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데이
역링크 | 토론 | 편집 | 역사 | ACL |
최근 수정 시각: 2022-11-03 11:39:49
분류: 4월의 기념일
v 1. 개요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비공식 기념일. 매년 4월 14일이며 각 달의 14일마다 있는 비공식 기념일의 일부이다.
명칭인 "블랙데이"는 화이트데이에 대비되는 표현이며, 짜장면이나 아메리카노와 같은 검정색 음식을 먹기도 한다. 특히 짜장면이 주요 품목. 본래는 솔로들이 자조적으로 시작한 이벤트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는 커플들 또한 짜장면을 즐기는 기념일이 되었다.
블랙데이 또한 여러 기념일과 같이 상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특정 상표나 대기업이 아닌 짜장면이라는 음식에 대한 기념일이라 근거는 약하다. 또한 중국집 업계에서도 블랙데이에 크게 장사가 잘 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한국 만화에서도 잘 안 다루어지는 마이너한 날이지만 특이하게……
.
.
.

제27K기지
"린제 박사님? 뭐 읽으세요?"
어디선가 파란색으로 염색된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 내 눈을 가린다. 즈소 연구원이다. 기지 행정고문이자 연구관리자, 자칭 제27K기지의 아이돌. 어떤 보고서든 몇 분만 주면 금세 검토 사항을 찾아내서, 마킹하고 돌려주는 것으로도 유명한 여자다.
"아, 이 우주는 블랙데이라는게 있더라고. 신기해서 한 번 읽어보고 있었어."
"블랙데이요?"
"그래, 4월 14일."
즈소의 머리가 올빼미마냥 까딱였다. 린제 박사는 가끔 즈소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 미소 속에서 생각해낸 전략일까 궁금하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일개 박사로서 사람의 정신을 읽는 행위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 그 날에는 다들 뭘 하는데요?"
"연인이 없는 사람이면… 짜장면을 먹고- 아니면 그냥 있지?"
"그럼 박사님은 짜장면을 드셔야겠네요! 제가 아는 집이 있는데-"
.
.
.
뭐어, 각설하고. 그래. 솔직히 인정하자. 재단에서의 연애는 힘들다. 사실, 사람 목이 치즈버거가 되고 사지가 비물질화 되는 곳에서 도대체 어떤 사람이 연애를 하겠는가? 격리 절차를 점검하고 보고서를 쓰기만 해도 하루가 저물고, 목숨이 간당간당한다. 재단에서의 연애는 힘들다. 물론 여전히 업무를 보면서 자신의 연인과 알콩달콩한 삶을 보내는 인원들도 존재하기는 한다만(즈소 연구원이 그 예시이다) 당연하게도 대다수에게는 유니콘, 별똥별, 월급 인상과도 같은 상상의 존재가 바로 연인이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도, 블랙데이는 재단 최대 명절이 되어 모든 연구원과 요원들에게 섬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강원도에 짜장 맛집이 있던가?
상급감시사령부 공지
전송 대상: @KO_SITEDIR
금년 대한민국 기념일 중 하나인, "블랙데이"가 임박한 상황이다. 그리하여 재단 한국지역사령부 기지 이사관들은 재단 한국지역사령부 인원 다수를 구성하는 독신 및 연애를 겪지 아니하는 인원들에 대하여 중화음식 배달, 기념 행사, 초콜릿 교환 등의 행위를 주의할 것을 명령한다. 또한, 기지 내부 반입 물품 검사를 더욱 철저히 실시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모두 기지 보안 파기 대책 및 업무 효율 증진의 일부임을 상기하라.
상급감시사령부의인(생략)

제21K기지
"…라고 하는데 세윤아… 아직도 그거 할 생각이야?"
