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P-878-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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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번호: SCP-878-KO

등급: 케테르

특수 격리 절차: SCP-878-KO의 모든 잠재적 발현자를 집중 감시해 SCP-878-KO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한다. SCP-878-KO의 발현 시 이는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해당 인원의 보호를 중단한다.

설명: SCP-878-KO는 이그네이셔스 제러마이어 워싱턴Ignatius Jeremiah Washington 심령행동학 박사의 직계 혈족을 대상으로 발생하는 변칙적 현상이다. SCP-878-KO의 발현은 기간, 방식, 순서 등 거의 모든 요소가 무작위적이며 규칙성을 띠지 않으나, 공통적으로 발화를 기점으로 시작되어 워싱턴 가 혈족 1명의 소사로 끝난다. 최초로 발현된 SCP-878-KO 사례는 이그네이셔스 워싱턴 박사 본인의 분신자살이다. 자살 당시 이그네이셔스 워싱턴 박사는 분신 당시 고령 등이 원인이 된 급격히 하락한 업무 능력으로 인한 근무 부적격 명목으로 재단에서 퇴직 권고를 받은 상태였다.

SCP-878-KO의 원인이 되는 발화는 SCP-878-KO 자체와는 전혀 관계없지만 이유는 인간의 고의적인 방화, 부주의로 인한 화재, 자연적인 발화 등으로 다양하다. 또한 워싱턴 가 인원 근처에서 불이 발생하는 것이 SCP-878-KO로 매번 이어지지는 않는다. SCP-878-KO는 발생부터 종료까지 대상 인원 1명을 제외하면 일체의 사상자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SCP-878-KO가 발생이 시작된 경우, 불길의 크기가 땔감의 규모에 관계 없이 급격히 커지며 대규모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이 때 불길이 확산되는 방향은 항상 대상 인원이 존재하는 방향이며, 대상 인원이 이동할 경우 불길의 확산 방향 역시 이에 맞추어 변화한다. 대상 인원이 그 어떤 방식을 이용해 대피하거나 생존하려 시도하더라도 해당 방식은 모두 역효과를 낳으며, 결국 불길에 휩쓸려 소사하게 된다. 대상 인원이 완전히 사망한 이후 불길은 즉시 사그라든다. 특이하게도 이러한 일체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도중 불길 또는 그로 인해 수반되는 붕괴 등의 부차적인 피해로 인한 사상자는 오직 대상 인원 1인으로만 한정된다.1

재단이 SCP-878-KO에 대해 최초로 인지하게 된 계기는 이그네이셔스 워싱턴 박사의 분신 이후 재단에서 기동특무부대원으로 근무하던 차남과 회계사로 근무하던 장녀가 연이어 방화로 사망하며 워싱턴 박사의 자녀를 대상으로 고의적인 범죄가 저질러졌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부터였다. 재단 보안부에서는 수사를 위하여 워싱턴 가 및 주변 인물들의 인적사항을 조사하던 도중 이그네이셔스 워싱턴 박사의 동료 직원들로부터 SCP-878-KO와 이그네이셔스 워싱턴 박사가 과거 예언 능력을 가진 개체의 격리를 맡던 중 받은 예언이 서로 연계되어있을 가능성을 파악하였다.

해당 예언의 내용은 "이그네이셔스 워싱턴의 피를 이어 받은 자는 불타 죽을 것이다."였으며, 이를 근거로 SCP-878-KO의 SCP 등록과 함께 생존해 있는 워싱턴 가 인원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 방안이 여럿 수립되었으나, 이는 SCP-878-KO를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증명으로 이어졌다. 또한 예언의 내용과 같이 SCP-878-KO의 대상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오로지 이그네이셔스 워싱턴 박사 본인 및 본인과 피가 이어진 후손으로만 한정되어왔다.

SCP-878-KO로 인한 사망자 중 워싱턴 가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일자 성명 원인 관계
1968/09/11 이그네이셔스 워싱턴 분신 본인
1977/03/12 서배스천 워싱턴 방화 차남
1977/03/20 엘리자베스 워싱턴 방화 장녀
1979/12/12 실비아 워싱턴 화재 차녀
1990/06/09 프레드릭 워싱턴 방화 삼남
1997/05/08 세실 워싱턴 화재 장남
1997/05/10 세실 워싱턴 주니어 화재 조손
2005/09/23 클래리스 워싱턴 화재 조손
2013/11/14 레이먼드 워싱턴 방화 조손

부록 1: 발췌 - 《주저주술학 일반론》

저주의 전파가 이루어지는 가장 일반적이고 흔한 방식은 혈연이나 가족, 또는 친지관계를 매개로 삼은 감염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대표적으로 다양한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저주-예를 들어 유령이나 불운 같은-에 시달리는 집안의 이야기가 있다.

