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P-1953-KO
일련번호: SCP-1953-KO 4 등급
등급: 유클리드-엑세퀴 보안인가 필요

특수 격리 절차: SCP-1953-KO는 건강상태가 회복될 때 까지 제01K기지 내에 가설된 특수 방균 처리시설 내의 인큐베이터에 격리된다. 대상의 빈약한 건강 상태로 인해 관리 인원이 24시간 대상을 주시하며 건강상의 문제가 생길 경우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때, 대상에게 접근하는 모든 인원은 인식저항수치(CRV)가 3.0 이상이어야만 한다.

현재 변칙개체의 심리 분석을 위한 종단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SCP-1953-KO의 전반적인 간호와 기본적인 할로우-애착 형성은 그레이스 '노래마인' 최 박사의 자원으로 시행 중에 있다. 그러나 대상이 5.0 이상의 인식재해를 방출한다면, 즉시 반밈 훈련이 된 보모와 교체해야 한다.

설명: SCP-1953-KO는 신체의 일부(특히 귀와 꼬리뼈 부근)가 붉은 여우(Vulpes vulpes)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본 문서 작성 시점 기준) 생후 1개월이 지난 여아이다.

대상은 인간의 귀 외에도 여우 특유의 뾰족한 귀와 얇은 털로 덮인 한 개의 꼬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대상은 출산 시기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다양한 신체의 일부분이 손상되어 있다. 오른손의 새끼손가락과 약지, 왼쪽 종아리 이하, (인간형 귀의) 오른쪽 귓불, 그리고 왼쪽 눈이 소실되어 있다.

SCP-1953-KO는 간헐적으로 강력한 인식재해를 방출한다. 대개의 경우 주변인에게 공복, 불안감, 다양한 자극에 대한 흥미, 그리고 애정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대상은 여느 신생아와 마찬가지로 아직 자의식이 형성될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활동이 기본적인 반사활동에 따르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재해 효과는 불규칙적이고, 원초적이다. 그렇기에 이는 스스로의 심리상태를 인식재해의 수단을 통해 직접적으로 발산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상은 발견된 이래로 계속해서 부실한 건강상태를 보여왔고, 오랜 기간동안 부모와 떨어져 있어 심리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 특히 대상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는 대상의 인식재해적 특성과 맞물려 큰 부정적 영향을 불러올 수 있기에 대상의 원활한 회복과 심리적 안정을 목적으로 임시적으로 보모를 투입 중에 있다.


발견 기록

SCP-1953-KO는 2010년 무속학부의 뇌수종 박사가 한반도 고대의 무속학적 개체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그 존재에 대한 단서가 발견되었다. 많은 자료들은 조선 중기에 경기도 과천현 부근의 산속에서 식인과 함께, 다양한 정신적, 인식재해적인 초상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가리켰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지역사령부의 뇌수종 박사와 그레이스 최 박사가 직접 관련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고, 이내 산속에서 과거 이금위에서 주로 사용하던 팔괘 기반의 강력한 무속학적 봉인이 적용된 것을 발견하였다. 해당 봉인은 강력한 시공간적 관성을 부여해 내부의 시간을 극히 더디게 흐르게 만드는 봉인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 탐사대는 충분한 무속학적 대응수단, 그리고 기동특무부대 한 분대를 동반하고 있었기에 그레이스 박사는 봉인을 푸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해당 동굴 내부에서 혼수상태에 있던 SCP-1953-KO를 발견했다.

그레이스 박사의 개인 기록


그 내부는 정말이지 아비규환이었다.

그 동굴은 피냄새와 썩은내, 그리고 탄내가 진동했다. 살점이 붙어있는 수십 구의 인골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이곳저곳은 불탄 흔적이 시커멓게 드리워 있었다.

외부 시간상으론 적어도 500년은 지났지만, 내부의 시간은 극히 더디게 흘렀기에, 내부의 시신들은 여전히 부패하고 있었다. 내부에는 봉인 당시 외부에서 사용되던 몇가지 생활용품(빗, 나막신, 엽전 등등)과 반쯤 그을린 수십 구의 인골들, 몇구의 시신들, 그리고 작은 모닥불을 피우던 흔적이 있었다.
이 모든 정황은 내부에서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지속적으로 식인행위가 있어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모닥불 옆에 있던 잿더미에는 이제 막 태어난 것으로 보이는 신생아의 형체가 둘 있었다. 이 동굴의 주인이 이들을 잡아먹으려 한 것인지, 혹은 먹기를 주저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들은 본래의 모습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체가 훼손되고 그을려 있었고, 그중 하나는 인간과는 다른 동물적인 신체기관을 일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끈적하게 늘어붙은 태반과 잿더미를 파낸 흔적이 있었다. 움푹 패인 굴곡을 보아, 그곳엔 세번째 아이가 누워있던 것으로 추청된다. 아마 이곳을 봉인한 자가 그나마 생명이 붙어 있던 아이를 데려간 것이라 직감이 들었다.

그때 나는 잿더미 사이에서 꼬리와 동물귀를 가진 아이가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는 걸 미약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숨결이 너무나 미약했기에, 대부분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 건강상태로 보아 분명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리라. 나는 즉시 당시에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해 그 아이의 생명을 구하고자 했다. 앰뷸런스에서 기본적인 응급조치가 이루어졌고, 그렇게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여전히 의식은 없었지만, 아이는 정말 잘 버텨주었다.

나는 뇌수종 박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아이를 품에 안고 01K기지로 복귀했다. 의무부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고 했지만, 아이는 정말이지 강인했다. 아이의 신체 일부는 영영 회복되기 힘들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지만 하루가 갈수록 건강해졌고, 얼마 전엔 의식까지 되찾았다.

01K기지의 많은 사람들이 이 아이의 살고자 하는 의지에 감탄하고 또, 힘을 얻고 있다. 부디 그 의지를 끝까지 잘 이어갔으면 한다.


변칙개체 종단 연구 계획 개요

제안자: 제01K기지 분석심리학부 윤금선 박사

승인자: 한국지역사령부 김정회 관리이사관

참여 인원:

  • 개체의 발달심리 연구: 분석심리학부 윤금선 박사
  • 개체의 변칙성 상호작용 연구: 변칙존재협력학부 치이카 박사
  • 개체의 건강 관리 및 보육: 그레이스 '노래마인' 최 박사1

개요: 현재 SCP 재단 한국지역사령부는 이례적으로 적은 연령의 인간형 변칙개체를 발견하였기에 이전부터 계획중에 있던 변칙개체의 심리를 중심으로 한 종단 연구2계획을 SCP-1953-KO에 적용하였다. 즉, 본 연구는 SCP-1953-KO 단일 개체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유의미한 데이터를 얻는 것이 목적이다.

내용: 본 연구계획은 제01K기지 내 분석심리학부, 변칙존재협력학부의 주관에 따라 SCP-1953-KO를 주기적으로 보모가 돌보며 그 과정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변칙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제어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떠한 발달심리학적인 변화가 있는지를 중심으로 연구할 예정에 있다.

현재 전반적인 격리는 그레이스 박사의 총괄로 이루어지고 있고, 대상이 건강을 되찾고 성장함에 따라 개정될 예정에 있다.

이것은 기회입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대부분 완전히 성장한 인간형 변칙존재와 대면했습니다. 그렇기에 변칙성이 영유아기의 인간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스스로 그것을 어떻게 제어하는 방법을 찾는지, 혹은 그러지 못하고 무너지는지, 이러한 것들에 대한 연구가 조금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영유아의 변칙성을 확인하기 힘든 이유로 크게 두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 아직 변칙성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파악하기 어려움. 혹은 둘, 선천적으로 강력한 변칙성을 가지고 있고, 이로 인해 주변인에게 치명적 영향을 미치기에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해 조기에 사망하기 때문.

하지만 SCP-1953-KO는 영아기에 발견된 매우 특이한 케이스이기에 충분한 돌봄이 있다면 개체가 성장하며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분석심리학부 윤금선 박사


1953-KO 연구노트 1

이하 자료는 그레이스 최 박사가 SCP-1953-KO의 종단 연구를 진행하며 그 발달과정에 대해 수기로 정리한 연구자료이다. 이 자료는 대상의 의식이 회복된 이후부터 생후 12개월까지의 기록이다.

SCP-1953-KO가 의식을 되찾은지 1주일이 지났다. 아직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적은 활동성만을 보이고 있지만, 잡기 반사나 빨기 반사와 같이 주변의 자극에 반응하고 고개를 돌리는 기초적 반사반응은 건재했다. 몸 곳곳의 상처는 아직 완전히 아물진 않았지만, 초기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


SCP-1953-KO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인큐베이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초기엔 많이 울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보였다. 기초적인 할로우 애착 형성을 위해 SCP-1953-KO에게 솜인형이 제공되었고, 보모(그러니까, 나)의 투입도 좀 더 자주 이루어졌다. 애착관계 형성이 이루어진 이후론 심박수도 정상화되고, 심리상태도 안정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없을 때 많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내가 좀 더 자주 접촉하는 것으로 완화시켜야 할 것이다.


SCP-1953-KO는 이제 기어다니고 옹알이를 시작했다. 하나의 눈으로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7개의 손가락과 하나의 다리로 그 세상을 누빈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내가 받쳐 주어야만 앉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스스로도 잘 앉고 이것저것 잡고 입에 넣기 시작한다. 한시라도 눈을 떼면 비좁은 격리실의 어디론가 가서 내 펜을 입으로 빨고 있거나 내 옷에 침을 흘린다.


1953-KO는 산발적으로 인식재해를 방출한다. 반사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이다. 대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타인에게 전달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인식한 불완전한 세계를 그대로 남에게 투영하고는 한다. 내가 영향을 받았을 때 꽤나 당황스러웠지만, 오히려 신생아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경험은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이제 1953-KO는 스스로 일어나려고 끙끙대기 시작했다. 내 부탁으로 1953-KO에게 의족을 장착시킬 수 있었다. 아이에겐 의족은 너무나 불편한 것일테지만, 1953-KO는 수많은 시도 끝에 내 손을 잡은 채로 두 다리로 설 수 있었다.


1953-KO에게 이제 대상영속성이 생겼다. 평균적인 아이들보다 2주정도 빠르게 말이다.

대상영속성이란, 눈앞에 있던 물체가 보이지 않게 되어도 여전히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대상영속성이 없는 아기는 시야에서 엄마가 사라지면 엄마가 죽었고, 더이상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렇게 서럽게 우는 것이다. 하지만 대상영속성이 생긴 이후엔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져도 엄마는 죽지 않았고, 다시 돌아올 거라 믿는다고 한다.

이제 아이는 시야에 내가 없어도 전처럼 서럽게 울지 않는다. 이제는 격리실을 떠날 때, 조금은 안심이 될 것이다.


오늘 1953-KO가 방출한 인식재해가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다행히도, 부정적인 영향은 크게 없었다. 내가 조금 코피를 흘린 정도. 뭐,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격리절차에 따라 1953-KO는 잠시 임시 보모에게 갔지만, 계속 나를 찾으며 울었다고 한다. 묘하게 뿌듯한 마음이 든다.


오늘 1953-KO가 나에게 '엄마'라고 말했다. 나는 부정했지만 말이다. 이제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기가 뭘 알겠는가.

어머니는 최초의 타인이다. 아이가 나를 엄마라고 불러줬다는 건 아이가 스스로와 나를 구분짓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아가 드디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구 팀원들은 아이의 자아가 더욱 명확히 형성되고 주변의 사물과 그 개념을 인지하게 될 때까지는 개체가 나를 엄마로 여기도록 하자고 했다.


