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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The Lambton Ghoul
원작: https://scp-wiki.wikidot.com/the-lambton-ghoul
저자:Tsercele
역자:Salamander724

1890년 촬영된 볼드윈네 과수원. 가장 오른쪽 인물이 버논 프로스트.
버논 프로스트(Vernon Frost, 생년 미상 — 1891년 11월 13일)는 캐나다의 물납소작농, 살인범, 그리고 혹자[누구?]에 따르면 “램턴의 식시귀(Lambton Ghoul)”라고 알려진 초상존재였다.
배경
버논 프로스트가 1858년에 온타리오주 램턴군의 한 사과 과수원에 고용되기 전까지의 그의 삶은 거의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지주가 작성한 사업 장부에 따르면, 프로스트는 “30대 정도이고, 황달 걸린 눈과 비뚤어진 턱”을 가졌으며, “문맹이고 요령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지런한 피용자로서 군소리 없이 땅을 관리했다. 1860년 어느 날 프로스트는 낙하하는 나뭇가지에 머리를 맞았다. 가시적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프로스트는 치료를 받기보다 일을 계속하겠다고 우길 정도였다. 결국 이런 노력은 재지 과수원지기 자리를 얻는 것으로 보상을 받았다.[1]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로스트는 지역 일대에 괴벽스러운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는 과수원에 무단침입하는 사람들, 특히 어린 소년들을 공격했다. 그는 그들을 “해충(pest)”이라고 부르며 신체적 체벌로 위협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한 질문을 받자 프로스트는 “서른 살 미만은 태어나선 안 된다. 어린애를 반나절 곁에 두느니 차라리 평생 대상포진을 앓겠다”고 말했다고 한다.[2] 이러한 태도는 다른 농부들의 조롱, 그리고 지역 청소년들과의 적대적 관계로 이어졌다. 아이들은 과수원지기 숙소 창문에 낙서를 하고, 프로스트의 집 안에 스컹크를 풀어놓고, 침대에 거북이 알을 채워놓았다. 이런 장난을 할 때마다 프로스트는 벌컥 화를 냈고 부모들에게 호소하였으나 장난꾼들은 벌을 받지 않았다.[출처 필요]
1891년 가을, 사건이 벌어졌다. 세 명의 어린이가 야음을 틈타 과수원에 숨어들어와 과수원지기 숙소의 문과 창문에 못을 박고, 굴뚝에 밀 한 포대를 떨어뜨려 연통을 막았다. 범행 당사자였던 조이스 할(Joyce Hall)의 증언은 이러했다.
“타일러가 지붕에서 내려오자 로널드가 콩 지줏대에 잭오랜턴을 걸어서 들어올렸어요. 로널드가 그걸 창 밖에서 흔들었고, 우리 모두 마치 악마가 들린 것처럼 소리치고 비명을 질렀어요.
버논 영감이 놀라서 침대에서 굴러떨어졌어요. ‘불이야! 불이야!’ 소리치면서 문을 두드리며 부수고 나오려 했어요. 죽여버리겠다느니 소리를 지르다가 갑자기 조용해졌어요. 우리가 못을 너무 꽉 박아서 안에 갇혔다는 걸 알고 제가 나서서 못을 뽑았어요. 문이 열리자 연기가 자욱했어요. 목이 아프고 앞이 안 보였어요. 그러더니 영감이 뛰쳐나왔어요! 눈이 노랗고 붉었고, 들고양이처럼 비명을 질렀어요.
저는 얼굴을 가리고 살려달라고 울었지만 남자애들은 도망가 버렸어요. 버논 영감이 날 죽이겠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여자애인 걸 알더니 갑자기 정신을 차렸어요. 그러면서 목쉰 소리로, ‘사내애들도 좀 계집애들처럼 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조심해라, 안 그러면 너도 저 놈들처럼 된다’고 그랬어요.”[2]
살인사건
1891년 10월 20일 이른 아침, 인부들이 헛간 아래 지하실 냉동고에서 14세의 로널드 트리프(Ronald Tripp)의 시신을 발견했다. 사다리가 넘어져 있었고 소년의 팔이 부러진 것은 마치 추락사고 같았지만, 목이 으스러져 있었기에 타살이 시사되었다.[3]
과수원지기가 바로 용의선상에 올랐으나, 버논 프로스트는 군경찰의 모든 추궁을 부인했다. 그는 저녁에 혼자 있긴 했지만 평소와 다른 일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프로스트는 과거에 사법기관과 얽혔을 때 히스테릭했던 것과 달리 침착하고 차분해 보였다.
단서가 없자 관할서에서는 범죄수사과(Criminal Investigative Division)의 로버트 아이브스(Robert Ives) 경감을 소환했다.[4] 아이브스 경감은 피해자의 가족과 친구들을 면담하고, 트리프와 과수원지기 사이의 악연을 알게 되었다. 이후 다른 소작농들과 대화하여 프로스트의 성격을 확인했다. 현장을 살펴 보니 소년이 높은 높이에서 떨어졌음에도 지하실이 깔끔했고 사다리 외에는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단서에 바탕하여 아이브스 경감은 과수원지기를 재방문하였고, 이번에는 자백을 받아냈다. 버논 프로스트는 램턴군 법원과 구치소로 연행되었고, 증언석에서 다음과 같이 신문을 받았다.
버논 프로스트는 고목의 나무뿌리처럼 쭈글쭈글하고 혹투성이인 끔찍한 추물이었다. 두 눈은 항상 충혈되어 있었고 피부는 잿빛으로 창백했다. 말할 때는 쉰목소리가 거슬렸고, 마치 숨쉬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처럼 심하게 몸을 떨어댔다.
