도의 방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고 그 중앙에는 작은 회의실 같은 방이 있었다. 그의 방은 207호였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에 화장실이 딸려 있고, 작은 주방과 냉장고가 있었다. 나름대로 배려가 있는 건지 주방과 방이 미닫이문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 외에는 침대, 책상, 옷장, 평범했다. 대충 가방을 던져놓은 다음 다시 밖으로 나온 그를 김 박사가 다시 안내하였다.

기지는 전체적으로 높은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가장 높은 건물은 둥그런 천체망원경이 있는 관측소 건물로 다른 건물은 관사보다 높은 건물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이 기지에서는 몇 명이나 일하고 있나요? "

" 글쎄요? 다른 기지보다 적긴 해요. 그래도 한 백 명은 넘을걸요? "

" 그런가요? 근데 그런 것 치고는 그렇게 건물이 많아 보이진 않네요? "

" 아 그건… 우리 기지는 겉보기에는 그렇게 크지 않거든요. 하지만 생각보다 엄청 큰 기지였어요. 원래는요. "

" 원래요? "

" 예전엔 더 컸다던데, 지금은 그렇게 크지 않아요. 그래서 오히려 더 좋죠. 나중에 천천히 알게 되실 거예요. "

김 연구원은 대충 얼버무렸다. 그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일단은 생각을 접어 두었다. 관사를 나오면서 보니 운동장은 아직도 여유로워 보였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그렇지, 저렇게 일이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그를 감쌌다.

" 어디보자… 식당은 저쪽으로 가시면 되고요. 생각보다 먹을 만해요! 사실 다른 먹을 것도 없지만요. "

" 확실히 그렇죠. "

그가 짧게 웃었다. 김 연구원도 웃으며 끄덕였다.

"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래요? 원래대로라면 감독관님도 만나보고 할 텐데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아마 당분간은 안 계실 것 같거든요. 당장 출근할 일도 없으니까 천천히 짐을 푸셔도 되고요. 아니면 기지라도 한번 둘러보실래요? "

" 글쎄요. 사실 쉬어도 딱히 할 게 없긴 하거든요. 그래서 일단 부서라도 들러볼까 했죠. "

" 와~ 열심이시네요. 그래도 제 추천은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일이 좀 있긴 하지만 아직 사무실 정리도 덜 끝나서 말이에요. "

" 뭐 정리할 게 많이 있나요? "

" 아뇨, 아뇨! 진짜 별거 없어요. 그냥 쉬셔도 괜찮으니 편한 대로 하세요. "

그는 결국 떠밀리듯 방에 들어왔다. 내일 마중까지 나와준다는 모양으로 생각보다 엄청난 환대라고 생각했다. 창문 밖으로는 키 작은 조경수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널찍한 창에 햇살은 잘 들 것 같았고 볕이 싫은 사람들을 위한 블라인드도 달려 있었다. 찬장을 열어 보니 냄비 같은 가재도구도 들어 있었고 공간도 제법 널찍했다. 그가 올려놓았던 가방을 아래에 내려놓고 침대에 몸을 눕히자 가볍게 튀어 올랐다. 마치 이불처럼 지금까지의 여정이 몸을 덮어서 금세 일어설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다음 날, 창밖의 새소리가 햇살에 실려 그를 깨웠다. 간단하게 준비하고 깔끔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관사를 나서자 김 연구원이 어제랑 비슷한 모습으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 좋은 아침이에요. 어젯밤은 안녕히 주무셨나요? "

" 뭐 그럭저럭이요. 너무 피곤해서 바로 자버렸네요. "

" 하하. 아침 식사는 하셨나요? "

" 아니요. 평소에도 하지 않는 편이라. "

" 아하. 그러면 바로 사무실로 가실까요? "

어제 보았던 운동장을 지나 관측소 아래의 3층짜리 건물로 향했다. 이 건물도 외관은 창문이 조금 작은 걸 빼면 관사와 비슷해 보였다. 출근 시간이라 그런지 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김 연구원은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었고, 그도 옆에서 약간은 어색한 인사를 보냈다.

