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 202K기지 대회의실.
"네, 이것으로 145K기지와 202K 기지간의 상호표준업무계약에 대한 협의를 마치겠습니다. 이번 결정은 기존의 비대했던 202K기지의 업무 부담을 간소화하는 한편, 급증하는 심령독립체의 위협에 대한 145K기지의 대응 능력 강화로 이어질 것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나는 회의실의 기나긴 테이블의 거의 끝에서 145K기지의 젊은 기지 이사관보를 바라보았다.
그의 외침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수십년간 재단에서 일하다 보면, 비단 변칙의 장막뿐만 아니라 인간 저마다 개개인이 둘러싸고 있는 장막 안의 감정과 태도도 들춰볼 수 있게 되기 마련이다.
미래를 확신하는 미소. 정중하지만 당당한 승리자의 여유. 145K는 뜨는 해다. 그리고 202K는 점차 알맹이를 타 기지에게 내려놓는 처지에 불과하다. 드넓은 터만 남긴 채로.
나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정점에서 내려오기 전, 145K기지는 비리로 얼룩졌고 요주의 단체들의 공격으로 거의 폐가 취급을 받는 저주받은 지역이었다.
반대로 202K기지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 최대의 기지로, 찬란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145K 이사관은 202K기지에게 심령독립체를 이겨낼 수 있는 기술의 일부분만이라도 공유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었다.
그 이름이 임…임…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들은 절박했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이제는 심령독립체를 다루는 기술 전부를 145K기지에게 이관하게 되었다. 전세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145K기지는 밑바닥을 찍은 후 끊임없이 성장했다. 심령독립체들은 중정 10국이 삼대천을 통해 행했던 미신 말살 정책이 만료됨에 따라 다시금 발호하기 시작했고, 미약했던 심야클럽 같은 이들이 활개치면서 한국사령부의 최 중요 관리대상이 되었다.
자연스레 145K기지는 21K기지와 함께 심령독립체 특화기지로 선정되어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 반면 202K기지는 정점에서 서서히 내려앉아 지금은 모든 기술을 완전히 타 기지에 이관하고 있는 신세다. GOC나 혼반에 대항하기 위한 무력시설은 04K기지에, 대규모 격리관리 체계는 21K기지에, 물류 저장 기능은 37K기지에…그리고 이제 심령독립체 관리 기능은 온전히 145K기지에 모든 권한을 넘겨주게 된 것이다.
"저기요…"
나는 청년기의 대부분을 202K기지에서 보냈다. 말단 연구원으로 시작해 기지 연구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202K기지는 내 인생과도 같았다. 그러나 202K기지는 버스 안내원처럼, 텔레마케터처럼 결국 시대의 고고한 흐름 앞에 스러질 운명인 것이다. 텅 빈 껍질뿐인 기지에 더 이상 할께 무엇이 있겠는가?
"저기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린 것은 젊은 남자였다. 내가 돌아보자, 청년은 어색한 듯 웃었다.
"그…혹시 궁금한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정말 별거 아니긴 한데."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구신지?"
"아, 145K기지 곤충학부 함필규라고 합니다."
"곤충학부?"
곤충학부라니. 이번 인수인계는 심령독립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내 의문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예. 이번 회의는 기지 내 전 부서 최소 1인 참여가 원칙이라서요. 짬 맞은 거죠 뭐."
"…그래서 질문할 게 뭡니까?"
나는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스러져 가는 기지의 늙은이에게 웃으며 다가오는 질문. 무슨 의도일까. 곤충학부라는 것도 거짓말일지 몰랐다. 재단의 인원들은 협력이 원칙이라지만, 원칙이 언제나 지켜지는 것은 아니니.
"왜 145K기지랑 202K기지는 이렇게 숫자가 높은 거죠? 02K기지, 04K, 05K기지는 숫자가 그럴듯 하잖아요. 근데 저희들 기지는 이상하게 숫자가 높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좀 궁금해서요."
나는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황당한 질문이다. 하지만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질문이기도 했다.
"…..여러가지 설이 있지. 허무맹랑한 것도 있고 그럴듯한 것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실한 진실은 없어. 듣고 싶은가?"
"그럼요. 더 재미있어지는걸요."
"첫번째 설은 원래 202K기지의 경우 그냥 202 기지였다는 거지. 자네도 제19 기지는 알 테지."
