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톡
조심스럽게 고추를 딴다. 따기 전까지 보인 쪽은 깨끗해보여 기분좋게 땄지만 아니나 다를까, 반대쪽으로 돌려보니 탄저병이 하얗게 일어나있다.
"에효…"
그래도 지금까지 딴 것중에서는 성한 녀석이었기에 바구니에 담아둔다. 이정도면 건조 후에 가위로 잘라내면 가루로 낼 때 문제 없다. 문제는 이것보다 심각한 녀석들이 수두룩 하다는 거지.
"에구구-"
노인은 허리를 피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1200평 정도 되는 고추밭이 펼쳐져 있다. 듬성듬성 비어있는 곳들은 탄저병이 너무 심해 아예 고추대를 뽑아낸 자리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딴 고추는 기껏해야 100근 정도.
"아주 망했구만."
여태까지 농사를 지으면서 이렇게까지 탄저병이 온 건 올해가 처음이었다.
2.
위이이잉-
뜨거운 열을 뿜어내며 연신 돌아가는 건조기를 뒤로하고 노인은 창고 하우스에 바구니를 내려놓는다. 저 건조기가 다 돌아가면 곧바로 지금 딴 고추들을 넣어야 한다. 어물쩡 거리다가는 딴 것들에서도 탄저병이 돌아 그나마도 못쓰게 되니까.
드르륵
"원장님 계십니까?"
"여깄수다. 늦게왔고만."
하우스 문이 열리고 한 청년이 들어온다. 노인은 그에게 시선하나 주지않고 수돗가로 다가간다. 청년이 먼저 나서 수돗가에 설치된 고무호스를 끌어 노인에게 간다.
"고마워. 이제 이거 씻고 건조기 돌리고 약주면 끝이여."
"원장님. 최교수가 원장님을 찾으십니다."
"거, 도와주는거 아니면 부르지 말라고 말했는데 왜 자꾸 불러재껴. 탄저병 약이라도 새로 만들었댜?"
"아뇨 원장님. 그런거보다는 좀 더… 심각해보였습니다."
그제서야 노인은 고개를 들어 청년을 쳐다보았다. 청년의 뒤쪽으로 트럭 한 대가 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 과장이 직접온 거 보니께 보통일은 아닌거같구만… 얼마 안되는거 세척이랑 건조기 돌리는거까지만 부탁혀도 될까?"
"물론입니다, 원장님. 하지만 고추들 상태가-"
"팔거 아녀. 그런거 팔면 욕만 먹으니께 올해 김장 때랑 내년까지 먹을거로 둘거여. 그정도 양이 될지는 모르겄지만은."
"알겠습니다, 원장님."
"부탁혀. 갔다오면서 새참 사가꼬 오께."
청년의 뒷말은 듣지도 않은채 노인은 맥고자를 벗어두고서는 잰걸음으로 트럭으로 갔다.
"바쁘신데 이렇게 불러서 죄송합니다, 원장님."
"으응, 아녀. 어차피 올해 농사 글러서 오늘 내일 따고 싹다 뽑을 생각이었거든. 그려, 무슨일이여?"
"일단 타시지요.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려그려. 손녀가 사가지고 온 빵 하나 주까?"
"감사히 받겠습니다."
두 사람이 올라타고 트럭은 출발했다. 노인은 가방안에 있는 안경을 썼고, 그에 맞게 운전수는 뒷좌석에 놓여진 서류 한장을 건네주었다.
"이번에 창고들 매입하려고 정리하던 중에 2대 원장님 서류들이 새로 발견되었습니다. 그중에서 1973년 자료도 보게되었고요."
"아직도 그런게 남아있었단 말이여?"
"남아있었더랍니다. 그래서 자료 정리중에 최교수가 뭔가 보고는 급하게 올해 퍼진 각종 병들의 균 샘플들을 모아 분석하시더랍니다. 그리고 나온 1차 결과가 그 보고서입니다."
"어디보자. 흠…"
노인은 눈을 연신 비비며 보고서를 읽어나갔다. 그러다 점점 표정이 굳어지더니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무표정하게 안경을 벗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거 누구누구 알고있는가."
