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타주

카에스틴은 집무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책상에 놓인 서류는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펜이 서류에 선을 여기저기 남기고 있었다. 그 때, 갑작스레 날카로운 신호음이 집무실의 정적을 깼다. 카에스틴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정보수집관입니다. 긴급한 일입니다. 당장 뵈어야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게.”

그는 비서에게 문을 열라고 지시하기 전에 기지개를 폈다. 반란과 전쟁을 하니 마니 하는 문제로 졸지에 퇴근도 못하고 이렇게 집무실에 쳐박혀 있어야 하다니. 물론 나름 고위직이니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차라리 현장 요원일 때가 더 나았지. 그 때는 사는 게 일하는 거였으니까 아무 때나 골프를 쳐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뭐 퇴근하면 잠잘 시간도 부족하니 참. 그런 망상으로 잠깐 정신을 팔고 있을 때, 신호음이 다시 울렸다. “급한 일입니다. 차장님. 지금 당장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문이 열리고 정보수집관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잽싸게 집무실 벽에 걸린 TV로 다가가 서버를 연결하더니, 곧 화면 하나를 띄웠다.

“한국 지역사령부 본부 감청 자료입니다. 실시간으로 스트리밍되고 있고, 지금 방송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카에스틴은 얼굴을 찌푸렸다. “잠깐만. 우리가 한국 재단을 왜 신경써야 하나? 그건 내부 보안부 소관이잖나. 그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는 지금 반란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이것까지 맡으라는 건가? 그쪽 2차장한테 내가 좀 말을 해야겠는데.”

“어, 사실 내부 보안부 2차장께서 정보국에서 처리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지금 한국에 있는 내부 보안부 요원들이 죄다 추방당했다는군요. 들어보시면 압니다.”

남자가 TV에 연결된 컴퓨터를 다시 조작했다. 곧 낭랑한 목소리가 TV에서 나왔다.

“이에 따라, 제가 O5 평의회와 관리부를 대신하여 지금부터 대한민국 지역사령부의 모든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한국 재단의 모든 인원들은 제 지시를 따라 주십시오. 그 외 어떤 인원의 지시라도, 설령 O5가 직접 지시하더라도, 일단 거부하고 저에게 알리십시오.”

“저거…노래마인 지휘관인가?” 카에스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무슨 소리지? 지금 실제 상황이라고?”

“지금 가니메데 프로토콜이 그쪽에서 발령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새롭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TV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지금부터, 한국에 전면적인 봉쇄를 선언하겠습니다. 어떤 해외에 있는 재단 인원도 제 명의의 허가 없이 한국의 재단 시설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만약 재단이나 다른 요주의 단체의 비행기가 한국 영공으로 들어온다면, 경고하고 격추하십시오. 만약 재단 소속 인원이 한국 영토로 입국한다면, 구금한 뒤 추방하십시오. 모든 인원은 제 지시가 있기 전까지 본인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이상의 지시사항은 여러분의 안전과 지역사령부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오, 젠장.” 카에스틴이 머리를 싸맸다. “저 지휘관은 왜 뜬금없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군. 이 타이밍에 이렇게 절묘할 수가. 국경 봉쇄하고 한국 재단을 자기 걸로 만든 거잖아. 미쳐버리겠네.”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내부 보안부 요원들은 전부 제압당했다고 합니다. 무인 수송기에 실려서 일본으로 가고 있다고 하는데요.”

“잠깐만.” 카에스틴이 머리를 싸맨 손을 풀었다. “내부 보안부 요원들이 제압당했다는 거지, 맞지? 한국 국가 정보국이나 기지 정보과는 멀쩡할 거 아니야. 정보국 요원들을 죄다 내쫓으면 그쪽도 완전히 마비될 테니까. 그렇지 않나? 제아무리 가니메데 프로토콜을 내렸더라도 우리 광역 정보국이 명령하는 걸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할 테지.”

“어…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떤 명령을 내릴 생각이신지…”

“일단 한국 재단에서 자체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을 빼앗아야겠지. 거기에 주요 인물 몇몇도 보내면 금상첨화고. 어차피 그 쪽에는 막아낼 병력이 별로 없어. 기껏해야 고든 소령 부대뿐인데, 그 쪽 부대는 지금 70%는 평의회에서 징집해 갔으니 상관없겠지.”

그렇게 말하고 카에스틴은 소매 속에서 열쇠를 꺼내 서랍장 하나를 열었다. 조심스럽게 때가 잔뜩 낀 붉은 수첩 하나를 꺼내들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던 그는 한 페이지에서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짚었다. 그 다음 그는 수첩을 보며 전화기의 버튼을 눌러대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게 정보국의 복잡한 명령용 코드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또 그게 자신의 보안 등급을 넘어선 것이라는 것도. 하지만 호기심에 그는 물었다.

“뭡니까, 지금 쓰시는 그 코드는?”

“사보타주.”


