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영)이 죽은 여름

감사했습니다.

저는 잠시 언니 오빠들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고민이 있어서 그래요. 제가 누구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면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소피아 언니가 그랬잖아요. 신은 힘이 센 거라고. 제가, 정말로 신이 된다면,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까봐 무서웠어요. 그리고 알고 싶었어요.

제가 신인지, 아니면 누구인지.

금방 돌아올게요.


소피아 미하일로브나 이바노브나(Mika)는,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심호흡을 했다. 탁자에 놓인 쪽지를 본 갈색 머리의 러시아계 여성은, 거의 패닉 직전이었다. 10살 아이가— 아니 사실 그보다도 어릴 아이가 가출했다. 범인은 운명이었다, 하고 여자의 등을 토닥이면서 최준섭(U)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찾으러 가자!" 소피아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더 늦기 전에…… 어서."

최준섭은 고개를 저었다. 소피아의 녹색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삶을 부정당한 사람처럼. 그러나 준섭 역시도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뱀의 손 맹원들로서, 그들은 옥리나 분서꾼보다도 잔인한 사건에 조우한 것이었다.

"그 애가 그렇게 결정한 이상……"

"헛소리 좀 하지 마!"

소피아가 준섭의 멱살을 덥석 잡았다. 준섭은 고개를 떨구었다. 여자는 그제서야, 냉기가 전신의 신경을 퍼져나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영은 가출했다. 어제 밤중에, 스스로 길을 열고 가출했다. 준섭은 부정하지 않았다.

아영의 육신이 고대신의 마술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손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점점 더 많은 도서관의 객들이 아영의 존재를 염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러브크래프트적일지도 모르는 여름신의 힘이, 도서관에 갑자기 내리꽂힌다는 것도 오판이 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고대신 유리카의 권능은 죽은 꿈의 도시 알라가다의 신들과 맞먹으리라는 것이 도서관 늙은이들의 총론이었다. 이미 아영의 심장부터 유리카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지만, 이미 아영을 돌보는 손의 맹원들은 가끔 어떤 기분을 느꼈다. 자신들이 폭탄이 설치된 테이블을 둘러 앉아 있다는 기분을.

"그 애가 길을 열었다면, 우리 중 아무도…"

"쫓아갈 수 없는 거 알아." 소피아는 숨을 내쉬었다. "그 애의 마법 재능을 아니까. 신의 힘이 들었으니까!"

"…몰랐어." 준섭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 정도로 혼란스러워했을 줄은… 몰랐지."

"나도. 그냥 애인 줄 알았어." 소피아는 읊조렸다. 나비와 나비 넥타이를 좋아하고, 약간 소심하고 겁이 많으면서도 세심하고, 섬세한 여자애. 그 모든 것이 기어드는 고대의 표상이었을까. "그런 줄 알았는데…"

"……아영이, 어디로 갔을까?"

"모르겠어. 진짜로."

소피아가 주위에 쳐 놓은 감시 결계 인발이 선명한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아영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여자는 사레 들린 기침을 했다. 고통스러운 숨을 토하면서, 소피아는 흐느꼈다. 신이라면, 멀리 가야 한다. 지구보다도 먼 곳으로. 옥리도 분서꾼도 눈을 부릅뜨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10살 꼬마라면 멀리 가서는 안 된다. 누구나 동의할 그 두 보편타당한 진리 속에서 손의 두 무력한 기적사는 익사하고 있었다.

"……지금 떠날 줄은 몰랐어."

"그러니까… 좀 더 컸을 때. 어른이 됐을 때는 몰라도."

"돌아올까?"

"그랬으면 좋겠네……"


어느 지구 너머의 섬. 길의 중심부. 거친 파도만이 사방에 보이는 암초의 날카론 바위 위에 아영은 앉아 있었다. 검은 파도가 삼라만상을 덮은 듯이 울부짖고 암초에 들이받았다. 쩌렁쩌렁 흐린 하늘 아래로 메아리치는 소리 속 홀로 남은 소녀는 웅크린 채 귀를 막고 있었다. 두려움 속에서, 주먹만한 심장만이 요동치고 있었다.