"최교수와 휘하 연구원 9명, 저, 그리고 방금 원장님까지 12명일겁니다."
"최교수가 나에게 남긴 말은 없었던가."
"현재 계신분들 중에서 1973년 병에 직접 대응하신 분은 원장님 포함 원로 열 분이 끝이고, 그 분들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려? 그러면 바로 대의원 소집혀."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운전수는 폰을 꺼내들었다.
"소집되기 전까지 잠깐 내 집에 갔다가 최교수한데 가보지."
"알겠습니다."
노인은 좌석 시트에 몸을 기대 잠시 눈을 붙인다. 잊고있던 기억들이 노인의 머리속을 헤집고 있었다.
3.
웅성웅성
마을 회관 회의장. 20여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다같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습은 시국을 여실히 반영해주고 있음과 동시에 그들의 표정에서 현 상황이 매우 심각함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원장님 오십니다. 대의원 여러분들 착석해주십쇼."
한 청년이 들어와 외친다. 외침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사람들은 의자에 착석한다. 이윽고 앞문이 열리고, 노인이 들어온다. 그 뒤로는 하얀색 연구복을 입은 장년 한명과 청년들이 뒤이어 들어와 빈 자리를 채워 앉았다.
"그려, 다들 잘 지내는가?"
"말도마십쇼, 원장님. 뭔 놈의 탄저병이 그리 독한지 하우스에서 지은거 빼고는 싸그리 망했습니다."
"옥수수나 토마토도 전멸이에요 전멸."
"참깨도 망해서 이거 올해 어떻게 대출상환금 막을 수 있을련지…"
노인의 인사말에 여기저기서 탄식섞인 말들이 터져나왔다. 노인은 조용히 그들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나도 올해 고추농사 망했고마. 근데 전반적으로 다들 농사가 흉작인게 이상하다 생각 안혀?"
"뭐… 올해 장마가 좀 길었답니까."
"그거 관련해서 다들 불렀어야. 최교수. 시작혀."
"네, 원장님."
최 교수의 신호에 뒷문에 서있던 조수가 회의실의 불을 껐다. 그리고 회의실에 설치된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더니 최교수의 설명이 시작됐다.
"올해 고추나 가지, 오이, 옥수수, 참깨 등등 여러 작물에 걸쳐 광범위하게 병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처음에는 유난히 긴 장마로 인한 병인줄 알았지만… 잠시 보시죠."
스크린이 넘어간다. 여러개의 원이 스크린에 띄어져있었고 원 안에는 세균으로 보이는 형상들이 찍혀있다.
"세균들의 구조는 모두 동일하게 생겼습니다만… 왼쪽 위부터 순서대로 고추, 토마토, 참깨, 오이, 가지, 부추, 옥수수. 그리고 어제 땅콩에서 채취한 세균들의 모습입니다."
"어… 전부 똑같잖습니까?"
한 의원이 말한다. 그러자 다른 의원도 입을 열기 시작한다.
"설마하니 저 병 하나로 작물들이 다 그 지랄이 난거는 아니겠지. 내가 학교는 제대로 안다녔지만은 그래도 다큐는 자주 봤거덜랑? 하나의 병으로 작물들이 다 작살났다고라?"
"신종 병인겁니까?!"
"농협새끼들 저런거 하나 파악 못하고 그냥 있는 약만 팔아 쳐넘겨서는-"
"다들 조용."
노인이 말했다. 지금까지 썼던 노인 말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고저없는 목소리로 순식간에 회의장을 침묵시켰다.
"계속혀, 최 교수."
"흠흠. 우려하신대로 한 종류의 세균이 맞습니다. 기존의 있던 병들과는 차원이 다른, 종을 가리지 않는 전염성을 가지고 약하게는 상품성 저하. 최악의 경우에는 싹다 죽을 정도의 치사율을 가진 병이지요."
"여기서 다들 주목해야 할 건, '신종'병이 아니라 그냥 '병'이라는 거여."
다시 원래 말투로 돌아온 노인. 최 교수가 신호를 보내자 회의실에 다시 불이 들어온다.
"그냥 병이라 함은 이미 있는 병이란 말씀이십니까?"
