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위의 소녀
Clementine

도서관은 전에 없이 한산했다.

보통 방랑자의 도서관을 생각할 제면 독자 제위께서는 무한한 높이의 서가, 기묘한 외양의 사서들, 다양한 우주에서 온 방랑자들을 떠올리실 것이다. 그 생각이 틀리지 않다. 한 블럭만 더 가면 십인십색의 도서관 이용자들이 사서나 다른 이용자들과 교류하며 도서관에 온 자기 목적을 충족하고자 하고 있으니.

한 소녀가 졸고 있는 이 공간과는 달리.

이 공간을 무어라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 이곳을 한 단어로 지칭하자면 '서재'라는 낱말이 적당할 것이다. 이 공간의 중앙에는 투스카니 양식의 거대한 탁자가 있고, 그 주위를 세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폭의 복도가 둘러싸고 있다. 공간의 끝에는 거대한 서가들이 나란히 늘어섰다.

눈썰미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곳을 금방 지나치고 말 것이다. 만일 이곳에 누군가 들어온다면, 필경 그는 도서관 서가를 아무 의도 없이 걷다가 서가의 틈새에서 고풍스러운 가구의 편린을 눈에 담은 인물일 것이다. 누가 알 것인가? 그 편린을 지나치지 않고 그 정체를 파악하고자 함이 이 공간에 들어오기 위한 제일의 행동임을.

다시 졸음에 빠진 소녀에게 돌아가 보자. 이 소녀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주의력이 깊은 독자라면 이 소녀에게 여우 귀와 여우꼬리가 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독자께서는 이 소녀의 왼쪽 종아리가 의족으로 대체되어 있다는 점을, 어떤 독자께서는 오른손의 새끼손가락과 약지가 의지로 대체되어 있음을 지적할 수 있으리라.

이 소녀는 자기 우주에서 다양한 이름을 가졌다. SCP-953의 자식, 호야의 손아랫누이, 그레이스 최의 딸.

혹은 SCP-1953-KO.

예전에 어떻게 불리었든 소녀는 어머니에게서 클레멘타인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그 이름을 유지 중이었다. 그러니 우리도 그를 클레멘타인이라고 불러주자.

클레멘타인은 졸고 있었다. 턱을 괴고 자는 클레멘타인의 앞에는 방랑자의 도서관 주간 소식지 플라나스타이 한 부가 펼쳐져 있었다. 소녀의 앞에는 다양한 두께의 책들이 켜켜이 쌓였고, 스크랩북 한 권이 그 옆에 놓였다.

그리고 지금, 그 위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얘."

"응얽!?"

클레멘타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몸을 퍼뜩 일으켰다.

"뭘 그렇게 신명 나게 졸고 그래?"

목소리의 주인이 씩 웃으며 말을 걸었다. 고풍스러운 귀부인의 외양이나, 그 말투는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여인의 존함이 바로 그 유명한 시간선 연구자 마담 몽모랑시 되시겠다.

"모…몽모랑시 선생님! 그, 그게…"

몽모랑시의 밝은 표정과 대조적으로 어린 클레멘타인의 얼굴은 썩어들어 가는 이유는, 아마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공부를 하고 싶다고?"

며칠 전, 역시 방랑자의 도서관.

해를 지나면서 강나루도 불혹에 진입하는 나이가 되었다. 어느새 중늙은이라는 칭호가 머지않은 나이를 가진 나루다. 독선과 듣지 않음이라는 몹시 나쁜 질병은 그에게도 찾아오는 듯했다.

"시간선 연구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니까요."

클레멘타인은 살짝 성난 표정으로 나루에게 성토하는 중이었다. 물론 클레멘타인도 나루가 점차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지만, 이런 주제에서는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중요한 일이 아닌가.

"아무리 우리가 도서관의 학인이라지만… 그런 불투명한 일을 시킬 수는 없어. 클레멘타인, 너 평생 이 도서관 안에서만 살 거니?"

