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기지 공방전

기지 내부에서 울리는 요란한 공습 경보음은 지상에선 들리지 않았다.
고요함이 여전히 안개를 적시며 해안에 침전해 있었다.

안개 사이에서 홀로 빛을 내고 있는 등대 밑에선 한국군 군장과 소총을 걸쳐 멘 몇 무리의 군인들이 숨죽여서 움직이고 있었다. 소속 불명의 부양정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등대지기가 선제 대응에 나섬과 동시에, 기지 전술반도 외부 경계초소에 병력을 전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S동을 떠나 각자 배정된 초소를 향해 속보로 이동하고 있는 대원들은 드문 실전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남쪽이라던데…"

군장에 걸리적대는 K2 소총을 고쳐 메며, 혁 병장이 방금 얼핏 들은 내용을 중얼거렸다.

"우리 담당지로는 안 오면 좋겠습니다."

혁의 부사수인 시언 상병도 덩달아 소총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들이 수비하게 될 고가 초소는 S동 북동쪽,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에 위치해 있었다. 적이 어느 쪽으로 접근하든 전술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으므로, 혁 병장은 제법 고된 언덕길에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몇 분도 걸리지 않아 둘의 시야에 초소가 들어왔다. 혁은 무전기를 들고 상황을 보고했다.

"S2 초소 방어인원 거의 도착했다. 적은 보이지 않음."

발신 단추를 놓았지만 다급하게 들리는 통신만 스쳐갈 뿐 답신이 오지 않았다. 혁이 불길함을 느끼기 무섭게 멀리서 총성이 들려왔다. 멀지만, T동 너머에서 난다고 하기엔 분명히 가까운 소리였다. 초소 방향에서 인기척을 느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엄폐해."

혁이 시언을 초소로 향하는 길목 옆의 비상호 쪽으로 밀치고는 자세를 낮추며 소총을 견착하고 주위를 경계했다. 부두 조명에 비친 어두운 그림자 세 개. 저 너머 해안가에 어렴풋이 보이는 것은 분명히 상륙부양정이었다.

"저거─"

타앙─

"─이런 썅."

혁은 즉시 비상호로 뛰쳐 들어갔다. 시언도 거의 자빠질 뻔한 끝에야 참호에 들어가 몸을 숙일 수 있었다. 설마 북쪽 해안에 상륙정이 도착해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시언이 초소를 향해 대응 사격하자 적들도 초소로 접근하기를 멈추고 몸을 숨겼다. 혁은 무전기에 대고 이 위험천만한 상황을 전파했다.

"북쪽에 부양정이 있다, S2 동측 500m. 초소는 확보하지 못했다."
"S2라고?"
"온 사방에 적이다—"
"S3 교전 중! 지원이 필요해!"

다들 혼란에 빠져 있었다. 혁은 답신을 기다리길 포기하고 소총의 조준을 가다듬었다. 다른 인원들이 향한 진지들에서도 교전이 일어나고 있는지 간헐적인 총성이 들려왔다. 적은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았다. 50명? 30명은 될까? 하지만 시간차를 둔 양동 공격은 절묘하게 먹혀들어가 버렸고, 재단 전투원들은 상당한 수적 열세에 몰려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복잡해지는 계산을 잠시 미루어두고 혁의 소총이 불을 뿜었다. 적들이 초소를 선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적도 마찬가지였지만 혁과 시언은 엄폐호에 몸을 숨기고 있었으니, 그들은 초소에 올라가 사각을 확보하는 것 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움직이던 적 하나가 고꾸라졌다.

"하나 잡았다."

하지만 엄폐호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어선 적들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혁은 적을 겨누던 시언의 손에 무전기를 쥐어주며 말했다.

"초소로 가라. 엄호할테니까. 조심해!"
"예- 옛."

시언은 헬멧을 한 번 고쳐쓰고는, 비상호 뒤로 언덕을 우회해서 초소에 접근했다. 혁은 적이 얼씬대려 할 때마다 점사를 갈겨 적을 숨게 만들었다.

거의 초소 코앞에 다다를 때 쯤 시언은 고목에 엄폐해 동향을 살폈다. 경보 신호와 사격 신호가 난잡히 섞여 시끄러운 인이어를 뽑았으나 다른 진지의 총포음 때문에, 그보다 큰 심박 소리 때문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초소는 조금만 뛰어도 닿을 거리에 있었다. 시언은 위화감을 느꼈다.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초소 문이 삐그덕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덩달아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시언은 총구를 들어 문짝에 탄환 세 발을 박고서 몸을 숨겼다. 초소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총을 겨눠보려던 시언은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타타탕─

적의 총구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왔고, 두어 발은 고목에 박혀 터졌다.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초소를 엄폐물 삼아 총을 겨누던 눈동자. 시언은 숨을 두어 차례 크게 고르고는, 냅다 연발을 갈기며 앞으로 약진했다. 초소는 양옆에 나 있는 날개 진지 덕에 그들이 서로를 겨누려 빙 돌기 좋은 크기였다. 거기까지 다다라 몸을 초소에 밀착한 시언은 적의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오른쪽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시언은 몸을 틀어 총을 갈겨댔다.

하지만 놈은 예상이나 했다는 듯 진지를 넘어 피했다. 거의 곧바로, 놈은 다시 튀어나와 총탄을 퍼부었다. 시언은 관성 탓에 옆으로 힘을 실어 구르곤 엎드려 바로 겨눴다. 그 과정 중에도 방아쇠를 수 회 당겼으나 시언의 탄환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놈은 다시 사라졌다. 시언도 초소에 붙어 몸을 숨겼다. 이젠 숨소리를 참는 일이 질식만큼 고통스럽게 되었다.

놈이 좌측 날개 진지에서 재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 기회야."