돌아가야 할까? 아영은 몇천 번을 되뇌었다. 그러나 몇천 하고도 한 번의 논리를 떠올려내 틀어막았다. 어느 날 방랑자의 도서관에서, 집에서, 좋아하는 사람들 곁에서 유리카의 힘이 폭발한다고 해 보자. 그런 참상을 견딜 수 있을까. 아마도 절대로 없을 것은 뻔했다. 머리를 푼 아영의 까만 머리칼이 바람결에 흐느꼈다. 무겁고 습기 찬 바람이었다.

아영은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가출의 길을 넘었다. 검은 점퍼 스커트에, 나비 넥타이는 세 개나 달았다. 머리는 묶지 못했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추억. 그러니까 바라건대 추억과 함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자신만이 혼자여도 회로를 돌릴 힘만은 남은 것이므로.

닷새 동안 아영은 두 차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들은 그렇게 말했다. 너는 자유로운 신이라고, 너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들의 신이라고. 아영은 모른다. 자신의 책무 자체를 모른다. 심지어 학생이었던 적도 없고 어른이었던 적도 없는데. 가혹한 미래 앞에 서 있다.

원해?

누군가가 속삭였다. 아영이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자신 스스로의 음성도 아니었다. 나비의 속삭임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거친 파랑의 포효를 뚫고 명백히 자신에게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영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왜 내가…"

몰라도 돼.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내 삶이잖아."

그래. 모든 게 네 삶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아영은 다시 귀를 틀어막았다. 심장 소리가 세차게 울렸다. 눈앞으로, 이름 모를 흰나비 하나가 스쳤다. 방금 그 말도 이 나비가 던진 화두인 것일까. 그렇다면 왜 나비들은 아영에게 그런 것을 들이미는 것일까. 잔인한 마음가짐이라고, 소녀는 눈물지었다. 파도가 울고 비가 쏟아진다. 아이는 그 중심에서 그저 미지근한 비에 젖는다.

누군가가 등을 토닥인다.

아영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빗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등에 따스한 온기를 전하면서, 너덜너덜한 우산으로 폭우를 막는다. 소녀는 눈을 비비고서 계속해서 감았다가, 뜬다. 그 사람은 가을에 말라가는 풀잎처럼 갈색인 코트를 입고 있었다. 눈을 감고 뜰 때마다 그 사람의 모습은 달랐다. 젊은 남자이기도 했고, 아영의 또래 남자아이기도 했으며, 키 크고 아름다운 여자였고, 죽어가는 노파였다.

그의 코트 자락에서는 꿈결 같은 검은 무늬가 일렁이고, 발길에서는 거미줄 같은 논리가 흩어졌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그 사람에겐 얼굴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얼굴의 존재째로 뜯어내어 버린 것처럼 공허한 모양만이 존재했다. 아영의 발 아래로 두어 마리의 거미가 가물거렸다.

"누구세요?"

"미안해. 이 말 외에는 못 하겠네."

아영은, "거미"의 말에 몸을 움츠렸다.

"난, 너에게 내릴 신의— 그러니까, 친구야."

"그럼…… 신이세요?"

"예전에는."

얼굴도 이목구비도 없었음에도, 소녀는 어쩐지 그 존재가 쓴웃음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슬픔과 자기혐오와 추억과 자기합리화라는 정보의 어떤 총체 같은 것이었다.

"네가 태어난 것도, 네게 나비의 신이 내리는 것도 모두 나 때문이니까……"

"……뭘 하셨는데요?"

"신을 실패하게 했거든. 그래서… 내가 신을…"

"거미"는 입을 닫았다. 아니,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영은 물었다.

"저를, 인간으로 돌려놓아 줄 수 있어요?"

"그건….. 내 능력 밖이야. 네가 결정할 문제거든."

"결정이라고요?"

"……신이 되고 나서 말이야. 그 힘을 간직할지, 다시 돌려놓을지는."

