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묵한 하느님께서 소리를 버리고 쓰러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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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일이니 시시?"

"나 소풍 가고 싶어."

"소풍? 소풍은 학교에서 최근에 갔잖아. 친구들과 다 같이. ██는 좀 쉬고 싶은걸."

"██랑 가고 싶어. ██ 오랫동안 일해서 같이 놀지 못했잖아. 다른 애들은 부모님이랑 같이 왔는데 나만 혼자였어."

"그래? ██가 미안해. 좀 피곤해서 그랬어."

"괜찮아. 우리 ██는 누가 뭐래도 최고니까."

"그래. 그러면 내일 가자. 내일은 날씨가 좋으니까. 같이 샌드위치도 싸 가서 먹고 물놀이도 할까? 테디도 데리고 가자."

"와! 만세! ██ 너무 좋아!"

"██도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단다. 세상 그 어떤 문제가 생겨도, ██는 너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그래?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

"그래. 약속. 절대로, 절대로 이 약속 잊지 않을 것이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았다.

초침 째깍거리는 소리가 머리를 갉아내는 것만 같았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그건 그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초조했던 적이 있던가. 신해는, 최신해 요원은,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애써 눌러가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발걸음을 한 번 옮기고는 이내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영락없이 갈 곳을 잃은 사람 같았다.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일어난 사건들이, 그에게 있어서는 막막하기 짝이 없었으니.

재단에서는 별의별 일들이 일어난다. 일반적인 상식 따위는 여기서는 언제라도 휘어질 수 있는 법이며, 조금 전까지도 같이 대화하던 사람이 언제라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될 수도 있는 것이 이 초상 사회였다. 변칙 개체란 그런 법이었다. 더군다나 특히 이곳, 제21K기지는 그런 것들을 수두룩하게 모아 둔 곳이 아닌가. 하나가 슬쩍 탈출하면 그거 막다가 다른 쪽에 구멍이 생기게 되고, 그렇게 문제가 생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늘 일의 시작은 단지 그뿐이었다. 큰 문제지만 익숙한, 차분하게 대응하면 끝날 수 있었던 일.

아, 물론 그 결말이 대참사로 이어져서 그가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사망자 없음, 일부 부상자 발생. 몇 변칙 개체가 기지를 빠져나가긴 했지만 재단의 기준으로 본다면 격리 파기 사건 치고는 썩 괜찮은 결말이었다. 특히 사건의 원인 자체는 완전 재격리에 성공하기도 했고. 그가 이렇게 불안한 것은 결국 하나였다.

요약하면, 그의 형이 탈출당했다. 다른 변칙 개체에 휘말려서 덩달아.

"그 탈출한 개체들은 아직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겁니까."
"그래. 워낙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말이지."

팀장과 전후 상황을 정리해 봐도 그의 마음은 도통 진정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무슨 심정인지는 알지만 자기도 방법이 없다는 듯이, 말 하나하나에서 걱정과 답답함이 느껴졌다.

"너도 알잖아. 여긴 변칙 개체가 너무 많아. 잡으려고 했을 때 바로 다른 놈이 나가려고 했지. 겨우 시간이 났을 때는 이미 그들은 기지를 떠난 지 오래라고. 하다못해 이후 단서라도 있으면 그거 따라가면 되는데 그것도 없으니. 핸드폰도 꺼두었고."

팀장이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그랬다. 격리된 것들은 어지간하면 탈출 기회가 왔을 때 자유를 찾으려고 할 테니까. 그런 쑥밭을 수습하기 위해 여러 부대가 제 분야에 맞는 개체를 잡기 위해 투입되었고, 그가 속한 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 큰 문제는 그 부대가 잡는 것은 다른 개체라면 장애가 될 벽 등 따윈 우습게 통과하는 영적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건 즉 어설피 묶어두는 것 따위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의미요 하나하나를 막기 위해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골든 타임을 지킬 수는 안타깝게도 없는 노릇이었다.

"깝깝한 건 잘 알아. 억까에 억까가 겹쳐서 격리당했다 복귀한 지 진짜 얼마 안 되었는데 이 사단이 났으니까. 에휴. 진짜 인생이란 뭔지."

