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시작>
████ █ 행정관
— 반갑습니다, 채 이사관님. 건강해보여서 좋네요.
채주혁 박사
— 반갑습니다. 이력에서 제일 높은 직급으로 부르는 관행은 알지만, 현재 직책으로 불러주면 좋겠습니다.
████ █ 행정관
— …알겠습니다. 오늘 면담은 이사관보님의 퇴직서 수리에 대해서 세부사항을 조정하기 위해 마련한 것임을 미리 고지드리며, 규정에 따른 몇가지 질문을…
채주혁 박사
— 미안하지만 내 쪽에서 먼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 █ 행정관
— 예? 아, 네. 얼마든지요.
채주혁 박사
— 기지 이사진급의 용퇴에 대해선 사령부 인사이사관이나 관리이사관이 직접 면담해서 결정하는 것이 상례였지 않습니까?
████ █ 행정관
— …인사이사관님과 관리이사관님께서는 일정을 내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규정에 따라 면담은 꼭 필요하기 때문에 제가 대리로…
채주혁 박사
—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나를 피하는 건 스스로도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일테니… 마지막으로 허심탄회하게 얘기나 하고 응어리를 풀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군요.
████ █ 행정관
— …
채주혁 박사
— 민간신원 조정신청서나 기억소거 동의서 같은 시시한 일은 사실 어찌되든 좋습니다. 원래는 김군한테 직접 하고 싶었던 얘기지만, 이 면담도 일단은 재단 인사데이터베이스에 남길 나의 마지막 메시지니 할 말은 전부 남기고 가고 싶군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 █ 행정관
— 제가 막아야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채주혁 박사
— 고맙습니다. 그럼 염치 없지만 또 질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행정관님은 재단이 수호해야 할 최우선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 행정관
— 음… 변칙성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것. 그러기 위해 '장막'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채주혁 박사
— 그렇다면 장막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 █ 행정관
— 변칙성과 그에 연관된 요소들을 민간사회로부터 이격, 은폐시킴으로써 사회의 정상성과 연속성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채주혁 박사
— 그것을 위해서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은 무엇이죠?
████ █ 행정관
— 변칙대상과 초상성 조직이 민간인과 접촉할 가능성을 최대한 차단하는 것입니다. 확보, 격리, 보호의 3개 강령으로 대표되는 활동입니다. 민간이나 경쟁자로부터 변칙성을 더 빨리 확보하고, 그것들을 철저하게 격리하며, 그 위협으로부터 민간인을 보호하는 것이요.
채주혁 박사
— 만약 앞서 말하신 강령과 행동원칙이, 조직으로서의 재단의 이익과 상충하게 되면. 그때는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 행정관
— 원칙이… 우선시되어야 하겠죠.
채주혁 박사
— …행정관님은 SCP-518-KO 보고서를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 █ 행정관
— 05K 기지 인사업무를 담당하면서 기지 내 변칙개체의 보고서는 한번씩 모두 읽어봤습니다. 중앙정보부 제10국에서 개발했던 개량 전투복이네요.
채주혁 박사
— 보고서에는 SCP-518-KO의 존재를 10국 해체시에나 알게 되어 무난하게 인수받은 것으로 기술되어 있죠.
████ █ 행정관
— 뭔가 문제가 있나요?
채주혁 박사
— 많지요. 우리는 그보다 한참 전부터, 10국이 강골 계획을 한참 발전시키던 무렵부터 이미 SCP-518-KO를 알고 추적했으니까요. 1977년이었습니다. 혹시 보안 인가 등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 █ 행정관
— 4/제한 등급…입니다.
채주혁 박사
— 그럼 모를 만도 합니다. 현재 SCP-518-KO 관련 상세 보존사료는 4/관리 등급을 요구하니까요. 사령부 본부와 각 기지의 이사진만이 이 등급을 부여받습니다.
████ █ 행정관
— 어째서 그렇게 높은 등급으로 잠겨있는 거죠?
