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시전 - 망인

"인사부장님께 연락이다."

"뭐야?"

"만약에 인사부장님과, 두 사람이 모두 탈출하게 되면 봉인을 풀어버리라고 하는군."

"뭐? 잘못 들었겠지. 여기서도 그 귀신의 살기가 느껴지는데. 그런 게 봉인이 풀려서 인간 세상으로 뛰쳐나오게 되면 대참사야."

"엄밀히 말하면 안에서의 충격으로 결계 외벽이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어. 우리가 풀지 않아도 풀려 버릴걸."

"더 심각하잖아! 당장 옥지기 놈들이라도 부르지 않으면….."

"아냐. 다른 방법을 얘기하는 거야."

"뭐?"

"결계가 풀리는 방향 말이야."




"이제 너 뿐이구나. 이걸로 끝이야."

사쿠라히메는 뜯겨나간 환부에서, 촉수처럼 검은 그림자를 뻗으며 다가온다. 그 수없이 일렁이는 팔들이 사방으로 뻗고, 더러는 연결되면서 마치 빽빽한 신경계나 그물 같은 모양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쓰러진 나라시를 붙잡으려고 몰려드나, 때가 아니라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사쿠라히메가 입을 열었다.

"동생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그렇기엔 너무 위험해."

본 목적을 포기했는지, 이번에는 가학적인 웃음을 띄우며 목소리를 높인다.

"자, 나와라."

그리고 그 뒤에서 언젠가부터 나타나 있었던, 유령의 무리들이 발을 나라시 쪽으로 옮긴다. 방전된 기계와도 같이 몸의 힘을 상당히 소모하여 있던 나라시지만 그 광경을 보고는 눈을 천천히 떠 버렸다. 참담하게 경악한 듯이. 언제나와 같이 무기를 든 사쿠라히메의 병정들 속에서 공허하게 눈을 뜨고 있는 서라원과 윤성재가 보였기 때문이다.

나라시는 몸을 떨었다.

찢겨진 팔을 수천 가닥의 그림자로 뻗었던 사쿠라히메. 그 가느다란 가닥이 그물처럼 공간을 포위했을 때 닿아 지배당하게 된 것일까, 하고 두려운 추론을 했다. 그리고 시야가 흔들렸다. 그들은 무감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서라원…?"

나라시는 떨리는 손으로, 겨우 손가락을 그의 머리에 겨누었다. 그러나 도저히 무엇도 쏘아낼 수 없었다. 지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머리에 구멍을 낼 마음이 결코 생기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자신 때문에. 자신 때문에 서라원을 악마의 사지에 몰아넣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만일 사쿠라히메가 서울 같은 곳으로 탈출한다면 수없는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

"…네 말에 따를 테니까… 걔는 풀어주면 안 되겠지…?"

"그 말은 이미 했잖아."

사쿠라히메는, 마치 피에로의 연기를 본 듯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그렇게도 쉽게 거짓말을 하니. 지하에서 왕이 통곡하겠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령들이 일제히 나라시에게 덤벼들었다. 서라원도, 윤성재도 마찬가지. 그들이 나라시를 붙들어 눌러 죽일 듯이 짓누른다. 격통 속에 나라시는 희미하게 중얼거린다. 무어라고 하는지도 듣지 못한 채로 거미줄의 나비처럼 붙잡힌 나라시의 발목을 누군가가 두 손으로 붙잡는다.

"……응?"

익숙한 감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나라시는 희미한 빛을 발하며 보검으로 변했다. 놀란 나라시가 그쪽을 보니, 서라원은 허망한 표정이 아니라 심술궂은 아이처럼 미소를 지으며 나라시를 쥐고 있었다. 윤성재도 그 순간 멈춰 서늘한 표정을 이쪽으로 지어 보인다. 서라원이 말했다.

"저 놈이 단순해서 살았어."