하늘에서 이제껏 없던 소리가 울렸다. 어둠을 누비는 뱀처럼 먹구름 사이에서 번개가 번뜩이고 있었다. "거미"와 아영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번개는 녹색으로 일렁였고 천둥은 야수가 울부짖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들은 이 기상이 보통의 뇌우가 아님을 깨달았다. "거미"는 착잡하다는 듯이 코트를 고쳐 입었다. 그 순간 그는 아영보다도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소년이 아영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미안해. 하필 내가… 지금… 곁에 있어서."

아영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번개의 과녁에서, 온 몸의 솜털이 쭈뼛 서고, 머리카락이 들려 올라갔다. "거미"의 손이 닿은 부분만은 아직 냉정했대도 소녀의 전신에서 열이 끓고 있었다. 소녀가 숨을 내쉬자 입김이 되었다. 구름이 푸르게 이글거렸다. 전뢰가 신화 속 용처럼 맴을 도는 새벽.

5일과 5주와 5달을 지나, 나비는 번데기를 찢고 날개를 펼쳐 우화하며, 꿈 속 여름의 제국을 부수고, 현실에서 날개를 말린다.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낙뢰가 아영을 덮쳤다. 거대한 밝은 녹색의 빛 기둥 속의 소녀는 소리조차도 내지 못한 채, 몸을 숙였다. 고통스럽지 않았다. 문제는 고통 외의 모든 감각이었다. 아영의 눈은 감기지 않고 심장은 멈추지 않으며, 마치 폭포를 담는 어느 물풍선처럼 육체의 열기와 운동은 폭발한다.

눈앞의 모든 것이 여름색이 된다. 녹색과 파랑색과 노란색으로 일그러진다. 시선 속의 파도도 깎아지른 기암괴석조차도 여름 바다와 같이 푸르고, 돛단배의 천과 같이 희고, 들풀의 숲처럼 푸르며, 무수한 나비의 시맥처럼 희며, 상록수와 활엽수의 피와 같이 푸르며, 송사리 떼의 춤 같이 희어진다. 아영은. 일어난다.

몸을 일으킨다. 멍하니, 본능적으로 걷기 시작하자, 번개의 빛이 그를 에워싸고 뒤따른다. 감각이 뒤죽박죽이며, 고작 발자국과 손짓도 번개의 속에서 미친 듯한 폭발이 된다. 그곳에서 생명이 깨어난다. 아영은 자신 곁에 선 무수한 생물들을 본다. 그리고 그것이 되는 상상이자 꿈이자 무아지경을 단 1초 안에 수십 종 체험한다. 아영은 한순간에,

꿈 속에서 잎을 갉아먹었다가 돌처럼 굳었다가 노란색 날개를 펼치고 꽃 위를 난다. 마비된 생물을 파먹었다가 예리한 침과 날개를 가진 채로 굴 속에서 빠져나와 부상한다. 느릅나무 그루터기에 붙어 여름의 노래를 부른다. 처마에 둥지를 짓고 칼깃과 검은 날개로 곡예 비행을 한다. 나무 그늘에서 스르르 기어나와 햇살을 쬐고, 수면 근처에서 은빛 비늘을 드러내고 헤엄치며, 웅덩이에서 피부를 습하게 하며 명랑하게 운다. 비가 퍼붓는 날 껍데기에서 나와 느릿하게 나아간다.

손발이 굳고 손가락으로부터 잎과 꽃이 피어, 꽃으로는 나비를 부르고 열매로는 새를 부르고 다리로는 지면의 물을 마신다. 들에 무수하게 피어서 여름 바람결에 휘말린다. 죽은 나무에 피어서 삿갓을 피우고서 포자를 흩는다. 햇볕 아래 담장 너머 좋아하는 아이를 보려고 까치발하고, 맴을 도는 잠자리에 잠자리채를 휘두르며 땀을 흘리고서 웃고, 바닷가의 모습을 보며 고뇌한다.

