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말하자면 여름의 아득한 하늘을 닮았다.
섬록색으로 일렁이며, 땅을 헤집고 나무를 베면서 날아가는 거대한 기운. 마치 공간 그 자체를 일그러뜨릴 듯한 위광을 휘감은 그 기운을, 서라원은 지친 채로 바라보았다. 방금 전 일격을 위해 나라시에게 흘려넣은 심령의 소모가 컸는지, 그는 휘청이고 있었다. 그만이 아니라 라원을 붙잡으러 달려들었던 귀신들도 충격에 쓰러진 채였다.
— 잘 날렸어……?
"네."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나라시에게, 서라원은 대답하여 안심시킨다.
물론 그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시피, 왕의 무기였을 때의 일격에 비하면 대단치 않은 공격이다. 그러나 그 공격이 일직선으로 날아든 것만으로도, 윤성재에게서 손을 떼게 만들기엔 충분했던 모양. 저 너머에서 분노에 찬 살기가, 무겁고도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 우리도 가자.
"네."
서라원은 기운을 가다듬으며, 땅을 각차고 벚나무 사이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쪽으로 도망쳐 오던 윤성재를 조우했다. 그 역시 사쿠라히메라는 격에 맞지 않는 상대와의 싸움에서 꽤나 소모되었는지,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냉기를 뻗쳐 쫓아오는 귀신들을 견제하며 그들에게 말했다.
"성공했어요. 방금 전의 공격으로, 공간 자체에 구멍이 났습니다."
실제로 공기를 찢고 그 역할을 다한 고압의 참격은, 사쿠라히메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보다 외부차원의 바깥쪽인 결계의 벽을 베어내는 것에 집중한 공격이었다. 성공했다는 소식에 서라원은 초조한 미소를 짓는다.
"그럼 어서 가야겠죠…?"
성재는 그럼에도 약간 불안한 기색을 얼굴에서 지우지 않은 채 답하여 주었다.
"문제는, 그 틈으로 나갈 수 있는 건 우리나 구출 대상인 유령들만이 아닙니다. 이 차원의 주인 역시 마찬가지고…"
사쿠라히메.
본디 뱀의 손 측 자료를 심야클럽이 일부 받았을 적에는, 그 역시 아주 오래되고 강대한 역병신이자 유령으로 생각하여 포섭의 가능성을 염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시, 서라원, 윤성재가 차례대로 그와 충돌한 결과 그들의 작전은 완전히 바뀌었다. 사쿠라히메라는 존재는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분명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섬뜩할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손이나 클럽이 알고 있는, 그 존재에 대한 첫 기록은 970년이지만 분명 사쿠라히메라는 자는 그 이전부터 존재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당시 미약했던 세계의 인류에게 위해를 끼쳐, 산 자는 죽이고 죽은 자는 지배해 나가면서 잔인한 봄의 꽃을 통제불가능하게도 피웠다.
1850년 경에는 다시 봉인에서 풀려나, 일본국의 땅에서 당대의 변칙 대응기관이었던 수집원의 두술사와 혈전을 벌인 끝에 다시 봉해졌다곤 들었다. 그러나 라원으로서는 두술사라는 집단에 대해 아는 바도 그들의 능력도, 심지어는 그 당시의 사쿠라히메가 지금만큼이나 강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들에게는 뾰족한 대응법이 없었다.
가장 일리가 있는 것이 바로 나라시로 베어 낸 구멍을 통해 도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종당하는 유령들을 구해 내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해 보였고, 셋만 빠져나간다 가정하더라도 사쿠라히메가 가만히 봐 줄 이유도 없다.
"일단 다시 사쿠라히메 쪽으로 이동하면서 구멍 쪽으로 접근하죠."
성재의 말에 서라원이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부러진 나무들의 위로 마치 파도와 같은 것이 크게 일었다. 그것은 수천 수만 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꽃보라. 독기를 머금은 무수한 꽃이 그들을 삼키듯이 떨어져 내리고, 그 위에서 소매를 휘날리며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사쿠라히메가 날아든다.
일견 보기에도 심지어 그 힘은 나라시나 윤성재와 싸웠던 일전의 힘조차도 크게 웃돌아, 가시화(可視化)된 기운이 시커먼 안개나 불꽃처럼 튀겨지고 있다. 윤성재가 공중을 날아 차가운 바람으로 꽃의 폭포를 상쇄시키려 해 보지만—
그 한계를 훨씬 넘은 질량이 덮쳐와, 그로서도 고작 방향을 바꾸는 것이 최대의 수였다. 그 저항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서 사쿠라히메는 뚜둑, 하고 목의 근육을 울리더니 이쪽을 향하여 내려앉는다. 악신의 시선 역시 이쪽을 향해 왔다.
