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 시보)
(경쾌한 오프닝 테마가 흘러나옴)
손인섭: 네. 청취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전산보안주무관 손인섭입니다. 다들 지금쯤 즐거운 점심시간에 웬 라디오에서 직장 상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나―하고 어리둥절하고 있을 것 같네요. 간단히 말하죠. 여러분이 보안 규정을 어기고 무단으로 웹 방송을 인터넷에 올리다 적발된 횟수가 어제 딱 1000 회를 돌파했기 때문에, 차라리 정당한 방송 출연 기회를 제가 직접 마련해주겠다는, 그런 방송입니다. 어제 아프리카 TV 개인방송 열었다가 강등되고 제 휴가 잘라먹은 놈, 듣고 있어요? 네… 좋습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바로 게스트를 소개하죠. 손인섭의 괜찮은 라디오! 기념비적인 파일럿 방송의 게스트로 란란맥 박사님이 나와계십니다.
란란맥: 안녕하세요.
손인섭: 자, 청취자 여러분께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란란맥: 에- 과학부 제7팀과 플러그소프트 추적조사팀을 임시로 이끌고 있는 보거튼 맥도날드입니다. 본업은 SCP-███ 연구 담당이고요, 최근에는 7팀 연구실에서 하루 종일 서류와 자료를 붙들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손인섭: 감사합니다. 임시로 제7팀을 맡고 계시다고요?
란란맥: 전 팀장님이 얼마 전에 과로로 쓰러지셔가지고… 플러그소프트도 저희 팀에서 전담으로 맡고 있어서, 두 그룹의 임시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손인섭: 저런. 빠른 쾌유를 빕니다. …그러면 이제 메인 토크를 진행할 텐데요, 아무래도 기밀을 지킬 건 지켜야겠죠? 손인섭의 괜찮은 라디오는 정말 방송해도 괜찮은 내용만 보내드리기 위한 룰이 하나 있습니다.
란란맥: 아, 어쩐지. 주무관님이 그렇게 쉽게 정보 공개를 허용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손인섭: 물론이죠. 오늘 토크에서는 오직 보안 인가 등급 1등급 이하의 정보만 다룰 수 있습니다. 1등급을 넘어서는 정보를 말한 사람에겐 가차 없이 벌칙 게임이 주어지니 주의해 주세요.
란란맥: 오…. 알겠습니다.
손인섭: 네. 청취자 사연은 SCiPNET의 "괜찮은 라디오" 페이지에 올려주시면 추첨을 통해 소정의 상품을 드립니다. 많이 보내주세요!
(잠시 테마곡이 흘러나옴)
손인섭: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란란맥 박사님은 기지 안에서 굉장한 햄버거 마니아, 아니 햄버거 그 자체라고 소문이 자자한데요. 잠시 인사 파일을 읽어보겠습니다. "보거튼 박사는 본래 재단에 영입되기 전 맥도날드 체인점에서 일하던 평범한 직원이었으나, 어떠한 변칙적인 물체로 인해 일어난 765-MK 사건에 휘말려 빵으로 변형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진입한 재단 요원들에 의해 햄버거 패티로의 변형을 멈출 수 있었다. 이 사건의 흔적으로 보거튼 박사의 몇몇 신체 부위가 구워진 고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잠깐, 진짜로 몸이 햄버거라고요?
란란맥: 뭐 그렇죠. 처음 이 꼴이 되었을 땐 엄청 절망해가지고, 이래가지고 어떻게 사나~ 그렇게 비관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별로 문제 될 건 아닌 것 같더란 말이죠. 여기엔 저보다 더한 몸뚱이를 가진 사람도 많고…
손인섭: 음. 그야 엄청 많죠. 머리가 개로 바뀐 교수님도 계시고, 목걸이에 혼이 붙어버린 분도 계시고, 일일이 말하기도 힘들겠네요.
란란맥: 그렇죠. 사실 살아남은 게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나름 사지 멀쩡하지, 머리 멀쩡하지. 재단 인원으로 일하는 데 지장은 없으니까요.
손인섭: 긍정적이시네요.
란란맥: 친한 선배가 항상 말씀하시곤 했죠. 재단에서 멀쩡하게 일하려면 미쳐버리거나 웃어넘기는 수밖에 없다고.
손인섭: 그렇군요… 그럼 분위기를 바꿔서 청취자 사연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연은 새벽 박사가 보내주셨습니다. 엇, 첫 사연부터 인트라넷 관리자께서… 흠. "손 주무관님이 이런 독특한 이벤트를 준비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방송 재미있게 듣고 있는데, 란란맥 박사님은 몸이 햄버거가 된 후에 생활하면서 무엇이 가장 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그렇네요. 뭐가 달라졌나요?
란란맥: 일단 물에 젖으면 큰일 납니다. 고기가 물을 먹어서 뭉개지더란 말이죠. 한번은 수조에 빠져서 고기가 된 부분이 다 떠내려가 가지고 본의 아니게 신체 부위가 조각조각 난 채 물에 둥둥 떠 있는 광경을 연출해가지고, 이야. 헤엄도 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는? 결국 피쉬 박사가 하나하나 건져줘서… 아, 그래도 고기 부분은 다칠 걱정은 또 없어요. 고기를 붙이면 재생되거든요. 찰흙처럼요. 그때도 떠내려간 고깃덩이들은 다 젖어서 못 쓰고 주방에서 다진 고기를 새로 구워와서 붙여가지고 수복했죠.
손인섭: 오오. 뭔가 호빵맨 머리 같은 원리입니까?