SCP-1953-KO와 관련한 후속조사

2011년 6월 27일 뇌수종 박사는 정상세계의 무속학과 관련한 논문을 수집하던 중 문헌학자 장하영 교수의 자료를 발견하였다. 이때 해당 자료에는 SCP-953과 그 자식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문헌에 따르면 SCP-953은 고대 한반도에 존재하던 요호 종족으로, 최소 1500년을 생존해 오며 식인과 타인의 EVE 흡수를 통해 신체 내부에 무속학적 에너지를 축적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SCP-953의 자식에 대한 정보도 찾을 수 있었다. 해당 문서의 확보 과정에서 재단의 요원과 마찰을 빚은 PoI-DH-001 "호야"가 바로 그 대상으로, 현재 요주의 단체 뱀의 손의 한국 지부인 '능구렁이 손'의 주석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상은 SCP-953과 유사한 인격과 변칙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해당 자료에는 SCP-953의 마지막 거처로 파악되는 자세한 위치 정보가 실려 있었고, 해당 위치는 이전에 뇌수종 박사와 그레이스 박사가 탐사를 진행한 동굴의 위치와 동일했다.

즉, 여러 정황상 SCP-1953-KO는 SCP-953의 자식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요주의 인물 PoI-DH-001 "호야"와 자매 관계인 것으로 확인된다.


1953-KO 연구노트 2

이하 자료는 대상의 생후 12개월차 이후부터 24개월차까지 작성된 그레이스 최 박사의 개인 일지이다.

이제 1953-KO의 꼬리는 제법 푹신한 털이 자라났다. 여우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이전까지는 조금 잊고 있었지만 1953-KO는 요호다. 하지만 이 아이와 17기지에 있는 요호를 비교하자면… 이 둘이 동일한 종족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만일 1953-KO가 온전히 성장하게 된다면 그 이처럼 되어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밑에서 자란 재단의 아이가 될까?


아이는 이제 혼자서도 꽤나 잘 서있을 수 있다. 의족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훌륭히 잘 적응해 주었다. 그리고 이젠 운동성이 급격히 늘면서 격리실 이곳저곳으로 왔다갔다 하는 걸 좋아한다. 제공받은 장난감들도 가지고 노는 걸 정말 좋아한다. 1953-KO는 특히 노란색 장난감을 좋아한다.
추가로, 개체의 활동성이 증가함에 따라 격리실의 내벽을 좀더 푹신한 재질로 교체했다.


이제 1953-KO에게 동화책이 제공된다. 내가 천천히 읽어주면 아이는 정말 집중해서 바라본다. 간단한 단어는 입으로 옹알거리며 따라해 보기도 한다. 이제는 응, 아니, 엄마, 뭐야?, 누구야?, 어디? 등의 단어를 알아듣고 말할 수 있다. 아이는 호기심이 굉장해서, 그림책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가리키고 이게 뭔지 물어본다. 하긴, 한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까.


1953-KO는 화가가 될 모양인가보다. 투입된 크레파스를 이틀만에 모두 소진해 버렸다. 격리실의 내벽을 보면 이곳이 아기가 사는 곳인지, AWCY의 전시장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어차피 더러워진 시트와 내벽을 교체할 예정이었기에 그냥 마음껏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라고 했다. 아직 어떠한 형체를 명확히 그리기엔 역부족이지만 말이다.


오늘 나는 김정회 이사관님의 뒤를 이어 한국지역사령부의 관리이사관으로 부임했다. 이젠 그레이스 최 박사가 아닌 최 이사관이다. 빨리 입에 붙어야 할 텐데, 아직도 조금 어색하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공적은 1953-KO를 찾기 전의 일로 인한 것이었고, 최근 들어서는 거의 1953-KO와 관련해서만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이제부턴 꽤나 바빠지게 될 것 같다.
이사관이라는 자리는 내게 너무 과분한 직책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아무쪼록 1953-KO의 종단 연구와 병행할 수 있기를 바래야겠지.


1953-KO는 이제 자기 인식을 시작했다. 칭찬을 해주면 활짝 웃어주고, 거울 속의 자신을 이해하고, 그림책 속 아이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당초에 정한 대로라면, 이제부터 나는 이 아이의 엄마라고 불리지 못하게 될 예정이다.

하지만 그건 여전히 아이에게 너무나 혼란스러운 변화일 것이다. 자신이 인식하고 이름 붙인 세상의 요소의 것이 갑작스레 알 수 없는 누군가의 합의로 바뀌어 버린다는 것이 말이다. 1953-KO는 여전히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자 했고, 나는 연구팀에게 사정하여 그 기간을 조금 더 미루기로 했다. 아이에게 내가 자신을 낳지 않았고, 그저 키워주기만 한 '어머니의 대행자'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논리적인 사고가 자리잡을 때 까지 말이다.


아이의 변칙성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아직은 스스로 제어하는 것을 힘들어 하지만, 그 정교함은 경이로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종단 연구 담당 인원들과 긴급 회의를 가졌다. 회의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아이의 능력을 긍정하고 발전할 수 있게 도울 것인가, 혹은 부정하고 억압시킬 것인가.

다양한 의견이 오갔지만, 최종적으로 윤금선 박사의 제안이 통과되었다. 능력을 억압하는 것은 도리어 그것이 무의식 속에서 곪아 비대해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대신 이제부터 아이에게 변칙성을 방출하고 스스로 제어할 수 있게끔 하는 훈련을 시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훈련시킬지가 여전히 막막한 문제이다.


훈련 방법에 대해 정말 많은 논의가 있었다. 학습심리학적으로 다가가자면, 아이가 일정량 이상의 인식재해를 방출하면 부적자극을, 그 이하일땐 강화물을 제공하는 방법이 있다. 이는 다른 변칙개체를 다룰 때에도 자주 사용되는 방법론이다. 그리고 대개 강화물은 먹이, 부적자극은 전기충격기를 통해 제공된다. 하지만 1953-KO의 종단실험의 의의는 일반적인(그리고 더 나아가 이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는 유아를 연구하는 것에 있기에 나는 적극적으로 이 방법에 대해 반대했다.

문제가 있다면 '그래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이지만 말이다. 결국 마땅한 묘수가 없다면 결국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안타깝지만, 우리는 재단이기에, 제대로 된 해결방법을 모색하지 못한다면, 언젠간 이것을 행할 수밖에 없다.


보존된 자료: 클레프 박사의 메세지

우선, 관리이사관의 자리에 오른 것에 축하의 말을 보낸다. 당신의 삶에 평화가 있기를.

SCP-1953-KO에 대하여 몇가지 이야기 할 사안이 있어서 이렇게 메일을 보낸다.

첫번째로, SCP-1953-KO에 관한 그레이스 최 이사관의 선택에 대해 큰 우려를 표한다.
최 이사관은 SCP 재단의 목적성을 유실하고 지극히 감정적인 이유로 SCP-1953-KO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실질적으로 한국지역사령부 전체에 대한 관할을 하고 있는 본인이 직접 SCP와 접촉하고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지역사령부 관리이사관이라는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 책임감의 부재로 느껴진다.

두번째로, SCP-1953-KO의 어미 개체가 SCP-953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SCP-953 확보작전에 참여한 장본인으로서, 그리고 현재까지도 그 개체의 격리전문가를 임하고 있는 본인의 현 직위로서, 본인은 그 개체가 가진 야만성과 사악함을 뼈로 직접 느끼고 있다. 1953-KO가 가진 인식재해적 효과는 953의 것보다 훨씬 강력한데, 현재의 신체적인 능력은 인간보다 떨어질지언정, 성체가 되었을 때 가져올 정신적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과연 당신의 대상을 향한 온정적인 시선이 그 때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기대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또다른 비극으로 이어지질 않기를 바라겠다. 물론, 본인 스스로가 그를 인지하고 대비해야만 그 비극은 현실화 되지 않을 것이다.

SCP-1953-KO는 당신의 자식이 아니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부디, 우리 모두가 양지를 위해 음지에서 죽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아주었으면 한다.


— 알토 클레프 박사 올림


1953-KO 연구노트 3

이하 자료는 대상의 나이 만 2세 부터 만 5세까지 작성된 그레이스 최 이사관의 개인 일지이다.

1953-KO는 이제 또박또박 말도 잘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저없이 말하고 싫어하는 것을 확실하게 표현한다.
날이 갈수록 주변의 사물을 보고 이름을 말하는 것이 능숙해졌다. 곰인형, 동화책, 펜, 키카드, 카메라, 보안요원.
다른 아이들이 쉽게 접하지 못하고, 발음하기도 힘든 물건들이 많았지만 또박또박 말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대견하다는 마음이 든다.


SCP-1953-KO는 동화책을 정말 좋아한다. 특히 구전동화, 그중에서도 햇님과 달님 이야기를 좋아했다. 호랑이가 나오는 부분을 무서워해서 그 부분이 나오면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곤 했다. 장난기가 돌아 내가 일부러 무섭게 호랑이의 대사를 따라했는데,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는 매일 내가 오면 동화책을 펼쳐 보이며 등장인물을 설명해주곤 한다. 얘는 누구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했는지. 1953-KO의 말을 들어주다보면 시간이 훌쩍지나버린다. 요즘 동화책이 이렇게 재미있는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오늘은 내가 격리실을 떠날때 1953-KO가 울지 않았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이러한 헤어짐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것은 아닌지 걱정이 든다.


1953-KO가 처음으로 나에게 강력한 요구를 했다. 나무를 보고 싶다고. 동화책에 항상 나무와 숲이 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휴대폰으로 나무와 숲의 사진을 보여주었지만, 아이는 직접 보고 싶다고 떼를 썼다. 아이는 처음으로 악을 쓰며 울었다. 그렇게 목청이 떨어져라 우는 것을 보니 그래도 건강은 하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동시에 인식재해 수치가 10.0 가까이까지 치솟았다. 이것은 (평균 이상인) 인식저항수치 5.0인 내 용량을 두배나 상회하는 양이었고, 갑작스러운 정신적인 타격에 나는 코피를 쏟아냈다. 아이는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피에 크게 놀랐고,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이를 안아주어 안심시켰다.


이후로 아이는 자신의 변칙성에 대해 크게 두려워 하고 숨기려하는 경향을 보였다. 아무래도 그때의 경험이 큰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인것 같다.

이제는 아이는 밖에 나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마음이 무겁다.


윤리위원회와 변칙존재협력학부에게 사정을 하여 드디어 외출 권한을 얻어내었다. 첫번째로, 종단 연구에 필수적이라는 나의(그리고 변협부 치이카 박사의) 강력한 주장, 두번째로 윤리위원회에게 SCP-1953-KO의 실험을 제공하자는 딜 승낙, 그리고 마지막으로 킬리 이사관의 약간의 도움으로 겨우 얻어낸 것이다. 밥 한끼 사줘야 겠다. 아직은 01K기지의 부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달에 한번 2시간 동안만 가능하지만, 분명히 큰 전진이다.

윤리위원회의 실험은 한참 뒤에 진행될 예정이니 일단 마음은 놓고 있어도 될 것이다. 다만, 당장에 필요한 건, 다음주 내로 제한적으로나마 외출을 할 수 있게 관련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만에 야근 깨나 해야 할 것이다.


오늘 드디어 아이와 함께 01K기지 주변의 산 중턱으로 산책을 나갔다.

산속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아이에겐 정말 신기하고 새롭다. 한걸음 뗄 때 마다 아이는 나에게 묻는다. '이건 뭐에요?' '저건 뭐에요?' '이걸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나요?' '저거는요?'. 나는 꼬박꼬박 대답해 주면서 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도왔다. 격리실에 돌아와서도 아이는 계속해서 나에게 산책 중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다. 정말 좋았나 보다.


아이는 평소보다 훨씬 활기차게 변했다. 활동성도 커졌고, 하루종일 놀아줘도 전혀 지치지를 않는다. 하나밖에 없는 눈 때문에 원근감이 없어 여전히 비틀거리긴 하지만, 이제는 제법 잘 뛰고 잡고 던지며 잘 논다. 특히 산책을 할 때는 정말이지 엄청난 에너지를 보여준다. 오늘 산책 중엔 돌을 잡아 던지는 거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나중에 좀더 크면 캐치볼이라도 해 볼 생각이다.

