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드롬?" 보나 데아의 시녀가 말했다.
"전차 경주장이오." 필록세노스가 설명했다. "10만 명의 흥분한 군중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건물이지. 반란이 시작되는 곳도 바로 거기일 테고."
보나 데아의 시녀와 필록세노스, 민테 세 사람은 은비부대 본부의 응접실에서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둘러앉아 있었다. 필록세노스는 마치 나그네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시녀를 이 방으로 초대했지만, 진실을 아는 민테는 그처럼 편안한 태도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 방으로 향하는 문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필록세노스와 민테, 그리고 필록세노스의 주군 세 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필록세노스는 보나 데아의 시녀를 여기에 데려온 것이다. 민테가 추측하기로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시녀를 다른 대원들의 눈에서 숨기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일이 틀어졌을 경우 결코 그녀가 이 건물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거나. 만일 후자일 경우 필록세노스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민테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긴장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옷자락 사이에 숨겨둔 단검이 그대로 잘 있는지 조심스레 확인해보았다.
다행히도 보나 데아의 시녀는 민테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군." 그녀는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너희들은 너희의 황제를 목표로 하는 반란 계획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어째서 지금 모의자들을 처단하지 않는 거지? 왜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성난 군중이 황궁 가까운 곳에 운집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냐?"
필록세노스는 대답하는 대신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내용물을 홀짝거렸다. 잠시 후 잔을 내려놓은 필록세노스는 보나 데아의 시녀에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제대로 된 자기 소개를 못 들었던 것 같군요."
"말 돌리지 마."
"미안하지만 돌려야겠소." 필록세노스는 그렇게 말하며 편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려면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 자체가 폐하께 대한 불충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오. 나는 이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 수 없소. 그런데 당신은 우리에게 당신 이름도 말해주지 않았지."
"내가 너희의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닐까 의심하는 거냐?"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을 이유도 없소이다."
민테는 이쯤 되자 슬슬 필록세노스의 배짱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 대범함이 필록세노스가 믿는 신의 권능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신비학자로서 본인의 능력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몰라도 여신의 사제나 다름없는 사람을 상대로 저렇게 강짜를 부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필록세노스는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그의 추종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신의 아들 크리스토스를 영접한 채 매일을 살아가는 필록세노스는 이 방에 존재하는 세 신의 영압을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편안해 보이는 태도는 민테의 생각처럼 자신감의 발로라기보단 궁중 암투 속에서 길러진 정치적 감각과 연륜이 불러일으킨 가장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나 데아의 시녀는 필록세노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는 수 없군." 잠시 후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늘어뜨리자 나머지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민테는 진짜로, 필록세노스는 속으로만.
"내 이름은 설령 내가 너희를 형제 자매처럼 여긴다고 해도 함부로 밝힐 수 없다. 하지만 다른 호칭은 알려줄 수 있어." 시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포르피라 바실리사의 신부라고 불린다."
"신부?" 민테가 말했다.
"자줏빛 여왕Porphyra Basilissa?" 필록세노스가 말했다. "그건 보나 데아를 뜻하는 거요?"
"그래. 그분께서는 한낱 병사에 불과한 나를 그분의 가장 가까운 종이자 영원한 신부로 삼아주셨다. 나는 오랫동안 그분의 거처를 떠나 있지만, 다른 신부들 중에는 여왕님의 집에 기거하며 그분의 시중을 드는 자들도 있다."
"다른 신부들이라고 했소?" 필록세노스는 그렇게 물으며 속으로 유쾌한 기분을 느꼈다. 민테는 님프Nymphe의 이름을 가진 여자일 뿐이지만, 지금 두 사람의 앞에 앉은 사람은 실제로 영원한 신부Nymphe인 것이다. 필록세노스가 그리스어 단어의 신묘함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었던 탓에, 민테는 그의 얼굴에서 한 아내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인 정교회 신자가 눈앞에서 자신을 동성다처(同性多妻)의 일원이라고 밝힌 사람에 대해 당연히 가질 적대감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그러면 보나 데아는 이계의 신이 맞군요. 여성이 같은 여성 다수를 아내로 맞는 풍습은 우리 세계의 것이 아니오." 자신만의 생각에서 깨어나 한 첫 번째 말이 이런 것이었으니, 필록세노스는 그냥 뼛속까지 학자인 자신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카이사르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간파하더군." 여왕의 신부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딱히 유쾌한 것이 아니니 여기까지만 하지. 나는 여왕께서 신부로 맞은 마지막 사람이기에 가장 어린 신부라고 불리기도 한다. 원한다면 너희도 날 그렇게 불러도 좋다."
"그러지요."
"그리고 나는 나의 반려이자 주인이신 자줏빛 여왕의 이름에 걸고 지금 이곳에서 네가 하는 말을 그 어떤 인간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다. 이 정도면 나를 믿을 수 있겠나?"
"충분하오." 필록세노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민테를 바라보았다.
"……왜요?" 민테가 말했다.
"자네는 어떤가? 지금 하게 될 이야기를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
"저요? 수틀리면 언제든 이교 숭배 죄목으로 광장에서 화형당할 수 있는 마당에 제가 당신 심기를 건드릴 짓을 할 것 같아요?"
"잘 기억하고 있군." 필록세노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지금 반란을 주도하고 있는 청색당과 녹색당은 물론 일차적으로 시민들을 대표하는 정치 조직이지만, 동시에 황가와 시민들을 이어주는 통로의 역할도 하오. 지금까지 선대 황제들은 한 당파가 황제에게 공공연히 반대한다면 다른 당파를 후원하는 방식으로 불만을 가진 자들을 통제하는 동시에 시민들과의 유대감을 유지할 수 있었소."
