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여신The Good Goddess
보나 데아Bona Dea (고대 로마)
포르피라 바실리사Πορφύρα Βασίλισσα (동로마 제국)
KTE-2451-블랙-티리언KTE-2451-Black-Tyrian (분서꾼들)
개요
in Publium Clodium Pompeiae uxoris suae adulterum atque eadem de causa pollutarum caerimoniarum reum testis citatus negauit se quicquam comperisse, quamuis et mater Aurelia et soror Iulia apud eosdem iudices omnia ex fide rettulissent; interrogatusque, cur igitur repudiasset uxorem: 'quoniam,' inquit, 'meos tam suspicione quam crimine iudico carere oportere.'
재판정에 출두한 카이사르는 그의 아내 폼페이아와 애인 사이였던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의 신성모독 사건에 대해, 그의 어머니 아우렐리아와 누이 율리아가 이미 사건의 전모를 낱낱이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의 아내와는 왜 이혼했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내 가문의 일원은 유죄 판결은 물론이고 의심조차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황제전>
외부차원의 존재들은 오래전부터 우리 세계에 다양한 이유로 관심을 가져왔다. 그렇게 우리 차원에 들어온 외부의 존재들은 옛날에는 마술에 정통한 우리 세계의 신과 영웅들에게, 지금은 재단처럼 정상성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자들에 의해 대부분 쫓겨나거나 제압되었다. 그러나 몇몇 끈기와 힘이 남다른 외부 신격체들은 종종 그들에게 적의를 품은 자들을 따돌리고, 무찌르고, 회유하는 식으로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 다루는 외부차원의 여신, 보나 데아는 끈질기게 지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세계의 신격체들까지 포함해서 가장 오래 그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녀의 역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시라고 할 수 있으며, 역사와 신화에 관심이 있는 마술사들이라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임에 분명하다.12
알려진 바
특징: 보나 데아BONA DEA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선한 여신'을 뜻하며, 이는 로마인들이 그녀의 본명을 몰랐기 때문에 임시로 붙인 이름에 가깝다. 한참 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작성된 사료 중 하나에서는 그녀를 ‘자줏빛 여왕’을 뜻하는 포르피라 바실리사Πορφύρα Βασίλισσα라는 이름으로 지칭한다. 이것이 그녀의 실제 이름 내지는 그녀가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외부차원에서 불리는 명칭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추정된다.3
아래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보나 데아 숭배는 고대 로마에서 기원했고, 기원전 1세기에 가장 성행했다가 로마가 제정으로 이행한 이후로 점점 쇠퇴했다. 보나 데아는 모든 로마인들의 신이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을 더욱 아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보나 데아를 기리는 제의는 한 해에 두 번, 각각 5월과 12월에 치러졌는데, 아벤티누스 언덕에 세워진 보나 데아 신전에서 치러지는 5월 제의에서 남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고위 공직자의 아내가 주관하는 12월 제의의 경우에는 더 심해서, 해당 제의가 열리는 장소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어떤 남성도 머무를 수 없었다. 심지어 수컷 짐승과 남성을 묘사한 예술품까지 내보내졌다.
일반적으로 로마 시대의 제의는 희생제물을 바치고 기도문을 외운 뒤 참석자들이 함께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보나 데아를 기리는 제의 역시 기본적으로는 동일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이나, 희생제 이후의 잔치에서는 퍽 독특한 순서 내지는 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나 데아의 제의에 쓰일 물품들을 지칭하는 여성들 사이에서의 은어 몇 개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데, 포도주를 '우유', 포도주를 담은 단지를 '꿀단지', 채찍을 '뱀'이라고 바꿔 부르는 식이었다.4 특히 뱀의 경우 보나 데아를 묘사한 조각상에서 거의 항상 그녀와 함께 묘사된 것을 보았을 때 보나 데아 제의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56
성질: 일반적으로 외부차원의 신격 독립체가 지구에 강림할 경우, 그(또는 그녀, 또는 다른 적절한 대명사)가 지구 강림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은 둘 중 하나이다. 해당 독립체에게 있어 중요한 아티팩트 등의 획득을 꾀하거나, 또는 (지구 기반의 신격체들과 마찬가지로) 숭배자들을 통해 아키바를 흡수함으로써 수명과 권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보나 데아는 그 둘 중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보나 데아의 숭배자들은 보나 데아의 목적이 전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수동적인 행보를 보였고, 후자라고 하기에는 자신들이 숭배하는 여신 자체에 대해서도 너무 아는 것이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나 데아는 현재에도 여전히 우리 차원에서 소멸하거나 쫓겨나지 않은 채 자신의 추종자들을 통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보나 데아의 영향력이 우리 차원에서의 인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녀는 이미 외부차원의 어딘가(높은 확률로 보나 데아의 절대적 지배하에 있는, 유의미한 수준의 지적 존재들이 밀집한 지점)에서 신격 독립체로서 영속하는 동시에 이차원의 질서에 간섭할 수 있을 만큼의 생명약동에너지를 수급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다른 차원에서 신적인 힘과 지위를 얻었다면 굳이 우리 차원에서도 신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이유는 없다. 더욱이 신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한다면 다른 신격체들과의 경쟁에 이토록 소극적으로 임하는 건 이해할 수 없는 태도이다.
