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카네는 없다.
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피는 굳지 않았다. 여전히 손가락 아래로 뚝뚝 떨어지며 바닥을 적셨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에는 한 남자가 벽에 기댄 채 죽어 있었다. 눈을 뜬 채로, 그러나 완전히 망가져 버린 모습이었다. 내가 그를 죽였을까? 아마 그랬겠지.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어젯밤 마신 알코올이 내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스스로 기억을 끊어냈던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여기 남자가 죽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한참 동안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내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거친 태도는 아니었다. 그저 나를 데려가려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일 끝났어. 가자고." 머리를 깎은 남자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옮겼다.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우리는 죽은 남자를 그 자리에 남겨둔 채 그 골목을 빠져나왔다. 시체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내 소속 조직에서 뒤처리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지금의 상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남자는 우리 조직에게 크나큰 위해를 끼쳤거나, 혹은 규칙을 어겼거나, 아니면 단순히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명백했다. 나는 그 남자를 죽였다. 그의 흔적은 이제 말끔히 지워질 것이다. 어느 시골 아스팔트 위에 녹아들어 존재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 처사가 올바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죽은 자에게 생각할 권리가 있을 리 없겠지만.
나는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골목 사이를 걸었다. 골목을 벗어나자 상가가 보였고, 차가 보였고, 길을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잠시 멈춰선 내 눈에 유리창 너머로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피투성이였다. 붉게 얼룩진 옷과 손, 그리고 그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흔적들. 그러나 사람들은 내게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다. 내 모습을 보고도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혼란스러워하던 내 시선을 남자가 흘끗 보더니 무심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신경 쓰지 마." 그 말에 희한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모습은 희미해졌고, 우리는 외딴 길가의 작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남자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여기야, 따라와." 그는 나를 향해 손짓했다. 좁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들이밀자, 정원 초과를 알리는 경보음이 울렸다.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야, 너 먼저 내려가 있어."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나는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천천히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이 열렸다. 모텔과 비슷한 공간이 드러났다. 시끄러운 음악이 울려 퍼졌고, 반짝이는 전광판 아래로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몸에 강철을 덧댄 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곧바로 입을 열었다. "맡은 일은 끝냈습니다." 남자들 중 하나가 비웃듯 말했다. "그래, 강서야. 죽이고 온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 누군가, 형님이라 불리는 남자가 크게 웃었다. "말 안 해도 알아, 새꺄. 씻고 와라. 다음 작업도 얼른 가야지."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곳을 지나 내 방으로 들어갔다. 키카드를 삽입하자 방안의 불이 켜졌다. 나는 옷을 벗고 작은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줄기가 내 피부를 타고 흘렀다. 달라붙은 피들이 씻겨 내려갔다. 물 아래 드러난 내 모습은 어딘가 이질적이고 불완전했다. 내 몸의 반은 강철로 되어 있었다. 몸을 움직이니, 기계 부품들이 생체 조직처럼 유동적으로 움직였다. 샤워실 안에 비친 내 얼굴의 반 역시 금속으로 덮여 있었다. 피부를 도려내고 깊이 박혀 있었다. 거울 앞에 놀란 얼굴의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우욱—" 그제야 구역질이 몰려왔다.
#2.
"자, 기도하자.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테이블에 여섯이 둘러앉았다. 장로는 미소를 띤 채 식전 기도를 이어갔다. 모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나도 깍지를 끼고 그들 곁에 섞여 있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언제부터였을까. 누군지도 모를 신에게 기도하는 내 모습에 지독한 환멸을 느꼈다. 여기 앉은 이들 중, 지금 기도하는 신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의문이 떠올랐지만, 곧 나는 그 질문도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내 앞에 앉은 어린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어른들의 기도문을 서투르게 따라 하고 있었다. "메카네 님…" 아이의 작은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나는 목구멍 깊숙이 치밀어 오르는 헛웃음을 애써 참으며 기도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이 부르짖는 신은, 나에게 있어 그저 허울뿐인 존재였다. 물론 이를 일부러 발설하지는 않았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업무가 시작된다. 삐걱이는 기계음과 함께 모두 생산라인 앞에 모였다. 우리는 쏟아지는 부품들을 조립했다. 목적도 출처도 모르는 부품이었다. 생산성이라고는 없는 반복되는 단순한 작업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주변의 소음이 거슬릴 정도로 시끄러운 게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그리 교육 받았다. 생각할 이유는 잊는다. 나보다 높은 자의 말에는 무조건 복종한다.
공격한다. 싸운다. 그리고 죽인다.
