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전부 무너지기도 한다

화장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는 걸 알았다. 열려있는 문 틈, 가끔 참방거리는 물소리, 누군가 불렀던 것 같은 느낌. 수건이 없다거나 휴지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나를 불렀던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 누가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문을 열면 알몸뚱이의 여자 한 명이 서있을 것 같다. 이상한 일이다. 이 곳에 사는 건 나 혼자밖에 없는데.

그러고보니 어젯밤에 뭔가 와지끈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깼지만, 꿈 바깥으로 얼굴만 내민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도로 잠에 빠졌다. 어쩌면 악어가 기어나왔던 걸지도 모른다. 하수구에 살고있던 놈. 크고 사나운 악어가 지금 화장실 타일을 기어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신의 여자든 우둘투둘한 악어든 간에 나는 내 화장실의 안전을 염려해야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현대의 수세식 화장실을 사랑한다. 마셔도 될만큼 깨끗한 물이 무한정 솟아 나오고 육체의 틈과 구멍에서 비어져 나온 모든 것을 씻어내릴 수 있는 곳이라니. 쾌적하기 그지없다. 문명의 기적이다. 잊어버리기 쉽지만 깨닫고 보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내게는 문을 열고 화장실이 무사한지를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어쩌면 성질 급한 배관공이 들이닥친 걸 수도 있다. 그래. 지금까지 떠올린 가능성 중 가장 현실성이 있다. 배관 안에 숨어든 악어를 찾으러 온 배관공. 그리고 그 배관공을 샤워에 초대한 알몸뚱이 여자. 내가 문을 열기만 하면 그 모든 것들이 화들짝 놀란 바퀴벌레 떼처럼 흩어져 사라질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문을 열어젖혔다.

팔이 솟아있었다. 아직 물기가 남은 채로.

변기 한가운데에 사람의 팔이 솟아있었다. 손은 어색하게 펼쳐져 있었고, 매달린 물방울이 손가락 끝으로 아슬아슬 미끄러지다가 떨어졌다. 타일 바닥에 물방울이 튀긴 그 때까지도 나는 문고리를 잡고 쳐다만 보고있었다. 문 틀 안으로는 현실 같지 않았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문 틀을 나무 액자로 생각한다면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감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척이나 초라하게 비현실적인 그림.

나는 그걸 언제까지고 감상할 수 있다. 변기는 안쪽에서부터 깨진 것처럼 보였다. 구멍은 억지로 비집고 넓혀져서 으깨졌다. 변기를 나올 구멍으로 택하기에 팔은 지나치게 굵었다. 나보다 조금 더 굵었다. 그리고 길었다. 팔꿈치 관절이 드러나지 않은 채로 내 가슴께까지 치솟아 있었다. 변기 밑으로는 관절이 있을지, 그 아래에 비좁은 배관엔 팔의 주인이 꽉 끼여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래로 아래로 오직 팔만 뻗어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끝 없이 팔과 관절만 꺾고 휘어지며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나는 찰랑거리는 변기 물 아래로는 눈이 닿지 않는다. 죽은 나뭇가지처럼 펼쳐져 있는 손가락만 바라볼 뿐이다. 가락마다 힘을 잔뜩 준 것처럼 뻣뻣하지만, 결코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그 때 주머니의 핸드폰이 울렸다. 현실이 부르르 진동하며 제 존재를 알려왔다. 꺼내서 확인할 수밖에.

발신번호없음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받기 거북한 전화였다. 표시제한도 아니고 아예 없다고 배를 째고있다. 그러나 끊어버린다면 찾아온 현실의 목을 꺾어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끊어버린다면 다시 눈앞에 팔과 단둘이서만 마주해야 했다. 진동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나는 전화를 받지도 끊지도 못하는 채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처음으로 보인 움직임이었다. 그 손가락이 돌연 움찔거리며 허공을 긁어댔다. 제게도 맥박이 뛰고 신경에 전기가 흐른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계속해서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내 손 안에 전화가 진동한다. 이윽고 나는 진동과 같은 때마다 그 손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냈다. 진동이 울릴 때 함께 움찔대고 애타게 손을 뒤틀어댔다. 나는 그 손이 전화를 받으라고 재촉하고 있음을 알았다. 더 이상 선택지가 없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쇼. 거기 누구 있나요? 아야야, 씨발…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배관에 끼였습니다." 남자 목소리. 동굴에 있는 것처럼 울리고, 웅웅대는 소음이 섞인다.

