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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솔리두스의 손길은 차갑고 메말랐지만, 민테는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는 그를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방 한가운데 놓인 화로 속에서 강렬한 불길이 타올라, 그 옆에 드러누운 민테에게 그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온기를 제공했다.
민테가 그녀의 흰 피부 위에 걸친 것이라고는 실크로 짠 얇은 검은색 가운 뿐이었다. 민테를 추위로부터도, 시선으로부터도 보호하지 못하는 그 옷은 분명히 솔리두스 같은 자가 민테를 멋대로 희롱하지 못하도록 막기는 커녕 아예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민테는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 사실이 그녀를 흥분시킨다는 점은 솔직히 인정해야 했다.
반대로 솔리두스는 아무런 부끄러움도 흥분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사무적인 태도로 민테의 턱을, 그리고 목을, 또 어깨를 자신의 손길로 전율하게 만들 뿐이었다. 민테는 그녀의 옆을 훑고 내려오는 솔리두스를 짐짓 무시하는 체하며,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숨기기 위해 누운 채로 화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온기가 그녀의 몸을, 냉기가 그녀의 정신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민테는 그 대비가 좋았다.
무관심을 가장하는 것은 헛된 시도였다. 솔리두스는 그가 민테의 몸에 손을 댈 때마다 그녀의 가빠지는 호흡과 미세한 진동을 느꼈으리라. 민테는 다급하게 손을 뻗어 솔리두스를 잠깐 멈춰세웠다. 그의 눈이 민테의 갈색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솔리두스, 잠깐만." 민테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아직 안 돼.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솔리두스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민테는 그의 황금빛 눈을 보며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불멸의 신들께서는 어쩌자고 저런 광채를 솔리두스의 눈에 담아주셨을까.
한편 그 광경을 방의 한 구석에서 바라보고 있던 중년 남성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민테에게 말을 걸었다.
"좋은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만, 자네, 지금 금화Solidus를 애무하고 있는 건가?"
흥분인지 쾌락인지 하는 것들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민테는 손에 들고 있던 반짝이는 금화를 화로에 던져넣은 뒤 일어나 앉았다.
"말은 바로 하셔야죠. 금화가 저를 애무한 거에요."
"이 도시에 그렇게도 남자가 없던가?"
"하여간 당신네 기독교인들 오지랖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민테는 투덜거리며 가운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지루하단 말이에요, 필록세노스. 가짜로 만든 밀회 장소에 올 지 안 올 지도 확실하지 않은 남자를 수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는 게 당신한테는 재미있을 지 몰라도, 저는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나도 재미있어서 하는 건 아니라네." 필록세노스가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견디는데요?"
"황제 폐하의 명령에 대한 충심으로 견디지."
"우엑."
"반응이 그게 뭔가." 필록세노스는 건성으로 답하고는 커튼을 살짝 걷어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왔군."
민테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로요?"
"그래. 전달받은 인상착의와 완벽히 일치하는군. 준비하게."
필록세노스는 그렇게 말한 뒤 창문을 다시 가렸다. 창문에서 새어들어오는 빛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화로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 서 있었던 필록세노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문 바깥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민테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킨 뒤 자신의 옷차림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긴장한 남자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민테는 문으로 다가가, 방문이 열렸을 때 그녀가 방문자의 눈에 조심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나도록 신경쓰면서 문을 열었다.
"정말 와주셨군요!" 민테는 입술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어서 들어와요, 마르키온. 화로에 불을 피워 놓았어요. 몸을 좀 녹이세요."
방 안에 들어선 마르키온은 민테의 말대로 하는 대신, 그녀의 얇은 가운과 그것이 덮고 있는 것에 시선을 빼앗긴 채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민테는 남자의 얼굴에 자신에 대한 어떤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 것을 발견하고 이 순진하기 그지없는 작자를 비웃었다. 물론 속으로만.
민테는 남자로부터 망토를 건네받아 옷걸이 용으로 벽에 박아둔 못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못 하나에 망토를 건 다음 몸을 돌렸다.
민테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마르키온이 성큼 다가오더니 그녀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민테는 순간 숨을 삼키며 몸을 긴장시켰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민테의 창백한 얼굴을 응시했다.
"저, 저기, 마르키온……" 민테는 상대의 박력에 압도당했다는 듯이 더듬거렸다. "뭔가…… 마실 거라도?"
마르키온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민테의 두 팔을 잡고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 민테는 두려움과 흥분이 섞인 표정으로 거칠게 호흡했다.
그러니까 마르키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가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민테가 보인 반응은 싹 다 가장이었다. 그것이 녹색당Prasinoi의 하수인인 이 남자를 붙잡는 제일 쉬운 방법이라 몇 주 전부터 그와의 밀회를 계획하긴 했지만, 이 야만스러운 작자를 애인으로 삼느니 차라리 솔리두스가 낫겠다는 게 민테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어쨌든 아름다운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여자와 같이 잘 수 있는 기회를 그의 눈 앞에서 빼앗는다고 딱히 마르키온이 불쌍하게 느껴질 것 같진 않았다.