채주혁 박사
— 뭐… 오늘 행정관님은 사령부 인사이사관의 대리로서 여기 계시는 거나 마찬가지니 그냥 얘기하겠습니다. 사령부가 SCP-518-KO 문제에 대해 별로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정 10국이 엉망진창이지만 무서운 잠재력을 가진 변칙 전투복을 개발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9년 10월 30일부터 특전사 등 전투부대에 선행양산분이 배치되기 시작했다는 것도 갑호-1의 첩보로 모두 파악하고 있었어요. 당시 사령부 방침은, 북한과의 휴전 파기 조짐이 없는만큼 선제적으로 SCP-518-KO를 한국군으로부터 탈취해야 할 필요성이 떨어지므로 그대로 주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 행정관
— 비격리 상태에서 위협이 감수 가능하고 격리가 곤란한 경우, 해당 상태의 타개를 일정히 유예할 수 있잖습니까.
채주혁 박사
— SCP-518-KO가 배치된 부대가 제3공수특전여단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그랬겠지요… 우선 1979년 12월 12일. 이때 3공수 대원들이 SCP-518-KO를 사용했는지는 증거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10·26 직후 중정 조직이 거의 마비된 와중에 다급하게 징발하다시피 이루어진 시범배치 일정을 보나, 성능 검증을 위한 선행 배치임에도 10국 측 기술인력이 전혀 붙지 않은 상태에서 12·12를 맞았다는 것을 보나, 저는 이미 이 시점부터 SCP-518-KO가 신군부에 의해 이용되었을 것을 의심합니다.
████ █ 행정관
— 12·12… 그, 하지만, 말씀하셨다시피 당시 기준으로도 증거는 찾지 못했던 거지요?
채주혁 박사
— 맞습니다. 그리고 당시까지는 광주 제05K기지 이사관이던 제 관할의 사안도 아니었고요. 당시엔 불문에 부쳐졌고, 사령부는 적대적이던 이전 군사정권과의 관계를 신군부에서 청산할 목적으로 여러 채널을 통해 접촉을 시도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솔직히 SCP-518-KO 문제는 빈말로도 중요하다 할 수 없었죠.
문제는 80년 5월 17일의 첩보였습니다.
████ █ 행정관
— …
채주혁 박사:
— 계엄이 확대됨과 함께, 3공수에서 보유중이던 SCP-518-KO 중 상당수가 제7공수특전여단으로 전달되었습니다. 특전사는 중정 10국에서 운용인력을 따로 파견받기까지 했습니다. 7공수의 1개 대대가 SCP-518-KO로 무장했고, 군은 분명 대상을 실전에 투입할 작정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아니, 실전이라 하면 안될 말이죠. 그때 군이 적대한 것은 비무장 시민들이었으니까요.
그때 우리 05K는 갑호-1의 첩보를 분석하면서 자정이 넘도록 비상대기에 돌입해 있었고, 새벽부터는 현장요원들의 보고가 빗발치기 시작했습니다. 전남대에 진주한 공수부대 군인들이 SCP-518-KO로 식별되는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군이 SCP-518-KO를 민간인 상대로 사용할 것은 명백했습니다. 이것은 재단 한국사령부 광주지역 시설의 최선임자로서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습니다.
████ █ 행정관
— 변칙 위협으로부터 민간인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는 거군요.
채주혁 박사
— 당연하죠. 이미 중정 10국 —아니 제4공화국과 적대관계를 세웠던 시점에서 국내에서 재단의 정치적 중립은 성립되지 못하고 있었고, 당시 상황은 어떻게 보더라도 적대 초상조직이 민간인을 상대로 변칙 무기를 투입한 사태였습니다. 재단은 행동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 █ 행정관
— 그러나… 그러지 않았어요. 왜죠?
채주혁 박사
— 신군부와의 협상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신군부는 중앙정보부를 폐지하면서 10국도 함께 청산하여 모든 자산을 재단에 다시 넘기겠다고 했습니다. 제4공화국 이전,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모든 초상사무를 재단에 일임하던 시절의 체제로 복귀하겠다는 것이죠. 사령부는 모든 걸 제쳐두고 이 제안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사령부 관할 내의 가장 중대한 초상위협 조직은 북한과 남한의 정부들이라는 인식 하에서 그 남한 정부가 완전투항을 걸고 교섭해온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니 그야 당연했죠.