김 연구원은 그를 복도 한구석으로 안내했다. 예측모델개발실이라고 방금 붙인 듯한 테이프가 표찰에 엉성하게 붙어있었고, 문 안쪽은 관사보다 좁아서 컴퓨터가 놓인 책상 두 자리에 한쪽 구석에 커다란 서버 같은 물건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 여기가 사무실인가 보죠? 자리가 2개뿐인가요? "

" 아 네… 사실은 그전까지는 이런 부서가 없었는데 이번에 신설한 거거든요. 성 박사님은 여기 실장님으로 오신 거예요! 명패도 만들어 봤답니다! "

가장 안쪽의 창문을 등진 책상의 앞쪽에 검은색 명패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02K 기지에서는 그냥 연구원이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승진이었지만, 그는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 자리가 2개인 건 제가 실장이고… "

" 네! 제가 아래에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 아… 뭐 그렇군요. 그래서 여기서는 정확히 무슨 일을 하게 되나요? "

" 아. 여기는 말이죠. 성 박사님이 02K 기지에서 했던 해류 시뮬레이션처럼 말이죠. 별의 움직임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들었어요. "

" 저기… 저는 천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말이죠. "

" 아 그건 괜찮아요. 저도 시뮬레이션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말이죠. "

" 네? "

" 그게 사실은… 제가 전공이 관측이라서 가상으로 시뮬레이션하는 코딩 같은 건 잘 모르거든요. 사실 여기에 저 혼자만 있었는데 도저히 안되겠어서… "

김 연구원은 웃고 있었지만, 그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아무리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툭 하고 떨궈질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의 굳은 얼굴을 보더니 연구원은 화제를 급하게 돌리며 일에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서 김 연구원의 결과물을 본 성 연구원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도저히 어떤 부분에서 작동하는지 모르겠는 코드들을 바라보자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김 연구원의 경우 아예 처음부터 가르쳐야 하는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였지만 이 프로젝트는 그냥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가 서류를 집어 들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이 프로젝트가… 기한이 언제까지죠? "

" 아 기한은… 여유가 있어요. 한 한 달 정도? "

" 이 부서에서는 이것만 담당하면 되나요? "

" 뭐 일단은 그렇긴 한데… "

" 그러면 일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네요. 관련된 자료를 좀 주실 수 있나요? "

" 아… 네! 알겠습니다. 바로 드릴게요. "

김 연구원은 자리로 달려가서 열심히 컴퓨터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한번 서류를 잘 살펴보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주일 이내로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건물 앞에는 연구원 몇 명이 산책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나를 보낸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환경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나의 미래를 찾을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이 기지에서의 일주일이 지났다. 돌아가야겠다.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단 보내진 이상 바로 돌아간다고 해도 명분이 없을 게 뻔했다. 정말 열심히 해서 내가 이곳에 있을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생활 환경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지금까지 나름대로 달려오던 그의 커리어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가 눈을 들어 앞쪽 책상의 김 연구원을 보았다. 김 연구원은 일을 못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배우는 것도 느리지 않고 금방금방 원하는 결과를 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일을 전력으로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5시쯤 되면 슬슬 일을 마무리 짓고 6시가 되면 같이 저녁 먹으러 안 가실래요 하고 성 박사에게 물었다. 아직 그는 일을 끝낼 생각이 없어서 글쎄요. 라고 말하면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다 하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곧 있어서 성 박사도 식당에서 밥을 대충 먹고는 다시 들어와서 일을 시작한다.

가끔 김 연구원은 여기서까지 그렇게 열 내서 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만, 이미 그는 스스로 다른 프로젝트를 몇 개 더 제안하고 상부의 승인을 받고 있었다. 김 연구원은 도와준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미 그 능력 범위를 넘어선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일을 혼자서 처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돌아간 한밤중에도 불을 켜놓은 채 일의 열중이었다.