그렇게 되뇌인 뒤 시언은 전술조끼의 멜빵에서 조용히 수류탄을 뽑아들고는, 안전핀을 제거하자마자 자기 발치에 굴려 두었다. 그리곤 진지를 냅다 타고 넘어가 꽉 찬 탄창을 놈의 발치에 던지며 연발로 갈겨댔다. 놈은 던지려는 폼을 포착할 때부터 날렵히 피했다. 등으로 진지를 타고 넘어가 방금 시언이 타고 온 진지에 몸을 박고 그를 겨눴다. 정말이지 놀라운 반응 속도였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시언의 노림수였다.

꽝 하는 소리, 치솟았던 모래가 가라앉는 소리. 땅의 진동은 멎었으나 여전히 머릿속은 울렸다. 놈의 파편을 확인한 시언은 탄내 섞인 비린내를 뒤로하고 초소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밖에 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시언은 무전기를 들었다.

"S2 초소 확보. S2 초소 확보했다."

그러고서 시언은 혁이 몸을 숨기고 있을 비상호를 살피려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혁 병장님?"

시언은 그 사람을 부르려고 했지만, 그 발치에 누군가 엎어져 있는 것을, 그 뒤에서 몇 사람이 더 다가오고 있는 것을 눈치채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 후,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는 자각을 마지막으로 시언의 의식이 흐려졌다.




<S동 해안 경계 거점 병력 투입 현황>

S-1 초소 S-2 초소 S-3 진지 S-4 초소 S-5 진지 S-6 초소
× × × × ×


제64K기지 전술반 


...


T동 동남측으로 몇 km 떨어지지 않은 지점. 기관총탑을 올린 무장 험비 세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구시가지에 진입했다. 곧 차량에서 내린 기동특무부대 뮤-39 "등대지기" 대원들이 빠르게 소산하며 각자 전투 위치를 잡았다.

"놈들도 이미 자리를 잡았을 거다. 모두 조심해!"

김기선 소령이 경고했다.

T동 이남의 버려진 주거지는 아직 개발이 덜 되었기에 철거 중인 폐건물이 꽤 있었다. 마을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낡은 민가와 어중간한 저층 건물들로 옹기종기 들어차 있었다. 그 덕에 엄폐물은 많았으나 그것은 곧 적이 어디 숨어있어도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선이 이끄는 1분대가 선두로 진입했고 각 분대도 네 다섯으로 나뉘어 동시에 여러 블럭의 수색을 전개했다.

정찰 중 다리우스는 잠깐 멈칫하며 '정지' 수신호를 하고는 맞은편 벽에 바짝 붙었다. 뒤따르던 분대원도 멈춰 주위를 경계했다. 다리우스는 장전손잡이를 당겨 노리쇠를 후퇴시키더니 전술조끼에서 탄두가 붉게 칠해진 소총탄을 뽑아 약실에 삽탄했다. 전장의 어느 건물의 창문을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기자, 예광탄이 궤적을 그리며 창틀에 꽃혔다. 그러자 뒤편 저 멀리서 낮고 빠른 총성 세 개가 들리더니 창이 박살 났다. 유리 요원이었다.

"쓰리 아웃. 이제 그 방엔 아무도 없습니다."

유리가 자세를 틀며 교신했다.

"잠깐, 건물에서 빠져나와 뒤편으로 이동하는 셋 식별."
"오케이. 관측 요망."

다리우스가 짧게 대답했다.

한편 다른 골목에서는 이미 교전이 일었다. 골목 중앙에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뚫으며 어느 폐가로 뛰어가는 적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 너머 코너에서 대기하던 팀원이 몇 발인가 쏘았으나 안개와 연막 탓에 명중탄을 내진 못했다. 분대장의 지시로 유탄수 하나가 고폭탄을 쏘았으나 돌담을 무너트려 엄폐물만 늘려줄 뿐이었다.

하늘에 울리는 묵직한 총성 하나는 유독 튀게 들렸다. 분명 저격소총의 총성이었지만 유리의 레밍턴은 아니었다. 그렇게 판단한 제임스 분대장은 팀을 데리고 타격을 준비했다. 목표는 이 작은 마을의 유일한 2층 건물이었다. 소음기 탓에 정확한 방향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이곳이 가장 유력했고, 아니더라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빠르게 약진해 건물 외벽에 도달한 제임스는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맞은편 담벼락에서 소총수 여럿이 튀어나왔다.

"이런 썩을!"

팀원 역시 빠르게 대응했으나 상대적으로 불리한 지형 탓에 공격이 쉽지 않았다. 제임스 팀은 외벽의 기둥에 숨어 잠깐의 교전을 벌였다. 이미 잠입의 목적은 무너졌다. 제임스가 시간을 버는 동안 대원들은 창문을 통해 건물에 진입했고, 마지막으로 제임스도 들어갔다. 팀원들은 이미 상층의 적과 교전 중이었다.

"마이크-시에라, 상가 2층에 저격수 보이나?"

제임스가 무전했다.

"좀 전부터 주시했지만 각도를 주지 않는다. 아마도 날 겁내고 있는…"

유리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옆, 부사수 빈센트의 안면이 육편으로 조각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유리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저격 위치가 발각됐다. 자리를 다시 잡겠다."
"아니, 현 위치에서 엄폐하고 기다려."

기선이 무전했다.

"마이크 1, 2, 상황이 놈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더 들어가면 완전히 포위될 꼴이야. 험비가 돌고 있으니 대기하라."

정말로 골목 너머에서 요란한 기관총 소리와 차량 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적의 저격수가 운전석을 조준했으나,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유리의 윈체스터 매그넘 탄이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며 날아들어서는 놈의 면상을 턱 째로 날려버렸다. 수송 차량은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각지의 병력을 태웠다. 유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며 차량이 다시 북쪽으로 돌아오는 걸 보자 무전했다.

"현 위치 T동 후방 잠복호. 우린 어디로 갑니까?"