분석심리학부의 연구실은 괴상했다. 아니, 괴상하다기보다는 기괴하다는 평이 맞을지도 모른다. 연구실의 반쪽은 일반 연구실과 같이, 실험실, 인터뷰실, 자료보관소가 존재했다. 자료보관소 옆에는 커피머신이 있었는데, 분석심리학부 연구원들은 당번을 정해 커피머신을 청소하곤 했다. 가장 특출난 것은 바로 연구실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수면연구실이었다. 향간에는 무의식을 연구하는 부서인 만큼 여러 해몽, 아키타입 연구, 무의식 침투를 위한 기반 시설이라 포장되어 있었으나, 실상은 바닥에 깔린 요에서 잠든 부서장을 관찰하기 위한 장소였다. 오늘도 그랬다.
"수일아… 낮잠 잘 때는 나 깨우지 말라고 했잖아…"
"너가 어둠의 자식이냐 진짜, 응?"
천세윤의 눈에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곽수일 박사가 커튼을 걷어버린 것이다. 다여섯개 정도의 촘촘한 빛기둥이 커튼을 뚫고 다용성 뇌기능장애 분석기를 지나 천세윤의 안구에 내리꽂혔다. 천세윤의 우렁찬 비명이 유리창을 강타한 것은 0.9초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수일아 왜 그러는거야 진짜…"
천세윤이 다시 이불로 자신의 얼굴을 둘러쌌다. 소라게는 껍질이 없을 경우 굴러다니던 플라스틱 병에라도 자신을 욱여넣는다 하지 않던가, 그 꼴이 딱 소라게의 그것에 가까웠다. 한 부서의 학부장이라는게 우스울 정도의 꼴에 곽수일은 혀를 내둘렀다. 염치없게도 그녀는 항상 이런 식으로 다가오는 현실을 회피하곤 했다. 미리 짜놓은 계획들이 어떻게든 작동해서 상관없긴 하지만, 여전히 수치는 그의 몫이었다.
"짜장면 파티가 뭐야 짜장면 파티가. 진짜, 어? 말이 안되잖아, 부서 전체라는게."
"수일아… 무의식으로의 억압이 심해지며는, 그게 부정적으로 표출되는거 몰라? 프로이트 발달이론에 따르면,"
"따르면? 따르면 뭐?"
"사람은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그리고 짜장기가 존재하는데.."
"염병한다, 아주."
곽수일은 안심했다. 그래도 저렇게 혼자서만 끙끙거리고 있지 이게 퍼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천세윤 아빠노릇하기도 이제는 지쳐가는 참이었다. 짜장면 이야기가 강다홍 연구원이나 이나연 연구원(물론, 쿨한 쪽 말이다.) 혹은 기지 게시판 같은 곳에 퍼진다면 얼마나 거대한 참사가 날 지-
"곽수일 박사님~"
들리면 안되는 목소리가 들린다. 강다홍 연구원이다.
"우리 부서 짜장면 파티 한다면서요! 다 전단 돌렸어요! 저도 가는거 맞죠?! 네?"
WoI 연구과의 전산실은 분주했다. 경이롭다 할 정도로 많은 양의 서버들이 웹크롤러, aic, 침투 요원들을 위해 노동하고 있었고, 그들의 비명은 쿨러 소리에 묻혀 아스라히 흩어지고는 했다. 서버에 박혀있는 형광불들은 불시적으로 껌뻑껌뻑거리고는 했는데, 마치 전자-호롱불같은 그 형태가 WoI 연구과 인원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흩어지는 비명의 중심에는 두 인원이 존재했다.
"선배… 옆에 부서는 짜장면 파티 한다는데…"
"구라겠지."
당연하게도 솔로들의 날인 블랙데이에 인터넷 커뮤니티만큼 활성화된 곳은 없었다. 골목길, 이글, 심지어는 AKI 야툰이나 장미향수같은 성인향 웹사이트조차 붐볐다. WoI 연구과는 그런 웹사이트 전담 분과였고, 어쩔 수 없이 칙칙한 업무실에서 인공적인 파란색을 음미해야 했다. 이러한 스트레스 속에서 강다홍 연구원이 외치고 다닌 "짜장면 파티" 란, 가히 재단발할라에 준하는 야사요, 구원이리라.
