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하늘.
풀이 무성한 폐허.
"·····."
이런 음침한 곳에 누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본다.
그게 내 삶의 전부.
여기서 더 무언가를 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
머리맡에는 바다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준 커다란 도미가 놓여져 있다.
먹을 수 없으니까 그만 보내라고 말했는데도 바다 마을 사람들은 매일매일 생선을 가져다줬다.
아마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거겠지. 이제 말릴 생각은 없다. 양식을 낭비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해.
"·····."
그렇다고 내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건 아니다.
"·····맛있는 냄새."
막상 뱃속에 처넣으면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맛이 없는 주제에, 황홀할 정도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
먹어야 할 때가 되니 팔과 다리에 활기가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시체처럼 늘어져 있을 시간은 끝났다.
그렇게 나는 일시적인 삶의 의지를 얻었다.
지극히도 혐오스러운 삶에 대한 의지.
"덱스, 인퀴나. 그리운 나의 세계."
주문을 외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턱을 갈랐다.
"조금만 있다 갈게. 그런 걸로 혐오하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어."
세상이 갈라지며, 빨간 속을 내보였다.
빨강 안에는 나의 고향 되는 세계가 있다. 이런 다 죽어버린 세계 말고, 아직 눈부시게 빛나는 세계.
'그런 몸이 되어 버리면서 행복해질 자격을 잃은 거야.'
'당연히 그렇게 먹어야지. 넌 괴물이니까.'
'안 돼! 잡아먹히기 싫어! 살려 줘! 살려 주세요! 이렇게 빌게요! 제발 놓아줘요! 잡아먹지 말아줘요!'
하지만 더 이상 내가 있을 자리는 없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으리·····."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마음을 울리는 구석이 있다.
말과는 다르게 난 언제든지 고향을 오갈 수 있지만 말이다.
"난 너 같은 괴물새끼 낳은 적 없으니까·····"
"·····다 닥쳐줬으면 좋겠네."
나는 식사를 하기 위해 빨강 안으로 뛰어들었다.
*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크리스마스까지 남은 시간은 약 오 분.
밤의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무지하게 춥네. 사람도 많고·····."
코로나 때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는데, 그런 잡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방금 편의점에서 산 핫팩의 포장지를 뜯었다.
목도리에 귀마개, 털실 장갑까지 끼고 나왔지만, 그래도 밤은 춥다.
"그러니 얘가 필요한 거지~."
핫팩을 열심히 흔든 뒤 마구 주물럭거린다. 온기가 핫팩에서 흘러나와 따뜻해진다.
"따뜻해~."
핫팩을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온기가 기분 좋다.
"기왕이면 영원히 따뜻했으면 좋겠는데, 핫팩값도 은근 부담된단 말이야."
이번에는 피부를 뜯어내서 만든 가짜 돈이 아니라 진짜 돈을 점원에게 건넸다.
"후우."
그래도 식비는 아예 안 들어서 다행이었다. 괴물의 얼마 안 되는 장점들 중 하나다.
"냄새가 진한 걸 보니·····여기 맞는 거 같네. 엇·····."
데엥. 데엥.
성당의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크리스마스구나."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해피 버스데이. 오늘도 살아가는 나."
추잡한 괴물로 추락하면서
모든 긍지와 명예는 먼지로 흩어져 사라졌다.
"·····."
성당은 코로나 때도 연인과 관광객으로 붐비던 명소였다.
도심 콘크리트 정글 속 아담한 성당. 그리고 일제 강점기 한참 전부터 시작된 길고 긴 역사. 다양한 매력을 지닌 성당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성당이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님도 종종 언니랑 나를 데리고 오시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종소리를 듣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던 커플들이 몇 명 있을 줄 알았는데.
"뭔가 기분 나쁘네·····."
성당 주변은 물론이고 건물 자체도 수많은 불빛 덕에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데도, 어두웠다. 불길했다. 기분 나빴다.
그리고 살짝 열려 있는 대문 너머로 풍겨오는, 속이 뒤틀릴 정도로 맛있는 냄새.
"문 살짝 열어 놓은 게 진짜 악질인 것 같아."
그리고 거기로 순순히 걸어 들어가려고 하는 난
"괴물."
괴물이 아니야.
너희야말로 괴물.
·····.
후드를 뒤집어쓰고 턱에 걸어 놨던 마스크도 올려 쓴 뒤
"흐얍!"
성당 입구의 문을 있는 힘껏 발로 차서 열었다.
"으윽."
문을 박살 내자마자 밀려오는 악취.
익숙한 냄새다. 피와 오물의 선명한 악취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우와, 벌써부터·····."
문을 열자마자 보인 예배당에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죄다 피 아니면 정체를 절대로 알고 싶지 않은 회색 슬러지를 토하고 있어 가지고 별로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어으·····."
연단 앞에 서서 서로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먹어 치우고 있는 신랑 신부 복장의 두 사람을 보니 원래는 결혼식을 치르고 있던 중인 것 같았다.
예베당의 성당에는 어린애 세 명이 리본처럼 걸려 있었다. 말 그대로 리본처럼 걸려 있어 가지고, 멀쩡한 머리통이 없었으면 끝까지 어린애인 걸 몰랐을 거다.
대체 무슨 끔찍한 괴물이 추억 어린 성당을 이런 악몽 같은 광경으로 바꾼 걸까.
"아니지. 이게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가 반영된 최신 결혼식일 수도 있잖아."
결혼은 아직 먼일처럼 느껴져서, 관심을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연말의 트렌드는 구토와 내장 먹방·····그리고 매미."
결혼식에는 매미 하객들도 엄청나게 많이 와 있었다. 날개가 반짝반짝 예쁜 걸 보면 평범한 매미는 아닌 것 같았다. 매미들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날아다니거나 벽에 붙어 왱왱거리기만 했지만·····.
"너네가 범인이지?"
그동안 쌓인 짬밥에 따르면, 저 매미들이 결혼식을 악몽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범인이었다.
"·····."
매미들은 대답 없이 앵앵거리기만 한다.
"·····성찬을 방해하는 자."
"피는 물보다 진하고, 펄프는 피보다 훨씬 진하다."
"한 손에는 신경 다발을, 다른 손에는 정강이뼈를!"
"·····우린 너 같은 탕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답은 하객들이 대신 했다.
"우연이네. 난 너희 같은 거 전혀 기다리고 있지 않았거든."
오른손에 의식을 집중하고, 힘을 조금만 안쪽에서 꺼낸다.
"왜? 성검이라도 나올 줄 알았어?"
꾸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멍이 뚫린 손바닥에서 튀어나온 건, 알루미늄 야구방망이.
진짜 야구방망이는 아니다. 형태만 흉내 낸 다른 무언가일 뿐.
하객들은 몸 안쪽에서 꺼낸 야구방망이를 보고 놀란 눈치다. 저런 꼬라지가 되고도 목숨 아까운지는 아는 걸까.
"아쉽게 됐네요. 뭐, 성검도 지금 분위기에서는 꽤 어울릴 것 같긴 하지만·····."
깡, 깡. 야구방망이로 가볍게 바닥을 두들기니, 하객들이 몸을 움츠린다.
"역시 이게 편해!"
"·····!"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하객의 머리를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호쾌한 소리와 함께 하객은 멀리 날아가 예식장의 벽에 부딪쳤고, 몸을 조금 경련하면서 기괴한 소리를 내다가 그대로 멈췄다.
"·····!"
하객들은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왔다. 대다수는 맨몸으로 달려왔지만, 몇몇은 촛대나 다리뼈 같은 걸 들고 달려왔다. 매미들도 위기를 느낀 건지 이리저리 바쁘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히얍."
의외로 하객들은 평범하게 부서졌다. 범상치 않은 존재라면 겉과 속이 뒤집어지는 등 더 극적인 반응을 보여 줬을 건데.
"씨·····귀찮게."
매미들은 시야를 가리거나 몸에 달라붙는 등 성가신 방법으로 하객들을 때려잡는 걸 방해했지만·····얼마 안 가서 물러났다.
"그래, 알겠으면 다가오지 마."
방망이에 닫기도 전에 자신들이 휴지처럼 구겨지는 걸 보고, 매미들은 뒤로 물러났다.
그 대신일까, 달려드는 하객들이 좀 더 공격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흐음·····.
"거기! 보고 있어?"
이 난장판을 열심히 지휘하고 있을 뭔지 모를 존재.
"솔직히 지금 재밌게 즐기고 있던 거 방해받아서 기분 엄청 더럽지?"
대답은 없다.
"나도 그래! 니도 기분 엄청 더러웠으면·····."
끔찍한 몰골이긴 했지만, 하객들은 어디까지나 평범의 범주에 드는 생물이다. 방망이로 쉽게 때려죽일 수 있는 족속들·····.
"좋겠다!"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다.
"태평성대! 식도와 기도로 쌓아 올린 연민의 탑!"
"시끄러워."
그래도 커다란 촛대를 들고 덤비는 하객은 조금 강했다. 방망이를 휘두르는 걸 재빨리 촛대를 놀려 모조리 막아냈고, 틈틈히 반격까지 날렸다. 원래부터 저런 걸 들고 싸워 왔던 사람일까.
"우엌!"
"그래봤자 평범한 것 치고 강한 거지만."
마지막에서 바로 전 일격은 촛대를 박살 내고, 가슴에 적중한 막타는 하객의 갈비뼈를 모조리 박살 냈다.
"육아의 피부 가죽을 껴입고 하늘로 비상! 추락! 타르트 맛이 나는 헤게모니!"
"진짜 시끄럽네."
얼굴에 방망이를 내리쳐서 닥치게 만들까 고민도 해봤지만, 아직 살아있는 다른 하객들이 몰려오는 덕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기흉 덕분에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됐으니 이 정도면 괜찮겠지.
"나선 실타래 왕국의 고깃덩이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노력한다!"
"그러니까 시끄럽다고."
한 놈.
"고양이의 내장 한 움큼이면 의사가 필요 없지."
"너도."
또 한 놈.
"여기 이상해요! 왜 다들 이러고 있는 거죠? 당신은 누구예요? 절 구하러 오신 건가요?"
"넓적다리뼈나 내려놓고 그런 말 해."
마지막 한 놈까지.
"후우."
하객들은 모조리 쓰러졌다. 대부분은 죽었고, 꿈틀거리고 있는 사람들도 몇 명 있긴 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로 잔뜩 때렸으니 식사를 방해하지 못할 거다.
"안녕, 훈남 아저씨."
메인 메뉴는 어디까지나 신랑 한 명이었다.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는 것 말고는.
"허겁지겁 먹고 있네. 그거 맛있어?"
신부 쪽은 정신을 잃은 건지 내장을 먹어 치우는 걸 멈추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지만, 신랑 쪽은 아직 왕성했다. 신랑은 계속해서 창자를 뜯어서 입 안에 처넣고 씹었다.
"난 내장류는 도저히 못 먹겠더라. 간이나 곱창 그런 거. 아, 근데 순대는 잘 먹어. 엄마가 사 올 때 마다 꼽사리껴서 먹곤 했는데, 디게 맛있었지~."
여전히 대답 없음.
"요즘 순대는 뭐 식용 비닐 같은 걸로 만든다는 소리가 있는데, 그래서 잘 먹었던 걸까. 모르겠네."
자세를 잡고, 방망이를 더 강하게 쥔다.
"뭐 상관없을지도."
그리고 휘두른다.
"·····."
있는 힘껏, 여러 번.
"이걸로, 끝."
식사 준비는 무사히 끝났다.
"그래도 아저씨는 얌전하게 박살 난 편이네. 기괴하게 생겼거나 마법 쓰는 애들은 진짜 기하학적으로 산산조각 나던데."
언젠가 요상한 주문을 외우고 손에서 불과 얼음을 뿜는 아줌마를 죽인 적이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괴물의 엄마였던가.
마법사, 아줌마는 자길 그렇게 불렀다. 처음에는 뭔 이상한 말을 하나 했는데, 하긴 나 같은 것도 있는데 마법사라고 존재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암튼 살면서 처음으로 만나 본 마법사였고, 하마터면 그때 죽을 뻔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다리 하나를 몽땅 태워 가며 살아남긴 했다. 중요한 전략적 깨달음도 얻었고.
"몸이 허약하거나, 마법 같은 걸 온몸에 두르고 다니는 애들은 뼈도 못 추리고·····흐읍!"
인간의 입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비명소리, 사실 비명보다는 포효에 가까웠다.
"에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던 신부가, 몸을 요리조리 비틀고 괴성을 지르며 날 죽이려고 했다.
"·····징그러워."
게다가 실시간으로 몸이 매미같이 변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등에는 알록달록한 날개가, 팔은 갈고리로, 척추는 길쭉하게·····최악인 건 기다랗고 굵은 침으로 변해버린 입이었다.
"굴러다니는 위장, 눈 부신 태양의 인두겁을 뒤집어쓴 벌레의 신비. 에다의 목소리가 들리나요? 그들의 갈망이 보이나요? 뇌를 골수와 밀푀유해서 만들어 낸 환상적인 가뮈플라쥬? 닿지 않아? 세상은 언제나 위궤양으로 통한다!"
"·····입이 저따구인데도 말 잘만 하네."
"역병의 창시자여! 전화번호부에는 파프니르의 앙갚음이 소리쳐 있다!"
"시끄러워."
망설일 틈은 없다. 험한 짓 하기 전에 곧바로 묵사발을 만들어 놓아야·····.
"·····."
아.
바닥에 널브러진 간을 잘못 밟고, 미끄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드는 매미 신부.
"푸른 수염, 노모를 극진히 모신다!"
·····.