햇살이 되어 사바세계에 닿고, 폭우가 되어 모든 것을 쓸어가는 파란 파도와 합일했다가, 돌개바람이 되어 무성한 나뭇가지를 흔들며 울고, 기적이 되어서 그 모습을 빛내며 웃는다. 아영은 기적이 되었을 때 그 변형을 멈추어서, 제자리로 향하고, 다시 아영 본인의 정신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걷기 시작한다. 천천히, 끝까지. 회오리치는 아영의 생각은 사이오닉 파장이 되고 걷는 발길은 흄 준위를 끝없이 높이게 될 것이다.

아이는 해안까지 걷는다. 거미의 모습을 찾으려 두리번거렸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의 발자국을 뒤따라 황량한 바위땅에 여름의 마법이 내렸다. 꽃과 나무 묘목과 싹이 피어나고 나비와 벌과 모기의 무리가 태어나면서 아영을 뒤쫓았다. 아영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열병 속의 환자처럼, 꿈꾸는 아이처럼.

아영의 발길에서 태어난 생물들이 암초를 뒤덮는다. 커다란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가 자라고 주위로는 장미, 찔레, 제비꽃 무리와 수선화, 능소화 가지가 뻗고 꽃을 피웠다. 마치 신전의 화단처럼 붉고 노랗고 푸른 꽃들이 섬을 채우고 길을 닦았다. 나비떼가 날고 벌들이 꽃향기 속을 부유하며, 제비와 꾀꼬리와 어치가 울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아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영은 바다 위를 걸었다. 파도는 입을 다물고 가라앉으며, 소녀를 호위하는 두 무리의 녹색 벼락과 반응하여 끓었다가 짙은 안개를 만들었다. 물고기 떼가 깊은 곳에서부터 소용돌이쳤다. 꽃과 비옥한 흙이 해수면 위로 뻗쳐 길을 만들며 바다를 걷는 신성을 뒤따랐다. 번개의 빛이 녹색 가루가 되어 소녀의 머리 뒤에 원형의 광배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아영 본인은,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다. 심장이 태양 같은 열기로 마법의 피를 짜내고, 의지대로 현실을 뒤틀고, 유리카가 그 육신을 매개하여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봄과 여름과 가을의 빛이 합해지며, 몸은 침묵하고 있다. 그런 무아몽중의 지경에, 환상이 그의 앞에 선다. 꽃을 든 자신이다.

거울상처럼 두 소녀가 마주보았다. 그제서야 아영은 그 소녀가 누구인지 깨닫는다. 아영과는 달리 꽃물이 든 하얀 옷과, 약간 녹색의 눈동자.

안녕. 아영.

"네가… 유리카지?"

그 소녀는 아영이기도 했다. 여름의 대홍수와 뜨거운 햇빛과 가뭄이기도 했다. 꽃피는 들이요 새 우는 하늘이기도 했다. 어머니이자 언니이자 요람이자 묘비였다. 오천 개의 날개가 달린 나비였다. 끔찍한 촉수를 뻗은 신이었다. 회전하는 이빨이었다.

그래. 난, 이제 너야.

"코트를 입은 사람이 너야?"

아니. 그건… 내가 아니야. 너도 아니야. 신도 아니지. 여름은 더욱 아니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세상을 무너뜨릴래? 구원자가 될래? 아니면, 죽은 문명이라도 살리자.

"모르겠어."

아영은 앞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뒤에는 번개의 빛이 미친 듯 일렁이며 날개와 뿌리와 잎의 복잡한 시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유리카는 싱긋 웃었다. 그리곤 아영에게 다정히 다가서서, 어깨를 감싸고 오른손을 쓰다듬으면서 상냥한 말투로 흉악한 뜻을 들이민다.

깨어난 걸 축하해. 나의 아이야. 나야. 유리카야.

아영이 얼떨결에 쥔 오른손의 주먹에, 휘몰아치는 녹색 분진이 모였다. 번개를 타고 공기를 타고 모인 고운 가루가 아영의 검지손가락 끝에 빛처럼 모인다. 손가락 총을 만든 소녀의 가느다란 손끝의 혈관에도 끓어오르는 마술이 모였다. 그 순간 그 손끝이 모든 여름의 향할 곳이 되어 손가락 총의 방아쇠가 폭발하고 거대한 섬광은 대포도, 번개도 능가하는 충격으로 거대한 녹색광을 일으켜, 하늘로 치솟는다.

