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륀힐드의 날개 아래 청록색 그림자가
  • 평가: +5+x

2022년, 옐로스톤 대전에서 혼돈의 반란과 광기어린 제비꽃 여신을 처치해 엄청난 명성을 쌓기 이전에·····.

브륀힐드의 비탄은 여러 방면에서 심하게 쪼달리고 있었다.

물론 상황이 훨씬 좋아진 2025년에도 쪼달리는 건 여한가지었지만 지금은 밥도 원 없이 먹을 수 있고 총알도 물처럼 쏠 수 있기라도 하지, 그때는 쌀 한톨 총알 한발까지 아껴가며 소비해야 했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했던 건 인력 부족 문제.

지원자 부족, 사망자 발생, 구주련 이사관의 까다로운 입맛·····참 다양한 원인들 때문에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은 항상 부족했다.

브륀힐드의 비탄은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 다녔고

"시월이는 학교에 다녀 본 적이 있느냐?"

아래에서 이어질 글들은 그 노력의 편린이다.

"옛날에 초등학교 3학년까지 잠깐 다니다 말았습니다."

"호오. 그럼 그 뒤로는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건가?"

"네. 202K기지에는 따로 학교가 없었거든요."

"초졸·····아니, 그것도 못 되는가."

"·····."

박시월은 옆자리에 앉아서 헛소리를 하는 구주련을 무시하고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학교에 못 다녀서 후회 같은 건 없느냐?"

"없습니다."

"즉답이로군."

"학창 시절이나 202K기지에서 구르던 시절보단 지금이 훨씬 행복합니다."

"아부 떤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흐응~."

구주련은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막대사탕을 다시 입 안에 집어 넣었다.

"고맙구나."

"뭡니까."

"행복하다고 말해줘서."

"·····."

박시월은 얼굴을 붉혔다.

2022년의 브륀힐드의 비탄은, 적어도 물질적인 면에서는 절대 행복하지 않았다.

오래된 해군 기지를 재활용한 시설은 허구한 날 누전이 일어나거나 물이 세기 일수였고, 탄약 같은 소모성 보급품들은 보충 간격이 들쑥날쑥했고, 절약을 위해 품질이 뒤떨어지는 식재들을 주로 사들인 탓에 식사의 질도 그리 좋진 않았으며, 무엇보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주제에 보수도 쥐꼬리만했다.

주련은 이런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타 기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비까지 털어가며 분주히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자신의 무력함을 체감할 때 마다 주련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숨죽여 울었다.

"안심하거라."

"·····."

그래도 괜찮았다.

"우린 반드시 날아오를 거니까."

"·····."

모두와 함께 있으니까.

"우리 둘이서, 하늘 높이 날아 오를 모두를 이끌자꾸나."

브륀힐드의 비탄은 사랑하는 동료들과 함께 살아가거나, 혹은 죽을 때 최고의 행복을 느꼈다.

"·····그러던가요."

"청록학교까진 얼마나 남았느냐?"

"잠시만요."

시월은 내비게이션으로 쓰기 위해 홀더에 넣어 놓은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당연하게도 재단 시설들은 일반적인 내비게이션으로는 볼 수 없었기에, 특수한 내비게이션 앱을 이용해서 시설을 찾아야 했다.

"십 분 정도 남았네요."

"그러냐? 다행이군. 풀숲 말곤 보이는 게 없어서 슬슬 화나려던 참이었다."

청록학교는 남양주시의 깊숙한 산골 안에 위치해 있었다.

시월은 미래의 재단 꿈나무들을 가르치는 학교 치고는 상당한 오지에 위치해 있다고, 처음 위치를 알았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요? 거기 학교 아니에요, 시월 씨.'

도로시는 시월의 의문을 깔끔하게 해결해 줬다.

'어린애들을 좀 더 쉽게 가두기 위한 감옥이죠. 단순히 격리실에 가둬 놓고 잊어버리는 것 보단 그게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니 학교 형태를 취한 거지, 본질적으로는 그냥 감옥이에요, 시월 씨.'

오랜만에 시니컬한 도로시가 나와서 당황하긴 했지만, 시월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좋은 추억이 없는 202K기지에서 유래된 시설이라는 게 거슬리긴 했으니까.

상당히.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요?"

"당연하지."

주련은 창 밖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입단하겠다는 애들이 줄을 설 거다."

"전 잘 모르겠는데요·····."

시월과 주련은 브륀힐드의 비탄 홍보를 위해 청록학교로 가는 중이었다.

주련이 아이디어를 꺼냈을 때 시월은 그 자리에서 졸도할 뻔했고, 이미 허락까지 받아 놨다는 말을 들었을 땐 진짜로 반쯤 쓰러져 도로시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수업은 지루하고 주변에 놀 거리도 없는데다 집에도 못 가는 재미없는 학교. 그리고 도파민 넘치는 작전 및 사랑스러운 동료들이 있는 52무장기지와 브륀힐드의 비탄. 어딜 고를지는 뻔하지 않느냐?"

"글쎄요."

물론 시월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브륀힐드의 비탄을 고를 생각이다.

하지만 이는 시월이 어딘가 맛이 가 있기 때문에 고른 선택지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구나."

