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뺨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아이가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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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새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소년의 뽀얀 뺨이 붉게 물들었다.
   화단의 노란 꽃들이 붉은 피를 머금었다.

    열다섯 살 어린 소년의 몸이 택한 곳은
  꽃들이 만개한 화단이었다.

      아직 뺨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아이가
              몸을 던졌다.

        어느 화창한 봄날, 맑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


대한민국 소재의 모 기지 산하 응용물리학 연구센터는 바쁘게 움직였다.

황급히 분향소가 차려지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돌아가며 조문을 했다. 스케줄러가 애쓴 덕택에 정상적인 연구 일정과 격리 활동은 차질이 없이 진행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몸으로 들어오지 않고, 대신 근조 화환에 달린 긴 리본에 이름이 적혀서 나풀거리며 들어왔다.

재단은 직원들에 대한 정보 확산을 막는 일에 무기력했다. 아침에 연구팀장이 알던 것은 점심에는 팀원이 알고 있었다. 경비원들이 쑥덕거리던 그 이야기는 경비대장에게 들어갔다. 센터장이 뒤늦게 서면으로 받은 대외비 문서는 센터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래서, 나이가 ───"

"올해로 열다섯 살 되는 아입니다."

센터장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 저번에 그 특채로 뽑혀온 애들 중 하나지?"

"예, 소위 신동이니 천재니 하는 애들 모아서 연구 가르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재단에 애들은 왜 불러 가지고…"

그때 마침 한 사람이 들어선다.

"어우, 늦었습니다 이거… 오는 길에 그 뭐냐, 녹색재단 자전거 앞바퀴가 찌그러져 가지고."

"아유 아닙니다 인사과장님. 걸어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인사과장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그… 분향소에 한번 가 봤는데 말입니다, 이번에 죽은 아이가 재단의 영재 훈련코스 뛰던 자원이였죠 아마?"

센터장은 인사 파일을 뒤적이면서 멋쩍게 대답했다.

"그럴 겁니다 아마… 아, 아니군요. 작년에 프로그램 수료하고 올해부터 유클리드급 SCP 격리동에 배치받았던 앤데, 격리에 필요한 계산 시스템의 디벨롭을 맡겼었습니다. 한 달 전부터는 그 친구 사수가 전보 조치돼서 혼자 담당하게 됐고요."

"이거 문제군요. 이런 자원이 몇 명이나 더 있죠?"

"지금 현장배치된 애들만 따지면 여덟 명인가 됩니다. 두 명은 유클리드급이고 나머지는 전부 안전입니다. 다른 부서 쪽에서 협조받아 온 애들이 그 중 셋입니다."

"…지금 기지 지통실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감독관님이 여기까지 쫓아오실 분위긴데 말이죠."

둘은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의 입에서인지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그 애는 대체 왜 죽어 가지고."


도열해 선 직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감독관은 잔뜩 심기가 뒤틀린 표정으로 센터로 향했다.

"뭣들 하고 있어? 하여간에 내가 신경 안 쓰면 관리가 안 되지 관리가? 엉?"

"…면목없습니다."

"하여간에 자네들 말이야! 도대체가 월급 꼬박꼬박 받아 처먹으면서 하는 게 뭐야? 엉? 할 말 있어? 야 센터장, 뭐 할 말 있냐고 응?"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감독관님, 철저하게 상황 파악해서 다시는…"

"됐고, 야, 인사! 자넨 이 지경이 되도록 뭐 했어?"

인사과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제 불찰입니다."

"자네들 말이야, 이런 거 위에서 언론통제 해 주니까 아주 뵈는 게 없지 응? 바깥이었으면 벌써 기자들 들이닥치고 난리 났어! 일간신문 첫머리에 메인으로 뜬다고! 알아? 맹목적인 영재 콤플렉스 이대로 괜찮나, 이런 소리 나온단 말이야. 재단에선 이런 소리 안 나올 것 같아? 이거 중간에서 다 뒤집어쓰는 게 누군지 아나? 정신 좀 차려, 응?"

휘하의 직원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체 걔는 어떻게 죽었대?"

"오늘 아침 8시경에 7층 건물 옥상에서 화단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지랄한다. 애새끼가 혼자 옥상 올라가는 동안 자네들은 뭐 했어? 그보다 자네들, 애초에 우리 기지에 높은 건물 짓지 못하게 한 거 못 들었나?"

