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시전 - 섬광

그것은, 어떠한 언어와도 달랐다.

사람의 말과도, 해원읍의 선주민의 말과도 달리 생각을 즉시 전달하는 듯한 이야기. 마치 아주 나이가 든 노인의 음성과도 닮은 목소리였다. 저번 윤성재가 했던 방식과도 닮았지만 그 격이 더 높았다. 서라원은 한 번도 느낀 바 없던 그런 존재의 기운에, 당황하며 뒷걸음쳤다. 반면 나라시는 그러한 괴물에 좀 더 익숙했는지 어깨를 펴고 수면 아래를 응시하며 낭랑한 목소리로 소개했다.

"나는 나라시. 신왕의 막내딸이오."

그 소개에, 정체불명의 존재는 잠시 침묵했다.

"왕이라 함은…"

그리고 마치 번뇌하는 듯한 소리를 속삭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무수히 떠 있던 연꽃과 개구리밥의 수면이 갈라지고, 날고 있던 반딧불 떼가 흥분한 듯이 여러 차례의 곡예비행을 해 댄다. 라원은 점점 더 그 모습에 겁을 집어먹어 도망칠 방법을 찾을 작정으로 뒤를 돌았지만, 나라시가 안심하라는 듯이 손으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어두운 물을 헤치고 드러나는 것은 바로 거대한 뱀의 머리다.

암녹색 비늘과 황색의 무늬. 어둠 속에서 몰려드는 반딧붙의 빛으로 검은 눈을 번뜩이는, 이무기와도 같은 크기의 뱀. 그 머리만 하더라도 나라시의 키에 준하고 날름거리는 갈라진 혀는 팔 길이에 준한다. 족히 고속버스 두어 대는 훌쩍 넘을 듯한 길이의 그야말로 대사(大蛇).

"아나콘다……?"

서라원이 경악하여 방정맞은 말을 흘리자, 나라시는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 세계의 신을, 열셋째 딸이 뵈오."

그것은 해원읍의 오래된 영물, 신록의 왕. 그는 나라시와 서라원을 검은 눈동자로 바라보더니, 특히 서라원 쪽을 향해 공격적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귀신인 서라원을 삿된 존재라고 생각하였을까. 그리하여 완전히 겁에 질린 남자는 필사적으로 나라시에게 시선을 보내며, 문자 그대로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그자는 저의 동료입니다. 이곳을 가해하러 온 망령이 아닙니다."

"그러한 그대들은 무엇을 위해서 왔느냐."

"왕을 찾기 위함이오. 별들 위에서 온 신이신 저희 아버지의 행방을 그대는 아시오?"

나라시는 신이 난 듯이 계속해서 설명했다.

"모습은 사람과도 같고, 머리는 검으셨소. 그리고 수없는 힘을 갖춘 신이오. 떠도는 것을 좋아하시니 여기에 있으셨을지도…"

그 말에, 잠시 뱀은 말을 멈추었다. 그 모습은 마치 고민하는 노인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반딧불의 무리가 그의 근처를 맴돌며 반짝일 뿐. 나라시는 그의 기색을 초조한 듯이 살폈다. 어쩌면, 서라원은 알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해원읍의 거대한 뱀과 몇백 년 전의 신이 지인일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을 것이라고. 그 생각 그대로 뱀은 말을 이어갔다.

"미안하구나."

"무슨…?"

"미안하구나, 그대들이여. 이제 해원읍에 신은 없다. 나도, 누구도 신인 자는 남아 있지 않다."

쓸쓸한 목소리로, 자신이 신이었던 시절을 회고하듯이 이야기하는 뱀. 그 역시 아주 태고의 해원읍에서 신이었음을 알 수 있을 듯했다. 허나 나라시는 그 말에, 한 가지 희망이 꺾인 듯이 멍한 표정을 지을 그뿐. 그리고 뱀을 그저 들여다보면서 들리지도 않을 듯한 소리로 이야기한다.