"몇 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레요?"

"저기 다른 기묘한 생물체들은 태어날 때도 도서관에서 태어난 존재들이지만, 우리처럼 한 세상에 속했던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어. 말하자면 지하철역 밖에서 태어난 사람이 지하철역 안에서 평생 살 수 없다는 이야기야. 설령 살더라도 번듯하게 살 수가 없다고."

"그래서 다른 걸 공부하면 뭐 달라져요? 주석, 결국 어떤 세상이든 제가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나루가 한숨을 쉬었다.

"넌 꼭 마음에 안 들면 날 주석이라고 부르더라… 아주 길이 없지만은 않아. 사슴대학교에서 강사를 구하기도 하고, 어쩌면 여타 기업에 기술직으로 일할 수도 있어. 아니면…"

클레멘타인은 눈을 치켜떴다. 나루가 하려다 만 말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뭐요?"

나루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아니면 재단에서 일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잖아요."

정곡을 찔린 나루가 입을 다물었다. 재단에 대한 이야기는 둘 사이에 특히 꺼려지는 주제였다. 그 현장에서 클레멘타인을 구출한 건 나루였지만, 그 상처를 봉합할 수 있는 건 나루가 아니었다.

"…나루 아저씨, 제가 왜 시간선 연구를 제대로 배우고 싶은지 아시잖아요."

나루는 말이 없었지만, 클레멘타인의 말대로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 거대한 도서관에서 나고 자라면서, 클레멘타인은 어느샌가 다중우주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다른 가능성이 실제로 구현된 세상들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고, 그 세상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다중우주를 관통하는 존재인 도서관에서도 다른 층위에서는 별개의 가능성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클레멘타인은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물론 클레멘타인이 거기 매몰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물론 한 사람이었고, 그 사랑으로 클레멘타인을 살게 한 그 사람 하나만이 클레멘타인의 어머니, 그레이스 최였다. 다만 클레멘타인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레이스 최가 생존한 시간선에서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어떻게 지내고,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살아갈지.

그것이 하나의 동인(動因)이 되었다. 그것을 본격적으로 배우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클레멘타인의 눈동자에는 그러한 말들이 서려 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굳이 도서관 안에서만 모든 걸 할 필요는 없단 이야기였다. 넌 밖에서의 삶도 충분히 누릴 자격 있어. 그러니… 스스로 문을 닫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루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적어도 내 전대처럼… 예전처럼 항쟁 그 자체에만 집중하라고 강제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강나루가 주석이 되면서 이곳의 능구렁이 손 방향성도 달라졌다. 맹원들은 늘었지만, 집요한 항쟁과 전투는 옛일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을 모두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능구렁이 손은 이전과 아주 달라진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호야가 이 일을 보았다면 어찌 말했을지.

가늠할 수도 없었고 가늠하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클레멘타인은 그랬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고 턱을 쓰다듬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멀고도 가까웠던 혈육의 생각 따위 이제 알 게 무언가. 적어도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강나루와 담판지어야 하는 이 일이었다.

"작가님도 그쯤 해둬요."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자 강나루와 클레멘타인은 고개를 들었다.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클레멘타인이 밝게 웃었다. 휘영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휘영 언니!"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13살의 클레멘타인보다 한참 컸던 휘영이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올해에 들어서는 정작 클레멘타인과 거의 동년배처럼 보이고 있었다. 아마테라스의 가호가 있다는 뒷사정이 있기는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꽤 기이하게 여길 구도였다. 정작 휘영과 클레멘타인 본인들은 아무 위화감을 못 느끼고 지내고 있었지만.

"부탁했던 사람 찾아왔어, 클레멘타인."

"지, 진짜!? 언니 고마워!"

휘영이 건네는 쪽지를 받기 위해 클레멘타인이 후다닥 일어나는 동시에, 나루가 휘영을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휘영아,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이러기야?"

