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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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불타고 있다.

마을의 경계에 그어진 기나긴 선은 몇백 년을 존재했다.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존재해 온 선이다. 사실 그는 그 선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큰 차이는 없었다. 둘 다 가능성이나 희망을 짓밟아버리는 점에서 비슷비슷한 강렬한 잔인성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죽은 여자는 강렬한 기적학적 불길에 타오르며 경계 바깥으로 튕겨나가 버릴 때 생각하지 않는다. 낡은 저고리가 흐름 속에서 뱀처럼 너울거린다. 이십 년 전만 해도 수없는 계획이 더 있었다. 십 년 전에는 그것보다는 적지만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었다. 마치 불나방들이 날아들듯이 그는 끝없이 회귀를 꿈꾸었다. 추방자들의 평균처럼 말이다. 그렇게 모든 시도가 막혀버린 이후, 숨쉬지 않는 몸은 낙엽처럼 지쳐버리게 된다.

눈이 내리고 있다. 저잣거리의 사람들은 변함없이 움직이며, 태양, 별, 달은 떠서 항상 같은 방향으로 지고, 여름 나절 태양이 달구어 놓았던 바위는 항상 비슷한 느낌으로 식는다. 지기(地氣)는 그 근처 생명들에게 자신의 소리를 속삭이고 꽃들은 여름과 겨울을 너무도 명명백백하게 알았다. 그 일련의 규칙대로 그는 행동했다.

아주 가끔 군사들이 귀신(鬼神)을 잡으러 배회할 때는 어둠 속으로 숨어버려야 했다. 눈이 내리고 있다. 나무 그늘 아래가 밤처럼 어두워짐에 따라 흰 눈은 발광하는 듯 소멸하는 듯 부유하고 있다. 그렇게 눈이 쌓여버리고 세월이 흐르게 될 때 그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더는 사람에게선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아주 오래 전 자신에게 유폐를 고했던 그 박수무당을 끝끝내 붙잡아서 협박하고 다그치며 끝내는 그를 난도질해버린 후로는 사실 그 무엇도 유의미한 시도는 아니였다.

더구나 어떻든 간에 결국 조선 왕조 이데올로기의 불길한 압박 속에서 아녀자— 비록 오백 살은 먹었을지언정, 게다가 죽었을지언정 그가 마구잡이로 쏘다니기엔 불편한 것도 사실이였다. 정보통을 마련해두기에 그는 지독하게 빈털터리였다. 이유는 명백했다. 고향에 대한 집착이 너무 지독해 초반의 세월은 단순하고 무식한 방법만을 쓰느라 자금을 마련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꽤 오랫동안 여러 거래라던가 물건을 팔아두려 시도하기는 했다만 일단 쉽지 않았다. 상단(商團)의 자본력은 생각보다 막강했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비록 그가 경계만을 넘나들면서 오랫동안 살아오기는 했지만 결국 변화하는 시대에 직면해둬야 했다. 정세나 위상이 서서히 변하고 있는데다, 결코 유쾌한 방향성은 아니였다. 우스운 일이다. 그런 지독히 상관없는 일들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적수는 그 인생 자체로도 충분했는데.

그는 불에 데인 어깨 쪽을 더듬거린다. 불탄 곳이라 해도 의미는 없다. 애초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생생한, 살아 있는 몸도 아니다. 아마 흉터로 남던가 복구되던가 둘 중 하나다. 여자는 불길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땋으려다가 다시 그만두기로 한다.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변하든, 이 고립 속에서 고향으로 되돌아가려면 다른 이들을 만나고 접촉하고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1871년 9월 5일

경상북도 ???



해가 떴고, 그는 방랑했다.

어찌 돌아갈 것이냐, 언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냐, 누구와 돌아갈 수 있을 것이냐…… 그는 처음에 다른 사람에게 물었고 그 다음에는 자신에게, 그 다음에는 땅 그 자체에게 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쓸모 없는 말만을 했고 땅은 답이 없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는 먹을 필요가 없었다. 음식, 음료, 수면. 불완전한 것이 의미가 없이 죽어간 그에게는 필요없는 것들이였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의식주의 모든 것을 그리워했다. 사실 이렇게 보면 고향조차도 불필요했다. 살아갈 필요가 없는 우아한 인생이 이론상으론 가능했어도 살아갈 이유가 아니였다. 애당초 살아난 이유도 집착, 살아가는 이유도 집착, 목적도 집착이였다.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면 육체를 움직이는 의지는 죽게 될 것이다.