"아, 그것이 공사 단계에서 대외비를 위해 휴양 리조트로 위장하느라고… 바깥에 빙 둘러서 7층짜리 리조트 건물을 좀 지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어린아이들이다 보니 복지 차원에서… 그 건물로 입주시켰었습니다."

"…내일까지 그 건물 싹 다 비워. 알겠어?"

"예."

"격리 절차는?"

"…그 아이 보안 승인이 3등급이라 상당한 차질이 예상됩니다. 일단 컴퓨팅 프로토콜 상…"

"미친 놈들. 열다섯밖에 안 되는 애새끼한테 3등급 승인을 한 또라이가 대체 누구야?"

"그… 그게, 한 달 전에 선임 연구원이 다른 기지로 발령나서 티오가 하나 비기도 했고, 아직 어린애인지라 사기진작 차원에서 보안 승인을 좀 높여 주…"

"개소리 하지 말고, 앞으로 애들한테 뭐 맡길 때는 무조건 2등급으로 맞춰. 알아들어? 2등급이야."

"알겠습니다."

"유서는?"

"찾았습니다만 별다른 내용은 없었습니다. 엄마 아빠 미안해, 보고 싶어, 그 정도입니다. 이런저런 자잘한 얘기들이 많지만 결정적인 요인으로 볼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

기지 감독관은 좌중을 한 바퀴 둘러 노려보았다.

"…어쨌건, 죽은 놈은 죽은 거고, 난 오늘중에 그 새끼 인적사항 조회할 거니까 알아서 협조들 좀 잘 해 봐. 그리고 다른 자원들도 전부 싹 다 심리검사 실시해. 어? 야 인사, 이건 네가 맡아서 해, 알겠어?"

"예."

감독관은 몸을 돌렸다.

"하여간 자네들 잘들 해 봐. 우리 기지 실적이 밑바닥의 밑바닥을 기고 있는데 이건 뭐 그냥 다 같이 죽자는 거구만. 모레 다시 올 테니까 그때까지 대응책 마련해서 보고해."


함께해요 녹색재단!
에너지도 아끼고 환경도 보호하고!

어제 오늘 무사해도 아차하면 대형사고
실험 10대 원칙, 격리 10대 원칙 필히 준수

 

"우와 진짜 해도 너무한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애새끼가 뭐냐, 애새끼가."
"죽은 애만 불쌍하게 됐지 뭐. 어린애가 뭔 죄라고. 감독관님 진짜 다시 봐야겠네."
"몰라 그거? 우리 기지 감독관님, 완전 욱하는 성질 장난 아니잖아."
"그나마 이것도 나은 거래. 예전에는 재떨이 날아다니고 조인트 까이고 그랬다더라."

 

기지 여직원들의 수군거림은 탕비실 바깥까지 들렸다. 올해로 인생 경력만 16년째인 강 군은 조그마한 어깨를 펴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친근하게 대해 주었던 연구원들은 이제는 굉장한 골칫덩이를 대하듯이 대하고 있었다. 강 군은 기지 감독관이 자신 같은 아이들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이미 충분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그날 저녁부터는 갑자기 사근사근하게 태도가 바뀌었다. 미성년자 연구원들을 데리고 가서 갑자기 피자를 사 주질 않나, 갑자기 심리검사인가 뭔가 하는 걸 시키지 않나, 웬 아줌마가 오더니 이번에는 밑도끝도 없이 힘든 게 없냐고 한없이 물어댔다. 강 군이 저녁에 하기로 되어 있던 SCP 의 유체방정식 해석은 ㅡ 아마도 최근 들어 갑자기 분비하기 시작한 분비액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ㅡ 뜬금없이 중단됐다. 그들은 강 군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었다. 얄팍한 수였다. 한심했다. 이내 강 군은 그 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역시 어른들은 죄다 썩었어, 크큭.

열네 살의 정 군은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껏 자라 오면서 신동이네, 천재네 하며 칭찬만 들어 오던 그로서는, 왜 갑자기 자신이 어른들에게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되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어른들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빛으로는 느낄 수 있었다. 오늘 갑자기 그들은 정 군을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정 군이 당장이라도 뒤따라 자살할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 군은 그 아이가 뛰어내려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정 군과는 달리 그 아이는 유클리드급 SCP 에 배치되었다. 언뜻언뜻 마주치면서 정 군은 그 아이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었다. 그리고 지난 주에는 그 아이와 휴게실에서 만났고, 직접 그를 위해 음료수를 대신 뽑아 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정 군은 아직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업무와 사람들과 SCP 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이리저리 휘몰고 다녔다.