"클레멘타인이 이렇게 강하게 부탁한 적 있어요? 작가님도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자식 가둬둔다고 부모 뜻대로 되지 않아요."

자기보다 한 뼘은 더 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휘영이 나루에게 질책을 보냈다. 나루의 표정은 황당함으로 물들 뿐이었다.

"그… 아무리 그래도… 하, 휘영아, 너 많이 컸다."

"벌써 강산도 80%는 바뀌었을 시간인데 당연하죠."

휘영이 클레멘타인을 바라보았다.

"빨리 가봐. 지금 저쪽에서 기다리겠대. 위치는 적어뒀으니까 바로 가."

"하, 하지만…"

클레멘타인이 나루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너 이러다 늦는다?"

휘영이 소녀의 얼굴을 붙잡고 자기 쪽으로 돌렸다. 볼이 눌린 클레멘타인이 무어라 웅얼거렸지만, 휘영은 씩 웃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어서 가. 기회는 왔을 때 붙잡아야지."

휘영이 클레멘타인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떠나라는 신호였다. 소녀는 잠시 망설였지만, 나루를 흘끗 보고 휘영을 다시 보았다. 휘영이 엄지로 뒤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안 가면 몽모랑시한테 다시는 받아주지 말라고 할 거야!"

바람과 함께 소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달려나가는 소리가 멀어지자, 휘영은 클레멘타인이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왜 붙잡으셨어요."

"그놈의 풍파 안 맞았으면 좋겠어서 그랬지… 내 딸이나 다름없는 녀석인데."

나루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딸부자라 좋으시겠습니다."

휘영이 짓궂게 대꾸하자, 나루도 실소를 흘렸다. 허탈한 표정이었다. 다만 그 표정에는 차가움과 조소보다는 단지, 서서히 클레멘타인을 위한 지지로 변할 걱정들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렇게 마담 몽모랑시의 제자가 된 클레멘타인이었지만, 생각보다 강도 높은 과제에 매번 치이고 말았다. 오늘도 밤새 시간선 충돌에 대한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냅다 잠들어버린 것이 아닌가. 도서관에서 잠들어버린 것은 둘째 치더라도 과제를 하다 그대로 잠들어버렸다는 사실이 클레멘타인에게는 견딜 수 없이 부끄러운 일이었다.

"죄송해요…"

몽모랑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클레멘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압박을 느끼고 손가락을 오므렸다. 몽모랑시는 시간선 연구자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이전에 우선 그 사나운 인상으로 먼저 악명을 날렸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로 범상치 않은 인상을 지닌 자였다. 그런 사람의 앞에서 그 누가 긴장하지 않으랴.

그리고 몽모랑시는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이 조금 졸 수도 있지! 너 너무 겁먹은 거 아냐?"

겁먹게 한 사람이 나쁘다는 말은 입 안에서 맴돌 뿐, 감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은 실제 관측을 한 번 해볼까 하는데, 어떠니?"

풀 죽은 클레멘타인의 얼굴과, 동시에 축 처져 있던 클레멘타인의 귀가 동시에 활발해졌다.

"시, 실제요?"

"그래. 이제 배우기 시작한 지 석 달 정도 지났으니 너도 어느 정도는 가능할 거다."

빙긋 웃는 몽모랑시의 표정이 갑자기 싸해졌다.

"그래도 주의할 점이 몇 개 있다."

"뭐, 뭔데요?"

"첫째, 제한된 시간선까지만 관찰할 것. 그 이상 넘어가면 우리의 인식이 버티질 못해. 뇌에 과부하가 걸려서 죽거나 죽는 게 더 낫게 될 거다."

클레멘타인이 침을 삼켰다.

"둘째, 철저히 내 지도에 따를 것. 우리가 온 세상이나 엇비슷한 세상들은 보통 관측해도 상관없지만, 그런 곳이 아니면 굉장히 위험해. 한 번은 노출될 수 없는 죄인의 얼굴이 오만 데에 다 걸려 있던 곳도 있었지. 이런 곳들은 직시하기만 해도 아주 위험하니 조심해야 한다."