주련은 창 밖으로 보이는 청록학교의 담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회색 담벽은 높고 견고해 보였다.

외부에서의 침입자랑 내부의 탈주자들을 모두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영 허접하군. 도로시가 주먹질 몇 방만 하면 부서질 것 같지 않느냐?"

"·····."

시월은 이번에 따라오지 않은 도로시를 떠올렸다.

맨날 시월과 붙어 다니려고 하는지라 이번에도 따라 올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몸이 안 좋다면서 시월과 주련 두 사람만 청록학교로 보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말을 하는 내내 기침을 한 데다 안색도 안 좋아 보였으니까. 감기라도 걸린 걸까.

혹시 감기가 아닌 신종 변칙 전염병이라면·····.

"·····시발."

시월은 뭉게뭉게 피어 오르려고 하는 편집증적 피해망상을 욕설과 함께 입 밖으로 내보냈다.

"응? 왜 욕하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흐음. 그럼 됐다. 기왕이면 나에게 욕한 거였으면 좋았을 것을."

"·····."

"시월이 너의 욕설 어휘력은 참으로 빈곤하지만, 발음이 좋아서 듣는 맛이 있다. 하아·····꾸준히 해 주거라."

"사양하겠습니다."

시월은 이번에 수십 번째로 욕설을 줄이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고, 그 전에 했던 다짐들처럼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정문까지는 금방이군. 속도 줄이거라."

시월은 차의 브레이크를 밟아 청록학교 정문 앞에서 멈춰 섰다.

"신원을 밝혀 주십시오."

"제 52기지의 이사관이자 기동특무부대 브륀힐드의 비탄의 최종결정권자, 구주련 소장이랑 이사관보 박시월 요원이다."

주련은 그렇게 말하고 시월에게 신분증을 건냈고, 시월은 받아든 신분증을 검문원에게 보여줬다.

"신원 확인 완료. 예정된 방문이십니까?"

"그래. 교육 목적이다."

"알겠습니다. 방문자용 주차장은 본관 건물 뒤쪽에 있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검문원은 그렇게 말하고 각 잡힌 자세로 시월에게 경례를 했다.

"수고하세요."

시월은 창문을 닫고 페달을 밟았다.

"안쪽은 제법 학교 같구나."

주련은 학생들이 체육복을 입고 축구를 하고 있는 운동장을 바라봤다.

지금은 오전 10시, 한창 수업이 진행되고 있을 시간이다.

"의외네요. 밖에는 절대로 안 내보낼 줄 알았는데."

"재단이 그 정도로 막장인 단체는 아니니 말이다."

주련은 양복 안쪽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두 개 꺼냈다.

"너도 먹겠느냐?"

"아뇨."

"계피맛인데?"

"맛은 상관 없습니다. 그리고 저 계피 싫어합니다."

"흐음. 아쉽구나."

주련은 계피맛 사탕의 포장을 뜯어 입 안에 집어 넣었다.

"·····."

주차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후우! 산 속이라 그런지 공기 한 번 좋구나!"

"·····."

"왜 그러느냐? 아!"

주련은 둘을 쳐다보고 있는 여학생 두 명을 바라보며 팔을 흔들었다.

여학생들은 대답 없이 주뼛거리면서 뒤로 가버렸다.

"쯧, 안 받아주다니 좀 무례하구나."

"우리가 그렇게 신기했던 걸까요."

"신기하고 말고! 우리처럼 아름다운 이들이 이 근방에서 흔할 리가 없지 않느냐? 그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 당하는 건·····"

"그렇다고 치죠. 먼저 교무실로 와 달라고 했었죠?"

시월은 주련의 헛소리를 무자비하게 끊었다.

"그래. 내가 앞장서마. 어디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세요."

둘은 본관 후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브륀힐드의 오늘 임무는 신병 충원.

순진한 학생들을 피와 애욕이 넘쳐 흐르는 전장으로 끌어 들이는 게 목표였다.

그게 청록의 학생들에게 있어선 더 희망 차고 밝은 미래니까.

적어도 구주련은 그렇게 믿었다.

"평생 동안 사회에게 부당한 증오를 받을 기형의 꽃들."

도로시와 함께 6형 전투 훈련을 완수하고 고유무기대응부로의 배치를 기다리고 있던 중

주련이 둘에게 찾아와 거부하지 못할 제안유혹 을 했다.

"고유무기대응부는 너희의 행복이 되어 주지 못할 거다. 아마 생명이 다 하는 순간까지 사랑은 한 모금도 주지 않을 거고, 너흰 증오만이 가득했던 삶을 저주하면서 죽겠지."

"하지만 난 너희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

"사회에게 억압 당한 너희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게 해 주마."

"그리고 당연 주머니도 두둑하게·····잠깐! 나가지 말거라! 좀 더 들어 보거라! 맛있는 것도 잔뜩 사 줄 거다! 마사지도 해주마! 행복하게 만들어주마! 제발! 으아아아아아!"

결국 시월과 도로시는 구주련을 따라 브륀힐드의 비탄에 합류했다.