"여기서 76년도, 77년도에 벼농사 직접 지었거나 지었던 집안 있는가? 그 때 돌았던 병 있지 않았어?"
"도열병 말씀이신가요? 하지만 그 때 돌았던 병들은 다 약으로 잡았던-"
"그 약들, 본인들이 산거여? 아니면 정부에서 보상금 쥐어주면서 같이 준거여?"
"…후자였지요. 왠일로 정부에서 약을 다 주나 하면서 아버지가 툴툴거리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상하다 생각 안해봤어? 그 전까지는 약이고 농기구고 다 자기 손으로 사라 하고 지원 하나 안해줬던 작자들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정부가 우리 생각한거 봤어?"
딸칵
노인은 물병을 따고서는 병의 반을 들이마셨다.
"지금 도는 병, 그 때 돌았던 그 망할 전염병을 기초로 어떤 써글놈들이 다시 이것저것 스까서 만든거여. 그 때 재단이랑 손잡고 신종 도열병 약 만들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나였고."
4.
"설마 피어슨 늑약의 재단을 말씀하시는건가요?"
최 교수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년 연구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재단? 재단이면은-"
"SCP인가 뭔가하는 곳 있잖여. 거기에 걸리지않게 항상 조심하라던."
"방재원이랑 다른건가?"
다시한번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이번에는 그들에게 어떤 말하나 꺼내지 않고 노인은 조용히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맞어. 그 재단이여. 그 때는 재단이랑 박통 정부랑 손잡고 있던 때여서 아예 번듯한 합동 연구소 하나 만들어서 그 병 연구를 했었지. 그러고 나온게 그 약인디… 중요한건 그게 아니지. 최 교수. 내 하나만 물어보지."
대의원들의 시선이 최 교수에게 쏠린다. 최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다.
"말씀하십쇼, 원장님."
"약은 만들수 있는가."
"만들수 있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최 교수의 모습에 대의원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노인은 계속해서 질문해나갔다.
"내년 3월 초, 모판에 고추 씨 뿌리기 전까지 적어도 두레원 내 사람들에게 뿌릴 정도의 양을 만들수 있는거여?"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럼 5월, 모종 심기 전까지는?"
"적어도… 내년 3, 4분기까지는 가야할 듯합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가진 기자재들 가지고는 양산은 힘듭니다."
"그렇구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노인은 답했다. 다시 한번 회의실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우리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구만."
"원장님. 그래도 노력하면 1차 양산분이라도 상반기 내에-"
"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의견하나 내지."
최 교수의 말을 끊고 노인은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약 자체는 나왔고 보고서도 있어. 나는 이걸 방재원과 재단에 인계해서 양산을 요청하면 어떨까 하는디. 임자들 의견은 어떤가?"
노인의 말 직후 제일 먼저 나온 반응은 연구원들의 탄식이었다. 그리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활발한 의견 교류'들이 시작되었다.
5.
"최 교수, 아직도 기분이 안풀린거여?"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원장님."
"그럴리가 있기는 개뿔이. 얼굴에 불만있소-하는게 다 보이는구만."
회의는 표결로 끝이 났다. 농민 출신 대의원이 과반수를 넘기고 그들은 모두 재단과 방재원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찬성했다. 연구원 출신의 대의원들도 처음에는 극렬히 반대했으나 연구원 파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최 교수가 침묵하는 것을 보고 결국 기권하거나 극소수의 반대표만 던졌다.
"반대가 심할 건 알고있었지만은… 찬성이 하나도 없을 줄은 몰랐고만."
"예상하신 결과 아니신지요. 재단에 좋은 감정을 가진 연구원은 자립농합연구조합 시절 원로 중에도, 두레원이 된 뒤에 들어온 이들 중에도 없으니까요."
"마치 나는 좋은 감정이 있는거처럼 말하는구마."
"저는 그저-"
"갈등을 목적보다 우선시하지 말어."
트럭 뒷좌석에서 가방을 꺼내오는 노인은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 사람들이 주장하는 농민을 위해서 변칙 개체의 자유로운 사용이나, 내 짝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방재원과 협력하여 농민과 살아가는 것이나. 결국 근본은 농민을 위한다는거 아닌가?"
"…그렇습니다."