·····.
"흐으으윽·····."
등에·····박힌 거 맞지? 입에 달린 침인가?
"잠깐·····윽!"
매미 신부는 커다란 손으로 양팔을 붙잡고, 야구방망이를 멀리 집어 던진 뒤 움직이지 못하게 꼭 껴안았다. 지금 보니까 팔이 무슨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좀 예쁘네·····."
"황홀한 달밤을 날아다니는 그대는 굴들이 췌장을 내뱉으면서 내지른 단말마를 기억하는가."
"윽·····아아악!"
침은 모기가 피를 빠는 것마냥, 안에서 무언가를 빨아 먹고 있었다. 몸 안에 있는 것들이 꾸르륵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아으악·····흐으윽·····."
"흐윽·····커어억·····."
"으엑·····흐엑·····으아아아!"
저렇게 비명을 지르면서 침착하게 상황 판단을 하는 나, 대단해.
"·····!"
매미 신부는 괴성을 내지르며 내 안을 빨아 먹었다. 머리 아파.
"흐그그극·····쿨럭·····우웨엑·····."
입에서 커다란 핏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안쪽 출혈도 심각한 걸까.
"·····."
핏덩어리·····. 끈적끈적해 보여. 만지면 기분 좋을지도.
"으으·····."
만지고 싶어. 촉감을 느껴보고 싶어.
"으으으·····."
엄마가 예전에 초록색 액체 괴물을 사 준 적이 있었다. 받자마자 입에 넣어버린 탓에 바로 뺏기긴 했지만 잠깐의 촉감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너 따위에게·····."
엄마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시간이 시간이니 잠을 자고 있을까, 아님 소중한 사람들이랑 크리스마스의 새벽을 만끽하고 있을까.
"·····먹힐 생각은·····."
아니면 지금
"·····없거든!"
누군가에게 잡아먹히고 있을까
"·····!"
날카로운 게 팔에 박히는 걸 참아가며, 힘으로 매미 신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악! 으으윽·····저리·····꺼져!"
당황하는 틈을 타서 침도 몸에서 빼 버렸다. 피와 창자 조각으로 보이는 게 침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건·····불쾌해.
"하아·····하아."
속이 울렁거린다. 몸이 비어버린 듯한 감각이 기분 나쁘다. 너무나도, 아프다.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어.
그래도 여기서 포기하면 내가 잡아먹힐 거 아냐
"·····잡아먹는 쪽은·····어디까지나·····."
"·····!"
"나야."
매미 신부는 여유를 잃었는지 기분 나쁜 말들 대신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윽!"
여유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마터면 또 붙잡힐 뻔했지만, 팔꿈치 아래로 산산조각 난 팔로는 역시 무리인 듯했다.
"·····팔이 멀쩡했으면 그대로 잡혀서 또 빨렸겠지·····."
기왕 빨릴 거면, 귀엽고 예쁜 애에게 빨리고 싶다. 이런 보기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 벌레 말고.
"흡!"
"·····!"
또 달려드는 걸 힘겹게 피하면서, 널브러져 있던 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이제 내 차례거든!"
그러고는 쩔쩔매고 있는 매미 신부에게 있는 힘껏 휘둘렀다.
"지평선! 지평선! 허물어지는 식도 궤야아아아아앙!"
"쳇·····멀쩡하네."
아까 매미들처럼 구겨져서 죽을 줄 알았는데, 매미 신부는 몸을 비틀거리기만 했을 뿐 죽지 않았다.
마법 등은 일절 쓰지 않지만, 육체가 강인한 덕에 그걸로 승부하는 타입. 제일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훌륭한 신부를 뒀네. 좀 부러울지도."
왱왱거리며 날아다니는 매미들을 통해 이 모든 걸 바라보고 있을 흉물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없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
매미 신부는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부서진 양 팔에서 붉은 고깃덩이가 자라나고 있는 걸 보니 팔도 재생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씨."
나를 먹고 얻은 영양분으로 새 팔을 만들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아랫배에서 찡하고 울리는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좀·····떨어져!"
재생 중에 두들겨 패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망할 매미들이 달려들어서 방해했다. 방망이에 닫기도 전에 구겨지는 건 아까랑 똑같았지만·····.
"·····방해된다고!"
"·····!"
매미들이 시간을 끄는 사이, 신부 쪽은 팔 재생을 마쳤다. 아까랑 똑같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빛나는 예쁜 팔이다.
"황색 지오선은 담즙으로 얼룩진 꿈을 꾼다!"
"다시 헛소리 시작한 거 보면 좀 여유가 생겼나 보네."
매미 신부는 하늘로 점프한 뒤 의기양양하게 날아왔다.
"날개는 진짜 장식이길 바랬는데."
무작정 공격하기보다는 피하는 게 좋겠지.
"계속 막고 피하다 보면·····."
매미 신부는 마법 같은 꼼수 없이 우직하게 몸으로 싸우는 타입인 것 같았다. 제일 상대하기 힘든 부류긴 했지만·····.
"·····기회가 생기겠지."
대응 방식 자체는 간단했다. 잘 피하고, 잘 막고·····.
"바로 지금처럼!"
잘 때리기!
"·····!"
무방비로 날아오다가 복구를 강하게 얻어맞은 매미 신부는, 괴성을 지르며 추락했다.
완벽한 기회다!
"죽어! 죽어엇!"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매미 신부의 배를 계속 계속 계속 계속 내리쳤다. 유리창이 깨지는 것 같은 경쾌한 소리와 함께 파편과 피가 몸에 튀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죽으라고!"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
"아홉 골짜기의 꼭대기에서 너의 심장에게 가솔린적인 질문을 던진다!"
"쳇!"
매미 신부가 기습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다행히 몸을 잽싸게 놀려 맞지는 않았지만, 신부는 자유를 되찾았다.
"좀·····힘드네."
매미들이 달라붙어서 시야 확보도 힘들 지경인데, 신부 쪽도 집요하게 공격한다.
이러다가는 분명 내가 틈을 보이든가 지쳐 쓰러지든가 해서 지고 말 거다.
"·····."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다. 단순하게 잘 피하고 잘 때리는 걸로는 도무지 이길 수가 없을 때. 역으로 잡아먹힐 뻔한 적도 참 많았지.
이길 수 있다는 확신 혹은 오만. 멋진 무용담을 세상에 전하겠다는 각오 혹은 탐욕.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의지.
"으윽·····."
그런 건 내 안에서 해방된 걸 보고 산산히 무너져 내렸다.
"헤엑·····흐으윽·····."
목 아래부터 아랫배까지, 세로로 갈라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뱁새 배심원으로 분쇄된 후두부여·····!"
매미 신부는 팔을 올려 피를 막아냈다. 멍청이, 그건 아무것도 아닌데.
"아까 내가 말했지?"
절개의 고통이 지나가니 몸 안에서 꿀렁거리는 감각이 느껴진다. 수백 마리의 장어가 몸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듯한 감각.
"잡아먹는 건·····내 역할이라고."
이제 밖으로 나올 시간이야.
"끊임없는 허기 아래서, 모든 사상과 긍지는 허위로 추락했다."
벌어진 틈 안에서, 수많은 촉수들이 빠져나왔다.
그래. 촉수다. 내 안에는 내장이랑 뼈 대신 이런 게 잔뜩 들어있다.
"·····!"
매미 신부는 몸을 가르고 튀어나온 촉수들을 보고 여유를 잃었는지 헛소리를 멈추고 괴성을 질러댄다. 음, 평균적인 반응. 이상할 거 없음.
"·····!"
촉수들은 매미 신부의 팔과 다리를 먼저 포박한 다음, 나머지 몸에 촉수를 감아 안쪽으로 끌고 오기 시작했다.
"·····!"
"·····윽! 크윽·····."
매미 신부는 날개를 잔뜩 퍼덕거리면서 하늘로 날아가려고 했고, 그 반동이 촉수에, 그리고 나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진짜, 산 채로 잡아먹는 건 이래서 별로 선호를 안 하는 건데. 촉수들에도 엄연히 통각이 있단 말이다.
"·····으윽·····."
날개를 포박하기 위해 뻗은 촉수는 날개에 닿자마자 바로 잘려 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촉수는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다가 금방 움직임을 멈췄다.
"짜증 나네·····."
남는 촉수들로 떨어져 나간 조각들을 주워서 안으로 가져갔다. 낭비하지 않으면 부족함도 없는 법이지.
"·····!"
촉수들로 매미 신부의 목에 몸을 감아 조르고 있었지만, 움직임이 느려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웬만하면 그냥 목을 조르는 걸로 끝낼 수 있는데·····곤충 아니랄까 봐 목으로 호흡을 하지 않는 듯했다.
"·····결국·····직접 가야 되는구나·····."
야구방망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매미 신부를 향해 천천히 몸을 좁혔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건 무리다.
"·····! ·····! ·····!"
매미 신부는 내가 다가오는 걸 보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괴성을 질렀다. 다가오는 끝이 무서운 걸까.
"그러니까 저항하지 말고 죽어줬으면 참 편했을 거 아냐."
"·····! ·····!"
"너도 험한 꼴 안 보고, 나도 이 난리 안 치고·····."
"·····!"
"·····."
이번에는 내 얼굴이 갈라질 차례였다.
"자."
코 아래 얼굴 전부가 다섯 갈래로 쪼개졌고, 갈라진 얼굴은 촉수로 변하면서 길게 늘어났다.
얼굴의 촉수는 문어 다리처럼 빨판이 잔뜩 달려 있었다. 게다가 몸통의 촉수들보다 더 굵고 단단했다. 대신 그만큼 짧긴 했지만·····.
"·····!"
얼굴의 촉수들은 매미 신부의 머리를 감쌌고, 그대로 압박했다.
매미 신부의 숨소리와, 두개골에 조금씩 금이 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고통이 엄청난지 아까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지르고 강하게 몸부림쳤다.
다행히 촉수들은 쉽게 끊어지지 않고 잘 버텼다. 옛날에는 진짜 무슨 두부처럼 잘려 나갔는데, 이런 몸도 성장을 하는구나.
"아파? 아팠으면 좋겠네. 나도 지금 무진장 아프거든."
촉수들은 몽땅 고통을 멀쩡하게 잘 느껴서 손상될 때의 고통도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서 상황이 다 끝나고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 절대 꺼내지 않았다. 웬만하면 그냥 방망이로 패 죽이는 게 간편하고 안전했다.
촉수는 필살기 같은 게 아니다. 상대방의 허를 찌르고 당황한 틈을 노리는 마지막 도박기다.
"날 함부로 빨아 먹은 죄, 그리고 아프게 한 죄·····."
콰지직 소리가 나면서 매미 신부의 머리가 무너졌다. 갈라진 틈에서 피와 뼈의 파편이 잔뜩 뿜어져 나왔다.
"대가는 적당히 받아 갈게."
대답은 없었다.
"·····."
빨판 촉수를 다시 얼굴로 되돌렸다. 식사를 하기 위한 입은 얼굴에 없었다.
촉수가 우글거리는 갈라진 몸통. 그게 내 입이었다.
"그럼."
매미 신부는 별로 맛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 얼굴에 달린 입으로 식사하던 시절의 나였다면 질색하며 멀리 치워버렸겠지.
하지만, 인간에서 괴물로 추락한 지금은·····.
"잘 먹겠습니다."
·····.
·····.
·····.
맛없다. 너무 쓰다. 터져 나오는 체액과 피가 섞여서 끔찍한 맛이 난다. 실제 매미도 이딴 구역질 나는 맛이 날까.
유리 쪽의 오도독거리는 식감도 심히 별로였다. 그래도 유리가 체액 범벅이 된 살점보다는 맛이 있었지만, 잘못 먹다가는 촉수가 상할 게 분명하다.
가리고 먹을 처지는 아니라 안 뱉고 다 먹을 거지만·····아아, 그냥 신랑부터 먹을 걸 그랬나. 이거 맛없어도 너무 맛없다.
"·····."
오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며 매미 신부를 입안으로 처넣었다. 이제 매미 신부는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조각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제 신랑을 먹을 차례. 애초에 여기까지 왔던 것도 신랑을 먹기 위해서였다.
"·····으윽."
허나 매미 신부를 먹고 나니 너무나도 배가 불렀다. 자칭 반신을 먹어 치웠을 때랑 비슷하게 배불렀다.
이 정도면 한 달은 안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후우·····."
촉수들을 모조리 몸 안으로 돌려보낸 다음, 갈라진 몸을 닫았다.
"꼴이 말이 아니네."
하객들과 매미 신부, 그리고 내 피와 오물로 범벅이 된 옷.
이런 상태로 밖에 나갔다가는 쓸데없는 주목을 너무 많이 받겠지.
"흐음."
입고 있던 옷이 꿈틀거리면서 피부로 돌아갔고, 안 밖이 뒤집혔다.
"이럴 때는 참 편리한 몸이란 말이야."
깔끔해진 옷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덕분에 옷이랑 세탁값을 아낄 수 있었으니까.
"운이 정말 좋네. 훈남 아저씨."
"신부 씨가 대신 먹혀준 덕분에 시체는 남겼잖아."
이제 별로 훈남처럼 보이지 않는 신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랑 씨는 대체 뭐였어? 꽤 맛있는 냄새가 나긴 했는데·····."
장갑을 낀 손으로 신랑의 바지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 안을 뒤졌다. 돈이 목적인 건 아니었다.
"Supply Conveyance, Park'S·····박씨네물자운송·····차장 길호준. 흐음·····."
몰라.
근데 여기 결혼식 비용 엄청 비싼 걸로 아는데, 벌이가 좋은 직장인가 보다.