잠시 결계에서 벗어났다 되돌아온 윤성재와 서라원은, 사쿠라히메에게 지배당한 척 기다리다가 나라시를 검으로 만들 기회를 옅보았던 것이다. 심지어 이를 위해 다시 사쿠라히메 하의 망령들까지 데려와, 철저히 그를 다시 속였다. 허나 그것조차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는 듯이 사쿠라히메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로는 날 절대로 죽일 수 없어."

그 말마따나, 사쿠라히메와 격돌했던 그들은 모두 패배하였다. 나라시가 최대 출력으로 쏘아 보냈던 검기라고 하더라도 한 번도 그를 베거나 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지금도 사쿠라히메라는 신의 힘은 계속해서 증폭되고 있었다.

"그렇지?"

서라원이 수척한 얼굴로 대답한다.

"하지만 이건 가능하거든."

그리고 나라시의 날로, 흙바닥을 내리쳐 커다란 일격을 쏘아낸다. 흙이 휘날리고 지반이 무너지는 것도 순간. 그리고 이윽고 그 아래쪽을 이루던 공간과 결계마저 찢어발겨 커다란 구멍이 만들어진다.

이 공간 통째로 외부차원이고, 벽과 같은 것을 찢을 수 있다면 바닥도 마찬가지. 물론 천장도 고려 대상이었지만 바닥에 비해서는 어렵다 생각한 윤성재는, 다급히 무수한 유령들을 자신의 힘으로 구멍에 밀어넣는다. 일부는 사쿠라히메 쪽으로 되돌려 그 움직임을 막아선다.

"탈출구라니…!"

그러나 사쿠라히메 쪽 역시, 수없는 가시를 쏘아 보내며 자신도 구멍 쪽으로 몸을 들이민다. 영락없이 흥분한 듯한 표정으로 구멍 밖으로 추락하는 유령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중간중간 윤성재나 서라원 쪽으로도 그 흉악한 공격을 겨누지만—

갑작스럽게 그 구멍에서는 물이 역류하여, 커다란 물결을 일으킨다.

"진짜 하는 건가…"

서라원은 사쿠라히메의 공격을 칼날로 내리치며 질린 듯이 혼잣말했다.

뱀의 손의 견해에 따르면 사쿠라히메의 결계 봉인구 중 하나는, 경상남도 진해에 위치해 있었다. 우연인지 벚꽃으로 유명한 그 도시의 봉인구를 바깥의 심야클럽 회원 쪽에서 해제하여 출입구를 바닷속에 내어 둔 것이었다. 쏟아지는 짠물의 수압을 출입구를 더 베어 조정하면서 유령들은 바깥으로 날려버리고 강력한 수류를 사쿠라히메에게 난사해 버렸다.

"이까짓 것—"

물에 젖은 악신이 포효하며, 서라원을 향해 그 날카로운 손톱을 번뜩이지만 이번에는 나라시의 칼날에서 녹색 점이 새겨져 그 힘을 쳐 날린다. 양면에서 집중포화를 얻어맞으면서도 이번에는 그 몸을 폭풍과도 같이 바꾸어 난사를 털어내 버리는 사쿠라히메. 그가 완전히 침착해지기 전 먼저 나라시와 서라원이 도약하여,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진다.

그들을 쫓으려 사쿠라히메는 더욱 변신하며, 팔과 소매를 뒤틀린 나뭇가지나 날개뼈와도 같이 전환한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이변을 깨닫고, 변형을 서서히 멈추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를 봉하고 있던 벚꽃숲의 결계. 즉 그 공간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아아."

나라시로 인해 그 벽이 무너지는 것을 깨달은 사쿠라히메가 기쁨에 찬 웃음을 짓는다.

"이건… 족쇄가 무너지고 있구나! 봐라, 나라시! 네가 결국 도운 것은 왕이 아니라, 네 오라비를 죽인 나구나!"