그는 10월 19일 밤의 일을 이렇게 증언했다. 지하실에서 늦게까지 작업하던 도중, 위층에서 부셸되 한 개가 뒤집혀서 사과들이 지하실로 굴러떨어졌다. 버논은 난장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리를 끝냈더니, 부셸되 한 개가 더 뒤집혔고 뒤이어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린 로널드 트리프가 난간 너머로 내려다보며 깔깔대고 프로스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격노한 과수원지기는 사다리를 가져와 사다리 끝으로 소년을 때렸다.
“그 해충을 죽이려던 건 아닙니다. 그저 한 대 쥐어박으려고 했는데 잘못 때렸고 애가 다쳤습니다.”
검사가 물었다. “피고인은 트리프 군을 구하려 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습니까?”
“안 했습니다. 그 애는 그저 목이 부러진 커다란 시궁쥐나 다름없었고, 그뿐이므로 저는 일을 끝내고 자러 갔습니다.”
방청석에서 분노의 웅성거림이 일었다. 판사가 정숙을 주문하고, 피고의 변호인이 신문할 차례가 되었다. “프로스트 씨. 당신도 한때 어린 소년이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요!” 버논이 으르렁댔다. 쉰목소리가 거칠어졌고, 그는 광란하듯 증언석을 두드려댔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스물다섯 살로 태어났기에 그런 시절은 금방 극복하였소!”
변호인은 피고인이 미쳤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상한 기벽과 급한 성격은 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배심원단은 버논 프로스트에게 모살죄 유죄 판결을 내렸지만, 판사는 그에게 토론토의 정신병자 수용소에 10년 이상 갇혀 있을 것을 선고했다. 판결을 들은 프로스트는 “거기에는 사내애들이 없으면 좋겠군. 그렇지 않다면 탈출할 수밖에 없을 테요”라고 말했다.[2]
처형
이 소식이 언론을 타자 대중은 양형에 대하여 분노했다. 트리프의 부모는 프로스트가 악의적으로 행위하였으며 보다 가혹한 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법원의 관대함을 불평했다. 볼드윈네 과수원의 다른 소작농들은 살인범과 함께 일했다는 경멸로부터 벗어나고자 프로스트가 알콜중독자, 요술쟁이, 천주교도 등등이라는 소문을 적극적으로 퍼뜨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문들 가운데 현재까지 어느 것도 확증된 것은 없다.
11월 13일 금요일 저녁, 한 무리의 사적제재범들이 구치소의 유일한 경비를 제압하고 버논 프로스트를 감방에서 꺼냈다. 그들은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응징을 약속하면서 프로스트를 조리돌림하고, 결국 그를 볼드윈네 과수원까지 끌고 가서 사과나무에 매달았다. 프로스트는 목이 매달리면서 목이 탈골되었으나 즉사하지 않았다. 30분간 프로스트가 몸부림친 끝에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밧줄이 느슨해지자 프로스트는 경련하면서 침을 튀겨댔다. 군중은 프로스트에게 투석하고, 여전히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얕은 도랑으로 끌고 가서 거기 암매장했다.
다음날 월요일, 조이스 할이 동네를 뛰어다니며 살인이야 외치고 다녔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그녀는 어두워진 뒤 타일러 오트웨이(Tyler Ottway)와 함께 볼드윈네 과수원을 재방문했다. 친구의 죽음에 상심한 오트웨이가 프로스트의 무덤을 짓밟고 저주하며 과수원을 불태우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덤을 짓밟은 순간, “흙 속에서 손이 튀어나왔고, 전신이 부서지고 뒤틀린 버논이 땅에서 기어나왔다. 머리는 옆으로 돌아갔고, 얼굴은 호박처럼 터져 있었다. 타일러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했지만, 늙은 산송장이 손톱으로 타일러를 붙잡고 목을 졸라 생명을 앗아갔다. 그러는 동안 타일러는 짐승처럼 우짖었다. 나는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다 뭔가 짤까닥 하는 소리가 들리고 타일러가 곡성을 멈추었다. 죽은 것이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달아났다.”
과수원을 수색한 군경찰은 비어 버린 도랑과 배수로로 이어지는 질질 끌린 자국들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관할 당국은 공식 성명에서 할 소녀가 동물의 공격을 보고 “히스테리를 일으켰”으며, 두 구의 시체 모두 산사자가 물고 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5]
이후
이후 볼드윈네 과수원은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작물은 부란병에 걸려 황폐화되었고, 나무는 악천후로 고사하였으며, 인력 부족으로 사업 운영 자체가 어려워졌다. 소작농들은 어두워지면 비명소리가 들리고, 울타리 선을 따라 앞뒤로 굼실대는 기괴한 형체가 보인다고 주장했다. 젊은이들은 안전을 우려하며 그 땅에서 일하기를 거부했다. 과수원은 결국 1894년 가을 폐업하였고, 지주는 은행에 폐업 사유를 “냉해(frost) 때문”이라고 설명했다.[1]
이후 버려저서 방치된 과수원 부지에는 식물이 웃자라 흰꼬리사슴과 야생칠면조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지형이 위험하고[6] 대형 포식동물이 있다는 이유로 여기서의 수렵은 금지되었다. 1972년, 5세 소년 찰스 배로먼(Charles Barrowman)이 이 땅에 들어갔다가 광란하는 짐승에게 쫓겨났다. 과수원 부지를 수색한 군청 야생생물 전문가는 썩은 고기가 잔뜩 있는 것을 보아 이 산림에 산사자가 살고 있으리라 설명했다.[7] 그러나 여기서 산사자가 실제로 목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오늘날 이 과수원 부지 주위에는 무단침입시 불운한 사고로 사망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표지판들이 설치되어 있다.[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