그나마 모두가 이렇게 탈출에 연연하는 것은 아니었다. 온갖 시행착오 끝에 재단은 자신이 격리 중인 지성 있는 개체를 어떻게 하면 보다 안정적으로 붙잡아 둘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생각보다 많은 자들이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굳이 현재 받고 있는 인간적인 대우가 아닌 짐짝처럼 가둬두는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단순 방관 외에는 턱 없이 적은 수였지만 직원들을 돕는 개체들도 분명히 있었다. SCP-811-KO, 즉 최산해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더욱 당혹스러운 거고.

그때 그 상황은 아직도 방금 일처럼 선명하다.
형은 다른 사람들을 부축하고 있었지. 그때 한참 벽을 부수려고 한 것들은 엄연히 말하면 아귀지 악령은 아니라서 그 능력으로 뭘 만들어 봤자 다른 사람들이 든 무기에 비해 특별히 더 낫지도 않았어. 그래도 할 수 있는 한은 최선을 다하려고 했을 거야. 형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착한 축에 속하니까.

그리고 그것이 문제였다. 다들 전방의 적에게만 집중하지 후방으로 향하는 사람에게 신경을 돌리기는 어려웠을 거고, 그 역시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 시점에서 마음에 빈틈이 생겼던 것이었다. 아니, 사실 거기까지면 위험한 건 없었다. 그 모습을, 격리를 파기한 심령체 하나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정말 큰 문제였다. 그렇게 돌아가려던 그를 그놈이 가져갔고, 연락을 받고 겨우 도착했을 때는 그것은 아슬하게, 참으로 아슬하게 멀어져갔다. 육체째로.

계속 추격을 했어야 했을까.
아니. 팀장이 말했잖은가.
자칫 잘못하면 양쪽 다 놓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 둘 외에는 (재확보하든 죽었든)전부 잡았다는 것이 기적이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실 전혀 다행도 아니었지만, 그가 자의로 기지를 나갔다고는 오해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제 발로 나갈 거면 굳이 재단 인원을 도울 필요는 없었다, 라는 것도 있지만 그 증거만으로는 그 콧대 높으신 분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니 명예 회복을 하려면 그들을 납득시킬 만한 증거가 필요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어찌 보면 유감스럽게도, 그에게는 있었다.

신해는 동료들과는 달리 유령을 보지 못한다. 아주 강력한 것들(그러니까 심야클럽을 이끄는 똑똑한 친구라던가, 그 엿 같은 놈 같이)을 빼면, 이라고는 해도, 그건 평균적인 재단 사람들이라면 다 마찬가지였다. 그런 거 봐봤자 피곤하고 괴로울 뿐이야, 라고 다들 말하지만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답답함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그는 이런 귀신들을 막을 수 있는 장비를 자주 가지고 다녔다. 보지 않아도 그들을 찢어버릴 수 있는 무기와 그들에게 독이 되는 방어구, 그리고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관측기들. 그건 그날도 마찬가지였고. 그 도구가 가족의 명예를 지키는 증거품이 될 줄은, 그때야 전혀 생각도 못 했었지만…

그는 한숨을 쉬고 개량형 하르트만 영체 촬영기를 손으로 쥐었다.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탈출 직전의 심령체가 일렁이는 순간이 거기 있었다. 완전히 빙의가 되지 않았던 걸까? 형 특성 때문에? 왜인지는 그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이 모든 상황이 순 타의라는 것, 그리고 납치범인 심령체 자체는 아주 강력하지는 않다는 것. 정확히는 강하지 않다는 것이 부수적인 변칙성이나 지성은 논외로 한 영체의 수준만 따졌을 때지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모았을 때 범인은 하나밖에 없었다.

SCP-248-KO.

사건이 끝난 이후 그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사살된 것을 제외하면 그 둘 외에는 모두 격리실로 돌아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자신도 유령이면서 영적 개체를 증오한다. 두들겨 패서 소멸시킬 수 있고, 또 그러려고 안달이 났다.
…그리고 그는 재단도 싫어한다. 안 나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는 참… 보면서도 당황했었지. 여태껏 우리가 고생했던 건 다 뭐였나 싶을 정도로."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했지요. 혹시 정체를 밝힐 증거는 없었습니까?"

