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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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디흐씨, 11번 부스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오후 5시 45분에 니나 민디흐는 자신이 설계한 전시장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공간괴리? 평행공간선과 교착지점, 이중 나선형 거품차원 안전확인. 시간 안전성? 타키온 편향성 왜곡장 안정화 확인. 현실성? 현실성 순환 체계 안전확인.

"민디흐씨, 들리십니까? 민스키폴로토프씨 예술품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니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시회 상태는 꽤 괜찮았다. 진행도 막히지 않았고 VIP들의 반응 또한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까지 인명피해는 총 9명의 평론가 밖에 없었다. 3명은 유로파의 바다에 수장당했고 1명은 인간형 의사 환영체에 빙의되었고 2명은 개념적으로 자기 자신을 상실했다. 나머지 3명은 토막 나거나 잡아먹혀 버렸다. 어쨌든 이 정도면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모두 의도된 것이 아니라 안전수칙 미준수로 인한 사고였으며 평론가라는 자들이 죽는 일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문제였다. 사실 이 평론가들은 토끼굴 속의 토끼 같아서 아무리 죽어나가도 계속해서 토끼들은 굴 밖으로 튀어나오듯이 평론가들은 어디선가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 토끼굴을 굳이 뒤집어엎으려는 자는 없었다.

니나는 모든 사항을 다 검토하고는 손목시계를 봤다. 오후 5시 49분. 그러던 중 문득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발견했다.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 잡생각으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쩌면 오늘이 본인의 마지막 날이라서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달리 해결책이 없었기에 그녀는 그냥 양치기가 자신의 양 떼를 몰고 오는 것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큐레이터는 36명의 멋진 정장과 드레스를 입은 관람객들-미국인, 소련인, 영국인, 프랑스인, 벨기에인, 이탈리아인, 조지아인, 우크라이나인 등 인종과 출신 국가는 다르지만 크게 본다면 결국 이들은 자본주의의 돼지와 노멘클라투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좀 더 크게 보면 결국 다를 바가 없는 이들이다-과 8명의 안전요원을 이끌고는 10번 부스에 도착했다. 사실 이들은 평범한 관람객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방금 전 9번 부스에서 라파흐의 '자살하는 남자'라는 작품을 보고는 일종의 자아도취 상태에 빠져 흥분하고 있었다. 흑색현실에 갇힌 한 남자가 공포에 질린 채 달려가다가 종착 지점에 도착하고는 절망에 빠져 광기롭게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기는 일종의 행위예술로 구경하는 이들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하는 아주 훌륭한 예술품이었다.

그렇겠지. 아주 훌륭한 예술작품이겠지. 니나는 생각했다. 분명 따사로운 햇살 아래 벌레를 가지고 재미나게 노는 법 중 하나는 돋보기를 들이대는 것일 테니까. 이와 동일 선상에서 이들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남자의 최후의 순간 하나하나를 들여다보았다. 남자가 리볼버를 손에 쥐고는 입안에 물었을 때 그들은 곧 눈앞에 펼쳐질 순간을 기대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리고 마침내 방아쇠가 당겨지고 남자의 피와 살점과 뇌수가 길바닥에 흩뿌려졌을 때 그들은 손뼉을 치며 이런 예술품을 고안한 예술가를 칭찬했다. 하찮고 열등한 종자들은 이런 식으로 공포에 질리고 이런 식으로 죽어 나가야지 높은 곳에서 이를 구경하는 이들이 우월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라파흐의 작품은 이 관람객들의 우월감에 대한 끝없는 욕구를 아주 훌륭하게 채워주었다.

그와 동시에 일부 평론가들은 이 VIP들의 공간과는 별개의 평행공간선-일반 관람객 전용 통로이다-에서 "자살하는 남자"를 두고는 안경 코 받침을 올리고는 펜대를 놀렸다. "자살하는 남자"는 '초월적인 공포와 절망, 그리고 그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붕괴를 매우 단순한 장치를 통해 구현해낸 작품' 이라고.