"뭐라고요? 배관이요? 지금 변기에서 손 내밀고 있는 게 그쪽입니까?"

"변기요? 그건 뭔 소린지 모르겠네요. 제가 지금 공중 화장실 밑이긴 한데 손 같은 건 못 내밀어요. 완전 꼈다고요. 새끼 고양이 따라서 정신없이 기어다니다가 껴버렸어요. 제발 도와줄 사람 좀 불러주세요."

"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요? 여기 꼈다고요. 도와줄 사람 좀 보내줘요. 어두워서 하나도 안 보여요. 옷도 다 젖었어요. 도와줄 사람 좀 보내줘요. 아래쪽 팔에 피가 안 통해요."

"이봐요, 거기가 어딘데요? 어딘지 말을 해줘야 제가…"

"고양이가 기어다니는 곳이요. 어딘지 알죠? 여기로 사람 좀 불러줘요. 전 제 사촌한테 전화 좀 해볼게요."

그리고 끊어버렸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조용해진 전화기와 눈앞에 팔을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팔은 다시 죽은 직후처럼 뻣뻣해져 있었다. 악수라도 해줄까. 그러나 손을 잡았을 때 갑자기 저쪽이 나를 꽉 틀어잡고 다시는 놔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났다. 나는 손을 피해 벽에 바싹 붙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행여 손가락 끝에라도 닿을까 두려웠다.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바닥의 배수구에다가 오줌을 쌌다. 다시 벽에 붙어 화장실을 나서면서 한 번 더 변기의 팔을 돌아보고 문을 닫았다. 웃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에나멜과 리놀륨, 유리의 성채를 부수고 들어온 거인의 팔.





다시 전화가 걸려온 건 이틀 뒤였다.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수 없다는 현실을 겨우 받아들이던 때였다. 여기는 아파트 꼭대기 층이라서 똥을 싸고 싶다면 지상으로 기나긴 모험을 떠나야 했다. 그것 말고는 받아들일 만했다. 언젠가는 그것 옆에서 샤워를 하는 내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역겹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발신번호없음. 전화가 왔을 땐 심장이 조금 덜그럭거렸다. 받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으니까, 화장실 문 너머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첨벙거리는 소리였지만 얼마 안 있어서는 악어가 물장구 치는 것만큼 큰 소리가 났다. 변기가 부서지도록 몸을 뒤틀어대는 거겠지. 화장실이 더 난장판이 되는 건 원치 않았으므로 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제가 제대로 전화를 건 게 맞나요? 경찰서죠? 와서 제 수갑 좀 풀어주세요." 같은 목소리. 이번에도 조금 울린다. 나는 가만히 들어보기로 했다.

"제가 짐승 같은 짓을 한 건 인정해요. 사람이 할 짓이 아니죠. 인정해요.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밑에 처박고 나서까지 수갑을 안 풀어주는 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 수갑 저랑 맞지도 않아요. 너무 작아서 아파 죽겠어요. 피가 하나도 안 통해요. 위쪽이랑 아래쪽 다."

"어느쪽 팔이요?" 내가 물었다.

"다요. 못 들었어요? 지금 간수한테 특별히 허락 받아서 전화하는 거에요. 손이 아예 보라색이 됐고 손목이 찢겨서 피까지 나는데 어쩔 수가 없잖아요. 제발요. 여긴 너무 깊어서 도와줄 사람도 없어요. 와줄 수 있죠?"

"죄송합니다. 정확히 무슨 일 때문에 거기 들어갔다고 하셨죠?"

침묵. 나는 내가 이 남자를 구하러 갈 수 없음을 알았다. 느껴지는 고통은 진짜지만, 이 자는 나와 말장난을 하고있었다. 그렇다면 장난을 파헤쳐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를 잡아 죽이고 여동생을 강간했습니다." 놀랍도록 담담한 목소리다. 지금까지 애원하던 목소리는 어디로 간 걸까.

"네? 뭐요?"

"당신 저 풀어줄 생각 없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죠? 애초에 다 알고있던 거 아닙니까. 알면서 물어본 거죠? 당신 지금 이러는 거 불법이에요. 저한테도 인권이라는 게 있어요. 제 사촌이 변호사입니다. 이딴 장난질 치는 거 걸리면 거기 있는 사람들 다 좆되는 거 알아요?"