오전 업무가 끝나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린다. 나는 채권자들을 찾아갔다. 빚을 갚지 못한 그들의 몸 깊숙이 추적용 칩이 심어져 있었다. 각서를 쓰는 순간, 그들의 몸에 강제로 박아 넣은 것이다. 언제나 사전 공지를 해주지만, 이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밑바닥에서 사는 놈들은 언제나 생각이며 행동이며 똑같다. 그들에겐 도망칠 곳이 없었다. 도망치는 자는 어디든지 찾아가 반드시 죽인다. 그만큼 우린 터무니 없이 비싼 돈을 빌려주었다.
물건이 날아왔다.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이 썅년이! 갚는다고! 갚는다고 했잖아! 다짜고짜 와서 갚으라고 하는 게 말이야?!" 순조롭게 끝날 것 같던 일이었지만, 채권자 하나가 식칼을 휘두르며 발악했다. 시궁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더니. 형님이 비웃으며 말했다. "너보고 썅년이라는데, 강서야?" 나는 말없이 다가갔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될 대로 되라는 듯 남자가 식칼을 들고 돌진했다. 나는 팔을 들어 칼날을 막았다. "어, 어떻게—" 식칼이 튕겨나갔다.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남자의 면상에 주먹을 꽂았다. 남자는 벽에 부딪힌 뒤 무너져 내렸다.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푸핫!" 형님이 조소를 터뜨렸다. "그걸 진짜 덤비네. 강서야, 네가 만만했나 보다?" 주먹질 한 방에 전의를 잃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머리채를 잡고 눈을 맞췄다. 남자가 질질 눈물을 흘리며 숨을 들이삼켰다. "어, 어떻게… 칼이 저리로…" 형님이 튕겨나간 식칼을 집어 들었다. "넌 모르겠지. 겉으론 멀쩡해 보이니까 말이야." 형님이 식칼을 남자의 뺨에 가져다 댔다. "하여간 한국이 살기 좋아졌다니까. CCTV 깔린 덕에 니들 같은 새끼들이 우리 만만하게 보네, 안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우리, 피부가 얼마나 연약한지 보자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형님이 칼로 남자의 뺨을 그었다. "아아악!" 남자의 비명이 집에서 울려 퍼졌다. 형님은 신기하다는 듯 남자의 피부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봐라. 날붙이 하나도 못 막아내는 게 인간 피부지. 안 그래, 강서야?" 그리고는 식칼을 다시 움직였다. 날카로운 금속이 살을 가르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슬쩍 안방에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을 느끼고 누군가 급히 문을 닫았다. 듣기로는 남자의 어린 아들일 것이다. 저 아이가 이 상황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3.
여자아이가 웃으며 텔레비전을 바라봤다. 다른 아이들도 거기 있었다. 나는 그들을 문에 달린 창으로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형님이 이죽거리며 캔커피를 들어 보였다. "커피 사 왔다." "아,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커피를 받아 들었다. 따지는 않았다.
"애들은 좀 어때?" 형님이 슬쩍 창 안을 살폈다. 그러고는 웃었다. "한창 클 때지. 재밌는 거 많이 볼 때고." 나는 뭐라고 대답할지 애매모호했다. 그저 "그렇죠."라고 짧게 맞장구를 쳐줬다. 형님은 별 대꾸도 없이 손에 쥔 캔커피를 마셨다. 형님이 말했다. "내가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저 녀석들은 무탈 없이 컸으면 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모습을 보더니 형님이 웃었다. "하여간 이짓거리도 이제 그만할 거다." 그 소리에 나는 놀랐다. 형님이 꺼낸 말은 이곳에서는 금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어찌할 방도를 몰랐기에 그저 당황한 내 얼굴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자기 머리카락을 매만지고는 말했다. "새꺄, 너도 알잖아. 여기 이상한 거." 형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반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꺼낸 이상 형님은 모두에게 적의를 노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숨을 삼키다가 되물었다. "왜 입니까?" 형님은 입을 열었다. "나이 먹다 보니까, 철 좀 들었나 봐."
형님의 시선은 여전히 아이들을 향해 있었다. 형님은 평소 같은 말로 얘기했다. "도망이나 칠까, 둘이서." 형님의 손은 내 허리를 향해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4.
메카네는 없다.
나는 알고 있다. 메카네는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이곳의 장로와 그의 부산물을 처먹는 자들을 위한 말뿐인 수단이다. 규격화는 메카네에게 닿을 수 있는 수단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기계를 대체할 수 있는 인간이 필요한 것뿐이다. 인간의 육신을 벗겨내고 금속을 삽입한다. 그로 인해 그들은 신도가 탈출해 사회로 돌아가는 걸 방지하고,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말로 깎아내고 조립한다.
