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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제목: SCP-313-KO 스러져 가는 기억이여
저자:Navla &
Moulinet
작가 Navla의 말: 언젠가 인류가 알츠하이머를 정복할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작가 Moulinet의 말: 친척이 많아서 제가 보고 들은 내용이 저도 모르게 들어간 것 같습니다.
작페
license:
Filename: N/A
Summary: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 비교 그림.
Author: Garrondo
License: public domain
Source Link: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lzheimer%27s_disease_brain_comparison.jpg
참고 자료:
- The Caretaker의 Everywhere at the end of time
- 알츠하이머 질환에 대한 개요
- #GDS 치매 척도: 알츠하이머의 진행 단계를 구분한 척도.
- #플로리앙 젤레르감독의 영화 <더 파더>
- 환자 개인이 느끼는 혼란에 대한 참고를 했습니다.
- #Terminal lucidity에 대한 설명
- 그리고 #콘 사토시 감독의 영화들
특수 격리 절차
SCP-313-KO의 일일 동향은 MTF-요타-98 "야쿠르트 아주머니"1를 통해 감시한다. 감시 임무를 맡은 MTF-요타-98 분대원이 매일 대상과 직접 접촉하여 신체건강과 정신건강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이상이 있을 시 결과를 21K기지 분석심리학부에 보고한다.
SCP-313-KO의 정신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현재 커너크급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위의 특수 격리 절차는 임시적으로 폐기되고 이하의 특수 격리 절차가 수립됨.
SCP-313-KO의 영향권 주변을 봉쇄하고 내부에 존재하는 민간인의 피해 규모를 파악하는 것을 최우선 사항으로 정한다. 분석심리학부의 허가 없이 영향권 근방에 접근하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된다. 영향권 주변의 민간인은 임시 구역으로 대피시킨다. 영향권 근방에 설치된 분석심리학부 임시거점에서 내부에 고립된 MTF-요타-98 분대원과 연락을 시도 중에 있으며 그와 동시에 영향권의 팽창 속도 추이를 주시 중에 있다.
대전 시내와 영향권 사이에 항밈인자를 프린트한 패널을 세워, 대전 시민이 영향권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 재단 웹 크롤러 봇이 sns에서 영향권과 관련한 자료가 공유되는 것을 최대한 막는다.
또한 영향권 주변에서 단기기억 상실증, 혹은 언어장애, 조울증 등의 증세를 겪는 인원이 있다면 즉시 분석심리학부에 보고해야 한다.
설명
SCP-313-KO는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에 거주 중인 82세 남성 권일복이다. 대상은 미운오리새끼 유형2의 현실조정자로, 재단이 주관하여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대민 정기 칸트 스캐닝 절차 도중 발견되었다.
대상은 최근까지 그 어떤 변칙성도 발현한 전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대상의 잠재된 특성의 세기가 적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기에 재단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MTF-요타-98 분대원을 통한 느슨한 감시를 이어왔다.
그러나 SCP-313-KO의 반복적이고 특수한 자극이 없는 일상과 현재 독거 중이라는 점이 대상의 노환을 악화시켰고, 이내 알츠하이머 질환의 초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대상의 거주지역 인근에서 유의미할 정도로 단기기억상실증 및 언어장애와 조울증 증상의 보고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SCP-313-KO는 분석심리학부의 주관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지난 2022년 9월 12일, SCP-313-KO의 알츠하이머 증세가 더욱 악화되며 갑작스레 대상은 현실조정적 특성을 크게 발현하기 시작했다. 해당 사건으로 인해 대상 주변의 현실이 왜곡되기 시작했고 그 영향권은 계속 팽창하여 현재 시점 기준으로 반경 1.3 km에 달한다.
영향권 내부는 대상의 과거 기억을 닻으로 하는 모호하고 비선형적인 과현실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3 해당 구역에 접근하는 인원은 그 기억이 유도한 현실성에 흡수되어 당시의 시대와 상황맥락에 걸맞는 현실의 일부로 편입된다. 이때 SCP-313-KO의 기억에 강하게 잔류하는 사람의 경우 일시적으로 이러한 현실성에 편입되지 않고 저항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나 현재까지 내부 영향권에서 탈출에 성공한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다.
현재 영향권 내부에는 32명의 민간인과 1명의 재단 인원(SCP-313-KO를 담당한 MTF-요타-98 분대원 박일순 여사. 57세 여성.)이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에 대한 구출 및 SCP-313-KO의 원활한 격리와 그 영향권에 대한 무효화를 위해 영향권 내부로 향하는 진입 프로젝트가 예정되어 있다.
<부록1> 진입 프로젝트 개요
SCP-313-KO의 영향권 내부 진입 프로젝트 개괄
- 목적:
- 1순위: SCP-313-KO의 영향권 내로 진입하여 대상을 찾고, 가용한 수단을 이용해 대상의 영향권을 무력화하거나 재단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축소시킨다.
- 2순위: 내부에 고립된 MTF-요타-98 분대원 박일순 여사의 안부를 확인하고 가능하다면 영향권 내에서 벗어나게 한다.
- 참여 인원:
- 내부 진입팀:
- 분석심리학부 천세윤 박사: 이전에 조나단 할리만 연구원과 비슷한 유형의 변칙공간을 연구한 전적이 있어 참여함.
- 권준환: 52세 남성. SCP-313-KO의 외동아들. 서울 종로구 부암동 거주. 앞선 임시 실험 결과 SCP-313-KO이 유도한 공간에 대해 강한 저항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아 대상의 기억에 현재까지 강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 외부 공조팀:
- 분석심리학부 윤금선 교수: 대상이 가진 정신질환에 대한 원활한 이해와 내부 공간 탐사 시 생길 수 있는 잠재된 위험성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 참여.
- 면담부 스완 요원: 위험 SCP 접촉 상황에 대한 고문을 제공하기 위해 참여. 변칙공간 내부에서 SCP와의 접촉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전적이 있음.
- 내부 진입팀:
- 지원 장비/제원:
- JUNG 아키텍쳐 기반 소형화 메멘토스 저장소
- 스크랜턴 현실성 닻 1기
- 알츠하이머 증세의 호전을 위한 콜린에스테라아제 억제제
- 유사시 사용할 수 있는 Y-909 화합물 기반의 기억소거제 1정
사전 면담 기록:
면담 대상: 권준환
면담자: 스완 요원
<기록 시작>
스완 요원: 반갑습니다. 권준환씨.
권준환: 아, 안녕하세요. 이름이 스완 이라고 하셨던가요? 한국식 이름이 아니네요.
스완 요원: (식은땀을 닦으며) 네, 미국에서 살다 와서 그렇습니다.
권준환: 오늘 안색이 불편해 보이시네요.
스완 요원: 아뇨,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할 면담은 저한테도 조금 부담이 되는 내용이긴 해요. 교육 과정은 다 끝났지만, 재단에서 권준환씨의 가족에 대해 알고 싶어하더라고요… 혹시 너무 무리라고 생각되시면 오늘은 쉬셔도 됩니다.
권준환: 이미 가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놓았다면 제가 말하는 내용이 도움됩니까? 제가 거짓말을 한다던가 아니면 말하지 못하는 얘기를 해도 서류를 읽어 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스완 요원: 물론 도움이 되죠. 나중에 조사 파일과 지금 면담 기록을 같이 두고 연구할 때 큰 도움이 돼요. 정보의 출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맞아요. 저한테 비밀로 하셔도 결국 재단에게는 비밀은 아니게 되겠죠. 하지만 적어도 저만큼은 모르게 될 거에요.
권준환: 스완 요원님은 몰라도 되시는 겁니까?
스완 요원: 네? 저는 괜찮아요. 가끔 저는 모든 것을 아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도 모르는 것이 대화할 때 더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가족들 사이에서도 서로 지켜야할 비밀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한테도 권준환씨 같은 아버지가 있었다면 정말 행복했을 텐데… 아, 너무 나간 거였으려나요… 사실 저도 권준환 씨의 마음이 이해가 가거든요… 갑자기 가족들하고 떨어져 지내야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것들이 비밀스럽고 신경 쓰이는 느낌이니까요.
권준환: 배려심이 정말 깊으시군요. 제 딸에게도 당신 같은 언니가 있으면 그 아이에게도 참 좋았을 겁니다.
스완 요원: 아아, 정말 감사해요. 권준환씨도 표정이 풀어지신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그럼 혹시 녹음을 시작해도 될까요?
권준환: 아 네.
스완 요원이 녹음기의 버튼을 누르는 시늉을 한다.
권준환: 제 이름은 권준환이고 1974년생입니다. 와이프와 딸과 같이 살고 있고, 평성 엔지니어링에서 영업부 부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기에는 사실 할 말이 없네요. 최근에 와이프가 염색을 하고 싶다고 괜찮은 미용실을 찾던데… 아, 딸이 대학교 심리학과 전공이라 여기서 뭐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게 요즘 신경쓰는 일이긴 합니다.
스완 요원: 그럼, 가족관계는 어떠신가요? 그러니까, 부모님이요. 지금 상황은 들으셨죠?