"…네."

"세 번째는… 철저히 '길'을 관측 형태로만 유지해야 한다는 거야. 절대 이동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면 안 된다. 우리는 철저히 관측을 수행하는 존재이지, 관여해서는 안 돼. 시간축과 그에 따른 사건들을 존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서관의 존재 자체도 위험해질 수 있어."

"명심할게요."

마담 몽모랑시가 빙긋 웃었다.

"그럼 따라와라. 실습을 한 번 해보자."


다른 시간선을 관측하기 위해선 우선 "길"을 내야 한다.

이때의 "길"은 보통의 "길"과 다르다.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영역에서 잠시 머물러 수만 가지의 반대편을 바라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거대한 연결복도 안에서 맞은편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다만 내부에는 무빙워크가 깔려 있고 그 위에서 계속 제자리에 멈춰있기 위해 걸어야 한다는 점이 특징일까.

그렇기에 정신력도, 체력도 많이 갉아먹는다.

클레멘타인은 자신이 만든 "길" 위에서 긴장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가라앉힌 뒤, 술식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고정한다. 준비 단계까지 마치고 나서야 눈을 뜰 수 있다. 멀리서, 상황을 주시하면서 클레멘타인을 보좌할 마담 몽모랑시가 방향과 세부를 일러주고 있었다.

모든 단계가 종결된다.

그리고 어린 여우는 눈을 뜬다.

광활하다. 시선을 던지면 끝도 없이 멀어질 듯한 세상이 눈앞에 자리한다. 오감을 깨우는 듯한 울림이 온몸으로 퍼진다.

다중우주가 저기 있다.

"진정해라, 아가. 여기서 평정 잃으면 큰일 난다. 너무 행복하더라도 그 행복감을 좀 죽일 필요가 있어."

"…네."

잠깐 멍해졌던 클레멘타인의 표정이 다시 긴장으로 물들었다. 그래, 지금은 마음 놓고 즐길 때가 아니었다. 클레멘타인은 심호흡을 한 뒤, 다시 가부좌를 튼 다리 위에 팔을 올린다.

눈에 혈기가 돈다. 아직 마셔본 적은 없지만, 술을 먹으면 꼭 내장의 위치를 느낄 수 있다고들 했다. 지금이 딱 그런 느낌이다. 직시하는 순간 온몸이 긴장하면서, 또 온몸의 세포가 서서히 자신의 존재성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이를 악물고 눈에 힘을 준다.

밝은 빛들이 눈을 스치는 듯하다.

첫 번째 우주가 눈에 박힌다.
거대한 고층 빌딩들. 지면을 달리는 차량들. 클레멘타인이 온 우주에서도 이러한 풍경은 일상의 것이었다. 비록 클레멘타인이 그 안에 있어본 적은 없었지만. 클레멘타인이 신기한 눈길로 이곳저곳을 관찰하자, 마담 몽모랑시의 목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왔다.

"신기해?"

"그럼요…! 처음으로 본 다른 세상인데… 여긴 어떤 차이가 있는 거에요?"

"음… 저긴 암끝검은표범나비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야."

클레멘타인이 잠시 정지했다.

"암… 뭐요?"

"암끝검은표범나비. 왜?"

"고작 나비 하나 차이라고요?"

"고작 나비라니! 한 종의 차이는 다중우주적 관점에서 아주 거대한 차이야! 그 차이 하나로 얼마나 다양한 문화적, 사상적 차이가 발생하는 줄 아니? 어떤 우주에서는 아스페르질루스 니게르(Aspergillus niger) 한 종이 생겨났기 때문에 세계대전이 두 개로 줄었어!"