한 가지 설득력 있는 가설에 따르면, 보나 데아의 목적은 우리 차원의 지적 존재들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그들이 형성한 종교 구조에 자연스럽게 편입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보나 데아가 로마 종교관 내에서 독특하고 눈에 띄는 입지를 구축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 나머지 당시 숭배자들 중 일부는 그녀를 순결과 출산을 관장하는 그리스-로마 문화권의 다른 여신들과 혼동하기까지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는 개연성이 있는 가설이다.
내력 및 관계: 보나 데아 숭배는 로마 왕국 시대에 처음 도입되었다. 로마를 통치했던 일곱 왕들 중 정확히 누구의 통치기에 숭배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나, 베스타를 섬기는 신녀들이 보나 데아를 기리는 제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베스타 신전의 건립자인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 시대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일 합리적이다. 도서관의 몇몇 학자들은 보나 데아 숭배의 시작 시기를 3대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시대로 비정하기도 하나,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누마처럼 신들의 세계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종국에는 의식을 엉터리로 진행하다가 유피테르 신의 분노를 사 사망하기까지 했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보나 데아 숭배가 정착하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은 낮다.
물론 보나 데아를 처음 기리기 시작한 왕이 누마가 맞더라도 그가 직접 외부차원에서 보나 데아를 불러들였을 리는 없다. 보나 데아 자신이 먼저 어떤 식으로든 누마와 접촉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마를 설득해 다른 토착 신들처럼 로마 시민들의 숭배를 받는 대가로 로마의 번영과 안전에 기여한다는 내용의 계약을 맺었으며, 여전히 누마를 경건한 현자로서 존경하던 로마인들이 마지막 왕을 축출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이후에도 보나 데아는 로마의 수호신으로 모셔졌다. 하지만 로마의 영적인 견고함을 위해 외부차원의 신격체를 불러들인다는 건 누마의 계획에 없었던 일이고, 로마인들의 정서에는 더더욱 맞지 않는 일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누마를 기만하고 로마의 종교 체제에 침입한 것이었기 때문에, 보나 데아는 자신의 실체가 신에게든 인간에게든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의 조치를 강구했다.
남성의 제의 참여를 금지하는 교의 또한 그러한 조치 중의 하나였다. 로마에서 깊은 종교적 지식을 접하고 교의 해석의 권위자로 불릴 수 있는 이들은 전부 남성이었다. 그들이 보나 데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신을 더 잘 알기 위해 연구하기 시작한다면, 그녀의 정체는 금방 탄로 날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보나 데아는 자신이 여성들의 순결과 출산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명목하에, 종교계의 수장부터 빈민들이 선출한 길거리 제단 관리인까지 모든 종류의 남성 종교인들을 그녀의 가장 핵심적인 제의에서 배제했다.
그녀의 조치는 성공적이었다. 누마 왕의 재위기였던 기원전 7세기부터 공화정 말기인 기원전 1세기까지, 그녀는 장장 6백년 동안 유피테르와 마르스, 베누스 같은 전통적인 로마 신들의 일원으로서 로마 시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78 그러나 견고했던 그녀의 입지는 예상치 못한 일격에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기원전 63년에 열린 최고신관 선거에서 30대 후반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다른 원숙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었다. 카이사르는 모든 분야에서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사는 사람이었고, 비록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출마한 선거이기는 했으나 로마의 영적인 질서를 수호하는 최고신관의 의무에는 그 누구보다 충실했다. 카이사르는 최고신관으로서 로마 종교 체제의 모든 분야에 공평하게 관심을 기울였고 평생에 걸쳐 그러했듯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했다.
한편 최고신관과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종교 단체는 다름 아닌 베스타 신녀단이었다. 물리적으로는 최고신관 관저와 베스타 신녀들의 거처가 사실상 같은 건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까웠고, 정신적으로 최고신관은 베스타 신녀들의 감독자 겸 보호자일 뿐 아니라 새로운 베스타 신녀를 선출하는 권한도 보유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처럼 유능한 최고신관에게 베스타 신녀들은 최고의 정보원이기도 했다. 그는 베스타 신녀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녀들로부터 보나 데아를 비롯한 비밀스러운 신들의 동향을 전달받았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카이사르가 보나 데아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을 것이다. 왕정 시대부터 로마 시민들의 고락을 함께한 여신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성모독에 가까웠기에 카이사르는 조심스럽게 조사를 시작했으나, 일단 베스타 신녀들을 통해 보나 데아의 보안을 우회하는 데 성공했기에 신임 최고신관은 채 1년도 안 되어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일단 보나 데아가 외부차원의 여신임을 확신하게 된 카이사르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로마인들은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동방의 신들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실리주의적인 민족이었지만 우리 세계 바깥에서 온 정체불명의 신격은 다른 얘기였다. 보나 데아는 축출되어야 했다.