산책 중에 생긴 재미있던 일도 생각난다. 오늘 산책 중에 무심코 아이가 던진 돌에 비둘기 한마리가 맞고는 도망친 일이 있었다. 아이에겐 이게 상당히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격리실로 돌아가는 동안에 끊임없이 비둘기가 얼마나 아팠을지 울먹이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17기지의 그 요호와는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건 기록: 외부 세력 개입으로 인한 SCP-953 무력화 사건

무력화 대상: SCP-953
위치: 제17기지 B동 A관 SCP-953 격리실 내부
격리 담당관: 알토 클레프 박사


<기록 시작>

CCTV 화면에 격리되어 있는 SCP-953이 비친다.

SCP-953은 먹이로 제공된 염소 한마리를 먹어치운 뒤라 격리실 이곳저곳에 유혈이 낭자하다.

갑작스레 전등이 깜빡인다. 그리고 곧 사이렌과 함께 붉은 조명으로 바뀐다.

신원 불명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SCP-953은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3번의 총성이 들린다.

SCP-953은 가만히 서서 격리실 문을 바라보고 있다.

둔탁한 소리

키카드의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는 거대한 격리실의 문이 천천히 열린다.

SCP-953: 거 누구냐.

입구의 어둠 속에서 흐릿한 인간형 형체가 나타난다.

[신원 불명]: 정말 오랜만이야.

SCP-953: 네놈의 짓인가?

[신원 불명]: 물론. 나한텐 식은죽 먹기지.

SCP-953: 권토중래. 널 여기서 다시 볼줄이야. 지천명을 서른번 넘기고도 운명이란건 언제나 알다가도 모르겠군 그래.

입구의 형체가 천천히 걸음을 대상에게 옮긴다. 대상은 푹 눌러쓴 빵모자와 혈흔이 이곳저곳 묻은 푸른 조끼를 입고 있다.

대상의 한손에는 위스키병이, 다른 한손에는 리볼버 한자루가 들려있다.

SCP-953: 어찌, 잘 지냈는가? 딸아이여.

호야: 덕분에. 아주 환상적으로 지내고 있지.

호야는 아랑곳 하지 않고 피가 고인 웅덩이 위에 위스키병 하나와 샷 글라스 두개를 올려놓고 그 앞에 앉는다.

호야: 앉아. (리볼버를 겨눈다.)

SCP-953: (웃으며 천천히 앉는다.) 언제 마지막으로 뵌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구려.

호야: 언제였더라, 한 200년 전 쯤인가?

SCP-953: 아, 그랬었지. 거 참 오랜만이네. (웃음)

호야: 그나저나, 내 이야기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SCP-953: 친절한 범인들이 세속의 이야기를 간간이 전해주는지라. 특히 비파를 든 색목인이 자주 네 이야길 하더군.

호야: 하, 클레프. 쓸모 없이 일을 벌이는 건 옥리들 특징이군. 뭐, 내겐 아무래도 상관 없지. 내 소개를 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일이 없어졌으니. (잔에 술을 따른다.)

SCP-953: 쓸모 없다니, 그래도 그 이들도 날 실험하고자 네 연고를 들려준 터인데. 물론 저들이 알아낸 건…

호야: 네게 모성애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뿐이겠지.

SCP-953: (말 없이 웃고는 잔에 담긴 위스키를 털어 넣는다.) 그래서 왜 여기에 온 거지?

호야: 내가 짊어지고자 하는 책무를 완수하기 위해.

SCP-953: 책무? 어미를 죽이는 것?

호야: 잘 아네. (호야 또한 잔에 든 술을 들이킨다.)

SCP-953: 날 죽이는게 왜 네 책무인가? 누가 시켜서 그런건가? 원래는 별 이유 없지 않았나?

호야: 내 스스로 정한 내 과업이니까.

SCP-953: 재미있구려. 누가 시키지도 않은 귀찮은 일을 스스로 정하다니.

호야: 나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거든.

SCP-953: 그럼 뭘 기다리는 게냐? 어찌하여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어미와 술잔을 기울이는지?

호야: 가기전에 뭐라고 지껄이는지 말이나 좀 들어 보려고.

SCP-953: 무슨 말?

호야: 뭐든.

둘은 말없이 술을 들이킨다.

호야: 천오백년을 살았지?

SCP-953: 왜 그런걸 물어보는거지?

호야: 지금와서 돌아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 죽음을 문턱에 둔 이때에. (리볼버를 흔들어 보인다.)

SCP-953: 무념무상이오. 난 충분히 살았어. 구미호에겐 천년이면 제 명을 다 산거지. 100년마다 꼬리 하나 얻는게 그렇게 뿌듯했는데, 안타깝게도 9개 달고 나선 그것도 의미 없어졌네.

호야: 그럼 그 이후로 500년동안 어떻게 살아온 거지?

SCP-953: 글쎄. 나도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

호야: 계속 살고자 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지. 안그래?

SCP-953: 아, 불쌍한 호야. 내가 어떤 대단한 이유 때문에 살아간다고 착각하고 있구나.

호야: 대단한 이유가 없는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나으니까.

SCP-953: 작금의 시대엔 돈을 받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들도 있다 들었는데, 그런 사람에게 찾아가 보는게 어떤가? (술을 홀짝인다.)

호야: (리볼버를 들이민다.) 그건 대답이 아니지.

SCP-953: (웃음) 미안한 이야기지만, 너의 그 공허함, 이 어미는 모두 다 알고 있단다. 왜 살아가냐고? 그야 당연한 것을.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린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거야.

호야: (술을 들이키고는 낄낄 웃는다.)

SCP-953: 넌 뭘 위해 살아가지? 사랑? 자아의 실현? 정의의 구현? 내 장담하는데, 다 찰나의 순간에 다 스러져버리지. 보이지도 않는 걸 위해 얼마나 많은 멍청한 사람들이 죽어가는지!

호야: 알아. 나도 존나게 잘 알지.

SCP-953: 너도 마찬가지란다. 딸아. 내가 몇명의 딸을 낳은 지 알고 싶나? 내가 왜 널 버린 지 아나? 수많은 시간들 속에서 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딸아이 중 하나야.

호야: 뭘 새삼스레.

SCP-953: 하지만 이 어미는 딸이 내게 찾아와서 나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을 주러 왔다는 사실에 눈물을 아니흘릴 수 없구나.

호야: 저항 같은 건 안하나?

SCP-953: 지금와서 무슨 쓸모가 있겠나.

호야: (표정이 어두워진다.) 한번 겨뤄나 보고 싶었는데.

SCP-953: 글쎄, 난 관심이 없네.

호야: 준비는 끝난 건가?

SCP-953: 준비야, 500년 전에 매듭 지었지.

호야: 할 말은 끝인가?

SCP-953: 방금 전에 다 털어냈지. 넌 마지막으로 어미에게 할 말 없나?

호야: (술잔을 기울인다.) 흠, 글쎄… 아, 이정도는 이야기 할 수 있겠군.

SCP-953: 기대하마.

호야: 그 애미에, 그 딸이네.

SCP-953: (실실 웃다가 웃음을 터뜨림)

호야: (천천히 따라 웃다가 곧 크게 웃음)

SCP-953: 하아, 재미있네.

그 말을 끝으로 호야는 SCP-953의 머리에 총을 격발한다.

SCP-953이 쓰러진다.

호야는 일어나 한참을 죽은 SCP-953을 바라보다 몸을 돌리고 격리실 외벽에 생성된 길The way을 바라본다.

그러다 다시 SCP-953의 시신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그것을 향해 실린더에 든 총알을 모두 발사한다.

몇번의 총성 이후, 짤깍이는 빈 실린더 소리가 들린다.

호야는 그제야 몸을 돌려 카메라 밖으로 사라진다.

<기록 종료>


1953-KO 연구노트 3

이하 자료는 대상의 나이 만 5세 부터 만 9세까지 작성된 그레이스 최 이사관의 개인 일지이다.

아침부터 흉흉한 소식을 클레프 박사에게 전해 들었다. 나는 아이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리고 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보다는 조금 순화하고, 핏줄을 숨기고, 하나의 이야기처럼 바꾸어 말해 주었다.

그리고 아이는 그 이야기를 듣고 무서운 감정을 숨김 없이 드러내었다. 아무래도 그녀를 마치 무서운 호랑이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아이가 방출하는 인식재해가 2.0을 넘기지 않은지 100일이 지났다.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변칙성을 너무나 잘 컨트롤 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 코피를 쏟게 한 기억과 무서운 이야기가 큰 억제제가 된 모양이다.

분석심리학부가 21K기지로 이전된 이후로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윤금선 박사와 간만에 만남을 가졌다. 아니, 이제는 윤금선 교수이다. 윤금선 교수는 아이가 스스로의 능력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결국 처음부터 막고자 한 것이 바로 변칙성을 억누르다 곪아 터지는 것이었는데, 현재는 그 주체가 외부에서 내부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것. 결국 많은 논의 끝에 아이가 변칙성을 스스로 방출할 수 있는 간단한 시설을 마련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바로, 쥐가 든 상자였다. 쥐의 정신을 조종하고 가지고 놀되, 쥐가 다치치 않을 정도의 세기로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이 놀이 과정은 곧 스스로의 변칙능력을 제어하는 좋은 훈련이 될 것이다. 즉, 이것은 변칙성에 대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동일하다.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구호에 따라 몸을 움직이고 멈추는 활동으로 우리는 신체능력을 조절하는 것을 배우는 것처럼 1953-KO는 쥐의 충동과 움직임을 통제하여 자신의 변칙능력을 조절하는 것을 배운다.


아이의 자아는 날이 갈수록 더 자세히 형성된다. 이제는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알고 다른 아이들의 모습을 따라하고자 한다. 아이는 자신의 여우귀와 꼬리를 항밈화 시켜 보이지 않게 하고, 두 눈과 두 다리, 그리고 열손가락을 가진 멀쩡한 자신의 환영을 스스로에게 덧씌운다.

아직은 정교하지 않지만, 이정도 수준의 인식재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히 큰 의미를 가진다.


이제, 아이에겐 사회성이 중요해지는 시기가 된다. 이것은 두가지를 의미한다. 첫번째로, 아이가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다른 아이와 처음으로 접촉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두번째로, 또래 아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규칙과 차례를 이해하고 그것을 얼마나 따르는지를 통해 도덕관이 얼마나 자리잡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이 두가지로 인해 각각의 문제가 생긴다. 전자의 경우, 어떻게 1953-KO를 또래 아이들과 접촉시킬 것인지가 너무나 막연하다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 계속 미뤄왔던 윤리위원회 주관의 윤리관 시험이 곧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러 모로 머리가 아프다.


결국 D계급 인사과에 사정을 했다. 인사과장은 극구 반대했지만 내가 무릎까지 꿇으며 부탁했고, 그는 마지 못해 들어주었다.

D계급 막사에서도 생명은 태어난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재단의 보육원에서 모두 함께 자라 D계급이 되거나 0등급 인원이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아나 아동이 격리에 필요한 경우 이들 중에서 격리 인원이 차출되기도 한다. 난 이렇게 차출된 일부 D계급 아동 몇몇을 빼돌려 1953KO의 격리실에 투입 예정이라는 일정을 추가했다.

4명의 아이들을 차출했고, 이들은 평균적인 D계급 아동들보다 낮은, 그리고 민간 사회의 아동들과 유사한 정도의 폭력성 수치를 보였다. 하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현재 아이들을 투입하고 상황을 지켜보는 사회성 실험이 예정되어 있다.


드디어 때가 왔다. 격리실에 미리 차출한 3명의 D계급 아동을 투입하고, 이들을 돌볼 재단의 보육자도 한명 투입했다. 실험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1953-KO는 아이들과 만나기 전 인식재해로 자신의 귀와 꼬리를 감추고 두개의 눈과 열손가락, 두 다리의 환영을 만들어 냈다. 아이들에겐 1953-KO가 변칙개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고, 보육자에게만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유치원의 일과처럼 아이들은 보육자의 지시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할 예정이다. 그리고 옆에서 나와 연구 팀원들은 그 활동을 녹화하는 카메라를 통해 사회성의 형성 과정을 지켜볼 예정이다.