여왕의 어린 신부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문제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어느 당파도 폐하께 호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오. 그분의 정책이 제국의 백성들 모두에게 짐을 지우면서, 청색당과 녹색당은 서로의 차이점보다 공통점에 주목하기 시작했소. 각 당파의 유력자들은 그들이 폭군의 밑에서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반란 음모가 시작됐소."
"너도 그가 폭군이라고 생각하나?" 어린 신부가 불쑥 물었다.
"폐하는 폭군이 아니시오." 필록세노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그분의 생각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닌 로마를 향해 있고, 지금 그분의 도시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폐하의 관심 밖이오. 그러니 반란자들이 폭군에 맞서는 혁명가의 환상에 잠겨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생각하오."
"알겠어. 그래서 반란자들을 사전에 제거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환상을 현실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지요. 도시 전체에 불만이 가득한 이 상황에서 군대가 반란자들을 잡아내겠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들쑤셨다가는 히포드롬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왼손에는 몽둥이, 오른손에는 횃불을 들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오."
필록세노스는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잔을 들었다. "위험하지만, 반란자들의 음모가 만천하에 드러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압하는 것만이 폐하께서 폭정의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오. 가장 질 나쁜 선동가도 반역자를 처단하는 것이 황제의 적법한 권리가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요."
"그리고 너희가 맡은 역할은?"
"저희는 반란 진압을 최대한 빠르고 조용하게 끝낼 수 있도록 폐하의 군대를 지원하려고 해요." 민테가 말했다. "반란자들에게 협조하는 마술사들은 진압 자체를 어렵게 만들 뿐 아니라 도시 자체의 질서에도 큰 피해를 입힐 거에요. 그 전에 은밀히 그들을 제압해서, 반란 당일에 주동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마술사들이 매우 적거나 아니면 아예 없도록 만드는 게 우리 목표에요."
"우리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요." 필록세노스가 말을 받았다. "그 마술사들은 서로를 식별하는 표지로 '니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당신은 앞서 항만에서 그것이 사람의 이름이라고 말했소. 하지만 니카라는 사람은 우리 부대의 요주의 인물 명단에 한 번도 오른 적이 없었소. 그러니 말해주시오. 니카는 대체 누구요?"
"니카는 용병이다." 어린 신부가 대답했다. "썩은 고기를 먹으며 살아남는 까마귀 같은 여자지. 그녀는 군대와 함께 나보다도 먼저 이 세계에 찾아왔고, 그 이후로 계속해서 이 세계의 백성들을 약탈해왔다."
"용병 군대의 지휘관이란 말이오?" 필록세노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전쟁에 참여했다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을 텐데, 방금 말씀하신 것과 일치하는 부대의 기록이나 전승은 떠오르지 않소."
"사람들은 그녀를 기억할 수 없다. 기억은 산 자들의 특권이니까."
"그게 무슨……?" 필록세노스는 그렇게 반문하려다 그녀의 말뜻을 깨닫고 전율했다.
"니카의 군대는 전쟁에 참여하지만, 굳이 전쟁의 향방을 바꾸기 위해 애쓰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지. 그녀는 패배가 확실한 자들에게 찾아가 희망을 대가로 그들이 가진 마지막 재보를 가져간다. 하지만 희망을 현실로 바꿔주지는 않아. 그녀의 고용주는 모든 걸 잃은 채로 패배해 죽어 사라진다."
민테는 창백한 얼굴로 어린 신부를 바라보았다. 필록세노스는 손으로 양 무릎을 짚은 채 허공을 응시했다.
"크리스토스의 추종자들은 헤브라이인들의 역사 기록을 경전으로 삼는다고 들었다." 어린 신부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그들의 남방 왕국이 멸망할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하고 있겠지. 이에레미아스의 호소가 동족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파라오가 파견한 어떤 용병 부대가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니카가 그들을 충동질했다는 말이오?" 필록세노스가 물었다.
"그녀는 헤브라이인의 왕에게 바빌로니아에 맞서 싸워주겠다고 서약했다. 하지만 그 왕이 의지하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니카의 서약 또한 무의미했다. 왕궁이 불탈 때, 그녀와 그녀의 군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약속을 어기고 다니는 자가 어떻게 용병으로서 고용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소?"
"내 말을 듣지 않았나? 그녀의 말과 행동을 기억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어린 신부는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증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니카에게는 언어의 권능이 있다. 실상이 어떠하든 간에 그녀의 말은 듣는 사람의 귀에 참으로 진실되고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그녀 자신 또한 마술과 속임수로 변장해 마치 여신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
게다가 니카의 군대는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 영과 육의 거리가 좀 더 가까운 다른 세계에서는 너희가 상상도 못할 사기극을 벌인 적도 있지. 나는 니카를 신들이 보낸 구원자로 기억하는 한 야만 부락에 가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니카가 자신들을 위해서 침략자들과 끝까지 싸워주었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 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전쟁터에 찾아갔을 때 나는 그 어떤 전투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기만자가 무엇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거요?" 필록세노스가 물었다.
"나도 확실히는 모른다." 어린 신부가 대답했다. "하지만 추측은 해볼 수 있겠지. 그녀는 자신이 억압받는 자들의 친구라 불리우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네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도시에는 자신이 폭군에게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반란을 준비하는 자들이 있지."