"모르겠네·····."
시체만 봤을 때 차장 길호준이라는 사람은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왜 맛있는 냄새가 났던 건지 의문일 정도로.
"뭐, 생긴 게 멀쩡하다고 안쪽까지 멀쩡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나처럼.
"슬슬 돌아가야지."
매미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없었다. 여길 숨겨준 마법이 사라지기 전에 나도 빨리 도망가야·····.
"으아아아아! 빨리 피하세요오오오!"
에?
"으아아아아악!"
"우와악!"
"흐갸갹!"
"아아아아악! 내 머리이이이이!"
머리가! 머리가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악! 내 머리이이이이!"
날아와서 박은 쪽도 머리가 무진장 아픈가 보다. 그래, 계속 아파해 줬으면 좋겠네.
"아으으으으윽·····시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으로 불청객을 바라봤다.
"끄그극·····."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강렬한 색의 금발이랑
"·····더듬이?"
이마에 자라난 벌레 더듬이였다.
"괜찮으신가요? 아으윽·····너무 아프네요."
"너 뭐야?"
"네?"
눈앞에 야구방망이를 들이대니 불청객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
"우와! 제 소개를 원하시는군요! 지금 당장 할게요!"
불청객은 야구방망이를 한 손으로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쉽게 밀리는데?
"그 전에 실례, 책을 좀·····."
불청객은 허리춤에 매단 가방을 열고 안쪽을 뒤졌다.
"어·····어라? 어디 갔지?"
"·····."
머리를 내려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지금 안 죽이면 나중에 덤벼올 때 귀찮아질지도 몰랐다. 빨리 집에 가서 쉬려면 지금 바로 죽이는 게 맞았다.
"아! 찾았어요!"
하지만, 뭐랄까·····.
왠지 죽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귀엽게 구는 생물을 만나본 건 생전 처음이라·····.
"잠깐 책을 좀 펼칠게요."
"이런·····!"
·····역시 바로 죽였어야 했나.
"저, 나름대로 마법도 좀 쓸 줄 알거든요."
불청객이 책을 펼치자, 기분 나쁜 냄새가 공기에 맴돌기 시작했다.
익숙한 냄새다. 마법사들이 공격을 준비할 때 풍기던 냄새다.
"·····힘이·····안 들어가·····."
매미 신부와의 싸움으로 누적된 피로, 성대한 박치기 덕분에 아직도 어질어질한 머리.
이런 몸으로는 싸울 수 없어.
살아 남을 수 없어.
·····근데 살아 봐야 의미가 있을까.
"바이츠 모르겐, 일레나 푸스티아, 아스트라페!"
펼쳐진 책은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푸른색 불덩이들을 몇 개 뿜어냈다.
불청객 주변을 둥둥 떠다니고 있는 불덩이들은 모조리 나를 향해 날아왔고, 단 한 개도 피하지 못한 난 그대로 불타 재로 흩어져, 망념과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을 끝내·····지 않았다.
"·····."
불덩이들은 날아들지 않았다. 둥둥 떠 있는 상태로 모양을 이리저리 바꾸고 있었다.
·····바꾸고 있는 모습이 어째 익숙한데·····.
"·····악기?"
"그냥 악기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악기들이랍니다!"
불덩이들은 트럼펫, 작은북, 캐스터네츠, 바이올린·····기타 잡다한 악기들을 들고 있는 하얀 손으로 변했고, 불청객의 뒤쪽에 자리잡았다.
"일주일에 두 시간씩 마도 실용 음악 교양 수업을 들었어요. 혼자서 오케스트라나 오라트리오를 연주할 실력은 아니지만, 저를 돋보이게 할 정도는 된답니다."
"음악 교양? 어디서?"
"당연히 개미 메이드 대학이죠. 개미 메이드가 개미 메이드 대학에서 수업을 듣는 건 당연한 상식 아닌가요?"
"그런 상식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거든?"
"에에? 개미 메이드 대학을 모른다고요? 어디 산골짜기에서 살다 오셨나요?"
"그전에 개미 메이드가 대체 뭔데?"
"바로 저요!"
극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의기양양하게 허리를 핀 불청객 씨.
"성목(聖木) 안트라스의 피조물이자, 순수의 여신 델미나 알 미라지의 가신. 그리고 메이드 대학 제325기 수석 졸업생인 머랭!"
·····진짜 한 대 패 버릴까. 마법 쓰는 애니까 진짜 환상적인 각도로 뒤집어질 것 같은데.
"네! 케이크를 만들 때 들어가는 그 머랭 맞아요! 제가 케이크를 너무 좋아해서 이름을 그걸로 지으려고 했는데 이미 케이크라는 이름을 가진 메이드가 수천 명은 되더라고요! 치즈케이크 체리케이크 이런 건 수만 명은 됐고요! 그래서 그 다음으로 끌렸던 머랭으로 제 이름을 지었어요! 서른아홉 명 정도밖에 동명이인이 없더라고요!"
"·····진짜 웃기는 이름이네."
"델미나 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불청객·····그러니까 계란 흰자로 만든 거랑 똑같은 이름을 가진 개미 메이드 씨는 주눅 든 기색 없이 활짝 웃었다.
"머랭은 제 스스로 고른 이름! 제 이름이 고귀하신 분들에게 웃음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건 크나큰 영광일 테지요!"
"아니, 딱히 웃음이 나오거나 그러지는 않는데·····."
"그래서, 당신은 안트라스에 새로 강림하신 신님이신가요?
"신?"
이건 또 뭔 생뚱맞은 얘기지.
"네. 저희 개미 메이드랑 말이 통하는 걸 보니 빼박 신님이잖아요."
"아니·····."
"안트라스에는 더 많은 신님들이 필요해요. 델미나 님을 비롯한 주신 님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아니, 안트라스도 주신도 뭔지 잘 모르거든. 아 혹시·····."
하나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너, 다른 세계에서 온 거 아냐?"
"다른 세계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기 푸치 님을 섬기는 성당 아니에요? 분위기가 딱 그거·····."
개미 메이드 씨는 말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흐갸갸갹! 이거 다 뭐예요! 피! 피! 피가아아아아!"
·····이제서야 자기 주변이 시체와 피로 가득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극적인 음악 소리와 함께.
"·····아차."
나도 개미 메이드 씨의 텐션에 휘말린 덕에 개판이 난 교회를 반쯤 잊고 있었다는 건 비밀이다.
"서·····설마·····당신이 다 죽인 건가요?"
"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까, 아님 거짓말을 하는 게 좋을까.
"응."
"히에에에엑!"
이럴 때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겠지.
"허튼짓하면 너도 이렇게 만들어 버릴 거야."
"·····허, 허튼짓 안 하면요?"
"글쎄."
조금 전의 하이텐션이 완전히 증발한 개미 메이드 씨는 날 바라보며 벌벌 떨고 있었다. 극적인 음악과 함께 말이다.
아니, 떨고 있는 것도 묘하게 텐션이 높다. 달라진 게 없는 건가·····?
"·····알겠어요. 허튼짓 안 할게요."
"잘 생각했어. 이제 우리 각자 갈 길·····."
"대신 같이 살게 해주세요!"
"에에에엑?"
나도 모르게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여긴 안트라스가 아닌 다른 세상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이계에서 제가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책임져 주세요!"
"아직 만난 지 십 분도 안 지난 사람에게 뭔 책임을 지라는 거야!"
"머리 박았잖아요!"
"그건 네가 개뜬금없이 튀어나와서 박은 거잖아!"
"아무튼 책임져 줘요!"
"싫어!"
"어째서죠!"
"아직 누굴 책임질 나이가 아니라고!"
·····왜 입에서 생각치도 않은 농담이 튀어나오는 거지.
"·····뭐, 저도 뻔뻔하게 무전취식할 생각은 없어요."
개미 메이드 씨는 극적인 음악과 함께 양팔을 벌렸다.
"다시 말하지만, 전 개미 메이드 대학 수석 졸업생이라고요? 다시 말해 봉사에도 도가 텄다는 말씀!"
"·····."
"장 보기라던가 집 청소라던가, 아님 쓰레기 분리수거라던가. 당신이 귀찮아하시는 집안일을, 모조리 제가 해치울게요!"
"밤일도 해줄 수 있어?"
"그럼요!"
개미 메이드 씨의 눈이 똘망똘망 반짝였다.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지만·····교양으로 배운 건 있으니 노력은 해 볼게요!"
"·····이럴 때는 어버버하면서 당황해야 정상 아니야?"
"그런가요? 잘 모르겠네요."
"흐음·····."
안 받아주면 엄청 귀찮아질 것 같은데.
"좋아."
지금은 내가 굽히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정말요! 우와! 고마워요! 고마워요! 저 머랭, 당신을 델미나 님이라 생각하고 섬길게요!"
극적인 음악과 함께 기뻐하는 개미 메이드 씨. 응, 착해서 좋네.
"아, 조건이 두 개 있는데."
"네! 뭐든지!"
"지금처럼 배경음 깔지 마."
시끄러워서 짜증 난다고.
"알겠어요!"
이번에는 극적인 음악이 깔리지 않았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또 만나요!"
웬걸, 악기들을 모조리 책 안에 집어넣기까지 했다. 고맙기도 하지.
"다음은요?"
"수상한 짓 하면 바로 죽여버릴 거야."
"알겠어요!"
"·····죽여버린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신나게 굴 수 있는 거야?"
"메이드의 생사 결정권은 주인이 가지는 게 상식 아닌가요? 전 지금 당신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으니, 당신에게도 제 목숨을 끊을 권리를 드릴게요."
"그러니까 그런 상식 모른다고·····."
"아, 어디까지나 죽일 권리를 드린다는 거지 순순히 죽어 주겠다는 소리는 아니랍니다?"
"·····."
개미 메이드 씨는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그때가 되면 잘 부탁드릴게요."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신, 당신 말고 뭐라 불리는 걸 원하시나요?"
"응? 호칭?"
흐음·····.
"그냥 희아라고 불러."
"그게 이름인가요? 성은요?"
"있긴 한데·····버렸어."
"버렸다고요?"
"지금은 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네."
엄마에게 버림받고, 나도 엄마를 버리고, 내가 괴물인 걸 인정하면서 정말 많은 걸 버렸다.
"복잡한 사연이 있나 보네요. 알겠어요! 저 개미 메이드 머랭은 델미나 님을 다시 만날 때까지 희아 님을 섬길게요!"
"·····그래, 알아서 해라."
평소대로 먹이를 먹으러 왔다가 예상 못 한 강적과 마주치고, 끝내는 자신이 개미 메이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메이드라고 주장하는, 과자나 빵의 원재료가 되는 반죽이랑 이름이 똑같은 애랑 같이 살게 됐다.
"·····전개가 너무 빠른 거 아냐?"
"뭐라 하셨어요?"
"딱히."
누구랑 같이 살아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
"덱스 인퀴나·····."
"응?"
"왜 그래?"
"·····지금 마법 영창하시는 거예요?"
"그런가?"
"마법을 쓸 줄 아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그것도 제가 아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걸 쓰다니·····어쩌면 두 세계의 마법 체계가 동일할지도 모르겠네요."
"으흠·····."
내가 마법을 쓴다는 자각은 전혀 없었는데·····.
"참고로 '덱스 인퀴나'는 빠른 이동을 위한 포탈을 여는 데 쓰이는 영창 술식이에요."
"아, 그렇구나."
유용한 지식이 늘었네.
"집으로 통하는 포탈을 여실 생각인가요?"
"응. 그럼 마저 외울게. 아차·····."
깜박하고 안 알려준 게 있다.
"끔찍한 걸 보게 되더라도 얌전히 있어 줄 수 있어?"
"끔찍한 거라고요?"
"·····그리운 나의 세계."
축축한 소리와 함께 턱이 촉수로 갈라졌다.
"으에엑?"
"이제 돌아갈게. 겁에 질려 떨지 않아도 좋아."
세상이 갈라지며, 빨간 속을 내보였다.
빨강 안에는 죽어가는 세계가 있다. 내가 편안히 있을 수 있는 곳.
"가자."
"·····."
"왜 그래? 역시 무서워?"
"·····."
"하긴 안 무서워하는 게 이상하지. 내가 저지른 살인 현장을 보고도 같이 살 생각을 한 건 좀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이건 어쩔 수 없으려나."
"·····무섭지 않아요."
"헤에."
"·····무섭지, 않아요."
"아니, 너 지금 엄청 떨고 있거든."
"·····무섭지, 않아요."
"그렇게까지 나랑 같이 살고 싶은 거야?"
·····슬슬 짜증났다.
"이유 좀 말해줄래? 단순히 가장 먼저 만난 게 나라는 거 말고, 본심을 드러내 줬으면 좋겠어."
모멸과 조소를 가득 담아, 개미 메이드 씨를 몰아세웠다.
이제 진심을 들을 시간이다.
빨리, 네 안에 있는 악의를 드러내·····.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요."
"·····."
"왠지 가만히 두면·····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실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제 감이요."
"흐에."
상상 이상으로 바보 같은 이유다.
"아무튼 그게 네 본심인 거지?"
"네. 부정하고 싶어도 너무 견고한 덕에 절대 부정할 수 없을, 제 확고한 마음이에요!"
"·····."
저런 타입, 딱 질색이다.
자기만의 뒤틀린 선의와 신념으로 남에게 친절을 베풀어, 끝도 없이 귀찮아지게 만드는 인간 군상.
·····.
생각해 보니까 그런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네.
"좋아."
"후에?"
촉수를 원래 턱으로 되돌리면서, 결국 동거를 허락했다.