권준환: 네. 그렇습니다. (한숨) 음…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으셔서 서로 은퇴하시고 각자의 삶을 즐기시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진 것 같습니다. 어머니하고는 예전부터 잘 지내왔고 교류도 많았었습니다. 어머니가 몇 년 전 저희 곁을 떠나실 때까지 사이가 안 좋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신 아버지하고는… 예전에 크게 싸운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화해하고 잘 지낸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뙈서 뭔가 제가 잘못한 게 있나 싶기도 하네요. 하지만 아버지에게 제가 필요하다고 그러시니 저도 발을 내딛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스완 요원: 진술 감사합니다. 앞으로 권준환씨는 탐사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실 거에요. 보통 탐사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내딛는 것이었고 이번 탐사도 그런 탐사였다면 권준환씨 대신 제가 탐사를 맡았을 거에요. 그런 건 제가 전문가니까요. 하지만 이번 탐사는 영화 촬영에 가까워요. 연극 경험이 있다고 하셨죠? 주연은 권준환씨 당신 아버지시지만 가장 중요한 조연은 권준환씨에요.
권준환: 무슨 의미인지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물론 보안에 걸리지 않는다면요….
스완 요원: 제가 오늘 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걸 자세히 설명해 드리기 위해서였으니까 괜찮아요. 비유적인 표현으로 대충 설명하는 거지만, 당신 아버지께서 주인공인 영화에서는 아무나 출현할 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저 같이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이라면 기껏 해봐야 배경이나 엑스트라 정도겠지요. 심지어 저라는 존재는 영화에서 아예 출현 기회도 못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권준환씨는 어느 장면이나 등장할 수 있죠. 주인공의 아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그저 지나가는 장면일 리는 없을 테니까요.
권준환: 그래서 제가 여기 오게 된 것이군요. 제가 필요한 이유를 이제 알겠습니다.
스완 요원: 네, 권준환씨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그래서 재단으로서는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분석심리학부에서도 당신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고요.
스완 요원이 몸을 앞으로 슬쩍 숙인다.
스완 요원: 하지만 개인적으로 얘기하자면 이번 탐사는 정말 위험해요. 시공간이 완전히 무너져서 제가 가진 의학적, 과학적 지식은 거의 쓸모가 없는 수준이에요… 하지만 권준환씨 대신 제가 간다면 적어도 탐사팀만은 안전하게 복귀할 자신은 있어요. 저는 이것보다 더한 것도 겪어보았으니까요. 하지만 권준환씨는 재단 요원이 아니시니까, 딸의 아버지로서 탐사를 안하실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혹시 다시 생각해보신다면….
권준환: 그래도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니까요. 그리고 필요하면 스완 요원님이 지휘해주신다고 하니, 저도 믿고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완 요원: 그럼, 네, 알겠습니다.
<기록 종료>
윤금선 교수의 알츠하이머에 대한 개요:
알츠하이머에 대하여
일단 본격적인 진입에 앞서 SCP-313-KO가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 질환에 대해서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구현된 대상의 불안정한 정신세계 내부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까요. 환자의 증상과 정신상태에 대해 명확히 알아야 해요.

일반인의 뇌(좌)와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우) 비교 그림.
우선, 알츠하이머는 치매 환자의 약 75%가 앓고 있는 질병으로, 그 원인은 피질 간의 뉴런과 시냅스의 손실에 있습니다. 쉽게 말해 뇌가 점진적으로 손상된다는 것입니다. 환자의 뇌는 천천히 녹아내리고, 마치 점점 닳아가는 필름처럼, 아니면 늘어난 테이프처럼 인지 기능이 저하되고 제 기능을 잃어가고 디스크가 헛돌거나 멈추거나 뻑이나 데이터가 날아가게 되죠. 그리고 이것은 현재 밝혀진 그 어떤 의학 기술로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네,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남은 건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죠.
그렇다면 SCP-313-KO는 어떻게 자신의 현실조정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예상하기로는, 알츠하이머로 인해 무의식 속에 잠재된 트리거가 발동된 것으로 보입니다. 뇌가 기능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정신의 여러 구석을 연결하게 될 때 그때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그 구역이 활성화된 것 같아요. 아마 대상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일 겁니다. 자신의 무의식에 따라, 그리고 저하되는 인식에 기반해 계속해서 변화하는 현실 가운데에서 제정신을 잡기란 힘들죠. 일반적인 알츠하이머 환자도 충분히 혼란스러워하고, 표준적인 현실조정자가 처음 변칙을 마주했을 때도 혼란스러움이 크겠지만,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나면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클까요.
그리고 중요한 건 이 막대한 양의 스트레스와 현실조작을 위해 소모하는 대량의 정신에너지가 서로 양성피드백과 시너지를 일으켜 대상의 증세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알츠하이머 환자에겐 본래 심신을 진정하기 위해 많은 케어를 필요로 하지만 대상은 현재 철저히 고립된 상태입니다. 이 부분이 대상의 상태 악화를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부채질하고 있어요. GDS 치매척도검사의 7단계 분류 체계에 따르면 대상은 벌써 5단계에 막 진입했고 현재도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는 중입니다.
원활한 참고를 위해 각 단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첨부합니다.
- 1단계: 무증상. 아직 뇌 손상이 인지기능에 이상을 만들 정도로 심각하지 않습니다.
- 2단계: 익숙한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고, 일상적인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직은 큰 불편함이 없어 증세를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 대상은 이때부터 미약한 변칙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 3단계: 인지력이 감퇴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계획적인 행위(예컨대 요리나 퍼즐 맞추기) 등에 어려움을 보입니다.
- 대상은 이 시점에서 분석심리학부의 주관으로 변경되었습니다.
- 4단계: 일상에 지장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대상은 이때부터 자신의 인지력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파악하고,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과거의 달콤했던 선명한 기억들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 대상은 이때 현재의 영향권을 생성했습니다.
- 5단계: 인지력 감퇴가 더욱 커집니다. 혼란은 커지고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려는 시도로 인해 정서적으로 극히 불안정해집니다. 암산이나 계절에 맞는 옷 입기, 전화번호나 주소 등을 기억하는 것에 도움이 필요해집니다.
- 대상은 현재 이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 6단계: 기억의 파편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합니다. 옛 추억들과 현실이 혼동되기 시작하고, 의심과 망상, 강박 그리고 환상이 기어 올라오며 자신의 개인사에 대한 것조차 떠올리기 쉽지 않아집니다. 모든 것은 익숙한 것과 낮선 것으로 밖에 구분되지 않습니다. 자식의 이름을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 탐사 도중 대상이 6단계에 돌입할 여지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비가 필수적입니다.
- 7단계: 탈인식 단계가 시작됩니다. 모든 기억들이 분출하듯 뒤섞여 간헐적으로 연결되고 끊어집니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환자는 외부의 환경에 전혀 대응할 수 없고 자신의 몸도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환자는 더는 자신의 뜻대로 앉고 말하고 음식을 씹을 수 없습니다.
- 탐사 도중 대상이 이 단계에 들어선다면 내부 접근 팀에게 큰 피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랠리the rally 혹은 Terminal lucidity라고 부르는 현상이 있습니다. 알츠하이머 이외에도 다양한 정신의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임종의 순간이 오기 직전, 몇 일에서 몇 주간 갑작스레 정신이 회복되는 현상입니다. 낮은 확률로 발생하는지라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대상이 7단계에 들어서기 이전에 작전을 완료하는 것입니다. 대상이 7단계에 들어선다면 그 내부의 끓어오르는 기억의 편린들 사이에서 큰 부상을 입거나 유도된 현실성에 침식되어버릴 가능성이 높아지거든요. 이미 그 기억의 일부가 되어버린 내부의 민간인들처럼요. 이 작전을 통해 최대한 빠르고 무탈히, 이 고통을 매듭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분석심리 자문위원 윤금선 교수
<부록2> 진입 프로젝트 기록
내부 진입팀: 천세윤 박사, 권준환
외부 공조팀: 윤금선 교수, 스완 요원
녹화 장비: 내부 진입팀의 액션캠. 전파를 통해 외부로 수신함.
<기록 시작>
천세윤 박사: 어… 됐나?
스완 요원: 네, 됐네요.
윤금선 교수: 부서장이 되어서도 아직도 캠 하나에 쩔쩔매니 맘 놓고 은퇴를 할 수가 없군요.
천세윤 박사: 그런 건 다 수일이가 해줄꺼니 괜찮슴다.
권준환: 어, 그럼… 출발 하는 건가요?
천세윤 박사: 네. 뭐 그렇죠? 아, 그 챙길 건 챙겨야죠. 어디보자… 그 준환씨 요 스크랜턴 닻 좀 들어줘요
권준환: 생각보다 무겁네요….
윤금선 교수: 조심하세요. 이거 비싼 장비랍니다.
천세윤 박사: 이 작전에서 제일 중요한 장비니까요, 절대 뭐 떨어뜨리거나 잃어버리거나 그러면 안되요. 알겠죠? 파손이라도 되면 임무 자체가 꼬이거든요.
스완 요원: 사실 파손되면 오히려 좋죠. 그러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시면 되니까요.
천세윤 박사: 임무는 어쩌고요?
스완 요원: 그냥 저기다가 기억소거제 살포하죠. 어차피 잊어버릴 기억들이 이렇게 날뛰고 있는 건데, 조기에 삭제 시켜 버리죠.
권준환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진다
천세윤 박사: 어,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건 이따가 이야기 하죠? 저희가 문제가 생긴다면 그때 해도 되고요.
윤금선 교수: 분석심리학적으로 봤을 때, 재단의 표준 기억소거제는 기억을 삭제시키는 게 아니라 개인무의식 구역으로 끌어내릴 뿐입니다. 애초에 이 현상 자체가 무의식의 기억으로 인한 것이기에 그 수단은 해결책은 되지 않습니다. 실행할 일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준환씨.