가끔 그는 심란한 고민을 하는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몸을 웅크려 그날을 강제적으로 회상했다. 그 죽음의 날에, 영원히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라비들과 헤어진 그날. 심지어는 그들의 사주마저 받아 추방된 그날이 생각나면 마음은 불길하게 타오르며, 두 눈의 공허에선 불꽃이 튄다. 그러나 결국 돌아간다 해도 가족들도 친지들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안동의 땅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만일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인식하게 된다면 서서히 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는 다리의 아픔을 느끼고 바위에 주저앉았다. 생물학적 불사라고 해도 그러한 심적 갈등이 찾아오면 몸이 무너지면서, 고통이나 피로는 어느 정도로 분명하게 느껴야 하는 것이다. 개울물과 새들이 우는 소리, 개구리 소리, 나무가 흔들리며 가지와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그러다가 그는 멀리 서 있는 존재를 눈치채기도 했다. 은밀하고 서서히 다가오는 누군가를 보았다. 수십 년간 자신의 심장 박동을 잊어버리고 살면서 그 다른 존재의 기력을 느끼기는 쉬웠다.

숲의 바람을 타고 가는 숨소리,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는 소리, 발길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범이나 이리 따위가 아니였다. 사람이다. 아마도 나무꾼이거나 포수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떻든 결국에는 위험의 잠재성을 품고 있는 존재다. 그는 일어서서, 서서히 걷는 속도를 높이서 방심하지 않은 채 추적자와 거리를 좁히기로 결정했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발걸음이 대기를 찢으면서 다가왔다. 일순간 번개가 번쩍이듯이, 순간 여자는 몸을 돌려 상대를 노려보았다.

"안녕하시오, 그쪽은……"

사내아이다. 열둘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와 청년의 경계 속에 있는 누군가. 삼베옷을 입었는데, 맨발이며 상투는 물론 머리를 땋지도 않아 거지나 죄인의 꼴을 연상케 한다. 물론 그도 다르지 않아서 거지 오누이 꼴이나 다름없다. 사내아이의 눈에 천진함과 호기심 그리고 공허가 섞인 감각이 묻어나고 있다.

"그쪽은 누구요?"

여자가 따져물었다. 소년은 미소하면서 뒷짐을 지었다. 그러다가 마치 작은 새처럼 날쌘 동작으로 여자 옆에 섰다. 그는 조금 놀라 뒤로 물러섰다.

"김천(金川)이라고만 해 둡시다. 저 산 위 절에서 내려왔소."

"나는….. 그, 잠시만. 뭐였더라."

"자기 이름을 잊어버리는 수도 있소?"

소년이 깔깔 웃었다. 그 웃음 소리는, 마치 온 집안 접시를 다 깨뜨릴 만큼이나 높은 소리로 운다는 새처럼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날짐승 무리가 놀랐는지 날개를 치면서 달아나 버렸다. 여자는 황당하면서도 어이가 없는 표정이였다. 그래. 세상에 혼자 있다면 이름 따위는 필요가 없을 터였고 그 상태에서 몇백 년간 둘러대면서 살아왔다. 그러한 연유로 그는 지금,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러고 보니 저 위에 절이 있소? 아무것도 없는데."

"있소. 그쪽은 찾을 수 없겠지만은."

"기이하군."

여자는 더 따져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기이한 일은 수없이 있고 서로 마주치고 이끌려선 좋을 것 하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잠시 그의 안색을 내다보고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만 이내 피식 웃었다.

"그쪽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고 말이지."

"어떻게?"

"당연한 일 아니겠소? 무릇 사람은 날숨과 들숨이 있는 법인데."

"아."

여자는 당황하여 뒤로 물러섰다. 소년은 놀랍다는 감각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저 생글생글 웃어 볼 뿐 다른 어떤 모습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여자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그대로 말했다. 그 음성은 어린애답지 않은 어떤 성숙함이나 강인함마저 느껴졌다. 이러한 과정을 목격한 그는 사내아이에 대해 제법 놀랐다. 촌뜨기나 절에서 심부름하는 종놈과 같지 않은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걱정은 마오. 나도 비슷한 인간이니만큼… 다만 내가 염려하는 것은, 아마도 그쪽이 움직이는 건 한스러운 일이 있어서겠지."

지금 그는 마치 부처 손바닥 위의 원숭이와 같은 꼴이다. 사내아이는 그를 궤뚫어보고 있는 터. 여자는 놀랍기는 했어도 불쾌하지 않았다. 도리어 기뻤다. 만일 저 사내아이가 신선이거나 도사라면야 그의 환향을 도와주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니 마악 들뜨는 기분 탓에 아득한 옛날에서야 뛰었던 심장이 맥동하고 몸에 피가 도는 기분이였다. 그는 소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맞소, 나 고향에서 쫓겨나 떠도는 신세요. 어찌해줄 수 없소?"