평소답지 않은 희열에 찬 고성을 지르며, 무너지는 벽을 향해 날아오른 사쿠라히메. 만약 본 바와 같이 바다 한복판에 추락하게 된대도 사쿠라히메 정도의 신이라면 그런 것은 별 볼 일 없는 장애물에 불과하다, 그리 생각하여 움직이는 순간 그의 발밑에서 차오르던 바닷물은 멈추었지만. 흥분한 신은 날뛰며 쓰러지는 결계를 벗어나 바깥으로 발을 내딛었고—

"응?"

이질적인 감각에, 목소리를 낮추고서 눈을 치켜뜬다.

바다도, 인간의 기척이 가득한 도시도 아니다. 사방에 가득한 것은 짠물을 머금은 무수한 모래.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곳은 고립무원과 같이 간혹 모래 언덕 정도가 보일 뿐으로 사람의 소리도 생명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반복해서 보아야 그런 풍경이 계속해서 반복될 뿐. 당혹감을 그 눈에 띄우면서 단지 계속해서 걷는 사쿠라히메.

가끔 그의 기운에 놀란 커다란 벌레 같은 것들이 도망치거나, 좀 더 거대해 보이는 벌레들이 그를 습격해 오고는 한다. 그런 잡것들을 갈기갈기 찢으면서 잠시 웃음을 짓던 사쿠라히메지만 그것도 잠시. 무한한 해변인지 사막인지 모를 공간과 유령 같은 벌레들만이 가득했고, 사쿠라히메는 곧 분노에 찬 소리를 쳤다.

"설마… 또 결계를…?"

꽃보라를 만들어내 땅을 크게 내리치거나, 붉은 독기로 보이는 모래 언덕을 쏘아 무너뜨려 본다. 이번에는 핏줄 같은 가시덤불을 뻗어 땅 깊숙히 파고들어 보았지만 전혀 끝이 없이, 끝없는 모래의 지층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사람의 흔적도 질병의 맛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말도 안 돼…!"

빠져나갈 수 없는 무한한 황무지에서 봄의 향기가 휘몰아쳤다.




"인사부장님!"

"난 괜찮습니다."

진해 근처. 어둑어둑해진 부두에 유령들이 몰려들었다. 심야클럽의 일원인 그들은 윤성재의 지령에 따라 추락한 유령들을 구출하고 마지막으로 내려앉은 3인조 역시 구해낸 참이었다. 사쿠라히메의 지배 하에 있던 귀신들은 지배력을 풀기 전까지는 직전 그랬던 것처럼 다시 봉하고, 너덜너덜한 상태가 된 세 사람을 부축하고 있었다.

전신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나라시나, 대다수의 힘을 소진한 서라원은 한 눈에 보기에도 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시는 서라원을 쏘아보면서도 안심한 듯이 미소를 슬며시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미안해."

사과를 고했다.

"대책 없이 달려든 것도, 무엇보다 널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나잖아."

서라원은, 방금 전 기절했을 당시 했던 생각을 곱씹는다. 생각을 했더라면 사실상 기절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순간의 라원은 나라시를 이해했다. 처음의 서라원이었다면 멱살이라도 잡았을지 대화를 피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서라원은 그저 지친 얼굴로 미소를 짓는다.

"….나라도, 가족을 죽인 사람 앞에선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리 말하지만, 서라원의 형을 죽인 세상에 대해서 이전의 그는 어떠한 분노도 내지 않았다. 반대로 죽일 듯이 덤비던 나라시를 보며 서라원은 심지어 부럽다는 감상까지도 하고 있었던 것을. 그 자신도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부턴 안 봐줄 거예요."

"……나도, 다음부턴 그러지 않을게."

몇 번이나 서라원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은 것을 상기하며, 나라시는 무엇보다도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이나 오빠를 모욕받았기에 자신 근처의 모든 것을 해 입힌 결과였다. 이전까지 잡귀라도 이용하겠노라 생각했던 나라시는 진심을 담아 그리 말했다.