스완 요원: 으음, 사실 저는 '처음부터' 문제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오게 된 거니까요. 제가 배운 신경과학이나 생물정보학은… 분석심리학적 탐사에 대해 어떠한 예측도 제공해주지 않아요.
천세윤 박사: 크흠, 그럼 여기 왜 온…
스완 요원: 이거나 받으세요. (알약 두개를 던진다.)
권준환: 그게 기억소거제인가요?
천세윤 박사: 음, 이건 콜레스테롤 억제제고…
스완 요원: 콜린에스테라아제 억제제.
천세윤 박사: 네, 뭐, 그게 그거죠. 암튼 이게 알츠하이머 증세를 완화시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윤금선 교수: 신경전달 물질인 아세틸콜린의 분해를 막아서 정상수치로 되돌리는 역할을 하죠.
권준환: 그럼 다른 하나는 뭔가요?
천세윤 박사: 어? 다른 하나는 뭐죠?
스완 요원: (눈치를 주며) 일단 주머니에 넣어 두세요.
천세윤 박사: 그래서 이게 뭔데요.
스완 요원: (천세윤에게 귓속말로) Y-909 화합물입니다. 쓸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일단은 잠자코 가지고 계세요.
천세윤 박사: (두리번거리며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음, 뭘까? 이게…? 저도 모르겠네요? (스완 요원을 노려본다.) 저기…
스완 요원: (작게 소곤거리며) 잘못 되면 제가 책임질 겁니다.
천세윤 박사: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다 기록되고 있는 중이라고요.
스완 요원: …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헛기침) 자, 그럼 준비도 다 된 거 같으니 이만 출발하시죠.
천세윤 박사: 네, 그러죠. 자, 그 장비 잘 챙겨서 따라오세요.
내부 진입팀이 영향권 주변으로 이동한다.
윤금선 교수: 준환씨는 지난번 임시실험 할 때 한번 보셨죠? 준환씨의 아버지의 기억이 현실화되는 경계입니다.
권준환: (넋을 놓고 바라본다.) 다시 봐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군요. 당신들은 이런 거 밥먹듯이 보는 사람들이군요.
천세윤 박사: 우와, 전 저런 거 처음 봐요. 뭐가 막 뭐가 일렁이는데? 지하철인가?
스완 요원: 현실조정이 실시간으로 덧씌워지는 중이라 그렇습니다. 과현실 상태라 잘못하면 유도된 현실성에 흡수되고 마니 조심해요.
천세윤 박사: 흠, 신기하군요. 그럼 준환씨, 앞장 서세요.
권준환: 네?
윤금선 교수: 준환씨는 대상에게 연결된 강력한 기억의 닻입니다. 임시 실험 결과 준환씨를 중심으로 한 일정 공간은 이런 과현실의 침식을 막는 강력한 저항 효과가 있어요. 준환씨가 없다면 천세윤 박사는 5분도 채 안되어서 기억의 일부가 될 겁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윤씨와 5분 이상 떨어지시면 안돼요.
권준환: … 알겠습니다.
천세윤 박사: 고고.
권준환은 잠시 망설이다 왜곡된 지하철 내부의 풍경 안으로 들어간다.
권준환: … 여기는 지하철이네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가 잘 안 보이는데…
부채를 들고 더위를 피해 노약자 석에 앉은 대상이 보인다.
천세윤 박사: 저기 있네요.
윤금선 교수: 가장 최근의 기억인 모양입니다. 대상은 아무래도 더위를 피해 이곳에 온 모양이네요. 하긴 이번 년도가 특히 기록적인 폭염이었죠. 아버님 댁에 에어컨은 있나요?
권준환: 잘… 모르겠네요.
임산부가 옆에 앉자 불편한 눈초리로 이리저리 둘러보며 자리를 비킨다
권준환: 아버지가 저희를 알아보실까요?
천세윤 박사: 아니요. 이건 아버님의 기억이 현실화 된 것이지, 실제 그 상황에 있는 건 아닙니다. 저거도 사실 진짜 아버지의 본체도 아니죠. 그냥 개인무의식 속 작은 기억의 투사에 불과해요. 그래서 다른 인파들의 얼굴이 이렇게 불명확 하죠. 그리고 저희는 지금 아버님의 기억 속에 인파의 일부라는 곁다리로 잠시 참여한 것이고요.
권준환: 아버지의 기억이라는 연극에 저희가 몰래 단역으로 출연하는 거라고 볼 수 있겠군요.
천세윤 박사: 아마도요? 어… 네, 딱 맞는 설명인 거 같네요.
권준환: 이전에 스완 요원께서 이런 식으로 설명 해 주셨어요.
윤금선 교수: 기억의 명확도는 어떤가요?
천세윤 박사: 형편 없어요. 지금 노선의 색깔, 번호, 정류장, 내부 구조 등등이 모두 불명확하고 모호하게 구현되어 있어요. 그래서인지 멀미가 좀 나는 군요.
권준환: 최근 기억인데도 이렇게 많이 망가져 있네요.
윤금선 교수: 알츠하이머는 본래 최근 기억부터 망가집니다. 위안이 되실 지는 모르겠지만, 심층으로 가실 수록 좀더 명확히 구현된 기억을 보실 겁니다.
권준환: 음… 그렇군요.
천세윤 박사: 슬슬 움직이죠. 최대한 빠르게 중심에 도달해야 합니다.
권준환: 네.
열차가 멈추고 진입팀은 쓸려나가는 인파를 따라 밖으로 나간다.
한적한 밤골목, 주변의 집에서 TV 소리가 새어 나온다.
강호동: 그럼 PD님… 이거… 이거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PD: … 강호동, 야외취침 확정!
실패 팡파레 효과음
권준환: 1박2일은 역시 강호동 때가 재미있었죠.
천세윤 박사: 저는 개인적으로 그 다음 시즌이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데프콘이 김주혁 붙잡고 수면랩 한 거 기억나시나요? (웃음) 스완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스완씨는 무한도전 파려나?
스완 요원: 전 미국에 입양되었던지라… 저는 프렌즈나 빅뱅이론을 봤네요.
천세윤 박사: 흠,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적 정서와 동떨어져 계시군요.
그때 진입팀 앞으로 대상이 끙끙거리며 쓰레기봉투를 끌고 나타난다. 봉투의 윗부분이 힘없이 풀리며 종이컵과 캔이 흘러내린다.
권준환: 엇, 잠깐… (반사적으로 다가가 도움)
천세윤 박사: 어, 잠시만요!
대상은 묵묵히 권준환의 도음을 받아 쓰레기 봉투를 여민다.
권일복: 아유, 고마워요, 매번 이렇게 옆집 양반 도움 받고 사네요.
천세윤 박사: 아, 어… 아니에요. 그냥… 이웃이잖아요.
권일복: 고마우이 아가씨.
권준환: (아무 말 없이 쓰레기를 주워담고 골목길을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 이 정도는 괜찮았겠죠…? 친절한 이웃 역할로요.
천세윤 박사: 흠, 이 정도는 뭐 상관 없겠지만… 그래도, 음, 너무 활발하게 다니지는 말라고요. 방금 식겁했잖아요.
권준환: … 죄송합니다.
스완 요원: 말싸움은 여기까지 하고, 빠르게 다음 층위로 나아가도록 하세요. 진입팀 여러분.
천세윤: 네, 뭐 그러려던 참이었습니다.
권준환: 그래도 아버지가 제 얼굴을 몰라보니 기분이 묘하네요.
윤금선 교수: 사실 그건 일반적인 초기 알츠하이머 증세와 비슷합니다.
권준환: 어쩌면 저게 현재의 아버지의 모습과 가장 닮아있는 것일지도요.
천세윤 박사: 음… 자, 갑시다. 갈 길이 멀어요. 권준환씨, 스크랜턴 거시기는 잘 챙기고 잘 따라오셔요.
권준환: … 네.
관중: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오~ 필승 코리아!
권준환: 여기는 어디죠?
천세윤 박사: 서울광장이네요? 근데 빨간 옷을 입은 응원단으로 북적이고요. 거기다 좀 노이즈가 끼어 있네요.
윤금선 교수: 2002년 당시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갔네요.
천세윤 박사: 월드컵! 저도 어릴 적에 봤었습니다. 그때 박지성 선수 대단했죠. 혹시 준환씨는 이때 뭐하고 계셨나요?
권준환: 그때 저도 여기서 딸이랑 함께 응원에 참여 했었죠. 목마 태우고 응원봉 흔들고 그랬네요.
중계: 아 박지성 선수 날카롭게 들어갑니다, 뒷쪽에 박지성! 가슴으로 치고! 슛!! 골!!!!!
관중의 환호성 소리
캐스터: 박지성!! 골이에요!!!!
권준환: 그나저나 이 가장자리의 노이즈는 뭘까요.
천세윤 박사: 아마 저희가 실제 그 현장에 있는게 아니라 대상의 기억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일 거에요. 그러니까…
대상이 낡은 TV를 끈다.
권일복: 예전엔 아들이랑 같이 올림픽도 보고 그랬었는데…
대상은 일어나 불을 끄고 이불 속에 눕는다.
천세윤 박사: (창문 밖에서 바라보며) 꽤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왔지만 어머님은 안보이네요.
권준환: 그게… 좀 예전에 이혼하셨거든요. 서로 안맞는 부분도 있고, 서로에게 좀 소홀해져서…
천세윤 박사: 그럼 그 이후로 아버님은 쭉 홀로 계셨던 건가요?