"내가?"

여자는 고개를 열성적으로 끄떡였다.

"아니, 그건 나도 불가능한데.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다른 비방이라던가 저주 때문일 거요. 난 그런 건 모르고."

여자의 반응이 어떻든지 간에, 소년은 기지개를 켰다. 그의 뺨에 송골송골 맺힌 땀에 새카만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하늘 위로 긴 울음을 토하며 사나운 새가 스칠 듯 가까이 날았다. 질풍이 불었다. 마치 세상 사이를 단절하듯 부는 그 바람을 여자는 맞았다. 생기 없는 진갈색 머리칼이 힘없이 휘날렸다.

"그럼 방법은……"

"내가 모른다고 한 거지, 누군가는 알지도 모르지 않소."

"누군가?"

"내가 보니 세상은 턱없이 넓소. 세상은 변하고 있구, 이제 변해야 할 때요."

그는 알 듯 말 듯한 말을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오의 태양이 뜨고 있었다. 저 해가 원래부터 저리도 눈부셨던지 꼭 백옥처럼 빛나고 있다. 그는 꼭 자기 말에 심취한 달변가처럼 턱을 짚은 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얀 얼굴을 잡목 잎의 그늘이 덮었다.

"이역만리 어딘가에는 해결법이 있을 테지."

"그럼 멀리 떠나야 한다는 말이요? 그렇다면 결국에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지 않소."

"이 사람, 답답하기는."

남자아이가 제 앞머리를 쓸어내렸다.

"조선은 변하고 있거든. 질풍에 휩싸였소. 서역, 왜, 이런 나라들이 더는 오랑캐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란 말요."

"허면….."

"곧 기회가 우릴 찾아오게 될 거란 말이지."

소년은 꼭 소리꾼이나 남사당마냥 과장된 몸짓을 짓다가, 이내 바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댁도 않겠소, 하는 말에 여자 또한 그의 옆에 앉았다. 바위의 서늘한 감각이 천 너머로 느껴졌다. 하늘 위로 철새 수십 마리가 스쳐 지나갔다. 소년은 이를 올려다보았다. 기러기 무리가 찾아온 것이다. 저 아득히 먼 논두렁에.

"그럼 어쨌든 내가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니오."

"그렇겠지. 내 듣기로는 왜국에는 수없는 신들이 있으며 서역에는 기묘한 짐승들과 도사들이 더 있다고 하니, 그쪽을 도울 이가 하나 쯤은 있겠지. 내가 찾아보겠소."

"어찌 날 도우려 하시오."

그는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위에서 기러기 우는 소리가, 온 세상을 덮을 듯 길게 내렸다. 소년이 제 새카만 머리를 뒤로 넘겨 두고는 땀을 닦았다. 그러다가 둘은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공허한 두 눈과, 소년의 기묘하게 오래되어 보이는 그 두 눈이 조우한 것이다. 그 사이에 순간 숨이 멎을 듯한 공백이 생겼다. 필사적인 의지, 나아가야 하는 욕망, 그 모든 것을 서로는 공감한다. 이해핱 수는 없지만 순간은 그 편린을 느낄 수 있다.

"난 외로운 사람이니까. 그리고 쫓기고도 있소, 저 산 위 절에서."

"승려가 사람을 쫓는 일도 있소?"

"무서운 작자들이요. 보통의 중이 아니라오."

여자는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승려가 추노를 한다는 이야기는 물론 기묘하다만 있을 법한 이야기기는 했지만 그 외에 조선이 변하고 있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훨씬 희한한 일이였다. 불행히도 여자는 촌 사람들보다도 더욱 정보에 무지하며 한동안 미친 듯이 경계선에 뛰어드는 일만을 반복해온 터라 더욱 그랬다. 본인의 탓이야 물론 아니였다. 긴 바람이 나무를 휘감으며 승천해 기러기의 깃털마저 훑는 창공의 아래에서, 남자아이는 여자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바람이 속삭이듯이 말을 건넸다.

"그러니 그쪽도 날 도와주시오."

"허면 어떻게?"