구주련의 카리스마와 그 틈에서 조금씩 내비치는 허접함, 그리고 이상에 흥미를 느끼기도 했지만

고유무기대응부보단 브륀힐드의 비탄에서 활동하는 게 가족을 죽인 원수를 찾기 수월해 보였기 때문에 합류했다.

"입단을 원하는 애들이 줄을 설 거다."

참고로 열 세번을 거절당하다가 시월과 도로시가 처음으로 동의해 준 거라고 했다.

"·····."

"틀림없다."

현재 브륀힐드의 비탄 맴버들은 모두 구주련이 직접 대면으로 데려온 애들이었다.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성공률을 보면 여기도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잘 됐으면 좋겠네요."

시월은 주련의 뒤를 따라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

브륀힐드의 비탄.

"·····."

미르는 제법 그럴싸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브륀힐드 설화는 알고 있다. 사랑하는 시구르드를 모략을 통해 죽이고 자살한 발키리 이야기 아니던가. 육상에 빠지기 전의 미르는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오만가지 책을 읽는 탐구자의 삶을 살았기에 잡지식 하나 만큼은 엄청났다.

아마 이름을 지은 사람은 북유럽 신화 오타쿠가 아닐까·····하고 미르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제1강의실·····."

그렇다고 미르가 브륀힐드의 문학적 네타성에 흥미를 느껴 강연에 참가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브륀힐드의 비탄에게 큰 관심도 없었다.

"여기 맞네."

근신 처분을 당해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세르챠가 꼭 가서 봐 달라고 부탁했기에

"실례합니다."

꼭 해야 할 운동도 빼 먹어가며 참석했다.

"·····사람이 적네."

40명 정도가 한번에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제1강의실은 절반 넘게 비어 있었다.

"몽땅 여학생이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연에는 오직 여학생만 참가할 수 있었다.

"·····좀 맘에 드네."

미르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빈자리를 골라 적당히 앉았다.

"·····."

시계를 올려다 보니 오후 1시 44분이었다. 강연이 시작되려면 15분 정도를 여기서 더 기다려야 했다.

"심심해·····."

미르는 친구끼리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애들을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딱 한 명 있는 친구는 퇴학 전 근신 처분 덕에 기숙사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처지였다. 다행히 방은 계속 같이 쓸 수 있었지만, 얼마 못 갈게 뻔했다.

"응?"

강의실을 둘러 보던 미르는 맨 앞 자리에서 이질적으로 생긴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쟤는·····."

붉은빛이 감도는 피부.

남색 머리카락.

머리에 달린 기묘한 모양의 뿔.

의자에서 삐져나온 날렵한 꼬리.

그야말로 '악마' 처럼 생긴 여자애가 두꺼운 책을 책상에 펼쳐 놓고 읽고 있었다.

"이름이·····그레모리였지·····아마."

선생님들은 그레모리가 악마가 아니라, 단지 그런 몸을 가지고 태어났을 인간이라고 안심을 시켰지만

미르는 물론이고 청록의 모두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이름부터 너무 노골적이잖아·····엇."

시선을 느낀 건지, 그레모리는 고개를 뒤로 돌려 미르를 바라봤다.

"·····."

그러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예쁘다·····.'

미르가 얼빠진 생각을 하는 동안 그레모리는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어·····어?"

미르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어·····."

"몰래 쳐다 보지 마."

"응?"

그레모리는 살짝 불만스러운 말투와 표정으로 미르에게 말을 걸었다.

"기분 나쁘다고, 그거."

"아·····미안·····사과할게."

"볼 거면 지금처럼 대놓고 바라 봐."

"에?"

"·····."

그레모리는 대답 없이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

이상한 애라고는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슨 책 읽는 거야?"

"성경."

"헤에."

미르는 생긴 거랑 안 어울리는 책 선정이라 생각했다.

"종교를 믿진 않지만, 이쪽 신을 따르는 자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궁금하거든."

"단순히 흥미 위주로 읽는 거야?"

"그렇지."

"감상은 어때?"

"아브라함계 종교를 믿고 있어?"

"아니."

"음·····."

그레모리는 잠시 고민하는 티를 냈다.

"그냥,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구나. 이 정도."

"담백한 평가네."

"결국 모든 종교가 그 쪽으로 귀결되거든. 다 같이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보자! 이 방식에 의견이 갈려서 분쟁이 생기는 거야."

"흠·····."

"도착했나 보네."

"누가? 아·····."

또각, 또각.

의도적으로 내는 듯한 구두소리가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

문을 열고 걸어 들어온 건, 키가 작은 금발 여성과 반대로 여자치곤 상당히 큰 흑발 여성.

"으흠! 제법 많이 모였네!"

금발 여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교탁 앞에 섰고

"·····."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교탁 위를 바라보다가

"고맙다. 역시 센스가 좋군."

"별말씀을요."

흑발 여성이 구석에서 들고 온 초록색 우유 바구니를 바닥에 깔아서 높이를 맞췄다.

"좋아!"

금발 여성은 손뼉을 쳐서 강의실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사실 딱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미르랑 그레모리를 비롯한 모두의 이목이 둘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험한 곳에서 구르는 특수부대라 우락부락하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패션 잡지에서 볼 법한 예쁜 외모라서 놀랐다.