권준환: 그래도 간간히 찾아 뵙기도 했습니다. 제가 힘들 때도 찾아갔고, 딸아이랑 같이 몇 번 찾아가기도 했고, 명절에도 드문드문… (말 끝을 흐린다.)
대상이 기침하며 이불속에서 뒤척인다.
권준환: … 요새는 너무 바빠서 아버지 신경도 못쓰고 있었네요.
천세윤 박사: 음, 그렇군요. (침묵) 움직입시다.
장년 권준환: (비틀거리며 정문을 벌컥 연다.) 아부지…
권일복: 아니, 이게 무슨일이야! 괜찮니? 아들?
천세윤 박사: 준환씨의 젊었을 적 모습이네요. 완전 술에 취해 녹초가 되어왔군요.
권준환: 이때가 기억이 납니다. 필름이라도 끊기길 바랬는데,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네요.
장년 권준환: 그게… 우리 회사가… 애 분유 값도 필요한데… 아내한테 아직 말도 못하고 지금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너무… 너무 막막해서…
청년 권준환은 닭똥같은 눈물을 흘린다.
권일복: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좋은 회사 들어간지 얼마나 됐다고…
장년 권준환: 그놈의… 그놈의 IMF 때문에…
권준환: … 혹시 한보그룹 아시나요?
천세윤 박사: 음… 잘 모르겠네요.
권준환: 1990년대까지는 지금의 삼성그룹과도 같은 그런 규모의 회사였습니다. 저는 승보엔지니어링에서 근무하다 96년에 한보그룹에 합병되며 그쪽 계열사에서 일하게 되었죠.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일이 발생했죠.
윤금선 교수: 그 거대한 기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리라고는 저도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죠.
장년 권준환: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내가 죽을까도 고민했는데, 마누라랑 딸내미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래서 이렇게 못난 아들이…
권일복: 진정하고, 물이나 마셔. 그리고 그런 소리는 빈말로도 하면 안된다 이 놈아. 어?
장년 권준환: (물을 마신다.) 후우… 죄송해요.
장년 권준환은 깊게 숨을 들이 쉰다. 무거운 침묵이 내리앉는다.
장년 권준환: 그냥… 좀… (긴 침묵) 거리를 둔거요. 지금 생각하면 좀 어린 마음에 반항심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버지가 되니까 조금 이해가 되는 거 같기도 하고…
권일복: 괘안타 괘안타. 니도 자식노릇 첨하는 거고, 나도 애비 노릇 첨 하는 거 아니냐.
장년 권준환: 그렇게 윽박지르며 집을 나갔는데… 이렇게 못난 아들이 눈치도 없이 되돌아와서…
권일복: (껄껄 웃는다) 난 그래도 기쁘다. 아들이 여전히 애비한테 의지해 주는 거 같아서. 안그래도 그때 상심이 컸을턴디… 그래도 지금까지 잘 참아줘서, 그리고 필요할 때 나에게 찾아와 줘서 참말로 고맙네.
장년 권준환: (흐느낌이 커지다 큰 소리로 통곡하기 시작한다.)
권일복: 그래 임마. 다 울어 재껴버려라. 여기서 다 털고 가라.
권준환: 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잘 우는 것 때문에 자주 구박했었죠. 사내 자식이 이렇게 쉽게 울어서 어쩌냐 같은 잔소리부터, 어떨 때는 제가 울지 않을 때 까지 회초리로 온몸을 때리기도 했죠. 그때 저는 울다 울다 지쳐서 쓰러졌었습니다.
천세윤 박사: 그럼 이 기억은…
권준환: 네, 일종의 서로 간의 속죄인 셈이죠. 서로가 서로 간에 쌓인 응어리를 풀었던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취기에도 여전히 머릿속에 깊게 박혔나 봐요.
천세윤 박사: 음…
권준환: 후우, 다음 기억으로 갑시다. 갈 길이 멉니다.
스완 요원: 슬슬 긴장 바짝 하셔야 합니다. 이 직후부터 흄 준위가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있어요. 초기 예상치보다 훨씬 높은 경향성입니다.
윤금선 교수: 이제 주요 기록 장치는 캠코더에서 JUNG 아키텍쳐 기반 메멘토스 저장소로 대체합니다. 수신되는 캠코더의 화질도 유도 현실성에 의해서 점점 후퇴하고 있거든요.
천세윤 박사: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필름 교체 하겠습니다. 준환씨 제가 신호 주면 박수 한번 쳐줘요.
권준환: 그, 영화 슬레이트 치는 것 처럼요?
천세윤 박사: 어… 네! 맞네요. 그럼…
(신호 소실)
<기록 종료>
녹화 장비: JUNG 아키텍쳐 기반 소형화 메멘토스 저장소 (감각 입력)
<기록 시작>
권준환: (박수를 친다) 됐나요?
천세윤 박사: 어… 됐나요?
윤금선 교수: 네 됐습니다.
천세윤 박사: 사고 모듈과 연결되었나요? 아니면 감각?
윤금선 교수: 감각 모듈입니다.
스완 요원: 뭐, 차이가 있나요?
천세윤 박사: 대충 생각을 기록하냐 감각을 기록하냐 차이에요. 감각이니까 그냥 우리가 생체 캠코더가 되었다 생각하면 돼요.
주변이 진동하며 일렁인다.
윤금선 교수: 이런, 안 좋은 신호군요.
천세윤 박사: 어… 설마 그건가요?
권준환: 그거라면…
윤금선 교수: 지금 준환씨의 아버님은 매우 특수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현실조정이라는 특성과 알츠하이머라는 병리적 현상이 서로 맞물리며 양성피드백을 일으키고 있어요. 비유를 하자면 생각을 그만하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어 계속해서 생각의 늪에 빠지고 있는 상태라고 보시면 돼요. 갈수록 정신이 가지는 부담은 커지고, 이로 인해 증세가 훨씬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어요. 이 말인 즉슨…
천세윤 박사: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 물론 아버님도 마찬가지고요. 암튼 중요한 건, 아버님의 정신 상태가 악화될 때마다 그 내부에 있는 우리도 신변이 위험해질 수 있어요. 아버님께서 그쪽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고요. 지금 당신과 그 옆의 제가 왜 여기에 멀쩡히 있을 수 있는지 잊지는 않으셨겠죠?
권준환: …
스완 요원: 빨리 움직여야 해요. 권준환씨.
권준환이 우뚝 서서 기억의 장막을 바라보고 있다.
천세윤 박사: 그, 준환씨? 빨리 다음 기억으로 넘어가자고요.
권준환: 아… 네… 그래야죠…
윤금선 교수: 준환씨의 트라우마군요. 준환씨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기억이 등장할 차례가 되었군요. 맞죠?
권준환: 후우… 아닙니다… 아니, 잠시만요. (침묵) 하아.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순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천세윤 박사: …
권준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권준환이 어께의 스크랜턴 현실성 닻을 고쳐 매고 일렁이는 층위 내부로 거침없이 들어간다. 천세윤도 그를 따라 들어간다.
그릇 깨지는 소리, 책더미가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
권일복: 어디 감히, 어디 감히 느이 애비한테 대들어!
청년 권준환: …
양은옥: 여보 제발, 애 이러다 죽겠어요!
권준환: 간만에 뵈는군요. 제 어머니 이십니다. 이혼 전에 있었던 일이에요. 정확히는 이 일로 인해 이혼을 하게 되었죠.
권일복: 니는 내가 도와주려고 해도 기어코 빙신같이 똥통으로 굴러들어가나? 내가 니를 그렇게 가르쳤냐?
청년 권준환: (코피를 닦으며) 그거 알아요? 전 안 두려워요. 때려 봐요. 한번 더 때려 봐요!
[뺨을 때리는 소리]
양은옥: 여보!
청년 권준환: (묵묵히 가방을 싸고는 한쪽 어깨에 들쳐 맨다. 그러고는 탁자위에 놓인 원서를 손으로 구겨 휴지통에 넣는다.) 이젠 다 필요 없어요. 제 삶에 간섭하는 것도, 절 쥐락펴락 하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이젠 어른이 되었으니 제가 알아서 살 거에요.
권일복: 뭐? 염병도 그런 염병이 없지. 느이 밥먹고 잠자고 하는 거 누구 돈에서 나오는지 알어? 어? 다 시발 내가 벌어서 너 키우려고 쏟은 건데 보답은 못할 망정 뭐? 안 두려워? 어?
청년 권준환: (가방을 맨 채로 문을 걷어찬다.) 그래서 이제 아버지 밥 안 먹고 아버지 집에서 안 살렵니다. 반찬거리도, 용돈도 주지 마시고, 연락도 하지 마십쇼. 저 혼자 알아서 잘 살다가 죽으렵니다.
권일복: 그래! 애미애비 없이 잘 살아봐라! 어? 얼마나 잘사는 지 두고 보자!
청년 권준환은 문을 쾅 닫고 집을 나선다.
양은옥: (주저 앉아 흐느낀다.)
권일복: (묵묵히 문을 쳐다보다 천천히 휴지통에 다가간다.) 염병할… (구겨진 원서를 손으로 편다.)
천세윤 박사: 남의 사생활을 이런 식으로 직관하다니 뭔가 오묘하게 불편하군요.