"대단할 것 없소. 날 쫓는 자들에게서 좀 숨겨주시면 좋겠고, 말상대나 좀 해 주면 더욱 좋지."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칼이, 옷소매가, 공중을 스치우면서 마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깃발처럼 순간에 존재하게 된다. 여자는 그 순간 미래를 느꼈다. 그 미래가 어떻든 결국에는 직면해야 하는 시간을, 계절의 흐름을, 낮밤을 그리고 그러한 것처럼 결국에는 마주해서 쟁취해야 하는 미래를 느끼고야 말았다. 사내아이의 눈— 아니, 그 순간 또 다른 일종의 도사가 된 이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저잣거리의 사람들은 변함없이 움직이며, 태양, 별, 달은 떠서 항상 같은 방향으로 지고, 여름 나절 태양이 달구어 놓았던 바위는 항상 비슷한 느낌으로 식는다. 지기(地氣)는 그 근처 생명들에게 자신의 소리를 속삭이고 꽃들은 여름과 겨울을 너무도 명명백백하게 알았다. 그 일련의 규칙대로 그는 행동했다.

그 모든 규칙을 역순해야 한다. 귀향을 위해서는 더 이상 수단을 가릴 수 없다. 조선적 방법도 가능한 방법도 넘어서서 나아가야만 한다. 여자는 고개를 끄떡이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날, 우습게도 하필 세을가교도의 배반자와 산송장이 조우했을 때 역사가 시작되고야 만다. 이하로 있을 참담한 시대의 흐름의 단초. 그 모든 것이 여자가 남긴 끄떡임에서 시작된 것이다.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김천(金川)이오, 방금 말했듯이. 그쪽은?"

"음….."

"아, 이름을 잊어버렸다 했던가?"

"아뇨, 아뇨. 방금 기억이 났소."

"뭐요?"

"안소란이오, 안소란(安小蘭)."





나아갈 길이 없을 때,
나무는 존립한다.
무구한 피가 땅을 적실 때가 되어서야
나는 죽고,
내 고향은 깨져 버렸으니,
이제서야 나는
영혼이 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내가 본 것은 그저 허황된 환상일 뿐이었나,
심장이 시릴 정도의 여전한 환상통이었다.





2023년 2월 5일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이게 끝이군."

제145K기지의 역사학자, 근신처분 경험자. 안진서 박사가 물건들을 재단 이송 차량에 옮겨 담으며 땀을 닦았다. 남자는 마른 체형에 키만 말쑥히 컸고, 터틀넥 셔츠라던가 청바지 따위 사복을 입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도통 관광객이라던가 주민으로 보이지는 않아서 현장 요원들의 주시를 한참 받아야만 했다. 그의 옆에서 고동빛 머리칼을 묶어 내린 여자가 길Way을 닫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의 손끝으로부터 선홍빛이 선연히 내리쬐며 무지개빛으로 휘어진 기적학적 공간의 입구를 결국에는 닫아 버렸다.

"이런 길은 일반적으로 자연스런 길은 아닌데요."

최진아 요원이 길이 닫힌 비석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박사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SCP-1605-KO. 탈법 변칙예술가 중 일각인 줄만 알았는데 기나긴 역사의 한 줄기만 발설해두고 소멸해버렸다. 살아움직이는 그러한 시체. 죽음이라는 것이 안진서는 익숙하지 않았고, 죽지 아니할 사람에게 곱게 대하지 않았던 것이 시한부에게 빈정거린 것으로 돌아와 버린 터다. 그래서 마음은 지독하게 쓰라려졌다. 비록 재단 인원이라 하더라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감정절제 수술을 받은 적은 없었다. 안진서는 길게 한숨 섞인 투로 대답했다.

"종종 이런 경우가 있지. GoI들이… 비록 이건 못해도 90년 전부터 이랬던 것 같지만."

"저도 해원읍에서 비슷한 걸 본 적은 있습니다."

"그렇겠지……"

안진서 박사는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모든 일이 기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물론 살아움직이는 시신이야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만 그 배후에 얽혀 있는 것이 훨씬 곤란하다. 가뜩이나 김경일 기지 연구이사관보에게 미운 털이 박힌 터인데, 더욱 일거리가 많아지고 있다. 가네가와를 찾으라고, SCP-1605-KO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가네가와, 가네가와 사토루라는 자는 지금은 소멸해버렸을 대일본제국 이상사례국 사람일 것이고 그럼 지금이야 죽어버렸을 텐데.

그는 2018년에 있었던 사건 하나를 기억해두었다. SCP-254-KO 메뚜기 종의 대량발생으로 기지가 난리였는데 그러고 보니 그 당시 확보된 문건 하나가 있었다. 대일본제국 이상사례조사국 측이 가지고 있다가 재단이 발견한 문서였다. 안진서는 이제서야 또렷하게 그 문건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거기 힌트가 있을 것이다.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해두었다. 가네가와. 가네가와 사토루라는 자는…..