먹구름도 바람도, 비도 파괴하고 심지어는 세상 그 자체조차도 궤뚫은 거대한 충격은 하늘을 산산히 부수어 공중에 거대한 형광색 오로라를 가득 칠한다. 아영은 약간 당황하고, 약간 일그러진 표정으로 귀밑머리를 휘날린다. 미친 듯이 머리카락은 춤을 추었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던지 세상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아영의 곁에 있던 분신은 간 곳이 없었다.

소녀는 다시 안개와 분진을 헤치고 나아간다. 여름의 그늘에서 봄의 피가 무수히 태어났다. 그네들은 노란 날개를 펼치고 소녀의 곁에 사정없이 내려앉아 제 주인에게로 귀향하였다. 아영의 작은 몸이 빛으로 가득 찼다. 눈을 내려감은 소녀의 몸에 돌아온 피는 머리카락이 된다. 심장이 된다. 뼈와 살이 된다. 피가 된다. 날개치는 나비들로 인하여. 어린아이는 간 곳이 없다.

빛을 뚫고 나아오는 것은, 어른이 된 아영이다.

키도 몸도 10대 후반 정도로는 자라서, 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자. 옷은 이제 반짝이는 검은 제비나비와 흰 모시나비의 날개 비늘로 구성되고, 녹색 광개가 금환일식의 빛처럼 머리 뒤에 떠 있었다. 아영은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모든 것이 보인다. 그리고 다시 먼 곳으로 나아갔다.

고대신 유리카 부활, 당일.


만나 자선재단 의료연구실. 한 무리의 세계 오컬트 타격조 대원들이 사주경계하며 특정 물품들을 압류 박스에 담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자선재단 봉사자들의 중심에서 이미 한장 소각이 이루어지는 약물도 있었다. 제8008타격조 "요정향의 폭풍"은 하나같이 찡그린 표정으로 보고를 듣고 있었다.

문제가 되는 약물이 엄청난 위험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으나, 약 5분 전 전지구적으로 희미한 사이오닉 파동이 발생했다. 연합 측은 이미 엑스-마키나급 개체와 그 약물의 상관관계를 눈치챈 터였기에 빠른 반응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타격조장 류다스 시모니테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대한, 엑스-마키나의 파동. 그러나 그 지점은 불명확했다. 마치 사라졌으나 그 잔상에서라도 발생하는 듯이. 그 파장은 인류 전체에 유해하지는 않은 듯 보였으나, 여러 복수의 초상위협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영향받은 존재는, 초상세계 각지에서 초상기술로서 사용되던 것들이었다. 비록 그 전반적 특성을 연구하던 제약회사 원 라스트 크라이가 1980년대 완파된 후로는 드물어졌다곤 하지만. 류다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면, 원 라스트 크라이가 파괴된 이유는……

류다스 시모니테는 몸을 떨었다.


제09K기지, SCP-408-KO를 연구하던 김다희 연구원은 이 기지를 떠나기 전 마지막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408-KO는 아파트 지하의 거울상 차원으로, 그곳에서 사망한 동물이나 떨어져 나간 조직은 같은 질량의 나비떼로 변하는 공간이었다. 거의 5년 동안 408-KO의 변칙성은 달라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지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단지 상처를 입으면 안 된다는 점과, 탈수 증상이 가속화된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이온음료 정도로 10분 정도의 짧은 작업은 너끈히 버틸 수 있었다. 비록 408-KO 내에서 거대한 사건들이 일어났다곤 하지만.

김다희 연구원은 언제나처럼 외부차원 내의 온습도와 흄 준위를 재고 있었다. 여름의 온습도와 거의 같은 그 공간은 온도 역시 항상 같았다. 김다희는 온도를 잰 후, 천천히 칸트 계수기에 손을 돌렸다. 계수기는 조용히 진동하고 있었다. 여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현실성이 뒤틀리고 있다. 흄 준위가 상승하고 있었다.