"재단은 나도 싫구만. 내가 80년대 때 내 선배 연구원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데 좋을리가 있나. 하지만 그 선배들은 그러면서도 농민이 우선이었어. 오늘 자리에 참석 못한 선배들도 재단 욕을 신명나게 하면서도 결국 찬성을 했을거고."
"…"
"무슨 말인지 알겠쟈? 그러면 최 교수 자네가 뭘 해야할지는 잘 알고 있겠지?"
"반대표를 던진 휘하 연구원들과 참석 못한 연구원들을 설득하는거 말씀이시군요."
"그랴. 만약 설득 안된다 하면 나한데 데려와. 술이든 고기든 먹이면서 풀면 어떻게든 풀리지 않겠나."
"제 선에서 최대한 설득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원장님. 연구원 대의원들이 말한 선행 조건의 해결법은 어떻게-"
띠리링~
최교수의 말을 끊고 울려퍼지는 핸드폰 벨소리. 노인은 가방에서 폰을 꺼내들고 누군지 실눈을 뜨며 화면을 본 뒤 받는다.
"어, 그랴. …벌써 왔다고? 거 성미 급하구만. 그러면 바로 그 쪽으로 갈거니까 좀만 기다리라."
톡
"최 교수, 미안한데 다시 밭으로 가야겠어. 손님이 왔다는구만."
"손님이요?"
"김장철때나 와서 사가는 손님인데 올해는 이르게 왔구만… 같이 가서 만나볼텨?"
"아뇨. 저는 농부가 아니라 그쪽 일은 잘 모릅니다."
"평범한 손님은 아녀."
노인은 가방을 다시 뒤로 넘긴다.
"자네랑 연구원들이 생각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줄 손님들이구마."
6.
"할머니!"
"최대한 빨리 온다고 온건데 조금 늦었구만. 손님들은?"
20대 초 쯤 되는 아가씨-손녀는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노인을 보고서 환히 웃으며 다가간다.
"일단 고춧가루는 계약된 양은 도저히 안될거같다고 말씀드렸어요 . 배추랑 무는 그래도 잘 크고 있어서 김장 준비에는 문제 없을거 같은데-"
"그랴. 나 없는 사이에 응대하느라 고생혔다."
노인과 아가씨가 이야기하는 동안 최 교수는 비닐 하우스 안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빵모자를 쓴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한 여자와 녹색 눈의 외국인 여자, 그리고 그 뒤에 다소곳이 서있으며 시루떡을 우물거리고 있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인. 그리고 여러 젊은이들이 비닐 하우스 안에 놓인 농작물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빵모자를 쓴 여자가 말린 고추 상태를 보다 노인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계약이랑 너무 다른 거 아냐, 이건?"
"미안하게 됐구만. 근데 올해 병이 심하게 왔어야."
"그래도, 허… 다른 건 좀 나은가 했는데."
"올해 멀쩡한건 아마 들깨정도밖에 없을거여. 그거라도 주까?"
"들기름에 밥이나 비벼먹으라고?"
분명 노인보다 한참 젊어보임에도 거리낌없이 노인을 대하는 빵모자 여자를 보며 최 교수는 내면에서 올라오는 장유유서적인 욱함을 잠시 눌러담고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쪽은 우리 최 교수여. 농생물학과 전공이고."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쪽은 호야라고. 내 단골이여."
호야라고 불린 빵모자 여인은 모자만 슬쩍 올리고서는 시선을 다시 노인에게로 돌렸다.
"고춧가루가 없으면 김장때 배추절임만 해먹겠는데. 다른 곳도 이 꼬라지인거 같고."
"안타깝게도 그리 됐구만. 그나마 멀쩡한건 하우스 고추밖에 없을거여."
"씁… 뭔 병이 거지같이 와서 이 모양이야."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부탁할게 있는데 말여."
노인은 손녀에게 손짓한다. 손녀는 잠시 노인과 호야를 둘러보더니 한숨을 폭 내쉬고는 비닐하우스 밖으로 몸을 돌린다. 비닐하우스의 문이 닫히는걸 본 노인은 다시한번 입을 열었다.
