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돌아보며

끼익 하는 소리에 움찔하며 잠에서 깼다. 온 몸이 찌뿌둥하고 피로감이 남아있는 걸 보니 악몽이라도 꾼 듯 했다. 방금 내가 졸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일하는 척을 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괜히 머쓱해하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후 8시 반. 내가 분명 책상에 앉아 시계를 봤을 때가 6시 쯔음 이었고 그 뒤로는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적어도 2시간 이상은 이렇게 엎드린 채 잠에 들은 듯 했다. 무려 2시간 씩이나 책상에 엎드려 졸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깨우지 않았다는 것에 의문이 들었으나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거 하나하나 신경쓰면 괜히 머리만 아파지니까.

나는 텅 빈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보통 이 시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다들 어디론가 가버린 듯 했다.

달력을 쳐다봤다. 2023년 8월 31일. 천문력에 따르면 오늘은 달이 크게 보이는 슈퍼문 현상과, 한 달에 보름달이 두 번 뜨는 블루문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는, 그러니까 슈퍼 블루문이 뜨는 날이었다. 고개를 돌려 창문 바깥을 바라봤다. 다른 건물에 가려져 아쉽게도 달은 보이지 않았다. 기지 밖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듯 했다. 다들 슈퍼 블루문을 직접 눈으로 관찰하기 위해 기지 밖으로 나와 밤하늘과 달을 보고 있었기에, 이렇게 기지가 한산했던 거였다.

잠도 좀 깰 겸 종이컵에 얼음 물을 가득 담아 마시며 사무실 밖으로 나와 기지 복도를 걸었다. 차디 찬 얼음 물을 한모금 한모금 할 때마다 짜릿한 느낌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몸 전체에 퍼져 피곤함은 금세 잊혀지는 기분이다.

나는 이 방법을 애용한다. 아무리 피곤해도 얼음과 물 한 컵이면 졸린 정신을 번쩍 깨워줘 금방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을 줘 자주 얼음 물을 마시곤 한다. 이번엔 얼음 하나를 입에 넣어 어금니로 까드득 씹었다. 차디찬 얼음의 냉기가 입 안을 가득 채워 상쾌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목적 없이 기지를 관찰하며 계속 걸었다.

한산한 기지 복도를 하염없이 걷다가 복도 모서리에 덩그러니 놓여진 나무 묘목 화분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방금 그 화분을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 화분이 꽤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이전에 한 번 봤었던 것 마냥.

그 화분을 바라보다 보니 이 곳, 제57K기지에 처음으로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의 제57K기지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단순히 외형만 다른게 아니라, 기지의 모든 것이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과거의 기억들을 회상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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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그러니까 내가 재단에 입사한지 3달도 채 되지 않았을 시절이었다. 그 당시 나는 뭐든지 처음 해보는 것들이라 어리버리 했었고, 경험이 적어 뭐든지 미숙했었다. 그럼에도 열정 하나 만큼은 다른 사람보다 가득해, 인류를 수호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어떠한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뭐든지 열심히 했었다.

그랬던 시절에 처음으로 나에게 타 기지로 파견 발령이 내려왔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현재 제57K기지에서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해당 기지의 인사계열직이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으니 해당 부서의 안정화가 이뤄질 때 까지의 추가적인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중 하나로 내가 선발되었다는 것.

애석하게도 나는 그 당시의 제57K기지의 악명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해당 메일을 받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했었다. 그 당시엔 제57K기지를 그저 여러 극비 프로젝트들을 다루는 연구개발기지 정도로만 알고 있었었고 그 뒤에 감춰진 추악한 이면에 대해서는 무지했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그 메일을 보고는 드디어 나도 재단에서 인정받을 기회가 왔다며 들떴었다. 이 기회를 발판 삼아 성장해 인류를 위해 재단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은 제57K기지에 도착해 실태를 마주하자마자 완전히 무너져버렸지만.