"예쁘다·····."

특히 미르는 흑발 여성에게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윤기 나는 흑발, 커다란 키에 맞게 훌륭한 몸매, 그리고 뭔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눈빛·····.

첫 눈에 반한 건 절대 아니었지만, 미르의 추구미에 부합하는 외모긴 했다.

"·····."

그레모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목을 가다듬고 있는 금발 여성을 바라보기만 했다.

"흠흠! 나는 기동특무부대 스티그마 11, 이하 브륀힐드의 비탄의 총대장 구주련 소장이다."

"브륀힐드의 비탄의 행동대장, 박시월 요원입니다."

구주련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박시월은 균형 잡힌 목소리로 청록 학생들에게 자기 소개를 했다.

"강연에 참석해준 청록 일동에게 감사를 표하도록 하지. 정체된 미래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주련은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깨서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지만, 너희들은 청록학교를 졸업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는가?"

"·····."

"아는 사람은 손 한번 들어 보거라."

누구나 알고 있는 미래.

하지만 굳이 직접 언급하고 싶진 않았기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냐? 좋다. 내가 말하도록 하지. 대다수는 다시 기지 격리 생활로 돌아간다. 일부는 재단에 취직하기도 하지만, 억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똑같다."

"나도, 시월이도 재단의 격리를 경험해 봤다. 덕분에 그게 얼마나 의미 없고 허무한 생활인지 잘 알고 있지. 우리들의 미래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청록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학교의 탈을 쓴 격리 시설 아니더냐? 너희들은 주말마다 소중한 친구들이랑 즐겁게 놀기 위해 밖에도 못 나가게 하는 곳을 감히 학교라 부를 생각인가?"

"·····저런 말 해도 괜찮은 거야?"

미르는 청록학교 및 재단의 격리 시스템에 대한 모욕을 늘여 놓고 있는 주련을 보며 기겁했지만

"·····."

그레모리는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주련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금부터, 너희들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길을 보여주도록 하마. 시월아!"

"네."

주련이 한창 떠드는 동안, 가져온 노트북을 빔 프로젝터 케이블에 연결하고 있었던 시월이 세팅을 마치고 프레젠테이션을 실행시켰다.

둘에게 허락된 시간은 딱 한 시간.

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빼앗아야 했다.





*

처음 20분 동안은 브륀힐드의 비탄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했다.

무력 투사 특화. 각 기지의 처리 능력을 벗어났거나 직접 처리하고 싶지 않아하는 일들을 대신 처리한다.

그 보상으로 받아가는 건 돈과 기술. 살아 남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

"뭐, 잘 죽이고 잘 살아남으면 그만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건 전혀 없지."

그 다음에는 십오 분 동안 작전 현장이 담긴 영상을 보여줬다.

총과 검, 혹은 마법으로 적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발키리들.

안타깝게도 영상은 꽤나 많은 중도이탈자들을 야기했다. 대원들이 입은 의상이 다소 음란한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끔찍하게 생긴 괴물이나 처참하게 부서지는 사람들 같이 잔인한 부분들을 아무런 편집 없이 그대로 보여준 게 두 번째 이유이자 결정적인 사유였다.

당연하게도 청록학교는 이런 영상을 틀어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었고, 애초에 입단 권유를 허락하지도 않았지만 주련이 청록 측에 조작된 강연 계획서를 제출하고 감독을 위한 교사도 은근슬쩍 간단한 암시 마법을 걸어 쫒아내는 등 다양한 뒷수작들을 부린 덕에 생긴 촌극이었다.

"나약하기 짝이 없군. 이 정도도 못 견디면 브륀힐드는 물론이고 재단 청소부 일도 못할 거다."

주련은 6명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은 강의실을 보며 혀를 찼다.

"재밌어?"

"응?"

"그렇게 보다가 스크린 안으로 빨려 들어가겠다."

그레모리의 지적대로 미르는 영상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

영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박시월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키 큰 언니였다.

시월 언니의 활약은 대단했다. 항상 앞에 서서 욕설과 호통으로 동료들을 이끌고, 무시무시한 포탄과 마법들을 보호막으로 막아 모두를 보호했다. 사실상 근접 무기처럼 다루는 건 액션도 미르의 눈길을 끄는 요소였다.

선두에 서서 동료들을 지키고 이끌어주는 상냥함. 그리고 적을 무자비하게 해치우는 잔혹함.

상당히 멋있는 사람이라고, 저런 사람이랑 함께하면 즐거울 것 같다고 미르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

그리고 검은 타이즈가 감싼 육감적인 몸이 진짜·····.

"자! 슬슬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군."

주련은 호탕하게 소리치며 남은 학생들을 둘러봤다.

"그럼 질문이나 받아 보겠다. 있으면 손을 들도록!"

"·····."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본래 이럴 때 질문을 하는 사람이 드물었기에 딱히 브륀힐드가 못나서 그런 건 아니었다.

"없느냐? 뭐 됐다. 입단 신청 및 관련 문의는 지금 나눠줄 종이에 적혀 있는 연락처로 하면 된다. 브륀힐드는 너희들의 입단을 진심으로 환영·····."