곧 그가 겪을 불행에 대해 까맣게 모른 채, 마르키온은 민테의 턱을 잡고 그녀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마르키온의 입이 그녀의 입술에 닿으려는 순간, 필록세노스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마르키온의 어깨를 쳤다.
"이보게."
"뭐, 뭐야?" 마르키온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실수였다. 마르키온이 등을 보이자마자 민테는 옷걸이 옆에 놓인 작지만 단단한 몽둥이를 집어들고 마르키온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겼다.
몽둥이가 마르키온의 머리를 치는 둔탁한 소리에 이어 마르키온의 머리가 바닥을 치는 두 번째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민테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의 위에 올라타 두 손을 묶는 동안 필록세노스는 작은 의자 하나를 끌고 와 마르키온 앞에 앉았다.
"불편을 끼쳐서 참 미안하네." 필록세노스가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소개부터 하지. 나는 테살로니키의 필록세노스라고 하네. 그리고 지금 자네 위에 올라타 있는 사람은 내 좋은 친구인 민테 양이야."
마르키온은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얼굴 표정을 굳혔다.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알 것 없고, 요점만 정리하자면 자네는 황제 폐하에 대한 반역죄로 체포되었어. 어쩌다 스스로 반역자가 되었는지는 자네가 더 잘 알겠지. 반역죄에 대한 처벌은…… 뭐, 오늘 이 집에 들어오면서 본 햇살이 자네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게 될 빛이라고 하면 대략 감이 잡히실까?"
"내가 반역자라는 걸 안다면, 내 입을 쉽게 열 수 없다는 것도 알겠군." 마르키온이 대꾸했다. 얇은 가운만 입은 여자의 무릎 아래 깔려 있는 사내가 낼 수 있는 가장 강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물론 마르키온은 별 볼일 없는 사내였다. 감히 로마 황제를 상대로 역모를 계획하고 있는 마당에 생판 모르는 여자랑 한 번 자겠다고 제 발로 함정에 빠진 것만 봐도 뻔했다. 별 볼일 없는 사내의 입을 열게 만들기 위해서는 간단한 방법으로도 충분했다.
필록세노스가 눈짓하자, 민테는 마르키온의 위에 올라탄 그대로 팔을 뻗어 화로 옆에 놓인 집게를 집어들고 화로에서 뜨겁게 달구어진 금화를 꺼냈다. 처음부터 이런 목적에 쓸 계획으로 장작이 아니라 석탄으로 불을 피운 화로였기 때문에 금화의 열기는 그것을 직접 던져넣었던 민테조차도 흠칫하게 만들 정도였다.
민테는 집게 끝에 매달린 금화를 마르키온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마르키온, 입을 안 열면 이걸 당신의 목 뒤에 대고 누를 거에요. 뜨거운 건 둘째 치고 평생을 뒷목에 금화의 낙인이 찍힌 채로 살아야 할 거에요. 다른 사람들이 그걸 보면 당신을 뭐라고 생각할까요? 돈으로 살 수 있는 남자? 흐음."
마르키온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눈동자는 강인한 남자라는 평가를 듣기에는 너무 빠른 속도로 사방팔방 움직였다. 필록세노스는 측은한 표정으로 마르키온을 내려다보았다.
"굳이 입을 열지 않겠다면야 어쩔 수 없지. 일단-"
"아, 아닙니다. 열겠습니다. 열었습니다." 마르키온이 빠르게 대답했다.
필록세노스는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그래, 일단 우리 용건을 얘기하겠네. 우리는 자네가 녹색당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떤 인물에게 돈을 받고 심부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그리고 자네가 그 인물의 유일한 심부름꾼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심지어 심부름꾼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암호도 알고 있지."
"이,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마르키온은 매우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다는 몰라. 그 암호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니까." 필록세노스가 말했다. "그러니 대답해 주게. 자네에게 '니카'는 어떤 의미가 담긴 단어지?"
"그 마르키온이라는 사람, 진짜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인가 봐요." 민테가 말했다.
"형편없는 사내지." 필록세노스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다른 일을 하는 대신 부패한 원로원 의원들의 허드렛일이나 해 주고 있는 거겠지."
"아뇨, 제 말은 그런 허드렛일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급이 낮은 사람 같다고요." 민테는 그렇게 말하며 부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이 추운 날에 맨날 겨울 바다를 쳐다보는 것 같은 쓸데없는 짓이나 시키죠."
두 사람은 마르키온을 대기 중이던 동료들에게 넘기고 그가 실토한 정보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항만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두터운 로브에 따뜻한 망토를 걸친 필록세노스의 옆에서, 민테는 그녀가 방 안에서 입고 있던 가운의 반대쪽 극단이라 할 수 있는 옷차림을 하고 그를 따라 걸었다. 민테는 날씨가 좀 더 화창할 때 즐겨 입던 키톤이나 튜닉 대신, 풍성한 양털 옷에 파묻히다시피 한 채로 머리만 살짝 내놓고 있었다. 자락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털옷으로도 부족해서 다리에는 두꺼운 양말까지 신은 채였다.