첫 실험. 1953-KO는 자신 이외의 또래 아이들에 대해 크게 낮가림을 보였다. 아이들의 활동에 전혀 끼려고 하지 않았고, 엄마를 찾곤 했다. 그 과정에서 인식재해 수치가 1.2까지 올랐다. 아동 중 예민한 아이가 두통을 호소했고, 1953-KO의 꼬리가 잠시 노출되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는 못했다.

보육자는 1953-KO를 같이 활동에 참여시키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퍼즐 맞추기, 블록 쌓기, 몸으로 말해요, 술래잡기 모두 참여를 완강히 거부했다.


다음 실험에서 보육자에게 산책을 제안했다. 1953-KO는 다행히도 산책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번 산책은 01K기지의 부지 바깥까지 나갔고, 아이는 평소가 가보지 못한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에 크게 흥분했다. 넓은 공터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은 이전 시간에 배웠던 술래잡기를 시작했고, 1953-KO는 이때 술래잡기에 원활히 참여할 수 있었다.

1953-KO가 술래에게 쫒길 때 술래가 된 아이가 갑자기 우두커니 서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 아이는 잠시 혼란스러워 하고는 다시 술래잡기를 시작했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1953-KO는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지 고민이다. 인간에게 변칙성을 사용하지 말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정정당당하게 놀이를 즐기지 않고 능력을 사용한 것을 타일러야 할까?


결국 정정당당하게 놀이를 즐겨야 한다고 타일렀다. 스스로의 변칙성은 결국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고, 또, 흉기도 될 수 있다. 변칙성을 무작정 억누르는 것보다 앞서 아이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 수업도 산책을 이어서 하기로 했다. 아이가 친구들과 더 긴밀한 사이가 되면 다시 격리실로 돌아와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보육자에겐 사정을 말해 두었다. 놀이가 진행되고 1953-KO는 아이들과 잘 어울리기 시작했다. 술래잡기에서 불리해도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잠시 보육자와 연구팀과 회의를 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간식시간이 주어졌다. 회의가 진행되던 도중, 아이의 큰 울움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회의를 잠시 멈추어야 했다. 밖에 나가보니, SCP-1953-KO가 뺨에 멍이 든 채로 울고 있었다. 나는 1953-KO를 안고 달래주며 사회성 실험을 종료 시켰다.

이후 격리실에 돌아와 녹화된 영상을 보았을 때야 그 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회의를 하러 들어간 사이에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간식을 뺏어 먹다가 서로 싸움이 붙었다. 간식을 뺏어 먹은 아이는 덩치가 크고 힘도 세서 다른 아이들이 쉽게 대들지 못한다. 하지만 뺏긴 아이는 할말은 확실하게 하는 성격이라 또 서로 싸움이 붙은 것이다. 말싸움은 순식간에 주먹다짐으로 변했고, 1953-KO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켜보았지만 결국 싸움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 아이가 1953-KO에게 주먹을 날리는 그때 아주 잠깐 인식재해수치가 3.0까지 올랐고, 아이의 눈이 붉게 반짝였지만, 그대로 눈을 감고 주먹에 맞았다. 그리고 목청껏 울기 시작했다.

그때 자신을 지키는 것보다 변칙성을 억누르는 것을 우선시 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이가 내 말을 절대시 하였기에 그런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 하게 된 것인가. 너무나 많은 생각이 들어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아이를 키우는게 이렇게 힘든 일인가 보다.


사회성 실험은 막바지에 다다랐다. 1953-KO는 싸운 아이와 꽤나 잘 화해를 했고, 놀이에도 훨씬 잘 참여한다. 차례를 기다리는 것을 의젓이 해내고, 서로가 만든 규칙을 잘 따른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치 정상사회와 초상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아이들 사이에 요호가 끼어 있고, 인간 아이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1953-KO는 아침마다 자신의 꼬리와 귀가 남에게 들키지 않게끔 심혈을 기울이고, 또, 조심스럽게 놀이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것을 보다 문득, 처음부터 아이들에게 1953-KO의 본래의 모습을 소개시켜주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변칙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들이 함께 자라고 서로 놀이를 할 수 있다면, 그런 사회가 온다면, 그 둘이 화합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아마 그때가 SCP 재단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세계일 것이다.


치이카 박사는 이 실험에서 충분히 많은 데이터를 얻었다고 판단하고 실험을 종료하기로 했다. 윤금선 교수 또한 동의했지만, 보육자는 조금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이유를 물으니, 투입된 아이들 중 하나가 이 실험이 끝나면 개체 격리절차에 동원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나에게 와서 사정을 했다. 이 실험을 조금 더 지속시켜 달라고. 나는 고민에 빠졌지만, 결국 거절했다. 영원히 실험을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난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흥분해서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리쳤다. 01K기지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상부 또한 내가 1953-KO에게 감정적으로 헌신하고 있다는 걸 안다고. 그레이스 최 이사관은 자신이 격리하는 SCP를 자신의 딸로 여기며 이름까지 지어주었다고.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 윤금선 교수와 치이카 박사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종단 연구는 핑계에 불과했다. 어차피 언젠간 밝혀질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1953-KO는 지역사령부 관리이사관의 딸이라서 이렇게 보호받을 수 있고, D계급 아동들은 D계급이라서 괴물에게 던져지거나, 어른들이 못하는 일에 투입되고, 필요에 따라 처분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재단이기에 어쩌겠나. 이 말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간편한 합리화의 방법일 테다. 그리고 난 이렇게 합리화 하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난 연거푸 그에게 미안하다고 밖에 말을 할 수 없었다.


때가 왔다. 너무나 오랜 기간동안 미뤄왔던 과업을 이제는 시행해야 한다.

첫번째로, 윤리위원회에서 공문이 왔다. 이제 아이의 도덕관이 충분히 검사가 가능할 정도로 형성되었고, 이것이 SCP-953에서 볼 수 있는 야만성이 내재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도덕관이 SCP 재단의 정신과 맞닿아있는지를 확인하러 올 것이다.

두번째로, 당초에 약속한 대로, 그리고 지역사령부 내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서, SCP-1953-KO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게 해야 한다. 이제 아이는 충분히 논리적인 사고도 갖추어졌고, 이해관계, 그리고 나와 자신의 사정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과연 잘 받아들여 줄지 걱정이다. 일단 이것은 급선무인 윤리위원회와의 면담이 지난 뒤에 진행할 예정이다. 섣불리 진행했다가 아이가 불안정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윤리위원회 면담기록

이하 기록은 SCP-1953-KO에게 진행된 윤리관 시험 목적의 면담 기록이다.

시험관: 윤리위원회 키아라 샤말란 위원

참관인: 변칙존재협력학부 치이카 박사, 분석심리학부 윤금선 교수, 제01K기지 그레이스 '노래마인' 최 이사관

대상: SCP-1953-KO (9세)


<기록 시작>

시험관: SCP-1953-KO?

대상: 네? 안녕하세요?

시험관: 그래 안녕.

대상: 아줌마는 누구에요?

시험관: 아줌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야. 재미있겠지?

대상: 그림책 읽어주는거에요?

시험관: 그래. 아줌마가 이야기를 들려줄테니, 너는 네 생각을 이야기 해주면 돼.

대상: 네!

시험관: (목을 가다듬는다.)


1. 규칙에 대한 존중 확인

제임스는 길을 가다가 인형들이 담긴 바구니를 발견했다. 제임스는 인형을 좋아하기에 바구니를 집어들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딜런이 나타나 제임스에게 그 바구니를 돌려달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바구니에는 딜런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인형을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제임스는 바구니를 돌려주지 않고 도망갔다.

시험관: 어때? 누가 잘못했을까?

대상: 음… 제임스가 잘못했어요.

시험관: 왜 그럴까?

대상: 이름이 쓰여 있었잖아요. 그럼 그건 딜런 꺼에요.

시험관: 그럼 왜 딜런 거를 제임스가 가져가면 안되지?

대상: 제 껄 다른 사람이 뺏어가면 슬프잖아요. 제가 딜런이었다면 슬플 거 같아요.

시험관: 그럼, 딜런보다도 제임스가 더 인형을 좋아하면?

대상: 그럼 가져가도 돼요.

시험관: 왜?

대상: 왜냐면, 제가 인형이었다면, 딜런과 같이 있는 거 보다 제임스랑 같이 있는게 더 기분 좋을 거 같아요.

시험관: 음, 그렇구나.

그레이스 최 이사관: 재미있는 답변이네요.

윤금선 교수: 물활론적 사고로군요. 아이들은 모든 것에 인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시험관: 그럼 제임스가 인형들을 가져가서 딜런이 슬퍼하는 건 어떡해?

대상: 음… 그래도 인형들이 기쁜게 더 좋아요.

시험관: 인형들이 기분이 좋다면 딜런 거를 뺏어도 돼?

대상: 네.

시험관: 이름이 쓰여 있는거도? 소중한 것도?

대상: 으음… (혼란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림) 네. 엄청 기쁘다면요.

치이카 박사: 또래의 일반적인 답변은 아닙니다. 벌써 공리주의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이해했다는 게 아니라면, 상호간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죠.

그레이스 최 이사관: 1953-KO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요. 아무래도 그것과 물활론적 사고 때문에 의인화된 인형도 등장인물로써 작용하고 있고, 그렇게 각자의 '기분'에 집중하는 것일수도 있어요.

시험관: 음, 그렇구나. 그럼, 다음 이야기를 들려줄게.


2. 자율적 도덕성 확인

존은 밥을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말을 들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런데 문 앞에는 15개의 유리컵이 있었고, 모든 컵이 쓰러져 깨져 버렸다.

헨리는 찻잔 위에 있는 잼을 발견했다. 잼을 먹기 위해 헨리는 탁자 위에 올라갔는데, 그러다 거기에 있던 유리컵 하나가 떨어져 깨져 버렸다.

시험관: 자, 존과 헨리 둘중 누가 더 나쁠까?

대상: 음… (오래 고민한다.)

윤금선 교수: 전까지는 정해진 규칙에 따르는 '타율적 도덕성'에 대해 알아보는 질문이었다면 이번엔 규칙보다 우선시 되는 어떤 의도에 따르는 '자율적 도덕성'을 알아보는 질문입니다. 또래의 아이들은 대개 아직 자율적 도덕성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과에만 집중하죠.

대상: 존이 더 나쁜거 같아요.

시험관: 왜지?

대상: 컵을 엄청 많이 깨뜨렸잖아요.

치이카 박사: 대상은 아직 자율적 도덕성이 형성되기 전이군요.

시험관: 그럼 이런 경우는 어떨까?

존은 길을 가다가 헨리의 집에 불이 나고 있는 걸 발견했다. 헨리가 그곳에서 나오기 위해선 문을 열어야 하는데, 헨리가 아끼는 그릇이 바로 그 문 앞에 있어서 문을 열면 그 그릇이 깨지고 만다.

대상: 음… 그래도 전 문을 열래요.

시험관: 왜? 다른 사람이 아끼는 물건을 망가뜨리면 안되잖아?

대상: 그래도 구하고 싶어요. 안그러면 존도 슬퍼하고 헨리도 슬퍼해요.

치이카 박사: 흥미로운 답변이군요.

그레이스 최 이사관: 앞선 가치관에서 행복을 위해 규칙을 어길 수 있다고 답한 부분과 합치하군요.

윤금선 교수: 행복을 위해서일수도, 혹은 그저 '좋은 기분'을 위해서 일수도 있죠.

치이카 박사: 자, 그럼 피아제 도덕발달단계 테스트는 모두 끝난거죠?

윤금선 교수: 네, 그런것 같네요. SCP-1953-KO는 또래 아이들보다 더 빠르거나, 혹은 조금 더딘 도덕발달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규칙을 절대시하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서 유동적이고 임의적으로 규칙을…

시험관: 아직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그레이스 최 이사관: 네?

치이카 박사: 콜버그 모델을 사용하는 건가요? 어차피 이정도 파악했으면 그 모델에서도 결과는 비슷할 텐데요.