떨면서도 나라시의 검 끝을 쥐고 있는 서라원.
아니, 서라원을 도와 녹색 기운을 일렁이는 그 황금보검 쪽으로.
그리고는 기쁘다는 듯이, 여유롭게 땅을 밟으며 단숨에 거리를 좁혀 온다.
"정체가 뭔가 했더니…… 왕의 딸이었나?"
그 말에 나라시는 달려들듯이, 그 도신을 진동하며 사납게 외쳤다.
— 네가 그분을……!
"아니. 아니야. 그를 만나 본 적은 없어."
표정을 바꾸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쿠라히메. 그 결론에 살기를 내던 나라시도 안심한 듯이, 그 움직임을 멈추고 이어지는 말을 듣는다.
"그 자가 그 땅… 즉 이 밖에 온 적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서라원도 윤성재도 움직임을 멈추고서, 사쿠라히메의 말을 듣는다. 그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듯이 여자는 수없는 꽃을 다시 거두어들이며 물고기 떼와 같은 풍경을 보인다.
"밖이라 함은 지구…"
"지구라. 어쨌든 너희가 말하는 그 땅이겠지. 허나 내가 세 번째로 나왔을 적에는 이미 그 자는 없었어."
서라원은, 그 말을 단서로 생각하여 집중하면서도,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해 칼끝을 계속해서 겨냥한다. 그가 알기로 사쿠라히메가 지구상에 다시 강림한 것은 1850년, 19세기의 중반이다. 허나 그때 수집원이 사쿠라히메를 봉했을 때는 기록된 두 번째의 탈주 사건이었다.
만일 이 자의 말을 전부 믿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후로 한 차례의 사건이 더 있었고 그때는 이미 왕이 사라져 있었다는 것일까.
"내가 그를 알고 있는 것은…"
말끝을 흐리며, 사쿠라히메의 탁한 눈이 나라시를 내려다본다.
"내 손으로 그 자의 아들놈을 죽였기 때문이겠지."
마치 반응하듯, 나라시의 기운이 폭주했다.
쥐고 있던 서라원의 손조차 태울 듯이, 내장된 신력을 마구잡이로 발산한다. 조금 전 왕의 기억에 흔들렸던 것과도 같이. 서라원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나라시는 뭐라 거칠게 포효하더니, 그 뻗쳐 나오는 푸른 기운이 라원의 손을 휘감아 파고들었다.
"윽……! 인사부장…?"
놀란 기색의 윤성재가 단숨에 달려들어 그 손에서 나라시를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사쿠라히메로부터 벚꽃잎으로 이루어진 울타리가 고속으로 파고들어 둘로부터 성재를 떼어놓았다. 마치 그 둘을 구경하거나 시험하려는 듯한 미소를 띄우며 아무렇지 않게 흉악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건넨다.
"너무 화내지 말아. 너처럼 귀여운 아이의 오라비인 줄 알았다면 죽이지 않았을 거야?"
서라원은 이를 악물었다. 라원의 팔을 찔러 파고드는 듯한 나라시의 에너지. 그것은 마치 그들 유령이 사람에게 빙의하여 미쳐버리게 하거나 육체를 탈취하는 작용처럼, 라원의 영혼과 형체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에너지가 흘러들어옴에 따라 나라시의 분노와 같은 열, 서러움과 같은 냉기도 휘감아쳐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온트, 라고 하던가. 그 사내의 이름은….."
— 여덟째 오라버니를! 네가 잘도…!
나라시는 포효했다. 서라원이 필사적으로 손을 떼거나, 혹은 팔을 돌리려 해 보았지만 거대한 벽을 미는 듯이 어떠한 변동조차도 일으키지 못한다. 사쿠라히메는 눈을 내리깔며, 나라시에게서 폭발하는 힘을 바라본다.
"우연이었다고? 그저 싸우는 도중 그 사내가 검이었음을 깨달았을 뿐이지."
— 어떻게 너 따위가!
"강한 자였어. 힘을 방출하는 능력이 있었지. 그 힘을… 자신이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있던 왕이라는 신의 것까지 전부 써서 나와 맞섰다면 내 목을 벨 수 있었을텐데. 아쉽게 됐구나."
그 순간,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라시의 의식이 완전히 라원을 덧칠한다.