장장 몇시간에 걸쳐 도착한 제57K기지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기지내 대다수의 사람들의 눈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왔었고 피로에 찌들어 축 처진 상태였다. 그 어느도 웃고 있지 않았다. 기지의 어느 곳에서도 활기참이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볼 수 있는 건 오직 칙칙한 그런 것들 뿐이었다. 기지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만 들려왔다.

도착하자마자 한 남자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걸어와 내게 물었다. "그 쪽이 이번에 제77K기지에서 파견온 사람입니까?" 내가 그렇다고 답하자 그 남자는 어디서 뭘하면 되는지 알려준다면서 따라오라 손짓했다. 그 남자 또한 피로에 찌든 듯 했다. 언제 깎았는지 모를 정도의 정리되지 않은 턱수염과 피곤해보이는 눈빛, 꾀죄죄한 몰골. 누군가 툭 치면 쓰러질 듯 했다.

그 남자를 따라 가다가 창고처럼 생긴 건물을 보고는 질문했다. 저 곳은 뭐하는 곳이냐고. 남자는 답했다. 기지의 지하시설로 가는 입구 중 하나라고. 그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더욱 더 피로에 찌들어 보였다. 나는 또다시 질문했다. 여기 사람들은 왜 죄다 지쳐 있냐고. 이번에는 아예 대꾸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기지 건물에 들어가 배정받은 자리까지 걸어가면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무실에 도착해 내 자리를 배정받고서야 그 남자는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여기서 일 하면 되고 자세한 내용은 옆자리 직원이 알려줄거라며 귀찮은 듯이 대충 말하고는 가버렸다. 자리에 앉자마자 옆자리 직원이 내게 서류파일을 주며 할 일을 알려줬다. 그 직원의 자리 옆에는 작은 나무 묘목 화분이 보였다. 나뭇잎 몇 개가 시들시들한 걸 빼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관리되고 있는 듯 했다. 이 사람은 그래도 다른 직원에 비해 그나마 나아 보였다. 피곤해 보이긴 해도 그나마 친철하게 알려줬다.

나는 그 직원에게 두가지를 물어봤다. 첫 번째는 왜 다들 지쳐있냐는 것. 두 번째는 이렇게나 큰 대형기지에 무슨 사고가 있었길래 인력난에 시달리냐는 것. 그 직원은 이에 답했다. 이 기지의 대부분의 사람이 매일 고된 업무량에 시달려서 지쳐 있다고. 예전에도 그랬었는데 최근 5년 전부터 그게 부쩍 심해졌다고 했다. 제21K기지가 신설되고 이 기지에서 담당하던 프로젝트의 대다수가 제21K기지로 이전된 이후부터 일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업무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그로 인해 다들 지쳐가고 있다고 했다.

그 직원은 사고에 대해서도 말했다. 애초에 여기는 매일매일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사고 또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며 과로사, 자살로 사람이 죽는 걸 대충 외부에 알릴 땐 사고로 인한 인력 손실으로 꾸민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배정 받은 자리도 4일 전에 업무 스트레스로 자살한 직원이 쓰던 자리였다고 그 직원은 덤덤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그런 말들을 믿지 않았다. 그냥 신입이라 어리버리 해보이는 나에게 농담하는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일을 하게 되면서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살인적인 업무량들과 그것들을 따라가기 위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일만 하는 직원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동안 생각해왔던 재단의 이상적인 면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어느 것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곳에 일하게 된지 딱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모니터에 비춰진 내 모습을 보았다. 이전의 생기 넘치고 열정 가득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비춰진 모습은 그저, 다른 직원들과 다를 바 없는 초췌한 몰골이었다. 그 직원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을 하나 꼽자면, 내 자리가 바로 창문 옆에 위치해 있어 언제든지 바깥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창문 바깥의 풍경은 이 곳과는 맞지 않게 꽤나 아름다웠다. 나무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숲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밤이 되면 밝게 빛나는 별들이 창문 너머 보였다. 이러한 풍경들이 이 지옥같은 곳에서 하루하루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어주어 미치지 않고 이 곳에서 버텨낼 수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 말고도 또 하나 더 있었는데, 이름 모를 작은 시설 하나가 보였다. 모습은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보았던 창고처럼 생긴 건물과 유사해 보였다. 그 건물에도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 사람들 모두 처음 보았던 그 건물에 들어가던 사람들처럼 우리보다 더 피로에 찌든 모습이었다. 들어가는 사람 모두 한 숨을 쉬면서 들어갔었다. 그리고 한 번 들어간 사람은 다신 그 곳으로 나오지 않았다. 물론 다른 출구가 있어 그 곳으로 나왔을 수도 있었겠지만,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들 모두 이전에 들어가는 걸 본 적 없는 사람들 뿐이었다. 다들 들어가기만 할 뿐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몇 주가 또 지나갔다. 반복되는 일들에 몸도 마음도 지쳐 피폐해졌을 때 쯤에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게 이사관님께서 나를 부른다며 지금 당장 이사관실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따라 이사관실로 갔다. 도착하자 그는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어 내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내가 이사관실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문을 닫았다.