"선배니임."
"선배이이임~"
"도윤아 신경 꺼라. 나 지금 기분 나쁘다."
"시영 누나… 한 번만-"
심시영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뱉었다. 2년 전에는 칼도 먹던 놈이 이제는 짜장면 하나 먹겠다고 옆에서 이러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한심스러웠다. 만약 연구과장이 본다면 블랙데이고 자시고 업무 시간에 농땡이 친다고 호되게 구박할게 분명한데, 그녀는 생각했다. 허나, 마음 한 켠에는 그놈에 짜장면 파티를 한 번 경험하고 싶은 마음 또한 있었다. 커뮤니티 사이의 욕설과 인간관계에서 시달린 시점에서, 뜬소문이 진실이던 아니던, 혹은 인간을 잡아먹으려는 비트겐슈타인급 정보재해던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는 구내식당으로 발을 이끌었다. 한 번 정도라면야 괜찮겠지. 트리블렌드.aic 정도라면 잠깐 업무 대리 정도야 맡아줄 수 있을 것이다. 심시영은 잠시 골목길에서 돌아다니던 "재단문학" 의 일부를 떠올렸다. 재단을 비하하기 위해 작성되었던 그 글은 어느새 재단 인원들 사이에서 자학의 뜻으로 사용되곤 했다. 아아— 라이라이 사사사, 라이라이 사사사. 헤이 격리박이, 헤이 격리박이. 이 어찌 경사가 아닐소냐.
구내식당은 사람들로 붐볐다. 우글우글한 사람들이 거대한 식당을 가득 채우자, 그 모습이 마치 개미때를 연상케 하였다. 풍소경은 그런 왁자한 상황이 혐오스러운 사람 중 하나였다. 아니, 애초에 그런 행사에 집중할 상황이 못 되었다. "블랙데이" 라는 문화적 기념일에는 당연하게도 변칙예술작품들의 홍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개체들만 해도 5개는 넘었다. 이놈들을 예술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모르는 상부와, 자길 바퀴벌레 보듯 대하는 예술가들 사이에서 숨겨야 하는 노릇이었으니, 가히 고생이라 할 수 있었다.
"선배! 왜 작업실에만 틀어박혀있어요!"
검은 장갑 한 쌍을 낀 청년이 작업실로 들어왔다. 최산해였다.
"짜증나서 그런다. 블랙데이라고 아주 그냥 창조적 행위를 따블로 하고 있어."
"저도 심령 처리하느라 고생인데요 뭐, 이번에 격리된 개체 중 두 개가 심령 관련이잖아요."
최산해는 손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뒀다. 짜장면 모양이 세겨진 뱃지였다. 크기는 의외로 조그만했는데, 딱 가슴에 달고 있을 정도였다. 풍소경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그가 제작한 물건임을 알아챘다. 명천구 예술거리나 공방 사람들 중에서 금속공예를 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으니까.
"좀 긍정적으로 살아요. 지난 미술 전시회 이후로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최산해가 나가자, 풍소경은 뱃지를 바라보았다. 뱃지는 그가 팔을 괴고 있던 종이 옆에 놓여있었다. 얕은 자국이 단 종이가 피사체를 위한 좋은 배경을 깔아주었다. 공백. 가능성 있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찰칵, 카메라 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그래서 이게 뭔데? 설명해봐라."
정보부 보고실은 조용했다. 이런 귀가 울리는 고요함에 남궁선우는 목이 탔다. 확실히 기지 이사관과 단 둘이서 좁은 방 안에 박혀있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니까.
"아뇨, 그. 짜장면 파티를 벌이겠다고."
"그래서 보안이 어떻게 된 건데."
이강수 이사관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전매특허인 웃지 않는 웃음은 모든 인원들의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자, 누구나 한 번 쯤은 맛 보는 무언가였다. 남궁선우는 진작 분석심리학부를 막지 않은 자신의 우둔함을 뼈져리게 후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니까… 기지 입구가 많이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몇 개는 외부차원이고. 그래서 음, 입구를 분산해서 짜장면을 배달시킨답니다."