"민디흐씨, VIP들의 경로를 바꿔야 합니다. 빨리 확인 좀 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번 작품은 게릭 엔드릭슨씨의 작품으로 "인간 신체의 구조적 변화"라는 작품입니다. 먼저 이 작품을 보시기 전에 이 고글들을 써 주시겠습니까? 네, 그거 맞습니다. 모두 쓰셨나요? 불편하신 분은 없으신가요? 알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 고글들은 시력이 안 좋으신 분들을 위해 자체 시력 보강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어지럼증 보완책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토나 어지럼증이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나 어지러우시다면 언제든지 고글의 전원을 끄시고 벗으셔도 됩니다. 모두 준비되셨나요? 이제 고글의 전원을 켜주시길 바랍니다."

10번 부스에는 무정형 고정 받침대에 한때 인간이었던 여성의 신체가 기하학적인 형태로 놓여져 있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그녀의 일부 피하지방층과 신경계와 귀와 안구가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해부도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직 살아있었다.

"모두 보이시나요? 네, 아주 멋지죠? 저 무지갯빛이 보이십니까? 맞습니다! 놀랍게도 이 여성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엔드릭슨씨가 아주 수고하신 작품이지요. 여러분이 지금 보시고 계신 것은 바로 이 여성의 신경 다발에서 일어나는 이 전기신호들을 보고 계신 겁니다. 아름답지 않나요?"

아름답기야 아름다웠다. 여성의 신경계는 끊임없이 전기신호를 주고받았으며 그에 따라 고글은 그 전기신호를 오색찬란한 색의 향연으로 바꿔 보여주었다.

"게다가 아직 살아있는 상태라 생각을 전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금 여러분을 보고 듣고 있는 상태랍니다! 여기 이 눈이랑 귀가 보이시나요? 안녕하십니까, 이름 없는 여성분? 아 이런. 이제 이분은 입이 없으셔서 대답을 하지 못하시는군요. 하지만 여러분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 거 같네요."

큐레이터는 이어서 그들에게 끝 부분이 빨갛게 칠해진 은색 막대를 나눠주었다.

"자, 지금 여러분이 지금 받으신 것은 '통각 막대'라는 것입니다. 여기 빨갛게 칠해진 부분으로 살갗을 건드리시면 전기 충격에 준하는 고통을 느끼게 된답니다. 서로 건드리시지 않게 조심해주세요. 엔드릭슨씨의 이 예술품이 대단한 이유는 단순히 평면적인 관점에서만 이를 구경하는 것이 아닌 여러분도 이 예술에 참여하실 수 있게 설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엔드릭슨씨의 다른 전시품들이 7개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시는 대로 이 전시품들을 건드려보세요!"

니나가 알기로는 엔드릭슨의 예술품을 만드는데 든 재료들 중에는 8살짜리 여자애도 있었다. 분명 저 전시품들 중에 있을 것이다. 곧이어 관람객들은 웃으며 엔드릭슨의 전시품들을 그 은색 막대로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이 전시품들이 살아있다는 것과 그 고통을 느낀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전시품들의 피하지방층과 신경 다발을 직접 건드리면서 그들 눈앞의 색의 향연이 움찔거리듯이 바뀌는 것을 즐겼다. 니나는 한 귀부인이 작은 전시품의 탁구공 같은 안구를 막대로 건드리면서 웃는 소리를 듣고는 뒤돌아섰다.

"민디흐씨, 안 들리십니까? 게오르기 민스키폴로토프씨 전시품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빨리 확인 부탁드립니다!"

일하러 갈 시간이다.

니나는 관리자 전용 통로에서 11-β 교착지점을 통해 11번 부스로 이동하고는 손목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오후 5시 46분. 시간은 다행히도 멀쩡하게 굴러갔다. 니나의 눈앞에는 분명 급하게 뛰어와서 얼굴이 8월의 발렌시아 토마토처럼 벌게진 조지아 출신의 늙은 예술가와 짜증으로 얼굴이 구겨진 양복쟁이가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 일반 관람객 통로에선 한 색안경을 낀 평론가가 자신의 노트에다가 무언가를 휘갈기고 있었다.

"아이고 니나, 드디어 와줬구만. 보다시피 사소한 문제라네, 그러니까-"

"민디흐씨, 도대체 어디 있으셨던 겁니까? 왜 무전을-"

"게오르기 표도르비치 민스키폴로토프씨."