이는 간단한 이치인데, 자고로 저주라는 것은 깊은 원한, 즉 사무치는 마음이나 복수심에서 기인한 폭력성이 주술적인 형태로 상대에게 방출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독자 여러분이 분쟁에 시달린다고 할 때 분쟁의 당사자 다음으로 원한이 가기 쉬운 상대가 누구일 것 같은가? 십중팔구는 그 가족을 꼽는다. 조금 사담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변칙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는 필자가 격리 담당자를 맡고 있기도 한 SCP-878-KO를 꼽을 수 있다.

SCP-878-KO의 첫 번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저주의 당사자, 나의 친우 이그네이셔스 워싱턴 박사가 재단에서 한창 근무하던 당시- 속되게 말하자면 전성기로 한 번 돌아가 보겠다. 이그네이셔스 워싱턴은 초창기 심령행동학의 중흥을 이끈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성취한 업적에도 불구하고도 이혼을 비롯한 수많은 싸움에 휘말렸기에 인격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가끔은 지인이었던 필자조차도 조금 꺼림칙함을 느낄 정도였다.).

SCP-878-KO를 내놓은 개체는 워싱턴 박사의 소관 아래 있던 어느 점쟁이였다. 당시 재단은 온갖 점술가, 예언가, 영매사 등을 잡아들이며 변칙 현상이 민속학적으로 정상사회에 뻗친 가지를 쳐내려 하는 중이었고, 당시의 여느 점쟁이건 늘 그러했듯 개체에게는 성격이 괄괄하고 거친 성미가 있었으니 재단과, 그 동시에 워싱턴 박사와는 늘 충돌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 특별한 점이 있다면 대상은 동시에 유령이기도 했다는 점일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 저주나 다름없는 예언이 워싱턴 가에게 전달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귀신들만큼 원한의 활용을 가장 잘 수행하는 개체는 없으니까. SCP-878-KO는 필자에게 있어 가장 독특한 주저주술학 개체 사례이자, 격리 담당자로서 마주했던 제일 큰 난적이다. 독자 여러분에게 하나 일러두자면, 혈연을 매개로 삼는 저주가 끊기도 가장 어려운 법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니까.


기타: 본 발췌문의 필자 마이클 브릭스Michael Bricks 주저주술학 박사는 1983년 SCP-878-KO의 예외적 발현으로 사망했다.

부록 2: 증언 - 세실 존 워싱턴Cecil John Washington 이사관/1990.06.10

저희 가족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딱히 없습니다. 이혼 후부터는 어머니 품에서만 자랐으니까요. 자살하셨단 소식을 들었을 땐 확실히 조금 충격받긴 했습니다만, 그게 전부입니다. 그 뒤로는 잊고 살았어요. 따지고 보면 오히려 작고하신 마이클 브릭스 교수님이 저희한테는 실질적인 아버지에 더 가까울 겁니다. 정서적인 의미에서 저희 가족을 나름 신경 써 주셨고, 교수님의 자식들과도, 대가족처럼, 사실상 호형호제 하면서 지내는 사이였으니 말이죠. 결국 교수님도 가셨으니 변함은 없는 걸런지요.

SCP-878-KO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아버지, 그분이 돌아가시고도 한참 나중에, 10년도 더 지나서, 세브Seb의 장례식 때였습니다. 한창 젊을 때였죠. 기동특무부대 일원으로서 충성스럽게 뛰다 전사했을 뿐이라 생각했으니, 저야 당연스럽게도 처음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불쌍한 서배스천, 하고 애도할 뿐이었죠. 그런데 아버지 친구라는 사람이 저희를 구석으로 부르더군요. 뭔가 미심쩍은 게 있다면서 말을 걸어오더란 말입니다. 그날 처음으로 저희는 뭔가 잘못 태어난 아이들이란 걸 알았죠.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비 때문에 평생을 같이 산 친동생을 그렇게 잃은 겁니다. 그런 억지스런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날 또 다시. 이번에는 엘리Ellie가, 누나가 죽은 겁니다. 장례식이 파하자마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차역에서. 어떤 머저리 같은 놈이 냅다 불을 질러서요. 화마가 진노한 듯이 달려와서는 엘리만, 딱 엘리만 정확하게 태워버리고는 그대로 사그라들었다고요. 신문이 그 일을 뭐라고 실었는지 아십니까?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죽은 사람은 수천 명 중 단 하나였다면서. 고작해야 엘리 하나뿐이었다면서. 그렇게 떠들어댔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 괜찮을 거라고 다독여 주던 믿음직한 누님이 어느 새 싸늘한 시신으로 돌변해 있던 기억이란.