"거짓말…"

세계도 해원읍도 그동안 수없는 변화가 있었다.

재단과 세계 오컬트 연합 같은, 정상성 유지 기관의 도래 이후로, 혹은 애초 그 이전 제국주의자들, 심지어 인간이 여러 섬과 대륙에 나타난 이후로 야생의 신들은 그 설 자리를 크게 잃었다. 신록의 왕도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제 해원읍에서 그를 숭상하는 자는 더 없고 그는 서서히 쇠락하여, 그저 거대한 짐승 정도까지 퇴화하고 있었다.

뱀은 나라시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아닌지, 계속해서 슬픈 기색을 띠고 이야기했다.

"나의 형제들도, 이곳을 이미 떠나거나 죽었다. 그 왕이라는 자도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일 게다…"

"그런…"

"네 기색을 보아하니, 그 왕이란 자도 너와 같은 부류라면 아마도 '벚꽃의 바다'에 있을지도 모르지."

"벚꽃의 바다… 말이오?""

또 다른 단서에 나라시는 펄쩍 뛸 듯이 목소리를 높인다. 라원의 곁에서 단지 왕의 소식에 울고 웃는 소녀. 서라원은 그 모습을 보면서 표정을 굳힌다. 아까 전에 하였던 왕이 영영 없을 경우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나라시의 상태에 대해 어딘가 짐작했기 때문일까.

"벚꽃의 바다는 혼령이 고이는 종착점… 허나, 그곳의 주인은 굶주렸으니, 되도록은 가지 않는 것을 권하겠으나.."

"감사하오, 꼭 가 보겠소!"

나라시는 칭찬을 들은 아이 같은 미소를 띠우며, 뱀의 말은 듣는 듯 마는 듯 하고서 웃는다. 라원은 그런 소녀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한 나라시의 반응에도 뱀은 표정을 지운 채, 이윽고 다시 탁류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반딧불 무리도 다시 찬란한 별빛을 반짝이며 흩어지고 물가에는 다시 둘 뿐이었다.

"여긴 안 계시지만… 다른 단서를 찾았네. 벚꽃의 바다래! 어딘지 알아?"

"……저는 모르지만… 그런데 그 뱀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나라시는, 그 눈에 광기와 같은 붉은 빛을 일렁이며 대꾸한다.

"나가자! 시간이 없어!"

그리고는 다시 총총걸음으로 경보하듯 나아가, 아직 남아 있던 길로 몸을 던졌다. 서라원은 마치 들어올 때와 같은 방식으로 머뭇거린다. 벚꽃의 바다라는 그 공간이 위험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제아무리 신령한 뱀이라도 단지 추측 끝에 내놓은 단서다. 그곳에서도 왕을 찾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곳을 뒤질 수도 없거니와 모두 찾아보아도 무엇도 나오지 않는다면, 나라시는 어떻게 될까.

하는 수 없이 서라원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이미 사라졌던 뱀의 목소리가 그에게 다시 들려왔다.

"명심해라."

서라원은 뒤를 바라보았다.

"잊힐 수 없는 것이, 너희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게야."




돌아오는 산길.

"그 뱀, 정말 영리한 것 같아. 왕에겐 못 미쳐도… 그러니 그리 큰 늪의 신령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런가요…"

"물론이야! 왕을 그 바다란 곳에서 마주치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귀여운 막내딸이 왔으니 당연하지!"

밤새처럼 재잘재잘 소리를 높이는 나라시를, 서라원은 여전히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밤길은 어두웠다. 해원읍의 늪과는 또 달리 밤의 새나 개구리 우는 소리도 없이, 그저 벌레 우는 소리만이 다가오듯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멋진 날이구나… 오늘은."

"왕의 단서를 찾은 게 그렇게 기뻐요?"

"물론이지! 난 왕의 검이니까…"

나라시의 말과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걷던 서라원은, 일순 그 기색의 정체를 느낀다. 나라시 쪽이 아니라 풀벌레. 그 다가오는 소리는 분명히

"나라시! 이쪽으로 붙어요!"