"아, 니나,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지 말아 주게.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

게오르기 표도르비치 민스키폴로토프의 옆에는 마치 녹아버린 케이크 같아 보이는 한때 식물이었던 예술품이 놓여져 있었다. 존재하기를 거부하는 듯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민스키폴로토프씨, 무슨 문제가 발생했다는 거죠?"

니나는 짜증을 담아 게오르기에게 질문을 던졌고 게오르기는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 대한 예술가의 애착을 담아 니나에게 돌려주었다.

"아마도 불확정성이 깨지면서 논리 체계가 붕괴한 거 같네. 타키온 폭주는 막았지만.."

"엔트로피 폭등 현상을 막으려고 하다가요?"

"그냥 안전장치였을 뿐이네. 이런 사태를 막으려고 했을 뿐인데.."

"제가 보기엔 '그냥 안전장치'로 보이진 않는데요, 민스키폴로토프씨. 지금 와서 이를 되잡기는 불가능해 보이는데요?"

"너무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좀 말아주게. 시간을 조금만 줘. 인과율만 조금 손보면 원래 형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건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니나는 슬슬 억지를 부리는 이 늙은 예술가에게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고 둘 옆에 있는 양복쟁이는 초조함이 아닌 피곤함을 느꼈다.

"잘 알죠. 인과율을 조금만 손보다가 빅토르 라오마니노프가 사라져버린 것도 잘 알고 있죠."

그리고 게오르기는 눈앞의 징조를 보지 못하고 열심히 항변하였다.

"그 비열한 놈은 나랑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지 않나!"

그리고 클라이맥스.

"그럼 게오르기 당신이 여기 인과율을 손보는 게 저랑 이 전시회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에요? 제가 왜 여기 예술가 노선을 정상 시간대에서 3분 정도 느리게 설계한 줄을 모르시는 거에요? 제가 왜 이 전시회에 시간 특이점을 8개나 박은 이유를 정말 모르시는 거냐고요!"

"..니나, 오늘이 자네의 마지막 날이라서 더 신중을 기하고 있는 건 나도 잘아네. 내가 왜 그걸 모르겠나? 나도 내 예술품이 이리될 줄은 몰랐어. 이런 일로 자네를 방해한 거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네. 그렇지만 이번 전시회에 자네만 힘 쓴 게 아니라는 건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이 늙은 예술가가 이걸 만드는데 들인 공을 조금만 이해해줄 수 없겠나?"

"..이런 말을 해야 해서 유감이에요 게오르기씨. 하지만 시간 가지고 작업하기엔 시간이 없는 거 같네요."

니나 민디흐는 반대편 통로를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며 큐레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나는 인간이 객관적으로 시간을 규정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주관적으로는 단 한 순간도 시간을 통제한 적이 없었다는 인류 역사의 진리를 되새기며 큐레이터에게 신호를 보냈다. 비록 반대편의 다른 공간에 있었지만 큐레이터는 그 신호를 보았다.

공간이 바뀌었고 큐레이터와 그의 무리는 멀어져 갔다. 양복쟁이는 그의 얼굴을 폈다.

"자, 다음 전시품은 유르카스 란티모스씨의 '순환'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는 고야의 '제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와 에리식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는데요.."

니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46분. 영 좋지 않다. 니나는 실망한 기색이 역려한 늙은 예술가에게 돌아섰다.

"게오르기씨, 아까 화낸 건 미안해요. 정말로요. 저도 당신 작품이 잘 됐으면 했었는데.."

게오르기 표도르비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닐세, 자네가 사과할 필요 없다네. 잘못 만들어놓고는 자네에게 억지를 부린 내가 사과해야지."

"끼어들어서 미안하지만 여기 공간이 조금 불안정해 보이네요. 왜 초침이 46초에서 51초를 벗어나지 못하는 거죠?"

"당연히 억지로 이 공간이 분리되었으니까 그렇죠, 양복쟁이씨. 이제 여기서 나가죠."

그는 미소를 지었다.

"15년째 양복쟁이라고 부르시는군요."