"니카가 청색당과 녹색당에게 접근했다는 건가요?" 민테가 말했다.
"가능성이 높다. 그들에게 무슨 대가를 받고 참전을 약속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란이 시작되면 니카와 그녀의 부하들은 마음껏 혼란에 빠진 도성을 약탈할 수 있겠지. 지금까지 내가 본 바로 이 도시는 매우 부유하다. 약탈의 기회 자체만 해도 참전의 동기로는 충분할지도 몰라."
"듣자하니 니카는 반란자들과는 별개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군. 그렇다면 그녀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오?"
"너는 아까 이 도시 전체가 어떤 신의 소유물이라고 말했었지." 어린 신부가 말했다. "그 신의 권능은 얼마나 강한가?"
"이에수스 크리스토스는 만왕의 왕이자 만유의 주이시오." 필록세노스가 자신있게 말했다. "그분을 능가할 자는 없소."
"좋아. 너의 그 호언이 사실이라면 니카가 섬기는 신도 그녀를 구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니카가 섬기는 신?" 민테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녀를 후원하는 신적인 존재가 있다는 말씀이세요?"
어린 신부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에 앞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녀는 필록세노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테살로니키의 필록세노스, 너는 오늘 여러 차례 나를 놀라게 했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는지 한 번 봐야겠군."
"말해보시오."
"니카가 섬기는 신은 너희의 언어로 다모코로스라 불린다.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버려진 성당 내부는 어두웠지만, 니카는 얼굴을 가린 검은 베일을 벗지 않았다.
그녀는 거미줄 쳐진 제단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등 뒤에서 문이 열리며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찬 바람이 들어왔지만, 니카는 가죽옷의 옷깃을 세울 뿐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니카는 여전히 제단을 바라본 채 정체불명의 방문자에게 말했다.
"그들이 무력하다는 증거가 여기에 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건물 말이야." 니카가 말했다. "이 도시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신을 얼마나 사랑하든 간에, 그들의 손으로 지어진 모든 것은 다 언젠가는 버려지고 낡아 무너질 운명이다."
"우리는 불멸의 신이 아니니까요." 남자가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너희는 마치 너희와 너희의 손으로 만든 것들이 불멸할 것처럼 굴지. 너희가 옛날에 섬기던 신들은 그런 오만Hybris을 도저히 참아줄 수 없었기에 결코 필멸의 운명을 지닌 하찮은 것들과는 상관하려 들지 않았다. 오직 신들만이 서로에게 동등하다. 다른 자들은 모두 노예일 뿐."
니카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등을 돌려 깨끗한 옷차림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네가 여기 왔다는 건, 그들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뜻이겠군."
남자는 머리에 쓰고 있던 챙이 넓은 모자를 벗었다. "저는 청색당과 녹색당의 전령입니다."
"네 정체 따위 궁금하지 않다."
"잘됐군요. 저도 이 이상을 밝힐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무슨 뜻이지?"
"당신은 우리에게 지원군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윗사람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길은 벨리사리우스가 감시하고 있고, 도시의 통신은 나르세스에 의해 검열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한 것 같은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가까운 곳에 있다면 둘 중 한 사람은 눈치를 채고 대응했을 것입니다."
"그랬겠군." 니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등을 돌려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단상 위로 오른 그녀는 제단의 뒤로 돌아가 그곳에서 전령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약속한 용병 군단은 어디 있습니까?" 전령이 물었다.
니카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전령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전령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단상 위로 올랐다.
"그래, 반란의 전령이여. 타당한 추리고, 타당한 의심이다." 니카는 전령이 제단 뒤로 돌아오자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 앞에서 그런 소리는 되도록이면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큰 전투를 앞두고 너희의 가장 소중한 동맹자를 의심하는 것은 모욕적일 뿐 아니라 비효율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전령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 군대가 어디 있느냐고?" 니카는 그렇게 말하며 코웃음쳤다. "황제의 장군들은 어떤 군대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 군대는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와 있으니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전령의 발밑에서 큰 진동이 느껴졌다. 전령은 기겁해서 두 발짝 물러났다. 잠시 뒤 두 사람이 서 있던 단상에 작은 틈이 생기더니, 틈이 점점 커지면서 종국에는 지하로 향하는 입구 비슷한 것이 만들어졌다.
전령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니카를 쳐다보았지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검은 너울만이 있을 뿐이었다. 니카가 손을 들어 입구를 가리키자 전령의 시야를 그녀의 흰 손이 채웠다.
"들어갈까?"
전령은 머뭇거리다가 입구를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는 위보다도 어두웠지만, 그것을 감안했는지 통로 곳곳에 밝게 타오르는 횃불들이 고정되어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계속 불을 피웠다면 내부는 사람이 숨을 쉴 수 없는 환경이어야 했지만, 니카와 전령은 여전히 숨쉬고 걸을 수 있었다.
"환기구가…… 있는 모양이군요." 전령은 그렇게 말하며 니카를 돌아보았다가 흠칫 놀랐다. 니카는 지하에 내려온 뒤 베일을 벗어 손에 쥐고 있었다. 전령은 얼떨결에 니카와 눈을 마주쳤고, 그 순간 거기에 온 정신이 매몰되는 경험을 했다. 니카의 얼굴은 대리석처럼 희었고, 그녀의 두 눈은 흑진주처럼 검었다. 그 강렬한 색감의 대비로부터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의지가 필요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군." 니카가 말했다.
"왜 갑자기 베일을 벗으신 겁니까?" 전령이 투덜거렸다.