"그런데 그놈은……?"

사쿠라히메가 생각났는지 나라시는 몸을 떨었다. 무엇을 해도 쓰러지지 않던 신. 얼떨결에 물의 흐름에 뛰어들어 탈출하기는 했어도 그 자를 쓰러뜨린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게 다시 긴장하는 나라시에게 이번에는 사람들을 지휘하던 윤성재가 끼어들었다.

"완전히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고, 단언하지만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아예 다른 곳으로 연결해서 다시 가두어 버렸지만요."

윤성재는, 심야클럽의 "길" 전문가들에게 사쿠라히메의 결계를 조종하도록 했다. 그 결과 자신이 아는 가장 고립된 곳 중 하나로 출구를 연결시킨 결과 사쿠라히메는 무한한 조개 해변과 조개 유령만이 가득한 저승과도 같은 차원에 봉해진 것이다. 그 출입구가 있다고 해도 너무도 드넓어 찾을 수 없는데다가 끊임없이 괴물이 나타나고, 그 관리는 재단이 하고 있다.

해원읍으로 뚫어, 신록의 왕이라고 하는 거대 구렁이의 먹이로 던져주는 방안도 후보에 올랐지만 뱀이 사쿠라히메에게 이길 가능성이 적다 판단해 취소한 것이다.

"잘도…"

서라원은 고개를 흔들면서도 피식 웃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성재는 목소리를 바꾸며, 그들에게 담담히 묻는다.

"…어떻게라면…"

"이제 다른 단서도 없으니까요."

나라시는 고개를 떨구며, 다리를 절었다. 이 세계에 해원읍과 사쿠라히메의 유배지, 또 그를 봉한 무한히 큰 사막. 그런 외부차원은 무수히 존재할 것이고 또 지구상만 해도 엄청난 규모의 면적을 자랑한다. 그런 곳에서 왕을 찾다가 또 이런 위기를 만날지도 모르는 일. 그것이 반복된다고 하면 자신도 서라원 등의 주위 인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시… 이제 왕을 찾는 건 그만둘래."

그 말에 놀란 서라원이, 부축당하고 있는 것조차 잊었는지 그쪽으로 몸을 돌린다.

"나라시! 방금…"

"역시 왕을 찾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어."

서라원이 당했던 피해와, 사쿠라히메의 말을 기억하면서 눈물을 훔치는 나라시.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싶은 표정을 하고서 억지로 웃어 보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 없이 어두운 밤이었다. 라원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부축을 따라 나아가는 나라시. 서라원은 그 뒷모습을 곱씹는다.

왜 지금.

내가 나서겠다고 생각한 지금 모든 것이 끝나는 걸까.

"고마웠어. 서라원."

"하지만…"

"날 위해 사람들이 다치잖아. 얼마나 민폐였을까."

오래 전 왕의 막내딸이었을 때도, 지금도. 어린애 같은 자신을 질책하면서 나라시의 의식은 천천히 가라앉는다. 라원은 그저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는 없었다.




1주일 후




희미한 달빛이 들어오는 밤.

나라시는 구석에 누워 빛이 일렁이는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다. 사쿠라히메 사건 이후로 칩거해 있던 나라시는, 잠잠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잠이 오기를 기다린다. 모든 것을 소모한 듯이. 밤을 기다리는 달맞이꽃처럼 그리 침잠한다.

그때, 어떤 쪽지가 문 틈으로 조용히 들어온다. 아마도 배달부 역을 하는 인사부원일 것이다. 심야클럽의 집배원격인 일부 인사부원들은 망자들에게 하는 말이 적힌 종이를 은밀히 수집하곤 했다. 그런 종이는 대다수 죽은 자를 잊지 못한 유가족이 남긴 것이기에 회수하여 근황을 알려주곤 하는 것이었다. 물론 회수되는 것은 납골당이나 묘지 등에 놓인 일부라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나라시의 경우 그런 부류의 유령이 아니며, 21세기에는 아는 이도 없다. 그러니 편지가 올 곳도 전무한 것이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종이를 더듬어, 그것을 펼쳐본다. 그리고는 서서히 놀란 얼굴로 눈을 떴다.