"·····."

"호오."

그레모리가 뒤늦게 손을 들었다.

"질문이냐?"

"그래."

"좋다. 하거라."

그레모리가 질문을 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미르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레모리와 주련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봤다.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었지."

"그랬었지."

"그거, 제대로 되고 있는 거 맞아?"

"·····어."

예상보다 독기가 가득한 질문이 그레모리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미르는 얼빠진 소리를 내면서 당황했다.

"흥미로운 질문이로군."

주련이 기분이 상한 기색 없이 그레모리의 질문을 받았다.

"우선 그런 질문을 한 이유부터 묻고 싶은데."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해."

"흐음."

주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솔직히 말해서, 브륀힐드의 비탄에 아직 부족한 게 많은 건 사실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시설은 열악하지, 보급은 간신히 이루어지고 있지, 게다가 유대를 나눈 소중한 동료들도 간간히 죽어 나간다."

"·····."

"우리가 이런 끔찍한 상황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 뭔지 아느냐?"

"·····."

"바로 소중한 동료들과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허망하기 짝이 없군."

"허망하다고?"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러운 아름다움을 위해 죽어나가는 게."

그레모리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살짝 어른거리고 있었다.

"호오·····."

주련은 그레모리를 흥미로워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인정 못하겠느냐? 그럼 나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느낀 증인에게 물어 보거라. 시월아!"

"잠깐? 네?"

"이제 네 차례다! 가서 저 의심 많은 소녀의 마음을 비집고 열거라! 아름다움을 증명하는 거다!"

"아니 씹·····."

시월이 뭐라 하기 전에 주련은 잽싸게 교탁에서 물러났다.

"·····시발 귀찮게 진짜·····."

"화이팅하거라!"

시월은 화이트보드 옆에 서서 손을 흔드는 주련을 노려보다가, 방금 전 까지 자기 상사가 올라타 있던 우유 상자를 발로 차서 밀어내고 교탁 앞에 섰다.

강의실에 차가운 분위기가 맴돌았다.

"아·····그러니까·····."

"박시월 맞지?"

"맞습니다."

"내 이름은 그레모리. 성은 따로 없다."

들은 자기소개를 마쳤다.

"특이한 이름이군요."

"그런 말 수천 번은 들었던 거 같네."

그레모리는 시월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행복해?"

"네."

"즉답이네. 이유는?"

"믿을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하니까요."

"그것 뿐?"

"그리고 뭐·····싸우는 게 꽤 재밌습니다."

"네 주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딱히 주인은 아닌데·····솔직히, 좀 칠칠치 못한 구석이 있기도 하고·····."

"얌마!"

"·····기지 운영과 특무대의 방향성 관련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시월은 주련이 자기 등을 가볍게 두들기는 걸 무시해가며 말을 계속 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좋은 상사입니다."

"·····싸운다고?"

"네."

"너네 주인이랑, 너랑?"

"네. 저 말고도 많은 대원들이랑 말다툼, 심하면 몸싸움을 벌이곤 했죠. 일부는 결국 브륀힐드의 비탄을 탈퇴했습니다."

"·····."

미르는 그레모리의 몸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 이유는 몰랐다.

"·····."

자기가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이기심 때문에 떠는 건 아니었다.

"·····거 참 잘 됐네."

그레모리를 사로 잡은 건 부조리 끝에 버려진 이들에 대한 연민과 주련에 대한 분노였다.

"·····후우."

그레모리는 심호흡을 한번 한 뒤에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만 하지."

아니, 질문을 끝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수고 많았다. 이제 종이 나눠주고 끝내자꾸나."

"네."

"너희들도 소중한 시간 할애해 줘서 고맙다! 졸업하고도 브륀힐드에도 쭉 관심 가져줬으면 좋겠구나! 입단하면 더 좋고! 종이 받는 대로 집에 가거라!"

한 시간 동안 이어진 특별 강연·····을 빙자한 브륀힐드의 비탄 입단 홍보가 끝났다.

신청서를 받아 든 학생들은 곧바로 강의실 밖으로 나갔고, 시월과 주련도 장비를 순식간에 정리한 후 따라서 나갔지만, 미르와 그레모리는 강의실 안에 그대로 남았다.

"·····."

정확히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굳어 있는 그레모리를 미르가 걱정하고 있었다.

"안 갈 거야?"

"·····."

"·····."

"·····야."

"어."

"아름답다는 게 대체 뭘까?"

"·····글쎄."

아름답다. 보기 예쁜 사물이나 사람, 혹은 멋지고 숭고한 행위를 이를 때 쓰는 말.

구주련이라는 사람이 주구장창 외치던 아름다움도 위의 정의에서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분명 있었다.

"너 브륀힐드에 입단할 생각이야?"

"음·····."

"아주 그냥 넋을 놓고 영상을 보고 있던데."

"·····흥미가 생기긴 했어."

"흠·····좋아. 그거야 네 자유니까. 이거 하나만 명심해라."

그레모리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미르의 귓가로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파리년의 감언이설에 절대로 속지 마."