"같이 살아도 된다고. 허튼짓하면 죽여버릴 거라는 말은 아직 유효하니까, 조심해."
"·····당연하죠! 명심할게요! 순종하지 않으면 죽음이 절 찾아오리!"
개미 메이드 씨는 날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렇게 환하게 웃지 마
"그리고 맹세할게요! 델미나 님의 이름을 걸고! 저 머랭의 이름을 걸고!"
뭔가
"당신에게 최고로 행복한 시간을 선사하겠다고"
기분 나쁘니까
"행복을!"
포식의 괴물 마법소녀 로커스트 하츠 희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목도하고 절망하자
니드호그 작전 전술 타격조 회의록-1
회의 장소: 제01K기지 ███████
회의 인원
*브륀휠드의 비탄: 박시월 요원, 도로시 클락 요원, 테루루 요원 외 3명
*악마학과: 전지찬 학과장, 우나은 요원 외 11명
*차원학부: 아라 청소부장
*고유무기대응부: 김현석 요원회의 목적: 훈련 일정 수립, 상황 전파 및 SCP-1837-KO에 대한 정보 공유
도로시 클락 요원: 때는 20█년, 온 세상에 전란의 불길이 타오르는 잔혹한 시대·····.
박시월 요원: 야.
도로시 클락 요원: 세상은 영웅을 원하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박시월 요원: 얌마.
도로시 클락 요원: 왜냐하면! 영웅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차 있는 주제에, 제대로 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런 잔혹한 현실 때문에 아무도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다·····.
박시월 요원: ·····이봐요.
도로시 클락 요원: 하지만 세상은 악을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기에, 영웅들이 여기 모였다! SCP 재단 정예 중의 정예만 모아놓은·····.
박시월 요원: 시발 조용히 하세요!
도로시 클락 요원: 게흐흑!
박시월 요원이 들고 있는 보고서를 둘둘 말아 도로시 클락 요원의 머리를 가볍게 내리친다.
박시월 요원: 어수선해지니까 작작 해.
도로시 클락 요원: 존댓말 쓰실 때는 진짜 화나신 거라는 걸 떠올렸어야 되는 건데·····죄송해요.
테루루 요원: 부부싸움 또 시작이네.
박시월 요원: 부부 아니거든.
테루루 요원: 맞잖아? 도로시가 남편, 시월이가 아내. 테루루가 보기에도 정말 예쁜 부부야.
박시월 요원 : 아내 아니거든.
도로시 클락 요원: 네? 시월 씨가 제 아내가 아니라고요?
박시월 요원: ·····도로시 클락 씨 ·····.
도로시 클락 요원: 죄송해요! 또 때리지 말아 주세요! 사랑해요!
테루루 요원: 닭살 돋아·····. 테루루가 대신 사과할게. 저 둘 맨날 저따구로 굴면서 놀아.
아라 청소부장: 전 상관없습니다. 제 주변에는 주인님을 포함해 극도로 이상한 사람이 우글거리니까요. 저 정도 보케는 귀여울 뿐입니다.
김현석 요원: 차원학부 소속이라 하셨죠? 그럼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도로시 클락 요원: 차원학부요? 이번에 제비꽃 관련해서 많이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딱히 이상한 건 못 느꼈어요. 평판이 많이 안 좋나요?
전지찬 학과장: (작은 목소리로)·····평생 모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박시월 요원: 타 부서 흉은 거기까지만 보시고, 본론으로 돌아가죠.
박시월 요원이 도로시 클락 요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도로시 클락 요원은 자리로 돌아가 앉아 노트북 마우스를 만져 빔 프로젝터 스크린에 화면을 띄운다.
박시월 요원: 니드호그 작전에 흔쾌히 동참해 주신 악마학과와 차원학부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가 성사될 수 있게 분주히 노력해 주신 고유무기대응부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
박시월 요원: 도로시 요원이 조금 전에 떨었던 너스레처럼 온 세상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아니지만, 상당히 귀찮은 일에 처해있긴 합니다.
박시월 요원: 바로 이 잡것들 때문에요.
화면이 요주의 단체 엔트로피를 넘어서의 로고로 전환된다.
우나은 요원: 엔트로피를 넘어서·····.
테루루 요원: 저놈들 혼반보다는 똑똑한 줄 알았는데.
박시월 요원: 엔트로피를 넘어서, 이하 BE는 구성원 대부분이 인간으로 구성된 변칙 극렬 환경 단체였습니다. 적어도 20█까지는 말이죠.
화면이 인터뷰 영상으로 전환된다.
PoI-2510-BE: ·····배신당했냐고? 아니, 지금 엔트로피를 넘어서를 점령한 놈들은 총지휘자 한 명 빼고는 전부 다 외부 세력이다. 나머지 충실한 동지들은 전부 다 죽거나, 좀비로 되살아나 노예로 부려 먹히고 있는 신세지.
PoI-2510-BE: 그 망할 여자·····. 포로를 잡으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더군. 나도 간부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똑같은 신세가 되었을 거다.
PoI-2510-BE: 내 기업도 완전히 빼앗겼지. 나랑 똑같이 생긴 놈이 나인 척 하고 계속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는데, 무슨 깡으로 다시 돌아가겠는가?
PoI-2510-BE: 그러니, 내 자네들에게 제안할 군침 도는 거래가 하나 있는데·····.
박시월 요원의 손짓에 맞춰 도로시 클락 요원이 영상을 정지한다.
박시월 요원: 엔트로피를 넘어서의 창립자, 동시에 세계적인 대기업 엥엘베르트 코퍼레이션 그룹의 회장인 베르나르 엥엘베르트는 재단에 항복하여 구류되었습니다.
우나은 요원: 엥? 그 미친 에코 파시스트 놈들 대장이 그 사람이었어?
김현석 요원: 저도 면담하면서 믿기지가 않더라고요.
박시월 요원: 재단은 안전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BE에 대한 유용한 자료를 넘겨받았습니다. 그중에는 엔트로피를 넘어서의 구성원 대부분이 리빙 데드(LD) 독립체와 타르타로스 독립체, 제비꽃 기원 SCP 몇 종류, 그리고 SCP-491-SHK로 대체되었다는 사실도 있었죠
박시월 요원: 기존 구성원들이 축출당한 BE는 이름은 그대로 유지했지만 그 활동 양상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적어도 환경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은밀하게 활동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고유무기를 이용한 적극적인 테러 행각을 이어가고 있죠.
김현석 요원: 딱히 환경 보호를 위해 그러지도 않고요. 구성원 전체가 좀비나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박시월 요원: 그럼 이제 문제의 고유무기 파트로 넘어가겠습니다.
화면이 고유무기 관련 시각 자료들로 전환된다.
박시월 요원: 현재 BE의 세포 조직들은 본래 하던 임무들을 중단하고 모조리 특정 고유무기, SCP-1837-KO의 양산 및 실전 배치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테루루 요원: 그 전까지는 '델미나의 불'이라 불렀었지?
박시월 요원: 어. BE쪽 이름을 그대로 썼어.
전지찬 학과장: 이름만 들으면 '그리스의 불'이 생각나는 무기군요.
박시월 요원: 이름은 비슷하지만, 작동 원리는 전혀 다릅니다.
박시월 요원이 도로시 클락 요원에게 손짓하자, 화면이 특수 실험실에서 SCP-1837-KO를 촬영한 영상으로 바뀐다.
박시월 요원: 보시다시피 SCP-1837-KO는 줄기부터 잎까지 모조리 새하얀 걸 빼면 평범한 묘목입니다.
영상 속의 SCP-1837-KO가 흰색 불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박시월 요원: 어디까지나 겉으로 봤을 때만요.
급격히 팽창한 화염이 카메라를 덮치고, 영상이 끊긴다.
도로시 클락 요원: 해당 영상은 제19기지 고유무기대응부에서 제공 받았음을 알립니다. 풀버전을 보고 싶으시면 저희 말고 고유무기대응부로 문의 주세요.
박시월 요원: 열 시간가량의 준비 시간이 끝나면, 활성화된 SCP-1837-KO는 평균 반경 600m 정도의 영역을 불태웁니다.
박시월 요원: BE는 활성화 시간이 도달하기 전까지 SCP-1837-KO를 지키다가 직전에 불분명한 탈출 수단을 이용해 도주합니다. 이런 테러를 본래 BE가 활동하던 영역에서 자행하고 있죠.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박시월 요원: SCP-1837-KO의 감지법과 초동 대처가 수립된 현재는 정상성 유지 기관의 영향권에 있는 지역에서 테러가 성공하는 일은 극히 드물어졌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정상성 유지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곳, 요컨대 혼돈의 반란이 점거한 제3세계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테러에는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박시월 요원: 그리고 전술신학부의 분석 결과, SCP-1837-KO가 주변을 연소시키면서 방출한 아키바 방사선이 특정 좌표로 모여드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좌표의 상세 정보를 소개하며 설명드리겠습니다.
전지찬 학과장: 스올에도 몇 번 SCP-1837-KO를 이용한 테러가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 쪽과 연이 있는 타르타로스 독립체가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BE에 동참한 거주민들이 꽤 많다고 합니다. 대부분 하루 벌어먹기도 힘든 노동자나 제대로 망한 사업가들이라 하더군요.전지찬 학과장: 현재 BE 스올 세포들을 이끌고 있는 건 비프론스라는 악마인데, LD 소생 독립체를 다루는데 능하다는 것 말고는 알려져 있는 게 없습니다. 다만 기적술의 위력과 군중 선동력은 상당한 수준이라 꽤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박시월 요원: 감사합니다. 사미오말리에랑 제비꽃 독립체 쪽은 현재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니 추후에 확실한 정보가 나오면 알려 드리겠습니다.박시월 요원: 다음으로 보여 드릴 건 이번 작전의 목표입니다.
화면이 오래된 성채들과 신전들을 촬영한 자료로 전환된다. 건물들은 불타 죽은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감싸듯 지어져 있다. 건물 중에서 가장 높은 하얀 탑은 나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박시월 요원: 여긴 한국의 ██와 연결된 여분차원 TBE-1에 위치한 고유무기 생산 시설입니다.
아라 청소부장: 배경에 커다란 나무·····.
박시월 요원: 왜 그러시죠?
아라 청소부장: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계속 해 주시죠.
박시월 요원: 현재 상당수의 BE 대원들이 여기 주둔하며 공장을 보호하고 있죠.
김현석 요원: PoI-2510-BE의 말에 따르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치명적이었던 이유로 폐쇄한 공장이라 합니다. 자기도 왜 굳이 저길 가동시키고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도면이랑 보안 코드 등등도 겸사겸사 얻어냈습니다.
박시월 요원: 니드호그 작전의 목표는 해당 공장의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해 무력화시키고, 아키바 방사선이 모여드는 것으로 밝혀진 첨탑을 조사하는 겁니다. 현재 BE가 테러 행각에 사용 중인 SCP-1837의 99%를 생산 중인 걸로 추정되므로, 공장을 장악할 시 BE의 기세도 꺾일 거라 예상됩니다.
우나은 요원: 나무를 만드는 공장을 장악하는 작전·····왜 니드호그라는 작전명이 붙었는지 알 것 같네요.
아라 청소부장: 이 정도 인원으로 좀비, 악마, 각종 벌레, 상어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장소를 점령하는 건 상당히 힘들 것 같습니다만.도로시 클락: 혹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해 보셨나요?
아라 청소부장: 네?
도로시 클락: 거기 메인 컨텐츠인 공격대랑 똑같은 거예요! 난공불락의 던전, 무시무시한 보스들, 그리고 이를 돌파하는 멋진 영웅들! 필사의 사투를 치르고 마지막에는 멋진 보물을!
아라 청소부장: 에?
도로시 클락 요원: 아라 씨도 가슴이 불타오르지 않나요?
박시월 요원: 좀 닥쳐·····. 물론 양동을 위한 별개의 작전도 구상 중에 있습니다. 기존 BE 전담 기동특무부대인 요타-33 "클라우지우스의 검"이 도와 줄 예정이고·····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작전의 세부적인 구축은 잠시 휴식한 뒤에 진행하도록 하죠.
회의 종료.
"이게 희아 씨의 집인 건가요?"
"응."
"뭔가 허전하네요."
허전할 수밖에 없지.
"제대로 된 가구가, 그리고 지붕이, 심지어 벽마저 보이지 않아요. 이런 걸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뭐, 낭비하지 않으면 부족함도 없는 법이니까."
"좋은 말이네요."
개미 메이드 씨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뭐, 마법으로 그럴듯하게 꾸면 되지 않을까 싶네."
"예? 아, 저 그 정도로 마법을 잘 다루지는 못해서요. 멋진 집을 마법으로 뚝딱 만들어 내는 건 신님들도 하기 어려운 일·····."
"암튼 여기서는 못 지내겠다는 거지?"
"네? 아뇨.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이것보다 더 나쁜 환경에서 살아본 적도 있는걸요. 적어도 여기에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희아 님이 있으니까요."
"헤에·····."
·····창피하게, 뭐야.
"그나저나 앞이 잘 안 보이네요·····."
개미 메이드 씨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이리저리 놀려 둥근 빛을 만들고 공중에 띄웠다. 저런 간단한 마법은 주문 안 외워도 쓸 수 있는 건가·····.
"여긴 항상 이렇게 어두운가요?"
"하늘에 재로 가득한 구름이 잔뜩 떠 있거든."
내가 왔을 때도 떠 있었고, 바다 마을 사람들이 정착할 때도 떠 있던 잿구름.
"으엑·····."
"뭐, 일 년 내내 잿구름이 떠 있는 건 아니거든. 한 이 주 정도는 햇빛이 들고 그래."