유리가 참호에 들어가 쌍원경으로 주위를 살폈다. 거의 근접한 두 그림자가 보였다. 저격수를 치려는 침투조였다. 유리는 아주 조심스레 선두에 선 놈을 조준했다. 숨을 다 고르기도 전에 둘은 갑자기 내달리려 했다. 반사적으로 격발된 탄두 하나에 한 녀석은 고꾸라졌다. 다음 녀석을 조준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는 강렬한 위기감이 유리를 덮쳤고, 그와 동시에 그 놈의 옆구리를 험비가 덮쳤다.

"요원!"

운전수가 빠르게 후진하고는 창을 내렸다. 차창엔 총알 파편이 다닥다닥 박혀있었다. 제임스 분대장과 전투원 몇 명이 내렸다.

"오, 이런."
"유리, 여긴 자네뿐인가?"

제임스가 달려와 턱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예. 빈센트는…"

유리가 침통하게 말을 흐리자 제임스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녀도 전투 디스플레이에 몇몇 이름이 빠져있는 걸 알아챘다.

"나머지 소대원들은요?"
"SCP-521-KO로 적들을 유인했다."

제임스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다음, 쓸어내리며 팀원에게 말했다.

"놈들을 기지로부터 격리할 수 있다는 점, 놈들이 이 제방을 모르는 이상 명백히 우리에게 유리한 전장이라는 점에서지. 적은 우릴 몰아넣었다고 생각할 거야. 대장이 돌아올 때까진, 위치를 고수하면서 여길 지켜야 한다."

유리는 고개를 들어 머얼리 등대의 빛이 비추고 있는 곳을 들여다 보았다. 저 빛이 꺼지면 그 방조제는 아무도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전장이 될 터였다.

그리고 빛이 사그라들었다.


...


야음이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지만 짙은 안개는 여전히 사람들의 눈을 두텁게 가리우고 있었다. 네 대의 헬리콥터는 그 안개 덕분에 주의를 거의 끌지 않고 무진 시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허나 안개는 그들이 당초의 목적지로 직행하지 못하게도 만들었다.

제64K기지와 해안가를 뒤덮은 짙은 해무는 등화관제를 유지하면서 비행하기엔 너무나 위험한 악기상 조건이었고, 더구나 BE 세포원의 공작으로 기지의 항공 관제 시스템이 제기능을 못하게 된 탓에 편대는 곧장 기지로 접근할 수 없었다. 연달은 긴급 임무로 연료를 충분히 보급받지 못한 상태에서 장거리 비행 후 오랫동안 체공하고 있느라 연료가 위험 수준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HH-60XN 편대는 더 나은 착륙 지점을 선택하거나 근접항공지원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착륙 지점, 이상 없음. 호크 1 착륙한다."

너른 벌판의 잔풀이 거센 기류를 맞으며 큼지막한 원을 그리기 시작했고, 풀밭에 아로새겨진 세 개의 기하학적 도형 위로 호크 아울 편대와 치누크 2번기가 조심스럽게 바퀴들을 내려놓았다. 호크 아울의 측면 도어가 열리자 야시경과 플레이트 캐리어 차림의 제88공수특무소대원들이 주변을 경계하며 차례로 내렸고 치누크는 화물창에서 전술차량을 한 대 내려주었다. 통신에 따르면 적은 두 척의 상륙정으로 기지를 남북 양측에서 포위해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백마 상사는 호크 아울이 기지에 직접 착륙하기 어렵겠다는 이야기를 듣자 마자 작전을 수정해서 포위망 밖을 공략하기로 결정했기에 이곳을 착륙 지점으로 고른 것이었다.

차량 전개를 마친 치누크는 로터를 다시 강하게 돌리면서 굉음과 함께 날아올라, 체공하며 기다리던 편대기와 합류했다. 이들은 아직 비행 시간에 여유가 있었으므로 다른 방향에서 병력을 전개해 역포위를 펼치기로 한 것이다. 1번기의 조종사가 백마 상사에게 무전을 날렸다.

"우리는 기지 부지의 헬기 착륙장으로 다시 접근하겠다. 아직도 관제 계통이 정상화되지 않았다면 조명 켜서라도 강행 착륙할 수 밖에."
"혹시나 적 대공 전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심하고, 행운을 빈다."
"알겠다. 지상에서 만나자."

치누크 편대는 그러고선 남남동으로 기수를 돌리고 제64K기지를 향해 다시 속력을 냈다. 그에 이어 무진공항에서 재보급을 받기 위해 이륙하는 호크 아울 편대를 지켜보며 소대원들은 전술 차량에 탑승했다. 조수석에 올라탄 백마 상사가 물었다.

"전장에서 얼마나 떨어졌지?"
"멀지 않습니다. 7분 내로 도착합니다."

장진호 하사가 운전석에서 벨트를 매며 대답했다. 이미 따끈하게 달궈진 엔진은 전 대원이 승차를 끝마치자마자 힘차게 회전수를 올렸다. 차량은 곧 벌판을 벗어나 해안 도로를 타고 질주했다.

"현재 전황 전파받은 건 없나?"
"남쪽의 뮤-39는 한참 교전 중이랍니다. 적을 SCP-521-KO로 유인해서 가둬버리겠다는 것 같습니다. 북쪽은 방어선이 뚫려서 기지가 직접 포위되었고요."
"그나마 적 전체 병력의 절반이 이탈해서 포위망이 두껍진 않을테군."
"그렇습니다. 제때 양동으로 치면 충분히 구원이 가능…"

"어, 저거 뭐야. 저거 뭐야!"

적재칸에서 전장 쪽 하늘을 지켜보던 블러디 리지 병장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개와 어둠을 가리는 폭발 섬광이 조금씩 약해지면서 그 아래로 불붙은 잔해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백마 상사와 장진호 하사는 사색이 되어 섬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씨발, 씨발, 젠장 씨발!"
"치누크 1, 2, 상황 보고하라!"

다급하게 무전을 치는 백마 상사에게 2번기 조종사가 떨림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답신해왔다.

"…치누크 1 다운. 2는 부지 외곽에 내렸다. 호크 팀 위치는?"