권준환: 전 연극과에 가고 싶었어요. 연기하는 게 좋았거든요. 그래서 전 당연히 연극과에 원서를 적었죠. 그런데… 답신이 엉뚱한 곳에서 온 거에요.
윤금선 교수: 아버지께서 원서를 바꿔치기하셨군요.
권준환: 전 아버지의 꼭두각시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원하는 일을 얻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 인생 마지막 객기를 이렇게 부려봤네요.
스완 요원: 하지만 역시 연극과로 가지 않았군요.
권준환: (허탈하게 웃음) 연극과에 지원한 학교는 기숙사에 가기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 해놓고는 결국 아버지가 원서를 넣은 기계공학과로 갔어요. 저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니 많은 장애물들이 솟아나더군요. 그래서 잠시만은 기계공학과에서 공부를 하다 다시 연극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지만… 아시다시피 쭉 거기서 눌러앉아 취업까지 하게 되었네요.
천세윤 박사: 이때 아버지와의 감정의 골이 생긴 거죠?
권준환: 쌓여오던 게 터진 계기가 되었죠. 그리고 이전의 장면에서 보셨듯이 나중에 다 풀었고요.
천세윤 박사: 그럼 왜 이후에도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은 건가요?
권준환: … 바빠서요.
천세윤 박사: 정말 그럴까요?
윤금선 교수: 세윤씨. 잠시만요. 지금은 아니에요.
천세윤 박사: 뭐, 나무라는 게 아닙니다. 자신에게 솔직해 지자고 하는 말입니다.
권준환: …
천세윤 박사: 여전히 아직까지 풀리지 않았던 거 아닌가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거리를 두고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땅이 진동함.
스완 요원: 시간이 없군요. 빠르게 움직입시다.
천세윤 박사: 흠, 일단 그것만은 알아 두셨으면 해요. 사람은 절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고, 매우 쉽게 자기 자신에게 속아 넘어간다는 것을요.
권준환: …
한강에 떠있는 여러 척의 배들.
트럼펫과 피리소리가 들린다.
수상스키를 타는 호돌이가 손을 흔든다.
합창단: 어히야 디야~ 어히야 디야~ 허이야 허이야 차!
북소리와 박수갈채 소리
천세윤 박사: 88올림픽이군요. 제가 갓난아기였을 때라 잘 기억나지는 않는군요.
권준환: 저도 꽤나 어릴 적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굴렁쇠와 호랑이 마스코트는 여전히 기억나네요.
윤금선 교수: 저는 생생히 기억납니다. 제가 재단에서 지금의 세윤씨 정도 나이였을 때 초기 분석심리학부 인원들과 옹기종기 모여서 시청했어요. 그땐 마땅한 장비도 없어서 01K기지의 흰 벽에다 대고 프로젝터로 쏘아서 사무실 의자를 끌어다 놓고 봤었네요.
스완 요원: 저희 지금 뭔가 한국지역사령부의 역사를 듣고 있는 것 같은데요.
권일복: 준환아! 시작했다!
양은옥: 여기 과일도 있어요. 드시면서 봐요.
청년 권준환: 네! 가요!
마당에서 고무신을 신은 권준환이 뛰어온다.
권일복: 허이 참, 우리나라가 올림픽도 여는 것도 보고. 참 나라가 좋아지긴 좋아졌구만. 준환아. 내가 너만했을 때는 막 대학교에서 최루탄이 날아다니고 그랬다. 인마.
청년 권준환: 아, 그 얘기 또 하시는 거에요? 귀에 딱지 앉겠어요 아버지.
청년 권준환은 네발 달린 TV 앞에 앉아 과일을 집어든다.
노태우 대통령: 제 24회 근대 올림픽 대회를 경축하면서…
천세윤 박사: 음… 잠시만요. 저 TV속에 우유 나눠 주시는 분 보이시나요?
권준환: 네? 아, 저기 있군요. 관중석에 계시네요.
윤금선 교수: 이런… 박일순 여사군요. 요타-98 분대원 말이에요.
스완 요원: 현실성에 침식되어 상황 맥락에 맞는 모습을 가지게 된 겁니다. 일단 현재 저분과 상호작용이 가능하려나요?
천세윤 박사: 박일순 여사님! 알파 분대장님! 아이고, 이런. TV에 말을 하는게 정말 기분이 이상하군요.
박일순 여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웃으며 관중들에게 우유를 나누어 주고 있다.
스완 요원: 이런, 상황이 안좋군요. 현재 유도된 현실 상으로는 지금 저희는 박일순 여사와 상호작용할 수 없습니다.
천세윤 박사: 후우, 운도 지지리 없네요. 하필이면 TV 속에 있어서…
스완 요원: 이미 현실성에 침식된 이상은 TV 밖이어도 다시 복귀시키는 걸 장담할 순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또다시 덧씌우는 작업이 필요하니까요. 그래도 다행인 건, 박일순 여사님이 무탈히 계시단 걸 확인했다는 겁니다.
화면이 전환되고,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스턴트맨을 비춘다.
이들은 공중에서 원을 만들어 오륜기를 형성한다.
윤금선 교수: 어쩔 수 없군요. 마저 진입을 계속하는 수 밖에요. 스크랜턴 닻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이 유도 현실은 사라지고 모두 정상화 될 겁니다.
천세윤 박사: 흠… 알겠습니다.
합창단: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권일복: 이야, 노래 좋다. 여보, 준환아 우리도 같이 손잡자. 으이?
청년 권준환: 아우, 쪽팔리게 왜 그래요, 정말.
양은옥: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하자~ 손에 손잡고~
권일복: (호탕하게 웃음) 벽을 넘어서~
권준환: … 갑시다. 여기서 옛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 없어요.
천세윤 박사: … (춤추는 가족들을 조용히 바라본다.)
권준환: … 빨리 가자고요.
천세윤 박사: 네 그러죠.
둘은 빠르게 마당을 나선다.
합창단: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천세윤 박사: 준환씨, 좀 속도를 늦춰보세요. 숨이 차네요.
권준환: (침묵)
천세윤 박사: …
인디아나 존스의 팡파레와 함께 크레딧이 올라간다
권일복: 재미있었어?
소년 권준환: (맑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임) 인디아나 존스 채찍 휘두를 때가 정말 멋있었어요!
권일복: (머리를 쓰다듬는다) 재미있었으면 됐다.
소년 권준환: 저도 인디아나 존스처럼 영화 주인공이 되고 싶어요.
권일복: 어유, 그래? 해리슨 포드처럼?
소년 권준환: 응, 저도 해리슨 포드처럼 영화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가 될 거에요.
권일복: (껄껄 웃는다.) 그래 애비가 너 헐리우드 명배우가 될 수 있게 해주마.
소년 권준환: 응, 정말로요? 꼭이요!
권일복: 허허, 당연하고 말고, 약속하마.
천세윤 박사: 권준환씨.
권준환: (묵묵히 앞만 보고 빠르게 걷는다.)
소년 권준환: (여린 목소리로 흐느낀다.)
권일복: 내가 울지 말라고 했지!
회초리 소리
소년 권준환: 잘못 했어요. 잘못… 잘못 했어요.
권일복: 그래서 뭘 잘못했는데? 으이?
소년 권준환: 그게… 그게… (눈물을 흘린다)
회초리 소리
소년 권준환: (비명을 지른다.)
천세윤 박사: 권준환씨!
권준환: 후우… 후우…
권일복: 그래 알았다 솜사탕 하나 사주마.
유년 권준환: 저거! 저거!
권일복: 그래. 저거. 자동차. 따라 해봐라 자. 동. 차.
유년 권준환: 댜. 동. 탸.
권일복: 그래 저건 뭘까?
유년 권준환: 저거? 저거! (한 손에 솜사탕을 튼 채로 달려나간다)
천세윤 박사: 준환씨! 옆에!!
권일복: 준환아!! 안돼!
대상이 권준환에게 달려든다. 자동차가 그의 옆을 가까스로 비켜간다.
권준환: (넋을 잃고 젊은 시절의 아버지의 품에서 그를 바라본다.) … 아버지…
권일복: 괜찮니? 다친 데는 없니?
대상의 모습이 흐릿해지고 기체가 되어 날아가듯 융해된다.
권준환은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자신이 부서진 스크랜턴 닻의 잔해 위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천세윤 박사: 이런…
권준환: (뒷걸음으로 빠져나오며) 이제… 어떻게 하죠?
윤금선 교수: 시간이 얼마 없어요. 스크랜턴 닻이 손상된 이상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천세윤 박사: 그거 버리고 지금 당장 되돌아가요. 빨리요.
권준환: 하지만…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윤금선 교수: 머뭇거릴 시간이 없어요! 지금 당장 복귀하지 않으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어요.
권준환: 장담할 수 없다는 건, 거꾸로 말해 살아 남을 확률이 있다는 것이죠?
천세윤 박사: 근데 그걸 해결할 방법이 없잖아요! 유일한 해결책인 스크랜턴 닻이 부서졌는데!
스완 요원: (침묵) … 방법이라면 있습니다.
정적
윤금선 교수: … 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스완 요원: 의심 가지지 말고 제 말대로 행동해요. 준환씨. 지금 이 방법을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윤금선 교수: 무시하십쇼 준환씨. 재단에서 정신의학에 관해선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스완 요원: 그리고 변칙공간 내부와 변칙개체와의 조우에 관해선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제가 타입-그린 한두번 면담해 봤겠습니까?
윤금선 교수: 그럼 어떻게 할 건지 말이나 들어보고 결정하죠.