다른 때였으면 그녀의 몸뚱이를 그런 추한 것으로 가릴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고 딱 잘라 말할 민테였지만, 1월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그것도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항만에 안일하게 망토 한 장만 믿고 나갔다가는 진짜로 죽을 수도 있었다.
"항만을 주시하라니. 대체 왜 그런 일을 시킨 걸까요?" 민테는 이빨이 제멋대로 부딪히는 것을 애써 진정시키며 필록세노스에게 말했다. "한겨울에 그 험악한 바다를 뚫고 멀쩡히 비잔티온으로 들어오는 배가 있다면 그 선장한테는 요나스도 한 수 접어줘야 할 걸요."
"요나스의 이야기를 뭔가 이상하게 기억하고 있군." 필록세노스가 대꾸했다. "요나스는 뱃사람이 아니라 그냥 승객이었네. 그것도 항해에 엄청난 걸림돌이 된 나머지 선원들이 직접 바다에 집어던진 사람이지."
"됐어요. 제국 최고의 마술사 앞에서 감히 고대 문헌을 인용해서 미안하게 됐네요."
"나는 마술사가 아니라 신비학자일세. 둘은 엄연히 다르지."
"그럼 제국 최고인 건 맞고요?"
"그런 무서운 소린 말게. 어디서 진짜 제국 최고의 신비학자가 누군지 얼굴이나 한 번 보자면서 찾아올 수 있는 거 아닌가. 정말 누가 찾아오면 난 자네가 멋대로 떠벌린 거라 일러바치고 그대로 테살로니키로 도망가겠네."
"저 당신 집이 정확히 테살로니키 어디에 있는 지도 아는데요."
"제기랄! 주여, 제 입을 용서하소서." 민테는 필록세노스가 황급히 입을 막는 시늉을 하는 것을 보고 키득거렸다. 그는 웃으며 민테에게 말했다. "꼭 배가 들어오는 게 아니더라도, 항만을 어떤 작업이나 거래를 위한 접선 장소로 정한 것일 수도 있네. 게다가 마르키온이라는 사람 자체는 쓸모없는 인간이지만, 어찌됐건 그 자는 '니카'를 암호로 사용하는 자들의 모임에 들어 있지. 어쩌면 마술사들과 면식이 있을 지도 몰라."
"그 암호라는 거, 전차경주 관객들이 허구헌날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응원 구호 아니던가요? 청색당Veneti이나 녹색당은 원래 전차경주 응원단에서 시작한 거잖아요. 그냥 그 무리들끼리의 인삿말 같은 것 아닐까요?"
"그냥 인삿말 같은 거였다면 벨리사리우스 장군께서 우리에게 연락하셨을 리는 없지 않나. 그분은 합리적인 분이시네. 휘하의 병사들만으로도 해결이 가능한 문제였다면 굳이 은비부대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알아서 처리하셨을 걸세. 그분의 정보원들에 따르면, '니카'의 무리 중에 우리 쪽에서 전달한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자들이 태반이라는군."
"그러니까 이 맥락에서 '니카'는 단순한 응원구호가 아니라, 예를 들자면, 황제 폐하를 적대하는 마술사들끼리의 표지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렇지."
민테는 그의 말에 무언가 덧붙이려다, 마치 자신이 떠올린 말에 스스로 놀랐다는 듯 잠시 멈칫했다. 그녀가 하려는 말을 대강 짐작한 필록세노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민테를 바라보았다.
"하긴, 저도 그 명단 보고 꽤 놀랐으니까요. 무자비한 기독교인들한테 박멸되지 않고 살아남은 이교와 이단 마술사들이 비잔티온에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어요."
디오니소스의 마지막 신녀는 그렇게 말하며 필록세노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비잔티온에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진 이후로, 수천 년간 이 도시를 지배하던 신들은 순식간에 추방되었다. 옛 신들의 숭배자들에게 있어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새로운 지배자의 명령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 명령에 따랐지만, 그러지 않은 이들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거나 도시의 일부를 불과 피로 장식한 뒤 죽었다.
신의 아들 크리스토스의 충실한 종이자 대언자인 로마 황제들은 대대로 이 신성한 도시에서 이교의 흔적을 말소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수십만 명이 사는 도시에서 한 명의 이교도도 남기지 않고 잡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살아남기 마련이었고, 또 그 살아남은 이들은 증오를 품기 마련이었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민테는 특이한 사례에 속했다. 수 년 전 황제의 명령에 따라 필록세노스가 은비부대를 창설했을 때부터 그는 어감부터 왠지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기독교인 마술사'들만 모아서 유의미한 전력을 보유한 부대를 만들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종교적 관용을 대가로 은비부대에 지원할 이교도 마술사들을 모집했을 때, 다른 신도 아니고 올림포스의 열두 신 중 하나가 그에게 손을 내밀 거라고는 필록세노스도 예상하지 못했다. 며칠 지나지도 않아 민테가 은비부대 본부에 홀연히 나타났을 때, 필록세노스는 그녀가 섬기는 신이 협상 테이블에 그토록 허심탄회한 태도로 나타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름 때문이에요." 민테는 그렇게 설명했다. "이방인을 사랑하는 자Philoxenos라는 뜻이잖아요. 우리는 당신이 황제와 독대한 기독교인들 중 그나마 제일 포용적인 태도를 보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 이름? 하지만……" 그때 필록세노스는 당황한 나머지 엉뚱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하지만, 어, 그러면 자네가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것도 자네 이름 때문인가?"