"짜장면?"
"네."
"그, 음식? 비벼먹는 그거?"
"…네."
그 날, 제21K기지는 폭발했다. 비유적으로.

제145K기지
기지가 휘감은 모양새로 중심에 있는 제145K기지 화단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으레 이 연못은 기지가 바쁠 적이면 더러워지고 한가해지면 깨끗해지고는 한다. 2023년 4월 지금은 그나마 기지가 잘 굴러가는 터라 물이 투명하여 안쪽의 물고기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지속가능격리개발과의 임찬미 박사는 쓸쓸히 앉아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변칙 개체의 부산물을 재사용한다는 지속가능격리개발과는 사실 기지 내 다른 부서들만큼 할 일이 많지는 않았다. 사이비 부서와 같은 취급 속에서도 꿋꿋하고 태평하게 기지 한 구석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때 기지 편으로부터 한 남자가 걸어온다. 이 봄철에도 코트며 목도리를 입은 차림의 임찬미와는 달리 얌전한 차림새다. 피부가 희고 키가 훤칠해 얼마 전까지 입고 있었을 연구복이 꽤나 어울리는 남자다.
"과장님. 점심 시간 끝나셨으면 일하러 들어가셔야죠."
임찬미는 마치 연못 그 자체에게 토라진 듯 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왜 블랙데이가 금지된 걸까?"
"그야 뭐, 외부 음식 반입하거나 먹으러 가거나 하면 보안 문제가 있으니까 그렇겠죠."
남자는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손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입에 물었다. 임찬미 박사는 부하직원의 요청은 들은 둥 마는 둥 꽁해 있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눈을 반짝였다.
"어딘가에는 짜장면을 무한대로 토해내는 변칙 개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봐, 그럼 상급감시사령부도 재간이 없을 거잖아. 모두가 짜장면을 양껏 먹을 수 있을 거 아냐."
"그거 그….. 케이크 꼴 나지 않겠어요?"
"그렇네. 그럼 적당히 토해낸다고 하면 되잖아."
"애초에 그런 변칙 개체가 있다는 말은 생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렇네……"
강렬한 사실 제시에 임찬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야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원하는 변칙 개체가 있을 리가 없는 노릇이다. 그는 썩 침울한 표정으로, 바지를 털고 일어섰다. 지금껏 연못을 덮던 그림자가 사라지자 작은 금붕어 무리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때 또 다른 사람이 막 연못 쪽으로 걸어오던 도중 두 사람과 마주쳤다. 곱슬머리에 키가 작고 마른 남자다.
"어, 개발과 과장님? 오랜만이네요."
"그…… 누구?"
"함필규요. 곤충학 쪽에서 일하는. 벌써 제 이름 여덟 번 잊어버리시지 않았어요?"
"미안. 생각을 하느라."
임찬미의 변명에 키 큰 남자는 항상 있는 일이라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함필규는 멋쩍게 웃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외부엔트로피 개체가 기지로 하나 들어왔거든요. 관심 있으세요?"
"물론이지."
임찬미의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 외부엔트로피라는 것은 엔트로치 법칙을 위반해서 무언가를 마구 생산해내는 개체들의 총칭을 주로 이르는데, 만일 그것이 통제불가능하면 지속가능격리개발과가 생산된 물건을 재사용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니 그 부서 과장에겐 최상위의 관심사일 것이 뻔했다.
"그게 아마 무슨 분열하는…… 면발이던가."
"진짜?"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쳤다. 정말 세상에는 짜장면을 무한대로 토해내는 변칙성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주 긴 허가 절차를 견디더라도 무한대로 짜장을 생산해내서 급양에 포함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임찬미의 마음이 희망으로 타올랐다. 함필규가 새로 입을 열기 전까지는.
"거꾸로 천장에 매달려 기어다니며 거미를 잡아먹는 지네 모습의 면발 덩어리인데, 거미의 체성분으로 만들어진 면발을 만들어내거든요. 우리 기지에 격리된대요. 멋지지 않아요? 이사관님?"