열다섯 살의 최 군은 심리검사지의 모든 문항들이 우스워 보였다. 최 군은 어른들이 만족해하며 기분을 풀 수 있을 것 같은 방식으로 문항에 체크했다. 면담 시간에는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날 밤, 이제 어른들이 자신에 대해 걱정을 덜 것이라고 마음먹은 그는, 아까 낮에 찰나의 순간에 보고 암기해 두었던 사수 연구원 형의 개인정보를 기억해 낸 후 음란 사이트에 접속했다. 아무도 몰래 재단 인트라넷 외부로 나가는 일은 그에겐 별 문제도 아니었고 언제나 자신있는 특기였다.


다음 날 아침, 응용물리학 센터에는 RM, 즉 레지덴셜 매니저라는 것이 생겨났다. 김 조교는 경황도 없이 꼬맹이 아이들의 매니저가 되었다. 무슨 오리엔테이션이라도 있었으면 했지만 담당자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담당자는 김 조교에게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가볍게 대답했다.

"아, 별 것 아니에요. 업무 끝나면 그냥 애들하고 같이 놀아주고, 먹을 거 사주고, 아이 라운지에도 데려가서 게임도 시키고 그러시면 돼요. 뭐 문제를 일으키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별도의 수당이 붙습니까?"

"글쎄요."

김 조교는 머리가 부서질 것 같았다. 어제는 그가 개입했던 어느 안전 SCP 의 격리 절차상의 허점이 발견되어서 밤샘을 했다. 게다가 오늘 새벽에 점검해 보니, 그가 관리하는 인트라넷 접속 기록에서, 누군가가 시스템을 교묘히 회피해서 외부로 빠져나간 기록이 있었다. 그 누군가는 그 날에 몇몇 동영상 파일과 함께 숱한 바이러스와 악성 애드웨어들을 재단 시스템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러나 김 조교는 그런 것에 일일이 조치를 취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재단 내 자체 백신 프로그램을 가동시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존의 업무를 전혀 경감시키지 않은 채 억지로 지워 주는 또 하나의 짐이라. 김 조교는 돈을 더 받든지 다른 보상을 받든지 하지 않으면 정말 감당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남자 중학교, 남자 고등학교, 공대 학부과정을 거쳐 동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중딩" 꼬마들과 놀아주는 법을 몰랐다. 그러나 온 센터가 초상집 분위기인 지금으로서는 태업을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세 명의 아이들을 먼저 매점으로 데려가 컵라면과 과자로 배불리 먹인 후, 아이 라운지에서 온라인 게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온라인 접속 시 보안 인가는 자신의 보안 카드를 활용했다.

강 군은 1인칭 슈팅 게임을 시작했다. 특수 요원이 되어 상대방을 총으로 쏴 죽이는 게임이었다. 강 군은 언뜻 기동 특무부대 아저씨들의 늠름한 모습을 떠올리고는 최대한 그들과 비슷한 종류의 소총을 골라잡았다. 그리고 강 군의 분신은 어디서 쏘는지도 모를 저격에 죽어나가기 바빴다. 2킬 22데스. 게임이 끝나고 나서, 강 군은 차라리 편미분 계산하는 게 더 쉽겠다고 생각했다. 강 군은 더 이상은 게임이란 것을 하지 못했다 ㅡ 강 군의 부모는 어릴 때부터 강 군이 게임엔 손도 못 대고 학원만 다니게 했으므로, 그의 전적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정 군은 AOS라 불리는 장르의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게임을 했다. 다섯 명이 한 팀이 되어 다섯 명의 상대팀과 승부를 벌이는 게임이었다. 문제는, 정 군이 천재라는 점이었다. 정 군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협동" 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게임을 하는 동안 정 군의 앳된 하얀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세 판을 내리 지고 나서, 네 번째 게임에서 정 군의 분신은 무작정 적진으로 돌격하여 죽어주고 있었다. 정 군은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앙다물려 있던 분홍빛 작은 입술이, 결국 파르르 떨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씨발 좆병신들, 존나 못해. 지들이 말아먹고 왜 나한테 지랄이야.