모니터 속에서 빛나는 글자들이 전부 별이 되어갔다. 그러다가 아름다운 흐름이 될 때쯤이면 그의 업무가 끝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바로 다음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하늘의 별이 흘러가면서도 그는 별을 보지 않았다. 그렇게 한 두 달쯤 지나자, 몸은 어느새 익숙해 진 것 같았지만 상부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김 연구원은 점심시간이 되면 밖에 나가서 풀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하루는 성 박사가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때 길 한구석에서 풀을 바라보는 김 연구원을 보았다. 그는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 뭘 하고 있나요? "

" 아. 실장님. 꽃을 보고 있었어요. "

" 음… 그건 무슨 꽃인가요? 생긴 건 토끼풀 같은데 "

" 아, 이건 괭이밥이라는 풀이에요. 이렇게 노란 꽃이 피어요. "

" 아 그렇군요. 평소에 꽃을 보는 걸 좋아하나 보죠? "

" 네. 사실 천문학을 전공했지만, 하지만 꽃도 굉장히 좋아해요. "

" 그런가요? 뭔가 전혀 다른 것 같은데요. "

"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한번 앞을 보세요. "

성 연구원이 앞을 보자 평범한 풀밭이 쭉 펼쳐져 있었다.

" 그냥 평범한 풀밭 아닌가요? "

" 하지만 그냥 풀밭이 아니에요. 이 위에도 수많은 풀꽃이 피어있잖아요? 검은 밤하늘은 그냥 밤하늘 같아 보여도 사실 수많은 별이 빛나고 있죠.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무심코 지나가면 보이지 않아도 저마다 자신의 이름과 이야기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 그렇게 말하니 그렇게도 보이네요."

" 그렇죠 그리고 잘 보면 키가 비슷 비슷한 경우가 많아요. 물론 중간에 툭 튀어나온 경우도 있지만 보통 이런 지형에서는 바닥에 쭉 펼쳐진 경우가 많죠.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게 정말 소중한 것 같아요. "

성 연구원은 다시 풀밭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냥 초록색으로만 보이던 풀밭 위에 하얀 점이 콕콕 박혀 있는 것 같았다. 가끔 노란색이나 약간 푸른색의 꽃도 보였다.

" 그리고… 이 기지에는 특이한 풀이 있어요. 그건 숨겨진 보물이죠. "

" 음?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

" 아 그건… 아직 필 때가 안되었거든요 조금만 기다리면 보실 수 있을텐데 그때 말씀 드릴게요. "

김 연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면서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잠시 들판을 한번 더 바라본 뒤 김 연구원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향했다.


책상 위에 서류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의 모니터는 끊임없이 글자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의 손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밤 11시가 다가왔을 무렵, 하늘에는 달이 유난히 크게 빛나고 있었다. 문득 화장실에 가려고 의자를 돌린 그는 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 그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둥근 달이 구름 사이에서 이리저리 다른 곳을 비추고 있었다. 머리 속이 복잡했던 그는 산책이라도 해볼지 하는 마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아무도 없는 기지에서 밤바람이 산을 스치면서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가 사각거리며 들려오고 남색 하늘에는 별이 가득 찼다. 기지에는 가로등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별이 유난히 더 잘 보이는 것 같았다. 그가 주변을 슥 둘러보자, 저 멀리 들판 한가운데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 그림자에 다가가게 되었다. 무언가의 변칙 현상이 아닐까도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검은 생머리에서 달빛이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김 연구원인가? 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약간 더 길쭉한 느낌의, 약간 창백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 달빛에 이끌리셨나 보네요."

성 연구원은 흠칫 하고 놀랐다. 앞의 그림자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 요즘 매일 열심이던데, 지금도 작업 중이셨나요? "

" 네? 아 뭐…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

" 오늘 드디어 피기 시작했어요. "

발 앞에는 키가 작지만, 꽃잎이 커다란 노란색 꽃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 이 꽃말인가요? "

" 네. 아. 구름이 걷히고 있네요. 보세요. "

그가 고개를 들어 앞의 들판을 보자 구름 장막이 걷히면서 하늘에서 달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 순간 그 빛을 받아 수많은 노란 꽃이 빛나기 시작했다. 하늘의 별들과 땅의 꽃 빛이 겹쳐 보이며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알 수 없게 될 것만 같았다. 그 사이에서 사람은 형상이 어둡게 되며 마치 작은 나무 하나처럼 보였다.