클레멘타인이 입을 삐죽였다. 물론 그런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들었지만, 클레멘타인의 입장에서는 좀 더 드라마틱한 변화를 관찰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주들은 그럭저럭이었다. 클레멘타인의 출신우주랑 약간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수준의 우주들이 끝이었다. 물론 대통령이 암살된 우주는 꽤 흥미롭긴 했지만, 그 경우 역시 그저 그런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별 쓸모없는 우주들만 보고 말아야 하나?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말도 있었지만, 클레멘타인 안의 무언가는 자꾸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본능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열기 — 어쩌면 종족 전체에게 공유되는 혈기와 열망일지도.

저도 모르게 가속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날뛰었다.

어쩌면… 저 너머를 볼 수 있을지도.

클레멘타인은 불에 달군 채찍을 맞은 것처럼 깜짝 놀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감히 그런 생각을 했다고? 소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천생이 모범생인 클레멘타인은 사실인즉 이런 내면의 속삭임이 어색하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하다. 열없는 솜씨로 소녀는 헛생각을 날리려고 시도했다. 여우 소녀의 귀가 까닥였다.

클레멘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냐, 아니지. 쓸모없는 생각들에 지나지 않아. 클레멘타인은 작게 고개를 짓고 눈을 감았다. 그런 생각들에 휘말리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해내지도 못할 일을 굳이 생각해서 기분만 이상해질 것은 무엇인가?

클레멘타인은 "길"의 상태를 수정하기 전에 잠시 몽모랑시와의 연결을 점검했다.

전달되는 말은… 없다.

다시금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몽모랑시가 나쁜 스승은 아니었지만, 간혹 그는 이렇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가 많았다. 수업 분량보다 과제가 더 많은 것은 오로지 자기만의 시간을 더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하는 가설까지 제기되었으니.

그렇다면…

클레멘타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약간의 기회에, 생각들은 다시 고개를 내민다. 작고 검은 뱀이 혀를 내밀듯이 헛된 생각들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끔찍하고 무거운 생각이지만 어쩐지 달큰하고 무시하지 못할 향기를 풍기는 생각이기도 하다.

지금 못 할 게 무언가? 혹은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려야 이 이상의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끔찍할 정도로 달콤한 사실이다.

여기서 선생님의 말씀을 어겨야 할까? 선생님의 규칙을 무시하고,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될까?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큼 이게 가치 있는 시도일까?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어떤 심상. 밝게 웃으면서 따뜻하게 안아주는… 어떤 여인.

…엄마.

소녀가 이를 악문다.

마음이 마침내 고요하게 달아오른다. 헛됨이 진실로 변모한다. 일선 앞에서 주저하던 발이 마침내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한다.

클레멘타인은 눈을 떴다. 숨을 들이마시고, 그리고…

주어진 권역 밖으로 나아간다.

"…흐아!"

짧게 터진 탄성. 그리고 시야는 미친 듯이 빠르게 흔들린다.

우주들이 눈으로 들어온다. 눈에 들어와 뇌에 머물다가, 그리고 금세 떠난다. 요동치는 헬리콥터 안에 앉아서 폭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수백 개의 우주가 안와를 덮친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얼어붙은 세상이 보인다.

극한의 추위만이 완연한 곳이다. 얼어붙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야 저편으로 날아간다. 언뜻 아는 얼굴들이 보이는 것도 같지만, 자세히 관찰할 수는 없다.

주황색 등산복을 입은 남자가 고개를 들어 클레멘타인을 바라보지만, 클레멘타인은 어느새 넘어간다.

다이쇼풍의 세상이 갑자기 시야로 날아든다. 꿈꾸는 다이쇼 천황의 세상이다.

150년의 통치를 이루는 이 세상을 클레멘타인은 바라본다. 의체를 단 인간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황제의 치세 안에 살고 있다.

소녀는 세상 안에서 차기 육군대신직을 노리는 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지만 클레멘타인은 남자의 이름을 모른다. 남자의 군복에 한자로 仁賀保라고 적혀 있음만 가늠할 뿐이다.