최 군은 아이 라운지에서 게임을 한 후 가장 괄목할 만한 심리적 안정과 기분의 호전을 보고했다. 최 군은 명백히, 연구뿐 아니라 게임도 잘 했다. 김 조교는 다른 두 아이가 오히려 주관적 불쾌감이 증가했다는 보고를 한 것과 대조해 보고 난 후, 인사과장에게 보고서들을 제출했다. 그리고 김 조교는 그날 밤에 허겁지겁 보고서 하나를 더 써서 올려야 했다. 새 보고서에는, 최 군의 일기장을 조사해 본 결과 최 군과 관련하여 "조금은 걱정스러워 보이는" 표현들이 있음이 설명되어 있었다. 인사과에서는 이것을 두고 게임 중독이라는 결론을 즉시 내렸다.

김 조교는 오늘의 방법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중얼거렸다.

그저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음 날에는 리조트 건물이 비워졌다.

강 군은 "이사" 라는 이름의 이 모든 번잡한 행위가 몹시도 귀찮았다. 설마하니 우리도 따라 죽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강 군은 새롭게 들어온 건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임시로 마련한 조립식 건물이었는데 퀴퀴한 냄새가 났다. 심리검사에서 의심스러운 소견이 나온 다른 세 명의 아이들은 따로 불려갔다. 그들은 더 이상 아이 라운지로 가지 않았다. 대신에 "이미프라민 Type-II" 라는 야릇한 약물을 주사받았다. 돌아온 아이들은 눈에 띄게 유쾌해 보였다.

정 군은 짐을 싸다가 문득 그 화단을 보았다. 아무도 없고 노란 꽃들만 가득 피어 있었지만 정 군은 조금 섬뜩했다. 그 아이가 떨어졌던 곳이다. 정 군에게 죽음이란 그렇게 서늘한 느낌으로 찾아왔다. 앞으로 그 아이를 영영 볼 수 없다는 생각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 아이가 저 곳에 떨어졌다는 상상을 하니 심장이 마구 뛰었다. 정 군은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그 아이의 분향소라는 곳을 한번 가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정 군이 이사를 마쳤을 때, 그는 그날 밤 12시를 넘겨서까지 처리해야 할 막중한 업무와 마주해야 했다.

최 군은 아침 일찍부터 따로 불려갔다. 어른들과의 심도 있는 면담 끝에, 최 군은 기지 내 다른 부서의 조금은 위험한 업무로 ㅡ 김 조교가 듣기로는 D계급 인원들이 다소간 소비되는 업무로 ㅡ 인사발령되었다. 최 군의 "문제" 를 다스리거나 최소한 그것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업무로 보내는 게 아니라, 그 "문제" 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재단의 결정이었다. 과연 그것이 "문제" 라고 간주되어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묵살되었다. 최 군은 김 조교와 의례적인 인사만을 나눈 후 즉시 그 센터를 떠났다.

김 조교는 재단 내 백신 프로그램이 제대로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그는 접견실로 소환되었고 얼굴도 잘 보지 못할 누군가에게 심한 질책을 들었다. 다행히 백업 파일이 남아 있어서 데이터베이스 복구에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과중한 업무에 더욱 과중한 짐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김 조교는 그의 마지막 커피 타임을 반납해야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백신을 업데이트하며 중얼거렸다. 어떤 놈인지, 그저께 몰래 야동 다운받아서 재단에다 악성코드 뿌려놓은 개자식은 내가 가만 두지 않을 테다.

새로 건물을 옮긴 아이들은 끈이란 끈이 온통 다 사라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은 운동화를 신을 수 없었다. 모든 종류의 옷들이 꺼내졌고 끈으로 활용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제거되었다. 강 군은 자신의 방에 "몰래카메라" 가 있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 군은 화장실과 샤워실을 공동으로 써야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인사과장은 그들로부터 모아 온 모든 종류의 끈들을 창고에 한꺼번에 쌓아 놓고, 그걸 커다란 파란색 비닐봉지에 꾹꾹 눌러담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영재고 나발이고 애들은 재단에 들여오지 말자고 했다니까."

분향소 앞에는 소리없이 꽃들이 쌓여 갔다.


감독관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센터장을 중심으로 사전 회의가 열렸다.