임찬미는 이번 해 39번째의 쓰디쓴 좌절을 짜장면 대신 맛보았다. 블랙데이가 느긋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제05K기지
배민 주문전표
주문번호 5007
결제방식 결제완료
배달주소: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 2로
요청사항:
가게 : 요청사항 없음
배달 : 공원 앞입니다. 조심해서 와주세요.
친환경 :
수저포크 O
메뉴명 | 수량 | 금액 |
---|---|---|
짜장면 | 6 | 40000 |
탕수육 | 2 | 26000 |
합계(결제완료)
66000
기본 배달팁 2900 + 거리별배달팁 0 + 총 배달팁 2900원
주문번호: YKS00005007
2023.04.14 18 : 13
소비자 중심 경영 (CCM) 인증기업 배달의민족

제04K기지
침묵. 제04K기지의 초소는 항상 그래왔다. 으레 이야기가 많고 음험한 뒷소문이 가득한 기지일수록 시끄러운 것이 정상이나, 제04K기지는 달랐다. 항상 이어져오는 이 귀가 아플 정도의 정적은 기지 밖에서 가끔 들리는 고라니 소리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올 즈음에야 잠시 멈췄다. 초병들은 이런 정적을 반찬삼아 곱씹으며 죽어가는 기지의 냄새를 버티곤 했다.
"…랍니다."
짜장면이라는 생소한 주제는 그러한 침묵도 깰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제04K기지가 사실상의 국군 방어시설이라는 점에서 짜장면이 배달 올 일은 없지만, 당연하게도 초소에서도 이런 주제가 나올 일은 없다. 그렇기에 초병들은 짜디짠 눈물을 춘장삼아 짜장면 배달, 블랙데이, 실존하지 않는 연인 등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짜장면? 영통쪽이 그러냐?"
김 상병이 놀란 눈치로 물었다.
"넵. 이번에 짜장면 배달을 전면 금지하라고 지시가 왔습니다. 그쪽이 거의 다 FM 따르는 애들이긴 한데… 물어보긴 했는데 어차피 여기서 짜장면을 시킬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김 상병은 빠르게 박 이병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숙이는 박 이병의 모습이 과연 진풍경이라 할 수 있었다.
"야 이 자식아. 짜장면은 무슨 짜장면이야, 어? 어후. 그런 건 또 왜 물어봐가지고 진짜."
박 이병 또한 직접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병 한 명이 영상통신반쪽과 친해서, 몇 가지 농담을 하던 것을 듣기만 하였다. 짜장면 배달 금지가 진실인지, 아니면 그저 관료주의의 폭포에서 떠밀려온 잡소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초소의 기묘한 분위기는 어떠한 소재라도 자신의 입에서 나오게 한다. 초소에 쌓인 군장 더미들과 창문은 대화를 먹고 산다. 그것이 초소이다.
"죄송합니다."
"일머리가 없어 진짜. 경계나 똑바로 서 이놈아."
다시 침묵. 블랙데이의 시끄러움 또한 기지의 어둠 속에 매장된다. 제04K기지의 초소는 항상 그래왔다.

