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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제목: 이름부터 알아먹을 수가 없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차마 물어볼 수조차 없었던 지속가능격리개발사업에 대하여 당신이 알 필요 없는 것
저자: romrom
사진: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ork_loin_cutlet_bowl_of_Matsunoya.jpg, 17 January 2021, Pork loin cutlet bowl of Matsunoya.jpg, 毒島みるく, CC BY-SA 1.0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orean_cuisine-Bibimbap-01.jpg, 13 March 2008, 10:54:07, Korean cuisine-Bibimbap-01.jpg, Jerine Lay, CC BY-SA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ake-huron-ipperwash-beach.jpg, May 2004, Lake-huron-ipperwash-beach.jpg, Giggy, CC BY-SA 2.5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eyuk-bokkeum_1.jpg, 22 May 2011, Jeyuk-bokkeum 1.jpg, , Charles Haynes, CC BY-SA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orean_soup-Sundae_gukbap-01.jpg, 22 February 2008, 10:48:13, Korean soup-Sundae gukbap-01.jpg, pcamp, CC BY-SA 2.0
책 돌리기 이벤트 참가작입니다.
캐나다에서 자연자원학과 자원관리학을 공부할 때는 이 학문이 그리 엄청나다는 생각을 하지 못 했다. 나름대로 궁리를 하며 GPA를 관리하고 상위권 대학에 합격했다만 그렇게 피나도록 노력하여 합격한 만큼 큰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못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식을 머릿속에 욱여넣는 행위는 분명히 쓸모가 있었으나, 이것이 그렇게 만족감을 준다는 생각은 하지 못 하고 있었다.
해우는 대학 학사논문 이후에 찾아왔다. 교수님의 권유로 잠시 쉬고 있던 나는 친구의 추천으로 이퍼워시 국립공원으로 떠났다. 한국과는 다른 크기의 "호수" (현지인들에게는 담수 해안가라고도 불렸다.) 를 바라보는 경험은 확실히 큰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공원 캠핑장에 남겨둔 캠프파이어가 수명을 다할 때쯔음, 기묘한 무언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캠프파이어 옆에 있던 돌에서 규칙적으로, 아주 조금씩 물기가 세어나오고 있었다. 밤 동안 수분이 액화되어 표면에 맺히는 현상은 흔하지만, 열원과 맞닿아있는 물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꽤나 신기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돌을 한 손으로 잡고 공중에 들었다. 그런 나를 무시하듯이 돌에서는 물이 조금씩 세어나오고 있었다.
돌에 대한 조사는 금방 완성되었다. 비록 적은 양이지만 질량 보존의 법칙을 위배하고 끊임없이 물을 뽑아내는 돌은 그야말로 금덩이 그 자체였으니까. 유일한 문제였다면 조사 보고서 검토 제안을 올렸던 날 내가 경동맥 압박을 통한 뇌허혈이 어떤 기분인지 몸으로 배웠다는 것인데, 이는 이름모를 지하실에서 깨어난 것과 비교하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자니 재단 치고는 나름 신사적인 방법으로 직원을 채용했던거겠다 싶다.
내가 제출하지도 않은 보고서의 내용을 줄줄 읇는 사람과 옆의 서류들을 관경하는 것은 꽤나 신묘한 체험이었다. 내 앞의 양복쟁이는 내가 이 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걸 어디서 구했는지, 추가적인 물체는 없는지에 대해서 물었고, 당연하게도 나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했다.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체 내가 거기서 뭐 하고 있었는지 의아해한 것은 틀림없다. 긴장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상한 방식으로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납치범들이 내 캠핑 이야기를 진중하게 적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웃긴 모양새임이 틀림없으니까.
어찌됐든, 결론적으로는 나름 괜찮은 채용조건이었다. 학자금 대출 일부 면제, 재단 소유 대학으로의 이전 졸업 이후 재단에 채용. 그리고 내 경험에 대한 완전한 함구. 조금 있으면 문이 열리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저 이상하고 멋지며 특권적이고도 엄청나게 힘든 학자들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었다.
발신자: 제43기지 행정부 rten.imdapcs|lylperon#rten.imdapcs|lylperon
수신자: 나가람 비전저감부원 ten.hcyspanapcs|an_marag#ten.hcyspanapcs|an_marag
발신일: 2023.10.02 22:10
제목: 파견 업무 관련
응용은비학계 비전저감부 나가람 수석연구원께
안녕하십니까, 그간 편히 지내셨길 바랍니다.