"내 병사들 앞에서는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
병사들이라고? 전령은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고, 두 사람이 서 있는 지하 공간이 소름끼칠 정도로 광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안은 비어있지 않았다. 곳곳에 모닥불이 지펴져 있었고, 그 불빛이 비추는 것은 다름아닌 망자들의 재가 담긴 유골함과 묘비들이었다.
네크로폴리스, 죽은 자들의 도시. 고대인들은 공동묘지를 그렇게 불렀다. 전령의 눈에 보이는 이것은 그야말로 지하에 조성된 하나의 네크로폴리스였다. 그리고 그 묘비들, 죽은 자들의 창백한 기념비 옆에서 니카의 병사들이 주둔해 있었다. 어림잡아 수천 명은 될 듯한 그녀의 부하들은 뼛가루를 담은 석관들 사이에서 불을 피우고, 병기를 가져다놓고, 그 으스스한 분위기에 개의치 않은 채 먹고 자면서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전령은 물론 마술사였고, 반란에 가담한 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눈 앞의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 공포와 경외감이 담긴 눈으로 니카를 바라보았다. 니카는 여전히 베일을 손에 든 채로 병사들 사이를 걸어 지나갔다. 전령은 니카를 따라가면서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던 병사들이 그녀를 보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나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전례없이 비현실적이었지만, 전령의 정신 속에서 이미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마침내 니카와 전령은 이 기괴한 숙영지의 중심부로 보이는 한 구조물에 다다랐다. 용도가 불확실한 돌벽들 사이에는 침상과 탁자가 놓여 있고, 안의 모습을 가릴 수 있도록 벽 위에는 두터운 장막이 달려 있었다. 니카는 그 안으로 들어가 침상 위에 걸터앉았다.
"자, 보다시피 나는 약속을 지켰다." 니카가 말했다. "너는 네 주인들에게 네가 본 것을 사실대로 전해라."
"왜?" 전령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라니?" 니카가 재미있는 말을 한다는 듯이 반문했다.
"당신은…… 역사에 유래가 없는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로마 황제의 감시망을 피해 이 도시에 군단 전체를 잠입시킬 수 있고, 그들이 발각되지 않도록 지하에 만들어진 공동묘지 안에 병사들을 숙영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아래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장군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까? 어떤 병사들이…… 그런 명령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 있단 말입니까?"
니카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전령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불가능한 명령을 수행할 수 있으니, 세상에 비할 바 없는 정예군입니다. 불가능한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따랐으니, 비이성적일 정도로 충성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왜? 왜 그런 군대를 부릴 수 있으면서 황제가 아니라 반란자들을 돕는 겁니까? 황제가 당신의 군단을 보았다면 황가의 금고를 모조리 비워서라도 그들을 사려고 했을 겁니다."
니카는 고개를 돌려 반대편 벽을 바라보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도모코로의 여주인이다." 니카가 침묵을 깼지만, 그녀는 여전히 전령이 아닌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모코로는 나의 집이고, 내 병사들의 고향이다. 지금은 비록 여러 세계를 떠돌고 있지만, 그곳에서 나는 신과 같은 권력을 누렸다."
니카는 그녀의 흰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마치 병사들이 자신의 검을 불빛에 비춰보듯이 왼손을 불에 쬐며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어느날 도모코로에 방문자가 찾아왔다. 그 여자는 다른 손님들과는 달랐지. 당당했고, 강했다. 그녀를 처음 본 그 순간, 나는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녀가 나를 이겼다." 마치 소리 죽여 웃는 것처럼, 니카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녀는 내게서 원하는 것을 얻은 뒤 도모코로를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눈 앞에서 그녀를 영영 잃고 말았지."
니카는 추억을 되새기려는 듯이 시선을 천장으로 옮겼다. 잠시 후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어젯밤, 이 도시의 항만에 배 한 척이 입항했다. 선원도 노잡이도 없는 그 배에는 단 한 명, 한 여자만이 타고 있었지. 그 여자의 이름을 아나?"
"……모릅니다."
"도모코로는 빼앗는 땅이라는 뜻이다. 빼앗는 땅의 여주인은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없다. 오직 다시 빼앗을 뿐." 니카는 그렇게 말한 뒤 아직 손에 들고 있던 베일을 다시 머리에 썼다. "아니, 나는 황제를 도울 수 없다. 황제를 권좌에서 몰아내야만 그 여자를 빼앗을 수 있다."
니카는 몸을 돌려 다시 전령을 마주보았지만, 그녀의 흰 얼굴과 검은 눈은 다시 베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황제를 끌어내리는 것이…… 그 여자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겁니까?" 전령은 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물었다.
"나는 이미 네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니카가 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네 주인들에게 돌아가라. 도모코로의 군단은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들에게 가서 내가 작전을 논의하길 원한다고 말해라."
"그 녀석들의 작전, 다른 건 다 이해가 돼도 이건 이해 못하겠어요." 민테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덜덜 떨면서 말했다. "반란을 왜 굳이 겨울에 결행하는 걸까요? 봄이나 여름에 해도 되잖아요."