옛 서부 시대풍 세상이 눈가를 스친다. 변칙과 재단의 전통적 정의가 사라지고, 여기서는 오직 서부의 규칙만이 존재한다.

동쪽에서 온 의사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얼굴에 쓴 도자기 가면이 달빛을 받아 빛난다. 이 세상에는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은 사람들이 즐비하다. 의사도 무관한 자가 아니다. 의사는 도자기를 살짝 누르고, 그리고 다시 병원이라는 이름의 판잣집으로 들어간다.

클레멘타인은 계속 나아간다. 소녀가 찾는 것은 이곳에 없다. 더 나아간다.

이 세상은 올림픽 열풍에 빠져 있다. 독수리와 UFO 형태의 마스코트를 보고, 클레멘타인은 살짝 미소 짓는다.

한 젊은 선수가 사격장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관중석에서 일련의 집단이 주홍색 로브를 걸치고 인조 생명체와 붉은 닭을 잡아 피를 온 사방에 뿌리면서 함성을 지른다. 화염을 장전하고, 남자는 심혈을 기울인다…

다른 쪽에서는 살아있는 공으로 족구를 하는 무리가 있다. 점수를 낼 때마다 관중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온다. 해괴한 광경에 클레멘타인은 눈을 끔뻑인다.

그리고 이곳은…

클레멘타인은 눈을 끔뻑이다가 다른 우주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도무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거대 케이크는 뭐고 싸이버거는 또 뭐란 말인가?

클레멘타인은 다음으로 넘어간다.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시야를 스친다. 좀비들이 득시글한 세상이 어지럽게 비명 지르고, 철의 사대부들이 지키던 존재가 깨어나 남한 자체가 사라져 버린 세상이 그 옆을 지나간다. 재단이 종교 집단화된 세상도 시야에서 명멸한다. 아예 종교화되어 버린 세상도 보인다. 기어리Geyre와 칼레프Kalef에게 제례를 올리는 사제들이 하늘을 우러른다.

시간이 오래 지나 모든 장생종들이 늙어버린 세상도 보인다. 클레멘타인은 아는 얼굴들이 나올까 유독 유심히 보지만, 아는 얼굴이라고는 거의 없다. 소녀는 자신의 손윗누이를 언뜻 본 듯하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확신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늙은 뒤의 모습을 본 적도, 볼 수도 없으니.

소녀는 계속 나아간다. 끊임없이 나아간다.

1998년에 모든 것이 바뀐 세상, 죽음이 부재하게 된 세상, 재단이라는 존재가 아예 부재하는 세상… 대체시간선들의 향연이 무자비한 속도로 뇌로 전달된다.

소녀는 어느새 자신이 꼬리를 꺼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쓰고 있던 베레모가 벗겨지고 귀가 드러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클레멘타인의 몸은 최대한 버티고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악문 입술에서 서서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클레멘타인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으므로 계속 나아갔다.

마침내 클레멘타인은 어떤 세상에 도달한다.

그 세상을 직시하자, 어떤 숫자가 뇌내에 입력된다.

88이다.

눈에서 무언가 흘러내리는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저 우주를 관찰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메운다. 익숙한 향기가 흘러나오는 공간이다. 어머니의 향기다.

클레멘타인은 그 세상에 달려든다.

익숙한 향기를 쫓는다. 세상의 세부를 관찰하기 위해 온 힘을 집중한다. 코에서 무언가 흘러나와 입술을 적신다. 피라는 것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여기서 멈춘다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클레멘타인은 핏발 선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본다. 대한민국, 저수지, 제01K기지. 익숙하면서 또 다른 공간이다. 지난 생애의 기억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지만, 클레멘타인은 어렵지 않게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다. 아는 얼굴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두통이 점점 심해진다.

더 안으로 들어가자. 기지 내부의 심층을 관측하면서, 클레멘타인은 덜덜 떨리는 아래턱에 애써 힘을 준다. 눈에 힘을 준다. 고통으로 눈물이 흐르지만, 눈을 감히 감지 않는다. 더 깊숙한 곳으로 가자. 어머니의 집무실로. 그레이스 최 이사관의 집무실로.