란란맥 요원과 이트륨은 비행기를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이트륨은 아무 말 없이 비행기 뒤쪽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란란맥은 비행기를 운전하며 혼자서 재잘거렸다.

“정말 힘들었죠, 안 그래요? 개인적으로 알래스카는 정말 갈 데가 못 되는 것 같아요. 출장비가 좀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요리도 허가가 안 되고 원. 그렇다고 햄버거 파는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음식을 먹지 않으니 모르겠군.”

“아, 네. 뭐. 말한 내가 바보죠. 이제 그리운 한국으로 돌아온 것 같은데. 이제 한국 관제센터랑 연결이 되겠죠?” 란란맥이 계기판의 버튼을 눌렀다. 칙칙대는 전자음이 들렸다. 램프에 등이 들어오고, 란란맥이 헤드폰에 연결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관제센터. 제29기지에 착륙 요청한다. 여기는 시그마-2. 29기지에 착륙 요청한다.”

칙칙거리는 소리가 답했다. “불허한다. 착륙할 수 없다.”

란란맥이 얼굴을 찌푸렸다. “어… 무슨 소리인가? 착륙할 수 없다니? 통보를 안 받은 거라면…”

“지역사령부 지휘관의 명령이다. 즉시 영공을 떠날 것을 명령한다. 반복한다. 즉시 영공을 벗어나라.”

이트륨이 조종석으로 다가와 마이크를 뺏었다. “여기는 시그마-2. 제29기지에 착륙하겠다. 모든 일은 착륙 후에 해결하도록 한다.”

“착륙을 시도하면 격추하겠다. 지역사령부 지휘관의 명령이다.”

란란맥이 걱정스럽게 이트륨을 돌아보았다. 그 때 비행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레이더 감지 경고인데요. 우리 지금 사격관제용 레이더에 포착되고 있어요. 아무래도 저쪽에서 진짜로 격추해 버릴 것 같은데…”

“그럼 우리도 다시 쏘면 되지 않나?”

란란맥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마이크를 빼앗고 관제센터에 말했다. “알겠다, 관제센터. 일단 따르도록 하겠다. 교신 종료.”

이트륨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디로 가겠다는 건가? 연료가 충분하지 않다.”

“뭐, 일단 러시아 지부로 가죠. 한국 영공만 안 들어가면 되니까 중간에 연료 수급쯤이야 할 수 있을 테니.”

그렇게 그 둘은 비행기를 돌려 러시아 지부로 이동했다. 그 비행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샐리 박사는 옥상 주차장을 종종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가뜩이나 크리스마스여서 기분이 영 그랬는데, 지금 직원용 인트라넷에서 발견한 이 소설은 더 가관이었다. 아 물론 본부에도 One Bad Mother인가 뭔가 하는 게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녀에 그레이스? “가뜩이나 추운데 손발이 제대로 오그라들 것 같구만.” 박사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차로 향했다. 가서 맥주나 마시며 크리스마스를 때울 생각이었다. 크리스마스라고 또 사내연애나 하는 연구원들은 휴가 쓰고 나갔으니 딱히 할 일도 없을 테고. 가니메데 프로토콜이 지금 발령되었더라도 없던 변칙 개체가 생겨나는 건 아니니까.

그 때 갑작스레 거친 엔진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자 새까만 차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채 움직이기도 전에, 그 차는 그녀의 정면에 멈춰섰다. “정보국 작전수행차량?” 샐리 박사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그 차의 문이 드르륵 하고 밀리며 열렸다. 차 안은 이상할 정도로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불쑥 그 안에서 총을 쥔 손이 나왔다. 앗 하는 찰나, 총에서 불꽃이 두 번 튀었다. 뺨에 피가 튀는 걸 느끼며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 차 문은 다시 닫혔고, 순식간에 주차장을 벗어났다. 샐리는 이를 악물었다. 쇄골이 부서진 것 같았다. 떨어진 핸드폰에서는 누군가가 외쳐대는 소리가 들렸다. “샐리 박사님? 지금 정보국 요원들이 미쳐 날뛰고 있어요! 다 때려부수고 지금 여기 난리났다고요! 당장 와주세요!”

“젠장… 나도 알겠거든. 나도 지금 난리났거든.” 그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무언가 이상한 직감이 들었다. 그냥 정보국에서의 돌발행동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더 큰. 기지에서 깽판을 치고 거기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을 한다? 지금 노래마인이 모든 시설의 통제권을 쥐고 있어야 하는데?

그녀는 핸드폰을 집어들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피가 눈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힘겹게 발걸음을 떼어놓으며 가까스로 그녀는 차에 타 시동을 걸었다. 재단 내에서 공격을 받은 이상 누구를 신뢰하는 건 위험한 짓이다. 아무래도… 다른 쪽에 도움을 청해야 할 듯 싶었다. 옛날의 인맥을 의지해야 할 때였다. 핸들 위로 그대로 엎어질 것만 같았다. 어질어질한 정신을 애써 다잡으며, 샐리 박사는 주차장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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