어린 신부는 망토 속으로 들어가다시피 하고 있는 민테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응접실에서의 작은 회담이 있고 다음 날, 필록세노스는 다가올 전투를 위해 은비부대를 소집시키러 떠났다. 민테는 본부 내에 있는 그녀의 전용 '무기고'에서 눈을 붙이고 일어나 아침 일찍 항만에서 돌아온 어린 신부를 맞이했다. 그녀는 민테가 입은 옷을 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민테가 참을성 있게 계획을 설명하자 한숨을 내쉰 뒤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잠시 후, 딱히 계절에 어울린다고는 말할 수 없는 특별한 옷으로 몸을 감싼 두 사람은 그들이 찾을 수 있었던 가장 두꺼운 망토를 두르고 대로로 나왔다. 키가 늘씬한 어린 신부에게 망토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적당한 크기였지만, 민테가 걸친 망토는 바닥에 질질 끌리다시피 해서 옷이라기보다는 거대한 털가죽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바람은 그 두꺼운 망토의 틈을 찾아 민테의 무방비한 몸 속으로 파고들어 그녀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아까 입고 있던 옷이 훨씬 나았을 텐데." 어린 신부가 말했다. 정작 그녀도 민테와 비슷한 옷차림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평온했다.
"그렇고 말고요." 민테가 간신히 대답했다. "하지만 남자들을 속이려면 가끔 희생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어요. 어린 신부님 당신에게는 조금 미안하네요. 그 옷이랑 망토 좋아보였는데."
"잃어버린 것도 아니니 상관 없다. 그리고 나는 추위를 타지 않아." 어린 신부는 그렇게 대답한 뒤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괜찮나?"
"무슨 질문이 그래요?" 민테가 딱딱거렸다. "제가 어딜 봐서 괜찮아 보여요?"
"아니, 그거 말고."
"그거 아니면 무슨…… 아." 민테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빙긋 웃었다. "어린 신부님, 혹시 제가 '이런 옷'을 입고 '그런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은 게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아무 의심도 들지 않는다고는 못하겠군. 너의 상관은…… 남자다. 그들의 본성은 내게 늘 생소했어."
"꼭 남자라곤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오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어린 신부는 민테의 눈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민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테는 입을 벌렸다. "와. 그것 참…… 그러면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는 엄청 당황스러웠겠네요? 다리 사이에 꽃 대신 길쭉한 열매가 달린 동물이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광경을 난생처음 보는 거였잖아요."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만."
"그리고 그 동물들 중에 적어도 하나는 당신 꽃에 자기 열매를 집어넣으려고 했겠지요. 아니, 잠깐, 이 비유는 전혀 말이 안 되잖아."
"목소리를 좀 낮춰주면 안 될까. 행인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아."
어린 신부가 쩔쩔매는 것을 본 민테는 유쾌한 기분을 느꼈다.
"당신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네요. 늙은 남자의 비서 일을 하는 젊은 처녀를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제대로 헛다리 짚은 거에요. 필록세노스는 저한테 '봉사'는 커녕 서류작업도 시키지 않아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것 같은 장난도 오히려 말리려고 드는 쪽이고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사실 저뿐 아니라 다른 여자들한테도 전혀 관심이 없길래, 처음에는 그 사람이 환관인 줄 알았어요." 민테는 키득거렸다. 그녀는 추위를 거의 잊은 상태였다. "황제랑 가까운 사람들은 종종 그렇잖아요?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분께는 실례지만, 나르세스 장군님도 오래 전에 물건을 떼어내셨다고 들었어요."
"그, 그랬나?"
"알고 보니 필록세노스는 한 달에 열 통 씩 편지를 써서 테살로니키에 있는 자기 아내한테 부치는 그런 사람이더라고요. 오늘날의 비잔티온에서는 희귀종에 가까운 인간이랄까. 틈만 나면 자기 로켓에 담긴 처자식들 그림을 보여주면서 임무가 끝나면 테살로니키에 가서 가족들이랑 재회할 계획이네 어쩌네, 귀가 닳을 지경이에요. 하루는 갑자기 본부에 조각가를 부르더니……"
"알았어, 알았어. 그만." 어린 신부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수행할 임무가 있으니 집중하라고."
두 사람은 대로변에 난 한 작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린 신부님, 그런데-"
"아, 제발!" 어린 신부가 약간 짜증을 내며 말했다. "이번엔 또 뭐야?"
"아니, 시덥잖은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민테가 다급하게 말했다. "궁금한 게 있어서요. 이번 일에 관해서."
어린 신부는 고개를 젓고는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도모코로의 여주인. 그 니카라는 사람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면서요? 필록세노스도 다모코로스에 대한 기록을 고대 문헌이 담긴 상자들을 뒤져가면서 간신히 찾은 걸 보면 엄청나게 오래된 신인 모양이죠? 그런데 왜 그녀는 다모코로스를 그런 이상한 발음으로 부르는 거에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언어가 달라졌다던가?"
"비슷하다. 실은 그것보다는 좀 복잡하다만…… 설명하자면 긴 이야기다."
"길면 좋죠, 뭐. 목적지까지는 아직 더 걸어야 하거든요."
어린 신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눈을 찡그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모코로스에 얽힌 이야기를 민테에게 들려주었다.
"다모코로스는 이계에서 기원한 신의 이름이다. 너희 세계에 세워진, 그를 숭배하는 왕국의 이름이기도 했고. 지금으로부터 천칠백 년 쯤 전에, 어느 고대의 강대한 왕이 다모코로스 왕국을 정복했지. 그는 자신의 노예 장군, 아우게워스를 다모코로스의 섭정으로 파견하고 자신의 식민지로 삼았다.