당신에게

왕은, 아직 살아 있다.

OJM

외전: 무딘 칼

1855년

습한 바람이 부는 땅.

그곳은 북쪽 변방의 오래된 황무지였다. 쌓인 눈을 날리는 그 습한 바람은 남방의 강에서 불어오며 작달막한 나무의 앙상한 가지를 오가고 있었다. 농사는 물론하고 짐승을 기를 수도 없는 이 북부의 땅에 터를 잡고 사는 백성은 없었다. 사람이 지난다고 하여도 범이나 멧돼지를 잡으러 오는 사냥꾼들. 그러나 이곳에 2년 전을 전후하여 도적단 떼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도적단은 말하자면 아마 조선 땅으로부터 온 산적 떼가 전신인 모양으로, 관군을 피하여 온 이 도적단은 현지에 있던 오랑캐 무리들과 섞여, 스무 명에 가까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말도 온 곳도 다른 두 무리가 뭉친 것은 이토록 적대적인 환경에 대한 말하자면 악의 결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개자식들!"

눈이 쌓인 땅을 짓밟으며, 사내 한 무리가 어둠 속에서 싸우고 있다. 몽둥이, 낫, 더러는 칼을 쥔 그들과 겨루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어둑어둑한 공중에서 샛노란 눈빛을 번뜩이며 멀리까지 짖어 대는 늑대의 무리가 점점 사내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곳에 뭉친 도적떼는 분명 관군이나 다른 도적 무리와도 싸웠던 일이 있는, 좋게 보아 주자면 전사와도 같은 자들이다. 그러나 늑대 무리도 거의 열 마리는 넘는데다가 혹한의 추위에 굶주려,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그 움직임은 마치 사냥꾼이 토끼를 모는 것과 같았다.

"불은…?"

"방금 눈이 내려서… 활도 없습니다!"

젊은이의 대답을 들은, 선두의 사내가 절망했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덫에 걸린 산돼지를 때려잡아 끌고 온 것은 좋았으나 피 냄새에 흥분한 이리들을 불러왔다는 것이 문제였다. 멧돼지를 내려놓고 도망치는 편도 생각해보았지만, 이 겨울에 사냥감을 버려두기에는 이들 역시 물러설 수 없었다. 남자는 들고 있는 무딘 검을 애써 휘둘러 늑대들을 잠시나마 쫓아냈다. 노획한 이 칼 역시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이가 나갔고 무뎌졌다. 늑대를 내리친다고 하더라도 절명시킬 수 있을지도 의심이 들었다.

늑대들은 더욱 사납게 짖어 댔다. 어떤 놈은 금방이라도 달려 와 물어죽일 듯이 선두의 남자들 바로 기까이로 달려왔다가 다시 물러서며, 점점 가까워졌다. 당장 달려들지 않은 것은 다만 짐승들이 그들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도 발톱도 없고 무기라는 것들은 무딘, 말하자면 하잘것없는 첨병임을 알고 나면 이미 순식간에 목을 물어뜯으려 달려왔을 것이었다. 특히 어둠 속에서 인간이라는 종은 나약했으므로. 그러한 틈을 타 앞에 선 자들은 발을 구르고 고함을 치며 늑대들을 쫓았다. 그러한 긴장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놈들, 더 다가오지 않는구나?"