"제 이름은 별 거 없는데요. 그냥 들에서 나는 박하Minthe에서 따온 거에요. 그 왜, 고기 썩는 냄새 지울 때 쓰는 거 있잖아요."
"……그리고 님프의 이름이기도 하지. 그녀가 하데스의 첫 번째 아내라고 기록한 문헌도 있고."
"그래요? 그건 몰랐네요. 아무튼 계약 성립인가요?"
그 날 이후로 필록세노스는 민테를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 민테는 필록세노스의 제안에 처음으로 응한 이교도였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 찾아온 마술사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가진 신을 섬기는 사람이었으므로 필록세노스와 다른 이교도 마술사들 사이의 의견차를 조율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테는 마치 필록세노스의 이름이 모든 것에 대한 보증이 된다는 듯이 스스럼없는 태도를 그에게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디오니소스가 민테를 은비부대로 보낸 진짜 이유를 눈치채게 되었다.
어쨌든 디오니소스는 동급의 존재들 중에서 가장 젊은 신 답게 현실주의적이었다. 다른 나이 많은 신들이 투덜거리고 분통을 터뜨리는 동안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크리스토스가 수립한 정권이 향후 수백 년 간은 유지될 것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이득을 챙기기로 한 것이다. 그런 현실주의적 시각 때문에 옛 신들의 다른 모든 악덕을 거의 배제하는 데 성공한 기독교인들조차 결국 음주와 탐닉의 늪은 메워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으리라.
포도주의 신에게 그 정도면 비잔티온에 마련한 기반을 지켜낼 수 있는 토대로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면 비잔티온에 주어진 새 이름은 또다른 이름으로 대체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크리스토스의 추종자들을 전혀 반기지 않는 새로운 지배자가 이 땅에 발을 디딜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계획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신녀인 민테는 그 계획에 적극 협조하기 위한 도구로 필록세노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필록세노스가 제공한 기회에 진심으로 감사했고, 필록세노스도 둘 사이의 협력에 이전의 원한 관계가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민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비잔티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항만에 도착한 민테는 생각을 바꿨다. 어쩌면 마르키온이 받은 임무가 그 정도로 별 볼일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필록세노스는 항만에 모여 있는 군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 해서 이삼십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무리였지만, 겨울바다의 찬 바람 속에서는 굉장히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필록세노스가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은 왜 저기 모여 있는 거야?"
"바다에 뭔가 신기한 게 있나 봐요." 사람들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아챈 민테가 말했다. "저 사이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필록세노스는 고민했다. 저 군중이 마르키온과 마찬가지로 '니카'라는 단어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무턱대고 들어가는 것보다는 일단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낫겠군." 필록세노스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황제의 관료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근처에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불렀다. "어이! 이보시오!"
관료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두 사람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중에 제일 연륜 있어 보이는 한 남자가 걸어나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폐하의 법령에 따라 항만을 관리하는 사람들이오. 당신들은 또 누구요? 공연히 귀찮게 하지 말고 갈 길 가시오."
필록세노스는 품에서 병사들의 인식표와 비슷하게 생긴 어떤 물건을 꺼내 그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그 물건의 정체를 깨달은 관료들의 얼굴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경악을 나타내는 것을 민테는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나도 자네들처럼 폐하의 신하일세. 자세한 것은 말해 줄 수 없지만 이게 그 분의 증표라는 건 알겠지." 필록세노스가 말했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주겠나?"
그래도 나이를 헛되이 먹은 것은 아닌지, 항만 관리인들의 수장은 침착하게 필록세노스에게 대답했다. "항만에 허가받지 않은 선박이 접안했습니다. 선원도 승객도 보이지 않고, 어느 항구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들어온 건지 전혀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지금 저기 모인 사람들은 그 배를 보려고 나온 어중이떠중이들입니다."
필록세노스는 민테가 "요나스의 망령인가 봐" 운운하는 것을 무시한 채 관리인에게 말했다. "그건 확실히 수상하군. 헌데 아무리 그래도 항만에 떠 있는 배 하나 때문에 저렇게 사람이 모일 이유는 없지 않나?"
"직접 보시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이리로."