푸른색의 신력은 핏줄, 혹은 숙주를 침식하는 가늘고 긴 기생충처럼 라원의 몸에 뻗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라원의 눈동자도, 입 안도, 나라시의 힘을 흘리면서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검으로서 내장하고 있던 모든 힘을 소모하면서까지 주인을 침식하는, 흔히 요도(妖刀)라 할 만한 형태로 그 기운을 날뛰게 한다. 나라시가 아닌 이번엔 서라원의 입에서 원한에 찬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 너 따위가……
"그 더러운 입으로 이야기하지 마!"
그리고 자신도, 이제까지를 훨씬 상회하는 힘을 그 날에 씌워 땅을 박찬다. 그 힘에 풀이 날고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떨어져 내리며, 추진력을 등진 서라원의 몸으로 이글거리는 힘을 휘감은 자신을 힘껏 내리친다. 이성을 잃은 듯한 행동에도, 아름드리 나무가 단숨에 깎여나갈 듯한 힘이 뒤따르며 사쿠라히메에게 직격하지만.
이번에는 사쿠라히메도 붉은 신력을 내리쳐, 그 공격을 깨뜨려 버린다. 그리고 긴 옷을 입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속도로 나라시를 피하며 즐거운 듯이 은은한 미소를 띄고서 말을 이어간다.
"부럽구나. 그렇게 위해 주는 신자가 있는 신이라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마치 자신의 발 앞에 쓰러져, 최후까지도 왕이 남겨주었던 힘을 쓰지 않았던 형제를 회고하듯이 나라시를 응시하며, 이번에는 그 손에서 날카로운 가시 같은 기운을 뻗쳐 나라시가 예비하던 공격을 부수어 흩뿌린다. 그러나 자신의 공격이 부서져도 흩날려 사라져도, 나라시는 멈추지 않는다. 자신을 이루는 영맥과 신력 하나하나까지 모두 뜯어낼 듯이 예리한 공격으로 바꾸어 방출한다.
"입 닥쳐!"
찔레 가시 같은 힘과 맞부딪힌 날을 크게 밀어내고, 포식성 물고기의 대이동처럼 덤벼드는 꽃보라도 쏘아낸 참격으로 베어 떨어뜨리며 나라시는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우리는 가족이었어…!"
사라진 윤성재를 쫓아, 저마다 멍한 눈으로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귀신들을 뒤로 한다. 그리고 나라시는 폭발적인 힘을 담은 검으로 공중을 베며 사쿠라히메를 다시금 크게, 윤성재의 힘과도 비할 바 없이 몰아내면서 무수한 붉은 기운을 단칼에 찢어내 버렸다. 녹색 칼날에 찢긴 기운이 안개처럼 크게 흩어진다.
"생각하지 말라고? 자만하지 마."
그럼에도 탁한 독기의 힘은 전혀 멈추지 않고 도리어 계속 합하거나 나누어지며 닥쳐오며, 그 사이사이로는 꽃잎까지 무수히 날아들어 시야를 가린다. 게다가 사쿠라히메의 힘은 전혀 닳지도 줄지도 않는다. 이번에는 그 그림자로부터 무수히 많은 가시나무 같은 손아귀들을 꺼내어, 수없는 방식으로 나라시를 압박하여 온다.
"내게도. 왕에게도. 너나 네 오라비는 보구에 불과해. 너희 같은 건—"
파고든 새카만 손톱이, 나라시의 칼날을 때려 둘을 크게 날려버린다.
"주인이 없으면 산야를 떠도는 들개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분노도 무엇도 띄지 않은, 심지어 퍽 다정한 음성으로 일갈한 사쿠라히메는 계속해서 공중에 공격을 띄운다. 서라원, 아니, 그 몸을 빼앗은 나라시가 신음을 흘리며 휘청였다.
끝이다.
천천히 그 힘이 공중으로 뜯겨 나간다. 모든 수단을 동원했음에도, 좁혀지지 않는 차이를 실감한다. 이제는 무릎 꿇고 용서를 빌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다. 왕이나, 혹은 첫째 언니와 같은 자들이었다면 긍지를 지키며 싸울 수 있었겠지만 나라시로서는 역시나 불가능한가. 섬광이 희미해지며 나라시는 추락한다. 서라원의 손아귀가 힘없이 그를 놓아 버리며, 다시 소녀의 형태로 돌아온다.
격통이 느껴졌다. 통제되지 않은 신력이 과충전된 모양일까. 명치를 붙들며, 고통스러운 숨을 토하는 나라시의 머리 위로 흰 손이 얹혀진다. 잔인하게도 그 순간 나라시는 왕의 손길을 떠올리고 말았다.
"신이란 건 다 같아."
허나 그 착각조차도 불허하는, 미약한 기쁨을 띈 목소리.