미르가 대답할 틈도 없이 그레모리는 성경책을 들고 강의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

"썩 좋은 인상은 못 남긴 거 같네요."

시월은 오늘 강연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남겼다.

"그럴지도. 그래도 난 즐거웠으니 됐다."

"마지막 상황은 대장님이 좋아하실 것 같긴 했습니다."

주련에게 질문을 빙자한 독설을 날린, 악마처럼 생긴 여자애.

인상적인 외모 덕에 처음부터 시월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마지막에 사고를 쳤다.

"익숙한 얼굴을 만나서 반갑기도 했고."

"혹시 그 악마 여자애랑 아는 사이입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

주련은 알려 주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다양한 표현으로 돌려 말하곤 했다.

"여자애 쪽에서 일방적인 증오를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비슷하군."

주련은 조수석에 앉은 뒤 안전벨트를 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건,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 법이라지만·····."

"·····."

"오늘 일은 좀 우스운 게 아닌가 싶군."

"그렇습니까."

시월은 더 이상 주련의 옛 지인, 혹은 원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이다. 적어도 인간관계에 한해서는 시월은 너무 많은 걸 알려 하지 않았다.

기껏 구축한 친밀한 관계가 얄팍한 비밀을 하나 알았다는 거 때문에 깨져 버리는 건 원치 않았기에.

"·····."

허나 구주련 대장님이 품은 비밀을 '얄팍하다'고 넘어갈 수 있을지는, 시월 자신도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저녁은 고깃집에서 먹는 거 어떠냐? 오랜만에 둘만 나왔으니 맛있는 걸 먹고 싶군."

"대장님이 사는 거면 먹겠습니다."

"에에? 당연히 반땅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럼 소주는 대장님 돈으로 사세요."

"좋다!"

그리고 시월은 이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기에

의문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

오늘치 수업이 모두 끝난 후

"·····."

미르는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세르챠! 다녀왔어!"

평소보다 훨씬 하이한 텐션으로 들어온 미르를 맞이해 준 건

"·····왜 이제 오는데."

고양이처럼 앙칼진 목소리였다.

"미안 미안~ 수업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 뭐야~."

딱히 수업이 늦게 끝났던 건 아닌데다 평소 귀가시간과 똑같이 들어왔지만, 미르는 불평없이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로션은?"

"여기!"

"흥."

세르챠는 미르가 건낸 로션을 거칠게 가져갔다.

"먹을 건 안 사왔어?"

"응? 아니. 매점에서 사오라는 거 로션 말곤 없었잖아."

"센스가 없네·····."

세르챠는 뿌루퉁한 표정으로 미르를 노려봤다.

다른 룸메이트였으면 세르챠의 머리는 진작에 깨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르는 세르챠랑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고

이는 미르의 둥글둥글한 성격 덕분이기도 했지만

세르챠가 두 번이나 미르의 목숨을 구해줬기도 했고

무엇보다 두 번째로 구해준 건 세르챠의 근신 처분 및 퇴학의 계기가 되어버렸기에

"미안 미안~."

미르는 세르챠에게 함부로 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지."

세르챠는 자기 책상의 가장 큰 서랍을 열었다.

"아껴 먹어야 되는데·····."

서랍 안에는 양갱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기회가 생길 때 마다 세르챠가 매점에서 대량으로 사 들인 양갱들이었다.

"너도 먹어."

"고마워~."

"딱히 고마움을 바라고 주는 건 아니거든."

미르는 해실해실 웃으면서 세르챠가 건낸 양갱을 받아 들었다.

"흥."

세르챠는 책상 의자에 털썩 주저 앉은 뒤

"루살카!"

양갱을 같이 나눠 먹을 친구사역마 를 불렀다.

"·····."

세르챠의 왼쪽 가슴에서 흑색 먼지들이 뿜어져 나왔다.

공중에 떠오른 먼지들은 한 대 뭉쳐 인간과 비슷한 조그마한 형상을 이뤘고

"·····."

누더기 같은 검은 로브를 몸에 걸친, 인간 같지만 인간이 아닌 생물로 변했다.

"헤에."

미르는 양갱을 들고 자기 책상 의자 위에 앉았다.

"재단 사람들이 루살카 못 소환하게 뭐 설치하지 않았어?"

"꼬맹이 버전은 문제 없이 소환되더라고. 풀버전은 무리지만."

'심령체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음. 소통 및 상호작용은 불가.'

그게 본래 알려져 있던 세르챠의 변칙으로

이게 세르챠의 거짓말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미르 말곤 아무도 없었지만

무너지는 담벽에게서 미르를 지키려고 풀 컨디션 루살카를 소환한 이후로, 학교의 모두가 세르챠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게 됐다.

미르에게 들킨 것도 세르챠가 의도한 건 아니었다. 깜박한 운동화를 챙기려 급하게 방으로 돌아온 미르가 양갱을 루살카에게 먹이고 있었던 세르챠를 목격하는 우연이 아니었다면, 미르도 평생 세르챠의 비밀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때 세르챠 엄청 당황했었지~."

"뭘 그렇게 실실 웃어?"

"아무것도 아냐~."

"하아·····. 넌 변칙 문제 없이 쓸 수 있어?"