기원전 62년 12월의 보나 데아 제의는 카이사르의 아내 폼페이아가 최고신관 관저에서 주최했다. 여신의 금기를 존중하여, 최고신관은 제의가 진행되는 동안 관저가 아닌 다른 곳에 머물렀다. 제의가 한창 진행 중이던 그때, 한 남성이 여장을 하고 최고신관 관저에 침입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신성모독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의 청년 푸블리우스로, 폼페이아가 결혼하기 전 그녀와 친밀한 사이였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의 변장은 빠르게 발각되었고, 경악과 공포로 비명을 지르는 여성들을 뒤로하고 청년은 재빠르게 현장에서 도주했다.
용의자는 명문귀족의 자제일 뿐 아니라 이듬해 재무관으로 당선되기까지 한 정치인이었으므로 그가 일으킨 신성모독 사건은 로마 시민들을 분개시키는 정도를 넘어 시민들에게 어떤 불가해한 광기를 목도한 것 같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관저에서 신성모독이 저질러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최고신관 카이사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폼페이아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열린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해서는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자신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근처에 없었으며 이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한편 재판을 진행하는 동안 카이사르의 어머니를 비롯해 제의에 참석한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증언대에 서게 되었으며, 결국 보나 데아에 관한 여러 숨겨진 지식들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대부분이 저명한 원로원 의원인 신관들의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퍼즐 조각들이 맞추어졌다. 그들은 신성한 로마에 기생하고 있던 외부 세계의 신에게 깊은 혐오감을 느꼈다. 여성들은 보나 데아가 받은 모욕에 눈물을 흘렸으나, 그녀들 역시 진실을 알게 되자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누구보다 분노한 것은 베스타 신녀들이었다.
재판은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되었고, 푸블리우스는 2년 동안 재무관으로 일하다가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호민관에 당선되었다. 본래 호민관 선거에는 평민만 출마할 수 있었으나, 푸블리우스는 평민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 명목상 평민 혈통의 신흥 귀족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Publius Clodius Pulcher가 되는 방식으로 규정을 우회했다. 경우에 따라 한없이 지지부진해질 수도 있는 과정이지만, 최고신관인 카이사르의 직권으로 모든 절차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9
물론 보나 데아는 격노했다. 사건의 배후에 카이사르가 있었음은 분명했다. 클로디우스는 사건 이전부터 카이사르와 정치적으로 가까웠으며, 나중에는 원로원을 위협할 목적으로 호민관의 직위를 악용하여 하층민들로 이루어진 정치깡패 집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그녀는 무력했다. 신성모독으로 인해 로마의 영적인 안정 자체가 큰 타격을 입었으므로 로마 종교의 수장인 카이사르는 겉으로만 봤을 때 보나 데아처럼 피해자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그는 제의가 진행되는 내내 관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사건 직후 이번 제의를 책임지고 주최한 사람, 즉 그의 아내와는 재빨리 연을 끊었기 때문에 보나 데아에게는 카이사르를 처벌할 명분이 없었다. 그에 더해 카이사르는 베누스 여신의 후손이기도 했으므로, 그를 함부로 공격했다가는 다른 신들의 분노를 살 위험까지 있었다.1011 따라서 보나 데아는 어쩔 수 없이 분을 삭이고, 한참 뒤인 기원전 52년에 로마 근교에서 클로디우스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편 서기 1세기에 레반트 지역에서 지중해 신들의 세력 구도를 완전히 뒤바꾸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결과 셈족의 유일신이 가나안 지방에서뿐 아니라 지중해 세계 전체에서 절대적인 패권을 손에 넣었고, 과거에 각 문명권에서 군림했던 신격 독립체들의 견고한 신디케이트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정세의 변화를 빠르게 눈치챈 몇몇 예민한 인간들이 나타났다. 곳곳에서 고대의 계약이 파기되고 토착 신들이 머물 곳을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다.