"조금 전의 밤하늘은 어둡긴 해도 자연스러워 보였는데·····."
"여긴 아까 전과 다른 세계거든."
"흐음·····."
"왜 그래?"
"아뇨, 뭔가 익숙한 느낌이라·····."
"익숙하다고·····엇."
저 멀리서, 산길을 타고 올라오는 익숙한 푸른 불빛이 보였다.
"저거 뭐예요? 여기로 오고 있어요!"
"별거 아니야. 그냥 나 살아 있는지 가끔 확인하러 오는 사람. 그러니까·····그거 집어넣어."
"·····."
개미 메이드 씨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을 순순히 둘로 쪼개 바닥에 버렸다. 대체 언제 만든 거야?
"위험한 사람은 아니죠?"
"응응. 적어도 뒤통수에 칼을 꽂을 사람은 아니야."
"희아! 오늘은 웬일로 일어나 있네! 보기 좋아!"
불빛의 주인이 팔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개미 메이드 씨가 방금 뽀갠 창은 보지 못한 눈치다.
"어라? 못 보던 사람이랑 같이 있네?"
"아, 어쩌다가 새로운 친구를·····."
"안녕하세요! 예전에는 델미나 님을 섬겼고, 지금은 희아 님을 섬기고 있는 개미 메이드! 머랭이 바다의 따님에게 인사를 건넬게요!"
내가 소개를 하기 전에 개미 메이드 씨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응, 쓸데없는 말을 아낄 수 있었으니 참 좋네·····.
"바다의 따님?"
"네! 선명한 바다 냄새가 참 향기로우세요!"
"칭찬 고마워! 한동안 육지 위에서 지낸 탓에 냄새가 옅어졌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불빛의 주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머랭이라고 했던가? 잘은 모르겠는데 뭔가 맛있어 보이는 이름이네. 난 소나 아미나, 메갈로돈으로부터 백상아리의 피를 이어받은 신민이자 자랑스러운 테넴니타의 일원이야! 편하게 소나라고 불러 줘!"
백상아리 씨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에 맡겨달라는 듯이 가슴을 주먹으로 살짝 쳤다. 가슴이 그거에 맞춰서 흔들리는 게 조금 신경 쓰여·····.
"반가워요! 새하얀 피부가 참 예쁘네요!"
백상아리 씨는 사미오말리에라는 나라에서 왔다고 했다. 재앙을 피해 도망치다가 여기로 흘러 들어왔다고 했던 것 같은데·····어쩌면 나랑 같은 세계에서 왔을지도 모르겠다.
알고 있던 문화가 엄청나게 다른 탓에 검증은 못 해봤지만 말이다. 세상에 스타벅스 매장이 하나도 없는 나라가 진짜로 있다고?
"고마워. 머랭의 이마에 자라난 개미 더듬이 정말 예쁘네! 축제에서 돋보일 것 같아!"
"축제?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바다 마을 사람들은 잿구름이 걷히고 해가 뜨는 첫날에 축제를 열었다.
한 해가 지나는 것과 무사히 살아남은 걸 기념하기 위해 벌이는 축제·····라고 백상아리 씨가 설명해 줬고, 열릴 때마다 꼬박꼬박 참가를 권했지만 깡그리 무시했다.
"축제라고요?"
개미 메이드 씨의 눈이 똘망똘망하게 빛났다.
"악단도 오나요? 맛있는 음식들도 있나요? 불꽃놀이는요?"
"불꽃놀이가 뭐지·····암튼 원래 세계의 축제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재밌게 즐길 정도는 될 거야! 게다가 년마다 축제의 질도 더 좋아지고 있다고!"
"우와! 희아 님! 우리 같이 축제에 가요!"
"·····귀찮은데."
단순히 귀찮은 것보다 더 어둡고 복잡한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귀찮음으로 넘기자.
"쟤 4년 동안 한 번도 축제에 온 적이 없어. 자유이용권으로 매번 꼬셨는데도 기어코 안 오더라."
"자유이용권이요?"
"응, 이거."
백상아리 씨는 개미 메이드 씨에게 이상한 그림이 새겨진 가리비 껍데기를 내밀었다.
"우린 희아 씨에게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거든. 그래서 축제 때마다 자유이용권도 가져다주고, 선물도 틈틈히 바치는데 희아 씨는 영 반응이 없네."
"나에게 그런 건, 하나도 의미가 없으니까·····."
"심지어 자유이용권은 매 해마다 내가 새로 조각해서 준다고! 안 받아 주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냐?"
"우와! 희아 님, 상상 이상으로 나쁜 사람이셨네요!"
"·····얼씨구."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네.
축제도 안 가고 선물도 안 받는 건, 내게는 그런 게 필요 없어서다.
괴물에게 그런 즐거운 것들은 필요 없어.
오직 순간의 허기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먹잇감만 필요할 뿐.
우리 엄마가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맞아.
"어? 희아 님! 햇빛이에요!"
"오, 곧 구름이 걷히려나 보네."
빛줄기 몇 가닥이 잿구름을 뚫고 들어왔다.
"그럼 곧 그것도 보이겠네."
"그거? 여기서 엄청 잘 보이긴 하지."
"·····그거요?"
개미 메이드 씨가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직접 보면 알아. 나도 처음 봤을 때는 입이 떡 벌어졌다니까."
거짓말이다.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희아 님이 입을 떡 벌리고 볼 정도로 멋있어요?"
"·····아니, 그건 아닌·····읍읍!"
"응응! 엄청나게 멋있어! 매년마다 그걸 보기 위해 살아있고 싶을 정도야!"
진실을 전하려는 백상아리 씨의 입을 막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우와·····희아 님이 저러실 정도면 진짜 멋있나 보네요!"
그리고 꼼짝 없이 속아 넘어가는 개미 메이드 씨. ~저러실 어쩌구 하면서 뭔가 기분 나쁘게 말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저기서, 똑바로 바라보면 돼."
"절벽에서요?"
"응. 너 밀어 버리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
"밀어 버리셔도 괜찮아요! 떨어지는 도중에 올라오는 건 식은 죽 먹기니까요. 한번 밀어 보실래요?"
"·····아니."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열부터 일까지 숫자를 세다 보면 보일 거야."
"알겠어요! 열, 아홉, 여덟·····."
개미 메이드 씨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숫자까지 세며 기대하고 있었다.
뭐·····내가 혐오스러운 걸 보여 주려는 건 아니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멋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나랑 바다 마을 사람들은 혐오감만 느끼긴 했지만.
"일곱, 여섯, 다섯·····."
"희아 씨, 뭔 생각으로 그러는 거야?"
백상아리 씨가 개미 메이드 씨의 위치에서는 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흉물을 보여줘서 뭐 하려고·····."
"그냥 장난."
"·····."
"뭘 그렇게 봐?"
"아니, 희아 씨도 장난을 치는구나 싶어서."
·····그러네.
"넷, 셋, 둘·····."
왜 장난을 치고 있는 거지.
바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런 거 한 적 없는데.
"·····하나! 어·····."
"드디어 봤구나."
이 세계로 떨어진 지 한 달 뒤에 잿구름이 걷히는 기간이 찾아왔고, 그때 저걸 처음으로 봤다.
"·····."
새까맣게 타들어 간 거대한 나무.
그리고 나무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마천루와 성채들.
바다 너머에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도, 성채도, 모두 다 죽었다.
나랑 바다 마을 사람들은 저기다 딱히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냥 나무라 부르는 걸로 충분하잖아.
"성목 안트라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역시, 불타버렸구나."
저 흉물의 이름을 알게 됐다.
"·····."
나는 가까이 가서 개미 메이드 씨의 표정을 살폈다.
치명적일 정도의 하이 텐션은 사라지고 없다. 넋이 나간 듯한 눈으로 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저기, 희아 씨."
"응."
"여기가 바로 제가 태어난 세계예요."
"·····."
"성목 안트라스, 그리고 성목의 가호를 먹고 자라는 아름다운 땅. 땅 위에서 기적 같은 문명을 일구는 수많은 신들."
"·····."
"이젠 셋 중에서 아무것도 안 남았네요."
"·····."
"·····머리가 조금 아파요. 잠시만요·····."
개미 메이드 씨는 몸을 돌려 폐허 쪽으로 걸어갔다. 부축해 줘야 되나 싶었지만, 개미 메이드 씨는 중간에 넘어지는 일 없이 무사히 폐허에 도달해 벽에 몸을 기대앉았다.
"이건·····생각도 못 했는데."
"·····."
당황해하는 백상아리 씨를 뒤로하고, 난 개미 메이드 씨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왜 그러세요·····?"
"·····미안해."
"·····."
왠지 모르게 들떠서, 개미 메이드 씨에게 장난을 쳐 버렸다.
바다 마을 사람들 상대로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억눌렀는데
어째서
"진짜·····미안해."
"괜찮아요. 여기가 안트라스인 걸 모르셨잖아요."
개미 메이드 씨가 손가락으로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줬다.
"·····으흑."
가슴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다.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다.
역시 괴물은·····괴물답게 굴어야 하는 건데.
'그런 몸이 되어 버리면서 행복해질 자격을 잃은 거야.'
엄마 말이 백번 옳았어.
내가 괴물로서 살아갈 수 있게 이끌어 주신 분
다시 보고 싶어, 엄마.
다시 만난다면 모가지를 꺾어 버리는 건데
"희아 님. 축제에 같이 가지 않을래요?"
개미 메이드 씨가 말을 걸었다.
"·····?"
"둘이서 신나게 놀다 보면 마음속에 있는 근심이 다 사라질 거예요."
"그래! 이번에는 꼭 참석해 줘! 머랭 씨도 특별히 공짜로 즐기게 해줄 테니까!"
"정말요? 너무 감사해요!"
"·····."
이상하다. 상처받은 건 개미 메이드 씨인데, 왜 내가 위로를 받고 있는 거지.
"희아 님."
"·····왜 그래."
"당신은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요."
"·····."
·····짜증 나.
"축제·····."
진짜로·····.
"·····갈게."
"네!"
개미 메이드 씨가 내 양손을 잡고, 열심히 흔들었다.
"우리 같이 즐겁게 놀아봐요!"
"·····."
그래, 가끔씩은
"·····응."
괴물이 아닌 것도 괜찮겠지.
*
축제는 잿구름이 걷혀 해가 뜨는 걸 신호로 시작한다고 상어 씨가 그랬다.
"올해 축제의 주인공은 바로 채소야."
"채소?"
나와 개미 메이드 씨와 같이 산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던 백상아리 씨가, 의외의 단어를 입에 올렸다.
"우여곡절 끝에 첫 채소들을 수확하는 데 성공했거든. 경사스러운 일은 기념해야지."
"채소 농사를 짓는 바다 민족이라·····특이하네요. 바닷속에서 사실 줄 알았는데·····."
동감이다. 상어처럼 생긴 주제에 왜 육지에서 사는 건데.
"음·····그게 좀 복잡한 이유들이 많거든. 가장 큰 문제는 바다에 먹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일까."
"그런가요?"
개미 메이드 씨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아마 잿가루 위에서 자라난 풀과 나무들을 보고 온 거겠지.
"육지 생물들은 잿가루에 적응하는 데 성공했지만, 바다 생물들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야."
적응했다기보다는, 그런 환경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생물들만 살아 남았다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산길에 자라난 식물들은 모두 붉은색 잎과 줄기를 가지고 있었고, 보기만 해도 정신이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암만 봐도 평범한 식물원에 있을 법한 식물들은 아니잖아.
"처음에는 멸망하기 전 사미오말리에에서 그랬던 것처럼 바다 안에서 살려고 했지만, 먹을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말이야. 열몇 명이 조그마한 청어 한 마리를 나눠 먹어야 될 정도였다고."
"고달픈 생활이셨겠네요·····."
"그렇지. 고향이 멸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청어 백 마리쯤은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백상아리 씨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사리 육지에서 살아보기로 합의를 마치고 진출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지. 여기 주변은 몇 년 전만 해도 엄청 위험한 맹수들로 바글바글했고, 육지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는 게 없어서 막막했거든. 그나마 후자는 똑똑한 데다 모험심으로 충만한 여동생 파올라 덕분에 기반 지식 자체는 있었지만, 전자는·····희아 씨가 아니었으면 끝까지 해결 못 했을 거야."
그 괴물딱지들을 맹수라 부르는 건 너무 지나친 축약이 아닌가 싶다.
몇 대 치니까 환상적으로 부서지며 피를 뿜었던 새 괴물 그림, 시체가 사람처럼 보인 모기 떼, 금속 맛이 진하게 느껴졌던 용 등등·····. 원래 세계의 사자나 늑대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 끔찍한 괴물들.
지금은 내가 다 잡아먹어서 찾아보기 힘들긴 하다.
"안트라스의 생물 중에서 신들이 통제하지 않는 종은 없는데·····주인을 잃고 폭주한 권속들이 날뛰고 있었나 보네요. 그럼 희아 씨가 모조리 처치하신 거예요?"
"아니."
마지막에 언급한 용은 지금까지 먹어 치운 사냥감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막강한 존재였다. 하마터면 내가 잡아먹힐 뻔했지만·····모든 바다 마을 사람들이 도와준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
"바다 마을 사람들도 열심히 도와줬지."
용은 자기 몸을 찌르고 물어뜯는 시체들을 보고 비명을 지른다. 더 이상 공포를 숨길 생각조차 없다.
"희아 씨가 앞장서서 맹수들을 처리해 준 덕분에, 우리도 용기를 낼 수 있었어."
