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설모
라타토스크(Ratatoskr)는 항상 나이와 함께 지혜가 는다고 생각해왔다. 이제 주둥이가 하얗게 되고 나니 그만큼 아는 것도 많아졌다. 나이가 들수록 관절통, 그리고 낮잠을 자고 싶은 고질이 조금씩 늘어났다. 신들에게 전갈을 저하기 위해 세계수를 오르내리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은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고, 또 늙어버린 관절 때문에 그런 여행을 다시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일상에 정착했다. 매일 아침 쑤시는 뼈마디와 함께 일어나, 자기가 집이라 부르는 나무에서 기어내려갔다. 그 나무가 위그드라실이냐? 아니, 한낱 참나무에 불과했다. 주변의 다른 나무들과 비교해도 더 특출날 구석이 없었다. 그래도 오히려 그랬기에 지친 육체가 나무를 오르내릴 때 덜 힘들었다. 나무에서 내려온 뒤에는, 그의 마지막 복사(服事)가 땅콩 한 알을 제물로 바치는 제단을 향해 걸어가 기쁜 마음으로 제물을 받은 뒤 어딘가로 호다닥 달려가 기쁨을 즐겼다.
숭배는 신을 살아 있게 만든다. 관절이 삐걱거리고 뼈는 아프지만, 누군가 그를 살려두고 있기에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는 더이상 과거와 같은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귓가에 기도나 찬양을 속삭이던 말들은 세월과 함께 사라졌다. 그래도 아직 그에게 매일 땅콩을 주는 두 늙은 남자는 그의 숭배자요 그의 후원자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여겼다.
오늘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이 받을 제물을 챙기고 쌩하니 달려갔다. 껍질을 벗기고 깊이 내음을 들이키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각, 마치 정적(靜的)인 불이 타는 듯했다. 그는 몸을 휘젓고, 한쪽 발로 귀를 긁적이며, 제물을 받아먹는 와중에 방해하는 이상한 감각을 한구석에 치웠다. 그리고 배가 차자 그 감각은 사라져 있었다. 그는 기지개를 켜고, 지친 눈으로 나무로 돌아왔다.
일상의 즐거움은 익숙함을 낳는다. 그는 여러 신들이 이 익숙함에, 무한히 반복되는 일상에 환멸한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애초부터 그렇게 큰 숭배를 받아본 적 없는 영세한 신이었던 그에게 이런 일상은 오히려 편안하였다. 그는 이 추종자들이 언제나 찾아올 것임을 알았고, 항상 제물을 받아먹을 수 있음을 알았다.
해서, 그는 언제나처럼 제단에 도착했다. 웃을 수 있다면 웃었을 것이다. 한 노인이 다른 노인의 팔을 감쌌다. 필멸자들 간의 서로에 대한 애정, 그것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가 여기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두 팔을 벌려 내밀었다. 두 늙은 남자가 빙그레, 그리고 껄껄 웃는 것을 지켜본 뒤 자기 몫의 땅콩을 받았다.
이번에도 쌩하니 사라진 그는, 다시금 그 이상한 감각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보다 확고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영혼 깊은 곳에 불이 난 듯하였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몸을 웅크리고 뒹굴었다. 머리통을 움켜쥐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어찌 감히 이런 감각이 만찬을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하루 일과 가운데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이 불온한 감각들은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인가? 나는…!
…그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필사적으로 자기 정신을 뒤져가며, 지난 몇 년간의 기억을 쏟아내며 이름을 찾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 뿐이었다. 이름? 이름? 그것이 뭐더라…? 몸이 부풀어 올랐다.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무언가를 발톱으로 긁으며 전율했다.
결국 그는 그 공허한 감각을 떨쳐버렸다. 상관 없다. 아무튼 그는 제물을 받았다. 땅콩을 깠고, 다시금 배를 채웠다. 그리고 공허함은 사라졌다. 이름 따위 어차피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여전히 그에게는 신도들이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이었다.