스완 요원: 지금 이게 어떤 제안처럼 보이십니까? 왜 일개 초심리학부 부서가 이런 중대한 변칙적 위협에 주요 전담 학부로 지정되었는지, 그리고 면담부인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잘 생각해 보십쇼.
천세윤 박사: 나 참, 상부의 명령이로군.
스완 요원: 면담부와 과학부, 그리고 윤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SCP-313-KO의 진입작전은 속행합니다.
윤금선 교수: … 하, 일개 초심리학부라고요? 과학부가 코가 높아져도 너무 높아졌군요. 저희가 얼마나 칼 융 박사님의 자료를 보존해 왔는지를…
스완 요원: 얼마나 정통성 있는 지와 변칙개체를 얼마나 잘 다루는지는 별개의 문제죠. 자,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진입팀. 작전을 속행하십시오.
천세윤 박사: 하하… 놀랍지도 않구만.
권준환: … 가겠습니다. 세윤씨는 돌아가십쇼.
천세윤 박사: 후우,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걸요. 제가 당신 옆에서 벗어난다면 저는 현실성에 침식되고 말아요. 길어봐야 5분이면 88올림픽 스타디움에서 굴렁쇠를 굴리고 있겠죠. 아니면 강호동과 함께 기상미션을 하고 있거나요.
권준환: … 그렇다면…
천세윤 박사: 전 상관 없습니다.
권준환: 그럼, 갑시다. 세윤씨.
주변의 공간이 크게 뒤틀린다.
[JUNG 아키텍쳐 기반 메멘토스 저장소 오류 발생.]
[불연속적 정신신호 감지.]
<기록 종료>
녹화 장비: JUNG 아키텍쳐 기반 소형화 메멘토스 저장소 (감각 입력)
<기록 시작>
아기 우는 소리
양은옥: (가파르게 숨은 내쉼)
권일복: 여보! 여보!
천세윤 박사: 준환씨, 정신 꼭 붙잡으세요. 6단계가 찾아왔습니다. 혼돈이 찾아올 겁니다.
귀를 찢는 아기 우는 소리
권준환: 이거… 정말 어지럽네요.
윤금선 교수: 절대로 천세윤 박사와 떨어지지 마세요. 그리고 7단계가 되기 전에 꼭 복귀할 수 있도록 서두르세요!
권일복: 아이 이름은 뭐로 지을지 결정을 했는가?
양은옥: (불룩한 배를 쓰다듬는다.) 준환 어때요?
권준환: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죠? 이 상태를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 거죠?
윤금선 교수: 알츠하이머의 증상에 따르면 항상 혼돈의 상태를 유지하는 건 아닙니다. 격렬한 혼란과 차분한 평화가 급작스레 교차해요.
천세윤 박사: 최대한 빠르게 움직입시다! 대상의 증상이 악화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 이러다간 저희가 이곳을 나가기 전에 7단계에 도달할 겁니다.
윤금선 교수: 추세상으론 7단계는 몇 분만에 일어날 거에요. 그 순간엔 모든 기억이 뒤섞이고 모두들 급변하는 현실에 침식될 거에요.
팡파레 소리
주례: 신랑 입장!
권준환: 아버진… 아버진 항상 어머니에게 제대로 된 결혼식을 못해드려서 미안하다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천세윤 박사: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어서요!
권일복: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권준환: 어머니가 떠나시고… 정말 많이 상심이 컸을 겁니다.
천세윤 박사: (기침한다) 콜록 콜록, 뭐야 이거!
시위대: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권준환: 최루탄 입니다! 입을 천으로 가리세요!
천세윤 박사: 콜록 콜록… 21K기지 방호 훈련 때 화생방 귀찮다고 꾀병부리면서 뺐는데, 좀 해둘껄…!
관중: 오~ 필승 코리아!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이 시위대를 가로지른다.
천세윤 박사: 이런, 어떻게 된거죠?
윤금선 교수: 기억의 순서가 뒤섞이기 시작합니다. 6단계의 악화가 더욱 심하게 진행되고 있어요.
권일복: 독재정권, 물럿거라!
권준환: 아버지는 등에 최루탄에 맞아 생긴 상처가 있었습니다. 샤워를 하거나 여름에 옷을 벗을 때 마다 이 이야기를 해주셨죠. 얼마나 그 상처를 자랑스러워 하셨는지…
천세윤 박사: 아버지 이야기는 탐사 내내 많이 들었으니… 이야기는 이따가 하죠.
권준환: 제가 아버지를 잘 아는 만큼 아버지도 절 알 알았을까요? 과연 제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자 했는지 알았을까요? 제가 연극을 하고 싶었다는 걸 아버지가 알았다면 그때… 과연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권준환이 멈춰선다.
구슬픈 색소폰 소리가 둘을 감싼다.
권일복: (색소폰에서 입을 떼고)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산새도 슬피우는 노을진 산골에~
반짝이는 옷을 입은 대상이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트로트를 열창하고 있다.
천세윤 박사: 아버님께서 음악도 하셨나요?
권준환: … 아니요. 저도 모르던 이야기 입니다.
권일복: 엄마구름 애기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갔나 어디서 살고 있나~
윤금선 교수: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네요.
스완 요원: 잘 부르시네요.
권준환: 아버진 제게 이것에 대해선 단 한번도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권준환은 우두커니 서서 스포트라이트 아래의 청년 아버지를 바라본다.
권일복: 아~ 우리는 외로운 형제 길잃은 기러기~
천세윤 박사: 말씀을 안하신 이유는 아무래도… 포기하신 거겠죠.
또다른 스포트라이트가 뒷편에 커다란 침대를 비춘다.
해가 뜨기 전의 새벽, 대상은 일어나 아내와 자식이 자는 모습을 지켜 보고는 자리를 뜬다.
모두가 자는 사이에 대상은 출근 준비를 마친다.
출근을 나서기 직전 그는 장롱에서 커다란 케이스를 꺼낸다.
케이스를 열자 안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색소폰이 있다.
대상은 도로 색소폰을 케이스에 담고는 집을 나선다.
그리고 대상은 집 앞의 쓰레기통 안에 케이스를 던져 넣는다. 그는 한참을 케이스를 쳐다 보고는 서류가방을 매고 출근을 떠난다.
권준환: (말 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는 그저… 그저…
천세윤 박사: 움직입시다. 기억의 최심부에 거의 도착했어요.
권준환: 절… 절 위해서…
천세윤 박사: (잡아 끌며) 빨리 갑시다!
폭발음과 함께 땅이 뒤흔들린다.
하늘에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혼미백산하여 달아난다.
천세윤 박사: 아악! 이게 다 뭐죠?
스완 요원: 6.25 때의 기억인가 봅니다. 그쪽도 폭격 당하지 않게 빨리 대피하십쇼.
하늘이 어두워지며 거대한 가오리 형태의 폭격기가 하늘을 가린다.
윤금선 교수: 이게 대상의 어린시절의 트라우마가 되었나 보네요. 어쩌면 기억들이 붕괴할 때 마다 땅이 흔들렸던 게 바로 이 트라우마의 발현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천세윤 박사: 어서! 이 오두막으로 들어와요!
포탄이 사방에서 터진다. 천세윤과 권준환은 얼굴을 가리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온다.
SCP-313-KO: (구석에서 귀를 막은 채 흐느끼고 있다.)
천세윤 박사: 윤교수님? 대상의 내면아이에 도달했습니다. SCP-313-KO, 아니, 권일복씨? 정신이 드시나요?
윤금선 교수: 내면아이… 그렇죠. 이 상황에선 정확한 표현이군요.
SCP-313-KO: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세윤을 바라본다.)
천세윤 박사: 권일복씨? 옆에 아드님 알아보시겠어요?
권준환: … 아버지…?
포탄 소리
천세윤 박사: 물러나세요. 일단 콜린에스테라아제 억제제를 투여하겠습니다.
천세윤이 대상의 입에 주황색 알약 하나를 집어 넣는다.
대상은 훌쩍이며 알약을 삼킨다.
윤금선 교수: 현재로썬 많이 늦은 시간대라 효과는 미미할 겁니다.
천세윤 박사: 안하는 것 보다야 낫겠죠. 그럼, 스완 요원? 이제 뭘 어쩌라는 거죠?
스완 요원: 제가 아까 주머니에 넣어드린 기억소거제 있죠? 그걸 대상에게 투여하세요.
천세윤 박사: 하. 네 뭐, 그렇죠.
권준환: 기억을 소거한다고요?
윤금선 교수: 네? 아뇨아뇨, 기억소거제는 단지 기억을 개인무의식 단계로 내리고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을 뿐입니다. 애초에 지금 이 상황이 대상의 개인무의식 속 기억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거라고요. 기억소거제는 아무 해결책도 되지 않아요.
천세윤 박사: 음, 윤금선 교수님, 이건 그냥 기억소거제가 아닙니다. 바로 Y-909 화합물에 기반한 특제 기억소거제죠. Y-909 화합물은 다른 기억소거제와는 달리 말 그대로 기억을 정신에서 도려내어 삭제시킵니다. 우리의 영혼에 그렇게 구멍을 남기죠.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기억을 도려내는 물질이에요.
윤금선 교수: 그렇다면 아주 말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천세윤 박사: 얼만큼 투여 합니까? 보니까 농도가 꽤 짙은 거 같은데요. 알약 반 개 투여하면 됩니까?
스완 요원: 한알 전부 투여하세요.