아우게워스의 주인은 잔혹한 성정을 가졌지만, 아우게워스는 그조차도 능가하는 악한이었다. 어느날 그는 갑작스레 그의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파기하고 스스로를 다모코로스의 주인으로 선포했다. 격노한 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다모코로스를 정벌하러 나섰지만, 아우게워스는 힘과 지략에서 그의 왕을 능가했기에 정벌군은 패배했다. 왕은 간신히 도망쳤지만, 포위된 그의 병사들은 모두 다모코로스에 항복했다.
그러나 불안한 왕좌에 앉은 왕이 두려워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모코로스는 그의 왕국을 침공하지 않았고, 대신 아우게워스와 그의 모든 병사들과 함께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
"사라져요?"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아우게워스는 다모코로스의 존재를 깨닫고 자신과 자신의 병사들을 모조리 그에게 바친 것 같다. 그 대가로 다모코로스는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권능을 아우게워스에게 주었다. 아우게워스는 스스로를 다모코로스, 도모코로의 군주로 자칭하며 수많은 세계에서 악몽과 같은 재앙을 불러오는 자로서 군림했다."
"다모코로스가 도모코로로 변한 이유는요?"
"고대인들은 너희가 지금 사용하는 문자의 조상격인 체계를 사용했다. 고대의 문자 체계에는 모음을 나타내는 부호가 없었고, 하나의 부호가 자음과 모음을 합친 하나의 발음을 나타냈지. '다모코로스'를 그 체계에 맞춰 표기하면 네 글자짜리 단어가 되고, 각 글자를 그대로 소리 내어 읽으면 '다-모-코-로'가 된다."
"어, 그러면 '도모코로'는 아우게워스가 문자를 엉터리로 읽은 결과라는 건가요?"
"나는 그것이 자신들의 언어를 이 세계의 것과 단절시키려는 의도적인 수정이었다고 본다. 그들은 그 네 글자를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뜻과 새로운 권능을 담은 도모코로의 언어를 재창조했지. 이전에 그들의 말을 가까이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추천하고픈 경험은 아니야."
"좋아요. 그럼 아우게워스는 어디 가고 니카가 도모코로의 여주인이 되어 있는 거죠?"
"그건 우리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당신들의 역사? 자줏빛 여왕 말씀이세요?"
"그래. 지금으로부터 천삼백 년 전에 아우게워스는 군대를 이끌고 자줏빛 여왕의 영역에 침공했다. 여왕께서는 반격하셨고, 큰 승리를 거두셨지. 도모코로의 군대는 패퇴했고 아우게워스는 큰 상처를 입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도모코로의 왕좌는 오직 경쟁자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과 권위로만 지킬 수 있다. 도망쳐온 아우게워스에게는 그 중 어느 것도 없었고."
"흠, 니카는 이미 반란을 성공시킨 경험이 있군요."
"나라면 그렇게 부르지는 않겠어. 그 날 도모코로에서 지위에 변동이 있었던 것은 두 사람 뿐이다. 니카는 도모코로의 여주인이 되었고, 아우게워스는 무참히 유린당한 시신이 되었다. 노예들은 여전히 노예였지."
"아무튼, 중요한 건 니카는 천 살 먹은 용병대장이자 한 왕국의 군주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통치자란 거잖아요?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한 줌도 안 되는 마술사들을 데리고 그녀를 붙잡겠다고 하는 거고?"
"안심해. 다른 건 몰라도 니카는 아우게워스만큼의 능력자가 아니다."
"확실해요?"
"그녀에게 능력이 있었다면 수백 년 동안 떠돌이 용병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겠지. 게다가, 나는 니카와 일대일로 맞붙은 적이 있다. 내가 그녀의 왼손을 불태우는 것으로 끝났고."
민테는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니카를 이전처럼 흠씬 두들겨패줄 수 있으시다는 거죠?"
어린 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테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지만, 어린 신부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표정은 어째서인지 어두워보였다. 마치 마음 속의 무언가가 그녀를 아프게 하는 것 같았다.
"어린 신부님?"
신부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래, 이전처럼."
"좋아요! 그러면 문제 없네요." 민테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아까 이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아무래도 여기에 계시는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댈 이름을 하나 만들어 두는 게 낫겠어요."
"이름?" 신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자줏빛 여왕의 신부 말고 다른 호칭을 원하지 않는다만."
"물론 그렇지만 길 가는 어중이 떠중이들한테까지 자기를 그렇게 불러달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안 그래도 눈에 띄는 분이신데 그런 특이한 호칭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에 퍼지도록 내버려두실 생각이세요?"
"알겠어. 그러면 무슨 이름을 댈 건데?"
"어디 보자…… 우리는 승리Nika를 붙잡아야 하는 거죠? 그러면 어린 신부님 당신께서 승리를 손에 넣는 자Berenike가 되시겠네요. 이걸로 해요!"
"베레니케?"
"어때요? 그럴듯하지 않아요?" 민테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허." 어린 신부는 그렇게 뜻모를 말로 대답하고는 잠시 아무 말도 않고 걷기만 했다.
초조해진 민테가 다시 베레니케라는 이름의 우수성을 설명하려던 찰나, 어린 신부가 다시 말했다.
"내가 보나 데아 교단을 갓 창설한 초기에, 그 이름을 가진 신도가 한 명 있었다. 아시아에서 온 여자였지. 너처럼 재기발랄하고 낙천적이었다. 그 아이 생각이 나는군."
"추억이 담긴 이름이라 안 된다, 그런 뜻인가요?"
"수백 년 묵은 이름이라 별로다."
민테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를 들은 어린 신부도 미소를 지었다.