"미물을 지배함으로써 살아가는 거야. 나도, 그 왕도 그랬을테지."
나라시는 그를 노려보며,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문다.
"그러니 버려진 너는 지금부터 나를 주인으로 모시면 돼. 나쁘지 않잖아?"
"닥쳐."
"아버지를 받드는 것보다야 이 언니랑 어울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잔인한 이야기를 하며, 손을 뻗으려 했던 신이었지만.
"언니에게……"
일순간 어깨를 바람이 관통한 듯한 통증을 느낀다. 그 통증의 방향을 이해하기도 전에 사쿠라히메는 단숨에 느꼈다. 저 멀리에서 날아온 나이프가 그의 어깨를 크게 궤뚫었던 것을. 그리고 그 나이프에서 사나운 냉기가 폭발하여—
다음 순간, 어깨 째로 찢겨나간 신의 팔이 공중을 날았다.
모든 것이 흐릿해진다.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일까. 생각컨대 긴 장마였다. 땅을 물들이고 지붕을 때리며 잿빛 하늘이 쏟는 그 장대비를 그는 보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 광경을 남자는 증오했다. 어쩌면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했던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라원은 비가 쏟아지던 7월에 태어났다. 평범한 가정이었다. 작은 마당이 딸린 골목 안의 집이었다. 가족은 모친, 부친, 형까지 하여 넷이었다. 그때의 서라원은 고등학생이었다. 그때 그는 도서관에 앉아 공부에 미약한 적의를 품거나 친구들과 떠들기를 좋아하는 그 시절의 소년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가 쏟아지던 날 형이 죽었다.
형의 얼굴에 흰 천이 드리우던 밤을 기억한다. 서라원과는 다륻 사람이었던 것도 기억한다. 제법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라원과는 달리 대학생인 주제에 공부에는 담을 쌓았지만, 탁구도 곧잘 하고 통기타에도 뛰어났다. 그래서 부모님에게는 퍽 골치였던 맏아들이었대도 무엇인가 생각이나 사회를 논하는 것은 라원보다도 훌쩍 어른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생각하던 것을 향해 몸을 던지던 형이 그렇게 죽었다.
서라원은 곱씹는다. 어쩌피 세상이, 자신을 향해 투신하는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죽이고 만다. 그렇다면 나서려는 마음가짐으로 행동한다는 그것 자체가 일종의 위반이라고. 옳다든지 해야 한다든지 하는 생각에 몸을 맡기는 순간 그런 식으로 죽게 된다고. 우습게도 서라원을 죽인 것은 그 무엇도 아닌 교통사고일 뿐이었지만.
라원은 깊게 웅크린다. 창 밖의 어둠이 추적추적 비를 내리며 푸르게 빛을 낸다. 마치 누군가가 지닌 여름의 힘과도 같이. 남자는 눈을 내리깐다.
내 주제에, 누구더러 참견했던 거지? 도구니 아니니 그런 건.
나섰으니까 이렇게 됐던 거야. 운이 나빴던 게 아니라 그 시작에 문제가 있었던 거라고. 메뚜기에게 뜯어먹히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꼴에 이렇게나 유유부단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때 남자는 저 밖에서 우는 소리를 듣는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흐느끼는 목소리를. 창 밖으로 내다보니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너다."
누군가가 그에게 속삭이고 있다. 자세히 들으면 그것은 단지 울음을 띄고 있다 그뿐이지 서라원의 음성과 완전히 같다. 당황한 라원은 주위를 둘러보지만 무엇도 보이지 않고, 빗대자면 공간 그 자체가 흐느끼면서 말을 걸어오고 있다.
"……누구야?"
그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서, 잠시 침묵을 띄운 그 목소리는 다시 일방적으로 말한다.
"서라원 너다."
"…나라고……?"
보통 사람이라면,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무언가 저항하는 말을 던질지도 모른다. 허나 서라원 그 자신도 비현실적 존재, 망령이므로 이상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리고는 단지 순응하듯이 턱을 괴며 말을 기다린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소멸 직전이라는 건가, 하고 의식하며.
"그래. 그 꼬맹이에게 침식당해 사경을 헤메는 너."
"그런가…"
사쿠라히메의 도발에 분노한 나라시는, 서라원을 이루는 원념을 짓밟을 수준의 분노를 토해 끝내는 그를 잠식하였다. 라원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꼬맹이가 밉지."
"아니. 그렇다고는…… 그 애는 부모 이상의 존재, 그런 사람의 욕을 들어먹은 거잖아?"
"이해되지 않잖아."
우울한 목소리는 라원의 말을 받아치며, 그를 궤뚫어본다는 듯한 말을 이어간다.