"최 교수. 다시 소개하지. 여기는 능구렁이 손이라고 재단이랑은 다른 변칙 조직이여."
노인의 말에 최 교수는 순간적으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능구렁이 손? 재단이랑은 무슨 관계인거지? 방재원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있나?
노인의 말에 호야는 품 속에서 담배 한가치를 꺼내 꼬나물었다.
"외부인은 아니겠지."
"같은 두레원 가족이여."
"두레원이라. 그 이름은 한동안 안쓴걸로 기억하는데."
"상황이 그렇게되서 말이여."
"그러면 이제 그 이름을 쓸 때가 왔다는 말이군."
후우-
"원하는게 뭔데."
여우가 묻는다.
7.
보고서를 건네받은 호야는 보고서를 다시 단원들에게 나눠 주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만 가득한 하우스 안에서 제일 먼저 입을 연 이는 노인이 오고나서도 조용히 관망하던 녹색눈의 외국인 여자였다.
"풀무치네."
몇 장 훑어보며 말하는 외국인 여자에게 호야가 되묻는다.
"모리안, 확실한거야?"
"몇 년전부터 좋은 샘플을 얻었다고 이야기 했었거든. 그 때 보여준 자료랑 일치하는데."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훑은 호야가 노인에게 묻는다.
"올해 고추랑 다른 작물들 박살난게 이 병에 걸려서 그런거야?"
"그려."
"씨발."
걸쭉하게 욕 한마디 뱉어낸 호야는 손에 쥐고있던 나머지 보고서를 뒤의 단원들에게 넘겨주고는 담배재를 휴대용 재떨이에 떨었다.
"이걸 해결해달라는거면 우리도 힘들어. 뱀굴이랑 이 놈들이랑 손을 잡아서 함부로 행동하기에는 제약이 있단 말이지."
"언제부터 그런걸 신경썼다고?"
"저기 떡 남은거 들고 바깥으로 꺼져."
"원흉이 따로 있었구마. 하지만 부탁하고 싶은건 그게 아닐세. 그것도 꺼내주게."
이번에는 농약통을 꺼내든다. 농약통을 받아든 호야는 통 속 액체를 몇번 흔들어보았다.
"벌써 약을 만든건가."
"기초로 잡은 병은 내가 연구소 막내였을적에 잡았던 병이었으니. 여기 최 교수가 과거 기록을 찾아내고서는 힘좀꽤나 써줬지."
"대단하네. 초상관련 기기들은 없었을텐데 바로 약을 만들어낼 정도라니. 그래서 이걸 가지고 뭘 부탁하려는건데."
"나는 이걸 방재원이랑 재단에게 전해주고싶구마."
노인의 말에 호야와 모리안이라고 불린 여인, 그리고 하우스에 있던 이들이 모두 정지했다.
"…왜 하필 옥리지."
"양산을 위해서. 그동안 내가 봐온걸로는 댁들은 일단 연구원도, 그렇다고 뭔가 양산하는 조직은 아녀, 그치?"
"아니… 씹."
"우리는 이걸 양산해서 농민들에게 배포를 해야하는데 우리도 양산할만한 자원이나 기기가 없구만. 당장 이걸 양산하고 배포할만한 조직이 재단이랑 방재원 정도밖에 생각이 안나야."
"…"
노인의 말에 호야가 거칠게 머리를 긁적이며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만약 우리가 거절하면?"
"별 수 있나. 그러면 거래 초반에 있었던 외상값부터 받아내고 약은 농협쪽이랑 협의를 해서 양산하는걸로 해야지."
"전자는 더럽도록 치사하고, 후자는 당신들의 목숨이 위험해질거같은데."
"그렇다고 손놓으면 내년에는 단체로 길거리 행이여. 소작농들은 올 한해도 힘들구만."
"제길…"
칙
"다른건 다 그렇다쳐도, 옥리- 재단이랑 접촉한다는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있겠지. 예전으로는 못돌아가는 길이야."
"알다마다."
"내가 듣기로는 너나 선배들이라는 사람들이 옥리한데 당한게 우리만큼은 못해도 혹독하게 당했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지금까지 지낸 가족들 죽는 소리를 무시할수는 없잖여."