놈들이 다시 다가왔다.

서라원이 떠올린 시점에서, 서라원이 보고 있는 풍경 역시 변형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나무 그루터기나, 바위라고 생각했던 형체들이 일그러지면서 흩어져 댔다. 빛에 몰려드는 무수한 하루살이의 무리와 같이 숲의 팔방으로부터 메뚜기가 더욱 달려들고, 뭉치며, 그 자체가 하나의 벽을 연상케 하는 형태를 만들었다.

새까맣게 모이기 시작한 벌레들은, 날개를 쳐 울리며 찌르륵찌르륵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마치 단순한 무리의 공격이 아니라 늑대나 병사들과 같이 협력하고 전략을 짜려는 듯이. 그리고 살아 있는 작은 폭포처럼 그들에게 서서히 다가온다. 방금 전 무수한 동족이 죽은 경험을 학습했을까. 나라시는 방해받았다는 것에 화가 났는지 단숨에 손가락을 들어 뻗었다.

"이… 버러지들이!"

나라시가 쏘는 손가락 총탄 한 발에 서너 마리가 단숨에 폭발하지만, 이번에는 대여섯 마리가 날아서 거리를 좁혀 온다. 방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가 계곡의 폭류처럼 달려들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압도적인 개체 간의 힘의 차이에도, 십수 초 내에 그들은 사실상 포위당한 꼴이 되었다. 흉측한 턱을 세운 메뚜기들이 나라시를 덮치려는 순간, 서라원이 쳐 날린 날카로운 돌과 나뭇가지가 부상한다.

"아!"

그 잡동사니의 벽에 메뚜기 떼가 부딪힌 사이, 단말마를 흘리며 나라시가 후퇴했다. 유령의 폴터가이스트로 들어 올린 것들을 타고 넘으며 무서운 기세로 덤벼오는 곤충 무리는 이미 더 이상 개체가 상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어쩌죠?"

"그러게… 어쩌지…? 지금은 왕도 누구도 없는데…"

감정기복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약간 풀이 죽은 듯한 나라시는 그럼에도 계속해서 빛을 쏘아 올린다. 이번에는 짧은 순간 폭격을 연상케 하는 무수한 공격을 쏟아붓지만 메뚜기 떼는 여전히 삼면에서 덮쳐오고 있어, 그 수가 피해를 상회함이 명백하다. 라원은 이를 악물었다. 유령이 죽는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소멸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새로운 시작이라 느껴지지는 않는다. 마치 눈앞의 어둠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지는 말 걸 그랬나. 라원은 독백한다. 애초에 나서려는 시도가 잘못되었을 것이었다. 꼴에 누군가를 돕는다는 일은 우스꽝스럽게 망칠 것이 뻔한데.

폭발하는 녹색광을 등진 소녀가 보인다. 은색과 갈색을 섞은 듯한 머리카락 빛깔에, 기원을 알 수도 없는 이국적인 얼굴의 소녀. 소녀는 붉은 눈을 내리깔고서 지친 듯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다. 그 길항의 중간에 끼기만 해도 도와주기는커녕 빛에 얻어맞아 산화하던가 무참히 찢겨 먹히게 될 것이다.

공포의 중심에서 나태나 도피가 아닌 타개책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서라원은 곱씹는다. 도망칠 수 없이 좁혀 오는 그 거대한 벽. 서라원은 당당히 서서 생각한다.

이번에는 살고 싶은데.

"…나라시. 당신 검이었죠."

"그래."

"무기였죠? 검이니까…"

나라시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는 고개만을 돌려 그를 응시한다. 맹랑한 꼬마를 보는 듯 혹은 감히 금기를 입에 올린 이를 노려보는 듯한 표정이다. 그 검붉은 눈이 서라원을 응시하자, 그는 잠깐 주춤한다. 마치 혼쭐을 낼 듯한 사나운 기운이 그를 덮쳤다.