늑대들 역시 그러한 기세의 무리는 선뜻 내키지 않는지, 점점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안쪽에서 죽은 돼지를 맡고 있던 젊은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길이 트이듯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던 늑대들의 그림자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선두의 중년 하나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멀어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늑대들의 도깨비불 같은 안광이 빛을 내며 다가오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리 떼의 사이로 더 크고 불그스름한 빛 하나가 일렁였다. 그제서야 그들은 볼 수 있었다. 다른 늑대들보다도 커다란, 검은 늑대가 다가오고 있던 것을. 놈은 한쪽 눈이 멀었는지 왼쪽 눈깔에는 빛이 없이 단지 허옇게 떠 있을 뿐이었으나 다른 눈은 말하자면 횃불 같은 맹렬한 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놈은 으르렁거렸다. 마치 공기 자체를 울리는 듯싶은 서늘한 소리였다.

"아."

한 사내가 헛웃음을 토했다. 마치 손에 잡힐 듯 놈의 숨소리가 가까워져 있었던 것이다. 들판 늑대 중 비범하게도 커다란 이리. 도적단은 그놈을 두려워하여 허연 눈깔이라고 이름까지 지어 붙였다. 그런 두령의 등장에 늑대들은 확신을 얻었는지, 크게 짖으며 더러는 아예 이쪽으로 내달려—

—다음 순간, 사내 한 명을 덮치려 뛰어오른 늑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날아갔다.

깨갱, 하고 새된 소리를 지르며 눈바닥에 쳐박히는 늑대.

어느새 두려움에 질린 사내들의 사이에, 또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사슴 가죽을 걸치고, 커다란 쇠몽둥이를 든, 그들보다도 머리 둘은 키가 큰 그야말로 거한이었다. 늑대 무리로 비한다면 바로 목전에 있는 '허연 눈'과 같은 기운을 풍기는 쾌걸. 동류의 접근을 눈치챘는지, 혹은 동지가 당한 것을 경계했는지 늑대 우두머리도 더욱 사납게 울부짖고 있었다.

"두령님……!"

"온토 두령님이시다!"

남자가 나타나자마자 살았다는 듯이, 사내들은 제각기 그 얼굴에 희망의 웃음을 띄웠다. 그 장사가 마치 필승의 상징이라는 듯이. 사슴 가죽을 두른 남자는 자신만만하게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며, 절굿공이의 갑절은 되어 보이는 몽둥이를 휘두른다. 그리고는 우레 같이 호탕한 소리를 친다.

"이놈들아, 뭘 겁내느냐…! 한낱 들짐승 아니냐?"

그 외침에 곁에 섰던 유약해 뵈는 사나이가, 땀을 흘리면서 이야기한다.

"두령, 저놈은 이 들판 이리 놈들의 왕입죠. 범을 물어 죽였다는 소문도 있는…"

두령을 걱정하여 한 말이었으리라. 그러나 온토라 불린 그 남자는 송충이 같은 눈썹을 찡그리며 아까보다도 흥분한 기색을 그 표정에 띄운다. 마치 '왕'이라 불렸다는 것에 흥분하듯이. 그리고 그 이리의 왕이라는 놈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야수 같은 숨을 토하며, 그 몽둥이를 즉시 허연 눈의 늑대에게 겨누었다.

"이리 따위가 강하다고 무엇이 왕이냐. 그리고 범은 나도 잡은 적 있지 않느냐?"

"그렇지만 저놈은……"

"시끄럽구나!"

방해받기 싫다는 듯이, 그는 잠시 몸을 숙여 그것을 추진력 삼아 지면을 박찬다. 마치 쏘아올린 대포알과도 같은 충격을 일으키며 그 몽둥이를 두 손으로 쥔다. 장사라고 유명한 두령이지만, 인간을 능가하는 속력과 힘이다. 그 모습에 도적단은 제각기 웃음을 짓거나, 걱정하는 듯한 기색이거나, 혹은 경외롭다는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본다. 늑대들 역시 놀라 대열에서 흩어지지만 오직 그 늑대 우두머리만은 버티고 서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어 그를 향해 돌진한다.