후-
담배연기를 내뿜는 호야. 주변의 동지들을 슬쩍 둘러본다. 주변인들로부터 어떤 사인을 받았는지는 알수없었다. 그저 다들 떡을 들고 한입씩 입에서 질겅거리며 호야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옥리는 안돼. 방재원 가는 길까지만 알려주도록 하지."
"그것만으로도 고맙구마. 안그래도 반대하던 대의원들이 말한게 방재원이랑 연락 수단이 없다는 거였는데 말이여."
다시 한번 최 교수로부터 서류를 건네받는다. 이번 서류에는 [신 식물병에 대응하기 위한 재단/두레원 접촉 건에 대한 투표 결과 및 소수 의견 보고서]라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하. 당신들 내부에서는 이미 이야기가 끝난거였어?"
"그치."
"그러면 이 건은 모리안이-"
"파프리카도 키웠었네? 이거 얼마?"
"야."
"이 식재료들 창고에다가 정리하는 사람을 다른 일로 빼다니, 창고를 얼마나 개판으로 만들려고 그러는지."
"그럼 다른 사람들은-"
"고구마랑 가지랑 오이랑 호박을 나 혼자 옮기라고?"
"씨발."
다른 이들을 쏘아보자 그들도 시선을 피하고서는 하우스 바깥으로 나가 배추와 무를 보며 감평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호야는 허탈하게 웃으며 담뱃재를 털어낸다.
"그래, 내가 간다 가. 언제 갈건데?"
노인은 빙그레 웃는다.
8.
11월 어느 밤. 들깨를 베어내고 일찍 돌아왔지만 노인은 잠에 들지 않았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두꺼운 옷을 입고 손녀의 잔소리에 목에 목도리를 단단히 조이고서는 양손에는 무언가 잔뜩 들고 바깥으로 나선다.
가로등만 거리를 비추고 가로등 밖은 칙칙한 어둠에 깔려 아무것도 보이지않것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 차도가 있는 곳까지 걸어간다.
이윽고 도착한 큰 거리에는 택시 한대만 덩그러니 서있었다.
"원장님."
"고생만 시키는구만, 김 과장."
"아닙니다. 제 본업인걸요."
간만에 본 김 과장은 이번에는 택시를 끌고 노인의 앞에 나타났다. 뒤늦게 노인의 양손에 짐이 가득한걸 본 김 과장은 허둥거리며 짐을 받아들고는 뒷좌석에 실었다.
"안내자는요?"
"아직 안왔어?"
"방금 왔다."
가로등 너머 어둠속에서 두꺼운 코트에 빵모자를 쓴 여인-호야가 나타난다.
"준비된거지."
"물론일세."
"가자."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탄 호야를 따라 김 과장과 노인이 탄다. 이미 시동이 걸려있던 택시는 그대로 도로를 따라 나아간다.
"들깨는 잘된거같던데."
"들기름에 밥비벼먹을수 있어 다행인감?"
"망할, 그 말을 아직도 안잊고 있었네."
"뒤끝 긴 노인네라 미안하구만."
"아무리 길어도 나보다 길까."
한참을 달리던 택시는 이내 고속도로로 올라탄다. 조용히 창밖을 보고있던 노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하고싶은 말이라도 있는감?"
"오늘이 지나면 이제 일상이 사라질텐데 어떤 기분인가 싶어서."
"일상이 사라진다기보다는… 돌아가는 기분이구만."
노인은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뉘인다.
"원래는 농업기술연구소 막내로 들어가 별 이상한걸 다루고, 그러다가 남산의 요원들이나 재단이랑도 엮이다가 둘이 틀어져서 싸우나 싶더니 중정은 사라지고 우리는 지금까지 연구한것들을 들고 도망쳐왔네. 먼길이었지. 도중에 사라진 선배들도 있었고 자료들도 많았어라.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때 막내가 자료를 들고 중정- …아니, 방재원 샌님들이랑 재단 만나러 가는데 몇십년은 다시 젊어진 기분이여."
"…"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적어도 한번쯤 직접 만난 사람의 세대에서 만나야쓰거지 않겠나. 아무것도 모를 새파란 아들보다는 그래도 한번은 만난 사람들이 가서 인사는 해야 좀 더 반갑고해서 너그러워질줄 누가 알것나."