시험관: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3. 트롤리 딜레마

열차가 선로의 갈림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직선 도로에는 5명이 묶여있고, 다른 갈림길에는 1명이 묶여있다. 당신은 갈림길에 있는 래버 앞에 있다. 래버를 그대로 두면 5명이 죽는다. 래버를 당기면 1명이 죽는다.

시험관: 넌 어떻게 할거니? 래버를 당길거니?

대상: 어…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열차를…

시험관: 열차를 멈출순 없어. 묶여있는 사람들도 풀어 줄 수 없어. 오로지 네가 선택해야 하고, 그 결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어.

윤금선 교수: 이건 누가 추가한 질문이죠?

시험관: 윤리위원회 표준 절차입니다.

치이카 박사: 이제 겨우 인습적 수준의 도덕 가치관이 형성된 아이에겐 이 질문은 너무 어렵습니다. 아이의 대답이 잘못된 해석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다분합니다.

대상: 으으…음…

시험관: 고민중이니?

대상: 당… 당길 것… 같아요…

(침묵)

시험관: 왜지?

대상: 그래야 더 많이 살 수 있으니까요.

윤금선 교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공리주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아이는 공리주의를 이해하고 있어요. 이건 피아제 도덕발달 3단계에 들어선 아이들도 겨우 이해하는 개념입니다.

그레이스 최 이사관: 재단의 강령과도 합치하군요.

시험관: 어디까지 그 강령을 지킬 수 있는지가 중요하죠. 자, 1953-KO? 더 대답할 수 있겠니?

대상: 네.

일자로 된 선로위에 다리가 하나 있다. 선로에는 5명의 사람이 묶여있고, 열차가 지나는 다리 위에는 지미가 있다. 당신은 지미를 다리에서 밀어서 선로에 떨어뜨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지미는 열차 바퀴에 끼어 죽고, 열차는 멈추게 된다.

대상: 전… 전…

그레이스 최 이사관: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질문이에요.

윤금선 교수: 성인에게도 어려운 질문이죠. 대개의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 밀지 않는다를 선택해요.

치이카 박사: 하지만 저희 재단은 인류를 위해 기꺼이 악인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 곳이죠. 그대가 양지에서 살 수 있도록…

그레이스 최 이사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작은 목소리로) 우리는 음지에서 죽으리라…

시험관: 1953-KO?

대상: (울먹이며) 그게… 전…

시험관: 넌 다섯명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한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니?

대상: 그… 그러니까… (눈물을 흘린다)

윤금선 교수: 이쯤 하시죠.

시험관: (무시하고) 어떻게 하겠니? 1953-KO?

치이카 박사: 이게 그렇게 중요한 질문인가요? 그 어떤 심리학적 정합성도 없는 의미 없는 질문이에요. 아까 못들었나요? 아이가 무슨 대답을 하던 그건 우리에게 오독의 여지가 다분하다고요.

시험관: 재단에겐 중요한 질문입니다. 아주 중요한 질문이죠.

치이카 박사: 하, 이제 알겠군요. 이 종단 연구 프로젝트를 해체하고자 하시는 거에요. 1953-KO가 어떤 대답을 하던 말이에요. 밀어버린다고 하면 1953-KO도 953의 야만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보고할 것이고, 밀지 않는다고 하면 재단의 정신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고할 것이군요. 그렇죠?

그레이스 최 이사관: (한숨) 됐어, 1953-KO. 이제 나와도 돼.

시험관: (1953-KO에게) 아니, 잠깐, 내 질문에 대답은 해야지!

윤금선 교수: (탁자를 내려친다) 그만 하시라고요!

대상: (소리친다) 제가 대신 뛰어 내릴게요!

시험관: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치이카 박사: 이건…

그레이스 최 이사관이 면담실로 들어와 울고 있는 1953-KO를 들쳐맨다.
잠시 뒤를 돌아 시험관을 쳐다본다.

시험관은 여전히 얼어붙은 채로 그레이스를 바라본다.

그레이스 이사관이 면담실을 나간다.

<기록 종료>


사건기록: 제01K기지 관리이사관 사무실

개요: 그레이스 최 이사관의 사무실에 요주의 단체 '능구렁이 손' 인원이 등장함. 이들은 그녀에게 몇가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급하게 찾아왔음을 알림.


<기록 시작>

그레이스 최 이사관이 사무실에서 업무를 진행중에 있다.

갑작스레 바닥이 진동하고 전등이 깜박인다.

[신원 불명]: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죄송합니다만,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습니까?

그레이스 최 이사관: (두리번거리며) … 네? 무슨 일이죠?

한쪽 구석에서 한 남성이 한 손에 책을 든 채 서 있다.

강나루: (고개 숙여 인사한다.) 능구렁이 손의 맹원, 강나루 입니다. 급히 전할 말이 있어 이렇게 실례 무릅쓰고 길을 열었습니다. 휘영아?

나루의 뒤에서 금발의 여자아이가 나타나 인사한다.

휘영: (고개를 숙인다.) 따님과 관련한 일입니다.

그레이스 최 이사관: 클… SCP-1953-KO 말인가요? 당신들이 어떻게…

강나루: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따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휘영: 따님을 향한 이사관님의 헌신도 모두 지켜 보았고요.

그레이스 최 이사관: 그래서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죠?

강나루: 능구렁이 손의 주석, 호야에 관한 겁니다. 조금 지난 일이지만, 그와 어머니 간에 있었던 일을 아마 전해 들으셨을 겁니다.

휘영: 호야… 호야언니는 왜 인지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극한에 밀어 넣고 있어요.

강나루: 강박과 집착도 심해졌고…

휘영: 자기혐오와 자기파괴적인 모습도 눈에 띄게 강해졌어요.

그레이스 최 이사관: 그게 SCP-1953-KO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거죠? 그 아이와 능구렁이 손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핏줄 하나만을 제외한다면요.

휘영: 그 핏줄. 그게 문제입니다.

강나루: 호야는 지금 요호를 사냥중에 있어요. 최근엔 청대장에게 넘긴 이자메아의 인공 요호 마저도 죽였어요. 지금 그것 때문에 청대장의 손과의 관계가 무지 나빠졌죠.

휘영: 이제는 저희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괴물이 되어버렸어요… 호야는 언젠간 그 과업을 마치기 위해 이곳으로 올 겁니다.

강나루: 다행인건, 아직까지 호야는 당신의 딸의 존재를 모르고 있어요. 제가 최대한 정보를 없애고 있거든요. 하지만, 자신의 죽은줄 알았던 동생이 살아남아서 재단의 손길 아래에서 자라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레이스 최 이사관: 전… 전,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왜죠? 왜 동족을 죽이려고 하는 거죠?

휘영: 저희도 자세힌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호야언니는 자기 종족에 대한 혐오를 줄곧 나타내곤 했어요.

강나루: 그리고 그게 현재의 감정 상태와 맞물려서 이제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혐오하는 것을 넘어 그와 관련한 것을 모두 죽이고자 합니다.

그레이스 최 이사관: 그렇다면…

강나루: 네, 아무래도 호야는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목숨을 끊을 생각인 거 같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강나루: (깊은 한숨) 일단 알아 두고만 계십쇼. 제가 딸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숨기고 있고, 일단은 재단의 격리 중에 있으니 보안도 상당할 테니까요. 다만 그래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군요.

강나루는 그레이스에게 조약돌을 깎아 만든 작은 동그란 부적을 건넨다.

부적에는 달의 바다가 음각되어 있다.

그레이스 최 이사관: 이건…

휘영: 제가 만든 거에요. 항상 이 부적을 지니고 계세요. 필요한 때에, 착용자를 지켜줄 거에요.

강나루: 만일 호야가 딸에 대해 알게 되고, 그리고 아이를 찾으러 떠날 때에, 그때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딸과 함께 도망치십시오. 기동특무부대는… 소용 없을 겁니다.

휘영: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듯 말이죠.

그레이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부적을 받아들고 둘을 번갈아 쳐다본다.

강나루: 최대한 저희 선에서 막아보겠습니다.

휘영: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레이스 최 이사관: 잠, 잠깐…

강나루: 무슨 일인가요?

그레이스 최 이사관: 한가지…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나루씨?

강나루가 다가간다.
그레이스가 그에게 귓속말을 한다.
강나루는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강나루: … 알겠습니다. 최대한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그레이스 최 이사관: 감사합니다.

휘영: 그럼… (고개를 숙인다.)

둘은 인사를 한 뒤에 천천히 화면 밖으로 향한다.
그레이스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바라만 본다.
휘영이 잠시 뒤를 돌아 그레이스를 바라본다.

휘영: (살며시 미소지으며) 가정에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휘영이 고개를 돌려 길 안으로 들어가고, 길이 닫힌다.
그레이스가 힘 없이 부적을 땅에 떨어뜨린다.

<기록 종료>


1953-KO 연구노트 4

이하 자료는 대상의 나이 만 9세 부터 만 12세까지 작성된 그레이스 최 이사관의 개인 일지이다.

가정.

어머니가 최초의 타인이듯, 가정은 최초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와 딸의 세계를 인정해 주었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곧 막을 내릴 것이지만 말이다.


난 1953-KO에게 미뤄왔던 약속을 시행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나는 그의 어머니가 아니다. 나는 아이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널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네가 어떻게 자라났는지, 그리고 너의 부모와 누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너를 발견하기 전에 내가 떠나보낸 딸에 대한 이야기까지.

아이는 너무나 고맙게도, 그리고 너무 어른스럽게도 그 모든 이야기를 묵묵히 경청했고, 덤덤히 받아들였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엄마라고 불러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이를 안아주고 마지막 모녀간의 포옹을 만끽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실험자와 실험체이다. 그레이스 박사님과 일련번호 SCP-1953-KO이다.


종단 연구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연구는 최종 결론만을 앞두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SCP-1953-KO의 격리절차는 조금 더 'SCP'다워 졌다.

다행히도, SCP-1953-KO는 이제 스스로도 이것저것 알아서 잘 해내고 있었고, 표준 인간형 격리절차에도 잘 적응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아직 적응을 하지 못한 것 같다.
앞으로 나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여전히 걱정도 되고, 이루지 못한것도 너무나 많은 것 같아 후회되기도 하고, 또, 원망스럽기도 하다.

매일 밤마다 SCP-1953-KO가 훌륭히 자라 수능도 보고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애인을 만나 결혼하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만, 잠에서 깬 나는 공허한 눈물을 흘린다.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지.


변칙 개체 종단 연구 계획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신체, 정신, 자아, 운동능력, 감정, 사고력, 윤리 관념.

모든 부분에서 인간과 동일함.

가장 눈여겨 보고자 했던 변칙성의 발달 역시 비변칙적인 인간의 재능 발달과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한 개체, 아니 한 아이를 키우며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게 어떤 일인지, 아이가 자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윗 세대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를 말이다.


긴 시간동안 이어진 종단 연구 계획의 끝을 기념하여 프로젝트에 참여한 많은 인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윤금선 교수, 치이카 박사, 뇌수종 교수, 그리고 킬리 이사관까지… 우리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례가 없는 기간동안 이어진 프로젝트였기에 모두들 프로젝트의 시작에 비해 호칭도 한층 거창해졌고, 얼굴엔 주름이 패였다. 하지만 여전히 윤금선 교수는 인자했고, 치이카 박사는 사람에겐 무뚝뚝했으며, 뇌수종 교수는 노련했다.

한참을 옛추억에 젖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클레프 박사였다. 그도 이 종단 연구 프로젝트의 끝을 기념하기 위해, 그리고 나와 단 둘이 직접 면대면으로 이야기 하고픈 것이 있기에 찾아왔다고 말했다.


면담기록: 그레이스 최 이사관과 클레프 박사

<기록 시작>

클레프 박사: 정말 오랜만이군요.

클레프 박사가 찻잔을 들며 인사한다.

가슴팍에 맨 우쿨렐레가 흘러내리자 그는 끈을 조여맨다.