"그럼 댁 같으면-"

공간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식당 한가운데의 분수대에 유리와 은으로 이루어진-그리고 약간의 백금 장식까지-그랜드 피아노가 중앙의 제니스 샹들리에의 수정 빛을 받고 빛나면서 스스로 라흐마니노프의 환상적 소품 3번을 연주하고 있었다. 은은한 샹들리에의 수정 빛이 유리 피아노에 닿으면서 산산이 부서지고 그 부서진 빛의 파편이 다시 분수대의 물에 물결치면서 식당 한가운데에 마치 백합화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 주위로는 무희를 연상시키는 웨이터들이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날렵한 속도로 막힘없이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이들은 검은색과 빨간색이 적절히 어우러진 제복을 입었는데 이런 색 조합으로 그들은 절도 있게 화려해졌으며, 동시에 손님들에게 우월감을 느끼게 하였다. 한편의 멋진 그림과 같은 장면 이었지만 니나는 아무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이 날 싫어해서 이럴까, 아니면 내가 세상에게 닳아서 그럴까? 니나는 문뜩 궁금해졌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어차피 두 생각 모두 정답이 아니었다.

니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게오르기 표도르비치씨가 홀로 원형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이 그녀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는 그녀를 보자 활짝 미소를 지었는데, 보아하니 그녀를 기다린 듯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입을 열었다

"이 늙은 식객의 외로운 식사에 함께해줄 수 있겠나?"

본인이 아무리 냉소적이라 하더라도 남에게 냉소적으로 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기꺼이요." 니나는 웃으며 자리에 합석했다. 아무튼 이 정도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곧이어 게오르기는 르카치텔리 와인을 주문했다. 니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고향을 추억하기 아주 적절한 와인이네요."

"적절하고 말고, 하지만 이젠 추억만 하진 않을 생각일세. 자네도 한잔하겠는가?"

"고마워요, 그런데 조지아로 돌아가시려고요?"

"일종의 안식년이라고 하겠네. 사실 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말일세."

게오르기는 웃음을 지었다. 아까와는 달리 진정으로 웃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모든 지각 있는 사회적 동물은 회귀본능이 있어. 적절한 때에 적절한 곳, 적절한 사람들에게 돌아갈려는, 그러니까 집으로 돌아가려는 의지 말일세. 이제는 더 이상 돌아가는 걸 늦춰서는 안 될 거 같아서 말일세. 제대로된 므츠바디를 고향에서 먹고싶어서 기다릴 수가 없을 지경이라네."

"좋은 생각이네요." 니나 또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그러나 니나의 머릿속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축하의 말을 하질 못했군. 15년 동안 수고 많았네." 게오르기는 잔을 들었다.

"뭘요, 오히려 더 호강하면서 일했는걸요." 니나와 게오르기의 잔이 쨍하는 소리와 가볍게 부딪혔다. 그와 동시에 식당 내 만찬의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제1세계와 2세계의 때 이른 화합이라.. 니나는 만찬을 둘러보았다. 웨이터들은 이제 오크로시카와 보르시, 오이 퓌레, 몽라쉐, 보르고뉴, 무크자니 와인등을 바쁘게 나르며 식탁 왼쪽에서 서빙을 하고 있었다.

게오르기는 만찬을 둘러보는 니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5년 전만 하더라도 생각지도 못할 광경이지 않나? 소련 연방과 서방 세계 예술가들의 공식 합동 예술전시회라.."

"요즘 분위기가 좋잖아요, 유한회사 나으리들이 가만히 앉아있을 리가 없죠. 몇 달 전에도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전시회가 한번 있었고 회사 간부들이랑 회담도 몇 번 있었다는데 아마도 노멘클라투라들 취향을 확인할 겸 했었나 봐요. 윗분들은 긴장 상태가 완화되면서 본격적인 시장 확대를 노리는 거 같아요."

그런 점에서 예술은 써먹기 좋은 카드긴 하지.."

게오르기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다시 화색이 돌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주문했던 우하가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니나가 주문한 라트비아 스튜 또한 나왔다. 우하에서는 전통적인 맑은 국물에 이질적으로 보일 정도로 고급스러운 상어살이 들어가 있었고 라트비아 스튜에는 돼지고기와 양파, 살구, 그리고 기타 등등 진귀한 재료들이 혼재되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었다.

