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

1. 개요

흥미로운 자료군요. 이 자의 이름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루핀? 풀네임은? 흠……. 세례명은 혹시 있습니까? ……아! 네메시오, 네메시아누스,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네메시스라…… 아무래도 우리가 찾던 자가 맞는 것 같군요. 물론 다른 쪽에 대한 가능성도 아직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만. 우선 이 자의 신변을 철저히 확보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보호해야 합니다. 약간의 위험이라도 예상되는 지점에는 절대로 파견하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접속 제한을 걸어두는 편이 낫겠습니다. 물론 유심히 관찰해야겠지요.

 
2. 본문: XL 가상 시나리오 #2

(4) 격리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죽음은 그가 미리 알고 있는 죽음이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그림과 재단의 주요 인력들은 ██████ ██ 지역에 출몰한 대규모의 SCP-023 무리들을 막아내고 펜리르의 봉인을 보강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났다. 그러나 SCP-023들은 이미 수백 명의 민간인들에게 노출된 상태였으며, SCP의 '시간차 살해' 능력으로 인한 2차적 피해는 애초에 손쓸 도리가 전혀 없었다. 더욱이 절망스럽게도 이들 무리는 어떤 지체도 없이 서쪽을 향해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재단에게는 펜리르의 봉인 역시 시급한 문제였지만 결과적으로 펜리르가 위치한 '농가'에는 최소한의 인력만이 배치되었고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모스크바로 향하는 마견들을 뒤쫓아 격리·말소시키기로 결정되었다. 말하자면, 펜리르 주변은 습격에 매우 취약했다는 것이다.

██████ ██, ██-██에서 녹취 기록: ██&████

그림: 오랜만이군. 그렇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겠지? 박사, 요원들에게 집 주위를 3m 반경으로 둘러싸고 밖에서 들어오려고 하는 어떤 녀석이든 쏴버리라고 지시하시오.

앨버트 박사: 알겠어요. (무전기로 지시를 내린다) 그런데 무엇으로 봉인을 보강하려고 하시죠?

그림: 말해도 될지 모르겠군. 흠, 뭐 일단 이건 임시방편이니까 상관없으려나? 소재는 숫자요.

앨버트 박사: 숫자요?

그림: 숫자는 비록 우리가 실재하는 듯이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잖소. (손가락을 하나 펴 보이며) 이건 '하나'라고 표현되지만, 실제로는 집게손가락만 달랑 들어올려져 있는 것뿐이오.

앨버트 박사: 그렇군요.

그림: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시간이지. 봉인의 소재를 완전히 바꿔놓으려면 하룻밤이 필요한데, 그때까지 늑대 놈이 참아줄지 모르겠군. 이게 성공하기만 한다면 차차 시간을 두고 실현 가능성이 더 적은…… 더 나은 소재를 찾아낼 수 있을 거요. 지금 봤을 때 확실한 건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지난번 그…… 하여튼 동화 내용이 한 번만이라도 더 현실화된다면 봉인이 정말로 깨져버린단 겁니다.

앨버트 박사: 이 근방은 완전히 격리됐어요. 괜찮을 겁니다.

그림: 그렇길 바라야겠지.

한편 루핀 박사는 SCP-19██에 대한 다툼으로 흥분이 극에 달해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했으나, SCP-023 집단 출현 사건이 일어난 관계로 다른 조치를 취할 새도 없이 주요 인력이 기지 내에서 대부분 빠져나가게 되면서 제17기지에 강제로 구금되었다. 이후 그는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D계급 인원들에게 일종의 강박 관념과 같은 죄책감을 느끼고 그들에게 지속적인 접촉을 시도하려고 했다. 이는 동행·보호 관찰 중인 보안 요원들에게 모두 제지되었으며 그는 결국 '보호 대상' 1호로 지정되었다.

제17기지 보안 기록(██.██.████)

루핀 박사: (의자에 앉으며) 언제까지 따라다닐 셈인가?

XX G. XXX: 죄송합니다, 박사님. 박사님을 시야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루핀 박사: (고개를 돌리며) 흥, 화장실까지 따라들어올 생각이로군.

XX G. XXX: 그 부분까지는 용인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지정된 곳만 이용하셔야 합니다.

루핀 박사: 보나 마나, 탈출할 구멍이 전혀 없는, 통신 기구를 휴대해서는 안되는, 그런─

XX G. XXX: 맞습니다.