백마 상사는 정신이 아찔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한순간 문장으로 완성되지 않은 단어들이 머리 속에서 스쳐갔다. 격추, 부상자, 구출, 전력비, 이탈, 작전 포기, 그럴 수는— 잠시 말문이 막혀 있던 그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17번 국도다. 5분 후 전선에 도달할 것이다. 적 섬멸 임무는 우리가 맡을테니 치누크 2는 1을 지원하라. 생존 대원 하나라도 잃지 말고 안전하게 이탈하라. 건투를 빈다!"
"…고맙다. 여유가 되는 대로 지원 병력을 보내겠다."
"알겠다. 교신 종료."

백마 상사는 무전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글로브 박스를 한 번 세게 치고 이마에 손을 얹은 채 분을 삭였다. 장진호 하사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속 페달을 마구 밟았다. 거칠게 달려가는 차량에 앉아 각자의 총기를 끌어안고 있는 대원들 역시 그저 침묵하며, 동료들이 무사하길, 그리고 이런 짓을 벌인 개새끼들 머리통에 정확히 총알을 박아넣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



교전세포 살모사는 머지않아 제방에 다다랐다. 스멀스멀 끼어오는 안개는 탁월한 연막 효과를 해주었으며 걸으면 걸을수록 더욱 짙어져 가는 것 같았다. 세포는 두 조로 나뉘어 서로를 엄호하며 교대로 전진했고, 그 옆을 바다거북의 무레나급 장갑부양정이 호위하며 따랐다. 십여 분 채 되지 않아 전투분대장 솔트가 저 멀리서 거뭇하고 넓적한 형상 하나를 발견했다. 아마 재단의 수송 차량일 것으로 생각하기가 무섭게 총성 하나가 귀 옆을 지나쳤다. 짧은 단말마와 함께 뒤편의 병사가 나뒹굴었다.

"모두 엎드려!"

솔트가 소리쳤다.

세포원들은 차량을 향해 총탄을 쏟아부었다. 아마도 차량 하나를 겨우 엄폐물로 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너무나 잠잠했다. 대응 사격은 없었다. 험비 위의 기관총 역시 나서질 않았다.

그때, 그럼과 동시에 험비는 헤드라이트를 켜 이쪽을 향해 껌뻑이기 시작했다. 당최 뭘 하려는건지 한눈이 다 팔린 그 순간에, 대략 20m 앞 방파제 양옆으로 피어오른 연막을, 그리고 그것을 비집고 날아오는 예광탄의 형광 궤적을 볼 수 있었다.

"옆으로! 방파제로 빠져!"

적의 위치를 파악한 전투원 하나가 소리쳤다. 총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개 같은, 애당초 길 위에서 싸울거라 생각한 게 모자란 생각이었어."

팀장 줄리아 준령이 테트라포드에 몸을 숨기며 내뱉었다. 재단 요원들의 반격이 거세게 시작되었다. 줄리아는 부양정에게 화력 지원을 요청하려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짙은 안개와 연막 속에서 부양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줄리아는 무전기를 꺼내 들어 말했다.

"이봐, 미다스! 지금 어디야?"

험비에 달린 기관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게, 분명 제대로 따라가고 있었는데… 전혀 보이지가 않습니다. 정확한 좌표가 어떻게 되십니까?"

지직거리는 소리, 곧 부양정 조종수인 미다스로부터 답신이 왔다. 줄리아가 주머니에서 장치를 꺼냈으나 위성 기능은 이미 먹통이었다. 그녀는 장치를 내팽개치고는 소총을 잡았다.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었다.

수류탄의 폭음과 파편이 퍼지는 소리, 테트라포드째 박살이 난 아군의 머리통, 정신을 부여잡고 제방의 뒤편 끝과 전방의 끝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아무리 눈을 찌푸려보아도 안개 때문에 도통 보이질 않았다.

"씨발! 이 자체가 비정상적인 공간이야. 이런 망할!"

줄리아는 늦게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역정을 냈다. 주위에 숨어있던 병사들을 끌어모아 임시 편대를 꾸린 줄리아가 수신호를 보내며 앞쪽으로 약진하려 했지만, 얼마 못 가 옆구리에 총을 맞고 방파제 틈으로 미끄러졌다.

"안 돼!"
 
솔트가 줄리아의 팔을 붙잡고 엄폐가 될 곳으로 끌고 왔다. 출혈이 심했다.

"왜, 나는 왜… 어째서."

줄리아가 패닉에 빠져 횡설수설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준령님!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줄리아가 다른 손으로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었다.

"줄리아!"

솔트가 소리치자 울컥 피를 토해낸 줄리아가 숨을 고르며 답했다.

"솔트, 우리는… 여기서 왜 싸우고 있는 걸까?"
"뭐라고요?"
"우리는… 분명 자연과 지구를 위해 싸우던 게…"

채 말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그녀의 숨이 멎었다.

솔트 앞에서 그녀는, 그녀의 얼굴은 반들반들한 위장 크림과 빨간 핏물로 젖은 채 차갑게 식어갔다.

솔트는 수 초간 멍하니 그녀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이 곧 새하얘졌다. 마치 이 공간에 자신만이 남아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비명을 지르며 하늘에 대고 의미 없는 연발을 쏴 재끼다가 넋을 아주 놓아버렸다. 차량이 움직이는 소리에 재장전을 하려 했지만, 덜덜 떨리는 손에 쥐어진 탄알집은 미끄러져 방파제 밑으로 떨어졌다. 숨 막히는 울분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는 허리춤에서 날붙이를 뽑아 들고 제방 위로 올라섰다.

"너희 더러운…"

차량에 뛰어들려던 솔트의 가슴팍에 총알들이 무수하게 박혔다. 고꾸라져 쓰러진 그는 뜨거운 액체가 울컥하며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입 안 가득히 채워진 선혈을 게워내자 구강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동시에, 숨을 쉬려 애쓸수록 바다에 잠기는 듯한 질식을 느꼈다. 정신줄을 다 놓치기 전에, 솔트에게 마지막으로 어느 말이 들려 왔다.