나는 이곳에 살면서 식전기도를 올릴 때도, 메카네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도, 낭독할 때도, 잘 때도, 씻을 때도, 채권자를 팰 때도, 매일, 매순간, 매초를 깨닫고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방안을 둘러본다. 창문은 존재하지만 커튼을 열어젖혀도 밖은 보이지 않는다. 그건 이곳이 그저 지하이기 때문이었다. 창문을 열어도 땅 때문에 보이지 않는 건 당연했다. 동시에 이질적인 구조였다. 어째서 이런 식으로 건물을 설계한 건지 매일 궁금해했었다. 이제는 안다. 그들은 그저 신경 쓰지 않아서다. 이곳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든, 언제든지 폭삭 무너질 수 있는 환경임에도 그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건물이 무너지면 또다시 지으면 되는 거고, 신도가 사라지면 또다시 유입시킨다. 돈이 모자르면 다른 사람들을 패서 뜯어내고, 불법 도박 사이트를 만들어 돈을 뜯고, 사람을 죽이고 해체하고 돈으로 만든다.
나는 다시 입에 읊조렸다. 메카네는 없다.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문을 열자, 말쑥해 보이는 신도가 앞에 서 있었다. 신도가 잔뜩 화난 얼굴로 말했다. "나와. 이영석이 배신했다. 이단을 처단해야해." 신도에 입에서 형님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결국 그가 잡혔나 보다. 나는 말없이 신도의 뒤를 따랐다. 탑승한 엘리베이터는 더욱더 지하로 내려갔다.
얼마 뒤, 조그마한 방이 보였다. 그곳에는 기계를 몸에 삽입한 신도 두 명과 함께 의자에 묶인 형님의 모습이 보였다. 형님은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재갈이 물린 채로 고통스러운 듯한 눈동자로 날 바라봤다. 신도 하나가 소리쳤다. "피를 흘리는 게 말이 되냐! 메카네를 배반한 이단자!" 그는 정말로 메카네를 신처럼 따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와 모습에서 광기가 넘쳐흘렀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신도의 말을 흘러 넘겼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연설이 끝나고 나는 형님에게 다가갔다. 형님은 지친 기색이었다. 그의 몸은 옅긴 하지만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절반은 기계였다. 나와 비슷한 처지였다. 형님의 몸은 전에 채권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식칼로 난도질 당해 있었다. 형님에게 묶여 있던 재갈이 풀렸다. "가, 강서야! 난—" 나는 말없이 형님의 얼굴을 때렸다. 강철로 이루어진 오른팔이 형님의 얼굴과 부딪히자 거슬리는 쇳소리가 났다. 의자가 고꾸라졌다. 신도가 소리쳤다. "한 번으론 죗값을 치를 수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형님의 얼굴을 계속 가격했다. 형님의 머리에 감싸던 쇳덩이도 서서히 뭉개졌다. 열일곱 번 정도 주먹을 휘두르니 형님의 머리에서 우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내던 신음도 점차 잦아들었다. 내 몸엔 기름인지 피인지 알 수 없는 오물들이 묻었다.
나는 옷깃을 털고 일어났다. 죽은 형님의 발치에 무언가 떨어졌다. 꾸깃꾸깃 접힌 종이뭉치였다. 편지인지는 모르겠다. 그것에 무심코 손을 뻗으려 했을 때, 신도 하나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신도가 말했다. "이단은 아직 한 명 더 남았다." 그러고 그가 보여준 것은 항상 내 앞에 앉았던 그 여자아이였다.
"응당한 죗값을 치르게 해라." 신도는 두말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평소처럼, 형님을 죽일 때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하지 않고…
…
…
…
…
…지긋지긋했다.
제145K기지는 오늘도 정처 없이 바쁘다. 박선정 요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연말이 돼서 일이 또 터졌네. 어, 안 끝나. 아주."
부쩍 들어 연말에 사건사고가 자주 터지더니, 이제는 아예 범죄 조직 하나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잡혀들고 만 것이다. 사실 한 달 전부터 그 세력을 감지하고, 예의 주시하던 곳인지라 언제든지 잡아 쳐넣어도 이상하지 않는 상태였지만.
이건석 요원이 선정의 머리를 보고서로 툭 건드렸다. 그가 복도로 걸어가며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
"잔말 말고 일이나 해. 사후 처리부터 빡세다 아주."
"알고 있다구요, 우으…"
건석은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유 넘치기는. 따라와."
"상황은 대충 알지? 부서진 신의 교단에서 굴러 나온 사이비 종교 잡은 거."
건석은 가면서 설명했다.
"잡느라 꽤 빡셌다, 진짜. 자기 은폐성 기술은 대체 우찌 알아낸 거야?"
선정은 잠시 눈을 흘기다가 건석에게 물었다.
"저희 혹시 어디 가는 거예요?"
"이번에 확보한 요주의 인물과 면담이 있어서."
그가 선정에게 들고 있던 보고서를 주었다.
"읽어봐."
선정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보고서를 펼쳤다. 그녀가 보고서를 읽으며 내용을 중얼거렸다.
"철강서… 이름이 뭐 이래요? …다른 신도들은 다 죽었네?"