황국군으로 전향한 전 세을가교도 가네가와(金川)가 이 비책을 숨겨두고 있다가 조사국에 넘겼는데, 그 이후로 세을가 백성들은 이런 방법은 쓰지 않았다. 이러한 기술이 귀축영미와의 전쟁에서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이미 알고 있는 방책에 비해 효율이 좋지 않다.

가네가와, 쇠 금에 내 천 자를 쓰던 이름이 맞다. 정말로 그 사람이 가네가와 사토루가 맞다면 세을가에서 나타난 존재일 것이다. 배반자. 누군가가 말했던 배반자가 바로 그 사람일까, 안진서 박사는 멍하니 턱을 짚을 뿐이였다. 세을가, 사르킥교도 인간들은 생물학적 개조를 받는다. 비록 세을가가 종교적으로 불로장생을 멀리하기는 하나 가불가의 영역이 아니다.

"살아 있어."

"예?"

"SCP-1605-KO 말이 맞아. 가네가와 사토루는 살아 있다."

하늘 위로 기러기 몇 마리가 고독한 울음을 울며 스쳐 지나갔다. 안진서 박사는 서러움이나 죄책감을 넘어선 희열을 느꼈다. 가네가와 사토루가 정말 살아 있다. 그렇다면 SCP-1605-KO가 이곳 마을로 가기 위한 수만 번의 시도를 도와준 이도, 그 여자에게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는 마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는 그 인물도 정말 패잔병 가네가와 사토루가 맞다. 질풍이 불어 오고 있다.

"기지로 가야겠어. 어쩌면, 조사해 볼 것이 지금보다 수백 배는 더 있을지 몰라."





가네가와 사토루가 쓰고 내가 밝히다





1921년 8월 5일

경상북도 안동시 경계



잡힌 흰 닭의 깃털과 피 냄새가 어지럽게 돌았다. 연기가 솟구쳤다. 한바탕의 은비학적 소란 이후, 우습게도, 안소란은 여전처럼 그 경계에 쓰러져서 시퍼런 창공을 내려다보고 있다. 배반의 굴레, 하고 왜인지 여자는 속삭일 따름이다. 그때, 김천, 가네가와 사토루와 만난지 수십 년은 훨씬 지났다. 모습도 바뀌었다. 안소란은 지금 양복을 입고 있다. 그때와는 결국 달리 안소란은, 양복을 입고 있다. 일본 순사 복장을 한 남자가 여자를 일으켜 세운다.

"실패했어."

안소란이 날선 눈으로 저편을 응시하며 속삭였다. 가네가와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편에 닭의 잘려나간 대가리만 나뒹굴었다. 여우 한 놈이 그것을 물고 안동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다음에는 성공하겠지. 이 방법은 쓸모 없군, 독일군 마법사들이 쓰던 해주술의 일부라 들었는데."

"나 두려워."

"뭐가?"

안소란은 옷에 묻은 낙엽이며 흙먼지 따위를 털어냈다. 그는 실소한 사람처럼 피식 웃었다.

"이제 영원히….. 고향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럴 리가."

가네가와는 미소했다.

"방법은 무한하단 말이야."

"무한해?"

"물론. 시간도 많고. 이제 나도 황국군이 될 테니— 시간은 많지 않겠어."

안소란은 몰랐다. 이 모든 일이, 김천이 자신의 고향을 내버리고 국가였던 것을 짓밟은 일이 악인지 아닌지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독립체였기 때문이다. 안소란은 오직 귀환을 위한 욕망으로 지탱되는 존재였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이 지나친 인간과 생각하는 인간이 만난 그 사건이 능숙히 수면을 헤치는 물뱀처럼 흘러만 가고 있었다. 하늘 위에는 기러기도 구름도 하나 없었고, 어디서 새소리처럼 된 유행가가 조선말인지 일본말인지 모를 가사와 함께 흘러왔다.

"안소란."

"응?"

"방법을 찾을 때까진 같이 있게 되겠지?"

안소란은 일어서서, 남자의 앞머리를 쓸어 주었다. 질풍조차도 불어오지 않는 땅에서, 오직 붉은 나뭇잎만이 져 가는 태양을 거슬러 떨어져 기와 지붕을 쓸어내고 있었다. 해가 정말로 지고 있는 그 순간 여자는 그 모든 악의 착륙을 그리고 악인에 대한 잣대를 망각해버리려고 눈을 감는다. 아무 것도 없는 하늘에서 철새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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