같은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 사후 발생한 내전을 종식하고 로마의 영적 재건자, 아우구스투스AUGUSTUS를 자처했다. 아우구스투스의 후원하에 내전기 동안 사람들의 관심 바깥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로마의 영적 세계가 다시 어느 정도 활기를 찾았다. 그러나 양부에게서 모든 사실을 전해 들었던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모든 신들에게 권위의 회복을 약속하면서도, 보나 데아는 재건된 로마의 영적 질서 내에서 철저히 배제했다. 어쨌든 로마 시민들과 오랫동안 함께했던 여신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제외하고 보나 데아에게는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미 보나 데아 숭배는 이른바 ‘클로디우스 사건’ 이후로 서서히 쇠퇴해 가고 있었다. 더 이상 여성들은 그녀를 추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나 데아가 로마에게 줄 수 있는 변변치 않은 축복마저 원하지 않았다. 결국 보나 데아는 실패를 인정하고 서기 2세기를 전후하여 로마를 떠났다. 보나 데아의 숭배자들이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보나 데아의 신전을 관리하는 소수의 사제들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들의 신앙을 받을 신이 로마에 없었으므로 단순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로마를 떠난 이후 보나 데아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어쩌면 그녀는 수백 년 전 누마에게 했던 일을 동방의 권력자들에게도 시도해 볼 만 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대 위정자들이 보인 신들에 대한 열심과 지식이 누마와 비교했을 때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지중해 동쪽 지역에서는 신의 아들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중이었다. 일명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압도적인 역량과 비타협성을 무기로 동방 속주 전체의 종교적 토양을 갈아엎다시피 하는 중이었으므로 그녀의 새로운 시도는 (만약 있었다면) 과거의 성공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처참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비록 보나 데아 숭배는 어디서도 다시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나, 그것이 보나 데아 자신의 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지중해 신들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로마도 수백 년 뒤에는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되었지만, 애초에 외부차원에 그 근원이 있었던 보나 데아는 다른 신격 독립체들이 생존을 위해 방법을 모색하는 와중에도 상대적으로 침착하게 상황을 평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차원에 기반을 구축하려는 그녀의 시도는 궁극적으로 실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보나 데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그녀는 마치 애초에 우리 세계에 없었던 것처럼 되어 버렸다.
보나 데아가 우리 차원의 초상 세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다. GOC의 소위 ‘위협 존재’ 데이터베이스의 변경사항을 모니터링하던 마술사들 중 한 사람이 KTE-2451-블랙-티리언이라는 식별자가 새로 업데이트 된 것을 발견했다. 코드에 포함되어 있는 ‘티리언’12이라는 단어, 그리고 도서관이 담고 있는 신격 독립체들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조사에 착수한 이들은 머지않아 분서꾼들이 발견한 이 새로운 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보나 데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새로운 발견은 옛 시대의 지배자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마술사들과 학자들을 열광시켰다. 처음의 발견에 이어 KTE-2451-블랙-티리언의 감시를 GOC 극동부문이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동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중 대담하고 적극적인 이들 몇몇이 수색대를 결성해 그 지역에 존재하는 것이 거의 확실한 보나 데아의 거처를 찾아 나섰다. 수색대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머지않아 보나 데아의 표식이 뚜렷이 새겨진, 미지의 공간으로 향하는 출입구 수 곳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수색대는 그 미지의 공간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성역’) 안으로 진입하지는 못했는데, 다름 아닌 재단 요원들에 의해 저지당했기 때문이다.
강력할 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저항에 부딪힌 수색대는 성역을 발견한 것으로 만족하고 활동을 종료했다. 이제 뱀손의 학자들은 보나 데아가 오랜 침묵을 끝내고 성역을 건설한 이유를 알기 위해, 그리고 고대의 여신이라는 신비 그 자체를 만나기 위해 재단의 저지를 뚫고 성역에 진입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접근법: 접근법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당연한 소리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찾는 이들이 많이들 간과하는 사실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람의 정신이 세월에 따라 변하듯이, 신들의 마음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우리가 상대하는 것이 인격을 가진 지성체인 이상 과거의 접근법이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는 믿음은 위험하며, 여기에 적힌 내용 또한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유효성을 잃을 수 있다.
깐깐한 일부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고대의 보나 데아 숭배가 위로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전멸했으므로 보나 데아를 만나는 그 당시의 방법을 서술하는 것은 공간의 낭비일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보나 데아를 찾는 가장 확실한 경로는 바로 그녀가 구축한 성역들을 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역의 입구들은 재단이 지키고 있으니 그들의 감시를 우회할 수 있는 수단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 어떤 마술사들은 재단이 파견한 성역 주변의 요원들에 대한 무력제압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폭력적인 해결법은 부수적으로 일반 사회에 큰 피해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활동하는 동지들1314의 상황을 어렵게 만들 것이 거의 확실하므로 다수의 지지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반면 성역에 잠입하는 쪽을 택한 마술사들은 그들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성과를 내고 있어 대부분의 관심은 그쪽으로 향해 있다. 재단의 경계에는 군데군데 허점이 있었으며 그치들 답지 않게 경계 실패를 상정한 2차 체계 또한 구축하지 않은 듯하다. 감시 장비는 있었지만, 최초로 그들의 경계를 뚫는 데 성공한 마술사 한 명이 그 존재를 알지 못한 채 그 앞을 여러 차례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응이 없었다고 한다.15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입에 성공한 자들은 성역 진입에는 실패하고 말았는데, 재단의 느슨한 감시를 통과해 들어온 마술사들의 앞을 문고리도 틈도 없는, 사실상 벽에 가까운 출입문이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성역의 입구는 ‘길’과는 달리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개방된 구조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전 내용에서 언급한 수색대 멤버들의 증언에 따르면 모든 성역의 출입문에는 “오라, 보나 데아의 시녀여VENI SERVA BONAE DEAE”라는 라틴어 문구가 동일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 문구가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새겨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학설은 이 글귀가 성역에 진입할 수 있는 자격을 설명한다는 것, 즉 ‘여신의 시녀’로서 인정받은 존재는 성역의 출입문을 통과하여 그 안으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설이다. 하지만 옛 시대의 보나 데아 숭배가 사멸해 버린 지금 아직까지 보나 데아가 신뢰할 수 있을 만큼의 신앙심을 가진 자의 존재 여부 자체가 의문스럽다.