다음 날, 그는 제단에 한 명의 신도밖에 찾아오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 주위로 깊은 무게감이 감돌았다. 노인의 지친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청설모가 나타나자 두 눈에 이채가 돌아왔다. 노인의 입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말을… 하는 것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바이러스? 병원? 그게 뭐지? 노인은 격앙되어 보였고, 청설모는 최대한 들어주려 하였다. 신이란 신도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신이 되겠는가? 아무튼 그는 언제나 경청하는 일을 잘 했다.
늘 그랬듯이, 그의 경청은 신선한 제물로써 보답받았다. 오늘의 제물은 특별히 소금가루로 덮인 고품질이었다. 참으로 희귀한 일이로다! 그는 제물을 챙겨 게걸스럽게 뛰어갔지만, 땅콩을 까기 직전에 멈추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고통이 다시금 자기를 덮칠까 예상하며 기다렸다. 결국 무언가 느끼기는 했지만, 이전에 느꼈던 그런 영혼을 뒤흔드는 고통은 아니었다. 대신 손등에 약간의 쓰라림을 느꼈다. 내려다보니, 작은 살조각이 흐지부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리 되니 느껴 마땅할 것들이 많았다. 두려움을 느껴야 했고, 고통을 느껴야 했고, 겁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대신 그는… 평화를 느꼈다. 결국은 이렇게 될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아무튼 축복받아서 이렇게 오래 살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그의 정신은 신도들에게 쏠렸다. 그들은 자신을 그리워할까? 없어졌다는 것을 알기는 할까? 확실히 그는 그들이 그의 일상이었던 만큼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그는 남아 있을까?
땅콩을 음미하는 동안,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추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땅콩은 그의 배와 영혼을 충만하게 하였다.
청설모는 습관의 동물이다. 어디로 가서 먹이를 찾을지, 먹이를 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매일 같은 벤치에 도착해서, 미소와 땅콩을 함께 던지는 두 노신사를 기다렸고, 땅콩을 받으면 재빨리 사라졌다. 하지만 오늘은 그 일상에 달라진 것이 있었다. 오늘도 한 명의 노인밖에 벤치에 찾아오지 않았다. 청설모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예민한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노인의 충혈된 눈은 어두웠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더니, 결국 벤치에 엎어져 오열했다.
청설모는 먹을 것을 찾으려면 이제 다른 데를 알아봐야 함을 알았다. 하지만 청설모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노인을 위로하라고 말했다. 그것(It)은 노인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그래서 노인에게 다가갔고, 삐걱대는 관절로 벤치에 올라가 노인의 옆에 앉았다. 노인은 처음에 충격을 받은 듯하였으나, 우울에 허우적대던 눈에 약간의 이채가 돌아왔다. 그는 껄껄 웃으며 청설모에게 땅콩 한 알을 건넸다. 청설모는 그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아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노인의 옆에 앉아 땅콩 껍질을 벗겨 먹었다. 노인은 청설모가 식사를 즐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참 작은 일이었지만, 노인의 마음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기에는 충분했다. 망설이다가, 노인은 청설모에게 손을 내밀었다. 청설모는 조심스럽게 그 움직임을 관찰하다가, 노인의 수중에 작은 발을 올렸다.
둘이는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주변의 세계를 조용히 들으며 관조했다.
땅콩은 다 먹어치웠다. 청설모는 마지막으로 한 번 노인을 바라보았다. 청설모는 이 노인이 자신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왜 중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중요한지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아주 많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았다. 청설모는 노인의 손바닥에 코를 비비고, 튀어올라 사라졌다. 노인은 이 기묘한 동물에게 손을 흔들어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청설모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발이 흐지부지해지더니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그것은 다리로 이어졌고, 몸 전체가 서서히 토막토막 희미하게 지워져갔다.
그리고 청설모는 웃을 수 있다면 웃었을 것이다. 준비는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머리가 지워지고, 청설모의 마지막 생각은 마지막까지 자기에게 친절했던 두 노인에게로 향했다. 청설모를 알아차리고, 청설모가 사라질 때까지 경의를 바쳐준 두 사람.
괜찮을 것이다. 아무튼 좋은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