그 일 이후로, 무슨 짓을 해서건 남은 애들은 살려보려고 했습니다. 밤을 새워가면서 연구에 몰두해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가설과 이론을 세워 보건 그 "모두 불타 죽는다" 그 한 마디를 넘을 수가 없었다고요. 실비아 때는, 저 스스로, 문자 그대로 몸까지 불사르려 하면서 도박수를 두기까지 했었는데. 차라리 대신 죽으려고까지 해 봤는데. 하나도 소용이 없었단 말입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그 빌어먹을 놈의 불길이 아주 매끄럽게, 저만 휑뎅그렁하게 남겨 두고는, 방향을 틀어서 가버려서였습니다. 그제서야 뒤늦게 깨달았죠, 제가 뭘 하건 남들이 뭘 하건 우린 어차피 죽는다는 걸.

어제 프레드Fred가 죽었습니다. 그걸로 제 가족 넷을 잃은 셈입니다. 다섯이던 남매가 이젠 저만 빼고, 전부 사라졌단 말입니다. 장남이란 놈이 혼자 비굴하게 살아있는데, 저처럼 한심한 놈이 또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지쳤습니다. 차라리 아버지를 본받아서 아예 확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버릴까, 그렇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무서워서 도저히, 실행할 엄두가 나지를 않더군요. 겁쟁이 같이. 그래서 아무 것도 못 한 채로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어차피 언제 찾아오건 도망치지도 못할 걸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몇 년이나 더 살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솔직히 별 상관 있나 싶습니다. 지금 죽나 늙어서 죽나 언젠가 저는 관 속에 처박힐 텐데요. 요사이엔 꿈을 꿔도 늘 장례식이 보입니다. 차라리 그렇게 제가 죽어서라도 저주가 끝난다면 좋을 텐데,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저에겐 아들이랑 조카 녀석들이 있지 뭡니까.

그 애들은 저희 집안의 운명에 대해선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실비아의 외동딸은 이제 학위논문을 준비 중이고, 서배스천의 아들은 아직도 새아버지가 자기 친부모인 줄 알고 있습니다. 제 아들은 브릭스 씨의 손녀딸에게 한창 빠져 있더군요. 결국 그냥 젊은 애들일 뿐이죠.

생각해 보니, 어쩌면 저처럼 평생을 후회랑 공포 속에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영원히 모르는 채로 평화로이 살다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그 애들에게 도저히 사실을 가르쳐 줄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잠재운 채로 태워버린다면 차라리 편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발상이요. 적어도 고통스럽지는 않을 테니.

이 생각은 정말로 제가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걸까요, 아니면 다음으로 죽을 순번을 넘기고 싶다는 공포감이 저를 합리화시키는 걸까요. 어느 쪽이건 제가 제 자식마저도 진심으로 죽기를 바라는 더러운 인간인 건 변함없을 것 같습니다.

부록 3: 면담 - 세실 존 워싱턴 주니어/1997.05. 08.

면담자: 매거릿 브릭스Margaret Bricks 간호장


<면담 개시>

브릭스 간호장: 왔구나, 세실.

워싱턴 주니어: 무슨 일이에요, 누나? 직장에 초대를 다 하고.

브릭스 간호장: 네가 좀, 알아둬야 할 SCP가 있어서 말이야.

워싱턴 주니어: 고작 그거에요? 아깝다, 데이트라도 하려는 건 줄 알고 괜히 설렜잖아요, 누나. 너무해. 근데 저 아직 여기 직원도 아닌데요? 문서 같은 거 보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브릭스 간호장: 어차피 나중에 들어올 거잖아. 재단 부모님 둔 애들은 다 그러더라. 참,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미리 말하겠는데, 이 SCP는 너희 부모님이랑 연관되어있는 거야. 정확히는 네 아버지, 아니 할아버지 대부터 너까지.

워싱턴 주니어: 네? 제 아빠가요?

브릭스 간호장: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너희 친가 쪽. 그러니까 워싱턴 피를 물려받은 사람들, 그러니까 너희 할아버지… 미안. 설명이 자꾸 꼬이네. 말하자면 너희 할아버님, 이그네이셔스 워싱턴 씨와 유전적으로 자식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 있어.