루핀 박사: (다시 뒤를 돌아보며) 빌어처먹을. 내가 컴퓨터에 쓰는 것도 일일이 감시할 텐가?

XX G. XXX: 인터넷 연결이 가능한 전자 기기는 모두 실시간으로 검열되어야 합니다.

루핀 박사: 그것도 명령인가?

XX G. XXX: 원칙이 그렇습니다.

루핀 박사: 엿이나 처먹으라지. (벌떡 일어나서 서랍 속에 있는 가위를 꺼낸다)

XX G. XXX: 지금 당장 그것 내려놓으십시오.

루핀 박사: (상대방을 뻔히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린다) 뭐야, 왜 그러나? 정신병자라도 만난 것처럼.

XX G. XXX: (권총을 꺼내며) 무장 해제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발포하겠습니다.

루핀 박사: '무장 해제'? (발작적인 웃음) 개그맨 해도 되겠어. (컴퓨터 쪽으로 다시 돌아서서는 바닥에 앉아 연결 케이블을 자르고 가위를 집어던진다) 똑똑히 봤겠지. 이제 됐나? 난 이제 이 기지 폐쇄 회로를 이용해서 데이터베이스만 붙들고 있을 거야. 내 뒤에서 당장 꺼지게.

XX G. XXX: 정면 3m 거리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루핀 박사: 고맙군.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 ██, ███: ███(███)

(노이즈) 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개미 떼처럼 몰려가고 있어요! (총소리) 이대로 간다면 2시간 이내에 시가지에 도착할 겁니다! (노이즈) 발포 중입니다만 신경을 전혀…… (괴성) 아니, 잠깐, 놈들이 나눠집니다! (총소리 계속) 일부는 계속 이동하고 나머지는 죄다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더 심각해졌군요. 이렇게 되면 절대 못 막을 겁니다. 지금 당장 지원이 필요합니다. 지금…… 뒤, 뒤다! 뒤에서 달려들고 있어, 델타-9-0-5!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 델타-9-0-5! 델타-(으르렁거림)아─(노이즈)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격리는 불가능했다. 이미 미디어에서는 사건에 대한 보도가 한창이었고, 현장 상공에는 리포터가 중계하고 있을 언론사 헬기들이 넘쳐났다. 러시아 정부의 경찰·군부대가 파견되었고 재단의 기동 부대와 충돌하면서 지휘와 통제에 혼선이 빚어졌다. 부대원 중 일부는 그들에게 사살당하기까지 했다. 정보원들이 알리길 이미 세계 오컬트 연합과 연방수사국 특이사건수사대가 행동을 개시했고, 심지어 이례적으로 혼돈의 반란까지 SCP-023들을 죽이기 위해 자신들을 노출시켰다.

이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펜리르의 봉인이 더욱 중요한 사안이었다는 것을 뜻했다. 봉인이 풀린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 ██, ██-██에서 녹취 기록: ██&████

그림: (펜리르의 옷에 무언가를 쓰다가 갑자기 일어선다) 제길, 이러면 안 되는데.

앨버트 박사: 무슨 일입니까?

그림: 놈들이 왔어.

앨버트 박사: 누구…… 혹시 그 늑대들?

그림: 빌어먹을, 스콜들이오.

앨버트 박사: 스콜? 태양을 뒤쫓다가 결국은 잡아서 갈가리 찢어버리고 만다는 신화 속의 그 녀석 말입니까?

그림: 그래, 잘 알고 있군. 이놈들은 주행성이지. 그러니 밤까지만 버틴다면…… 아냐, 그렇다면 밤에는 하티로 교체될 가능성이 더 클 거요, 제기랄! 펜리르가 모든 늑대들의 아버지라는 게 일을 이렇게 전개시킨다니……. 어쩔 수 없군.(품에서 종이쪽지를 꺼낸다) 여기, 이 공식들을 펜리르 주변에 빼곡히 써넣으시오. 늑대 형상을 한 함수식이니 당분간은 봉인을 유지해줄 거요. 나는 밖에서 당신 친구들과 함께 잔챙이들을 막지. 여백 하나 남기지 말고 꼼꼼히, 틀리면 안 되오.

앨버트 박사: 알…… 았어요.