지난번 한국에 위치한 제145K기지에서 비전저감부 측과 일정 기간의 인원 파견을 통한 업무방안 및 폐기물 처리방식 교환에 대한 회의가 진행되었음은 잘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전체적인 재논의 결과, 제43기지 행정부는 변칙적 폐기물 보관 시설의 운용법, 폐기물의 효율적인 재가공 루트, 그리고 이용가치가 존재하는 초상폐기물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노하우 공유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인적자원부의 논의 아래 나가람 수석연구원님이 국적, 선호도, 그리고 직무 면에서 가장 이상적인 주재연구원으로 거론되었기에, 다음 달 말에 한국으로 파견업무를 나가게 됨을 안내드립니다.
공유 프로젝트는 대략 2년 정도를 목표로 잡고 있으며, 현재 진행하는 직무와 유사한, 지속가능배수로 관리 측면의 업무를 맡게 되실 것이니 기술 면에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제43기지 행정부
구내식단표
제육볶음 - 9000₩
비빔밥 - 8500₩
순대국밥 - 9500₩
돈까쓰덮밥 - 10000₩
본질적으로, 구내식당에서 물어야 하는 질문은 단 하나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내가 손에 넣은 가치로 무엇을 구매해야 내 입 속에서 가장 큰 축제가 벌어질까? 그 점에서 기지 구내식당이란 그야말로 최흉의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엄청나게 복잡하고 끔찍하게 재밌는 문제, 그 정도로 축약할 수 있었다. 아, 메뉴판을 볼 때 느껴지는 그 두근거림이란! 그리고 메뉴를 실제로 받았을 때 뼈저리게 후회하는 내 마음이란! 어떤 때는 가격을 훨씬 상회하는 퀄리티가, 그리고 어떤 때에는 마귀비빔밥에서 짬처리당한 야채비빔밥이 나오고도 하는 그곳이 바로 제145K기지렸다. 특권 따위는 없었다. 예를 들어서, 전자물리학과 박사학위를 받은 이들도 식물학 석사 연구원들과 동등하게 머리를 싸매고 비명을 지르곤 했다.
그리고 옆에서 울리는 전자음. 12시임을 온 몸으로 피력하는 알람시계였다. 오늘도 다시 한 번, 어제 풀지 못 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우선 제육볶음. 가장 변함없는 선택지다. 마치 아무것도 묻지 않은 캔버스와도 같다. 언제 먹어도 이 음식은 실패한 적이 없다. 사실, 이 음식을 실패한다는 것은 재단이라는 초거대 비밀조직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에 가깝다. 강한 화력을 투사해서 빠르게 볶는다면 언제나 갑자기 고기에 생기가 돌듯 아무렴 적당한 맛이 깃드는 요리었으니까. 이 식당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또는 수상할 정도로 이름이 휘황찬란한 특이한 양식 요리 (지속가능격리개발과 마크와 함께) 가 나와있을 경우 가장 신뢰가 가능 선택은 역시 제육볶음과 흰쌀밥이었다.
그러나, 약속을 깨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앞에 했던 칭찬이 무색하게도 내가 이 식당에서 제육볶음을 시켜먹은 횟수는 사실 다른 직원들보다도 유난히 적은데, 그야 언제나 맛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제육볶음이라는 메뉴는 내가 이 기지에 파견왔을 때부터 존재했고, 속설로는 적백합교회가 이 기지 관측소를 처음 반파시키고 나서부터 제육볶음이 이 기지에 있어왔다고들 한다. 십구 년 혹은 그 이상 자신만의 자리를 지킨 수문장이라는 점은 대단하나, 그것이 다른 선택지를 거부할 논거는 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것에 흥미는 없다. 구르지 않는 돌에 쌓이는 이끼는 귀중하지만, 나는 이끼 없는 돌이 먹고 싶었다.
어느새 주머니에 마귀비빔밥 할인 쿠폰이 들어있었다. 쿠폰을 찢자 금새 진동하는 유황 냄새와 비명이 살짝 들리더니 불타 사라진다.
패스.