뿐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성역 안에 진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보나 데아가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녀를 지중해의 여느 갈 곳 잃은 여신처럼 여기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 보나 데아는 어디까지나 외부차원의 여신이며, 기준차원에 건설된 성역들은 그녀의 유일한 거처라기보다는 우리 동지들이 흔히 만들어놓곤 하는 안전지대 내지 거점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관찰 및 이야기
위 단락에서는 "강구하고 있다"고 적어놓긴 했지만, 사실 성역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마술사들의 노력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른 거 하러 갔다는 매우 당연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인해 답보 상태에 처해 있다. 하지만 관심이라면 나한테도 충분히 있는데 왜 나는 현장에 나가 직접 발로 뛰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그런 의문에 대한 변명을 떠올리는 대신에 반성의 의미로서 휘영을 데리고 직접 성역에 대해 조사하기로 결심했다.1718
물론 앞서 보나 데아를 찾아갔던 다른 경험 부족한 마술사들처럼 재단 요원들의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서는 성역의 문을 더듬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따라서 출발 전날에 고향 친구19의 도움을 받아 한 달간 지속되는 인지재해 보호막을 두르고 최소한의 장비만 챙겨서 짐을 쌌다. 나와 휘영은 일본 모처에 위치한 성역에 그대로 이어지는 길을 타고 문 앞에 도달하는 즉시 근처에 재단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임시 거점을 구축했다.
문과는 한참 떨어진 지점이었지만, 어차피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어떻게"가 아니라 "누가"이니만큼 문 주변을 관측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어찌 됐건 그 문은 성역에 출입하기 위해 세워진 구조물인 게 분명하고, 그런 구조물이 세워진 이상 누군가는 그곳을 통해 성역으로 들어갈 것이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바로 그 누군가였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다. 우리가 감시를 시작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어떤 사람이 문을 통해 성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포착되었다.
재단 소속의 누군가가 성역에 들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아예 상정 범위 외의 인물이 이곳을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방문자의 모습을 보고 나와 휘영은 적잖이 당황했다. 방문자는 나이가 많아 봤자 20대 초반도 안 될 것 같은 백인 여성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코트, 바지, 부츠 등으로 평범하게 현대적이었지만 그 밖의 모든 요소에서 이세계인의 분위기를 풍겼다. 외모와 일치하지 않는 눈빛은 말할 것도 없고 묶지도 않고 그냥 허리까지 늘어뜨린 금발에, 무엇보다 코트의 오른쪽 팔 부분을 잘라내고 대신 드러난 팔에 황금 사슬을 감은 채였다.
그녀는 주변을 경계 중이던 요원들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고, 재단 쪽에서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대화 내용을 엿들을 수 있도록 원격으로 술식을 제어해 감지 장치를 초소에 설치할 수 있었다. 대부분은 사무적이고 무의미한 대화였으나 도중에 요원들 중 누군가가 그녀를 '베로니카'라고 부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원 하나가 차단기를 올리자 베로니카는 그들 사이로 지나가 그대로 성역 문을 향해 올라왔다. 이 시점에서 나는 더 가까이에서 그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하에 휘영을 아래로 내려보냈다. 휘영이는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볍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고, 유사시에 나보다 훨씬 빨리 자리를 뜰 수 있었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나는 휘영의 눈이 받아들이는 정보를 공유하는 상태로 거점에 머물렀다.
휘영은 베로니카의 눈에 띄거나 재단의 감시 장치에 포착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문과 3미터 정도 떨어진 수풀 사이로 숨어들었다. 잠시 후 베로니카는 휘영의 앞을 지나쳐 문 앞에 다다랐고, 그러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휘영도 나도 당황해 잠시 굳어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휘영이 정신을 차리고는 거점으로 돌아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휘영도 그 아이의 예민한 시각에 아무것도 잡힌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몇 시간 뒤에 침착하게 상황을 되짚어보니 베로니카가 사라지기 직전 그녀의 왼손 쪽에서 금속성의 반사광이 한 차례 터져 나왔다는 것이 기억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영무가 걸어준 보호막이 해제되려면 아직 3주가 더 남아 있었기에 나는 베로니카가 성역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릴 생각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에 위치한 성역에서 비슷한 짓을 하고 있던 친구 중 하나가 자기 눈앞에 별안간 어떤 여자가 나타나서는 성역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몇 가지 질문을 통해 그 여자가 베로니카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더 이상의 잠복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 출입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베로니카는 나올 때도 들어갈 때 만큼이나 신출귀몰했다.