"그럼요. 역병의사에 조각상에 온갖 걸 격리하고 있는 엄청난 기지 아닙니까?"
"걔는 왜 기지에 K 나 EN 따위가 붙어있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 있나?"
"어…그거야…미국에 있는 기지니까."
"그렇지. 그리고 여전히 미국 바깥의 해외기지들 중 상당수가 그처럼 오직 번호만 달려있는 경우가 많고."
"그러니까…원래 202K기지는 202기지였다는 말씀이군요. 흐음…"
"왜, 뭐가 미심쩍나?"
"그게요. 나름대로 일리는 있는데, 그렇다면 145K기지가 설명이 안 되는 거 같아요. 777K기지도 그렇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02K기지가 수도권 최대기지였을 때, 해당 설을 실제로 믿는 직원들이 많았다. 그것이 진실이던 아니던, 직원들로 하여금 타 한국의 기지들과 우리들은 다르다 라는 선민의식을 기르게 해 주었음은 사실이다. 나 역시 30년 전만 해도 그 설을 실제로 믿었었고.
참으로 바보같던 때였다.
"두 번째 설은 좀 더 깔끔하지."
"뭔가요?"
"각 지역의 대표 기지는 한 자리에서 두 자리 수. 대표 기지가 아닌 경우는 세 자리 수라는 원칙이지."
"하지만 정읍시는 기지가 하나밖에 없는데요?"
"그렇지…그래서 이 설도 신빙성은 떨어지는 편일세."
이 설은 05K기지에게 처음 수의학 관련 인수인계를 해 줄 때 그쪽 지원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05K기지는 전라도의 거점기지이지만, 그 규모가 작아 기지 인원들이 정점에서 조금씩 스러져가는 202K기지 인원들에게 약간의 열등감과 함께 비아냥대는 의미로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다.
어쩌면 한 자리 수 기지에서 일하는 말단 직원들의 경우 여전히 그 가설을 믿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말단이었을 때 첫 번째 가설을 믿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면 남은 게 세 번째 가설. 개인적으로는 이게 가장 타당하다고 보고 있는데…"
"뭔가요?"
"그냥 번호 따위는 아무 의미 없다는 거야. 그냥 랜덤이라는 거지."
"……가장 타당하기는 하네요."
"그렇지. 기지 번호를 식별할 수 있는 건 우리 재단 인원에 한하면 충분하지. 예를 들어 어떤 규칙성이 존재한다면 혼반이던, 사르킥 놈들이건 이상한 놈들이 우리 기지의 개수가 몇개인지, 무슨 거점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는 거 아니겠나? 그건 좋은 방식이 아니지."
"…그렇기는 하죠…"
청년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석연치 않은 표정이군. 뭔가 생각해 놓은 가설이라도 있는가?"
청년은 씨익 웃었다.
"실제로 세 자리 수만큼의 기지가 있는 거죠!"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허 참. 이 좁은 한반도에? 999K기지가 있는 건 알고나 있나? 그럼 못해도 999개 기지가 있다는 건데?"
"충분히 가능하죠. 수십년간 근속하신 곽 박사님도, 얼마나 많은 기지가 있는지 정확한 개수는 모르시잖아요?"
"허허…"
청년은 밝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렇다. 수십년간 재단에 근속했지만 이곳의 크기 하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202K기지는 쇠락해가고 있지만, 재단은 끊임없이 그 깊이를 모른 채 성장해 가고 있고, 이곳에서 일하는 한 꾸준히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빈 껍데기뿐이다 하더라도, 202K기지는 새롭게 다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크르륵. 생체 정보 확보 완료. 의태 실시."
곤충학과 함필규의 얼굴을 취했던 존재의 얼굴이 우르르 무너지며, 파리와 곱등이 사이의 무언가인 기괴한 형상이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기괴한 형상은 변환되며 이윽고 나이든 노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145K기지 곤충학부. 제비꽃에 부적합. 202K기지. 감시 소홀. 번식 가능 지역 다수. 번식 용이. 알낳기를 시작하겠다."
전라북도 정읍시 145K기지.
"야 함필규!"
"으음…메뚜기의 먹이는…"
"일어나라고!"
"악! 어…박사님?"
"너 202K기지 안가고 뭐해! 곤충학부에서 너 한명 가기로 했잖아."
"어…맞다 그거 오늘이었죠?"
"정하연 박사님 회의 돌아오면 넌 뒤졌다."
"히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