관리인은 그렇게 말하며 필록세노스를 군중에게 시야가 가려지지 않는 곳으로 이끌었다. 필록세노스와 민테는 항만에 세워진 높은 초소 위에서 정박 중인 배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문제의 배가 어느 것인지는 잠깐 보아도 명백했다. 갈색 내지 검은색의 목재로 건조된 평범한 선박들 사이에 마치 색을 칠한 듯이 이물부터 고물까지 새하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심지어 돛대와 돛까지 한 점의 티도 없이 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떤 할 짓 없는 작자가 자기 배를 온통 흰색으로 칠하는 사치를 부렸을까?" 필록세노스가 말했다.
"그것보다도 이상한 놈입니다." 관리인이 말했다. "따로 칠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흰색인 목재와 천으로 만든 겁니다. 선생님은 속까지 표백한 것처럼 새하얀 나무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태어나서 처음 봅니다."
"대체 저걸 어디에서 만들었을까요? 티로스? 시돈?" 민테가 말했다.
"거기서도 저런 나무는 나지 않아." 필록세노스가 말했다. "저 동방의 세리카에는 특이한 식생들이 존재한다고 하니 거기일 수도 있겠군.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것뿐이 아닐세."
"눈치 채셨습니까?" 관리인이 감탄했다. "역시 황제께서 증표를 하사하신 분은 다르군요."
"왜, 뭔데요?" 민테가 끼어들었다.
"노가 없네." 필록세노스가 대답했다. "그냥 노만 없는 게 아니라 애초에 노를 바다에 집어넣을 구멍 자체가 보이지 않는군. 저 정도 배를 돛만 가지고 움직이려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민테가 고개를 홱 돌려 필록세노스를 쳐다보았다. "마술로 움직이는 배일까요?"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보네. 관리인 양반,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자네 부하들을 데리고 군중들을 해산시키게. 그냥 돌려보낸다고 순순히 돌아갈 리는 없으니…… 그래, 뭔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그 사람들에게 해 주면 좋겠군. 폐하께서 조선공들에게 겨울에 일거리를 주기 위해 건조를 명령하신 배라고 하든지, 뭐든 그럴듯한 걸로 말이야. 그러면 대충 만족하고 돌아가겠지."
"뭘 하실 생각이시길래……"
"뭘 하긴, 승선해야지."
몇 분 뒤, 민테와 필록세노스는 기묘한 흰색 배의 갑판 위에 올라와 있었다. 겉보기에도 이상한 배였지만 직접 올라와 보니 갑판 위는 더 수상쩍었다.
"아무것도 없잖아?" 필록세노스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말했다. "밧줄도 삭구도 없고…… 꼭 조선소에서 방금 만들어서 물에 띄우기 전인 배를 보는 것 같군."
"그런데 이 배는 분명 바다를 건너서 비잔티온까지 닿았단 말이죠." 민테는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입구는 있네요."
필록세노스는 민테가 가리킨 견고해 보이는 바닥문을 보더니 그대로 문에 튀어나온 손잡이를 붙잡고 밀어 열었다.
"아하!" 그가 탄성을 질렀다. "이제야 좀 인간 세계의 것 같군."
열린 문 사이로 평범한 갈색의 계단과 그 계단이 이어진 바닥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나무로 만든 것처럼 갈색을 띤 깨끗한 바닥이었다. 두 사람은 모종의 안도감을 느끼며 계단을 따라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우와!" 민테가 외쳤다.
호화롭다는 표현도 갑판 아래의 광경을 수식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았다. 벽과 천장은 마치 나무로 만든 배가 아니라 바위를 깎아 만든 것처럼 석재로 되어 있었다. 벽의 곳곳에는 정체불명의 세공된 광석들이 매달려 스스로 빛을 내었다. 배의 갑판 아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환한 공간이었다.
"그래, 정말 감탄스럽군…… 자네도 알아차렸나?" 필록세노스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두 사람은 동일한 황홀경에 빠져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 공간은 배 자체보다 크군." "이 배 주인은 진짜 부자인가 봐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필록세노스의 얼굴에 '내가 어쩌자고 이런 여자를 부관으로'라는 느낌의 표정이 올라오는 것을 본 민테는 민망함을 해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크게 헛기침을 했다.
"으흠, 으흠! 그런데 이 방이 배 용적보다 더 넓다고요? 아, 하긴 지금 보니까 그렇군요."
"음. 그런데 이 아래에도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으니, 이거 갈수록 예감이 안 좋은데."
"그래도 사람의 흔적이 있기는 있어요." 민테는 그렇게 말하며 벽 한 편에 놓여 있는 궤짝들을 가리켰다. "안에 뭐가 있을지 궁금하네요."
"진정하게. 우린 이 배를 털러 들어온 게 아니니까. 일단 더 들어가 보세."
두 사람은 궤짝이 놓인 공간을 지나쳐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필록세노스는 긴장한 표정으로 계단이 있는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어쩌면 너무 깊숙이 들어온 사람들을 붙잡기 위한 함정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민테 역시 오감을 긴장시킨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마법의 방에도 끝은 존재했다. 방의 끄트머리에 도달한 두 사람은 그들의 양 옆에 서로 구별된 공간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곳에는 빛을 발하는 광석이 달려 있지 않아, 필록세노스는 각 공간의 내부가 무언가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만 알 수 있었다.