"뭐…?"

"무례했다면 죄송하지만…"

"나는 왕만의 도구야. 주인이 없다면, 지금은 이 모습에서 변하지 못해."

나라시는 침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잡은 것은 확실하다. 앞으로 한 걸음이면 놈들이 덮쳐온다. 그러니 더는 물러설 이유도 예의 차릴 방법도 생각할 수 없다. 라원은 동작을 고르고, 나라시 곁으로 내달렸다.

나라시는 어쨌건 맞춤 제작은 아닐 테다. 그렇다면야.

"미안합니다. 나라시."

서라원은 즉시 몸을 던지듯 바닥으로 내려앉아, 두 손으로 나라시의 발목을 쥔다. 도박수였다. 그것도 아마 도박장 모서리에 놓여서 손목시계도 옷도 빼앗길 추레한 수. 우선 하나. 유령이 사람이나 물건을 쥐어 들어 올릴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최소한 여기는 괜찮았다. 지금껏 둘은 같이 다니며 여러 차례 닿고는 했으니까 이 행동의 근거가 있었다.

"잠깐, 너…!"

나라시가 외치는 소리도, 겨냥을 실패한 빛이 유성처럼 사방에 튀는 충격도 무시하고서.

서라원은 온 힘을 집중한다. 죽은 지 오래임에도 그 순간만큼은 생전처럼 세포 하나하나가 약동하면서 근육이 피를 짜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나라시는 생각보다도 더 맥없이 움직였다. 아마도 둘 다 살아있는 인간이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상황이다. 서라원이 강하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서라원은 목적을 지니고 태어난 이가 아니다. 하지만 나라시는 목적이 있는 존재. 그것은 바로 베는 것이다. 라원은 언젠가 그 사실이 참으로 골치 아프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렇게 목적이 있는 존재니 아직도 왕이라는 주인을 찾는 것이므로.

뭐라고 다시 나라시가 높은 소리를 지르지만 서라원은 망설이지 않는다. 그리고 한 차례 공중에서 팔을 휘적거리는 나라시를 검극으로 삼아서, 하늘에서 땅으로 선명한 궤적을 그린다. 마치 아주 옛날 대검을 휘두르던 광전사처럼.

그리고 잠시 그 기행에 놀랐는지 메뚜기 떼가 물러난 단 이 초의 순간이다. 서라원은 눈을 꼭 감고, 나라시의 기억을 믿는다. 주인이 어떤 주술적 속박을 걸었던지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마치 어떠한 고정 행동양식과도 같은 잔인한 도구로써의 기억.

그리고 그 순간 서라원을 이루는 엑토플라즘이, 영혼이, 심령질이 손가락부터 증발한다. 아니 마치 끓어올라 열과 빛으로 화하듯이 일순간 청회색의 불꽃이 된다. 유령 따위가 부릴 수 있는 기적이 아니다. 손에 잡힌 소녀의 발목은 순간적으로 감촉이 달라진다. 차갑고 단단하며 무감한 존재의 느낌. 결의에 사로잡힌 라원은 이를 의식조차 하지 못한다. 허나, 모든 것을 순간 운에 맡기고자 한다.

그리고 마침내 금빛의 오래된 빛이 눈을 뜬다. 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황금보검의 칼과 보석에서 방출되는 선명한 빛이 모든 메뚜기의 겹눈에 동시에 비추었다.

서라원의 영(靈)에서 뜯겨 나온 푸른 불은, 검의 요철에 흘러드는 피처럼 타고 올라 나라시의 검신을 휘감았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라원은 다시 한 차례 나라시의 칼자루를 쥐고, 모든 영의 기운을 응집한 그 공격을 다시금 휘두른다. 둔중한 충격이 서라원의 죽은 어깨와 허리를 뒤덮는 그 순간 나라시는 더 이상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검과 빛과 선의 우아한 궤적으로 적들에게 잔인한 응답을 한다.

그리고.