"갇혀있던 아이들을 제외하면, 이 녀석만 유일하게 투항했어."
건석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가 혀를 찼다.
"아니, 했다고 해야 하나."
"무슨 말이에요?"
"죽기 일보 직전에 발견했었거든? 쇳파이프 같은 걸로 흠씬 두들겨 맞아서 의식 불명 상태였던 걸 건져 온 거야. 뭐, 자세한 건 따로 청소부 그짝 놈들한테 현장 보고서 받아서 보면 될 테고."
얘기를 하던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건석이 취조실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한쪽 팔을 깁스한 채 공허한 눈으로 벽을 바라보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궤멸시킨 조직의 신도였던 철강서였다. 건석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자리에 앉았다.
"제145k기지의 이건석 요원입니다. 이쪽은 박선정 요원이고요."
여자는 미동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건석은 얘기를 이어 나갔다.
"아이들은 무사히 구출했습니다. 걱정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겠고요. 이제는 좀 어때요. 이야기해 줄 맘이 들었습니까?"
강서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이제 둘을 향했지만, 여전히 인간적인 반응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침묵하던 건석은 웃으며 넘겼다.
"좋아요. 알겠습니다. 이해했어요. 당신이 거기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말씀을 해 주셔야 저희도 진도를 나갈 수 있겠습니다만—"
강서가 입을 열었다.
"상관없습니다. 죽일 거면 죽이시죠."
선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기요. 저흰 그렇게 악랄한 기관이—"
건석이 손을 들어 올렸다. 선정은 기분은 풀리지 않았으나, 결국엔 입을 다물었다. 건석이 유쾌하게 맞받아쳤다.
"저흰 죽이지 않습니다?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이렇게 치료도 다 해주고, 아이들도 구출하지 않았습니까?"
"사악하게 말씀하시는 재주가 뛰어나시네요, 선배님. 그런 말투로 말하면 다들 오해한다고요."
"아, 그래? 그럼 반말하고."
강서는 입을 다물었다.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부서진 뒤였다. 순응과 적응만이 그녀의 유일한 장기였으니까.
허나 이윽고 건석이 꺼낸 말은 좀처럼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이름 철강서, 나이 스물일곱, 부서진 신의 교단에서 파생된 범죄 집단의 신도. 불법 무기 개조와 판매, 불법 사채,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 폭력, 살인, 시체 유기… 이야, 완전 엘리트시네. 보기와 다르게. 사법으로 처리했으면, 최소 무기징역에 최대 사형까지 족히 나올 수준인데?"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이제야 사람다운 말이 나오네. 감옥은 편했냐? 넌 이제 합법적인 절차를 밟고 공식적인 범죄자가 된 거야. 축하해."
건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그건 싫어. 난 그게 싫어. 근데 말야. 아직 쓸 수 있는 놈은 써야지. 넌 쓸만해 보이고."
"여기서 일하라는 말입니까?"
"겠냐? 우리도 급은 가려서 고용해.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선정이 우물쭈물 건석을 제지했다.
"선배…! 욕하려고 온 게 아니라구요…!"
"알고 있다고. 그래도, 네가 그렇게까지 나쁜 새낀 아닌 것 같거든. 아일 감싸다 그렇게 됐다고… 뭐, 단편적인 얘기라 더 진행해 봐야 알겠다만은… 아, 맞다. 야, 너. 이거 받아."
강서의 앞에 파일에 담긴 종이가 놓여졌다. 그녀가 파일을 열며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네게 기회를 줄게. 존나 고생할 기회를. 최소한… 사람답게 살아볼 권리를 주는 거야."
건석은 취조실 문을 다시 열고는 걸어 나갔다.
"담배 피고 온다. 10분 주지. 맘 안 바꾸면 넌 그대로 유치장행인 거고."
"선배, 진짜! 갑자기 자릴 비우시면—!"
"10분이면 꽤 길다? 선택할 시간은 넉넉해."
건석이 나갔다. 강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파일을 열고 나온 보고서로 향했다.
「프로젝트: 와일드 헌트」
프로젝트: 와일드헌트는 SCP 재단 대한민국 지역사령부의 특무작전사령부, 요주인물 감시과 등 재단의 주요 부서들의 합동으로 계획 중인 프로젝트로, 재단에 의해 구금된 요주의 인물 및 변칙 개체들을 대상으로 기동특무부대를 편성하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이는 기존 기동특무부대들이 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큰 여러 임무를 대신 수행하여, 수감된 인원들을 적극적으로 재활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둔다.
1945년도, SCP 재단 한국사령부가 창설되고 재단이 한반도 일대의 변칙 문제를 관할하게 된 이래로…
.
.
.
"결정은?"
"…하겠습니다."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순응과 적응만이 그녀의 유일한 장기였다.
아,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메카네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