워싱턴 주니어: 아,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저희 집안이 SCP한테 모종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 거군요?

브릭스 간호장: 정확히 이해했어. 그 영향이 약간, 일종의 수명이랑 연관된 문제거든.

워싱턴 주니어: 수명이요? 뭐 할아버지가 악마랑 계약하고 수명이 반으로 깎이기라도 했대요? 아직 못 해본게 많아서 일찍 죽을 순 없는데. 설마 진짜 그런 건 아니죠?

브릭스 간호장: 그런 건 아니야. …있지, 세실. 짧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그게… 일단 넌 네가 어떻게 죽게 될 지 생각해본 적 있어?

워싱턴 주니어: 어떻게 죽을지요? 아직 그런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요, 사람을 왜 그렇게 시한부처럼 말하고 그래요. 일찍 죽는 건 아니라면서. 저 지금 좀 무서워지려고 하는데요.

브릭스 간호장: 네 할아버지께서 예전에 한 가지 예언을 받으신 적이 있대. 후손들이 전부 불에 휩싸여서 생을 마감할 거라는 예언.

워싱턴 주니어: …네? [기침] 타죽는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브릭스 간호장: 그 말 그대로야. 너희 할아버님부터 너희 아버지 형제, 자매 4명까지 전부 다 소사하셨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고. 예전에 내 할아버지가 화재로 돌아가셨단 얘기 들었지? 그분도 너희 할아버님한테 수혈받은 적이 있다는 모양이야. 당연히 이그네이셔스 씨의 친손자인 너도… 마찬가지로 죽게 될 거래.

워싱턴 주니어: 하느님 맙소사.

브릭스 간호장: 충격이 클 수도 있어, 그래도…

워싱턴 주니어: …아니에요. 누나. 난 괜찮아요. 좀 놀라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일이라고 생각되진 않는걸요 뭐. 고작 그 정도 가지고. 저는 말이죠, 오히려 굳이 그런 죽음의 운명이니 하는 시시껄렁한 현상 따위를 두려워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죽는 거야 언젠간 일어나는 일 아닌가요? 아니, 뭐. 확실히 불타 죽는 건 많이 아프긴 하겠지만요. 언제 죽는지는 결국 무작위로 일어나는 셈이잖아요. 그렇다면야, 차라리 기대는 접어 두고 지금 즐겁게 살 생각이나 하는 게 훨씬 나은 거죠. 어쩌면 오히려 더 좋은 걸지도 모르지 않아요? 반대로 불타 죽지만 않으면 무얼 해도 살아남는다는 말이잖아요.

브릭스 간호장: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다. 너 어렸을 때부터 몸이 좋은 편은 아니었잖아. 혹시 많이 충격받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기우였나 보네. 네 아버지께서도 그런 일을 우려하셔서 너랑, 자기 조카들한테는 꽁꽁 숨기셨던 거였거든. 받아들이기 쉬운 일은 아니니까.

워싱턴 주니어: 나 참. 제 아버지는 사고방식이 너무 구세대적이시라 곤란하다니까요. 저도 성년이 된 지 한참 지난 사람인데. 사실을 들은 권리 정도는 있다고 생각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제 운명 정도는 저도 알 수 있을 텐데요. 뭐, 이런 게 세대간 차이라는 거 아니겠어요. 아버지는 눈 앞에서 온 가족을 잃어 보신 분일 테니 더 예민하게 반응하실 수밖에 없겠죠.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테니. 그것보다도, 누나도 할아버지가 그 일로 돌아가셨다고 했잖아요. 그럼 누나네 가족한테도 남 일은 아닌 거 아녜요?

브릭스 간호장: 거기서 오히려 날 걱정하는 거야? 고맙네. 하지만 너희 집안은 지금까지 다섯이었어. 우리는 할아버지 한 분이셨고. 애초에 규모부터가 다를 뿐더러, 할아버지 말고 불 때문에 돌아가신 분은 없거든. 우리 가족이나 연구하시는 분들이나 할아버지 외엔 영향이 없다고 보고 있대.

워싱턴 주니어: 에이, 뭐야, 그럼 괜히 걱정한 거였잖아요.

브릭스 간호장: 너는 거기서 웃음이 나오니? 됐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이라 좋네. 나도 그런 사고방식을 가져보아야겠는걸.