어둠을

메우는

섬광.

무수한 낙하와 공기가 폭발하듯 찢어지는 소리가 울린다. 되돌아오는 반발을 겨우 견디며 라원은 눈을 뜬다. 하늘에서 땅까지 휘둘렀던 검을 아래로 두고, 여전히 선명한 녹색의 빛을 이글거리면서 갈라지는 공기를 느낀다. 눈앞의 메뚜기들은 총탄과도 그 규모가 다른 충격에 휩쓸렸는지, 가루가 되어 휘날리고 있었다. 충격파의 결과인지 머리가 울리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서라원!"

검에서는 소녀의 화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라원은 초조하게 웃었다. 칼이 여자애의 음성으로 말하는 것은 역시 환상 같은 광경이었다만 되돌아올 후폭풍은 아마 그것만큼 유쾌하진 않을 예정이었다.

"나라시, 그게…"

역시, 혼나겠다고 생각했다.

서라원이 나라시를 휘두른 것은 단순히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다. 왕을 지독히 그리워하며 찾아 헤매이는 나라시에게, 그것은 어쩌면 왕을 모독하는 행위일지 모른다. 설마 이쪽으로 총을 쏘아오진 않겠지, 하고 긴장한 남자에게 나라시가 외쳤다.

"미친놈이야, 너?"

"잠깐 들어보세요! 사람은 습관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걸 반복 수행해서……"

나라시는 침묵한다. 다시 영혼을 잃은 유물이 된 것 같은 그 침묵에 라원 역시 제풀에 장광설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멋대로 휘두른 건…"

"만약에 소용없으면 어쩌려고 했어?"

"그럼 칼로 못 돌아갔더라도… 휘둘러 봤겠죠."

"미쳤어. 그냥."

서라원은 나라시의 칼자루를 집어 들고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칼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몇 초 후에야 다시 입을 연다.

"나는 왕에게만 속박된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뜯겨나간 메뚜기 떼의 파편이 휘날렸다. 나라시의 검신이 희미한 녹색으로 반짝이더니, 곧 몇 초 후 다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를 맹렬히 쏘아보다가 일어난 나라시는 몇 번 투덜대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라원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 슬픈 것을 생각하듯이.

검이었던 날들은 오직 왕의 손아귀에서만. 그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었던 것이 나라시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겨우 대단치도 않은 벌레들을 상대로 고작 잡귀 하나의 염원으로 다시 검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의 도구지?

나는 왕만의 신보(神寶)가 아닌가? 그렇다면 나라시라는 건, 대체 왜 존재하는 거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나에게는?




산을 내려와,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어느 버스 정류장.

"수고했어요."

둘은 멍하니 앞을 바라본다. 눈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다. 새카만 가쿠란을 입은 남자, 혹은 심야클럽의 인사부장 윤성재. 그는 조용히 버스 정류장에 기대어 너덜너덜해진 죽은 남자와, 잔뜩 화가 났는지 혼란해 하는지 모를 표정의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특히 윤성재는 서라원 쪽을 바라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하셨어요. 서라원 회원님."

라원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의 멱살을 쥐고 도로변에 내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힘조차 없다. 그리고 그 차이를 생각해 보자면 역으로 제압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왕은 없더군요. 거기엔."

서라원의 한 마디에 윤성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나라시는 아까보다도 더 심란한 표정으로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어쩌죠? 다른 단서가 있나요?"

"들은 바가 있어요."

서라원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퉁명스레 대답하지만, 상대는 그 태도보다도 단서가 있다는 것에 더 주목하는 듯했다. 라원은 그 열정적 상관의 프로토타입 같은 시선에 질렸다는 듯 말했다.

"……유령들이 가라앉는 벚꽃의 바다.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들었는데…"

그 순간 윤성재의 눈빛이 선명해졌다. 나라시는 그의 눈치를 보면서도 마치 단어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둘을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었다.

"제 추측이 맞다면, 그곳은… 제가 아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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