기지이사관의 모습은 다른 직원들과 달라 보였다. 어딘가 지쳐 보이거나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내게 앞에 의자에 앉으라 손짓했다. 내가 의자에 앉자 이사관은 나를 보며 일이 할만하냐고 물어봤다. 상사 앞에서 할만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그렇다고 답하자 그는 마음에 든다며 껄껄 웃었다.

그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작은 희생은 불가피하다며 자신의 경영철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부분은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내는 말들로 들렸지만 그의 눈은 그렇지 않다는 듯이 빛났다. 이사관은 일하다가 사람 몇 명 쓰러지는게 뭐 대수냐며 사람을 소모품에 비유하며 실적에 대해 강조했다. 어차피 남는 건 결과라고. 아무도 과정을 기억해주지 않는다며 생기 가득한 눈빛으로 떠드는 그를 보며 왠지 모를 혐오감을 느꼈다.

나는 그 혐오감을 애써 표출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이사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마자 나는 업무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다. 계속해서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에게 느꼈던 분노와 혐오감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모조리 표출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어 나가려 하자 그는 나에게 말했다. "자네는 충분히 능력이 있어. 지금처럼 열심히만 한다면 언젠간 나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겠지. 쉬지 말게."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이사관실을 나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내내 그의 말이 떠올라 기분이 좋지 못했다. 나도 그저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일까.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게 인류를 위한 것이 맞을까. 그저 누군가의 목표를 이뤄주기 위해 착취 당하는 게 아닐까. 복잡한 머리를 붙잡고 자리에 앉았다.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말은 없었으니까. 기분을 풀기 위해 창문을 바라보았다. 순간, 창문에 무언가 비쳤다.

나는 그것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사람이 바로 내 뒤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쓰러진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옆자리에 있었던 그 직원이었다. 이사관실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분명히 자기 자리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었다. 쓰러진 직원을 깨우려 해보고 일으키려 노력해봤으나 그는 차가운 시체 마냥 축 바닥에 늘어져 약간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하고는 급하게 기지 의료팀을 호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다들 한 번 쓱 쳐다보기만 할 뿐 이내 다시 바쁘게 자신의 일에만 열중했다.그런 그들의 모습에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사람이 쓰러져 있음에도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며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는 그들의 모습은 전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은 그저 계속 굴러가기만 하는 기계 속 톱니바퀴와 유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 몇 명이 도착했다. 내가 이 곳이라 손짓하자 그들은 내 쪽으로 걸어와 쓰러진 직원을 확인하더니 들것을 이용해 그 직원을 들고 가버렸다. 그들 또한 이러한 일에 익숙하다는 듯이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 사람을 붙잡고 무슨 일인지 묻자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은 입을 열었다. "그냥 과로사 같네요. 뭐, 별 일 아니니 신경 끄고 일하시면 됩니다."