몇몇 어린 도적들은 떠올린다. 늑대란 짐승은 크기도 하거니와 사람에겐 없는 것이 너무도 많다. 그 이빨과 발톱, 멀리서도 피 냄새를 맡는 감각. 인간보다 지혜가 모자라기는 하나 맹수란 족속은 그 힘에 있어선 사람이 비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 전설 같은 자기네 두령이지만 늑대에게 찢기지나 않을까, 떨리는 눈으로 그 충돌을 바라본다.

그 순간 그들은 이변을 느꼈다.

야수처럼 돌진하는 두령이 붙든 몽둥이에서, 마치 일렁이는 듯한 움직임이 보인다. 그 몽둥이를 중심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듯이. 혹은 돌이 던져진 연못의 수면에서 파문이 일듯이. 그리고 거칠게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지는 몽둥이는 찰나 뒤흔들렸다. 그리고 마치 찢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충격파가 전방으로 터져나와,

눈을 날리고, 흙을 부수며, 서너 마리의 늑대를 일격에 날리는 힘을 가한다.

"이거 재미있구나!"

그 충격의 반발도 거뜬히 서서 견디며, 남자는 다시 한 번 방망이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달려오는 늑대의 우두머리를 향한 공격이었다. 방망이의, 그리고 남자의 이변을 짐승은 이미 눈치챈 듯했다. 그럼에도 단순히 속력을 제어하지 못한 것인지, 혹은 무리를 지키는 대장으로서 그런 것인지 멈추지 않고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는 이리의 대가리를— 아까보다도 막대한 힘을 방출하며 몽둥이가 정통으로 내리쳤다.

— — —

그 단 한 차례의 충돌로 눈이 휘날리며, 바람이 일고, 천지를 울릴 듯한 굉음이 공중을 뒤흔든다.

겨우 그 충격이 지나고서야 눈을 뜬 도적단은, 당당하게 선 두령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목에 이빨도 닿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늑대도. 놈은 쓰러질 때도 소리도 피도 흘리지 않은 채, 짐승으로서의 삶을 즉사로써 끝낸 모양이었다. 우두머리가 당하자 늑대 무리는 짖는 소리를 멀리 울리며 밤중의 어둠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런 늑대의 주검을 조용히 내려다 보던 두령은, 늑대를 어깨에 들쳐 메고 자신을 바라보는 부하들을 향해 돌아섰다.

"무어가 걱정이냐. 내가 있는데!"

그리고 자신의 승리를 외치듯이 쩌렁쩌렁하게 포효를 울린다. 침묵하던 부하들도, 화답하듯이 기쁘게 펄쩍 뛰며 저마다 주령을 높이는 소리를 올린다.

"범을 혼자 때려잡으셨다는 것이 진짜였어!"

"천하 제일의 장사시라니까…"

"오늘은 늑대 고기도 먹겠구나!"

두령은 어느새 돌아가는 그들의 앞에 서서,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반대 어깨에는 커다란 늑대를 짊어진 채로 호방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들을 이끌었다. 두 무리가 섞아 이 도적단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인 버팀목이 되는 장사 중의 장사, 두령. 지금은 한자 식으로 온토(瑥土)라 자칭하는 남자는 단지 보통의 남자가 아니었다.

옛적, 왕이라 불리우던 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수양아들과 수양딸로서, 검들을 모았다. 검들은 그 영혼이 날붙이에 깃들어, 본질은 검이 되었으나 인간 형상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이르렀다. 왕의 아래에 모인 검은 총 13인. 그들 역시 서로서로를 형제자매로 받들며 수백 년을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왕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고 열셋은 이 세상에 남겨져 버렸다.

온토, 라고 자신을 자칭하는 이 이인(異人)과도 같은 사내도 그 중 하나. 그 본명은 간단하게 "온트"로 부르는 이 남자는.

지금은 죽어버린 나라시의 여덟째 오라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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