"어찌 되었든 자네는 최선을 다했어. 오늘 전시회도 아주 훌륭했었어. 저 주체 못 할 머저리 예술가들도 잘 다뤘고."

보통 이런 식의 고급스러운 만찬은 그 고급스러움 만큼이나 일종의 엄숙함 또한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의 만찬의 대상은 정신 나간 예술가들이었다. 그렇기에 만찬의 분위기는 마치 시한폭탄처럼 무언가가 도사리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니나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전시회가 끝나면서 VIP들은 다른 곳으로 몰려갔고 어차피 니나의 할 일은 다 끝났다. 게다가 이런 곳에서 난장판을 벌일 경우 어떻게 되는지는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는 바였다. 내가 바로 그 산증인이지. 니나는 생각했다.

곧이어 그들의 테이블에 쑤구다이와 쁠롭 2인분, 쇠고기 스테이크가 각각 서빙되었다. 쑤구다이 접시 위에서는 적당한 냉기를 지닌 촉촉한 연어살 위에 쓸데없어 보일 정도로 정교하게 양파가 연꽃무늬로 곁들여 올려져 있었고 쁠롭에서는 향신료들이 쁠롭의 양고기와 소고기를 미(味)적으로 빛나게 했다. 미디움으로 구워진 스테이크에는 데이그라스 소스가 곁들여져 달콤한 윤기를 내며 잔잔한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니나 민디흐는 이 모든 광경 앞에서도 초점을 맞추질 못했다. 곧 그녀가 먹을 음식들 앞에 황홀함으로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보다는 조금 오래되고 본질적인 문제와 생각으로 그녀의 머릿속은 엉켜있었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곳, 적절한 사람… 그 모든 걸 다 잃어버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노잡이도 조타수도 항해사도 선장도 모조리 잃어버린 배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아니 어딘가로 갈 수나 있는 것일까? 니나는 자신이 침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니나, 자네 괜찮나?"

니나는 문뜩 정신을 차렸다. 사실 그녀가 그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니었다. 유리 피아노가 곡을 끝마치고 뒤이어 다음 협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네? 뭐라고 하셨었죠?"

게오르기는 방금 전까지 그의 입과 그릇 사이를 바쁘게 오갔던 포크와 스푼을 내려놓고는 손에 깍지를 쥐었다.

"자네가 괜찮은지 의문이 들어서 말일세. 혹시 몸 상태가 안 좋은가?"

"아, 아뇨. 전 아주 괜찮은걸요. 걱정 안 해주셔도 돼요."

게오르기는 손의 깍지를 풀고는 다시 스푼을 들고 쑤구다이의 국물을 먹으며 담백한 맛을 음미했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흠, 자네 얼굴을 보건대 아파 보이진 않은데 말이지. 근데 왠지 자네는 지금 불편해 보여서 말일세. 마치 무언가가 짓누르는 것처럼."

"전 정말로 괜찮아요."

"눈앞의 사람이 라트비아 스튜는 보드카를 들이마시듯이 맛은 뒷전으로 보내버리고 그 앞의 스테이크는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식사에 집중하질 못한다면 그 식사의 상대역으로서는 그 사람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네."

게오르기는 진지해 보였고 그의 일흔여덟 먹은 검은 눈동자는 니나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었다. 니나는 그의 눈동자를 피하고 싶었다. 그 눈동자는 범람하기 직전의 댐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방울 같았다. 왠지 토해내야만 할 것만 같은 거북한 느낌이 들면서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니나로서는 더 이상 그 눈동자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길어요. 우울하고 뒷마무리도 씁쓸하고요."

게오르기는 그의 잔에 르카치텔리 와인을 다시 채웠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었다.

"시간은 많고 식사거리 또한 넘쳐나고 아직 귀 또한 막히지 않았다네. 무언가 우울한 것이 자네를 짓누른다면, 또한 그것이 산 페르민 축제의 수소처럼 뛰쳐나가려고 한다면, 뛰쳐나가게 하세. 우울한 이야기는 담아두면 독밖에 되지 않네."

니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게오르기씨, 한낮의 떡갈나무 유랑극단에 대해 아시나요?"


« 이야기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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