김다희는 비상 버튼을 누르고, 아파트 건물 내에서 신속히 뛰쳐나왔다. 아키바 방사선이 기하급수적으로 치솟고 408-KO의 깊은 지하가 메아리쳤다. 나비떼가 다시 합쳐지고 뒤섞여, 본래 모습대로 돌아갔다. 무수한 손과 발이 여름의 아파트에서 기어올랐다.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는. 다시.

그들은 변칙의 파묻힌 무덤에서 왔다. 하늘의 연약한 아이들의 피에게서 왔고, 잔인무도한 여름의 묘비에서 왔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살아 돌아왔다. 아파트 난간의 끝에서 한 무리의 꼬리명주나비 떼가 날아들었다. 나비들은 마치 아주 오래된, 그들의 근원인 "봄의 피"처럼 본모습으로 돌아갔다.

408-KO 사건의 피해자이자, 거울상의 죽은 자. 한 소년이 몸을 웅크리고 계단에 누운 채 깨어났다. 소년은 오랫동안 여름에 대한 꿈을 꾸었다. 날개치는 무수한 나비들 사이로 비추이는 햇살을 조용하게 바라보면서.

한 소녀가 생각났다.


해원읍의 어느 풀숲. 도세화 인턴은 땀을 흘리며 그늘진 풀숲을 걸었다. 장화와 팔토시를 쓰고 잠자리채를 든 그는 변칙적인 곤충들을 한창 잡고 있었다. 해원읍의 생태는 변칙적인 생물들의 보고였으므로 곤충학부의 주 활동지대이기도 했다.

세화의 곁에서는 등나무 꽃잎이 떨어졌다. 그 꽃잎을 세화는 흰 손으로 받아들었다. 이 계절에는 피지 않는 꽃이었고, 주위엔 자신 뿐이었다. "꽃님"의 언어로 사랑에 취한다느니, 결속이라느니 하는 꽃이었다. 누가 자신에게 이런 꽃을 보내었을까?

그 해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내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보랏빛 꽃들이 하늘하늘 비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어떤 빛의 소나기처럼 아름답고 꿈결처럼 고왔다. 도세화는 찬란한 이상현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위로는 무수한 구름이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어느 멋진 봄날. 혹은 여름날.

해원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때아닌 라일락이 피었다. 보라색 꽃들의 향이 무수한 길목마다 깃들 정도의 개화였다. 해원분소의 재단 인원들에게는 난리통의 길목이었지만, 한낮의 떡갈나무 유랑극단의 음악가들은 저마다 악기를 빼어 들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너를 기다려. 여기에서.


심야클럽 회실. 꼭 어느 사이 좋은 오누이처럼, 유령 남자의 무릎을 베고 갈색 머리 소녀가 누워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검의 소녀 나라시는 멀리서 몰아치는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언젠가 자신에게 새겨져 있던 신적인 힘과 같았다. 나라시는 남자의 소매를 끌었다.

"서라원."

"네에?"

"안 느껴져?"

"뭐가요?"

"누군가가 돌아오고 있어. 이 세상으로."


앤더슨 로보틱스의 총의는 입을 닫았다. 더는 이 일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었다. 인간 그 이상. 그들 모두가 동의했으니.


최후: 제07K기지.

SCP-818-KO 출신 D계급들은 변함없었다. 청소를 하고, 격리실을 정돈하며, 살인 괴물에게 잡아먹혔다. 공간변칙 내에서 갈기갈기 찢겼다. 오렌지색 점프수트를 입은 그들은 변함없이 생각하지 않거나, 유순하고 순종적이었다. 맡은 바를 묵묵히 수행했으며 줄어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훌륭한 자산이었다. 변치 않는 채로 제07K기지에서 어려운 업무를 수행해냈다. 괴물을 먹이고 실험 부록을 채웠다. 그들의 유용함만은 그리고 온순함만큼은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재단은 그들만 보고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아닌지 알지도 못했다. 아마도 영원무궁히 알지도 못할 것이었고, 알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D계급들은 머지않아 비밀스러운 변화를 제각기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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