시체를 죽이느라 정신이 없는 용의 머리에, 방망이를 수도 없이 내리쳤다. 팔이 당장이라도 빠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내리치고 난 뒤에야 머리가 부서져 내용물을 드러냈다.
검푸른 뇌가 드러나자 맛있는 냄새가 더 진해졌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난 몸을 가르고 촉수를 꺼내
"·····고마워."
그렇게 섬의 터줏대감이자 최강의 포식자였던 용은 잡아먹혀 죽었다.
"자라고 있는 식물들은 전부 다 희생의 신 가르곤 님의 권속들이에요. 험준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고, 일부를 빼고는 먹기에 안전하죠. 그나마도 사람을 죽일 정도의 맹독을 축적한 식물은 없고요. 안트라스의 잿더미 위에서도 자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의외네요."
"헤에·····자주 볼 수 있었던 애들이야?"
"아니에요. 왜냐하면 가르곤 님도 본인의 권속을 싫어하셔서, 만약의 상황을 위해 보존해 둔 종자와 묘목 외에는 살아 있는 걸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우연의 일치로 운명 오염과 상당히 닮은 탓이었죠!"
개미 메이드 씨는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아니 신들 이름을, 듣는 사람들은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말했다. 푸치, 가르곤, 아이르가흐·····워낙 이상한 이름들이라 기억 속에 잘 남네.
아마 개미 메이드 씨가 살았던 세상에서는 저게 상식적인 언행이었겠지. 신들이 실제로 존재해 신도들과 적극적으로 의사소통하는 세상.
아아, 우리 신은 세상에 안 내려오려나.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데.
"우와! 저기 보이는 게 마을인가요?"
빽빽한 산길을 다 내려오자, 상어 인간들이 사는 바다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엄청 깔끔해졌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완전 허름한 페허였는데.
"부서진 벽에 벽돌을 바르고, 무너진 지붕에 철판을 씌우고, 썩어버린 문은 새로 만들고·····예전에 살던 사람들의 유산을 최대한 이용했어."
언젠가 TV에서 봤던 하얀 마을이랑 비슷하게 생겼다. 마을 이름이 무슨 산토 였던거 같은데·····.
산토 뭐시기는 절벽이 아니라 평평한 바닷가에 있긴 했지만, 뭐 건물 배색은 비슷하니까.
"여긴·····."
"아는 곳이야?"
"네. 델미나 님의 영지들 중 하나에요. 삼 년 전에 같이 와봤던 거 같은데·····."
개미 메이드 씨는 복잡한 시선으로 마을을 바라봤다.
"문명의 기초 및 종자의 보존을 위해 델미나 님이 직접 꾸미신 섬이었죠.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 같아서, 살짝 기쁘네요."
"연이 있는 장소였구나. 기쁘다니 다행이네~. 난 축제 도와줘야 되는 게 좀 있으니까, 먼저 갈게! 느긋하게 와!"
그렇게 말하고 백상아리 씨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섬의 관리를 담당하신 건 고철룡 바르바사스였는데, 델미나 님에게 세례를 받을 정도로 착하고 성실한 아이였어요."
"·····."
"고철을 가져다주면 연거푸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먹는 모습이 참 귀여웠는데, 혹시 만나 보신 적 있나요?"
'우매한 필멸자들! 이 섬에 너희들의 자리는 없다!'
'꺼져라! 꺼져! 여긴 내 땅이다! 내가 노력해서 하사받은 땅이란 말이다!'
'필멸자 주제에 죽음을 거스르려 들다니, 어리석구나! 죽음은 신도 피해 가지 못하거늘!'
'난 대소각 때도 살아남았다. 이런 건 시련 축에도 못 끼지!'
"별로 귀엽지는 않았던 것 같아."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런가요·····."
개미 메이드 씨는 더 이상 용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우리는 말 없이 길을 걸었고, 얼마 안 가 마을의 입구에 당도했다.
"예쁘네요·····상어 분들이 만드신 걸까요?"
"기묘한 조합이네·····."
상어 모양 나무 토템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할로윈 때나 볼 법한 호박 조각. 익숙한 주황색이 아니라 새빨간 색이라 기묘함이 배가 됐다.
"멋있지? 그거 내가 만든 거야!"
"어머·····."
입구 문 뒤에서 가족들로 보이는 상어들과 얘기를 하고 있던 상어 소년 씨가 우릴 보고 달려왔다.
"저 '호박'이라는 걸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팍팍! 떠오르더라고! 멋있게 웃는 호박은 물론, 상냥하게 미소 짓는 호박이랑 슬프게 우는 호박·····멋있지? 최고지?"
"어·····."
"네. 귀여워서 맘에 드네요."
머뭇거리는 나랑 다르게 개미 메이드 씨는 바로바로 대답해 줬다.
"으으·····귀여운 게 아니야! 멋있는 거지!"
아무래도 상어 소년 씨는 귀엽다라는 말을 상당히 싫어하는 듯했다. 응, 평범한 소년 같네.
"자! 이거 받아! 이거 누나에게 줄게!"
"어머 어머·····."
상어 소년 씨는 토템 위에 있던 호박을 개미 메이드 씨에게 건네줬다.
"누나 좀 맘에 들었으니까 주는 거야!"
"귀엽·····아니 멋있는 호박 고마워요. 평생 간직할게요."
"응!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안녕! 영웅 누나랑 같이 축제를 즐겨줘!"
상어 소년 씨는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귀여운 호박이에요. 에헤헤·····."
"너 그 말 쟤 못 듣게 해. 울고불고하면서 뺏으려 들지도 모르니까."
"아하하하·····."
개미 메이드 씨는 호박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영웅 누나라니·····대단한 칭호시네요."
"그 정도인가·····."
"영웅이라 불리는 건 신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데, 대단하시네요."
"으음·····."
그저 먹고 싶었던 걸 먹고 다녔을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백상아리 씨를 비롯한 상어 인간들은 날 영웅이라고 불렀다.
웃기는 일이다. 괴물인 내가 언제 자기들을 잡아먹으려 들지도 모르는데.
"영웅 님이 마을로 내려오셨잖아?"
"게다가 개미 메이드랑 같이 있어!"
"오랜만에 고귀한 존안을 보니 가슴이 메이는군·····."
상어 인간들은 축제에 참석한 내가 엄청나게 신기했나보다. 수군거림이 멈추지를 않는다.
왜 개미 메이드 씨를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지? 벌써부터 익숙해진 건가?
"헤에·····희아 님은 생각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었군요! 모시는 보람이 있겠어요!"
"·····그래, 맘대로 생각해."
·····지금 보니 '축제'라는 단어는 너무 거창한 게 아닌가 싶다.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마을 광장에 탁자와 의자들을 잔뜩 늘여 놓고, 먹으면서 조촐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구경한다. 이게 축제의 전부인 것 같았다.
군데군데 토템이나 호박 등지로 장식을 해 놓긴 했지만, 역시 초라했다. 화려하게 벌이는 건 무리인 걸까.
"이래서는 기껏 받은 자유이용권을 쓸 일이 없겠는 걸·····."
"희아 님! 저기서 음식을 나눠 주는 것 같아요!"
개미 메이드 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니, 음식이 잔뜩 쌓여 있는 가판대가 있었다.
"잠깐·····."
"빨리 와요!"
"·····."
나는 가판대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개미 메이드 씨를 멍하니 바라봤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긴 했지만, 식욕이 당기지는 않았다. 이런 몸이 된 뒤로 입을 통해 음식물을 집어넣는 게 거북하게 느껴졌다. 억지로 먹어도 역겨움을 견디지 못하고 토해버리는 걸로 끝났다.
'당연히 그렇게 먹어야지. 넌 괴물이니까.'
절대로 인정하기 싫었지만 결국 맞는 말이었고, 지금까지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
"아, 희아 님!"
음식을 구경하고 있던 개미 메이드 씨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거의 다 채소 요리네요! 과일들도 있어요!"
"한 절반은 올해 수확한 걸로 만든 거야. 나머지, 특히 과일은 수렵으로 때운 거고."
인심 좋게 생긴 상어 인간 아줌마가 우리 둘에게 말을 걸었다.
"아, 저희 자유 이용권·····."
"자유 이용권 보유자, 마을 사람들, 착한 외지인들은 모두 축제를 공짜로 누릴 수 있어. 오직 사악한 이방인들에게만 돈을 받지."
"에·····."
그럼 자유 이용권 이거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잖아.
"소나 씨가 주신 자유 이용권은 희아 님을 낚기 위한 미끼였군요!"
"·····허탈하네."
잠깐이라도 좋아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진다.
"암튼 많이들 먹어! 촌장님이 비축해 둔 기름도 많이 풀어준 덕에 잔뜩 요리했으니까 걱정 말고 먹으라고!"
"감사합니다! 원 없이 먹을게요!"
개미 메이드 씨는 접시와 집게를 집어 들고 신들린 듯이 음식을 집기 시작했다.
"영웅 님은 뭐 안 먹어?"
"·····조금 전에 뭘 먹고 와서 말이야."
"그래? 아쉽네. 배부른 상태에서 억지로 먹으면 상당히 안 좋으니 어쩔 수 없지."
상어 아줌마 씨는 그렇게 말하고 나에게 조그마한 감색 자루를 내밀었다.
"이건·····."
"고구마 캔 거 얇게 잘라 가지고 좋은 곳에서 말린 거야. 엄청 맛있지만 생산량이 턱 없이 부족해서 축제에는 못 내놓았어. 영웅 님에게 선물로 줄게."
"·····."
자루의 주둥이에 묶인 끈을 풀고, 안에 든 내용물을 하나 꺼냈다.
내 기억 속의 고구마는 노란색 아님 자주색이었는데, 자루 속의 말린 고구마는 피처럼 붉었다.
평소 같았으면 조롱과 자기 비하와 함께 자루를 돌려줬을 거다.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발버둥은 남에게 상처를 줬을 거다.
"네. 감사합니다."
"먹어보고 맛있으면 다음에 고구마 말리는 것 좀 도와줘!"
·····도와 달라니·····.
"희아 님! 희아 님!"
"우왁·····."
뭘 이렇게 많이 담아왔데·····.
"희아 님이 드실 것도 여기에 담아 왔어요!"
"·····나 안 먹는데·····."
"저기에 자리가 비네요! 빨리 가서 앉죠!"
"·····."
결국 텐션에 휩쓸려서 자리에 앉았다.
"먼가 튀김 종류가 많네요·····. 으음! 튀김옷도 안 둘러서 그런지 심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맛있네요!"
개미 메이드 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들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배가 고팠던 걸까·····.
"희아 님도 빨리 드세요! 잠깐 방심한 사이에 다 사라질걸요!"
"난 됐어."
"배 안 고프세요?"
"입으로 먹으면 다 토하거든."
"네?"
개미 메이드 씨가 한창 음식을 먹어 치우다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입가에 부스러기랑 기름이 잔뜩 묻은 게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럼 평소에 식사 안 하시는 거예요?"
"·····억지로 조금씩 먹긴 해."
반쪽짜리 진실이었다. 억지로 먹는 건 맞지만, 조금 먹는 건 절대 아니니까.
"우으·····계속 먹으려니 뭔가 죄송하네요."
"그냥 내가 특이한 거니까 신경 안 써도 괜찮아."
"·····네."
개미 메이드 씨는 다시 튀김을 들고 우물거리기 시작했지만, 방금 전의 텐션은 또 잃어버렸다. 침울해 보인다.
"·····무슨 조울증 환자도 아니고·····."
이렇게 기분이 순식간에 변하는 거, 싫다.
"·····."
오렌지처럼 생긴 걸 집어 들고 껍질을 벗겼다. 과육도 껍질처럼 시뻘건 색이었다.
"하읍."
하나 뜯어서 입안에 넣고 씹었다.
달다. 시다. 진짜 오랜만에 먹어 보는 오렌지.
솔직히, 맛있다.
"우웁·····."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느껴지는 욕지거리.
"·····희아 님?"
"괜찮아. 괜찮으니까·····."
오렌지의 달콤함은 구역질 나는 역겨움으로 변했다. 당장이라도 뱉어 버리고 싶다.
"무·····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나는 괴물이다.
괴물은 사람을 비롯한 끔찍한 걸 먹는다.
괴물은 형언할 수 없을 기괴한 모습으로 먹이를 먹는다.
괴물은 포식한다. 괴물이기에, 괴물은 그래야만 하니까.
"·····다 집어치워·····."
개미 메이드 씨는 나에게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 했다.
나를 비롯한 과거의 경험은 이를 부정했다.
"·····."
계속 오렌지를 씹고, 맛본 뒤에 삼켰다.
"희아 님!"
"·····나에게도·····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 했었지·····."
입에서 역겨운 느낌이 난다. 뱃속이 부글거린다.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다.
"·····이건 그게 진짜인지 알아보기 위한 첫 번째 시험이야·····."
한 조각 더. 그리고 계속 몰려오는 역겨움.
"평범한 음식을 먹고 바로 토해버리는 건 영락없는 괴물이니까·····우웁·····우웨에에엑!"
"·····희아 님·····."
·····결국 바닥에 오렌지를 토해버렸다.
"우웁·····우우욱·····."
갓 소화되기 시작했던 오렌지 조각들. 오렌지를 소화 시켜야 했던 위액 한 움큼. 토사물의 내용물은 단촐하기 그지없었다.
"싫어·····."
다들 날 혐오스러워 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괴물을 바라본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희아 님! 희아 님!"
개미 메이드 씨도 혐오감으로 가득 찬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괜찮으세요? 희아 님!"
입에서는 괴물이라고 매도하는 폭언이 튀어나온다.
"으아아아아·····희아 님 지금 안색이 엄청 창백해요!"