" 어떤가요. 이런걸 볼 수 있다니. 야근하길 잘했지 않았나요? "

성 연구원은 옆에서 빙긋 웃는 그 사람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한 인상이었지만 곧바로 웅크리더니 무릎을 꿇고 꽃을 하나 매만지기 시작했다.

" 이 꽃은 영양복수꽃이라고 해요. 들어 본 적 없겠죠? 신기하게 이 기지 안에서 발견된 종이거든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꽃이죠. 그리고 연구원들이 말하길, 이렇게 넓게 퍼져서 자랄 수 있는 이유는 이 기지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래요. 다른 풀들은 들어오지 못하면서 나무도 없는… 그런 특수한 환경에서 이곳만의 무언가가 세워져 있는 거죠. "

성 연구원이 시선에 따라 발밑의 꽃을 바라보았다. 모두 같아 보이지만 얼핏 보면 모두 같은 것 같아 보여도 잘 보면 하나하나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았다. 세포 하나하나가 다시 이런저런 색을 만들어 내고, 그 색들이 다시 모여 이 꽃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시 그가 들판을 바라보자. 사람이 입을 열었다.

" 다른 곳에서는 나무에 가려 빛나는 줄 모르던 이런 소중한 꽃들이… 이곳에서 빛나게 하는 게 제 목표에요. 설사 다른 곳에서 가려졌더라도… 이곳에서는 마음 놓고 그저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하기만 하면 되는 거죠. "

" 그게 대체… "

" 성 연구원님.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오지 않으셨나요? 가끔은 쉬어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열심히 뻗지 않아도 당신은 충분히 빛나니까요… "

차마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렇게 웃으며 그 사람은 다시 달빛 속으로 사라졌다. 성 박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어제나 같은 모습으로 떠 있었다. 문득 그는 달이 움직이고 있다는 게 생각났다. 머리 위에 있던 달이 언제는 산 위에 앉아 있고, 언제는 나무 뒤로 사라진다. 하지만 달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세상 모든 것… 밤하늘에 저 가만히 있는 별조차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그들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리는 사람들에게는 그 움직임을 멋지게 보여준다. 그의 머리 속에서 그 별들이 휙 하고 달려 나가면서 모든 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는 당장 사무실로 달려가서 컴퓨터를 꺼버렸다.


어느 날 저녁,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주황빛이 사무실 안에 가득 찼다. 성 박사는 슬쩍 시계를 보았다. 그러자 김 연구원이 말했다.

" 성 실장님. 오늘 저녁엔 뭐 하실 건가요? "

" 글쎄요… 일단 저녁 먹고 천천히 산책하며 생각해 볼까 싶어요. "

" 산책 좋죠~ 저는 요즘 좀 피곤해서 들어가서 쉬려고요. "

"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한 거 아니에요? "

김 연구원이 웃으면서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했다. 예측모델개발실에 밤새 불이 들어와 있는 날은 이제 거의 없었다. 둘은 웃으면서 자리를 정리하고는 같이 저녁을 먹으러 향하기 시작했다.

" 맞다. 성 팀장님 이번에 27K 기지로 가실 수도 있다면서요? "

" 아. 지금보다 약간 높은 직책이었어요. 근데 거절했어요. "

" 네? 좋은 기회인 것 같은데 왜요? "

" 그건… 아시잖아요? 이곳이 얼마나 좋은지. "

김 연구원은 그 말을 듣고는 활짝 웃어 보였다. 본청 건물을 나서는 두 사람의 모습을 누군가가 창문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빛에 그 사람의 검은 장발이 빛나고 있었다. 목에는 시설이사관보라는 명찰이 빛나고 있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 드디어 자신의 꽃을 피우신 것 같네요. 성찬민 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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