도서관에 돌아온 나는 다시 문헌 연구에 착수했다. 베로니카라는 이름을 쓰는, 오른팔에 황금 사슬을 감은 여자가 다른 시기 다른 장소에서 활동했었다면 분명 누군가가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내 예상대로 SCP 재단 정보부 2015년판 요주의 인물 리스트의 'V' 단락에서 베로니카 브라이드Veronica Bride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단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자면 그녀는 "기적술 능력이 뛰어난 타입 블루로서, 모든 종류의 구속과 속박을 해제하는 능력이 있으며 불특정한 수의 다른 요주의 인물들 사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녀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요주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조사를 진행한 결과 그 요주의 인물들 사이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첫째로 그들은 전원 여성이었고, 둘째로 우리 세계의 일반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듯 보였으며, 마지막으로 동지들과 접선할 때 황금 사슬을 그들이 공유하는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여기까지 확인한 나는 '보나 데아의 시녀들'을 찾았다고 확신했다. 이 여성들은 외부차원에서 왔을 확률이 높으며, (아마도) 보나 데아가 직접 보낸 하수인들이거나 (적어도) 보나 데아의 지배를 받는 신민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상징인 황금 사슬을 가장 공공연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베로니카 브라이드가 이들의 지휘관(적절한 용어가 아닐 수 있음)이거나 최소한 그들 중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자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했다.
그리고 일단 베로니카와 그 동지들의 정체가 어느 정도 밝혀지자 더 이전 시대에 작성된 문헌들에서도 베로니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지만, 언제 작성된 사료였는지와 관계없이 항상 등장하는 "황금 사슬을 팔에 감았다"는 묘사를 통해 그녀를 특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나는 자료들의 연대를 비교하며 베로니카의 행적을 역순으로 추적했다. 그녀의 거꾸로 된 행로는 현재 동아시아에서 시작해 동에서 서로 이어지며 마침내 7세기 초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끊겼다.
베로니카 본인의 행적만큼이나 흥미로웠던 것이 바로 그녀에 대한 7세기 이전의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기록이 아예 없다는 건 베로니카의 활동이 7세기에 처음 시작되었거나, 아니면 그녀가 일하는 방식이 더 사람들의 눈에 많이 띄는 쪽으로 변한 것이 7세기였기 때문일 수 있다. 만일 답이 전자라면, 내가 차원 사이를 넘나드는 기술을 익히기 전까진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만일 답이 후자라면 7세기 이전에도 그 근방에서 어떤 흔적을 남겼을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에 대략 반년 정도가 소비되기도 했고, 추적을 지속할 정신적 여유도 많이 부족해진 탓에 나는 이스탄불에서의 수탐을 마지막으로 모험을 종료하기로 했다. 이스탄불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두 대륙을 잇는 요충지로 통했고, 그 도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불리던 시절에 축적된 대량의 초상 자료와 유물이 땅에 가득 묻혀있는 탐구자들의 천국이므로 만약 베로니카의 7세기 이전 행적에 대한 자료가 남았다면 여기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나는 내 추적행의 마지막 목적지로 그곳을 택했다.2021
별 기대 없이 찾아간 탓인지 큰 성과는 없었다. 나는 이스탄불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며 내가 아는 비밀 창고, 클럽, 경매장, 심지어 지도에도 없는 기묘한 골목길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내가 원하는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날 점심을 해결하러 찾은 평범한 시장에서 마술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이 운영하는 잡화점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나도 내가 거기 왜 들어갔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히 기억나는 건 내가 잡화점 문을 열고 들어간 그 순간 눈앞의 액자에 금화 하나가 들어 있었고, 바로 그 금화에 "보나 데아, 나의 주인BONA DEA DOMINA MEA"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주인장 말로는 몇 년 전 디오니소스 신전 터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했다. 너무 다급한 나머지 내 흥정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값을 치르고 금화를 손에 넣었다. 그때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는데, 내 거처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베로니카가 성역 안으로 사라지기 직전 금속의 반사광이 휘영의 눈에 한 차례 잡혔던 것이 기억났다. 베로니카가 찾아와서 자기가 평소 주머니에 뭘 넣고 다니는지를 직접 알려주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으나, 나는 베로니카가 성역에 들어갈 때 자신이 보나 데아의 시녀임을 증명하는 징표로 이런 비슷한 금화를 하나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성역의 열쇠를 손에 넣은 것이다.
의문점
- 보나 데아가 (적어도 겉보기에는) 얻는 것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차원에 이리도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보나 데아의 시녀들 중 적어도 한 명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세계에서 활동해 왔다. 그들이 구축한 성역과 시녀들의 활동은 초상 사회와 일반 사회 양쪽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 재단이 보나 데아의 시녀들과 사실상 협력 관계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우리 차원에서 보나 데아의 전권대사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 베로니카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녀의 목적이 보나 데아의 목적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 보나 데아의 이름이 새겨진 금화가 디오니소스 신전에서 발견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
.
.
.
.
.
- Y.L.
- 저번에는 여기 창문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 Knr.
- 잠시 없앴다. 오늘 여기서 할 일을 생각하면 밖에서 안이 안 보이는 편이 더 안전할 것 같아.