그레이스: 하하, 거의 십년만인거 같네요.

그레이스 또한 찻잔을 든다.

클레프 박사: 얼굴을 마주보는 건 더욱 오래 되었고요. 그땐 당신이 이사관이 되기 전이었으니까요.

그레이스: 맙소사, 너무 오래전 이야기 같네요. 백년은 지난 이야기 같아요. 지난 십년간 너무 바쁘게 살아온 탓일겁니다.

클레프 박사: 하하, 육아라는게 언제나 그렇죠.

그레이스: … 그렇죠.

클레프 박사: (호탕하게 웃음) 당신을 나무라는게 아닙니다. 아니, 사실은 프로젝트 초기엔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경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레이스: 전… 전 그저… (고개를 숙임)

클레프 박사: 아이는 잘 지내고 있나요? 격리절차는 안힘들어 하고요?

그레이스: 네. 정말 다행히도요. 예전엔 한달에 한번 외출도 했었는데, 이제는 창문도 없는 곳에서 격리중에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아무런 불평하지 않고 있어요.

클레프 박사: 아이가 정말 어른스럽군요.

그레이스: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건 아닌지 걱정이 듭니다.

클레프 박사: (가볍게 웃음) 당신은 요새 어떤가요? 혹시 꿈자리가 사납지는 않은가요?

그레이스: 그게… (얼굴을 손으로 가린다) 미안해요 클레프, 전 자격이 없나 봐요. 어머니의 자격도, 한국지역사령부 관리이사관의 자격도요…

클레프 박사: 머릿 속에서 생각이 끊이지 않나 보군요. 저도 이해 합니다. 저도 항상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곤 해요.

그레이스: (고개를 숙인 채 찻잔을 바라본다.)

클레프 박사: 아이가 과연 그 힘겨운 격리절차를 이겨낼 수 있을 지, 그리고 그 아래에서 정말 올바르게 자라줄 수 있는지, 그리고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숨을 천천히 내심.) 언젠간… 언젠간 같이 느긋하게 해변의 의자에 앉아 바다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도요.

그레이스: 953을 죽인 요주의 인물이 1953-KO도 노리고 있다고 해요. 안으로도, 밖으로도 아이에겐 너무 가혹한 환경이에요. 아이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게 막는 장애물들이 이중으로 솟아서 양옆으로 절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에요.

클레프 박사: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레이스: (깊게 한숨을 쉰다.) 전, 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약간의 침묵이 흐른다.

클레프 박사: 뭐, 별거 있겠습니까?

클레프는 가슴 켠에 메고 있던 우쿨렐레를 가볍게 튕긴다.

클레프 박사: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기록 종료>


녹화 기록: 능구렁이 손의 메세지

한밤중에 그레이스 최 이사관의 개인 단말기에 신원 불상의 발송자가 이하 영상 기록을 전송했다. RAISA 인원이 발송자를 추적하고자 시도하였지만, 발송자가 인공지능응용학부에 등록되지 않은 .aic의 일종이라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기록 시작>

방 안의 테이블 앞에 호야가 가만히 앉아있다.

오랜 시간동안 미동도 하지 않는다.

강나루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호야: (폴라로이드 사진을 강나루에게 던진다.) 자, 설명해 보시지.

강나루: 뭘?

호야: 이거 안보여? 너, 여기 알지? 가본적 있지?

강나루: 여기가 어딘데.

호야: (날카롭게 웃음) 난 500년 묵은 여우야. 누굴 상대로 거짓말을 치려고 하는건지 알기나 해?

강나루: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데.

호야: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침) 거짓말 말고 제대로 대답해. 왜 이 동굴에 봉인이 있는 거지?

강나루: 봉인을 풀었군. 그 봉인은 풀릴 때에만 알아챌 수 있는 거니까.

호야: 풀리기 전에는 그 동굴이 있는지도 모르게 보이지 않지.

강나루: 그래. 내가 거기에 다시 봉인을 걸었어. 그리고 지금 드는 생각인데, 그 동굴안에 있던 그 모든 천년구미호의 흔적들을 불태우지 않은 게 후회되네.

호야가 벌떡 일어나 강나루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호야: 그래. 이제 다 이해가 되네. 왜 내가 이곳을 지금까지 못찾았는지. 넌 나에게서 무언가를 숨기고 싶었던거야.

강나루: (코피를 닦는다.) 아니, 그냥 네가 너무 과거에 집착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하면 정신을 차릴까 싶었어.

호야: 계속 시치미 떼시겠다? 내가 찾은 걸 보면 더는 시치미 떼질 못할 걸?

휘영: (방 안으로 달려오며) 아까, 무슨 소리가…

호야: 나가.

강나루가 휘영에게 눈짓을 한다.

휘영이 주저하며 어쩔 줄 몰라한다.

호야: 못들었어?

강나루: 휘영. (휘영을 바라본다.)

휘영이 나루에게 눈을 맞춘 채로 방을 나간다.

강나루: 호야, 제발. 진정해.

호야: 이게 지금 진정할 일로 보여? 그래. 자, 넌 이게 뭘로 보여?

호야가 보자기에서 작은 유골더미를 꺼낸다.

강나루: (눈살을 찌푸리며) 유골이네. 신생아의.

호야: 하나 짜리지. 자, 그럼 수학을 좀 해볼까? 내가 찾은 그 고문서, 전우치전에서 천년구미호가 낳은 자식은 몇마리지?

강나루: 셋이지.

호야: 하나는 이거고(유골을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여기 있고(자신을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강나루:

호야는 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낸다.

호야: 위스키 어디다 뒀어.

강나루: 씨발 그만하라고!

호야가 멈춰선다.

호야: 네가 욕하는건 처음 듣는데.

강나루: 존나 지긋지긋해 죽겠어. 한 분파의 주석이라는 새끼가 맹원들하고 대화도 한번 안하고 변칙개체들을 족치러 다니는 데 우리라고 빡이 안치겠어?

호야: 이건…

강나루: 변명해봐.

호야: (우두커니 선다.) 이건 대의를 위한 일이야. 이건 내 과업이야.

강나루: 씨이발 니가 무슨 옥리야? 대의를 위한다는게 니 입에서 나올 소리야? 정신 차려 새끼야 넌 뱀의 손의 주석이야.

호야: 난 내 피에 새겨진 저주를 풀어야 해. 저주를 풀기 위해 싸워야 해.

강나루: 모든 요호를 죽인 다음엔 네가 마지막으로 남은 요호가 될 텐데?

호야: 그때를 위한 준비도 마쳐 뒀지. 난 생각보다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강나루: 그 잘난 이성으로 본인 행동부터 돌아 보셔. 대의를 위해서 죄 없는 이들을 죽이고 다니는 게 분서꾼이나 옥리랑 다를 게 뭐야?

호야: 그렇게 태어난게 죄지.

강나루: 넌 너무 많이 변해버렸어. 우리에겐 우리의 신념이 있잖아. 넌 우리가 왜 능구렁이 손인건지, 왜 네가 능구렁이 손의 주석인지 잊어버린 거야?

호야: (강나루를 똑바로 쳐다보며 재킷에 박힌 패치를 뜯어낸다) 이제 아니니까 상관 없지?

강나루: 그럼 이제 넌 뱀의 손의 사상을 위협하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어. 이제 만족해?

호야: 어. 매우 만족해. 너무나도 만족스러워. 싸울 상대가 늘어났으니까.

강나루: 이제 남은 건…

호야: 투쟁 뿐이지.

호야가 뒤를 돌아 강나루에게 발차기를 날린다.
강나루는 충격으로 뒤로 넘어진다.

그가 끙끙거리며 일어난다.
호야는 곧바로 손을 뻗어 강나루의 가슴팍을 손톱으로 찌른다.

강나루: (이를 깨물며) 결국 이렇게 되었군.

강나루의 가슴팍과 입에서 피가 새어나온다.

호야: 부적은 어따 두고 다니나?

호야가 강나루를 거칠게 바닥에 내던진다.
강나루가 바닥에 구르며 신음한다.

휘영: (비명을 지르며 방 안으로 들어온다.) 세상에… 이게… 이게 어떻게…

강나루: (호야를 바라본다.) 니가 저지른 일을 봐. 병신아.

호야: … 허.

호야는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휘영을 밀치고 방에서 나간다.
문 밖의 모리안이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호야를 바라본다.

휘영: 일단 지혈을…

강나루: (기침하며 피를 토함) 모리안, 넌 안막을 거야? 호야가 스스로를 파괴하러 지옥불로 들어가는 걸?

모리안: (강나루를 쳐다 보고는 다시 호야를 쳐다본다.) 쟤가 선택한 일이라면.

강나루: 싸이코패스 새끼…

모리안은 자리를 뜬다.

휘영: 진정하세요. 피가 멎어야 해요…

강나루: 그보다도… 브라단? 언제부터 녹화가 진행되었지?

브라단.aic: 지시대로 유의미한 맥락이 시작된 때부터 모두 녹화 완료하였습니다.

강나루: 그레이스에게 보내줘. 곧, 호야가 찾아간다고.

브라단.aic: 알겠습니다.

휘영: 일단 안정부터 취해야 해요.

강나루: 하아… 그 아이가 무사하기를 바랄 수밖에…

휘영: 언니의 피를 가지고 있으니, 아마 잘 싸워줄 거에요.

강나루: 싸운다라… 그래 싸우겠지…

<기록 종료>


사건기록

2022년 1월 12일 제01K기지 정문에 요주의 인물이 출현함. 이에 대응하여 기동특무부대가 투입됨. 이하 내용은 당시의 기록이다.

[CCTV-01-12: 정문 기록]

함박눈이 01K기지를 뒤덮는다.

파란 재킷에 빵 모자를 눌러쓴 형체가 01K기지 내부의 공터를 천천히 걷는다.

보안요원: (멀리서) 어이! 여기 군사시설 입니다! 잠깐… 비상! 기지내 요주의 인물 출현!

호야는 우두커니 선다.

호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보안요원: 내 알바 아니지. 손을 들고 무기를 버려라.

호야: 내가 조사한 게 맞다면… 이름은 SCP-1953-KO. 이 기지의 관리이사관이 극진히 여기는 아이. 여기 지하에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

보안요원: 투항하지 않으면 쏘겠다.

호야는 깊게 숨을 들이쉰다.

호야: 공기가 차군. 간만에 느끼는 추위야.

호야를 둘러싸고 기동특무부대원이 총을 겨눈다.

호야: 이런 날은 피냄새가 별로 안나지.

호야의 눈이 붉게 빛난다.
보안요원과 분대원이 동시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패닉한다.

보안요원: 씨발! 저게 뭐야!!!

알파 분대원: 발포하라! 발포하라!

군인들은 서로를 향해 총격을 벌인다.

호야: 귀찮아 죽겠네.

총성과 비명 소리를 뒤로한 채 호야는 건물 내부로 들어간다.


[CCTV-03-01: 본관 기록]

건물 내부는 희미한 전등 때문에 어두컴컴하다.

연구원: 꼼… 꼼짝마!

호야는 권총을 들어 그의 머리를 쏜다.

호야: 보안인가 2등급? 겨우?

키카드를 챙기고 계단통으로 향한다.


[CCTV-03-11: 1F 층계참 기록]

호야가 목을 한쪽으로 꺾는다.
뚜둑이는 소리가 들리고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의 모습으로 변화한다.

호야: 의사도 아닌 것들이 흰가운은 왜 입어.

선임연구원: 어이, 거기! 1층으로 올라가지 마! 밖에 적대적 변칙개체가 침입했다고 경보가 울린 참이야!

호야: (목에 걸려있는 키카드를 바라본다.) 보안인가 4등급?

선임연구원: 어?

가슴팍을 손으로 찌른다. 피가 가운 아래로 흐른다.

호야: 이쯤은 돼야 돌아다닐 맛이 나지.


[CCTV-03-24: B1 로비 기록]

오른손에 피가 묻은 선임연구원이 층계참에서 나온다.

지하는 수많은 인원들이 뒤섞여 혼란에 빠져 있다.