나는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한 내 모습을 본 그는 나를 위 아래로 쭉 훑어보더니 이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어 내게 말했다. "아, 온지 얼마 안되셨나 보구나. 그냥 흔히 일어나는 일 중 하나니까 신경 쓰지 마시죠. 처음이라 그렇지 나중 되면 점차 익숙해질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하던 일 마저 하세요." 그는 그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순간 공포, 역겨움, 혼란, 절망, 당황, 두려움 등의 여러 감정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다시 뒤돌아 다른 이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그들이 더 이상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일만 하는 그 기괴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사람의 형상을 한 톱니바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창문에 비춰진 내 모습 또한 그들과 닮아가고 있었다.

그날 나는 그 곳에서 도망쳤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와 숲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그 기괴한 장소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까지 달렸다. 내가 그렇게 도망치듯이 달렸음에도 바깥의 직원들은 왜 저래? 하는 눈빛으로 날 한번 쓱 하고 쳐다보기만 하거나,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나를 말릴 생각도,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 물어볼 생각도 없어 보였다. 모두가 그렇게 방관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더 이상 그 장소가 보이지 않을 때 쯤에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해 지쳐 쓰러졌다. 나는 쓰러진 채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지쳐서 그렇게 느꼈던건지, 아님 진짜로 그 날의 달빛이 밝아서 그렇게 느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유독, 달이 크게 빛나 보였다. 달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모든게 악몽이었으면 하면서 달을 보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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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한 몇 주동안 일을 쉬었던 것 같다. 바로 복귀했었다면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했었을 테니까.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었다. 된다면 그 한 달 동안 겪었던 모든 기억들과 감정들을 전부 소각기에 넣어 돌려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보통 이렇게 장기간 동안 휴식하는 것은 잘 받아들여 지지 않았지만, 뭐 다들 제57K기지에서 복귀했다고 하니까 어느정도 이해해 주는 분위기였다.

어느정도 휴식을 마친 뒤 나는 재단에 복귀했고, 제자리인 제77K기지로 다시 돌아가 근무했었다. 모든게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나만큼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열정이라는 것은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렇게 몇년동안 어딘가 비어버린 상태로 일만 했었다. 진짜로 일만 했었다. 계속 일만 하면서 승진도 해보고 신입딱지도 때고 어엿한 재단의 직원으로서 인정도 받아봤지만 성취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가 공허한 느낌이었다. 계속 하다보면 언젠간 채워지겠지 싶으면서도 그 공허함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타 기지로 전출가게 되었다. 나는 그 곳에서도 똑같이 행동했다. 서류보고, 컴퓨터 두드리고, 계속 일만 반복하는 내 모습을 본 그 곳의 직원들은 내게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주, 몇 달을 반복하니, 어느 날 팀장이 내게 찾아와 괜찮은 거 맞냐고 물었다. 잘 모르겠었다. 지금 내 모습이 과연 괜찮은 건지. 내 스스로도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내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팀장은 곰곰히 생각하더니 이내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제57K기지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오라고. 그 말을 듣고선 잊고 있었던 악몽같은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지옥같은 경험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 정중히 거절했지만 그는 내게 계속 권유했다. 자신도 예전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괜찮은 곳이라며 짧게 요양한다고 치고 한 번 가보라고 했다.

대체 무슨 정신이길래 그 곳을 좋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그 곳에서 요양을 하라니. 날 엿맥이려고 그러려는 건가 잠시 생각했지만 그의 눈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속는 셈치고 그의 손에 떠밀려 이 곳, 제57K기지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컵을 다시 입에 갖다 댔지만, 더 이상 컵에 남은 얼음 물은 없었다. 어느정도 잠도 깼으니 이제 다시 슬슬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찰나에, 누군가 내 뒤에서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내 등 뒤에는 고양이 귀가 달린 한 소녀가 서있었다.