천세윤 박사: 이 정도 양을 한번에요? 그럼 대상은 사실상 뇌사상태가 될 텐데요.
스완 요원: 다른 방법보다 가장 확실하게 처리하는 방법이죠.
권준환: 잠시만요. 지금 당신, 제 아버지를 죽이려고요?
스완 요원: 죽이는 건 아니고, 존재하는 모든 기억을 없애고 무의식 상태로 만드는 겁니다. 어차피 지금 아버님의 건강 상태에 비하면 달라질 건 없고요, 저희는 그 끝에 있는 걸 조금 앞당겨 올 뿐이에요.
권준환: 아니… 그래도… 제가 이제야 이해 했는데… 드디어… 드디어 아버지를 이해 했는데…
스완 요원: 왜 그렇게 까지 매달리는 거죠? 권준환씨?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이제는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에 불과합니다.
권준환: … 뭐라고요?
스완 요원: 우리, 솔직해 지자고요. 지금 이 변칙성이 아니더라도 아버님이 벽에 똥칠하시는 걸 직접 간호라도 해보셨습니까? 치매는 사실 당사자 보다도 그 주변인이 제일 힘든 병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조금이라도 아버지에게 신경을 썼다면, 오히려 먼저 그러자고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안해보셨잖아요? 그러니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거죠. 안 그래요?
윤금선 교수: 스완씨!!
권준환: 당신이 지금 뭘 지껄이고 있는지, 뭘 하려고 하는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스완 요원: 저도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이해한답니다. 한국은 또 제가 태어난 나라였으니까요. 제게도 이런 가족이 있었다면 공감까지 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그런 적이 없었네요. 그래도 천박사님은 공감까지는 아니어도 이해는 하시죠?
천세윤 박사: … 아버님과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는 건 안타깝지만, 방법은 이것 밖에 없어요.
스완 요원: 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네요. 천박사님.
침묵
권준환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권준환: … 부모 없이 자라온 걸 길게도 말씀하시는 군요.
권준환은 바닥에 쭈그려 앉은 대상을 들춰 맨다.
천세윤 박사: 아니 당신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이러다 다 죽어요!
스완 요원: 명령 불복종의 책임은 이후에 묻도록 하죠.
윤금선 교수: 세상에, 준환씨부터 진정시키세요!
천세윤 박사: 잠깐! 권… 권일복씨! 정신이 드시나요? (대상의 손을 잡아 끈다.)
SCP-313-KO: (두리번 거린다.)
권준환: 안돼! (천세윤의 손을 뿌리친다.)
천세윤 박사: 313KO 이리 내요!
권준환: 아버지한테 손대지 마!!!
폭발이 주변에서 크게 일어난다. 충격파가 오두막을 덮친다.
권준환과 천세윤이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SCP-313-KO는 기둥에 머리를 부딪힌다.
천세윤 박사: (신음소리. 땅바닥을 짚으며 알약을 찾는다.)
권준환: (눈 앞에 굴러들어온 알약이 눈에 들어온다.)
천세윤 박사: 잠깐!
권준환: (알약을 곧바로 집어들며 일어선다.)
천세윤 박사: 안돼!
주변의 현실이 조각나기 시작한다. 무수히 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휘몰아친다.
윤금선 교수: 7… 7단계에 돌입! 어서… 어서 빨리 나오세요!
권준환: 전 아버지와 함께 나올 겁니다.
천세윤 박사: 하아, 씨발, 준환씨!
포탄이 한번 더 주변에서 폭발한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어진다.
[JUNG 아키텍쳐 기반 메멘토스 저장소 오류 발생.]
[불연속적 정신신호 감지.]
<기록 종료>
<부록3> 추가 기록물
녹화 장비: JUNG 아키텍쳐 기반 소형화 메멘토스 저장소 (감각 입력)
<기록 시작>
권일복: (어디선가) 그래 임마. 다 울어 재껴버려라. 여기서 다 털고 가라.
합창단: 손에 손잡고~
[Error! 불연속적 정신신호 감지]
권일복: (어디선가)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천세윤 박사: 하아 세상에…
[Error! 손상된 데이터 감지.]
윤금선 교수: [노이즈] 영향권이 팽창… [노이즈] 어떻게든 대피… [신호 소실]
스완 요원: 빨리… [노이즈] Y-909를… [판독 불가]
천세윤 박사: 하, 씨…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빨리 알약을 찾아야 뭘 하든말든 하지…
색소폰 소리
권일복: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산새도 슬피우는 노을진 산골에~
[Error! 에러코드 614: 자세한 정보는 곽수일 박사에게 요청하십시오.]
천세윤 박사: 권준환씨!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권준환: (어디선가) 오지 마세요.
천세윤 박사: (두리번 거리다 뒷편에 서있는 권준환을 발견한다.) 거기 있었군요.
권준환: 가까이 오지 말라니깐요.
큰 진동과 함께 땅이 크게 휘청인다.
둘은 중심을 잡기 위해 팔을 허우적댄다.
천세윤 박사: 잊으셨나요? 제가 당신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5분 내에 이 끓어오르는 개인무의식에 잠식당해요.
권준환: (침묵) 유감이군요.
천세윤 박사: 허… 그렇게 나오시겠다?
권일복: (멀리서 메아리치며) 어디 감히, 어디 감히 느이 애비한테 대들어!
권준환: 당신이 말했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곤 한다고요. 네. 전 아직도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직 포기하지도 않았고요.
천세윤 박사: 어쩌면 그건 본인의 딸에 대한 기대사항이 투영된 것일수도 있죠. 자신의 딸이 언젠간 자신을 버리진 않을까 하는 그런 심리가요. 어쩌면 본인이 제일 잘 알겠죠.
권준환: 흠, 인정하죠.
권준환은 그녀를 바라본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 친다. 뒷편으로 뒤틀린 심리지형이 깎아지른 절벽을 형성한다.
천세윤 박사: 스스로를 벼랑으로 몰고 가네요. 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요.
권준환: …
천세윤 박사: 그럼 이제 제발 그 같잖은 자존심 내려 놓고 기억소거제 이리 내요.
인디아나 존스의 팡파레 소리
권준환: 와볼테면 와봐요.
침묵.
그리고 바람소리가 침묵을 깬다.
천세윤 박사: …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기꺼이요.
천세윤은 그를 바라본 채로 한걸음 씩 다가간다.
천세윤의 구두 소리가 울린다.
권준환은 조금씩 뒷걸음을 친다.
아기 우는 소리와 역정내는 소리, 시위대의 노랫소리가 그의 뒷편에서 울린다.
권준환은 식은 땀을 흘리며 천세윤을 노려본다.
천세윤 박사: 아버지의 기억들이 당신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군요.
천세윤은 성큼성큼 나아가기 시작한다.
권준환: … 하지만 전 그것들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인디아나 존스의 팡파레 소리와 함께 권준환은 페도라를 쓴다.
그는 주머니에서 꺼낸 채찍을 휘둘러 벼랑을 넘어간다.
포탄 소리와 함께 기억공간이 더 크게 뒤틀리기 시작한다.
천세윤 박사: 이런 썅!
천세윤은 그를 잡기 위해 달린다.
천세윤은 절벽 끝에서 크게 도약한다. 천세윤이 공중에 매달린 권준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
권준환은 채찍에서 손을 놓치고 같이 추락한다.
권준환: 아악!
둘은 하늘에서 수직으로 낙하한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같이 나란히 낙하하고 있다.
천세윤 박사: 약 이리 내요!!
천세윤이 스카이다이빙 도중에 그를 붙잡는다.
권준환: 절대로 못줍니다!!!!
천세윤이 주먹을 꽉 쥔 그의 손을 붙잡자 다른 사람들도 이들의 손을 잡고 감싸 푸른 원을 만든다.
다른 스카이다이버들도 함께 형형색색의 원을 만든다.
다섯개의 원이 공중에서 만나 오륜기가 된다.
합창단: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낙하산이 펴진다. 둘은 스타디움 안으로 물결지어 입장한다.
권준환이 먼저 땅에 거칠게 착지한다.
천세윤 박사: 기다려!
천세윤이 그를 쫒아 달린다.
중계: 아! 천세윤 선수! 끈질기게 쫒아갑니다! 빈틈을 보이지 않습니다!
캐스터: 여러분도 저 붉은 악마의 함성소리가 들리시나요?
함성 소리
캐스터: 아!! 뒷쪽에서 천세윤 선수! 슛!
천세윤은 있는 힘껏 축구공을 찬다.
중계: 아아!!! 권준환 선수의 철통방어! 슛을 막아냅니다!
관중의 환호성 소리
관중: 오~ 필승 코리아!
천세윤 박사: 제발! 이게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권준환: 모두를 위해 당신은 자신의 부모를 희생할 수 있겠나요?
천세윤 박사: 그래야만 한다면 저 자신도요. 그러려고 여기 온 거죠.
최루탄이 날아든다.
권준환은 입을 가리고 최루탄 연기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시위대: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최루가스 속에서 시위대가 물결친다.
천세윤은 시위대에 휩쓸린다.
천세윤 박사: 아씨, 꾀 부리네. 콜록 콜록!
시위대: 동무야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어 바다 건너 태평양 넘어, 아 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권준환이 기침하며 카메라 앞으로 달려온다.
두개의 음료가 담긴 컵이 올려진 조그만 탁자가 있고, 그 앞에 PD가 앉아있다.
PD: 복불복 미션입니다. 하나는 아메리카노이고, 다른 하나는 까나리 액젓 입니다.