워싱턴 주니어: 그래야 누나죠. 설마 당사자인 내가 사실을 알고 나서도 이렇게나 멀쩡히 있는데, 딴 사람도 아니고 누나가 내가 충격받을까봐 혼자서 속 썩이고 있던 거에요? 왜 그래요, 답지않게. 거기다. 피가 문제라면 바꾸면 되는 거 아녜요? 그러고 보니 제 사촌동생 중에 어렸을 때 백혈병이었나 때문에 피를 완전히 갈아끼운 애가 있거든요. 기억하시죠? 저번에 병문안 갔을 때 만난 애.

브릭스 간호장: 기껏 걱정해줬더니 얘가 말은. 그런데 피를 바꾼다는 건 골수 이식 같은 거 말하는 거지? 그거라면 가능할 법도 하네,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뭐, 어쨌든 오늘 면담은 끝났어. 조금 후에 안내해줄 사람 오니까 거기서 가만히 기다려라. 난 먼저 갈게.

워싱턴 주니어: 알았어요. 그럼 주말에 봐요, 누나.

<면담 종료>

부록 4: 견해 - 법의학과 앨프리드 아크필드Alfred A. Arkfeld 교수, 토마스 D. 강Thomas D. Kang 선임연구원, 알타룬 아크필드 Altalune Arkfeld 박사/1997.05.08.

SCP-878-KO 관련 부검은 지금껏 모두 우리가 맡아왔네.

드물지. 온 가족이 순수하게 통째로 한 SCP로 묶이는 일은. 사실 정확하게 보자면 이번 878KO 건도 완전히 워싱턴 가족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나. 이미 그 외 희생자가 발생한 판국에 말야.

일단 그 가족이건 아니건 간에, 하나 확실하게 해두자면 시체 자체에 변칙성 따위는 없었네. 예언학자들이 일컫기를 SCP-878-KO는 확률변칙이니 어쩌니 하는 종류라더군. 그 말이 적당한지는 잘 모르겠다만, 의학적으로 바라볼 때에는 꽤나 잘 들어맞는다고 보네.

설명하자면, SCP-878-KO로 인한 시체에서는 어떤 수단을 쓰건간에 변칙성을 나타내는 흔적이 검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라네. 이게 변칙 현상으로 인한 사망자에게서는 굉장히 드물게 검출되는 현상인데 말일세. 당연한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변칙적 현상은 그 현상이 정상성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발생했음을 암시하는 증거를 남긴다네. 그게 흄 준위의 변화건, 변칙적 잔여물이건, 생명에너지의 변형 흔적이건 간에 뭐든.

그런데 SCP-878-KO에서만큼은 아무리 뒤져봐도 그런 증거물을 찾을 수가 없었네. 단 하나도. 발화 쪽을 보면 방화에서 일부 변칙적 사례가 이용된 예가 존재하긴 하지만, 각각의 사례에 공통성이 없지. 결론적으로 SCP-878-KO는, 단순하게, 화재로 인해 특정 인물이 소사할 확률이 천문학적으로 높다는, 확률의 문제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일세. 그게 재단 예언학부와 부검부가 공동으로 내린 소견이지.

따라서 SCP-878-KO를 제일 확실히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예 발화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야. 그런데 알지 않나, 이론적으로나 이게 가능하지, 무슨 극지방도 아니고 실제로 불이 아예 발생할 수 없는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생활하는 건 불가능할 따름이라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 한다면 예언학자들이 세운 가설이 있긴 하다네. 실패하는 사례가 많아 예언 해석에서는 기피되는 경우가 많지만 성립할 경우에는 확실히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으로 꼽힌다던데, 예언의 정의를 역이용하는 것일세. 말하자면 예언은 자신의 대상을 "워싱턴 가의 인물"이 아니라 "워싱턴의 피를 지닌 인물', 즉 피붙이로 한정지었고, 실제로도 지금까지 죽었던 인물의 배우자들에게는 아무 이변도 없지 않았나.

유일한 추가 사망자가 의료 기록 상으로 워싱턴에게 수혈받은 경험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문자 그대로 몸에 워싱턴의 피가 흐르는 인물이 곧 타깃이라고 볼 수 있네. 따라서 체내의 혈액을 전면적으로 교체할 경우 SCP-878-KO에서 해방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지. 투석을 통해 혈액을 교체하거나, 아예 골수나 조혈모세포째로 이식하는 방법이 있다고 볼 수 있다네.