란란맥: 뭐 대충 비슷한 거 아닐까요?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얼마 전에 변칙개체 연구팀에서 제 신체를 응용한 신체 회복력 향상 연구를 하긴 했는데, 크게 성과는 없었다고 하네요. 음… 그리고 하나 더 꼽자면 몸에서 항상 잘 구워진 고기 냄새가 납니다.
손인섭: 오, 과연. 아까부터 뭔가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난다 싶었습니다만 박사님 몸에서 나는 냄새였군요.
란란맥: 네, 그겁니다. 여름엔 벌레가 좀 꼬이는 통에 항상 긴소매 옷을 입어야 해요. 가끔 방부제도 뿌려줘야 하고… 그거 빼면 냄새도 좋고, 그냥 향수 뿌리고 다닌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스는 안 들어있는 게 어딥니까.
손인섭: 윽, 소스는 상상하기 싫군요.
란란맥: 그렇죠?
손인섭: 네… 사연은 아니지만 좋은 질문 보내주신 새벽 담당관님께 해남 호박고구마 한 상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두 번째 사연은 기지 급식소에서 근무하는 마리아 조리원이 보내주셨습니다. "란란맥 박사님, 이번 금요일 점심에 버거 메뉴 있으니 늦지 말고 11시까지 조리실로 내려오세요."
란란맥: 아, 이번 주였네요. 알겠습니다.
손인섭: 호오, 버거 메뉴가 나오는 날은 특혜로 빨리 드시는 건가요?
란란맥: 아뇨. 그날 제가 담당 조리사입니다.
손인섭: 앗, 그렇습니까?
란란맥: 재단 입사할 때부터 연구원 겸 조리사로 들어왔죠. 제 입으로 말하긴 그런데, 제가 햄버거는 진짜 기막히게 잘 만들거든요. 불고기버거, 새우버거, 치킨버거, 빅맥, 못 만드는 게 없어요.
손인섭: 맥도날드 집안의 후계자라거나?
란란맥: 성씨는 그건 그냥 우연이에요, 우연. 재단 들어오기 전에는 맥도날드가 맥도날드에서 일한다고 친구들이 좀 놀리기도 했는데. 흠. 여튼 제가 맥도날드 점원으로 일할 적에는 아무래도 패스트푸드다 보니까 만들 때마다 맛이 다르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영업 중에는 정해진 레시피로 만들었는데, 한산할 때 가끔 맘대로 만들던 걸 점장님한테 들켰지 뭡니까. 이야, 이건 본사에 보내야 한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셨거든요. 그런데…
손인섭: 오호. 하필 그 무렵에 일이 터진 거군요. 재단 안 들어왔으면 그쪽으로 잘 나가셨겠네요.
란란맥: 그럴지도 모르죠. 개인적으로는 햄버거만 줄창 만드는 것보단 연구원으로 일하는 게 적성에 맞아서, 햄버거는 취미로 만드는 지금 생활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손인섭: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멀쩡한 사연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수고하시는 마리아 조리원님께 던킨 6개팩 기프티콘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세 번째 사연은 동료분이 보내주셨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란란맥 박사와 같은 팀에서 일하는 마크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란맥이한테 직접 말할게요. 야, 보거튼. 팀장 대리 한다고 고생이 많어. 업무는 갑절이지, 승진한 건 아니지, 괜시리 요즘 들어 플러그소프트도 활발하게 날뛰는데 니가 얼마나 힘들겠냐. 저녁에 일과 끝나고 형이 맥주 쏜다. 버거 두 개 싸와. 그때 보자―"라고 마크 큐빅 박사님이 보내주셨습니다.
란란맥: 그래 이 자식아. 형님이 특별히 란란맥스페셜로 들고 갈 테니까 두당 다섯 병씩 준비해 놔라?
손인섭: 생각해 주는 좋은 동료가 있으시군요. 좋으시겠습니다. 근데 누가 형인 겁니까?
란란맥: 글쎄요? 생각해 보니 나이를 안 물어봤네요. 아마 제가 형이겠죠.
손인섭: 하하. 하긴 친구를 사귀는 데 나이가 뭐 대수겠습니까. 그럼 마크 박사와는 얼마나 같이 일하셨나요?
란란맥: 음… 제가 7팀 배정받았을 때 처음 만났으니까… 올해로 3년 됐네요. 와, 생각보다 오래됐네요. 평소엔 별로 생각 안 해봤는데.
손인섭: 평소에는 그럴 여유가 없으니까요, 다들. 모쪼록 두 분 다 죽지 마시고 우정 이어가시길 바라며, 저녁에 같이 드시라고 후라이드 치킨 기프티콘 2장 드리겠습니다. 순살이니까 버거에 넣어도 좋겠네요.
란란맥: 중간에 불길한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잘 먹겠습니다.
(클로징 테마가 흘러나옴)
손인섭: 네, 벌써 점심시간이 끝나가네요.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됐습니다. 오늘은 한 번도 벌칙이 주어지지 않았네요?
란란맥: 사실 아까 신체 회복력 향상 연구가 2등급 열람 제한이었지요.
손인섭: 앗, 그랬나요? 피디님 왜 지적 안 하셨어요!
란란맥: 내용은 말 안 했으니까요(웃음).
손인섭: 윽… 그러면 아쉽지만, 첫 벌칙의 영광은 다음에, 정식 방송의 게스트분께 돌려야겠군요. 손인섭의 괜찮은 라디오, 다음 주 이 시간에 정식 프로그램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청취해 주신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란란맥: 다들 좋은 하루 되세요!
(1시 시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