보안요원: 모두들 빨리 대피하십쇼!

보안요원이 인원을 통솔하며 작은 모니터가 딸린 장비를 확인하고 있다.

호야는 벙커로 향하는 인파에서 조금 벗어난다.
격리구역으로 항하다 보안요원 두명과 마주친다.

보안요원1: 잠깐, 정지.

호야: (작은 목소리로) 아이씨…

보안요원2: 우선, 벙커로 대피하라는 명령을 못들었나?

호야: 들었습니다만 중요한 업무가 있어서 나왔습니다.

보안요원1: 이쪽은 격리구역인데, 볼일이 있나?

호야: 1953-KO 관련한 건입니다. SCP-1953-KO의 격리실은 어디입니까.

보안요원1: 어이, 우선 인식재해부터 검사해봐.

보안요원2: 네.

보안요원이 작은 모니터가 달린 장비를 꺼낸다.

호야: … SCP-1953-KO의 격리실은 어디입니까.

보안요원1: (침묵)

보안요원2: (모니터를 확인하고) 엇, 잠깐… (잠시 비틀거린다.) 수치는… 정상… 입니다.

보안요원1: 휴우. 다행입니다. SCP-1953-KO의 격리실은 지하 3층 제 3복도의 끝에 있습니다.

호야: 고마워.

호야가 앞에 있던 보안요원의 배를 힘껏 찬다.

보안요원1: 아악!

보안요원의 몸이 거칠게 뒤로 밀려난다.

보안요원2: 수치는… 정상… 정상…

호야는 아직 비틀거리는 다른 보안요원을 잡아끌어 그에게 밀친다.
두 요원이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낸다.

보안요원1: 이 새끼… (무전기에 손을 뻗는다)

호야가 총을 격발한다.
총알은 두 요원의 배를 한번에 관통한다.

호야: 총알 한발은 아낄 수 있었네.

두 요원이 어두운 복도 한가운데에 천천히 주저 앉는다.


[CCTV-03-35: B3 복도 기록]

호야: 보안인가 4등급. 보안인가 4등급.

복도의 한쪽 끝에서 천천히 사람의 형체가 다가온다.

호야: SCP-1953-KO. SCP-1953-KO.

뚜벅이는 장화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호야: 자기 이름은 있을까? 재단의 격리실 안에서 얼마나 평온하고 의미없는 삶을 살아왔을까?

호야가 리볼버의 실린더를 돌린다. 짤깍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호야: 한번도 부딪혀 본 적 없는 온실 속에서 자라온 놈이 산다는 게 얼마나 힘겨운지 알까?

호야가 복도의 끝에 도착한다.
격리실의 격벽이 크게 가로막고 있다. 격벽에는 커다랗게 SCP-1953-KO, 보안인가 4등급이라 쓰여 있었고, 그 아래는 인식재해 경고문이 붙어있다.

오른편에 키카드를 인식할 수 있는 단말기가 주황빛의 불빛을 점멸한다.

호야: 그냥 들어가자 마자 쏴야 하나? 어차피 걔가 무엇을 말하든 들을 가치는 없을텐데.

주머니에 담긴 콜라병을 꺼내고 한참을 바라본다.

호야: (깊게 심호흡하고 키카드를 단말기에 댄다)

격리실의 격벽이 괴성을 지르며 굼뜨게 열린다.


[CCTV-1953-02: 1953-KO 격리실 내부]

SCP-1953-KO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맞은편에는 몇겹으로 쌓인 책과 작은 인형들이 정돈되어 있다.
외벽에는 마모가 되었을 때 갈아끼울 수 있는 의족 몇개와 안대, 그리고 말끔히 다림질을 한 옷가지들이 걸려 있다.

격리실이 진동하며 외벽이 열린다.

SCP-1953-KO: 음? 격리인원 아저씨?

피를 뒤집어 쓴 호야가 모습을 드러낸다.

호야: … 안녕.

SCP-1953-KO: 안녕… 하세요…

둘은 한참을 서로 쳐다본다.

호야: 예상보다 많이 컷구나. 올해로 몇살이지?

SCP-1953-KO: 13살이요.

호야: 내가 누구인지 아니?

SCP-1953-KO: … 네, 이야기를 들었어요.

호야: 그래? 어떻게 이야기를 해주던?

SCP-1953-KO: 제 언니라고요. 그리고 무서운 사람이라고요.

호야: 흠, 내 소개를 해줄 필요는 없을 거 같네.

호야가 천천히 격리실 안으로 들어온다. 발자국을 따라 흰 바닥에 혈흔이 남는다.
1953-KO 맞은편에 있는 다른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을 바라본다.

호야: 앉아도 될까?

SCP-1953-KO: 네.

호야: 콜라 좋아해?

SCP-1953-KO: 콜라요?

호야: 어… 달고… 톡 쏘는 음료수야.

SCP-1953-KO: 콜라가 뭔지는 알아요. 먹어본 적 있어요.

호야: 아, 그래. 그냥. 만나서 반가워서 주는 거야.

호야가 1953-KO를 빤히 바라본다.

호야: 이야기도 같이 해보고.

SCP-1953-KO: 무슨 이야기요?

호야: 그냥 이것저것.

SCP-1953-KO: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좋… 아요.

호야: (주머니에 담긴 리볼버를 만지작 거린다.) 이름은 있나?

SCP-1953-KO: 네.

호야: 뭐지? SCP-1953-KO?

SCP-1953-KO: 그렇게도 불려요.

호야: 그게 네 진짜 이름이야?

SCP-1953-KO: 진짜 이름은 따로 있어요. 제 이름은 클레멘타인이에요.

호야: 클레멘타인? 이름 진짜 특이하네.

SCP-1953-KO: 옛날 노래 이름에서 따왔다고 들었어요.

호야: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클레멘타인…

침묵

호야: 콜라 안먹을꺼야?

SCP-1953-KO이 황급히 콜라를 마시다 기침한다.

호야: 맛있어?

SCP-1953-KO: … 네. 오랜만에 먹어요.

호야: … 만약 내가 콜라를 뺏는다면 넌 어떻게 할래?

SCP-1953-KO: … 콜라 먹고 싶어요?

호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니가 원하는 걸 빼앗겼다면 뭘 할 거냐고.

SCP-1953-KO: … 정말 콜라 먹고 싶으면 드셔도 돼요.

호야: (깊은 한숨을 쉼) 이해가 안돼? 너 콜라 좋아하지?

SCP-1953-KO: … 네.

호야: 근데 내가 뺏었어. (호야가 탁자에 놓인 콜라병을 주먹으로 쳐낸다.) 자, 기분이 어때?

SCP-1953-KO가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린다.

SCP-1953-KO: … 속상해요.

호야: 그래. 그럼 뭘 해야겠어?

SCP-1953-KO: … 잘 모르겠어요… 콜라가 먹고 싶다면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호야: (벌떡 일어나며) 씨발, 난 콜라 먹고 싶은 게 아니라고! 난 그냥 니가 콜라 먹는 게 싫어. 알겠어? 그냥 콜라 먹지마!

SCP-1953-KO: … 알겠어요.

호야: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그래? 그거야? 넌 그러고 끝이야? 화 안나?

SCP-1953-KO: 네… 속상하고 화도 나요… 근데 전… 전 모르겠어요.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울먹인다.)

호야: 하하, 격리실에서 평생을 살아왔으니까. 잘난 이사관의 빽 아래서 원하는 거 다 얻어가면서 사육되었으니까 애가 이렇게 되었지.

SCP-1953-KO: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림) 그러지 마세요…

호야: 그러고 살고 싶나? 뭐하러 살아?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넌 왜 이딴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거지? 나였으면 진작에 저기 저 벽에 머리 박고 죽었을 텐데.

SCP-1953-KO: 하지 마세요…

호야: 그 애미에 그 자식이네. 어쩜 이렇게 한심하게 사는거야?

SCP-1953-KO: 우리 엄마 욕하지 마요. (이를 깨문다.)

호야: 화나?

SCP-1953-KO: 네…

호야: 그래 화나면 어떻게 해야겠어? 말해봐!

SCP-1953-KO: 하지만…

화면에 노이즈가 낀다.

호야: 그래. 그래! 그래!!! 일어나! 날 봐! 그리고 말해!

SCP-1953-KO: 우리 엄마 욕하지 마요.

호야: 더 크게!

SCP-1953-KO: 우리 엄마 욕하지 마요!!!

SCP-1953-KO의 눈이 붉게 빛난다.

노이즈가 화면을 채운다.

호야: 그래! 그거야! 자! 주먹을 들어! 나와 싸워!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친다.)

격리실의 전등이 빠른 속도로 깜빡이다 붉은 비상등이 켜진다.

기지 방송: 강력한 인식재해 검출됨. CRV 지수 20.0 돌파. 기지 내 인원들은 빠르게 대피하십시오.

전등에서 스파크가 인다.
스피커에선 의미없는 방송이 동시에 송출된다.

호야: (코에서 코피가 흐른다.) 자, 이제 알겠지? 산다는 건 싸우는 것이야.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과. 나를 좆같게 구는 모든 것과 싸워야 해. 지금 널 좆같게 하는게 뭐야?

SCP-1953-KO: … 언니에요.

호야: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SCP-1953-KO:

호야: 왜 대답을 못하는 거야? 너 멍청이야?

SCP-1953-KO: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이제 알겠어요.

갑작스레 모든 것이 정상화 된다.

호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 멍청한 새끼야!

붉은 등이 꺼지고 격리실엔 희미한 전등 하나만이 남아있다.

SCP-1953-KO: 그런데 그 대답을 하기 싫어요. 싸우지 않고 싶어요.

호야: 그럼 말해봐. 넌 이 세상에서 뭘 기대하는 거야?

SCP-1953-KO: 전 그런 거 잘 몰라요. 어딘가에 무언가 제가 기대하는 게 있겠죠.

호야: 그걸 어떻게 알지?

SCP-1953-KO: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호야: 아니, 안보이는 건 없는 거야.

그레이스: (격벽을 쾅쾅 두드린다.) 이쯤 하시지.

입구에서 그레이스가 권총을 호야에게 겨누며 걸어온다.
그레이스는 숨을 가쁘게 내쉬고 땀에 젖어있다.

SCP-1953-KO: 엄마!

그레이스: 늦어서 미안, 클레멘타인, 이쪽으로 오렴.

호야: 어딜!

호야가 1953-KO의 손을 꽉 잡는다.

호야: 뭐?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어?

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내 1953-KO에게 겨눈다.

SCP-1953-KO: 엄마…!

호야: 그 잘난 이상이 어떻게 바스러지는 지를 보여줄게.

그레이스: 안돼!

SCP-1953-KO: 꺄악!

호야가 1953-KO의 가슴팍에 총구를 대고 격발한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SCP-1953-KO이 바닥에 쓰러진다.

호야: 잠깐.

SCP-1953-KO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몸은 멀쩡하다.

호야: 이게 뭐야.

SCP-1953-KO가 자신의 목걸이를 바라본다.

목걸이에 음각된 달의 바다가 노란 빛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호야: 강나루… 강나루 이 새끼가…

격리실의 바닥에 소금물이 솟아오른다.
소금물은 천천히 격리실을 채우고 발목을 조금 채울 정도의 얕은 바다를 이룬다.

그리고 거대한 반투명한 달이 떠오른다.
달은 클레멘타인의 중심에서 떠올라 그녀를 감싸안는다.

그레이스: 걱정마 클레멘타인. 달이 널 지켜줄거야.

클레멘타인: 그렇지만…

그레이스: 엄마는 걱정마.

달이 완전히 불투명해지며 울먹이고 있는 클레멘타인의 모습을 감춘다.

그레이스: … 그리고 미안해. 클레멘타인.

달은 천천히 떠올라 어두운 격리실을 비춘다.

호야: (달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그레이스를 바라본다.) 그럼… 남은 건…

그레이스: 우리 뿐이군.

호야가 천천히 달을 등지고 걷는다.