- Y.L.
- 형 가끔 그런 말 할 때마다 진짜 불길하게 들리는 거 알아요? 됐고, 여기로 불러낸 이유가 뭐예요?
- Knr.
- 너도 내 연구에 대해 읽었으니 알 테지만, 보나 데아의 성역을 탐사할 준비는 다 끝났어, 내 추측이긴 하지만 열쇠도 손에 넣었고, 성역에서 잠복하는 동안 재의 경계망에서 벗어난 안전한 경로도 파악해 뒀지.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돼.
- Y.L.
- 그런데요?
- Knr.
-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나는 못 들어가. 적어도 성역 문에 시종SERVUS이 아니라 시녀SERVA라고 적힌 이상 나는 보나 데아의 심기를 정면으로 거스를 수도 있는 짓을 할 생각이 없어.
- Y.L.
- 그러면 형 연구에 관심 있는 사람들 중에 여성인 사람을 찾아야겠네요.
- Knr.
- 그렇지.
- Y.L.
- ……아, 형, 왜 맨날 저한테만 이런 일 시켜요?
- Knr.
- 밤하늘에 뜬 달에 맹세코 나도 이번 일은 너 말고 다른 맹원들한테 맡기려고 했다. 그렇지만 대장은 관심 없다고 하고, 모리안은 차라리 관심 없는 게 더 안전한 사람이고, 율이는 독일 가 있고, 희지는 평소에도 워낙 바빠서 얘기도 못 꺼냈어.
- Y.L.
- 다희는요? 제 누나는요?
- Knr.
- 다희는 이미 섬기는 여신이 따로 있잖아. 걔는 오히려 나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연이는 대답이 긍정적이긴 했는데, 갔다 올 테니까 대가로 금화를 자기한테 아예 달라고 하잖아. 그거는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고.
- Y.L.
- 휘영이 있잖아요.
- Knr.
- 휘영이를 그런 위험한 데 보낸다고? 절대 안 되지.
- Y.L.
- 저는 보내도 되고요?
- Knr.
- 솔직히 너가 엄밀한 의미에서 '시녀'라고 불릴 수 있는지를 포함해서 모든 면에서 못 미덥긴 하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래서 보나 데아가 너를 경계할 가능성이 제일 낮아.
- Y.L.
- 요즘 누나도 그렇고 대장도 그렇고 형도 그렇고 제 취급이 좀 너무한데요.
- Knr.
- 림아, 한 번만 도와다오. 여기까지 왔는데 금화 하나만 챙겨서 끝낼 수는 없단 말이야. 그리고 너 요즘 배달 일도 안 들어온다며. 차 없이 발로 배달 뛰는 거라 생각하고 좀 해 줘.
- Y.L.
- 그러면 배달비를 주시죠. 금액 보고 생각해 볼게요.
- Knr.
-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이 정도면 돼?
- Y.L.
- ……미친.
- Knr.
- 이번 건에 대한 내 집착을 수치화한 액수야.
- Y.L.
- 형이 아니라 브라단이 회계라서 참 다행이네요. 내가 봤을 때는 경제관념 면에서는 형도 못 믿을 사람이에요. 에휴, 알았어요. 할게요.
- Knr.
- 고맙다. 역시 너밖에 없다. 이리 와 봐. 너가 챙겨가야 되는 물건 알려줄게.
- Y.L.
- 제 짐은 제가 챙겨요.
- Knr.
- 네 방에 '우유'랑 '꿀단지'가 있는 건 못 봤다. 일단 제의에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는 것들은 내가 다 준비해놨으니까 걱정 마. 가서 쓸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아예 꺼내지도 않고 돌아올 수도 있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전부 가져가는 게 좋겠다.
- Y.L.
- '뱀'도요? 저, 어……
- Knr.
- 그것도 일단 준비해 두긴 했어. 걱정 마. 아마 너가 생각하는 그런 용도로 쓰지는 않을 거야. 정말 그 용도로 쓰인다면…… 뭐, 그럴 때는 보통 경험 있는 사람이 초보자를 배려해서 주도한다고 하니까-
- Y.L.
- 그만 들을래요. 그건 그렇고 저 상자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거예요?
- Knr.
- 아, 저거. 저건 옷이야. 출발하기 전에 처음부터 입고 가는 게 좋겠어. 지금 꺼내서 보여줄게. 어때?
- Y.L.
- 이, 이건 옷이 아니라 그냥 천 조각이잖아요?
- Knr.
- 생각해 보니 너는 고대 지중해 복식에 대해서 잘 모르겠구나. 이거는 도리스식 키톤이라고 하는 건데, 고대에 지중해 지역 여성들이 입었던 옷이야.
- Y.L.
-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 베로니카라는 그 여자도 현대식으로 입는다면서요.
- Knr.
-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후원자 요청이라서 어쩔 수가 없다.
- Y.L.
- 후원자요?
- Morrígan.
- 나루, 내 이야기는 안 하기로 했었잖아.
- Knr.
- 그 쪽도 여기에는 안 오기로 했을 텐데요?