"아쉽게도 없어. 거기 애초에 방치된 폐가여서 감시 카메라 하나 없었거든. 하긴, 상대도 유령이었다면 애초에 있으나 마나였지만…"

그는 사정이 있어서 참여하지 못했지만, 재확보 작전 당시 SCP-248-KO는 어느 저택에서 절규하고 있었다고 했다. 앞에 누가 있었는지도, 재단 요원들이 오는지도 모른 채로.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죽어가는 것처럼 괴로워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그의 절규가 멈출 때까지도, 요원들이 그를 끌고 가 진공실에 구겨 넣을 때까지도, 그는 그 어떤 저항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마치 미처 부서지지 못한 허물처럼.

"이대로 그게 죽어버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 우리가 과잉 대응한 것이 아니라고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니까."

"하지만 무속학부의 의견에 따르면 아주 멀쩡하다고 하덥니다만. 여전히 성격도 고약하고."

"내 말이. 이제는 그때 단체로 헛것을 봤다고 해도 믿겠어."

그가 그때 왜 그랬는지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워낙 재단에 비협조적이라 기대도 안 했지만, 그는 의외로 순순히 답해줬다.

"내가 묻고 싶다, 시발. 그때 일은 나도 기억 안 나. 정신 차려보니 격리실이었다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날의 단서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겠지.
하지만 그날 모두가 깨달은 것은 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가 아무 저항도 못 하고 재단에 끌려온 것은 이런 변수가 없다면 힘들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런 일이 두 번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왜 굳이 그가 형을 끌고 가는 도박수를 시도한 것일까? 그 혼자만으로도 힘은 충분할 텐데?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1년 가까이 한국어도 모르는 상태로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 난리를 피운 놈이 이제 와서 가이드가 필요할 리도 없을 테고 말이다. 갑자기 픽,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이드를 해주는 형을 떠올려서였다. 웃기는 소리지, 형이 다른 것도 모르고 유령, 그것도 적대적인 유령에게 그럴 리는 없잖아.

여기서 우스운 생각은 왜 하는 건데, 아니, 애초에 범인을 알아봤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신해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근무처로 돌아갔다. 어쨌든 몸은 있다는 소리니, 무호-17이나 람다-7이 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놈 성격이라면 조금만 기다려도 알아서 우리 쪽에서 추적할 단서를 흘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박살이 난 영적 존재의 흔적 말이다.

아니, 돌아가려고 했다. 그의 휴대전화에서 벨 소리가 울리기 전까지는.
화면에 적힌 글자는 너무나도 익숙했고, 그렇기에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낯설었다.

'발신자: 형'

형의 핸드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두 눈을 비벼봐도 익숙한 글자였다.
보통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았겠지만, 문제는 그가 재단에서 일하는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따르릉. 당장 그가 알고 있는 개체만 해도, 발신자 번호를 사칭하거나 분실된 핸드폰을 주워 쓸 만한 자들은 충분히 많았다. 일개 요원이라고 해도 소속이 소속이다 보니 3등급 보안 인가도 있다. 유령이라는 특정 분야 안에서는 충분히 좋은 먹잇감인 셈이었다. 현장직이라서 얼굴도 알려져 있을 테고. 그의 변칙성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따르릉. 또 형도 형대로 초상 사회 안에서 이름이 알려진 편이었다. 예술가들의 모임 속에서도 제법 유명 인사였던 자. 유령 인권 운동이니 하면서 한풀 꺾였던 심령 예술과, 부서진 신의 신도들의 종교화가 대세였던 금속 예술을 새로이 재조명한 자. 한때는 유령 학살자였던 자. 지금은 변칙예술학부에 합류해 사실상 직원이자 비서인 것처럼 활동하는 자. 그쪽에 대해서는 조금 주워들은 것을 빼면야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적어도 가족으로서는 연관이 깊은 편이니 못 할 것도 없었다.