"응? 확인 안 해 봤는데. 잠깐만·····."

미르는 오른쪽 주먹을 꽉 쥔 뒤 정신을 그쪽으로 집중했다.

"문제 없네."

세르챠는 회색 바위로 변한 미르의 주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네·····못 쓸 줄 알았는데·····."

미르는 신체를 흰색 암석으로 만들 수 있는 변칙을 가지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대리석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재단 연구원들 왈, 기존에 알려진 모든1 광물들과 일치하지 않는 미지의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암석은 트럭에 정면으로 치어도 금만 갈 정도로 단단했다. 암석의 손상은 실제 몸의 부상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아무리 심해봐야 뼈가 부러지는 정도였다. 맨 몸으로 트럭에 치이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미르를 향해 추락하던 담벽도 아마 무난하게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세르챠도 미르의 변칙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미르를 구하려고 했다.

·····미르는, 세르챠의 그런 면을 좋아했다.

"먹어."

세르챠는 양갱을 반으로 잘라 루살카에게 건냈다. 양갱을 두 손으로 받아든 루살카는 물끄러미 양갱을 바라보다가, 한 입에 집어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볼 때마다 신기해."

"뭐가."

"루살카가 이렇게 조그맣다는게."

풀 컨디션 루살카는 세르챠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컸고, 몸의 볼륨감은 미르와 비슷했다.

그리고 엄청나게 무서웠다.

"별 걸 다 신기해 하네."

세르챠는 자기 몫의 양갱을 배어 물었다.

"브륀힐드 쪽 강연은 다녀 왔어?"

"응."

"어땠어?"

"강연을 빙자한 입단 권유더라."

"예상대로네."

미르는 청록학교에서 보기 드문 '부모가 있는 학생' 이었고, 재단 직원을 부모로 두고 있었다.

사이는 썩 좋지 않았지만 연락을 안 하는 사이는 아니었기에 미르는 그저께 한 통화에서 브륀힐드의 비탄에 대해 물어봤었다.

부모님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생긴지 1년이 지난 기동특무부대로, 무력 행사에 특화되어 있으며 전원 인간형 변칙 개체로 구성되어 있다. 항상 인력과 자금이 부족해 이사관이 미친듯이 일하고 있다. 딱 이정도.

몸매 좋은 언니와 작지만 위압감 있는 이사관이 있다는 건 아마 미르가 처음 알았을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 줄까?"

"그러던가."

미르는 세르챠에게 자기가 보고 들은 걸 모두 설명했다.

"파리의 감언이설을 믿지 말라고? 그레모리 다운 헛소리네."

"어때?"

"제법 흥미가 돌긴 하는데, 음·····."

"신경 쓰이는 거 있어? 설명이 부족했나·····."

"아니, 그건 아니고. 박시월이라는 언니 얘기가 절반이었던 거 같아서·····."

"에·····좀 심했나·····."

"기특대 설명보다 그 언니 외모묘사가 더 많았던 거 같아. 암튼·····이 정도면 들어갈 만 하네."

"그래? 좀 미심쩍은데·····."

"어짜피 난 갈 곳도 없는 걸. 너랑은 다르게."

"·····."

졸업이던 퇴학이던 격리실 행인 건 똑같은 세르챠와 다르게, 미르에겐 재단 취업이라는 길이 열려 있었다.

부모님의 빽으로 들어 온,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

강요받은 미래는 아니었기에 언제든지 걷어찰 수 있었지만, 미르에게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적어도 세르챠가 자신을 돕다가 퇴학 위기에 몰리기 전까지는.

"·····."

책임을 지라고 한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미르는 이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다.

"우와, 이름 적는 칸이 여섯 개나 있어. 자신감이 넘쳤나 보네."

세르챠는 미르가 가져온 신청서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부정적인 감정에 반응한 루살카가 양갱을 우물거리면서 다가와 같이 물끄러미 신청서를 바라봤다.

"내 이름도 적을게."

"오케이."

"·····뭔가 반응이 심심한데."

"예상하고 있었거든."

세르챠는 자신의 이름과 재단 내 식별번호 등의 개인정보를 적은 뒤 미르에게 신청서와 팬을 건냈다.

"쓸데없이 상냥하잖아, 너."

"·····."

"그리고 박시월 언니에게 단단히 매혹된 거 같고."

"아·····아니거든."

미르는 신청서에 개인 정보를 적었다.

"미르가 단단히 반할 정도면,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괜찮겠어?"

"뭐가."

'브륀힐드에서 일하는 거, 엄청 힘들 것 같은데.'

'죽을 지도 몰라.'

'무섭지 않아?'

"세르챠도 보고 정신을 못 차릴 건데."

"내가 너 같은 레즈비언인줄 알아? 으휴."

"아하하·····그러네·····."

미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걱정을 삼켰다.

"세르챠."

"왜."

"우리 같이 잘 해 보자."

"·····흥. 뒤쳐지지나 말라고."

"체력은 내가 더 좋을 건데?"

"실전 경험은 내가 더 많아."

"조그마한데다 빼빼 마른 세르챠가 무슨 수로 싸운다고."