그가 마구 소리를 지르길래, 전화기를 귀에서 떼냈다. 멀찍이 떨어트린 전화기에서도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전화기를 귀 가까이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장난 틈을 찔러볼 생각으로 한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장난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제서야 화장실 쪽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나는 문득 화장실의 상황이 염려되어서 그쪽으로 가 문을 열어보았다. 팔이 발악을 하듯이 비틀리고 있었다. 변기가 덜컹거렸다. 나는 변기가 부서지는 게 걱정이 되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끊김과 동시에 팔이 경직되었다.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굳었다. 나는 변기에 새로 갈라진 금이 몇 줄이나 되는지 세어보고 있다.





그 날 이후로 많이 불편해졌다. 화장실에 드나들기가 힘들다.

내가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 탓일까. 변기에 솟구친 팔에서 적의가 느껴졌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지만 그런 착각을 멈출 수 없었다. 화장실에 들를 때마다 지나쳐야 하는데 그때마다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때로는 행동하지 않는 게 행동이라고도 한다. 지금 그 팔이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그 자리에 있음으로서 내게 묵직한 경고를 내리고 있다. 전부 미친 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제 그 팔 옆에선 오줌도 잘 안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 팔이 보이는 한, 아니 그 팔이 보고있는 한 깊숙한 곳이 꽉 조여서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싱크대에서 오줌을 싸야 할 지경이다.

이 아파트에 있는 다른 모든 화장실들을 생각해보면 기분이 묘하다. 그 수많은 화장실들을 지나치고 길고 복잡한 배관을 타고 올라와서 도달한 게 내 화장실이라니. 내 발 밑에 펼쳐진 아파트의 높이를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이 모든 게 휘청이다가 무너지지 않는 건 기적에 가깝다. 나는 내 밑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을 두드려서 이 아파트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여기서 전부 빠져나가야 한다고 소리 치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여기 사는 사람들을 하나도 모른다. 그들도 나를 모른다.

악어를 쫓는 성질 급한 배관공이라도 좋으니, 여기로 불러서 변기를 봐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왜 나는 진작 사람을 부르지 않았을까? 너무 오래 혼자 살더니 머리가 돌아버린 모양이다. 나는 발신번호도 없는 전화만 받는 건 그만두고 진짜 사람을 부르기로 했다. 청소 용액을 부어서 배관에 꽉 찬 유기물을 녹여버릴 사람. 전지 가위로 그 손가락들을 잘라내고 톱으로 팔을 썰어버릴 사람. 아니면 단순히 팔을 붙잡고 뽑아낼지도 모른다. 뻥, 하는 소리를 내면서. 나는 사람을 부르기로 했다. 그 전에 팔이 그대로 있는지 확실히 해두려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팔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 팔을 붙잡았다. 깨닫기도 전에 단단히 틀어쥐었다. 온 몸으로 빼내려 했지만, 곧장 온 몸이 끌려들어갔다. 오른팔부터 구멍 안에 처박히고 머릴 변기에 부딪혔다. 배관 깊숙한 곳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손이 꽉 죄여왔다. 나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어깨가 뽑히고 목이 억지로 접혀 빨려들어가면서 두개골이 박살나자 할 말을 잃었다. 그 뒤엔 추측만이 남는다. 아마도 가슴이 경쾌한 소리로 부서지며 끌려들어갔을 테고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내장들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지며 뿜어져 나왔을 것이다. 피의 분무 속에서 골반이 몸에서 끊어지지 않고 잘 따라들어갔을지 모르겠다. 만약 아니라면 변기 위에 다리 두 짝만 덜렁 걸쳐져 있을 것이다. 전부 피로 물들었다. 머리가 부서질 때 튀어나왔던 앞도 보지 못하는 눈알이 시뻘건 변기 위에 둥둥 떠있다. 그 눈알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제서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눈 앞에는 아까와 같이 변기 한가운데에 팔이 솟아있었다. 화장실은 새하얀 그대로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손가락이 까딱거렸다. 때로는 행동하지 않는 것도 행동이라고 한다. 나는 사람을 부르는 건 그만두었다.




"그러니까, 젤리 통에 팔이 끼셨다고요?"