"그런가."
뭔가 말을 더 하려던 호야는 이내 입을 다물고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시계는 막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서 내려가. 그리고 내가 멈추라고 할때까지 쭉 가."
고속도로에서 내려 산길로 들어간다. 산길에는 가로등도 없어 택시의 안개등에만 의존하여 어둠을 뚫고 나아간다.
"정지. 여기다."
"아무것도 없소만?"
"교묘하게 흙길로 숨긴거지. 차 하나는 멀쩡히 들어간다. 좌회전."
호야의 말에 김 과장은 노인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부웅
거침없이 좌회전하는 택시. 흙길에 심하게 덜컹거리는 차체는 이내 금새 진정되어 나아간다.
"이런 길을 어떻게 숨긴거지."
"꼴에 국영폭력기관이라고 같잖은 술수를 쓰는군. 길 따라 쭉가면 건물 하나 나와. 거기야."
군인들이 근무를 서는 초소들을 스쳐지나 한참을 달리던 택시. 도로의 끝에는 지어진지 얼마 안된 건물 하나가 번듯하게 서있다.
건물 앞에 멈춰선 택시. 멈춰서자마자 호야와 노인이 택시에서 내린다. 노인은 뒷좌석에 놓여져있던 짐들을 들고서는 건물 입구로 걸어갔다.
"그건 그렇고, 군인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눈치 못챈거는 이상하구려."
"눈속임정도야."
"그렇구만."
"저 입구에 짐들을 내려놓으면, 환각들을 치울거야. 약속은 약속이니 나가고 나서도 추적은 바로 못하게 막아는 주지만 거기까지고, 그 이후의 있을 일들은 전부 당신과 당신 동지들의 책임이야."
"끌끌… 그래도 대변칙기구라는 작자들이 이렇게 눈치를 못채서야 쓰것나. 이거 선배로서 골려주는 맛이 각별하겠구만."
노인은 거침없이 건물 입구로 걸어갔다. 새벽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는 사람들이 이러저리 다니며 열띤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양복을 입은 이들도, 하얀 가운을 입은 이들도 연신 커피를 마시며 문 넘어로 사라지고 나타나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노인은 그 모습을 보며 과거의 자신을 기억해냈다. 자신도 저기에 껴서 일을 했었다. 한 쪽은 국가를 위한다는 사명감에, 한 쪽은 농민을 위한다는 사명감에. 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그 모습은 산산히 조각나 사라졌다. 필사적으로 도망쳐야했고, 그 과정에서 노인의 선배들은 사라졌다.
"그래도 다행이구만… 이렇게라도 다시 볼수 있으니 말이여."
막내 연구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노인만이 입구 앞 대리석에 서있었다. 이걸 보고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른다. 허나 적어도 국민을 위한다 생각한다면 이 약은 내년 5월 전에 농민들의 손에 쥐어지리라.
툭
짐을 대리석에 내려놓는다.
웨에에에에엥!!
그와 동시에 긴급사이렌이 울려퍼지고, 안의 인원들은 노인을 보며 경악하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노인은 과거 막내때마냥 장난끼가 돌아 그들을 보며 손을 흔들어준다.
"용용, 약올라 죽것지?"
"애도 아니고 뭔."
"당신에 비해서는 애 맞고마. 어여 돌아가자."
"네, 원장님!"
"급할 필요없어. 적어도 집 돌아갈때까지는 추적 못할거니까."
노인은 몸을 돌려 택시로 향한다.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리지만 건물 안에서 사람이 나올 기색은 보이지않는다.
택시는 왔던 길로 다시한번 돌아간다. 이번에는 환한 불빛들이 건물과 주변 도로들을 환히 비추었지만 택시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왔던 길로 다시 나왔다.
"약속은 지켰다."
"들기름 싼 값에 팔아주께."
"그 놈의 들기름. 모리안이 파프리카 맛있다고 다음에 또 달라하던데 다 뽑아버려."
"그것도 돈인데 그럴수는 없지."
"염병. 여기서 멈춰."
한참을 달렸을까. 고속도로 진입 직전까지 온 택시는 호야의 말에 속도를 늦췄다.