- Y.L.
- 혀, 형?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 Knr.
- 설명하자면 이래. 나는 내 호기심 채우겠다고 맹원을 사지로 보낼 생각은 없어. 도중에 너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거나, 아니면 너는 느끼지 못하더라도 다른 무언가가 널 상대로 악의를 품는다면 바로 도서관에 있는 우리 거점으로 귀환시킬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둘 계획이었어. 근데 그건 내 능력 밖이라 나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빌린 거야. 너는 그 대가로 측면이 최소한으로 가려진 옷을 입어야 되는 거고.
- Y.L.
- 뭐가 최소한으로 어떻게 되어 있다고요?
- Knr.
- 내가 말해버렸나? 미안. 어차피 로마 시대에는 도리스식이 아니라 이오니아식이 대세였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고증에도 맞지 않는 복식이지만 모리안이 입으라고 하는 거니까 그냥 입어줘.
- Morrígan.
- 나루,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쉬운 방법을 선택하는 게 어때.
- Knr.
- ……미안하다 이림, 날 원망하지 마라.
- Y.L.
- 이건 또 뭐야? 뭐가 내 옷을 붙잡는 거야? 당장 놔!
- Knr.
- 실은 네가 들어오기 몇 시간 전에 그 자리에 환복 절차가 탑재된 마술 장치를 설치해 놨어. 저항하지 않으면 네 옷이 상할 염려도 없고 빨리 끝날 거야. 포기해라. 그러면 편해.
- Morrígan.
- 아, 호야한테서 전화 왔네. 나 잠깐 나가 있을게. 얘 옷 갈아입히는 거 끝나면 한 번 보여줘, 사진 찍어서 율이한테 보내주기로 했어.
- Y.L.
- 이건 아니지! 형! 나루 형! 나루, 아니, 야 이 망할, 멈춰! 제발! 안돼애애애!
- Hwy.
- 똑똑, 계세요?
- Knr.
- 휘영아, 노크를 하던지 다른 방식으로 인기척을 내라고 전에 얘기했었잖아. 눈앞에 서서는 그러는 거 너한테는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보호자로서 정말 난처한 습관이다.
- Hwy.
- 죄송해요, 작가님. 그런데 저번에 성역에서 봤던 베로니카라는 그 언니 기억나요?
- Knr.
- 베로니카가 왜?
- Hwy.
- 아까 찾아와서 저한테 이걸 주던데요.
- Knr.
- 뭐라고?
- Y.L.
- 이거 놔, 이런 씨- 어라? 멈췄네?
- Knr.
- 편지잖아. 그냥 너가 읽고 나한테 전해 줘도 되는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왔어? 어차피 내가 읽으면 너도 알게 될 텐데.
- Hwy.
- 어, 베로니카 언니 말로는 멘툴라Mentula가 있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읽으면 안 된대요.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일단 작가님한테 가져왔어요.
- Y.L.
- 멘툴라?
- Knr.
- 미성년자 앞에서 잘도…… 그 여자도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면 어찌 됐든 펴서 읽어볼 수 있는 건 여기서 나뿐이겠네. 네가 잘 처신한 것 같다.
- Hwy.
-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서 뭐라 적혀있어요?
- Knr.
- ……
- Hwy.
- 작가님?
- Y.L.
- 형? 괜찮아요?
- Knr.
- 괜찮아. 흐음. 어, 휴우.
- Y.L.
- 갑자기 어디 가요?
- Knr.
- 연구는 이걸로 마치도록 하자. 너 굳이 거기 안 들어가도 될 것 같아. 그래, 어, 연구 종료다. 모리안한테는 내가 얘기할 테니 그만 가봐, 난…… 난 어디 가서 좀 마음을 정리해야겠다.
- Y.L.
- 저 형 왜 저러냐?
- Hwy.
- 글쎄요.
- Morrígan.
- 나 돌아왔…… 어라? 다들 어디 갔대?
- Hwy.
- 강 작가님이 베로니카가 보낸 편지를 읽더니 갑자기 대장님처럼 연구에 관심 없는 체하셔서 그냥 그렇게 끝났어요. 작가님이 이러시는 건 처음 봐요.
- Morrígan.
- 편지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 Hwy.
- 뭐였더라, 아, 작가님이 고향의 바다에 뭘 던졌는지 알고 있다면서, 원치 않는 지식을 알게 되기 전에 그만두라고 했던 것 같아요.
- Morrígan.
- 나루가 바다에 뭘 던졌어?
- Hwy.
- 저도 모르겠어요. 저랑 만나기 전의 일이었던 걸까요? 근데 작가님이 막 처치곤란한 쓰레기를 바다에 무단투기하고 그럴 사람은 아닌데.
- Morrígan.
- 뭐, 나중에 알아보자. 나도 가야겠다. 김새네.
- Hwy.
- 아, 언니, 혹시 뭐 좀 물어봐도 돼요? 멘툴라가 뭔지 아세요?
- Morrígan.
-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니?
[[footnotebloc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