"무식하게 크기만 한 너보다는 훨씬 실전성 있는 몸매거든? 그리고 나에게는 루살카가 있으니까·····."

"루살카는 굉장하지~. 암튼 오늘 저녁 카레인데, 가져다 줄까?"

"푸짐하게."

"오케이!"

"루살카 몫도! 잊지 마!"

"깜박 할 리가 없잖아!"

미르는 양갱을 우물거리는 세르챠와 루살카에게 손을 흔들며 방 밖으로 나왔다.

"·····저질러 버렸네."

충동적으로 가입을 마음먹은 브륀힐드의 비탄.

미르는 운동을 좀 잘할 뿐인 평범한 소녀였다.

죽거나 죽이거나를 기본으로 깔고 가는 전장에서 자신이 살아 남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를 생각은 없었다.

박시월 언니의 곁에 서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세르챠에게는 진 빚이 있으니까.

"·····좋아!"

미르는 기합을 넣고 식당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세르챠는 미르가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쓸데없이 착하다니까, 쟤는."

그렇게 말하는 세르챠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만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

세르챠는 가능하면 미르랑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미르가 함께하기를 거부하면 미련 없이 털어 버릴 생각이었다.

"미르는 미래가 짱짱하니까. 발목 잡으면 안 돼."

라고 생각하면서 세르챠는 천천히 말라 비틀어 졌으리라.

"·····."

영원히 함께 있을 수도 있었다.

세르챠가 지닌 변칙은 단순히 망자들이랑 소통하는 걸 넘어, 마음대로 지배 할 수 있었으니까.

재단도, 미르도, 세르챠가 지닌 리즈네리시취의 요정 의 혈통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미르에게는 말해 둬야겠지."

세르챠는 양갱을 우물거리고 있는 루살카를 바라봤다.

"그치?"

루살카는 대답 없이 세르챠를 올려다 보기만 했다.

"후우."

세르챠는 루살카가 올라탈 수 있게 양 손바닥 모아 앞으로 내밀었고, 루살카는 그 의지에 따랐다.

"·····."

둘은 바로 키스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흐읍."

하지만 세르챠는 키스를 하는 대신

"·····."

루살카의 머리를 가볍게 깨물었다.

·····.

오래 전, 세르챠가 방랑자의 도서관에서 자라고 있을 과거에.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는 세르챠가 쌍둥이 동생을 잡아 먹은 적이 있다고 알려 줬었다.

아직 제대로 된 의식과 인지가 형성되지 않은, 태아 시절에 말이다.

마법은 아니었다. 배니싱 트윈이라고, 현실 과학의 범주 내로 일어나는 괴이한 현상이었다.

·····.

세르챠는 쌍둥이 동생을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치웠다.

하지만 혼은 그대로 남아 세르챠에게 귀속되었고

"루살카."

"·····."

"미르에게서는 어떤 맛이 날 거 같아?"

"·····."

"루살카처럼 맛있을까."

"·····."

루살카는 아무런 대답 없이 양갱을 우물거리기만 했다.





*

청록학교는 그 상징성으로 인해

오만가지 사악함이 몰려드는 장소였고

"·····."

운명의 군세를 피해 도망치던 그레모리도 그 중 하나였다.

"이제 여기랑은 작별인가. 꽤 좋은 은신처였다."

그레모리는 당연하게도 악마, 재단에서는 타르타로스 독립체라는 쓸데없이 문학적인 표현으로 칭하는 생물체가 아니었다.

허나 종족의 외모가 그쪽의 대중적인 악마의 이미지랑 비슷한데다, 이름마저 유명한 악마랑 똑같아서 자주 오해를 사곤 했다.

어쩌겠는가, 하나같이 먹을 걸로 이름을 고르는 개미 메이드들과 다르게 집게 정원사들은 무난하게 예뻐 보이는 이름을 골랐다. 고른 이름이 우연찮게 솔로몬의 72마신 중 하나랑 이름이 겹치는 게 그레모리의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

학교 본관의 옥상 물탱크 위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그레모리는 옛날 생각을 했다.

즐거웠다. 같은 동포들과 개미 메이드, 진딧물 셰프 등의 델미나의 엘레강트 시리즈와 으쌰으쌰 하면서 주인님들을 모시는 건 정말 즐거웠다.

첫 주인인 델미나 님은 밥맛 그 자체였고 두 번째 주인인 주알 님은 다른 방향으로 밥맛이긴 했지만, 그래도 모시는 건 즐거웠다.

"우리들은 반역을 위해 창조 되지 않았다."

그레모리는 브륀힐드의 비탄 입단 신청서에다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죽을 때 까지 주인님을 섬기는 게 우리들의 운명."

앞선 생에서 그레모리는 주알과 운명을 같이했었고

"그러니 이번에도 함께해 주마."

죄인이 정당한 심판을 받는 걸 다시 한 번 보고 싶었기에

"아름다워지고 싶어서 몸부림 치는, 역겨운 파리 신님."

고고하게 빛나는 달을 올려다 보며, 그레모리는 분노로 어색하게 굳어버린 미소를 지었다.







⚠️: SCP 재단의 모든 콘텐츠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합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