제17기지에 구금된 루핀 박사는 재단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목적은 D계급 인원의 목록표였던 것으로 보이나 우리가 알기로 그에게는 접속 권한이 없었으니 따로 돌발 행동에 대한 대비를 할 필요는 없었다. 재단 측은 그를 계속 지켜보면서 다만 펜리르가 완전히 봉인되면 SCP-19██의 출현 또한 멈추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의 가치를 지켜낼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제17기지 보안 기록(██.██.████)

루핀 박사: 인원 목록은 어느 항목에 있나?

[신원불명]: (쳐다보지도 않고) ██-█ 7번 열.

루핀 박사: 아니, 연구원 목록 말고! D계급 인원 목록이 필요하네.

[신원불명]: (고개를 여전히 돌린 채) D계급? 미안하네만 난 잘 모르네. 애초에 그런 목록이 있기는 할지 모르겠네만.

루핀 박사: (혼잣말) 빌어먹을……. 이대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건가……?

[신원불명]: 가만, B구역 자료실 컴퓨터에는 그런 게 있을지도 몰라.

루핀 박사: 어디?

[신원불명]: (모니터에 비친 루핀 뒤편의 보안요원들을 불편하게 바라보며) B-33-O███. 확실하진 않아.

루핀 박사: 고맙네. (달려감)

XX G. XXX: (툴툴거리며 달려감) 젠장, 밥도 안 먹은 사람이 뭐 저렇게 빨라?

SCP-023의 무리는 계속해서 이동했다. 엄청난 물량 공세에 재단의 기동 부대 셋이 전멸했고 러시아 정부는 다른 국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마셜, 카터 & 다크 유한회사가 보유 중이라고 알려진 SCP가 SCP-023들을 향해 사용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부서진 신의 교단이 '신의 분노'를 잠재울 것을 요구하며 어떠한 방식으로 추적했는지 불분명한 동선을 통해 SCP-271을 소유 중인 제██봉쇄 기지를 공격했다. 재단 측은 이곳에 다시 기동 부대를 급파함과 동시에 SCP-023을 막기 위한 추가적인 지원 부대를 편성했다.

알베르토 박사의 증언

악몽이었지. 내 일을 마치고 그곳에 가게 됐을 때 피난민들의 눈을 봤소. 그 개인지 늑대인지 하는 놈들을 본 눈을. 희망을 잃었더군. 본능인진 모르겠지만 그 녀석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느끼고 있었던 거야. 나중에 보니, 들개 놈들은 멀리 프랑스까지 이동했더군. 그래, 들개라고 하지. 됐지? 뉴스에서는 종말이라고 떠들어대고, 유럽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지. 체코는 나라 자체가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어. 아, 프라하는 정말 아름다웠을 텐데. 난 거기 갈 기회를 영영 놓쳤지. 아쉽지? 아냐? 말도 안 돼, 거기가 얼마나 멋있는 곳인데. 넌 가봤다고? 언제? 젠장. 나만 못 봤군.

진압을 시도하고 있는 재단 측 행동 부대들에게 SCP-023의 '시간차 살해' 능력에 대해서는 통보할 수 없었다. 괴수 무리들이 실제로 SCP-023과 동일한지조차 알 수 없었으며(외형적인 묘사는 완전히 일치했지만) 무엇보다도 이를 밝혔을 때 부대원들이 진압 활동에서 탈주하지 않을지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SCP-023에 대해 알고 있는 연구원들도 임시방편으로 파견되었으나 대부분은 이동 과정에서 연락이 두절되었다. 만약 그들이 SCP-023이 맞다면, 1년 뒤에 일어날 일은 그저 재앙이었다.

███████, ███: ████(██████)

브라이트 박사: (눈을 가늘게 뜨고) 무지하게 많군.

클레프 박사: (고개를 숙이고 총을 만지작거리며) 그래, 무지하게.

브라이트 박사: 저 녀석 눈을 봤을 때 내가 죽을 확률은 몇 퍼센트쯤 될까?

브라이트 박사: (크게 웃으며) 제로에 이백 개. (무전기에 대고) 행동 개시. 각자 파트너의 생존 여부에 내기를 걸도록. 성공적으로 살아돌아온다면 자기가 직접 쏴 죽이는 거 잊지 말고. (킬킬거리면서 액셀러레이터를 바닥까지 밟는다)

클레프 박사: (총을 쓰다듬으며) 자네는 알토 음자리표의 몫이야.

브라이트 박사: 유전자가 내게 속삭이는 말이 들리는군. 자네가 그전에 죽을 거라는데?

클레프 박사: (오랑우탄 흉내) 욱, 우욱, 익, 익─

브라이트 박사: (웃음을 터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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