"너 따위 형의 죽음 이후로 열심히 살아본 적도 무언가 분노를 표출한 적도 없으니까."
"그건 아니지."
서라원은 표정을 굳히며 대꾸했다.
"나라시도 나처럼… 가족을 잃은 게 확실했으니까."
어쩌면 그것을 알아버린 시점에서 나라시를 이해한 서라원이, 무의식적으로 빙의를 거부하길 끝냈던 것은 아닐까. 서라원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은 분명 이제까지 해 왔던 어떠한 생각과도 달랐다. 나섰기 때문에 죽음의 위기에 몰린 것일까. 죽음의 위기에 각오하고 자신을 던졌던 것일까.
설령 후자라고 해도, 그것은 무의식으로 한 공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경험한 서라원에게 희생이란 어불성설이었으니. 그 죽음이란 도로변에서 늑골이 부러지고 머리가 부딪혔던 자신의 그 사망이 아닌, 옳다고 믿던 바를 외치다가 시위 도중 싸움에 휘말려 죽었던 형의 사망일 것이다. 하지만, 하고 라원은 읊조린다.
세상에 맞서서 자신의 마음을 간직하고 싸웠던 형.
악귀 같은 신에 맞서서 마지막 흔적을 간직하고 싸웠을 나라시의 오라비.
그 둘을 내적으로 겹쳐 보며 서라원은 생각한다.
"…역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형처럼 되는 걸 두려워한 네가?"
서라원은 쓸쓸한 표정으로 웃는다.
"아…… 하필 왜 나일까. 내가 아니라 유서진 외교부장이었다면, 혹은 다른 더 뛰어난 사람이었다면 잘 마쳤을텐데."
다른 것을 찾을 수 있는 서라원의 감각. 그러나 자신은 그 감각에 맞지 않는 한량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라시라는 자에게 꼭 한심하다는 표정을 들으면서도. 그리고 윤성재 인사부장에게 떠맡겨지면서도. 누군가에게 믿음의 대상이 되어버린 순간 그의 의식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울고 있던 목소리는, 이제는 거의 속삭이듯이 이쪽으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갈 거야? 그 몸 상태로 펄펄 날뛰는 신에 맞서겠다고?"
서라원은 눈을 뜬다.
"이제 와선 뭐라도 할 수 밖엔 없잖아."
그리고 흐려져가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이걸로도 안 되는 건가…"
윤성재는 망연자실하게, 붉은 빛이 번뜩이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사쿠라히메의 뜯겨나간 팔에서는, 그것을 대체하듯 뒤틀린 팔 뼈와 같은 검은 그림자가 대량으로 나타난다. 그 팔들을 마치 헤일로와 같이 흔들며, 눈에서 피와도 같은 액체를 흘린다. 그 팔 하나하나에서 시뻘건 기운을 일으키며 떠오른 사쿠라히메는 그야말로 아수라와도 같은 형태였다. 마치 애초에 다다르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신의 힘.
그때, 뒤쪽에서 무엇인가가 윤성재의 뒷목을 붙잡아 끌었다.
"……인사부장."
서라원이었다.
둘이 있는 곳은, 벚꽃잎이 가득한 숲이 아닌 빌딩 위. 아래로는 자동차 무리가 휙휙 빛을 내며 오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평소의 서울. 이해가 되지 않는지 눈을 깜빡이던 윤성재는 금세 그 방법을 눈치챘는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라원 역시 그 모습은 엉망이지만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방금 전 사쿠라히메와 나라시의 폭발에 준하는 싸움이 있었다. 그 결과 폭주하는 나라시가 마구잡이로 쏘아올린 공격이 사방으로 도탄된 탓에, 결계가 갈기갈기 찢겨 공간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셈이었다. 허나 여전히 사쿠라히메 본인이 이쪽으로 강림할 가능성이 있다. 성재는 곰곰히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다행이죠."
그의 설명을 듣건대, 둘의 싸움 당시 윤성재는 이들에게 동참하지 못했다. 대신 홀로 사쿠라히메의 권속들을 유인하여 첫 번째로 낸 입구로 그들을 내던지는 데 성공, 기다리고 있던 외부 회원들이 구출된 유령들을 모아 심야클럽 회실에 일시석으로 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이제 적은 사쿠라히메 하나 뿐.
"나라시는 꺼내고 그 여자는 봉인할 방법이 있을까요…?"
서라원의 물음에 윤성재는 진지하게 눈을 치켜들었다.
"딱 한 번입니다. 나라시를 구할 방법은."
"……그렇겠죠. 그럼 어떻게—"
"연기 잘 하십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