성공할 가능성은 낮네. 시도해볼 가치는 적잖이 있지만, 본인들이 받아들일지가 문제지. 몇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이니만큼 이러한 의견에 대해 현재 집안의 기둥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아버지 쪽 세실 워싱턴 말일세—에게 형식적으로 답변을 구해 보았다만, 역시나 거부했었네. 이미 포기하고 달관한 상태에 가까워 보이더군. 애초부터 워싱턴가 3세대들에게 SCP-878-KO를 숨겨야 한다고 가장 극렬히 주장했던 인물인 만큼 찬성할 거란 생각은 낮았지.

하나 상부에서는 워싱턴 가 인원 전체를 SCP-878-KO의 부산물쯤으로 취급하고 있네. 세실 그 사람이 재단 인원이건 뭐건간에 변칙 현상에 휘말린 장본인인 이상 발언권을 부여하지는 않을 생각이란 말일세. 그런 연유로 3세대 워싱턴가 인원 중 화재에 제일 취약할 가능성이 높은 유소년층을 대상으로 이식 실험이 진행되었지. 실험이라고는 해도, 고작 진단서를 위조해서 혈액암을 명목으로 워싱턴과는 관계없는 부모 쪽에게 이식했을 뿐이지만.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모르니 강행시켰지.

이러한 사실들을 놓고 볼 때, 나는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SCP-878-KO는 유전 및 혈액을 통해 감염되는 유전병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했었네. 적어도 정직하게 규칙을 따라 전파되니 말일세. 재단에서는 어떤 방법을 써서건 SCP-878-KO를 끊어 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 중이었다네.

그런데 오늘 세실이 죽어버리면서 그게 모조리 뒤집혀버리고 말았네. 완전히 예상 밖의 사태가 일어나고야 말았어. 기지가 무너지는 바람에 부검은커녕 시신 회수조차 못 했다고 지금. 세실 그 인간이 죽은 건 별 문제 안 되네. 어차피 언젠간 죽을 인간이었어. 그런데 다음이 문제란 말일세, 그 다음이.


SCP-878-KO는 그 때 두 번 연속으로 발현했습니다. 첫 번째가 세실 씨였죠. 자동차에 문제가 있었던 건지, 엔진에서 발화가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그대로 자가용과 함께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소사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것뿐이었다면 평범한 사망 사고였겠지만, 주행 중이던 자동차가 속력 그대로 불타는 채 돌진해버리고야 만 겁니다.

세실 씨의 승용차는 그대로 재단 기지 외벽에 충돌했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자동차가… 폭발하더군요. 직후 기지 전체로 불이 옮겨붙었습니다. SCP-878-KO가 또 다른 SCP-878-KO의 트리거가 된 셈이죠. 불타는 기지에서 대피가 이루어졌던 만큼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습니다만, 늘 그렇듯이 화재 자체로 인한 피해자는 최초 근원지인 세실 워싱턴 씨를 제외하면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2번째 발현자의 이름은 매거릿 브릭스 양, 초대 격리 담당자를 맡으신 마이클 브릭스 박사님의 손녀입니다. 브릭스 가 사람들이 워싱턴 집안이랑 관계가 깊은 사이였던 모양이라, SCP-878-KO 격리에는 꾸준히 참여해 왔었답니다. 물론 아직 젊다 보니 재단에 대해 자세히 안 건 아니었죠. 단순한 의료 지원 쪽이었습니다. 나이 상 워싱턴 가 3세대 인원들과도 친하게 지내기도 했던 인원입니다.

재단에서 추정하기로 브릭스 박사님에게 SCP-878-KO가 발현했던 이유는 수혈이었습니다. 격리 파기 당시 입은 부상으로 급히 이그네이셔스 워싱턴의 피를 직접 수혈받았던 경험이 원인이라는 주장이었죠. 이론상으로는 수혈 시점이 40이 훌쩍 넘어서였으니 그 이전에 태어났던 자녀들에게는 영향이 가지 않았어야 합니다. 실제로도 지금까지 마이클 씨의 자녀들의 사망 원인 중 소사는 기록된 적이 없었거든요. 더군다나 고 브릭스 양의 아버지께서는 막내아들입니다.

격세유전인지 뭔지는 몰라도, 죽어선 안 될 사람이 죽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저희 쪽은 완전히 혼란 상태고요. 새 의견을 낼 때는 늘 해석과 예측이 엇갈리는 법이잖습니까. 조심스럽게 접근 중입니다.


어쨌든 현재 상황에서 추정해 볼 수 있는 진상은 세 가지라네.