"이건 또 뭐지?" 필록세노스가 중얼거렸다. "일종의 장막 같은 건가?"
"천으로 만든 장막이에요. 재질이…… 꼭 군용 천막에 쓰는 물건 같은데요?" 민테가 그렇게 말하며 왼쪽의 장막을 살짝 걷어 안을 잠깐 들여다보고 몸을 빼냈다. "침대를 봤어요. 그 위에 사람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침실이군. 그럼 이쪽은 뭐지?" 필록세노스는 오른쪽의 장막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말미암아 매우 고급스러운 재질인 듯 했다. "위험하지만, 확실히 알아보는 게 낫겠지."
필록세노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모종의 주문을 중얼거렸다. 잠시 후 그가 들고 있던 작은 초에 불이 붙으면서 흰 빛을 발했다.
오른쪽 방을 가리고 있는 장막의 정체를 확인한 두 사람은 충격에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이거 제가 생각하는 그건가요?" 민테가 더듬거렸다. "자줏빛 비단? 그 귀한 걸 가림막 따위로?"
"그냥 자주색이 아니야. 이렇게 진하고 선명한 색은 처음이군." 필록세노스가 말했다. "티로스 자주라고 해도 믿겠어."
"자기 침실은 투박한 천으로 가리면서 이 방은 티로스 자주로?" 민테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여기에 뭐가 있길래? 저긴 선원들 침실이고 여긴 선장의 개인실인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필록세노스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는 성소로 이어지는 것 같네."
"성소요?"
"그래. 이 배에는 분명 신이나 마술의 증거가 아주 선명히 남아 있어. 그 반대로 사람이 생활하는 흔적은 거의 없고. 노가 없다는 건 노잡이도 없다는 뜻이고, 삭구가 없다는 건 돛을 조종할 선원도 필요 없다는 소리니까…… 한 사람이 혼자서 모는 배야. 그 사람 침실은 왼쪽이고. 그러면 가능한 설명은 하나뿐이네. 이 배는 말하자면 이동식 신전인 거지."
"이게 신전이라면, 대체 어떤 신을 섬기는 거죠?"
"그걸 알려면 이 장막 안으로 들어가야 하네."
"성소 안으로? 누군지도 모르는 신의 허락을 어떻게 받으실 생각이세요?"
"상황이 이러하니 그냥 들어가야겠지."
"그렇지만 나중에 내려올 신벌은 어떻게 하시게요?"
필록세노스는 민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똑바로 서더니 경건한 태도로 오른손을 가슴께에 올렸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는 그렇게 말하며 성호를 그었다.
민테는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 그래요. 당신 비잔티온에서 제일 끗발 센 신의 숭배자였었죠. 기독교인들의 보호 주술은 참 편리해서 좋겠어요."
"디오니소스 교단 쪽 의식이 즉석에서 하기에 너무 번잡하다면 그냥 여기 있게. 나 혼자 들어갈 테니."
"아뇨, 같이 가요. 있다가 돌아가서 팔루스 상을 입에 여러번 넣었다 뺐다 하면 되죠, 뭐."
"성인들이시여…… 정말 그런 식으로 하나?"
"그냥 한 번 농담해본 거에요. 팔루스 상은 안 써요. 들어가시죠."
필록세노스는 고개를 젓고 조심스레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민테는 그런 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그를 따라 들어갔다.
자줏빛 장막 너머에는 특이하게 생긴 제단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장막 맞은편 벽에는 세로로 긴 타원형의 석판이 걸려 있었는데, 흑요석처럼 검은빛이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재질의 이 석판이 정확히 어떤 돌을 깎아 만든 것인지는 필록세노스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석판은 그 크기에 맞춰 가공한 은 테두리 속에 들어있었으므로 마치 거울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 제단에서 가장 특이한 요소는 다른 데 있었다.
"이런 거 본 적 있나?" 필록세노스가 석판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놓인 등받이 달린 의자를 가리켰다. "신탁이면 몰라도, 제사를 의자에 앉아서 드리는 신은 금시초문이군."
"어쩐지 제단이라기보단 화장대 같은데요." 민테가 대답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용도가 아닌 거 아닐까요?"
"아냐, 여기 화로가 있네. 이 의자에 앉아서 제물을 태우는 거야. 생긴 걸 보아하니 동물 같은 건 아니겠고…… 약초나 부적일까?"
"이 쪽 한 번 비춰주시겠어요?" 민테가 말했다. "이 석판 위쪽에 무언가 새겨져 있는 것 같아요."
필록세노스는 초를 든 손을 들어올렸다. 초에서 나오는 빛이 석판 위를 비추자 그 위에 정교하게 새겨진 라틴어 문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BONA DEA DOMINA MEA
"말도 안 돼." 필록세노스가 중얼거렸다. "보나 데아?"
"보나 데아? 그건 그냥 '선한 여신'이라는 뜻이지, 이름이 아니잖아요."