싫어, 싫어, 싫어·····괴물은 내가 아니야. 너희가 괴물이야.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날 괴물이라 매도하는 너희야말로 괴물이야.
그래, 괴물은 너희. 난 괴물을 죽이고 잡아먹어서 세상을 지키는·····.
"으·····으아아아·····희아 님·····죄송해요!"
마법소녀.
"끊임없는 허기 아래서, 모든 사상과 긍지는 허위로·····우웁?"
"·····!"
잠깐
잠깐만
"후와!"
방금 키스한 거야?
"왠지 진정시키려면 이 방법 말곤 없을 것 같아서·····불쾌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아."
신기하다. 정말 기분이 한도 끝도 불쾌해지려는 게 진정이 됐다. 덕분에 옛날에 벌어졌던 참사가 또 벌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첫 키스·····."
"에?"
"방금 그게·····첫 키스야·····."
"·····에."
개미 메이드 씨에게, 첫 키스를 뺏겨 버렸다·····.
"·····."
"·····."
둘 다 얼굴이 빨개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주변에서 이 참극을 바라 보고 있던 상어 인간들은 아무 말 없이 식사로 돌아갔다. 다들 얼굴에 당혹감과 부끄러움이 감도는 걸 보니 아마 두고두고 오늘 일 가지고 이야기꽃을 피우겠지·····.
"·····저기·····."
"·····응·····."
"·····야채 튀김이, 눅눅하네요·····."
"·····튀김옷이 입혀져서 그런가·····."
"·····에·····음·····이건 안 입혀져 있어요. 희아 씨."
어색함을 깨기 위해 아무 말이나 주워 던졌지만, 좀처럼 되지 않는다.
"하긴 튀김은 오래 지나면 눅눅해지니까요."
"기름지기도 엄청 기름지고·····."
"시발! 상어다! 상어다아아아아!"
그런 어색함을 한 번에 깨버린 건
"더 이상 못참겠다아아아아! 시바아아아아알! 상어다아아아아!"
이상한 옷을 입고 축제 한가운데로 떨어진 괴인이었다.
*
상어 인간들은 고향을 멸망시킨 주체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
"흐럇! 흐럇! 흐럇!"
놈들은 육중한 갑옷을 걸치고 수면에서 내려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상어 인간들을 주먹으로 패 죽였다고 했다.
뭔가 유머러스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백상아리 씨에게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무사히 도망치는 걸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여기, 그러니까 안트라스는 상어 인간들이 안전하게 숨어 지낼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와하하하! 역시 줘 패는 맛이 장난 아니군!"
그리고, 정말 잔혹하고 끔찍하게도
"너희 인간-상어들은 수수깡마냥 조금만 힘을 줘도 잘 부서지지만·····패는 맛이 정말 좋지. 아아, 그리웠다."
학살자들이 희생양을 기어코 찾아낸 것 같았다.
"·····!"
"·····!"
"·····!"
건장했던 상어 인간 한 명이 주먹 몇 방에 으깨지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후우! 이 비명!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
학살자 씨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기지개를 폈다.
"그리웠다! 그리웠다고! 살아 남은 놈들은 죄다 재단이나 용궁같이 그냥 와서 패고 가기에는 꺼림칙한 장소에만 숨어 있어 가지고 곤란했었는데! 아아! 고마워!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원래는 명령에 맞게 조용히 정찰만 하다가 가려고 했는데·····참을 수가 없겠더라고."
"여전히 연약하고, 여전히 줘 패는 맛이 끝내줄 것 같은데·····이걸 그냥 넘어갈 수 없잖아? 그래서 충동에 모든 걸 맡기고 달려들었지!"
"근데 무전을 들어보니 대기 중이던 동료들도 몽땅 여기로 달려오는 중이더라! 하! 나 혼자서 이 많은 상어들을 독차지하고 싶었지만·····."
"그래, 남기지 않으면 부족함도 없지."
"우와악!"
학살자 씨는 야구방망이에 몸을 얻어맞고 멀리멀리 날아갔다.
"크헉! 우허억!"
가슴 쪽 갑옷이 모조리 으스러진 학살자 씨는 필사적으로 일어나 자세를 잡으려고 발버둥쳤지만, 잘 되지 않는 듯했다.
"내장까지 모조리 으스러진 걸까나~그랬으면 좋겠네~."
느낌상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갑옷이 고통까지는 막지 못한 모양이다.
"카밀라 데 모르가나흐, 아스트라 미드서머·····."
"으억! 으허어억!"
바닥에서 솟구친 창 하나가 학살자 씨를 꿰뚫어 높이 띄워 버렸다.
"흐억! 아프아! 그만 해! 으아아악!"
또 창들이 솟구쳐 학살씨의 온몸을 꿰뚫었다.
"아프죠? 그만했으면 좋겠죠?"
엄청나게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는 개미 메이드 씨가, 빛이 넘실거리는 마도서를 펼친 채로 학살자 씨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즐겁게 죽인 무고한 희생자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거예요."
"쿨럭·····커흑·····."
"피네. 죄를 되새기며 고통스럽게 죽으시길."
개미 메이드 씨가 주문을 외우자 학살자 씨를 꽂아버린 창들이 사라졌고, 학살자 씨는 바닥에 떨어졌다.
"죽었나·····아무런 반응도 없네."
"희아 씨."
"응."
"오고 있어요."
"·····."
달려오는 발소리와 격한 흥분으로 가득한 고함 소리. 여기서도 잘 들릴 정도로 컸다.
"오고 있어! 오고 있다고!"
"저놈들이 아내랑 자식들을 다 죽였어·····."
"여기까지 간신히 도망쳤는데, 결국 따라왔다고?"
"끝장났어! 이제 다 끝장났다고!"
"·····육 년이 넘게 이어진, 우리의 노력이·····."
상어 인간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비명 지를 만도 하다. 무자비한 학살자를 피해 머나먼 곳까지 도망쳤고, 슬슬 낯선 환경에 적응해 나가려 할 때 학살자들이 돌아와 전부 다 죽이려고 한다.
나 같아도 비명을 지르는 걸 멈추지 않을 거다.
"얼마나 많은 것 같아?"
"꽤 많은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어요·····하나 하나는 생각보다 약할지도 모르겠지만, 수가 많으면·····의미 없죠."
"·····해 보는 수밖에."
"희아 님·····."
"저딴 미친 놈들보다 끔찍한 건 수두룩해. 지치지 않고 싸우다 보면, 어찌어찌 이길 수 있겠지 뭐."
"·····저도 끝까지 싸울게요, 희아 님."
"고마워."
그나마 개미 메이드 씨가 도와줘서 다행이었다. 혼자보다는 당연히 둘이 났지.
둘보다는 수백이 더 나을 거고·····.
"·····어?"
음악 소리?
"무대에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무대에, 상어 인간들이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위대한 상어 메갈로돈님이 악신 가트랑시아와의 최종 결전을 앞두고 있을 때, 목숨 걸고 메갈로돈님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악기를 연주하는 상어 인간들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으니 오늘 무조건 승리를 쟁취하리라! 라고요."
백상아리 씨가, 아까랑은 다른 화려한 옷을 걸치고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근데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도 그렇고, 너무 아슬아슬하게 입은 거 아냐? 조금만 움직여도 다 보일 것 같은데·····.
"맞습니다, 여러분. 메갈로돈 님의 말대로, 우리는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승리는 언제나 우리 사미오말리에의 것입니다."
"몇 년 전, 사악한 학살자들이 사미오말리에의 모든 걸 파괴 했을 때도, 패배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다음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였을 뿐이죠."
"그리고 그 승리를 쟁취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여러분은 사미오말리에서 살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험준한 땅을 개척하고 살아남음으로써 몸에는 근육이 붙고, 살기 위한 지혜도 터득하셨죠. 그 외 우리가 섬에서 얻은 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린 새로운 환경에서 문제없이 적응해 살아남았습니다. 하늘에는 잿가루가 내리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항상 어두컴컴하고, 듣도 보도 못한 식물과 괴물이 가득한 섬에서 말이죠. 여러분-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저들이, 이 험준한 섬보다 강할까요? 그렇다고 자신하실 수 있나요? 아니죠! 아닙니다!"
"우린 절대, 이 허접한 학살자들을 상대로 지지 않을 겁니다. 당당하게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영웅 님이 있고, 영웅 님을 섬기는 개미 메이드가 있고, 제가 있고, 여러분이 있으니까요."
극적인 음악. 과장되고도 아름다운 몸짓. 당찬 표정
"우리는 약속된 승리를 쟁취할 겁니다! 메갈로돈의 이름으로, 가트랑시아의 이름으로, 사미오말리에의 이름으로!"
"우와아아아아!"
"그래! 섬도 우리 것으로 만들었는데 저런 놈들이 뭐 대수냐고!"
"망할 지상인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자!"
상어 인간들의 투지는 진짜인 것 같았다. 백상아리 씨가 한 멋진 연설이 잘 먹혀들었나 보다.
"·····무사히 잘 넘겼으면 좋겠네요. 이 사람들은, 더 행복할 삶을 살 자격이 있어요."
"·····."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
모두가 무기를 챙기고 갑옷을 입은 뒤에 학살자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큰 전쟁이 났을 때 입는 무장을 재현한 물건·····이라고 한다. 첫 학살 때는 못 입었지만, 지금은 입을 시간이 충분하다고.
"·····."
지금 다시 보니 꽤 승산이 있는 조합 같았다.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상어 인간 수백 명, 그런 상어 인간들을 이끄는 능력 있는 촌장, 텐션이 장난 아니게 높은 개미 메이드 씨, 그리고·····.
괴물.
괴물 아니야.
괴물 맞아
괴물은 너희야.
"·····둘 다 닥쳐."
"희아 씨?"
"·····아무것도 아니야."
"싸우다가 불편해지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응."
·····.
"희아 씨, 와요."
"·····그래."
학살자들은 이제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수백. 아니, 수천은 되어 보인다. 게다가 하나같이 육중한 갑옷을 걸치고 있다.
특이하게도 무기를 들고 있는 학살자는 하나도 없었다. 몽땅 주먹으로만 싸울 작정인 걸까.
"자, 거대한 악이 우리들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백상아리 씨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이들을 모조리 죽여 승리를 쟁취하는 게 오늘의 목표입니다! 메갈로돈의 군세여, 용맹함을 뽐내 주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엄청난 함성 소리. 다들 용기로 충만해 보였다.
"야."
"네, 희아 씨!"
"열심히 해보자고."
"·····네! 희아 님에게 승리를 안겨다 드릴게요!"
개미 메이드 씨는 날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
예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라가 벽에 기대 쉬고 있는 시월에게 생수병을 건네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헌데 전 이미 물이 있어서요."
"딱 좋게 녹은 얼음물입니다. 시원하죠."
"·····."
시월이 따로 물병에 담아서 온 물은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훈련 덕에 미적지근해져 있었다.
이런 물을 마셔봤자 땀과 더위로 죽을 지경인 몸에는 도움이 하나도 안될 게 뻔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시월은 아라에게 받은 생수병의 뚜껑을 열고 단숨에 들이켰다.
"말하신 대로 딱 좋게 녹았네요."
차가운 물을 충분히 마신 시월은 생수병을 들고 훈련장을 바라봤다.
"흐앗! 받아라!"
"거기 위험해! 내가 엄호할게!"
"고마워요 테루루 씨! 이얍이얍!"
웃기게 생긴 바이저를 쓴 도로시랑 테루루가 허공에 대고 VR 훈련용 모조총기·····아무리 봐도 장난감 총으로밖에 안 보이는 물건을 발사하는 시늉을 했다. 더없이 진지한 자세와 표정으로 말이다.
"외부에서 보니 제법 병신 같은 광경이군요."
"동감입니다."
최신 초상 기술이 접목되어 99.999% 현실에 가까운 훈련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특수 장비였지만, 머리 전체를 덮는 커다란 바이저를 쓰고 총 쏘는 흉내를 내고 요리조리 회피기동을 벌이는 건·····상당히 우스워 보였다.
"쉬고 있는 것도 우리 둘 말고는 없네요."
시월의 말대로 느긋하게 물을 마시며 쉬고 있는 건 둘밖에 없었다.
"다들 왜 이렇게 필사적인 걸까요."
"아라 씨는 엄청 필사적으로 보입니다만."
아라가 기원한 제비꽃 차원과 목표인 BE의 공장이 있는 차원은 동일한 곳이다.
이 사실은 작전에 큰 도움은 주지 못했다. 아라가 살던 곳은 어두컴컴한 땅굴로 한정되어 있어 제공해 줄 정보, 그러니까 고향에 있을 동포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지금이야 연을 끊었다고 해도 고향은 고향이니까요.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있습니다."
아라가 아비 되는 자를 죽인 이후, 친하게 지냈던 개미 메이드들과의 연락이 모조리 끊겼다가 니드호그 작전 논의 한 달 전에야 연락이 닿았었다.
'오르트의 종양은 모조리 축출 완. 이제 우릴 이끄는 건 정당한 신님. 당장 돌아와.'
아라는 돌아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보고하지도 않았다. 이 사실을 아는 건 이 세계에 오직 아라 혼자였다.
"하긴 BE놈들이 아라 씨 고향에 도움 될 일을 퍽이나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랄나기 전 기준으로도 말이죠."
"꽤 악감정이 많으시나 보군요."
"네. 한반도에서 벌어진 고유 무기 사건 60퍼센트의 원인은 그 시발놈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한 백 퍼센트에 한없이 가까운 99퍼센트쯤 되겠군요."
"장난 아니군요."
"장난 아닙니다."