순대국밥, 이 메뉴는 조금 특이하다. 그 사유는 바로 이 메뉴가 지난주부터 추가된 메뉴라는 사실인데, 순대국밥이 한국 문화에서 보편적 한끼의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나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순대국밥이라면 이러한 의문도 무시할만한 국밥만의 장점이 있다, 바로 국물 그 자체이다. 생각해보자, 당신이 지속가능배수로 점검 업무를 끝내고 기지 내로 돌아온다. 분명 배수로의 모든 액체는 인체에 무해한 물에 가깝지만, 여전히 어딘가에서 사용된 물이 내 몸에 튀긴다는 점은 찝찝하다. 부서 업무실로 돌아오니 책상에 올라가있는 것은 여전히 변치않는 자세를 유지하는 서류더미 뿐이다. 커피를 먹으려고 탕비실에 들어가지만 탕비실의 커피는 의문의 곤충성단백질 덩어리로 대체되어있다.
그런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구내식당에서 급양부 인원들이 퍼다주는 뚝배기 하나, 거기에 담긴 따끈따끈한 순대국밥이다. 거기에 다데기를 풀고, 깻가루를 넣고, 부추를 넣은 뒤 뽀얀 공기밥 한 그릇을 말아서 한 숫가락을 뜬다. 숫가락이 입에 들어가자 육수의 감칠맛가 다채로운 재료들의 양념이 어우러져 완벽한 한 숫갈을 만든다. 양념이 부족하다면 딸려온 깍두기를 먹으면 된다. 씹어보니 식당 깍두기 특유의 사이다 단맛과 매운맛이 어우러져 단짠의 향미— 그리고 육수의 향미가— 그리고 마늘과 부추의 끝맛이— 그야말로 완벽한 식사다.
우선 점심 후보 당첨이다.
돈까쓰덮밥. 딱히 걸리적거리는 요소는 없다.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가격, 가격, 또 가격이다. 아무래도 다른 음식들 사이에서 다섯 자릿수라는 독보적인 가격으로 남아있는 이 당당함이 흠이라면 흠이다. 소스 묻은 돈까쓰도 좋다, 눅눅한 껍질에서 나오는 즙이 독특한 맛을 더해주니까. 계란도 좋다, 반쯤 액체같은 형체가 돈까쓰의 퍽퍽함을 완화해준다. 하지만 그래도 저 다섯 자릿수의 미묘한 거부감은 참을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패스.
역시, 오늘은 새로운 메뉴를 시도해봐야겠다.
먹는 게 아니었다. 뭐를? 순대국밥을. 절대 지속가능격리개발과 마크가 붙은 음식은 먹는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다 좋았다. 달아오르는 뚝배기, 잘 우려낸 듯한 육수, 거기 들어간 당면순대와 내장까지… 사실 캐나다에서는 제대로 된 내장 음식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는데, 한국은 다르다. 역시나 한국의 맛이지 하면서 숫가락을 떴다. 그러나, 순간 옆에 세워져있던 깻가루에 시선이 옮겨갔다. 그러면 안됐었는데, 안됐는데,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나 자신을 탓하며 기억을 되짚어봐도 여전히 가루를 펑펑 쏟아내는 나 자신만 느껴진다. 국을 한 숫갈 뜬다, 거기에는 밥알과 순대가 적절한 비율로 섞여있다.
1초, 밥알이 부드러운 목넘김에 의해 목 안쪽으로 흘러간다.
2초, 국물의 감칠맛이 느껴진다. 가끔 혀에 닿는 고춧가루와 마늘 조각들이 뭉근하면서 매콤한 반전을 준다.
3초,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잘못됨을 느낀다.
4초, 그 무언가가 갈고리 모양임을 알아챈다. 입을 벌린다.
5초, 깻가루 뒤에 메뚜기 단백질이라고 쓰인 것을 알아챈다. 깻가루의 거짓됨을 원망한다.
6초, 자신 앞에 임찬미 부서장이 앉아있음을 깨닫는다.
"아, 혹시 다리가 씹혔나요? 잘 안 갈아졌나보네. 여기 설비가 좀 오래되긴 했어요! 아 맞다, 이번에 새로 파견 오신 연구원분이시라면서요? 캐나다에도 자원 재활용-
"네, 하하, 그렇죠. 네, 네."
오늘도 점심은 공쳤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