"아저씨는 여기서 뭐해요?"
"네가 그 유명한 성한나 조수인가 보구나"
"누가 그래요? 유명한 거 피곤해서 싫은데."

소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성한나 조수, 제57K기지에 오게 되면 적어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사람의 귀 대신 머리에 고양이 귀가 달린 어린 소녀가 제57K기지를 자유롭게 배회하며 사람들을 도와준다고. 이 기지에 오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처음에는 단지 소문 정도로만 생각했었으나, 이 곳 사람들조차 그 얘기를 반복하는 걸 보고 그게 소문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왜 기지에 어린아이가 그리 쉽게 돌아다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래서, 아저씨는 여기서 뭐해요?"
"나는 아저씨가 아냐. 그냥 뭐, 잠도 깰 겸 돌아다니고 있었지"
"다른 사람들처럼 밖에 나가서 달 구경 안해요?"
"나는 그닥 관심이 없어서. 그러면 너는 왜 여기 있니?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달 구경 하러 나가지 그래?"
"별로 재미없는걸요. 가만히 앉아서 달이나 보는 것 보단 이렇게 기지를 돌아다니는게 더 재밌어요."

소녀의 말에 적당히 대답해주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소녀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돌아가려 할 때 마다 나를 따라와 계속 질문하였다. 처음에는 그냥 무시하고 돌아가려 했으나, 소녀의 끝없는 질문에 결국 포기하고 결국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할 일이 그렇게나 많아요? 다른 사람들은 일이 적어서 한가하다고 했는데."
"다음달이나 다다음달 업무들을 미리 미리 해두는거지. 밀리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럼 그 일이 끝나면 뭐해요?"
"그 다음달 업무를 하겠지"
"안 쉬나요? 보통 여기로 파견 오는 사람들은 쉬기 위해 온다고 저번에 다른 사람들이 알려줬어요."
"딱히 쉬고 싶지 않아서."

소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이 손을 턱에 대고 몇 초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무언가가 떠오른 듯 내게 말했다.

"음… 그러면, 나랑 같이 옥상으로 가서 달 보러 가요."
"아까는 관심 없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보고 싶어졌어요. 지금 밖에 무지 큰 달이 떠있는데 같이 보러 가요."

그 부탁을 거절했다가는 더 귀찮아질 것만 같아서 일단 승낙했다. 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적당히 맞춰줄 생각으로 소녀가 이끄는대로 옥상으로 따라갔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 옥상 문을 열자마자 거대한 달빛이 나를 비췄다. 옥상으로 올라갈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막상 크게 빛나고 있는 달의 모습을 보니 마음 속에서 무언가 요동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느낌인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딘가 지치고 힘들어 보이더라고요. 보통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밤하늘을 보면 좀 나아지던데. 아저씨는 어때요?'
"음…"

소녀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냥 무언가에 이끌리는 듯이 내 마음 속 무언가도 달빛에 이끌리는 듯 했다. 어쩌면 그게 내 비어있는 마음을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졌다. 나는 내가 그동안 걸어왔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재단에 입사하고 겪었던 일들, 내가 이뤄냈던 일들, 내가 살아왔던 모습들, 그리고 내가 이전에 제57K기지에 와서 느꼈던 일들. 나는 달리는 것을 잠시 멈추고 그동안 걸어온 먼 길을 돌아보았다.

그 길을 다시 돌아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왔던 것에 뿌듯함을 느끼기도, 일에만 집중하다 보니 일 외에 다른 것들은 소홀히 대했다는 것에 대해 자기반성을 하기도, 그리고 그동안 내가 무얼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살아 왔던걸까에 대한 약간의 찝찝함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그 곳에서 벗어났지만, 내 모습은 아직도 그 곳과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 이후로 계속 내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지 않았던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서야 나는 내 마음 속 공허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드디어 알 것만 같았다.

"달이 참 밝은 것 같네."

뭐, 가끔은 이렇게 쉬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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