권준환은 망설이지 않고 오른쪽을 집어든다.
뒤따라온 천세윤은 왼쪽을 따라 집고 동시에 들이킨다.
천세윤 박사: 푸하!
PD: 천세윤 야외취침 확정!
실패 팡파레
권준환: 저 먼저 가겠습니다.
천세윤 박사: 어디를요?
권준환: 심층이죠. 당연히. 그곳에서 아버지를 찾을 겁니다.
천세윤 박사: 그래서 뭘 할 건데요.
권준환: 그때가서 생각해야죠.
그가 문을 걷어차 연다.
권일복: 그래! 애미애비 없이 잘 살아봐라! 어? 얼마나 잘사는 지 두고 보자!
권준환: 전 두렵지 않습니다.
천세윤 박사: 하 씨, 콜린에스테라아제 억제제의 효과는 언제쯤 나타나는 거야!
천세윤이 바닥에 침을 뱉고는 그를 따라 문으로 들어간다.
포탄이 이들 주변에 떨어진다.
권준환이 포탄으로 움푹 패인 지형을 비틀거리며 뛴다.
권준환: (숨을 가쁘게 내쉰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천세윤 박사: 아버지는 여기 안계십니다.
포탄 소리
권준환: 아버지! 아버지!
천세윤 박사: 본체는 지금 기억공간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을 겁니다. 아버님은 곧 당신도 잊고 대전시의 모두가 이 혼돈의 현실을 맞이할 거라고요!
멀리서 들리는 총성
권준환: 저 왔습니다 아버지!!
천세윤 박사: 포기해요! 아버지는 지금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정도로 정신이 와해되었어요!
폭발음과 함께 땅이 물결치듯 요동친다.
둘은 크게 휘청인다.
권준환: 아버지!!!!!!!
천세윤 박사: 당신 목소리를 들을 수도, 반응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고요!
경적 소리
권준환: 엇…
천세윤 박사: 준환씨!
SCP-313-KO: 준환아!! 안돼!
자동차가 그를 가까스로 스치고 지나간다.
권준환은 대상의 품에 안겨있다.
SCP-313-KO: 괜찮니? 다친 데는 없니?
권준환은 가만히 아버지를 바라본다.
권준환: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버지… 미안해요…
SCP-313-KO: 괜찮다면 됐다. 신경 쓰지 말아라.
권준환: 절… 절 알아보시겠나요? 어린 제가 아니라, 주름지고 수염나고 지친 저를 알아 보실 수 있나요?
SCP-313-KO: 고럼… 고럼 물론이지. 이제 다 기억이 난다 임마.
윤금선 교수: [노이즈] …가 확인됩니다. 세윤씨? 준환씨? 지금 영향권이 갑작스레 축소되고 있는 것이 확인됩니다!
천세윤 박사: 뭐라고요?
그녀가 주변을 둘러본다.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씩 순서를 맞추어 재조립되고 희미해지며 현실에서 사라진다.
도시 외곽의 한적한 골목길이 나타난다.
권준환: 정말… 이렇게 못난 아들이… 이렇게… 매번…
SCP-313-KO: 괘안타 괘안타. 다 지난일 아니냐.
멀리서 스완 요원과 윤금선 교수가 달려온다.
스완 요원: 성공… 성공 한 거군요!
천세윤 박사: 아니요. 대상은 Y-909 화합물을 투여받지 않았습니다.
윤금선 교수: 그럼…
천세윤 박사: 랠리 현상. 기적이 일어났군요.
윤금선 교수: 그렇다는 건… 임종 역시 다가왔다는 것이군요.
스완 요원: 몸은 괜찮으신가요? 이정도로 급변하는 현실에선 몸도 제 형체를 유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천세윤 박사: 괜…찮아요. 저희 둘 다요.
천세윤이 권준환을 바라본다.
권준환: 아버지 호강도 제대로 시켜 드리지 못하고…
SCP-313-KO: 얌마. 내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게 나였겠냐? 내 인생의 주연배우는 언제나 너였다.
알파 분대원 박일순 여사: 왐메, 일복씨! 우짠 일이래요?
SCP-313-KO: 허허, 일순씨 왔는가. 어째 오랜만에 보는 거 같으셔. (웃음)
권준환은 눈물을 닦고 씁쓸하게 웃으며 일어난다.
윤금선 교수: 박일순 여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SCP-313-KO를 안전한 곳에 호송 부탁드립니다.
알파 분대원 박일순 여사: 고마워요. 금선씨.
박일순 분대원이 대상을 데리고 움직이자 스완 요원이 굳은 표정으로 권준환에게 다가간다.
스완 요원: 권준환 씨. 지금 이 상황 무엇으로 책임질 거죠? 아니, 진짜로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제가 원상태로 복구시킬 거니까. 분심부 분들은 남겨두어도 SCP 포함해서 권준환 씨의 기억만큼은 소거 처리를 수행할 거에요.
윤금선 교수가 화들짝 놀라며 스완에게 다가가지만 스완이 그녀를 막아세운다.
스완 요원: 방금 전 화해하는 기억은 남겨드리죠. 그래도 장례식 때 남겨야 할 추억은 있어야 될 거 아니…
권준환은 스완의 얼굴에 주먹을 한번 날린다.
스완 요원: 어흑, 말이 안, 허억.
스완은 바닥에 쓰러져 뒹군다.
스완 요원: 감히… 이럴 수가 있어…? 어차피… 너네들도 아무것도… 몰랐잖아…?
스완이 크게 기침한다.
스완 요원: 분심부 당신들…. 윗분들이 이걸 어떻게 볼지 생각이라도 해봤어? 결국 책임지는 건 나밖에 없잖아.
천세윤 박사: 분위기는 좀 봐가면서 합시다.
스완 요원: 정말이지, 난 당신들을 이해 못하겠어… 내 오빠는 이런 상황에서 진짜 죽어버리는 걸 골랐다고…
스완은 걱정스레 쳐다보는 윤금선을 노려본다.
스완 요원: 혼자 착한 척하는 동안 다른 요원들은 어떻게 되는지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어…
권준환은 스완을 내리깔고 쳐다보며 손목을 풀고 있다.
스완 요원: 그리고 권준환씨 당신… 딸에게 잘 대해줘요, 응? 무슨 뜻인지 알겠지?
스완은 엉거주춤 일어나 코피를 닦는다.
스완 요원: 저는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그 동안 알아서 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세요들…
스완 요원은 급하게 자리를 뜬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천세윤 박사: 쟨 또 갑자기 왜 저런대요?
윤금선 교수: (한숨을 내쉰다.)
권준환: 그러게요.
<기록 종료>
<부록4> 사후 보고서
진입 프로젝트 이후 절차 관련
보고자: 윤금선 교수
우선 현재 시점 기준으로 대상과 대상의 아들은 21K기지 의무부 병실에 격리되어 있는 상태이다. SCP-313-KO는 사태 기간동안 자신의 변칙성을 명확히 알아차렸으나 현재 꽤 성공적으로 그것을 통제하고 있다. 역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스크랜턴 닺 2기가 대상의 병실에 배치되어 있다.
의무부는 SCP-313-KO에게 남은 시간은 3일 남짓이라고 전했다. 사실상, 이렇게까지 회복된 게 기적에 가깝다고. 나도 30년 가까이 정신의학을 공부하며 이정도로 명확하게 랠리 현상이 찾아온 적이 손에 꼽을 만 하다. 권준환씨는 남은 그 시간동안 대상과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대상의 시간이 다하게 된다면, 대상의 등급을 무효로 바꾸는 것을 등급분류위원회에 건의해야 할 것이다. 이런 건 곽수일 박사가 빠르게 잘 처리하니까 문제가 없을테고, 이 때가 온다면 권준환씨에게는 표적성 기억 소거제가 투여될 것이다. 스완 요원의 말마따나, 화해의 기억은 남아 있겠지. 이것이 우리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이다.
또한, 결국 이 사태가 해결된 것은 전적으로 행운에 불과한 것이고, 그런 부분에서 스완 요원의 행동은 충분히 납득할 만 하다. 다만, 작전에 대해 이런 중대한 사항을 숨기고 분심부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점은 통탄스럽기 그지 없다.(게다가 천세윤 박사는 아마 별 생각 없이 수락했을 터이다. 물론 나는 반대했겠지.) 나름 우리 분석심리학부가 커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상부의 전적인 신뢰를 받기엔 한참 멀었나 보다.
스완 요원의… 그런 감정적인 행동은 아무래도 윤리위원회의 지적을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 사실은 아무래도 본인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또, 그렇기에 그때 일부러 우리에게 모질게 굴었던 것이리라. 뭐, 자세한 건 본인이 제일 잘 알 것이다. 아무쪼록 나의 온정주의적인 선택으로 인해 그에게 필요 이상의 고통이 가해지지만은 않았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사태는 내 분석심리학부 근무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매'는 현생 인류가 짊어진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이다.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할 지, 과연 이것이 극복될 수 있는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치매 환자들은 계속해서 소외되고 있다. 사회로부터,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대상의 겪은 모든 혼란과 고통은 그 짧은 시간에 모두 해소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과 함께 찾아온 기적을 보았고, 그렇게 나는 이 인류의 커다란 과업이 언젠간 극복되리라는 희망의 빛줄기를 보았다.
그리고 이 작은 희망의 빛줄기가 있는 한, 우리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 분석심리학부 윤금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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