"이제보니 농담도 제법이시네요." 민테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뭐, 정 마음에 안 들면 기억에 있는 적당한 이름 하나 대시면 되죠. 하지만 빨리 결정을 내려주셔야겠어요."
"왜?"
"목적지에 도착했거든요."
어린 신부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목적지를 바라보았다. 시내의 복잡한 골목 사이에 위치한 한 다층주택 앞에는 아침부터 바쁜 시민들이 분주히 어디론가 오가고 있었다.
"여기가 그 공동주택인가?" 어린 신부가 말했다.
"우리 정보가 맞다면 이 건물은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녹색당의 강성 지지자들로 채워져 있어요." 민테는 그렇게 말한 뒤 망토를 추슬렀다. "가요. 우리가 찾는 사람은 3층에 있을 거에요."
두 사람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 아침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주랑을 따라 걸었다. 윗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네 명의 청년들이 하릴없이 노닥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 민테는 그들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청년들 중 한 사람이 민테를 보고 인상을 쓴 채 일어났다. 그의 친구들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청년이 윽박질렀다.
민테는 대답하는 대신에 망토의 목 부분에 달린 조임쇠를 풀었다. 두꺼운 망토가 민테의 어깨를 따라 스르르 내려가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뭔가 험악한 말을 덧붙이려던 청년은 햇빛 아래 드러난 민테의 모습을 보고 그만 굳어버렸다. 님프들이 미소년을 유혹할 때 입었을 법한 아름다운 연두빛 드레스가 민테의 윤곽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어린 신부 역시, 청년들의 멍한 표정을 보고 속으로 이마를 짚으며, 망토의 조임쇠를 풀었다. 그녀의 망토가 벗겨지며 그 아래 잠들어 있던 고혹적인 빛깔의 검은 드레스 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3층의 거주자를 위해 망을 보고 있던 것이 분명한 이 청년들은 님프 같은 자태의 두 여자가 이곳을 방문할 것이라는 예고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바로 직전에 자기들끼리 나누던 얘기의 주제도 희미해지는 중이었다. 속이 비칠 듯 안 비칠 듯, 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아슬아슬한 두께의 드레스를 입은 두 여자의 모습이 청년들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이곳의 관리인이신가요?" 민테가 공손하게 말했다. "테오도로스 의원님께서 저희를 부르셨어요. 제 이름은 니사라고 하고, 이쪽은……"
"베레니케." 어린 신부가 말했다.
"……베레니케에요." 민테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희를 들여보내 주시겠어요?"
제일 먼저 일어선 청년이 그들 중 조장인 듯 했다. 그는 정지 직전인 두뇌를 재빨리 굴려보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테오도로스가 그녀들을 부른 것이라고 했으니 들여보내도 문제 없을 것 같았다.
청년은 한 발짝 물러나 계단을 손으로 가리켰다. 스스로를 니사라고 소개한 여자가 우아한 몸짓으로 인사하더니 연두빛 드레스를 살랑이며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곧이어 베레니케라고 불린 여자가 망토 두 벌을 집어들더니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청년에게 건넸다. 그 끝내주게 투박하고 무거운 망토를 청년들은 마치 동방의 비단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개어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2층에는 1층 주랑보다도 서성이는 남자들이 많았지만, 파수를 1층에 세워두었으니 그 윗층부터는 마음 놓아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니사'와 '베레니케'는 2층에서 이렇다 할 제지를 받지 않았다.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 아니 두 몸에 받으며 두 사람은 반대편에 놓인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테오도로스라는 사람은 이 다층주택의 3층 전체를 자신의 집으로 쓰고 있는 것 같았다. 2층과 마찬가지로 심각하게 결여된 보안의식을 여실히 드러내듯 그의 집으로 향하는 출입구에는 잠금 장치도, 문지기도 없었다. 민테는 베레니케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문을 밀어서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호화로운 거실 안에는 테오도로스와 대여섯 명 되는 그의 경호원들이 있었다. 이 경호원들은 1층의 얼뜨기 청년들보다는 훨씬 노련한 사람들이라, 민테와 베레니케의 모습을 보고 순간 감탄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의자에 앉아서 무언가를 읽고 있던 테오도로스의 눈이 커졌다.
"무슨 일로 왔나?" 테오도로스가 말했다.
"저 자인가?" 베레니케가 민테에게 물었다.
"네, 맞아요. 일 시작하시면 되겠네요." 민테가 대답했다.
베레니케는 민테의 대답을 듣고 테오도로스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경호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중 한 사람이 베레니케의 앞을 가로막자, 베레니케는 오른발을 내딛은 상태에서 체중을 실어 왼주먹을 경호원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적중시켰다. 경호원이 맥없이 바닥에 엎어지자 테오도로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나고, 다른 경호원들이 베레니케에게 달려들었다. 베레니케가 그녀의 아름다운 검은빛 드레스를 휘날리며 경호원들의 뼈를 부러뜨리고 혈관을 파열시키는 동안, 민테는 소란을 뒤로 하고 물동이를 하나 찾아 거기 담긴 물을 자신의 머리와 목 아래에 세심하게 뿌렸다.
잠시 뒤 3층에서 나는 쿵쿵거리는 소리를 듣고 녹색당의 난폭한 지지자들이 손에 각종 연장을 쥔 채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이 다급하게 테오도로스의 집 대문을 두드리자, 대문이 살짝 열리며 그 사이로 땀에 젖은 듯한 갈색 머리의 여자가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지지자들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당황한 것 만큼이나 여자도 그들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 것 같았다. 사내들 중 눈치가 빠른 자들은 머리와 목, 그리고 옷에 땀이 흥건한 여자의 모습과 그녀의 가쁜 숨소리,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무언가 격렬한 운동을 하는 것 같은 소음을 듣고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아……" 갈색 머리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소리가…… 너무 큰가요? 죄, 죄송합니다……"
그 순간 집 안에서 어떤 남자의 신음 섞인 비명이 들려왔다.