제64K기지
제64K기지는 무성한 안개 속에서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 안개라는 것이 일종의 방어벽의 대체제였다. 무진시의 재단 인원들은 오로지 그 안개를 들이마쉬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고, 제아무리 힘이 센 기념일조차도 기지를 덮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짜장면, 이라는 일종의 된소리조차도 의미는 없었다. 오토바이가 덜컹대며 철가방 속의 따뜻한 음식을 내놓으면 그것을 으레 사냥하는 행위마저도 무진시에서는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허인숙 박사는 무진시 서면의 부두 끝으로 걸어갔다. 기지에서 꽤 먼 곳이다. 안개가 허락하는 만큼이나 멀다. 하늘은 어둡고, 겨울잠에서 깬 개구리들이 고요히 울었다. 무진이라는 공간은 허(虛)한 공간이다. 무(無)나 공(空)이 아니다. 허인숙 또한 이를 본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그 공허 속에 무엇을 채워넣을 수 있을 것인가 하면 답할 수 없다. 한동안 가슴에 난 구멍을 채우는 것이 안개 뿐일 것이라는 비관적 생각의 속에서 방황하게 되는 꼴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이라고 생각해봐야 소용없다. 무진의, 제64K기지의 사랑이란 일종의 꼭두각시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쉽게 필요시에 찢어지고 다시 기우다 보면 안개가 내리는 가벼운 감정에도 찢겨나가게 된다. 허인숙은 짝사랑을 해 본 적이 있지만 그럴 때마다 그 상대는 무진시를 떠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는 모양이다. 허인숙이 싫어서는 아닐 것이다.
제64K기지는 블랙데이를 금지하고 아주 추방시켜 버렸다. 귀담아듣는 이는 정말이지 아무도 없다. 말했듯이 이곳 사람들은 기념일에 신경쓸 수 없는 처지가 된다. 허인숙은 그 원인을 너무나 궁금해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 허인숙 그녀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금세 어느 순간 떠나간 이들과 비와 안개 따위를 불시에 납득해버리자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흄이니 넥서스니 인지저항수치니 하는 것은 애들 장난이고 무진에서는 그냥 그런 기분이라는 법이다. 그럼에도, 허인숙이 이를 납득해버린 후에도 그는 아직 고기의 기름과 나랑드 사이다의 시원함, 잠의 평온함만큼은 그리워했다. 대신 바깥에서 그 모든 것을 되찾을 의지는 없었다. 무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처럼 사고한다고 가정하면 그럴 이유도 없다. 그래도 그리운 것은……
멀리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확 끼친다. 허인숙은 불빛을 기다린다. 나방처럼 기다린다. 기지를 아주 잠시 떠나서, 그 그리움을 기다린다. 무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찾으라. 그런 마음이다. 최소한, 아주 최소한 안개 속에서 자신만큼은 무진식 자유를 누리기를 바란다. 오토바이는 다가왔다 구식 결제 수단을 거친 뒤, 휑하니 떠나버린다.
부두에 짜장면 그릇이 누추하게 서 있다. 허인숙은 젓가락을 들고 랩을 벗긴다. 인간의 껍질이 벗겨지듯 노골적으로 막이 찢겨지며 냄새와 색이 드러난다. 무진의 심해처럼 검은 양념이다. 젓가락이 어설프게 뜯겨나가고 허인숙의 흰 손이 젓가락을 잡는다. 면이 중력을 거스른다. 기름진, 짠, 따뜻한 감각이 순간 배를 채우고 피로 순환된다.
그리고 허인숙은 저쪽을 바라본다. 오토바이가 왔다가 사라진 자리. 그곳은 어느덧 차로가 아닌 거친 길으로 변해 있다. 왜일까, 위화감이 없던 그 순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진시의 법칙이 다시금 회전하는 걸까. 그 순간 앞에 놓였던 접시 속의 그 음식이 잿빛 안개로 화한다.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이 안개만이, 피어올라서 다른 안개와 엮여 사라진다. 양념 한 방울도 실재하는 것은 아니였던 것일까. 안개가 흩어지는 그 순간, 허인숙의 입으로부터 안개가 거슬러 새로이 나타난다. 드라이아이스 같은 안개의 흐름을 그는 마구잡이로 토해낸다. 그 동안 그는 웃는다.
이 얼마나 낭비인지.