따르릉. 아니, 형은 지금 재단에게 적대적인, 이제 막 탈출한 심령체에게 붙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그라면 굳이 그런 복잡하게 속일 필요도 없다. 그냥 꺼두었던 기기를 켜서 걸면 될 뿐. 자신들은 적이니 협박이든 인질극이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상대는 무속학부 사람들이, 그리고 자신들이 혀를 내두르는 또라이니.

"여보세요?"

천 년과도 같은 고민은, 실상은 전화 소리 세 번에 끝났다. 지금은 현재 위치라는 정보가 정말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설령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될지라도 부딪혀서 후회하는 것이, 마지막 구조 요청을 놓쳐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더 나아 보였다. 물론 녹음은 해두었다. 이제는 습관에 가까웠다.

"신해? 다행이네. 못 받을 정도로 바쁠 줄 알았는데."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목소리만큼은 기억 속과 똑같았다. 나긋나긋한 톤에 유창한 한국어.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그는 상당히 지쳤고, 딱 그만큼 짜증이 났다는 것.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평소 성격에 그것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게 이게 거짓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았다. 심령체가 산 자의 몸에 깃들면 보통 영혼에 큰 충격을 주게 된다. 심령체 자신뿐만 아니라 숙주에게도. 더군다나 재단에 들어온 이후 조금 나아졌다고는 해도 그는 기본적으로 심령체를 싫어했다. 게다가 그런 것 때문에 자기까지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니 화가 안 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일단은 적어도 아직 빙의 상태라면 한국어로 대화 자체가 되지 않았을 테니, 의심 후보 하나는 던 채로 그는 대화를 이었다.

"누구누구 때문에 바빠 죽을 뻔하다가 이제 겨우 짬이 난 상황이야. 길게는 못 해."

일련번호로 부르려다가 정보 유출일 가능성이 있어 꾹 참았다.

"그러게. 나도 그 급발진 덕분에 죽을 맛이고. 이게 뭔 민폐냐고…"

"…근데 이렇게 대화가 가능한 건 좋은데, 그놈은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설마…"

"말도 마. 겨우 묶어 두었어. 여기가 지하철역이라서 깡통을 얻을 수 있었거든. 다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혼자 싸우는 미친놈보다는 이게 나으니까. 싸움을 빨리 끝내려면 어쩔 수 없었어."

증거는? 이라고 하려다가 전화 상대 뒤에서 나오는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말을 멈추었다. 아마도 그 통에 욱여넣은 거겠지. 저 소리는 그놈이 발버둥 친 결과겠고. 팀장님이라면 오만 욕지거리를 하는 것까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설득력이 늘었지만 이대로는 부족했다. 이게 진짜 형이라고 믿을 수 있을 만한 단서가 더 필요했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그는 한 발자국 나아갔다.

"역시 형이야. 초등학생 때 생각 나네. 그때는 참 즐거웠는데…"

"그랬지. 그때는 시간이 참 길었어. 뭐든지 될 수 있었고. 그놈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신해는 한숨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차마 막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망가진 것은 결국 자신의 잘못이었으니까. 영원히, 늙어 죽는다는 안식조차 받을 수 없는 채로 짊어져야 할 속죄의 십자가. 하지만, 지금 후회만 해봤자 무엇이 달라질까.

"어쩔 수 없잖아. 아무튼. 기억나? 학교 싸움 짱이었던 애가 나한테 돈을 뜯으려고 했는데 형이 그거 보고 맞서 싸웠잖아. 치고받고 한 건 아니고 말로 싸운 정도였지만."

"그래. 말도 마. 다음날 학교 전체에 소문이 쫙 났잖아. 어휴. 그때는 뭔 용기였는지."

"그때 나는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돈만 주면 되는데 시간 아깝다고, 만화 놓친다면서 투덜댔고. 조금만 놓쳐도 자리 없었잖아. TV는 한 대뿐이지, 보고 싶은 애니는 많지, 다른 애들도 안 놓치려고 우르르 모이지…"

"응? 넌 그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 다른 애들 얘기하는 걸 듣고만 있었는데… 굳이 말하면 책이나 운동파잖아. 뭐야."