갈색 머리의 여자는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져서는 그대로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지지자들은 맥이 빠져 투덜거리고 욕설 몇 마디를 던지면서 흩어졌다.
민테는 다시 슬쩍 머리를 내밀어 바깥 상황을 확인한 뒤, 대문을 닫고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됐어요. 우리가 일 끝마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에요. 정리 됐어요?"
베레니케는 마지막 경호원의 부러진 코뼈를 친절하게 다시 맞춰 준 다음 혼절해버린 동료들 옆에 가지런히 눕혔다. 그녀는 민테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됐어."
민테는 다소곳하게 누운 경호원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들을 넘어가, 벽에 붙다시피 한 채로 주저앉은 테오도로스에게 다가갔다. 테오도로스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거실의 이곳저곳을 쳐다보다가, 민테가 손을 뻗자 그 손을 쳐내고는 화살처럼 뛰쳐나갔다.
그가 진짜 화살이었다면 도망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사람이었던 탓에 다리가 달려 있었다. 민테는 여유롭게 다리를 걸어 테오도로스를 거실 바닥에 죽은 개구리마냥 엎어버렸다.
"테오도로스 의원님, 안녕하세요?" 베레니케가 테오도로스를 뒤집어 천장을 보게 만들자, 민테는 그의 가슴팍을 양 무릎으로 누른 채로 말했다. "저는 민테라고 해요. 이쪽은 제 친구인 베레니케고요. 어느날 아침에 작은 새가 찾아와서 의원님이 니카라는 이름의 친구를 사귀셨다고 말해주고 갔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를 위해 한 가지 심부름을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집어치워!" 테오도로스가 쥐어짜내듯 말했다. "나는 내 동지들을 배신할 수 없다!"
"이렇게 부탁해도 안 될까요?"
"황제는 지옥에나 떨어져라!"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민테는 그렇게 말하고는 허리춤에서 무언가가 든 가죽 부대의 마개를 열었다. 부대를 거꾸로 들자, 안에 담긴 검붉은 액체가 쏟아져 나와 테오도로스의 얼굴을 적셨다. 테오도로스는 놀란 나머지 숨을 들이쉬어버렸고, 결과적으로 액체를 코로 들이키고 말았다.
"겁 먹지 말아요. 그냥 포도주에요." 테오도로스가 고통스럽게 기침하는 동안, 민테는 그렇게 말하며 가죽 부대의 마개를 다시 닫았다.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민테는 테오도로스와 이마를 맞대기 직전까지 고개를 숙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원님, 저희는 반란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게 아니에요. 저희 목표는 어디까지나 다른 데 있어요. 저희 요구를 들어주신다고 해도 결행 전에 당신이나 당신 친구들이 체포돼서 고문당하거나 영영 투옥되는 일은 없을 거에요. 하지만 그건 원래도 걱정거리가 아니었겠죠?
천만에, 그런 것보다는 당신 집에 작년 12월 한 달 동안 들락날락했던 창녀의 수라던가, 당신이 포도주에 쩔어서 남의 집 부인들한테 집적거린 횟수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게 진짜 걱정거리죠. 당신이 반란에 가담한 것도 그것 때문이죠? 반란자들 중에 그 숫자를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래도 한 번 반란에 동참한 뒤에는 마음을 다잡고 여자도 안 부르고, 술도 입에 안 대고, 원로원 의원이라는 지위에 재력도 겸비해서 반란의 핵심 인사로 올라섰으니 참 잘 된 일이죠.
그런데 이를 어쩌나, 오늘 이 건물의 1, 2층에 있던 모든 남자들이 유혹적인 옷을 입은 두 미녀가 당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봐 버렸네요? 이 소식이 동료들한테 전해지면 큰 맘 먹은 게 다 무용지물이겠죠?"
"이 빌어먹을-" 테오도로스는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민테는 그가 제대로 무슨 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의 입을 붙잡고 포도주 부대를 그 안에 처박아버렸다.
"맞다. 이거 사실 그냥 포도주 아니에요. 여기 담긴 액체의 정체는, 마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디오니소스 신의 축복을 받아 고통과 시름과 이성과…… 사실 문명인의 모든 필수 덕목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적포도주에요. 그러니 잘 선택하세요. 저희 요구사항을 들어주시면 저희가 이곳을 떠난 뒤에 사람들에게 상황을 잘 설명해서 후폭풍을 무마할 수 있고요, 거절하시면 저는 이 포도주 부대 마개를 열고 내용물을 당신 목구멍에 부어버릴 거에요. 그러면 당신은 최소 이틀 밤낮을 개와 돼지가 합쳐진 어떤 신화적인 생명체가 된 상태로 살아야 해요."
포도주 부대로 막힌 테오도로스의 입 속에서 무언가 읍읍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답이 예면 눈 한 번 깜빡여주시고, 아니오면 두 번 깜빡여주세요. 저희 요구사항을 들어주시겠어요?"
테오도로스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니카를 불러내세요. 당신들이 평소에 사용하는 장소에서 만나자고 해도 괜찮아요. 조용히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죠?"
테오도로스는 다시 눈을 한 번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