흄이니 넥서스니 인지저항수치니 하는 것은 애들 장난이다. 무진시의 흐름에 배반하였다, 하는 생각에 다다르니 기분이 맑아지고 상쾌해지는 기분이 오히려 즐겁기만 하다. 비가 내리고 안개가 눌러붙는다. 얼굴에 까아만 머리카락이 들러붙고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다. 웅성이는 소리, 그 소리가 무진의 기나긴 바다로부터 허인숙의 고막까지 들어가며 입으로부터 나온 안개는 바다로 순환하고 있다. 기념일이라는 것이, 짜장이라는 것이 다 무어냐. 이 기지조차도 한낱 무진의 감각에 따라 금지를 내렸을 것을……
안개가 멎고 허인숙은 몸을 숙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날인가. 그야말로 무진의 세례 속의 기묘에서 그는 다시 일어나 기지로 돌아간다. 거친 땅이 밟힌다. 개구리가 우는 사이 한 여자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혹은 돌아가고 있다.

제09K기지
제09K기지 또한 짜장면이 금지된 기지 중 하나였다. 다만 대다수의 인원은 이런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따름이다. 일은 많고 기지는 그늘지며 짜장면의 기름진 성질이나 기념일이라는 룰은 아주 특별히 즐거운 것이 될 수 없었다.
이지윤 박사는 장갑을 낀 손으로 꿈틀거리는 근조직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삼대천 피트니스가 만들어낸 이 살아 있는 "실전 압축" 닭가슴살은 이세윤의 부하 직원들이 보기에는 엄청나게 기괴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삼대천의 창조물 중에서는 딱히 아주 그로테스크한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 만들어진 허리띠나 다이어트용 기생충 같은 것에 비하면 집토끼만큼 온순한 것이었다.
그는 몇 번의 약물 실험 후 다시 살덩이를 유리 상자에 가두어놓고는 일어섰다. 갑자기 기지에 격리된 이 살덩어리 때문에 점심을 거른 차였다. 오늘의 저녁은 무엇일까 하며 고민하던 와중 무언가가 머릿속에 꽂혔다. 짜장면. 기지가 만들어내는 모조품이 아닌 진짜배기 짜장. 공교롭게도 이지윤은 블랙데이 따위는 몰랐음에도 결국 중화음식적인 운명론에 따라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그때, 한 그림자가 그의 옆을 덮었다. 짧은 머리카락의 건강한 인상을 갖춘 여자다. 어려 보이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기지이사관이라는 고위직에 자리잡은 연소하는, 이지윤의 옆에 턱 앉았다. 이세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사관님이 여기까지 오셔도 되나?"
"뭐 어때."
연소하는 상쾌한 투로 말했다. 마치 봄바람을 맞고 있는 말투처럼 뚜렷한 경쾌심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이지윤은 절로 미소를 지었다. 둘은 모두 선임들 치고는 어렸고 이사관과 이사관보 치고는 젊었다. 그리고 과거를 모를 만큼 까마득히 어두운 이 기지에서도 어떻게든 지냈다. 어떻게든 지내면서 기지의 몇 안 되는 사랑을 둘이서 독차지했다.
"오늘 밥 뭐지?"
"고구마줄기랑 추어탕."
"아, 내가 싫어하는 것만 나오네."
이지윤의 반찬투정에 이번에는 이사관 쪽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점점 청량해지면서 커졌고 돌개바람처럼 마음을 뒤흔드는 맑은 운율으로 살아났다. 이지윤은 아주 찰나 동안 그 웃음에 꽁해 있다가 이내 같이 웃음을 지었다. 연소하는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다시금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자장면 사 줄까?"
"그거 땡기는 건 어떻게 알고."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어."
연소하는 이지윤의 진갈색 머리칼을 매만지면서 속삭인다. 이러한 속삭임이 막 웃음으로 또 화하는 가운데, 막 표준형 408급 위상모형계를 분주히 나르던 김다희 연구원은 문 너머로 이 상황을 보고 기겁하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기념일의 법칙과 금지 규약은 가끔 어이 없을 정도로 효력을 빠르게 다했다. 제09K기지에선 언제나 이상한 쪽으로 효력의 소멸이 이루어지고는 했다.

제01K기지
"어, 그냥 급양으로 짜장을 만들어 주면 되는 것 아닌가?"
노래마인 이사관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짜장면을 한 젓가락 먹었다.
[[footnotebl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