"나는 여기서 가보도록 하지."
"집까지 태워주께."
"내 집이 어디인줄 알고? 동료 불렀고, 사후 서비스는 확실하게 해놨어. 김장거리 예약만 준비 잘 해둬."
"그려."
호야는 차에서 내려 다시 가로등 너머 어둠 속으로 향한다. 그 뒤로 검은 고양이가 따라 갔지만 새벽에 고양이가 다니는것 정도야 이상한 일은 아닐터.
"그럼 우리도 가자. 고생 많았어, 김 과장."
"아닙니다, 원장님. 가시는 길 편히 모시겠습니다. 눈 좀 붙이시죠."
"그러까? 간만에 새벽에 몸을 움직이니 피곤하구만."
노인은 가죽 시트에 몸을 뉘였다. 고속도로위의 스쳐지나가는 가로등을 보며 노인은 눈을 감는다.
옛 추억을 기억하며 꿈속에서라도 선배, 동기들과 해우를 하기를 바라며 노인은 끼룩 잠에 들었다.
9.
밭을 넘어 산 전체가 울릴 정도의 엔진음이 귀를 강타한다. 맨 처음에 가져온 트랙터에 연결한 타작 기계는 조작 미숙으로 작동이 되지 않았고, 노인의 긴급 지원 요청으로 동네에 놀고있던 전기식 타작 기계를 끌고 와 막 시동이 걸린 참이었다.
"거 소리 더럽게 크네!"
"시끄럽고 들깨나 가져와! 막 가져와서 들깨 다 흩뿌리지 말고!"
"거 잔소리 더럽게 하네!"
"다 들린다!!"
20대 초반의 여인과 청년들이 한참을 투닥거리며 들깨를 옮기며 털어낸다. 노인은 나무 밑에 앉아 그저 허허 웃으며 그들을 바라본다.
원래같으면 자신도 저기에 끼어 혹여나 제대로 나오지 못한 들깨를 털어내려 했으나 손자 손녀들의 거듭된 설득으로 이내 못이긴다는 듯이 맥고자만 머리에 쓴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부웅-
시끄러운 타작 기계 사이로 차소리가 들린다. 노인은 커피가 담긴 보온병을 내려두고 자신들이 들어온 진입로로 시선을 돌렸다.
쌔까만 차 두대가 연달아 밭 입구로 들어온다. 손자 손녀들은 소리에 파묻혀 차들이 들어오는지 눈치를 못챈다.
노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들로 몸을 돌렸다.
덜컹
안에서 차색과 똑같은 색의 양복쟁이들이 내렸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린다.
"거, 옷 차림새는 남산때랑 달라진게 없고만."
"두레원 원장님 되십니까."
"고렇구만. 뭐, 들깨라도 사러 왔는감? 아쉽게도 저거는 선약자가 있어야."
"잠시 이야기 좀 나눌수 있을련지요."
"당신들 뭐야. 방재원이야?"
뒤늦게 차량들의 존재를 눈치챈 젊은이들이 들깨를 내려두고서는 우루루 몰려나와 노인을 감싼다. 그 모습에 검은 양복의 요원들이 잠시 당황한다. 노인은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린다.
"클클.. 남산때랑 다르게 많이 물러졌구만. 너희들은 마저 일하러 가그라."
"할머니!"
"귀 안먹었다. 이 양반들은 진짜 이야기만 하러 온거같으니께 걱정들 말어. 저거 채질까지 하려면 한참 걸릴텐디? 어여 끝내고 밥묵으러 가자!"
노인의 말에 젊은이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로 일터로 돌아간다.
"그려. 이 차는 방재원에서 온거고. 저 뒤는 누구 차여? 재단?"
"…맞습니다."
덜컹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기묘한 가면을 쓴 검은 양복의 사내와 남색 긴 생머리의 하얀 가운을 입은 여인이 내린다.
"안녕하십니까. SCP재단 한국사령부 외무부에서 왔습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수 있을련지요."
"허허…"
노인은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높은 하늘이 펼쳐져있었다.
"그려 무슨 이야기가 듣고싶어서 여기까지 왔는가?"
옛날 이야기는 노인의 전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