"네. 마지막 파인애플 젤리 집으려다가 손이 꼈지 뭡니까. 제일 맛있는 걸 나중에 먹으려 했거든요. 이해하시죠? 이게 빠지질 않네요."

"하… 그러면 그, 뭐냐. 식칼로 자르면 되지 않나요? 슥삭슥삭 하면 잘릴 거 같은데요."

"이게 생각보다 단단하거든요? 그렇게 자르다가 제 손까지 잘라버리면 어떡해요? 젤리 먹다가 후크 선장 되기는 싫은데요."

"아, 예… 그러면 미끄러운 건 어떤가요. 샴푸나 린스 같은 걸 틈에 뿌리고 뽑으면 될 거 같은데.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네요. 그 사촌 분 지금 계신가요?"

"예? 뭔 사촌이요? 갑자기 제 사촌 얘기가 왜 나와요? 당신 저 알아요?"

"아니요. 모릅니다."

"근데 뭔 소리야… 아, 그리고 우리 집에 그런 거 없어요. 비누도 안 써요."

"그렇군요. 그러면 그…"

"네."

"그…"

"네."

"그…"

정적.

"그냥 나가 뒤지는 건 어때요?"

"네?"

"그냥 손목 긋고 죽지 그래?"

"갑자기 왜 그래요?"

"다 큰 어른이 젤리 먹다가 통에 손이 낀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쪽팔리지도 않아요? 그딴 걸로 전화까지 해? 그냥 식칼 가지고 찢어서 열어버리면 될 걸. 그리고 손목까지 찢어버리면 되지."

"갑자기 저한테 왜 그래요?"

"질질 짜고 자빠졌네. 지랄하지 마. 너야말로 나한테 왜 그러는데? 처음엔 배관이고, 다음엔 수갑이고, 이젠 젤리 통이냐? 재미 하나도 없어. 이 지랄 좀 다 치우면 안 돼?"

전화기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질질 짜면서 손목 긋고 뒈지던지 알아서 하고 부탁인데 화장실에서 손 좀 치워. 네 좆같은 손 때문에 똥도 못 싸고 있잖아."

"…"

"듣고 있어?"

"…"

"듣고 있냐고."

"…"

"내 화장실에서 더러운 손 치우라고! 좆같은 새끼야!"

"후회할 걸."

그리고 끊어졌다.

분노에 찬, 이질적인 목소리였다.

나는 조금 떨고있다.





화장실에는 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처음 언짢아졌을 때는 나를 들어가기엔 너무 작은 구멍에 봉제 인형처럼 쑤셔넣었다. 그것도 맛보기로만. 이번엔 어떨까? 이번에도 맛보기로만 끝나리라는 기대는 접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마 근처에 발만 들여놔도 그 발목을 휘어잡고 지옥 밑바닥까지 끌고 갈 것이다. 지옥을 향해 끌고 가는 도중에 부서지고 짜부라져서 발목 위로는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도. 그러니 화장실에는 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고독하다. 아무에게도 얘기할 사람이 없었다. 떠올리면 생각나는 내 그리운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아마 먼 데로 떠났을 것이다. 내가 찾을 수도 없는 먼 곳으로. 아니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거나. 내가 기다릴 수 있는 건 발신번호도 없는 전화 정도 뿐이다. 그마저도 이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오지 않은 지 며칠이 지났다. 내가 다 망쳤다. 생각해 보니, 누가 나한테 전화로라도 말을 걸어준 게 얼마만이었지? 그것도 그리도 간절하게. 내 도움에 기대를 걸면서. 내가 누구인지, 어떤 놈이었는지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도움을 구해왔다. 어쩌면 좀 더 잘 들어주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용서를 구해볼 수도 있다. 배관의 춥고 습한 구멍을 통해서 용서를 구하며 악을 써볼 수도 있다. 그가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도는 해볼 수 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맨홀 뚜껑을 열고 지하를 향해 외쳐볼 수도 있다. 그런 나를 보고 유모차를 밀고 오던 어떤 부인이 황급히 유턴을 할 수도 있겠지만 개의치 않을 수 있다. 내가 어찌 해야 할까? 실수는 돌이킬 수 없다. 나는 결과를 기다려야 할 뿐이다. 그리고 결과는 언제나 갑작스러운 때에 찾아온다.