"이놈이 끝인가 봅니다. 소령님."

다리우스가 한 줄의 연기가 피어 오르는 총구를 내리며 말했다. 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마, 여기는 마이크-알파. 적은 소탕했다. 이탈할테니 등대를 켜 주기 바란다."
"알겠다. 곧장 기지로 돌아와 방어전에 합류하라."
"양호."

앞에서는 자빠진 채로 가슴을 쥐어 잡은 적 하나가 끅끅 소리를 냈다. 다른 한 손엔 대검을 꽉 붙들고 있었다. 운전병이 놈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 차 제방 밑으로 굴려버렸다.

"차 빼야 돼, 새끼야."

한숨을 돌리며 수통을 꺼내는 다리우스를 지켜보던 기선은 돌아서고는 기지 S동 등대 초소와 재차 통신했다.

"리마, 어서 등대를 점등하라. …리마?"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정적 뿐이었다.


...


등대 옆에 마련된 방어 구조물 위에서 기관총이 쉴 틈 없이 총탄을 내뱉어댔다. 그 어마무시한 화력에 적들은 접근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등대는 S동에 지원 병력이 오기 전까지 시간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초소였다. 최후의 방어선을 지키는 등대 초소에는 이주영 중사와 톰 상병이 있었다.

시뻘겋게 뜨거워진 총열을 교체하고 있자 "등대지기"로부터 무전이 오고 있었다.

"톰, 일단 내려놓고 등명기부터 켜고 와. T동은 작전 성공. 등대를 켜주면 곧 이쪽으로 지원 올 거야."
"알겠습니다."

톰은 주영이 링크탄을 연결할 때까지 엄호 사격을 하다 등명기 문 쪽으로 돌아갔다. 문고리를 쥐어 잡자 총성이 들렸고, 뒤통수가 시렸으며, 눈앞은 번쩍했고, 시야는 붉게 젖었다. 모든 작업은 기관총의 우렁찬 총성에 묻혔다. 그가 머리통에 구멍이 난 채로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주영은 탄통 하나를 다 비울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탄환이 발사된 곳은 S-2 초소였다.

"뭐야, 지금?"

진지에 바짝 엄폐 중이던 리처드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아, 각도가 딱 잡혀서…"

초소에 남아 엄호하고 있던 벨라가 G28 지정사수소총의 총구를 내리며 소심하게 무전했다. 기관총의 총음은 곧 멈췄고, 잠시 후 한 줄기의 궤적이 날아든 등대 초소의 한쪽 벽이 폭발해 무너졌다. 굴러떨어진 등명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으하하, 클리어!"

유탄수 폴이 호탕하게 웃으며 진지에서 기어 나왔다.

"마지막 거점 초소 파괴. 좋은 판단이었다, 벨라."

교전세포 시베리아호랑이의 팀장 리처드가 무전으로 칭찬하자, 초소를 이탈해 본대에 합류하려 이동하고 있던 벨라가 수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머지 세포원들도 폴의 뒤를 따라 진지에서 빠져나왔고, 벨라가 합류하자마자 곧장 S동을 통해 기지 지하로 진입했다. 그들은 지하 로비를 지나쳐 행정사무실까지 덮쳤으나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폴이 잠깐 살펴보자 서류나 컴퓨터의 본체는 이미 떼어갔고 일부는 못 쓰게 되었다. 그때, 리처드에게 무전이 들려왔다.

"—보세요, 여보세요. 들려요?"
"잘 들린다. 살아 있었군."

목소리의 정체는 제64K기지에 연구원으로 위장해 있던 잠입세포 고치벌-142, 진 요원이었다.

"우리는 직원들과 함께 더 깊은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지금은 비디오월로 당신네를 관찰하고 있죠. 곧 그쪽으로 경비대가 갈 겁니다. 두 방향에서요."

리처드가 무전을 받으며 손으로 인원들을 지휘했다. 인원들은 CCTV를 찾아 박살냈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사무실은 방어와 은엄폐가 용이한 장소였다. 리처드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벨라가 뛰어와 옆에 붙었다.

"진, 우리가 놈들 움직임을 먼저 읽어내면 공작원을 의심할 텐데."
"그러니까 한번에 성공해야죠. 리처드. 이만 마칠게요. 바로 문 앞이에요!"

무전은 끊겼고, 작전은 시작됐다. 아래층으로 연결된 문이 벌컥 열리던 참에 리처드가 탄을 쏴박았다. 리처드와 벨라가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적을 만나는 족족 과감하게 쏴제끼는 벨라의 총알은, 간혹 리처드의 머리통 옆으로 쐑 지나가서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곤 했지만, 결국엔 정확하게 보안대원들을 맞춰 거꾸러트렸다. 그들은 지하 3층까지는 어렵지 않게 돌파했지만 끈질긴 저항에 시간은 점점 지체되고 있었다.

"리처드씨? 여기는 진. 일이 꼬였어요."
"뭐? 무슨 일…"
"시간 없어요. 살모사가 당했답니다. 상황 브라키오로 이행하겠— "

진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갑작스레 무전이 끊겼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한참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하던 주변 층도 고요해졌다. 상황이 어떻게 되가는지 알 수 없게 되자 리처드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둘은 탄창을 비워가며 남은 경비병을 처치했고 겨우 지하 4층에 들어설 수 있었다. 층은 매우 어둡고 빛 한 줄기조차 보이지 않다. 벨라가 총열에 부착해둔 조명을 밝히자 저 멀리에 격리실의 문이 보였다. 리처드가 숨을 고르고 앞으로 걸어 나가자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많이 급하셨나보군. 아군이 뒤처지는 것도 모르고 둘이서 여기까지 오다니."

이어서 계단실 문을 닫는 소리와 권총의 해머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움직이지 마. 총은 내려놓고, 뒤로 돌아."

리처드는 입 모양으로 '씨발'을 뱉으며 조심스레 움직였다. 총기를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고는 천천히 돌았다. 벨라도 순순히 말을 들었다.