"아냐, 고대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 중립적인 표현으로만 부를 수 있는 신들이 간혹 있었지. 개중에는 그런 표현이 이름으로 정착한 신격들도 있었어. 보나 데아도 그런 경우고." 필록세노스는 그렇게 설명하다가 갑자기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보나 데아의 교단은 수백 년 전에 소멸했는데?"
갑자기 장막 너머에서 큰 소리가 들려와 민테와 필록세노스는 몸을 돌렸다. 그들이 열어두었던 갑판의 바닥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갇혔다!" 민테가 외쳤다.
"서둘러! 여길 나가야 하네!" 필록세노스가 그렇게 말하며 뛰쳐나갔다.
두 사람은 두려움에 잠겨 성소에서 나와 계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여전히 바닥문이 활짝 열려서 겨울의 햇살을 바닥에 뿌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자네 혹시 환청을 들은 것 아닌가?" 필록세노스가 말했다. "감히 다른 신의 성소를 범했다는 생각에 과도하게 긴장한 나머지……"
"제가 환청을 들어요?" 민테가 억울해했다. "제일 먼저 고개 돌려서 뛰쳐나간 사람이 누군데요? 환청은 당신이 들은 거겠죠! 이제 슬슬 그럴 나이시잖아요."
"그건 인정할 수 없군, 내가 자네보다 한 세대 위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벌써 헛것을 보고 들을 나이는 아니네!" 필록세노스가 반박했다.
"그만." 누군가가 두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난 어느 위치로부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맞게 들은 거다."
민테와 필록세노스는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밝은 빛을 발하는 광석 아래에 한 금발의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티없이 맑은 푸른색이었고, 회색 겉옷 위에 초록빛 망토를 둘렀으며, 그 아래 허리에는 은빛 자루의 검이 매달려 있었다.
민테는 그녀가 자신에게 다가와 '나는 팔라스 아테나다. 마침내 비잔티온에 돌아왔노라.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신실한 자여, 불멸의 신들이 그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금발의 여성은 민테에게 다가와 "나는 보나 데아의 시녀이며 그분의 신전인 이 배의 관리자이다. 너희 도둑놈들은 무슨 생각으로 감히 그분의 성소를 침범했는지 설명하라.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하지 않으면 이빨로 날카로운 강철을 깨물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민테는 하마터면 실망의 한숨을 내쉴 뻔한 것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그녀가 순간 겪은 고뇌를 까맣게 모른 채, 필록세노스는 여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이에수스 크리스토스의 종이오. 당신은 그분께 바쳐진 도시에 허락 없이 입항했소. 당신부터 여기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먼저 설명하시오."
"적반하장이군." 여성은 그렇게 말하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도둑이 주인에게 이렇게 따져묻는 법도 있는가?"
"우리는 도둑이 아니오. 크리스토스의 대언자이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이 배를 조사 중이었소. 그분을 적으로 돌릴 생각이 아니라면 그 칼자루에서 손 떼시오."
민테는 온몸을 긴장시켰다. 만일 여성이 필록세노스를 베려고 하면 그녀는 그 즉시 바닥에 몸을 던져 여성의 다리를 붙잡고 자비를 구걸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보나 데아의 시녀님, 제발 살려주세요. 저는 여신님을 모독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는데 저 미친 기독교인이 강제로 끌고 온 거에요. 저놈이야 죽이시든 살리시든 마음대로 하시고 저는 그냥 보내주세요.' 등등의 대사를 머릿속으로 연습해보는 동안, 여성은 한숨을 내쉬고는 칼자루에서 손을 떼었다.
"그 황제 폐하라는 자가 이 도시의 관리자라면, 필경 손님을 환대하는 예의를 알 테지. 알겠다." 여성은 그렇게 말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나는 손님으로서 이 도시에 들어가겠다. 그대 크리스토스의 종이여, 어떻게 할 텐가? 나를 환대하겠는가, 아니면 박대하겠는가?"
"아직 내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으셨소."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황제 폐하의 종으로서 당신을 이 도시에 들일 수 없겠구려."
"정녕 나그네를 문전박대하겠다는 건가?"
"굳이 그런 식으로 표현하겠다면, 그렇소."
여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민테는 필록세노스의 어깨가 긴장되는 것을 그의 뒤에서 볼 수 있었다.
양측 사이의 긴장이 폭발하려는 순간, 민테가 두 팔을 들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민테는 두 사람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몸에 받고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저 남자는 보나 데아의 시녀님 당신과 다투려는 게 아니고요, 어디까지나 일이라서 저렇게 구는 거에요. 저는 민테라고 하고요, 디오니소스를 섬기고 있어요."
"바쿠스의 신녀?" 여성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다 사라진 줄 알았다."
"실은 저희도 시녀님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민테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바쿠스의 신녀. 저 꽉 막힌 자에게 내 입장을 알아듣게 설명해줬으면 한다." 여성이 요청했다. "나는 이 도시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만 내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내 목적을 알아서는 안 된다. 다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겠으니 그저 손님인 나를 받아들이기만 해 주면 된다."