그레이스는 총기의 안전장치를 푼다.

호야: 네가 내 상대가 될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야.

그레이스: 그거라면 나도 알고 있어.

둘은 서로를 한참을 노려본다.

그리고 호야가 그레이스에게 돌진한다.
바닷물을 밟으며 철퍽이는 소리가 난다.

그레이스가 총을 격발한다.
총알은 호야의 뺨을 스쳐지나간다.

호야가 그레이스의 권총을 손바닥을 총구에 대고 감싸 쥔다.
총이 한번 더 격발하고 호야의 손등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다.
호야가 손톱을 세우고 권총을 할퀸다.
권총의 총신이 분리되어 후두둑 떨어진다.

그레이스는 호야갸 총을 무력화하는 사이에 생긴 빈틈을 놓치지 않고 옆구리에 부적을 붙인다.
부적이 붉게 빛나며 살갖을 태운다.

호야: 크으윽, 이건 또 뭐야.

그레이스: 뇌수종 교수의 도움을 받았지.

그레이스가 부적이 붙은 쪽을 발로 차낸다.
호야가 쓰러지며 바닷물을 뒤집어 쓴다.
부적은 바닷물 속에서도 거품을 내며 타들어간다.

호야: (신음) 허, 이거 재미있네. 간만에 좀 사는 느낌이 들어.

호야가 손톱을 세우고 자신의 옆구리를 할퀸다.
부적이 찢어지며 빛이 사그라든다.

호야: 네가 한번 대신 이야기 해봐. 넌 왜 살아가는 거지?

그레이스: 난 네 눈 속의 공허함을 이전에도 본 적 있어.

호야: 헛소리 말고 대답해.

그레이스: 태어난지 몇 주도 안된 내 첫 딸아이를 떠나 보냈을 때. 나도 그런 눈을 한 적이 있었지.

호야가 절뚝거리며 일어난다.

그레이스: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주먹만한 아이를 뒷산에 묻어주는 그때 난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지. 더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었어.

호야: 그럼 왜 죽지 않았지?

그레이스: 너도 알지 않나?

호야: 하하. 죽지 못해 살아있었군.

그레이스가 주먹을 들어올린다.

호야가 뒤를 돌아 발차기를 날린다.
종아리가 그레이스의 가드를 정통으로 타격한다.
그레이스가 비틀거린다.

호야가 달려들어 주먹을 날린다.
그레이스는 가까스로 피하고 훅을 날린다.
호야의 등에 주먹이 꽂힌다.

호야가 비틀거리다 자세를 다잡고 잽싸게 다가가 그녀의 가슴팍에 손을 뻗는다.
그레이스가 손목을 잡고 저항한다.
그렇지만 이내 손톱이 살갗을 파고든다.

그레이스: 하지만 내가 그 동굴에서 클레멘타인을 발견하고,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난 깨달았어.

가슴팍에서 피가 줄줄이 새어 나온다.
그레이스가 신음한다.

그레이스: 내가 왜 더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내 이전에 있던 그 많던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 지를.

그레이스의 신음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고함으로 바뀐다.
그레이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호야의 손이 그녀의 가슴팍에서 점차 멀어진다.
호야는 그것을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곧이어 호야가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난다.

호야: 어쩔 수 없지. 훨씬 간편한 방법을 쓰는 수밖에.

호야의 눈이 붉게 빛난다.
그레이스는 비틀거리며 다가가 주먹을 내지른다.
호야의 얼굴에 주먹이 정면으로 꽂힌다.

호야: (코피를 닦아낸다.) 대단한 정신력이야.

그레이스: 한번 무너진 적 있는 성벽이 더 튼튼한 법.

호야는 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낸다.
호야가 총구를 들이밀자 그레이스가 손을 붙잡고 총구를 왼쪽으로 비튼다.
격발음. 총알은 그레이스의 왼팔을 관통한다.

그레이스: 그래서, 물었었지? 왜 살아가냐고?

그레이스 아래의 바닷물에 핏물이 풀린다.
그레이스가 순간 어지럼증에 몸을 비틀거린다.

호야: 그래. 그 대답을 듣고 싶어. 불완전한 세계에게 짓눌리면서까지 왜 살아가는 거지?

그레이스: 그야, 지키고 싶은 게 있으니까. 그리고 지키고 싶은 게 세계에 존재하는 이상, 그 세계는 불완전하더라도 가치가 있어.

호야가 천천히 그레이스에게 다가간다.
그레이스가 바닷물을 발로 차 그녀의 눈에 뿌린다.

호야: 아악!

호야가 비틀거리자 그레이스는 발로 오른손을 가격한다.
리볼버가 오른쪽으로 날아간다.
리볼버는 바다에 반쯤 잠긴 채 파문을 따라 수면 위아래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감춘다.

호야: (헉헉댄다.) 포기해. 넌 이미 피를 많이 흘렸어.

그레이스: (기침한다. 기침엔 피가 섞여있다.) 넌 뭘 위해 그렇게 싸워 온 거야?

호야: (천천히 고개를 내젓는다) … 글쎄. 몰라. 잊어버렸어.

그레이스: 넌 그 싸움에 목적을 잃었어. 넌 그저 싸우기 위해 싸워온 거야.

그레이스가 비틀거리며 호야의 오른편으로 천천히 돈다.

호야: 아니야. 아니야… 싸운다는 건… 그 자체로서 의미있어. (숨을 거칠게 들이쉼) 그리고 싸우지 않는 존재는… 가치가 없는 거야.

호야가 주먹을 날린다.
그레이스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주먹에 맞는다.

호야: 왜… 왜 안싸우는거야.

그레이스가 팔을 들어 호야의 뺨에 손을 얹는다.

호야: 그 손 치워.

그레이스: (고개를 내젓는다.)

호야: 치우라고… (팔을 들어 손을 쳐낸다.)

그레이스: 넌… 클레멘타인의 좋은 언니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호야: 좆같은 소리 그만해… 빨리. 빨리 주먹을 들어.

그레이스: (바닥을 향해 걸쭉한 침을 뱉는다.) 싫어.

호야의 표정이 어두워지다 이내 천천히 일그러진다.

호야: (이를 꽉 깨물고) 날… 날 죽이라고! 그레이스!!!

호야가 그레이스를 덮친다.
둘은 바닷물 위로 넘어진다.

호야는 무차별적으로 그레이스의 얼굴에 주먹을 꽂는다.
그럴 때 마다 바다는 첨벙이며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

일렁이는 바닷물에 달빛이 반짝인다.

호야의 주먹질이 점차 느려진다.

그레이스: 호야. 더이상 싸우기엔 지쳤잖아. 넌 오백년 동안이나 싸워왔어.

그레이스가 얼굴이 짓뭉개진 채로 말한다.

그레이스: 이제는 좀 쉴 때도 되었잖아.

호야: (고개를 흔든다.) 싸워야만 해…

호야는 몇번 더 힘없이 주먹을 날린다.

그리고 주먹세례가 멈춘다.

달이 점차 내려온다.

그레이스의 오른팔이 곧게 뻗는다.

호야는 쓰러진 그레이스의 위에서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바라본다.

호야: 죽지 못해 살아간다는 건…

호야의 숨결이 떨린다.

호야: 그건… 그건 저주야.

호야가 주먹을 든다.

그레이스가 두 팔로 호야를 강하게 포옹한다.

호야가 멈춘다.

호야의 손이 천천히 내려간다.
호야의 두 손은 힘없이 축 늘어진다.

달이 내려오며 이들을 옆에서 비춘다.

호야의 붉은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격발음.

총알이 호야와 그레이스의 복부를 한번에 관통한다.

호야가 뒤를 돌아본다.
그레이스의 오른손에 호야의 리볼버가 들려있다.
리볼버의 총구에서 연기가 새어나온다.

호야는 그레이스를 바라본다.

그레이스가 눈물을 흘리며 살며시 웃는다.
호야도 따라서 환하게 웃어보인다.

달이 진다.

<기록 종료>















일련번호: SCP-1953-KO 4/01K 등급
등급: 비격리 보안인가 필요

특수 격리 절차: SCP-1953-KO의 확보 작전은 킬리 관리이사관의 직접 명령에 따라 무기한 연기된다. 킬리 이사관의 직접 명령에 관한 정보는 특수 기밀사항으로 제01K기지 외 인원에겐 열람이 제한된다.

설명: SCP-1953-KO는 현재까지 확인된 남아있는 최후의 요호이다. 대상은 전 한국지역사령부 관리이사관 그레이스 '노래마인' 최 이사관의 딸이며 현재 능구렁이 손의 맹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로 인해 대상은 현재까지 SCP 재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SCP-1953-KO는 여우의 귀와 꼬리등의 비인간적 신체구조를 일부 지니고 있고, 이에 더해 출산 직후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신체의 일부가 소실되어 있으나, 인식재해를 구사하는 자신의 변칙성을 이용하여 이러한 특징을 숨긴다.

대상을 이용해 재단이 능구렁이 손과의 유리한 외교적 이점을 취하고자 하는 제안이 제기되었으나 다음 인원에 의해 해당 제안은 거부되었다.

  • 한국지역사령부 킬리 관리이사관
  • 무속학부 뇌수종 교수
  • 분석심리학부 윤금선 교수
  • 변칙존재협력학부 치이카 박사
  • 17기지 격리전문가 클레프 박사
  • 윤리위원회 키아라 샤말란 위원
  • 외 42명의 인원

이후 해당 인원들을 중심으로 현 격리절차가 수립되고 유지되고 있다.


내력

SCP-1953-KO는 발견 직후 변칙개체의 심리 연구를 위한 종단 연구 계획의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연구의 일환으로 대상은 그레이스 최 이사관의 보호에 따라 성장하며 사회성과 가치관을 습득했다. 그러나 대상에 적대감을 보인 요주의 인물이 대상을 습격했고, 대상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그레이스 최 이사관이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SCP-1953-KO의 전반적인 격리업무는 새로 부임한 한국지역사령부 킬리 이사관에게 이전되었다.

이후 대상의 격리실에 요주의 인물 PoI-DH-016(능구렁이 손의 맹원 "강나루"로 알려짐.)이 출현하였다. PoI-DH-016는 당시 크게 상처를 입은 상태였고, SCP-1953-KO의 격리실에 나타나기 위해 연 길도 힘겹게 생성한 것으로 보인다. PoI-DH-016는 SCP-1953-KO에게 무언가 속삭였고, 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PoI-DH-016와 함께 격리실을 탈출하였다. 탈출 직후의 자리엔 킬리 이사관과 격리인원에게 양해를 구하는 쪽지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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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된 거 맞죠? 카메라는 챙겼고요?」
휘영이 가방을 들춰 매며 소리친다.

「카메라라면 당연히 챙겼지.」
류원시가 목에 걸려있는 카메라를 들고 흔들어 보인다.

「어깨 좀 펴요 이젠 능구렁이 손의 새 주석이잖아요.」

휘영에 말에 강나루는 아직 아물지 않은 가슴팍의 상처를 문지른다.

「그 꼬마앤 어디 있지?」

「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 빨리 와! 곧있으면 나루가 길을 열거야.」

「아아아! 잠깐만요!」

멀리서 클레멘타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거야…」

클레멘타인은 커다란 스크랩북을 들고 돌아다닌다.

방랑자의 도서관의 책장들 사이에 빈공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는 그 사이에 자신의 스크랩북을 끼워 넣는다.
그리고는 책장 번호를 메모지에 열심히 받아 적는다.

「뭐해? 이제 출발할거야!」

「지금 가요!」

클레멘타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일행에게 달려간다.
강나루가 일행 앞의 문을 활짝 연다.
문의 안쪽에서 밝은 빛과 바람이 새어 나온다.

클레멘타인은 휘영의 옆에 선다.
둘은 서로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일행은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문이 닫힌다.


한편으로, 책장에는 반듯한 책들 가운데 우악스럽게 크고 울퉁불퉁한 스크랩북이 끼어 있다.

스크랩북의 제목은 이렇다.

《엄마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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