"반갑다. 나는 경비대 분대장 정곤이라고 한다. 편하게 고니라고 불러줘. 내 동료들은 다 그렇게 부르거든. 위층에 있던 놈들, 네 놈의 팀인가? 걔네들이 죽을 때까지 힘 써준 덕분에 이제 날 불러줄 동료는 없지만, 그래. 이제 나뿐이야."

놈이 겨누고 있는 콜트 M1911의 총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너희 쪽에서 손을 봤는지 층간 자폭 시스템도 CCTV도 먹통이 되었어. 직원들이 코드를 복구시키느라 고생깨나 하고 있다만 그 덕에 내가 너희 둘에게 무슨 짓을 할지 상급 사령부는 알 길도 없고, 안 그래?"

고니가 벨라에게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겹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무슨 짓을 벌였는지는 몰라도 첩자는 곧 발각될 거야. 그러는 순간 끝장이지. 물론 네 놈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아니, 그래. 말하던 중에 끊어서 미안하지만 자네 말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결국 항복하라는 말 아냐? 그럴 생각은 네놈 아버지의 좆 껍질만큼도 없다네. 쏠 테면 쏴."

"팀장님!" 당황한 벨라가 소리쳤다.

"좋아. 병신을 만들어주마."

고니가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천장에서 웬 물컹한 것이 떨어져 놈의 머리통에 달라붙었다. 그것은 고니의 얼굴을 뒤덮은 채 채 젤리처럼 철벅였다. 고니는 잡아떼려 애쓰며 계단실 문을 열었지만 결국 액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빠져서 발버둥쳤다. 비명을 지르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는 곧 저지되었고, 앞으로 자빠져 축 늘어진 고니는 완전히 죽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천장에서 누군가, 아니 사람 형상의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 문서로만 봤는데."

벨라가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벌렁이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푸른 인어 소녀, 재단이 SCP-331-KO라 이름 붙인 그것. 투명한 피부는 반들반들했고 속은 바닷물로 꽉 차 있었다. 얇은 모래층 너머로는 심해처럼 어두운 그늘이 비쳐보였으며, 해초의 섬유질 같은 머리칼은 가슴팍까지 흐트러져 있었다. 소녀는 고니를 바르게 눕히고 입을 맞추는가 싶더니, 울컥이는 소리가 방을 덮었다. 상상보다 더욱 끔찍한 광경에 리처드와 벨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소녀는 둘을 빤히 쳐다보고선 말없이 계단을 타고 뛰어 올라갔다.

"앗. 오, 올라갑니다!"

벨라와 리처드는 겨우 정신머리와 총기를 챙겨 쫓으려 했지만, 갑자기 고니의 몸뚱이가 움찔이자 흠칫 멈춰서 놈을 겨누었다. 고니였던 것은 뽀글거리는 기침 소리와 함께 검붉은 덩어리를 토해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치아 사이를 헤집더니 샛노란 섬유 같은 것을 더 게워냈다.

"으악… 저건…"
"씨발, 더럽게 역하군."

리처드가 욕지거리를 뱉자마자 고니 역시 힘겹게 균형을 잡으며 몸뚱아리를 일으켰다. 그것은 리처드가 떨리는 손으로 총구를 겨누건 말건 신경도 안 쓰고 소녀를 쫓아 계단을 뛰어올랐다.

"살면서 별 꼴을 다 보게 되는군. 가자, 쫓아야 해."

그들을 쫓아 올라가던 리처드는 위층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메아리치는 것을 들었다. 헐레벌떡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시 L동에 도달한 둘은 믿지 못할 광경을 보고 말았다. 완전히 초토화된 사무실, 그곳에 이곳저곳 흩어져 있는 세포원들의 시체들, 그리고 무더기로 쌓여있는 붉은 덩어리. 그 옆에서 소녀는 경비대원 하나의 안와를 빨며 꿀렁이고 있었다. 리처드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젠장, 이딴 녀석이라고는 들은 적 없는데!"

그제야 벨라의 시야에 고니와 재단 경비대가 포착되었다. 그들은 기우뚱거리며 하나둘씩 기지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벨라는 그들이 이미 소녀에게 당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소녀는 시체의 안와에 입을 떼고 일어나더니 어떤 문장 하나를 말했다. 높고 강한 어조와 함께 물 끓는 소리가 났고, 성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출렁였다.

"느넨 무사 와당이영 사르믈 오도낫이 날리뒤질 아년가…?"

얼핏 듣기에는 한국어 같았지만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어쩔 줄 모르며 총만 겨누고 있으니 소녀는 답답하다는 듯이 뒤돌아 나갔다. 시체가 된 재단과 BE의 전투원들도 비척이며 그 뒤를 따랐다. 소녀가 끌어안고 있던 시체도 그 뒤를 따라나가자 그 뒤에 가려 있던, 숨을 헐떡이며 정신을 잃어가는 폴이 보였다.

"맙소사, 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티, 팀장니— 우웩."

폴은 풀려버린 눈의 초점을 맞춰보려다가 입에서 피를 쏟았다. 그에게 뛰어간 리처드는 폴의 얼굴을 뒤덮은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폴의 상의는 벗겨져 있었고 그의 통통한 배엔 삐뚤빼뚤하게 'GONY'라 칼집이 새겨 있었다. 다른 상처들까지 보니 응급조치는커녕 가망은 없어 보였다. 리처드는 격정적으로 끓어오르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지만 폴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 꾹 참았다. 폴도 할 말은 많았지만 남은 시간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폴이 숨을 고르며 겨우 한 단어씩 말했다.

"…죄, 죄다… 당했어. 우리도 놈들도, 자신이 아냐…"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폴! 정신 차려봐!"

리처드가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폴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잠깐 마음속으로 기도한 리처드는 그제야 일어날 수 있었다. 리처드가 벨라를 쳐다보자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사령부 지령을 확인했다.