그리고 클레멘타인은 어머니와 조우한다.

격통.

"길"은 온통 클레멘타인의 비명으로 가득 채워졌다. 끔찍한 고통이 온몸에 전달되면서 클레멘타인은 자제력을 잃었다. 관측에서 오는 부하가,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은 것이었다.
연결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모습, 그 뒷모습을 목격한 즉시 클레멘타인은 바로 연결을 반강제로 끊어낼 수밖에 없었다.

고통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아…아아아악!!"

머리를 움켜쥐면서 클레멘타인은 피투성이로 나뒹굴었다. 손톱이 뾰족하게 변하면서 자기 몸을 할퀴고 찢었지만, 클레멘타인은 그런 것조차 조절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수천 개의 못이 두개골 안으로 파고드는 감각에, 소녀는 들을 사람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고통은 집요했다. 머리에서는 격통이, 호흡은 점차 불규칙해졌다. 발끝부터 산 채로 분쇄되는 감각이 일자, 클레멘타인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성한 오른쪽 눈이 흐릿해졌다.

도울 사람은 없었다. 여전히 마담 몽모랑시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구해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지금의 클레멘타인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을 깨달음일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 오래 지속될수록, 출혈이 심해질수록 클레멘타인의 비명은 잦아들고, 지친 신음만이 빈발할 뿐이었다. 마치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직감하듯이.

시야가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클레멘타인은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느껴진 것은 등에 닿는 도서관의 딱딱한 바닥이었다. 약간 뒤척이자 소녀는 그제야 자신이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있음을 알았다. 눈에 빛이 슬며시 돌면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누군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담 몽모랑시였다.

"…흐악!"

그야말로 날 생선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어린 클레멘타인은 펄쩍 뛰어 제 스승의 무릎에서 벗어났다. 아직 숨기지도 못한 꼬리털이 바짝 선 상태로, 소녀는 눈을 번쩍 뜨고 도서관 바닥에 착지했다.

금방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나동그라지고 말았지만.

"얼씨구. 이게 무슨 쌩쇼야."

"으으…"

넘어진 클레멘타인을 부축해서 스승은 가까이 있는 의자로 데리고 갔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생수병을 가져온 몽모랑시가 클레멘타인의 입에 물을 대 주었다. 약간 입을 축이자, 그제야 목소리가 제대로 흘러나왔다.

"그, 그게…"

상황이 어찌 되었는지보다도 일단 미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앞서서, 클레멘타인은 냅다 고개부터 숙였다.

"죄송해요…"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른 지 알기나 하니?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고…"

마담 몽모랑시도 할 말은 많아 보였지만, 우선 눈앞의 클레멘타인이 기운을 차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클레멘타인에게 물을 먹였다. 클레멘타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까만큼의 격통은 아니었으나 아직 어지러운 것은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보니 피부는 따끔거리지 않았다. 클레멘타인은 힘없는 동작으로 두 팔을 들어 보였다. 옷은 갈아입혀져 있었고, 자기 스스로 찢어버린 피부는 어느새 회복된 상태였다. 멍하니 바라보는 클레멘타인을 알아챘는지 몽모랑시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갈아입혔어. 회복 주문도 걸어뒀고. 하아… 네가 산 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요호라서긴 하지만, 그렇게 다치는 것도… 어휴, 일단 정신부터 차려 봐."

약간 시간이 지나자 클레멘타인도 일어설 정도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클레멘타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직 어지러워서라기보다는, 다가올 호령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너… 하, 내가 널 더 안 가르치겠다고 선언해도 넌 할 말 없어야 해."

클레멘타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네…"

"왜인 줄 알아? 네가 기본적인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야. 그 세 가지, 내가 지키라고 한 세 가지는 관찰의 가장 기본이야. 관찰자는 자기가 운용할 수 있는 정도만 관측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 지식이 오히려 독이 되는 거니까."