첫번째, 가장 간단하고 가능성이 낮은 가설일세. 매거릿 브릭스가 사실 워싱턴 가 인물이라는 가설이지. 원인은 다양할 수 있네. 예를 들자면 브릭스 양의 어머니가 조금 떨어진 워싱턴 가 인물이라 유전으로 물려받았든지-이 경우엔 애초에 우리가 조건을 착각했던 셈이니 전국의 워싱턴들을 다 지켜봐야 할 걸세- "피치 못할 사정"으로 워싱턴 집안 아이인 매거릿 양이 브릭스 가에 오게 된 걸 수도 있네. 이 가설의 문제는 증명이 힘들단 걸세. 현장 전체가 폭삭 주저앉아서 시체를 회수조차 못한 상황이야. 설령 가설이 사실이더라도 브릭스 양의 가족 본인들이 직접 말하지 않는 한, 증명할 방법은 없네.

이제 두번째 가설, 브릭스 가 역시 SCP-878-KO의 희생양이 됐다는 가설이지. 이번 가설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는데, 브릭스 가에서 죽은 사람 중 소사는 고 마이클 브릭스 박사를 빼면 매거릿 양이 유일하다는 것이라네. 이 반론의 근거에 다시 재반론을 펼 수 있는 근거는 아직 존재치 않아. 다만 내가 보기에 두번째 추측이 옳다면 브릭스 가는 "본가"가 아닌 만큼 발생 확률이 그만큼 낮아졌거나, 애초에 SCP-878-KO가 불타기 전에 먼저 다르게 죽으면 무효화될 뿐인, 그저 그런 개체였다는 것이었다는 게 되는 셈이네. 이쪽도 증명할 방법이 없긴 매한가지일세. 워싱턴 가 사람을 총살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가설이 남아있다네. 미리 말해 두지만 이번 가설도 증명할 방법 따윈 존재치 않네. 제일 단순하고 속 편힌 가설, 그냥 우연이었다는 거지. 변칙이 아니더라도 죽을 사람은 죽게 되어 있으니까 말야.

부록 5: 사건 - 세실 존 워싱턴 주니어, 매거릿 브릭스 간호장

시각 사건
11:37 브릭스 간호장이 면담을 종료하고 복도로 나온다.
11:39 세실 워싱턴의 시신이 담긴 승용차가 기지 벽면에 충돌하여 대파된다. 그와 동시에 폭발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기지에 화재가 발생한다.
11:40 화재 발생 구역이 봉쇄됨과 동시에 기지의 전 인원에게 대피 명령이 내려진다.
11:41 브릭스 간호장이 대피 명령에 따르지 않고 긴급 탈출로와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해당 방향에는 상황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채 면담실에서 대기 중에 있던 워싱턴 주니어가 있었다.
11:43 브릭스 간호장이 워싱턴 주니어가 있던 면담실에 진입한다. 브릭스 간호장은 워싱턴 주니어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하며 화재 대피를 유도하려 시도하나, 워싱턴 주니어는 이를 거부한다.
11:44 브릭스 간호장과 워싱턴 주니어간의 언쟁이 이어진다. 둘의 논의는 일정 지점에서 합의에 도달하여 화재 대피를 위해 면담실에서 함께 나선다.
11:46 화재로 인해 약해진 벽면이 일부 붕괴되어 건물이 일부 파괴된다. 해당 과정에서 기지의 석면제 방화설비 및 장비가 파손되어 화재가 더욱 쉽게 번지기 시작한다. 또한 기지 상층 계단이 붕괴되며 해당 방향으로 이동하던 브릭스 간호장과 워싱턴 주니어의 탈출로가 막히게 된다.
11:47 빠르게 퍼져나간 화재가 브릭스 간호장과 워싱턴 주니어가 갇혀 있는 층까지 도달한다. 해당 시점에서 해당 2인을 포함한 붕괴로 인한 일부 사상자 및 고립자를 제외한 기지 전 인원의 대피가 완료되었다.
11:48 지역 인근 소방서에서 화재 현장에 도착해 화재 진압 및 사상자 구출을 시도한다. 기지 저층의 인원 구출은 순조로이 완료되나. 상층에 고립된 브릭스 간호장과 워싱턴 주니어의 구출에는 난항을 겪는다. 기지 내의 격리 설비에 쓰인 다양한 종류의 인화성 물질로 인해 화재 진압 역시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11:49 브릭스 간호장과 워싱턴 주니어가 고립된 층의 공간 과반 이상이 화재에 완전히 휩싸여 이동할 수 없는 공간이 된다. 재차 이동해 면담실을 지나던 도중 워싱턴 주니어는 체념한 태도를 보이며 더 이상의 이동이나 대피 시도를 거부하려 시도하기 시작한다.
11:50 면담실이 완전히 화재에 둘러싸인다. 브릭스 간호장은 워싱턴 주니어를 끌어안아 보호하려 한다.
11:52 SCP-878-KO로 인한 화재가 완전히 진압된다.
12:00 워싱턴 주니어를 마지막으로 생존자 전원이 기지에서 탈출한다.
12:13 기지 건물이 붕괴한다.