"작전은 제3단계로 이행됐습니다. …이탈하라는 명령입니다."
"…어떻게 할 거냐, 너는?"
"네?"
"나는 이 현장을… 조금 더 목격하고 싶어서 말이다."

벨라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머뭇거리고 말았다. 그는 지금 허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시에 철저히 따랐고,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결과는 세포가 전멸하고 두 명의 생존자가 주저앉아 있는 이 상황인 것이다. 벨라는 리처드를 이해했다.

둘은 피와 물로 얼룩진 참혹한 공간을 뒤로 하고 다시 걸음을 떼었다.



...



소녀를 둘러싼 재단 경비대원과 BE 세포원의 육체들이 기지 출입구에서 끝도 없이 밀려나오고 있었다. 리처드와 벨라는 이들을 피해 몰래 창문으로 건물을 빠져나가고 있었고, 기지 앞 해안선에는 갓 도착한 제88특무소대가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애초에 BE의 포위망을 뒤에서 치려고 서둘러 온 참이었지만, 긴급 명령을 받고 SCP-331-KO 저지에 나선 것이었다.

"기지에서 한 무리가 나오고 있다. 그들이 대상을 엄호하며… 잠깐, 저건 재단 인원들이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애로우헤드 병장이 쌍원경으로 상황을 살피며 보고했다.

"인질로 삼은 건가?"

백마 상사가 물었다.

"아닙니다. 저들 상태는 뭔가… 이상합니다."

직원들은 각자 무기를 꼬나쥔 채 몸을 삐그덕거리며 걷고 있었다. 흘러나온 내장을 부여잡으며 걷는 이들도 있었고, 눈알이 다 빠진 채로 걷는 이들도 있었다. 확실한 건 그들이 멀쩡한 정신으로 움직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백마 상사로선 다짜고짜 이들을 모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사살 명령 철회, 무력화 및 생포에 집중해. 전원 다!"
"아무렴, 늘 그런 식이지. 물러터진 족속들."

공중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폭발이 S동을 뒤덮었다. 등대와 건물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철근 콘크리트 파편이 되어 무너져내렸고, 미처 다 빠져나오지 못한 무리가 화염에 휩싸인 채 날아가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공중 폭격이었다. 난데없는 공격에 제88소대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세계 오컬트 연합의 강화 전투복을 입은 남자가 강하해 사뿐히 착지했다. 장진호 하사가 소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연합 놈들인가!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리는 분명히 19133을 파괴하라고 경고했다. 너희가 하지 않으니 우리가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나?"

곧이어 제3544타격조 "목마"의 나머지 타격대원들도 공중에서 떨어졌다. 강화 슈트의 역분사 장치가 불을 뿜었고 흙과 먼지가 강하게 튀어 올랐다. 타격조는 반들반들한 방탄 섬유로 보호되는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장진호 하사가 하늘을 보니 안개 구름 사이로 전술 헬리콥터의 실루엣이 보였다.

"저것들 상태를 봐. 이미 잠식당했다. 구할 수 없어."

타격조장 코세인이 헬멧의 영상 장치를 딸깍이며 말했다. GOC 전투원들은 비척비척 걸어오는 SCP-331-KO의 호위 무리를 향해 소총을 겨눴다.

"그 총 내려!"

백마 상사가 소리쳤다. 코세인이 한숨을 푹 쉬고는 뒤돌아섰다.

"그럴 순 없지. 피해를 막으려면 여기서 막을 수 밖에 없다고."
"아니, 당장 내리지 않는다면 너희도 적으로 간주하겠다."

백마와 알파-88 전투원들도 타격조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 와중에 폭발의 충격에서 벗어난 소녀와 무리들은 다시 바다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짧은 침묵이 지나가고, 코세인이 웃으며 제안했다.

"좋아, 그럼 제안 하나 하지. 딱 1분 줄 테니 재단 직원들은 너희가 가져. 우린 저 초상 생물 하나만 작살내면 그만이거든."
"하, 웃기는 소리! 상사님. 저 쥐─오─씨팔 것들 말은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애로우헤드가 소리쳤다.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겠군. 사격 개─"

코세인의 말을 끊으며 전장에 총성 하나가 차올랐다. 탄환은 코세인의 가슴팍에 명중해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고, 코세인은 천천히 발포한 인원을 응시했다. 애로우헤드의 소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튀긴 피는 없었다.

잠잠했던 해안가, 순식간에 다시 총격전이 벌어졌다. 코세인이 애로우헤드의 가슴팍에 탄을 쐈다. 반응할 틈 조차 없이. 모든 인원들이 타격조에게 관심이 쏠리자 소녀와 무리들은 우회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그걸 가만히 볼 수 없는 코세인과 타격조원 랜달이 기동했다. 그때, 형광 궤적 하나가 둘의 사이에 지나가더니, 랜달의 머리통이 박살 났다. 예광탄은 백마의 것, 랜달의 갑피를 깨부순건 T동의 유리였다.

저격수의 등장에 공중에서 대기하던 헬기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코세인은 탄환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서너 발을 발사했다. 첫 발이 제임스의 머리 위를 쌩하고 지나치자 저격조는 내밀던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러곤 마지막 발이 저격소총의 조준경을 박살 냈다.

"으악! 그 거리에서 어떻게…"
"말도 안 되는 놈들이군."

저격을 피해 가까스로 엄폐물을 찾은 코세인은 거의 모래 바닥의 해안까지 뛰어나온 시체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소녀를 호위하려 무지하게 쏘아댔지만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코세인이 그들을 향해 연사를 갈기자 대부분이 순식간에 엎어져 자빠졌다. 그러나 소녀는 그 틈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코세인이 영상 장치를 켜자 소녀의 신호가 모래 속에서 잡혔다. 그 모습은 마치 땅 속을 헤엄쳐가는 것 같았다.

"이런, 씨발!"