"저, 그게 어려워서 이렇게 말하는-"
"어째서냐!" 여성이 고함을 질렀다.
"-그렇지만 그게 저희 일인데요……" 민테는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디오니소스께 지금 당장 자신을 하데스의 집으로 옮겨달라고 진심을 담아 기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민테는 어쩔 수 없이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그, 최근에 황제 폐하에 대한 반역 음모가 있어서, 그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 중에 마술사들이 끼어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폐하께서는 저희에게 명령을 내리셔서 그들을…… 아, 저희는 은비부대라고 하는 곳에 소속되어 있고요, 폐하를 해치려는 마술사들 막는 게 저희 일이에요."
민테는 이 신과 같은 여성이 '이 도시에는 바보들만 있나 보군' 운운하더라도 상처받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그런 횡설수설이라니. 정신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한 민테는 눈앞의 여성이 그녀를 답답한 눈으로 바라보는 대신 놀란 표정으로 응시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반역 음모라고?" 여성이 말했다. "그 얘기는 못 들었는데."
"그, 그, 그러면 시녀님께서도 그것 때문에 오신 건가요?" 민테는 입술을 핥았다. "……'니카' 때문에?"
순간 한 차례 바람이 일었다. 민테가 시선을 약간 내리자 여성이 뽑아든 검의 끝이 정확히 그녀의 목젖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하려고 했던 거 지금이라도 시도해 볼까?' 민테는 생각했다. '근데 이 상황에서 내가 살려달라고 하면 살려주실까?'
"네놈들, 니카와 무슨 관계가 있지?" 여성이 꿈에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윽박질렀다. "대답해! 너희는 니카의 도당인가?"
"보나 데아의 시녀여, 검을 거두시오!" 아까부터 침묵하고 있던 필록세노스가 외쳤다. "우리는 '니카'의 무리를 막기 위해 일하고 있소! 그들이 당신의 적이라면 우리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단 말이오! 나는 은비부대의 지휘관, 테살로니키의 필록세노스요. 여기 있는 민테는 내 부관이고!"
검이 치워졌다. 민테는 반쯤 혼이 나간 채 자신의 목을 만지작거렸다.
"무례를 사과하겠다." 여성은 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 "나는 니카가 여기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그녀가 정확히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은 너희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녀'라고?" 필록세노스가 물었다. "'니카'가 여성의 이름이오? 그냥 암구호가 아니라?"
"암구호는 또 무슨 말인가?" 여성은 그렇게 반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자리를 옮기지. 이거 아무래도 긴 대화가 될 것 같은데, 이 배 안에는 너희들이 앉을 자리가 없다."
"저희 거처로 초대하겠습니다." 필록세노스가 말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항만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 어느 다층주택의 옥상 위에서 한 사내가 항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내는 시력이 꽤 괜찮은 편이었다. 그는 항만에 정박한 흰 배에서 한 남자와 두 여자가 하선하는 모습을 포착하고 주머니에서 도자기 파편을 꺼내 거기에 무언가를 새겼다.
몇십 분 뒤, 사내의 도자기 파편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마침내 길거리 주점 앞을 서성거리고 있던 한 여성에게 전달되었다. 무슨 동물의 것인지 확실치 않은 검은 가죽 재질의 옷으로 몸을 감싼 여성의 얼굴은 잿빛 베일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여성은 베일 너머로 도자기 파편에 새겨진 상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검은 가죽 옷의 여성은 파편을 떨군 뒤 장화를 신은 발로 밟아 깨뜨렸다. 그런 뒤 그녀는 몸을 돌려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점 내부는 1월의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 몰려든 사내들로 북적였다. 여성은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는 남자들을 무시하고 지나쳐 주점 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이 주점에는 특이하게 '중요한 손님'들을 위한 밀폐된 방이 있었다. 여성은 그 방을 향해 곧바로 걸어갔다. 문 옆에 서 있던 사람 둘이 그녀를 막았지만 여성은 어째서인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두 사람을 간단히 양 옆으로 밀어낸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원탁과 그 주변에 둘러앉은 다양한 출신의 부유한 남성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는 여성이 들어온 것을 보고 하던 이야기를 멈췄다.
"반갑다. 청색당과 녹색당의 지도자들이여." 베일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렸다.
"당신 누구요?" 누군가가 물었다. "이것은 비밀 모임이오. 어떻게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고 온 거요? 원하는 게 뭡니까?"
"협력." 여성이 대답했다. "똑바로 귀를 열고 들어라. 황제는 이미 너희 음모를 알고 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병사들을 동원할 준비를 마쳤다. 너희들의 반란은 시작되는 즉시 진압될 것이다. 내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둘러앉은 남자들 사이에서 약간의 비웃음이 일었으나, 여성이 베일을 벗자 그 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검은 가죽 옷의 여성은 베일에 가려져 있던 무서울 정도로 위엄찬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흑발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니카승리다. 한 가지만 묻겠다. 그대들은 나를 원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