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보트가 해변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들어왔다. 물이 얕아져 구명보트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정도가 되자 타고 있던 네 명은 내려서 걸어서 해변으로 나왔다. 넷 모두 옷이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카일리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흠뻑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미, 미…치게 춥군요, 27기지는 여기서 한 몇백 미터만 가면 도착할 테니 빨리 어떻게든 옷이라도 갈아입어야겠는데. 아, 그런데 그 기지에서 우릴 받아들여 줄지는 어떻게 알죠?”
“그거야 일단 가서 생각해 봅시다. 어쨌든 거기도 지역사령부 소속 기지 아닙니까.”
몇백 미터쯤 걸어가자, 반듯하게 직선으로 파인 진입로가 보였다. 진입로의 양 편에는 나무들이 줄지어 심어져 있었다. 나무의 얼마 남지 않은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나무 가지가 한 두 개씩 휘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밧줄이 매달려 있었다. 그 밧줄 끝에는 재단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매달려 있었다. “오 맙소사.” 넷 모두가 멍하니 나무들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나무마다 27기지 직원들이 목매달려 있었다. “여기 뭐가 어떻게 된 거죠?”
“구명보트 타고 오면서 들었을 텐데요. 네탈시포라는 자가 지금 중국 전역을 휩쓸고 다니고 있다고.” 풀그림이 침착하게 답했다.
“하지만 이건 말도 안 돼요. 네탈시포 사제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건 일주일도 안 됐어요. 그 자가 재단 기지를 이렇게 초토화시킬 수 있을 리가..”
“광신자들은 깜짝 놀랄 일도 해낼 수 있는 법이죠.” 풀그림이 중얼거리고 진입로 옆을 따라 기지로 향했다. 기지는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외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입구에 있던 초소는 피범벅이 된 채로 탄피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나마 온전히 서 있는 외벽 조각에는 재단 로고가 거꾸로 그려져 있었다. 카일리가 붉은색 페인트로 그려 넣은 로고를 만져 보았다. “이게 뭐죠? 뭘 의미하는 거지?”
“아무 의미 없는 상징일 걸. 십자가를 거꾸로 그려놓고 적그리스도 상징이라고 하는 것처럼. 사이비 종교들이 흔히 하는 짓 있잖아.” 하사드가 그쪽으로 다가가며 답했다.
외벽 안쪽으로 들어가서 보이는 기지의 모습 역시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보안카드로 열게 되어 있는 문은 죄다 강제로 비틀어 열어 놓았고, 격리실도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었다. 하사드가 격리실 문 옆에 있는 피묻은 명패를 문지르며 말했다. “격리실까지 비어있다는 건 아주 제대로 당했다는 소리인데, 차량이나 식량 같은 게 남아있기는 할까요?”
“확실히 그런 불안감이 들기는 한다…만.” 풀그림이 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기지에 차량 한 대쯤은 남아 있을 것이고, 식량이나 비품은 패닉 룸에 가보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27기지 패닉 룸이 어디인지는 알아요? 난 이 기지 와 본 적 한 번도 없는데.” 카일리의 말에 네 명 사이에서 침묵이 감돌았다.
즈소 연구원은 패닉 룸의 잠긴 문을 점검했다. 평소에는 직원 휴게실로 쓰이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철문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더 이상 문을 비틀어 열려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요원 하나가 구석에 웅크려서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말했다. “이제 끝났어요. 전부 다. 밖에서 비명소리 들었잖아요. 기지가 완전히 무너졌어요. 더 이상 비명소리도 안 들려. 다 죽었어. 전부 다.”
즈소가 요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침착하게. 천천히 숨 쉬어요. 천천히. 우린 지금 패닉 룸에 있는걸요. 여긴 안전한 곳이고. 걱정할 건 없어요.”
요원의 호흡이 천천히 안정되어 갔다. 완전히 진정되자 즈소가 일어서서 옆에 있는 연구원에게 요원을 맡기고 방을 계속 확인했다. 전력이나 수도는 완벽했고, 비품 창고에 있는 식량 역시 충분했다. 문제는 자신에게는 여기를 잠가버릴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권한이 있는 기지 관리자나 다른 이들은 죽었고, 원래대로라면 계속 접근 권한이 넘어가야 하겠지만, 재단 시스템이 나가버린 지금은 불가능했다. 만약 누군가가 강제로 열려고 한다면,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그 때 멀리서 무슨 소리가 메아리치는 게 들려왔다. 즈소 연구원이 철문에 귀를 바짝 대고 소리를 들어보았다. 흐릿해서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말소리였다. 즈소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자신과 같이 이곳 패닉 룸에 있는 사람은 둘. 조금 전까지 공황장애로 움직이지도 못하던 요원에, 그 요원을 챙기고 있는 연구원. 누군가가 공격한다면 방어할 수 있는 사람뿐은 그녀뿐이었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말소리가 완전히 철문 밖까지 다가오고 철문이 열리는 찰나, 즈소가 의자를 집어들고 휘둘렀다.
“워우!” 철문이 열리자 막 들어오던 하사드가 의자를 피하며 소리질렀다. “조심해요!” 즈소가 의자를 엉거주춤하게 내렸다. “하사드 씨?”
잠시 후, 이들은 패닉 룸에서 다시 직원 휴게실로 돌아간 방에 의자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기지를 점검하러 나가있었던 즈소 연구원이 돌아와 커피를 한 잔씩 들려주며 물었다. “그래서, 이 기지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하사드 씨가 있는 103-Γ01기지도 공격당한 건가요?”
“공격한 사람은 다르지만, 공격당하기는 했죠. 그런데 왜 지역사령부와는 연락을 끊은 겁니까?”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즈소가 커피잔을 들고 자리에 앉으며 답했다. “평의회에서 지역사령부를 공격하겠다고 나선다면, 평의회를 적으로 돌리느니 지역사령부를 적으로 돌리고 이 기지라도 건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뭐? 그게 무슨-” 고디스가 발끈했지만 풀그림이 제지했다. “무슨 얘기인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기지 상황을 보아하니, 평의회에서는 이 기지를 버린 것 같습니다만. 이제라도 우리를 돕는 것 어떻겠습니까?”
즈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확실히 그런 것 같군요. 기지 관리자분이나 제 상관 분들도 다 안 계시는 상황이니, 지금이라도 아군을 만드는 게 좋겠죠. 그래서 무슨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거죠?”
“제5기지로 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차량, 식량, 자원. 최대한 빨리 말이죠.”
“알겠어요.” 즈소 연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찾아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