코세인의 욕지꺼리를 뒤로하고 드디어 바다에 접한 소녀가 기쁨의 함성을 지르더니 빠르게 헤엄치며 곧 분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공 크기의 쪼글쪼글한 알들이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점차 사지가 갈라져 나오며 사람처럼 변모했다. 개체들은 한 마리씩 태어날 때마다 몸 안에서 푸른 빛을 발산했다. 재단과 GOC가 잠깐 놓친 사이에 해안가는 일렁이는 푸른 빛으로 가득해졌다. 안개의 도시, 무진에서 별이 빛나는 하늘을 대신 선사해주는 것만 같았다.

"DC급 문명멸절 시나리오 발령.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반복한다, DC급…"

알파-88과 유리, 현장 주위의 모든 재단 인원에게 긴 경보음과 무전이 수신되었다. 발신 주체는 기계음 처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코세인이 다급하게 본대와 무전하려 애를 쓸 그때, 재단 고속정 네다섯 대가 해안가를 빙 둘러 이동하며 나타나 불상의 용액을 살포하기 시작했다. 알들의 푸른 빛은 사그라들었고 부화한 개체들은 비명 지르다가 형태를 잃어갔다. 이 사태를 대비해 마련해 둔 항미생물제제 수용액이었다.

죽어가는 동족들을 목격한 소녀는 괴음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 비명은 거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소녀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꿀렁거리기 시작하더니 근처의 바닷물을 자신에게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해류가 뒤집어지며 소녀에게로 빨려 들어가며 커져갔다. 처음에는 등대 정도, 그 이후에는 고층 아파트만큼 커졌다. 괴성이 들릴 때마다 파도는 심해졌고 소녀는 다가오는 파도를 전부 세워올려 자신의 껍질로 삼았다. 이제 소녀의 머리끝을 보려면 목이 부러져라 올려다봐야 했고, 그조차도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모래층과 어두운 그늘은 사라지고 푸른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수백만 마리의 반딧불이가 속을 비춰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계속해서 몸집을 불려갔다.

소녀— 아니, 이제 괴수라고 불러야 마땅할 그 존재는 팔을 뻗어 고속정 한 척을 집어들었다. 승조원들의 다급한 무전에 미처 답하기도 전에 괴수는 고속정을 양손으로 꽉 쥐어 단번에 두 덩이로 분질러 버렸다. 괴수가 고속정의 후미 쪽을 바다에 버리자 큰 파도가 일었다. 괴수는 격앙된 목소리로 포효했고,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은 이 압도적인 광경을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백마 상사가 야시경을 벗고 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장은 더 이상 항생제 용액을 구할 방법도 없었다. 있다고 한들, 저 거대한 생명체를 끝장낼 만큼의 양에는 턱도 없을 게 분명했다. T동의 제임스와 유리도, 엄폐 중이던 코세인과 GOC 타격조도, 시체들 틈에 숨어있던 리처드와 벨라도,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기여 성제가 모다들영 모다치영 삶이 어떵 그초록 이뜩하영 마뜩하멘…"

괴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미사일 하나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괴수를 향해 날아갔다. GOC의 전술 헬기가 발악적으로 발사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틈도 없었다. 괴수는 들고 있던 고속정을 집어던져 미사일에 맞췄고, 폭음과 화구가 괴수의 눈 앞에서 불꽃놀이를 펼친 뒤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상공의 안개에서 몇 개의 섬광이 다시 괴수를 노렸다. 미사일들은 각기 다른 크기의 나선 궤도를 그리며 모든 방향에서 괴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머리에 비운 지름이 쉬염 어거라 아룽 쉬염에 흘터… 가네 옷짓까장 나림 가뜨영…"

어느새 용오름 만큼이나 커진 괴수는, 몸에서 물결치는 파도를 뻗어 미사일들의 충격을 흡수해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무시무시한 속도의 미사일들이 이제는 물에 빠진 쌀알들처럼 보였다. 소녀가 힘을 주자 발사체들은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분해됐다.

"공격 실패, 유효한 타격 수단이 없다." 헬기 조종사 우드가 코세인에게 무전했다. "아무래도 본기는 좆된 것—"

괴수는 도망치려는 헬리콥터를 주먹으로 쳐 박살냈다. 꼬리가 부서져나간 헬리콥터는 발악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하며 바다에 떨어졌다.

"할락산 이슬이 섬오름더레 흘름 가뜨다."

괴수가 계속 주문을 외며 두 팔을 들어올리자 한순간 그 몸뚱이가 마치 용암처럼 끓어올랐고, 그 다음 순간 안개의 흐름이 바뀌어 괴수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순식간에 무진의 짙은 해무를 모두 자신의 몸에 끌어모으고 있었다. 괴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그 풍압에 몸을 가누기 힘들 지경이었다.

"소령님, 안개가 걷히고 있습니다!"
"저건 대체…?"

SCP-521-KO의 안개에 갇혀 있다가 비로소 거구가 시야에 들어오게 된 기선과 뮤-39도 입을 다물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상정을 초월하고도 더 나아간 그 존재 때문에 충격과 공황에 빠져 있는 목격자들을 괴수는 가볍게 무시하고, 끌어모은 수분을 바다에 되돌리면서 엄청난 해일을 형성해냈다. 파고가 괴수의 무릎을 조금 넘기는 이 해수 덩어리는 그러나 제64K기지를 포함한 광양만 해안을 초토화시키기엔 충분히 거대했다.

"쓰나미다!"
"해안에서 당장 벗어나라!"
"너무 가깝습니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그디의서 하늘님이 복을 시기영― 어거라 영생이구나."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코앞에서 발생한 초대형 해일은 빠른 속도로 그들의 눈앞까지 치달아 왔다. 절망과 발버둥, 체념, 사명감, 의지. 그 모든 것이 해일 앞에서 의미를 잃으려는 순간, 소녀는 움직임을 멈췄다. 폭풍이 사그라들고 파도는 잠잠해졌다. 드높이 치켜들었던 해일도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식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모두가 정신을 차리려 애쓸 때 리처드는 얼빠진 표정으로 해안을 살폈다.

잠잠해진 괴수의 뒤편에서, 작은 실루엣 하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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