그 아이가 죽은 것은 전적으로 그 아이의 책임인가, 아니면 이 센터가, 이 기지가, 재단이 책임을 져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그 아이가 재단의 격리 활동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떤 이는 그 아이가 휴게실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그의 평소 표정이 어두웠다고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 아이가 너무 오냐오냐 하며 곱게 자란 나머지 현실의 어려움을 직시하고 극복하는 요령을 깨우치지 못했다고 서슴없이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영재 특채와 관련하여 아무런 후속조치가 없었음을 비판했다. 재단은 처음에는 뛰어난 수학적, 과학적 재능을 보이는 어린 유망주들을 모셔오는 데에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 아이들은 재단에서 버림받은 채 걸리적거리며, 자기들의 삶을 알아서 찾아야만 하는 지경에 놓였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평소에 이런 미성년자 연구원들에 대해서 정기 심리검사는 진행되어도 그 대응조치는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평행선을 달리던 도중에 감독관이 돌아왔다. 회의가 속개되었다.

감독관은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 그 아이 개인의 부적응으로 인한 결과라고 결론내렸다.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직원들은 감독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 아이의 신상정보를 말소하고 최종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SCP 재단 그 자체가 그 아이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데에도 모두가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인사과장이 업무결과를 보고했다. 감독관은 대체로 만족했지만 아이들을 대상으로 추가적인 기억 소거를 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몇 가지의 지시사항을 더 내렸다. 인사과장은 머리를 조아렸다.

감독관은 한 시간만에 회의를 마치고 돌아갔다.


다음 날.

분향소는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치워졌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겠는가. 기지의 일과는 정상으로 돌아갔다. 스케줄러는 더 이상 분향소 때문에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정 군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던 아이를 추모하지 못했다.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화단에도 출입이 다시 허용되었다. 몇몇 아이들은 그 화단에 가 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이 화단에 가기 전에, 그들은 새로 나온 "선별적 기억 소거 작용제" 의 알파 버전을 투여받았다. 투여 후의 아이들의 반응과 기억은 남김없이 기록되어 재단 신경과학 연구실로 보내졌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인사과장은 시간을 내서 자신의 망가졌던 녹색재단 자전거 앞바퀴를 고쳤다. 찌그러진 앞바퀴를 두들겨 펴고 부품 하나를 갈아 끼우자 바퀴는 쌩쌩 잘 돌아갔다. 출장 기사는 그에게 앞바퀴 부품 하나가 충격으로 인해 부러졌지만 그 외에 다른 문제는 없고, 비용을 청구할 것도 많지 않다고 했다. 인사과장은 허허 웃으면서, 이것이 전적으로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불의의 사고로 인한 것" 이라고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윤리위원회에서는 응용물리학 센터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대한민국의 근로기준법에 저촉되는 부분이 있는지 검토해 볼 것을 요구했다. 센터장은 인적자원 개발을 위한 일종의 산학협력 프로그램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아이들의 업무에는 이제 "연구소 현장실습"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김 조교는 자신이 한때 개입했던 안전 등급의 SCP 격리 문제를 해결했다. 예산도 확보했고 상부의 의견도 나쁘지 않았다. 새롭게 업데이트된 백신 프로그램은 더 이상 재단 네트워크에 남아있는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김 조교는 화단으로 향했다. 한때 예쁜 노란 꽃들이 만개했던 그 곳에는, 그 꽃들이 미처 다 지기도 전에 전부 파헤쳐져 한쪽에 쌓여 있고, 어디선가 공수되어 온 관상용 나무들이 버팀목에 의지한 채 새로 심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앞으로는 누군가가 여기서 뛰어내린다 해도, 나뭇가지에 걸려서 적어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골치아픈 일들은 한꺼번에 왔다가 한꺼번에 가는 법이지, 그래, 그렇게 지나가는 거고 그것만 버티면 돼. 김 조교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일로 인해 경질되어 옷을 벗게 된 직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건물들은 밤낮으로 불을 밝혔고 그 어떤 SCP 도 격리에서 풀려나지 않았다. 기지의 모든 직원들은 ㅡ 비록 한 명이 줄긴 했어도 ㅡ 확보하고, 격리하고, 보호하는 데 여념이 없는 시간을 보냈다. 달라진 것은 없었고 그들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을 가고 있었다.

센터 직원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비석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소년의 작은 몸은 조용한 가운데 묻혔다.
  산새들이 숨을 죽이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뺨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아이가 입을 맞추었던 노란 그 꽃은,
            이제 파헤쳐져 시들어 버린 채 뒤뜰 공터에 내버려졌다.

        십오 년의 시간은 그들에게서 잊혀졌고,
      그 누구도 마지막 유언을 들어주지 못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산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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