클레멘타인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조용히 끄덕였다.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서 몽모랑시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마음에 무거운 돌이 얹혀지는 것만 같았다. 손발이 차가워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볼이 떨려왔다.

울면 안 된다. 여기서 울면 안 된다. 잘못한 것은 클레멘타인 자신이고, 자신의 잘못을 저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여 울음으로 표출하는 것은 성숙한 대처가 아니다. 어머니가 가르쳐 준 길이 아니다.

꿈결처럼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잠깐이나마 눈에 담은 그 모습…

클레멘타인이 훌쩍였다.

"그럼에도… 어휴."

무언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는…

클레멘타인은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몽모랑시가 클레멘타인을 껴안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소녀는 스승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스승은 눈을 감고 있었다.

"이 못난 제자야…"

"죄송해요…"

클레멘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요동치면 바로 흐를 것 같은 눈물에, 클레멘타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양한 감정이 한데 몰아치면서 저도 이해하기 힘든 마음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네가 처음에 내게 한 말 기억 나니? 무얼 위해 여기 왔냐고 내가 물었잖아."

당연히 기억난다. 몽모랑시의 물음에 조금은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던 그 말.

"어머니를 보고 싶어서… 라고 말씀드렸어요."

"…보통 다중우주에 관해 연구하는 자들이 그런 이유로 시작하지. 만약 내 인생에서 그 사건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다르게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몽모랑시가 클레멘타인을 껴안은 팔을 풀고 일어나 옆에 앉았다. 마담은 애써 흐르는 눈물을 닦는 클레멘타인에게 잠시 시간을 주고,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내가 그랬거든."

"…선생님이요?"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클레멘타인에게 살짝 웃으며 티슈를 주고, 몽모랑시는 다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응."

"선생님도… 가족을 잃으셨나요?"

"아니, 나는 이기적이라서. 내가 다른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지. 내가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몽모랑시가 피식 웃었다.

"물론 방랑자의 도서관에 정착해서 방법을 찾았지만, 처음부터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할 때가 많았어. 그렇게 사는 나도 보고 싶었고, 그렇게 사는 나의 가족들도 보고 싶었고…"

몽모랑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클레멘타인은 대답하지 않고 몽모랑시를 바라보았다. 그 한숨의 의미가 어떤지 클레멘타인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널 내쫓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야. 넌 그동안 무지막지한 양의 과제도 군말 없이 수행했고, 남들이라면 1년이 걸릴 지식도 빠르게 습득했어. 그런 열정은 모두 네 안에 목적한 것이 있기 때문이고, 무언가 잃은 게 있기 때문이지."

몽모랑시가 클레멘타인을 바라보았다.

"그런 열정이 오늘처럼 독이 되면 안 되겠지만."

"네…"

몽모랑시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렇게 독단적으로 앞서나가지 마라. 나도 네 마음을 알았으니, 진도를 수정해 볼게."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쫓겨나지 않았다는 기쁨과 안도.

그러나 그 마음도 잠시, 방금 제 스승이 무어라 말했는지 재고한 클레멘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 잠깐만…요…? 몽모랑시 선생님…?"

"네가 좋다고 했다?"

"자, 잠깐만요…! 이… 이건…!"

"어, 열정 없어? 열정으로 한 일이 아니었단 말이지…?"

클레멘타인이 다시 울상이 되었다.

"그, 그건…!"

몽모랑시의 웃음과 어린 클레멘타인의 당황한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곧 이들 둘 다 소음에 주의하라는 사서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를 듣게 될 테지만, 지금 당장은 괜찮을 터였다. 비극으로 치닫지 않은 결말에 감사할 시간도 필요했으니.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 저편으로 거닐어가기 시작했다.

클레멘타인 최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 언젠가 다시 만나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소녀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벌써 저만치 거닐어 간 스승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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