그렇지만 5월 광주를 코앞에서 두눈 뻔히 뜨고 감시만 해야 했던 05K 인원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초상 테러였습니다. 인간성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장막을 완전히 무시하고 벌어진 처사였어요. 이미 정권을 위해 이렇게 도시 하나를 박살내면서 변칙무기를 동원하고 있는데, 이것만 끝나면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공허한 약속을 왜 신뢰해야 했겠습니까?
████ █ 행정관
— 하지만… 당시 광주에 투입된 군 병력은 만여 명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중 삼백은…
채주혁 박사
— 적다고 생각하십니까? SCP-518-KO 착용자들은 잠도 자지 않고 고혈압과 혈중 일산화탄소 중독에 취한 채 SCP-518-KO가 전기 자극으로 가리키는 곳을 생각없이 쫓아다니며 사람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건 살육장치를 만드는 기계였어요. 시일이 지난 뒤엔 3공수까지 나머지 수량을 갖고 내려왔고, 10국은 그것을 더 양산해낼 능력을 갖고 있었으며, 학살은 얼마나 계속될지도 어디까지 퍼져갈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 직원들은 이걸 막기 위해 사령부에 몇날 며칠을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격리 제안은 거부되었고, 본부 특무전력 파견 요청도 거부되었고, 끝내는 지시불이행을 이유로 나를 기지 이사관직에서 해임했지요. 대기발령 상태로 윤리위에까지 직통 탄원을 넣었지만 그들도 눈을 돌렸습니다. "신군부와의 협력을 통한 외교적 변화가 장기적으로 더 많은 민간인의 보호와 장막의 유지에 이득이 될 것이다." 반려사유서에 단 한 줄 적혀있던 문구입니다. 그런데, 가장 우스운 것이 뭔지 아십니까?
████ █ 행정관
— 무엇이죠…?
채주혁 박사
— …그들이 맞았다는 겁니다! 신군부는 정권을 확고히 잡지 못하리란 불안감에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마구잡이로 썼습니다. 당장 있는 초상무기는 진압용으로, 그것들을 포함한 중정 10국은 협상용으로. 국내에서 편을 만들 수 없던 그들은 미국과 재단의 정치적 지지가 절실했던 겁니다. 사령부는 그걸 간파했기에 광주에서의 조그만 일탈을 '없던 셈' 치기로 한 것이고요.
결과적으로, 존재를 모르면 일반 군복이랑 구분도 가지 않는 그 미치광이 살인복은 그때 광주에 없었던 것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재단은 1981년까지 그 존재조차 몰랐던 것으로 입이 맞춰졌죠. 그 결과 보다시피 재단은 한반도 남부에서 다시 온전한 권한을 손에 넣었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어떠한 방해도 없이 장막과 민간사회를 수월하게 보호하고 있지 않습니까.
████ █ 행정관
— 맙소사…
채주혁 박사
— 이런 결과가 된 것은, 나라는 개인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해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현장에 있던 우리야말로 혈기가 돌아서 판단을 그르친 것일지도 모르죠— 그날 이후로 여태 함께 고통을 삼켜온 동료 직원들에겐 물론 못 할 말이지만, 재단 전체의 시각에선 이미 그렇게 결론이 나 있는 게 현실입니다.
아마 행정관님도, 다른 젊은 재단 직원들도 몇번이고 이런 딜레마를 마주할 겁니다. 우리는 늘상 저울질과 줄타기가 이어지는 도덕의 끄트머리를 걸으니까요. 큰 목적을 위해 작은 원칙을 저버릴 수 있는 것인지? 어디까지가 타협할 수 있는 작은 원칙인 것인지? 임무를 위해 임무를 포기하더라도 재단은 여전히 가치있는 조직으로 남을 것인지…?
늙어 사라지는 지금 나는, 적어도 사령부 인원들이 이 지나간 역사를 제대로 마주할 수는 있기를 바랍니다. 부끄러워 하라는 게 아닙니다. 누굴 비난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과거를 이해하고 치열하게 고민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고민은 절대 과거에 머무르고 있지 않을 테니까요.
████ █ 행정관
— …
채주혁 박사
— …억지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류는 전부 주십시오. 모두 불만없음으로 충분합니다.
<기록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