마지막 말에서 전화 너머의 소리가 순간 차가워졌다. 조금 기분이 안 좋아졌을 때의 투다. 본격적으로 화가 난 것까지는 아니지만 이쪽에서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뭐, 사실이긴 했다. 기껏 판 함정에 말려들지 않았으니, 여기까지 알고 연기하는 거면 그건 인정해 줘야 했다.

"미안. 형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어. 알잖아, 이렇게 속여먹는 악질들이 많은 거. 뭐, 이렇게 보니 형이 맞는 것 같네."

"야, 최신해. 깜짝 놀랐잖아. 뭐, 상황이 이 모양이라 내가 화낼 상황이 아니긴 한데."

냉기가 가시고 툴툴거리면서도 상냥한, 언제나와 같은 소리로 돌아왔다. 다행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래서, 전화한 이유가 그거야? 지금 잘 묶어두었으니 데려가라고?"

하지만 그 대답은 의외였다. 아니.

아니. 그건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재단을 배신한 건가?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 당당하게 전화를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 안 돌아가면 제일 불리해질 사람은 형이었다. 애초에 당장 최산해라는 사람이 사망 판정을 받지 않은 것 자체가 자신(그리고 그 선배라는 놈)의 요청을 받아들인 재단의 자비였으니, 거기서 벗어나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신세였다. 도주 시점에서 돈이 있었을 리도 없었을 테고.

그러고 보니, 형이 큰 부상을 입고 격리된 것도 이렇게 통화하던 중이었지. 무슨 변이라도 당한 줄 알고(실제로도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고) 얼마나 걱정했는가. 나중에 그 진상을 알았을 때는 한 대 제대로 먹이고 싶었던 것을 꾹 참았었지. 대체 여기서 더 뭘 원하는 건데. 신해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걸 눈치챈 걸까. SCP-811-KO의 다음 대답은 훨씬 다급하면서도 달래는 투였다. 아니, 그러니까 돌아가기 싫다는 건 아냐. 나도 지금 이 상황이 황당할 뿐이고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어. 근데 어쩌겠냐… 지금 사악한 유령 하나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어서 잡을 때까지는 못 돌아가. 사악한 유령 누구? 그놈이라면 아무거나 공산주의자니 잡아야 한다고 할 것 같은데. 들려오는 한숨 소리. 그런 헛소리였으면 그냥 두들겨 팼지, 언제 내가 그런 말을 믿디?

"뭐, 그러시겠지. 그러면 문제가 뭐야? 지금이라면 솔직하게만 말하면 넘어갈 수 있을 텐데. 왜 간단한 방법을 택하지 않고 돌아가는 건데?"

애써 차분하게 말해보았지만 사이사이로 떨리는 불안이 섞이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감정이 섞인 향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라면 알겠지. 여러모로 예민하니까.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데 3년은 걸린 것 같았다. 설마 그놈은 아니겠지.

"해골악단."

하지만 그 대답은 그의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해골악단? 말이 제법 낯설었다. 해골악단? 아마 유령과 연관이 있겠지. 그 미친 양키가 이 때문에 기지를 뛰쳐나간 것이니. 하지만 그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대한민국 곳곳에 있는 유령 잡으라고 만든 부대에서 거의 10년은 일해 왔는데도.

"아. 맞다. 모를 수도 있겠구나. 처음 사건이 터진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잠깐. 갑자기 그의 머릿속을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최근 일이면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첫 공연이 나 일 못하고 그럴 때였어?"
"어. 이제 생각 났어?"
"응. 1년도 더 지났는데, 그 정도면 알 건 알지. 요즘 워낙 신경 쓸 사건이 많아서 잊고 있었지만."
"그래. 그 대장을 잡겠다고 막 그래. 그것만 끝나면 돌아가겠다고 협상을 하던데."

그 말을 끝으로 신해는 이마를 찌푸렸다. 머리에 보고서의 도식이 그려졌다. 상대의 목소리가 잔잔하면서도 확고해졌다. 마음의 정리가 끝나자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이거였다.

"이런 미친."

아무래도 그 풍소경이라는 양반이 이상한 방향으로 바람을 넣은 것 같았다.
원래라면 농담으로라도 이런 생각은 안 할 텐데.

이거, 협상하려는 쪽이 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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