화장실 쪽에서 거대한 소음이, 마치 거인이 익사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수면이 콰르릉 요동치고 홍수가 거인의 숨구멍으로 쏟아들어져 오며 모든 것을 삼킬 때의 소리.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감하여 화장실로 뛰어들어 갔다. 아, 생각대로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었다. 그 팔만은 빼고. 금이 간 변기만 내버려두고 저 아래로 꺼져버렸다.

나는 주저앉았다. 폐 속의 모든 공기를 안도의 한숨으로 몰아냈다. 침입자는 나의 하얀 성채에 약간의 균열만을 남겨둔 채로 사라진 것이다. 마침내 가버렸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뻔한 일이다. 나는 먼저 변기의 물을 내려보았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으깨지고 갈라진 구멍으로 물이 잘도 내려갔다. 깨진 파편들도 함께 휩쓸려 내려갔다. 한 순간 다시 한 번 그 손이 나를 향해서 뛰쳐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수면은 너무나 고요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변기 커버 위에 앉았다. 뭘 싸려는 건 아니었고 그냥 앉았다. 그 위에 앉아서,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안도와 평화를 만끽했다.

그 길고 긴 팔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언젠가 그 팔에 붙들려 깊숙한 곳까지 끌려들어갔을 때, 나는 머리뼈가 박살나고 뇌가 눌려 터지는 순간에도 그 팔이 정말로 깊게 뻗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죽지 않았음에도, 내가 부서지고 쑤셔넣어져 죽었을 때 얼마나 깊게 내려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지각의 밑까지 뚫고 내려갔을 수도 있다. 터무니 없는 소리다. 만약에 그 팔이 그렇게 깊게 뻗어있다면, 뜨거운 유동층 밑에 웅크려 있는 몸뚱아리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얼마나 길고 뒤틀린 육체인 걸까.

그리고 내가 아는 건 그의 팔 하나에 불과하다. 다른 쪽 팔은 어디에 뻗어있을까? 땅 밑에 처박혀 있다면 다행이지만 또 어느 건물의 밑을 헤집고 솟아올라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 해도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나는 다만 걱정이 조금 피어오를 뿐이다. 내가 느낀대로 이 아파트 밑에 그리도 깊고 깊은 시추공이 뚫려있다면… 지금 그곳은 텅 비어버린 게 아닌가? 황량한 공동(空洞)이 얼마나 넓고 깊게 파여있는 것인가?

전부 쓸데없는 기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통화 내용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후회? 내가 어떤 후회를? 내 화장실에서 꺼진 것만으로 나를 후회하게 만들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아있나?

마침내 되찾은 화장실과 평화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핸드폰이 다시 진동하는 것을 두려워 하고있다. 왜 기껏 내 품으로 돌아온 안식을 내쳐야만 하는가. 나는 변기에서 벌떡 일어나 잡념을 떨쳐버렸다. 결과는 이미 마주했다. 내가 얻은 평화가 이야기의 마침표다. 그렇게 믿고 싶었으나, 결과는 이제부터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변기에 고인 물의 수면이 떨리고 있다.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서 무언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발 밑이 흔들리는 건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휘청이다가 무너지는 건 아닐지 의심스러웠다. 나는 내 밑에 살고있는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 모두에게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머무르는 건 미친 짓이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우리가 올라타 있는 배는 너무나 위험하다. 언제 파도 밑으로 가라앉을지 모르는 이런 배에 우리는 왜 올라타기로 한 것일까? 누군가는 경고했어야 했다. 그건 나여야 했다. 그러나 알아달라. 내가 그럴 수 없었음을. 여기선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전부 가라앉아 죽을 때까지 아무도.

아주 오래되고 분노에 찬 무언가가 치솟아 올라왔다. 모든 게 휘청이기에 충분할 만큼 터져 나왔다. 땅이 수면처럼 요동치니 땅 위에 세워진 건 무엇이라도 고꾸라지고 침몰할 수 있을 터였다. 가장 엄숙한 교회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내 발 밑이 흔들린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고, 사방에서 새어나오는 이웃들의 혼란과 비명도 느껴졌다. 이제 도망칠 수 없다. 나도 비명을 질렀다. 모든 게 비스듬히 쏟아져 내려간다. 모든 게 어긋나고 부서지며 기울어 간다. 파편과 먼지가 폭풍처럼 일어나는 위로 거인처럼 큰 건물이 쓰러진다. 그 꼭대기에 내가 있다.

그리고 전부 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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