부록 6: 유언 - 세실 존 워싱턴 주니어/1997.05.10

…전부 제 잘못입니다. 단순하게 제가 언젠가 불타죽을 운명이라는 것 정도는 저도 다른 사람들도 감수하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 아버지에 이어서… 사랑하던 사람을 동시에 잃어버릴 거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생각하진 않았을 겁니다. 알았더라도 바뀌는 건 없었을 테지만요.

그 일이 일어나기 전 주, 그 중에서도 토요일이었습니다. 사촌동생이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병문안을 가기로 했었죠. 메그Meg 누나가 마침 자기도 병원에 볼 일이 있다며 태워다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단둘이서 차를 타고 가던 도중에 떠올랐습니다. 난 어차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몸이니 차라리 가능한 한 빨리 청혼해야겠다는 생각이요. 머릿속에 그 발상이 떠오르자마자 바로 약속을 잡았죠. '다음 주 토요일에 같이 식사나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누나는 흔쾌히 승낙해주더라고요.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메그는 아직도 사흘 전 그 기지에 갇혀있네요.

그날 기지가 불타는 동안 누나는 제가 죽는 것만큼은 막아보려 애써줬습니다.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거라고는 꿈도 모른 채 이리저리 도망칠 길을 찾아보는 누나에게 질질 끌려다녔죠. 어차피 죽는 건 나일 테니 누나가 피해 도망갈 길이라도 같이 찾아보려고 열심히 따라다녔습니다.

결국 아무 데도 도망칠 길은 없었지만요. 그렇게 불길에 몰려다니는 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처음 그 면담실 안에 갇혀 있지 뭡니까. 제기랄. 하나도 겁이 안나는 것 처럼 행동해왔던 주제에 막상 이제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바보같이 머릿속이 새하얘지지 뭡니까.

그 때 메그가 절 감싸안았습니다. 다 괜찮을 거라고, 다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되뇌이면서. 절 끌어안고는 토닥여줬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불길은 계속 다가왔었죠. 메그가 조용히 절 감고 있던 팔을 풀고는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메그의 몸에 불이 옮겨붙었습니다.

자기 몸이 타오르는 와중에도 메그는 울면서 저한테 말했습니다. 미안하다고. 저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럽게, 몸이 불살라져서는 무너진 건물 속에서 으스러졌을 텐데. 미안할 사람은 오히려 저였는데 말입니다.

후유증 때문에 병원에 실려가는 와중에도 제 머릿속에는 자책과 후회밖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제가 입원해 있던 곳이, 예전 메그와 함께 갔던 그 병원이더군요. 문득 궁금증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왜 메그가 저랑 굳이 병원에 왔던 거였을까요. 무슨 사정이 있다고 재단 간호사가 굳이.

[한숨]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면서 왜 저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났던 건지, 왜 메그가 죽어야 했던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멍하니 병원을 걸어다니고 있었는데 우연히 마주친 간호사가 제게 질문을 하나 걸어왔습니다. 혹시 저번에 왔던 환자 남편분 아니시냐고 말이죠.

그곳 말입니다, 산부인과 병동이었습니다. 네. 메그, 임신 초기였다더군요. 태어나기 전인지 후인지는 상관 없었나 봅니다. 아니, 오히려 태어나기 전이라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운명은 그 아이를 한 사람 몫으로 치기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아버지가 돼서 자식의 존재조차 몰랐다니. 저같은 놈한텐 이런 일이 일어나도 싸죠.

제 아버지 말씀이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건 그냥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 텐데. …더 이상은 버텨낼 자신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대로 잠들어 버린다면, 더 이상 불과 엮일 일은 없겠죠.

세실 존 워싱턴 주니어는 1997년 05월 10일 오후 10시 27분 스스로 병실에서 투신한 후 낙하 시의 충격으로 뇌사 상태에 빠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시신은 협의 하에 가족묘에 매장하기로 결정하였으나, 행정상 착오로 인해 화장 후 소실된 것으로 파악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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