시월은 얼음이 살짝 녹아서 새로 생긴 찬물을 들이켰다.
"SCP-1837-KO 말입니다만."
"네."
"예전에는 그 자리를 다른 개체가 차지하고 있었다 하더군요."
"누가 그랬나요?"
"클라라 씨가 그랬습니다. 이번 사건의 주모자로 추정되는 인물과 깊숙이 연관된 SCP 였다는데·····거기서 뭔가 불길한 악의가 느껴진다고 하더군요."
시월은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한때 옆에서 그 고통을 지켜봤던 사람이다.
"시월 씨랑도 제법 인연이 있었다면서요."
"·····시발·····대체 어디까지 얘기하고 다닌 거야."
클라라와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어 뭐 하는 사람인지 몰랐지만, 만날 일이 있으면 주먹부터 먹여 주겠다고 다짐하는 시월이었다.
"·····."
과거는 뜬금없는 계기를 통해 뇌의 심연에서 떠오른다. 시월의 머릿속은 제202K기지 유아청소년부에 격리되어 있던 시절의 익사체로 가득 찼다.
"웬일이래? 평소에는 관심도 안 주더니."
"그냥 계속 가만히 있는 걸 보니·····뭔가 짜증 나서."
"드디어 시월이도 재단에 대한 충성심에 눈을 떴구나!"
"입 닥쳐."
그곳에서 시월은 다 부서져 가는 괴물을 만났고
"나는 포식의 마법소녀 로커스트 하츠 희아."
"힘없는 어린애들을 괴롭히는 악한은 내가 용서하지 않아."
"·····입으로 말하니까 겁나 부끄럽네·····역시 이건 아닌가."
나중에 괴물과 재회하니 괴물은 마법소녀가 되어 있었다.
"뭐, 저도 큰 관심은 없습니다."
"·····?"
"이미 죽은 사람의 이야기지 않습니까. 전 언제나 산 자들의 이야기에만 관심이 가더군요."
거짓말이었다.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모면하려는 거짓말.
아라가 지내던 굴에는 벽화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각종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있는 동포들, 위풍당당하게 그려진 신들, 그리고 이 모든 걸 굽어살피는 커다란 나무.
한때 아라는 개미의 몸으로 벽화들을 바라보며, 저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이들을 동경했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처지가 되고 싶다고 꿈을 꿨었다.
아비 되는 자는 모든 벽화를 훼손시켜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게 만들었고, 아라는 극도의 증오심을 품고 그를 죽였다.
"그렇습니까····."
둘은 훈련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
마지막 학살자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후우."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진짜 방금 죽인 놈이 마지막 학살자였다. 그 웃기게 생긴 갑옷 입고 살아서 움직이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 살아 있는 놈은 말이다.
"수고 많으셨어요. 헤엑·····."
개미 메이드 씨가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내 곁에 앉았다.
"메이드 씨도 수고 많았어."
"갑옷이 생각보다 단단해서 힘들었어요. 등의 관절 부분이 그나마 취약해서 다행이지·····."
개미 메이드 씨는 마도서를 들고 주문을 외우며 각종 창들을 날려 보내 학살자들을 죽였다. 근접한 적에게는 직접 창을 들고 휘두르기까지 했다.
솔직히 나보다 잘 싸우는 거 같은데, 여기서 사람 제일 많이 죽인 게 개미 메이드 씨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나저나 희아 님, 아까 그 기술은 뭐였어요?"
"기술·····?"
"그거요 그거!"
·····설마 그거 말하는 건가.
학살자에게 잘못 맞아 뒤로 넘어졌을 때, 날 넘어트린 학살자는 하늘로 높이 점프해 괴성을 지르며 내려찍으려고 했었다.
그냥 바로 달려들어서 계속 때리는 게 나았을 건데, 겉멋과 허세에 찌든 놈들이라 그런지 쓸데없는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그래서 재빨리 배를 가르고 촉수로 휘감아 그대로 삼켜 버렸다. 저항다운 저항도 못 했다.
"어·····음·····."
"정말 멋졌어요!"
"음?"
얘 분명 얼굴 촉수를 보여 줬을 때는 겁먹었던 거 같은데·····.
"방심한 적의 뒤통수를 갈기는 멋진 카운터! 개미 메이드 대학에서도 가르쳐야 할 정도에요?
"아니·····몸속에서 촉수를 꺼내 삼키는 건 개미 메이드라 해도 힘들 거라 생각하는데·····그보다·····징그럽지 않아?"
"제가 섬기는 희아 님의 촉수니까, 이젠 징그럽지 않아요!"
·····충성심이 부담스럽다. 우리 아직 만난 지 하루도 안 지났을 건데, 왜 이렇게 충직하게 구는 거지·····.
"그리고 진짜 징그러운 건 바로·····."
개미 메이드 씨가 우리 근처를 돌아다니는 그것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게 아닐까 싶어요."
죽어 쓰러진 상어 인간들과 학살자들은 모조리 다시 일어났다.
살아난 건 아니다. 저 맹한 표정과 흐느적거리는 몸짓을 보고도 멀쩡히 살아있다는 생각을 할 사람이 있을까.
"리빙 데드·····살아 움직이는 시체·····."
"생명의 순환을 모독한다고, 델미나 님이 엄청나게 싫어하셨던 존재들."
"델미나 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하얀 불로 모조리 정화해 버렸겠죠."
"·····뭐, 그래도 쟤들 덕분에 안 밀리고 버틸 수 있었잖아."
좀비들이 열심히 전선을 유지해 주지 않았다면, 학살자들의 엄청난 숫자에 밀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감사 인사나 한번 해 주라고."
"·····네, 뭐·····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요."
개미 메이드 씨는 무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무대 위에 있는 건 자기들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상어 인간들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백상아리 씨.
예쁜 춤이었다. 시체들을 좀비로 일으킨다는 것만 제외하면
"춤을 통한 강령술이라·····불경하면서도 아름답네요."
백상아리 씨, 그리고 여동생은 춤을 통해 시체를 조종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먼 과거의 조상들로부터 내려져 오는 기술이라던데, 덕분에 다른 상어 인간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외모 때문에 더 큰 차별을 받은 것 같지만 말이야."
언젠가 여동생 쪽이 저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새하얀 피부, 다른 동족과 달리 튀어나오지 않은 주둥이.
"그래도 원망하진 않아. 나와 다른 걸 무서워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여동생 씨는 초기에는 자기 지식을 총동원해 육지로의 정착을 돕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언니 씨에게 물어보니 '더 큰 이상을 찾아 떠났다'라고만 했는데, 그 이상은 잘 모른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어?"
"으어?"
백상아리 씨가 비틀거리고 있다. 지친 건가?
"소나 씨!"
진짜 쓰러져 버렸다. 으아아·····.
백상아리 씨가 쓰러져 춤을 멈추자 좀비들도 거의 동시에 다 쓰러졌다. 생기 없지만 살아 있는 시체에서 생기도 없고 살아있지도 않은 시체로 돌아갔다.
나와 개미 메이드 씨는 시체들을 무시하고 백상아리 씨를 향해 달려갔다. 주변에 악기를 연주하던 상어 인간들도 진이 빠져있어 백상아리 씨를 도울 처지가 아니었다.
"괜찮으세요? 지금 바로 부축해 드릴 거니까·····어?"
개미 메이드 씨가 황급히 달려가다 말고 멈춰 섰다.
"왜 그래?"
"·····마법의 흐름이·····."
"·····?"
"포탈 마법이에요! 희아 님이 썼던 거랑 똑같은 거!"
"그럼 증원이 왔다는 거야?"
"몰라요! 아무튼 무대 쪽에 곧바로 열릴 거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상아리 씨 바로 옆의 공간이 조금 찢어졌다.
"·····."
그리고 그 안에서 보이는 건, 빨강.
빨강 안에서 제일 먼저 걸어 나온 건 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상어 인간. 매끈하고 새하얀 피부. 백상아리 씨의 여동생이었다.
"·····."
여동생 씨는 시체로 가득한 마을을 보고 혀를 차더니, 다음에 나올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줬다.
"후아! 시체 냄새로 가득하네요!"
경박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걸어 나온 건 메이드였다.
"오호, 다 죽은 줄 알았는데 꽤나 많이 살아 있네요! 학급 하나도 못 채울 정도긴 하지만, 살아 있는 게 어딘가요!"
메이드가 걸친 옷은 개미 메이드 씨가 입은 옷이랑 비슷했지만, 회색 계열로 칠해진 부분이 많았다.
·····지금 보니 이마에 개미 더듬이까지 달려 있다. 쟤도 개미 메이드인가?
"·····체다."
"응?"
개미 메이드 씨가 갑자기 치즈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직 살아있었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개미 메이드 씨의 얼굴은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어라? 어라어라어라?"
경박한 메이드 씨는 개미 메이드 씨를 발견하고는 잽싸게 여기로 다가왔다.
·····뭐가 이렇게 빨라?
"머랭! 살아 있는 줄은 몰랐네요! 델미나 님이 성목을 불태울 때 같이 타 죽은 줄 알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검 두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경박한 메이드 씨는 아직 이를 뽑으려 들지는 않았다.
"·····응, 체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보니·····살아 남았어."
근데 진짜 이름이 체다야? 왜 죄다 먹는 걸로 이름을 짓는 거지?
"다행이다! 머랭 수준의 마법사가 없어서 곤란했던 참인데 말이죠! 우리의 새로운 대의에 합류하지 않을래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주인님을 임시로 섬기고 있어서·····좀 곤란해."
"헤에·····."
경박한 메이드 씨는 그제서야 날 바라봤다.
"안녕."
"뭐야, 평범한 인간이잖아요. 살짝만 찔러도 바로 뒈져 나갈 것 같은데 정말 이딴 걸 주인님으로 섬기고 있는 거예요?"
·····아무래도 경박한 메이드 씨는 싸가지가 상당히 없는 듯했다.
"이런 연약해 보이는 인간 말고, 내가 지금 섬기고 있는 주인님으로 갈아타는 게 어때요?"
"·····체다도 새로운 주인님을 섬기고 있는 거야?"
"응! 마지막으로 나오실 거니 직접 보세요!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질걸요!"
상어 인간들과 개미 메이드들을 몇 명 더 내보낸 뒤 마지막으로 나오는 건·····.
"·····."
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난 너 같은 괴물새끼 낳은 적 없으니까·····"
한때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사람.
"헬라 님! 제가 예전부터 틈만 나면 얘기하던 머랭이 살아 있었어요! 정말 기쁜 소식·····으아아아아악! 헬라 님!"
경박한 메이드 씨는 내가 방망이를 들고 주인에게 달려가는 걸 보고 비명을 질렀다.
"·····."
"·····."
머리를 노리고 한 공격은 하얀색 불길에 막혀 닿지 않았다.
"·····!"
연달아서 계속 내려치려고 했지만, 옆에 있던 개미 메이드들이 주먹이랑 무기를 휘둘러 날 방해했다.
"·····방해되니까, 꺼져!"
개미 메이드 하나를 멀리 날려 버린 뒤에 나머지 방해꾼들도 똑같이 날려 버리려고 했지만
"헬라 님에게서 떨어지세요!"
쌍검을 들고 하늘에서 떨어진 경박한 메이드 씨가 날 가로막았다.
"큭·····."
쌍검의 공격은 못 막고 못 피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말투 때문에 만만하게 봤었는데 전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어·····.
"안트라스의 재림을 방해하는 악한은 머랭의 주인님이라고 해도 가만히 두지 않아·····응읏?"
"어엇?"
땅에서 솟아 난 얼음 결정들이 나와 경박한 메이드 씨를 감싸서 못 움직이게 했다.
"두 분 다·····그만 하세요·····."
이것도 개미 메이드 씨의 마법인가·····. 못 움직이겠네.
"·····."
아니, 우리 둘만 멈춘 게 아니었다. 싸울 수 있는 모두가 얼음에 구속되어 있었다.
"체다. 가만히 있어 주시죠."
"하지만·····!"
"제가 저런 하찮은 괴물에게 허무하게 질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복종하겠습니다."
"머랭이라 했던가요. 마법을 거둬 주시죠. 당신은 물론 주인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델미나 님의 불을, 당신이 이어받은 건가요?"
"네."
"·····델미나 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 하실 수 있나요?"
"그게 당신에게 의미가 큰 이름이라면, 기꺼이 그러죠."
"·····."
개미 메이드 씨는 마법을 모조리 해제했다.
다시 달려들까 생각도 해 봤지만·····개미 메이드 씨의 얼굴을 봐서 그만뒀다.
"·····오랜만이네."
이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개미 메이드 씨.
"엄마."
지금 나 엄청나게 참고 있다는 걸.
*
"잠깐, 잠깐잠깐, 엄마라고요? 진짜?"
경박한 메이드 씨가 가까이 딱 붙어서 바라봤다.
"흐음·····이렇게 보니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감동의 모녀 상봉인가요?"
"내 딸은 수십년 전에 죽었다고 말했을 건데."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엄마 손으로 직접 태워 죽었다는 얘기도 했어?"
"여덟 살 생일 때, 내 딸은 세상의 부조리에 먹혀서 죽었다. 그 이후로 존재하는 건 딸의 껍데기만 흉내 낸 괴물들일 뿐."
"뻔뻔한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그리고 내가 세상의 부조리를 모조리 불태워 버릴 것이다."
엄마는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뭐, 나도 저딴 거의 관심 따윈 필요 없으니까, 나쁠 건 없겠지.
"파올라, 설득은 다 끝났나요?"
"응."
이 촌극에 끼어들지 않았던 여동생 씨가 엄마에게 다가왔다.
"일단 망자 수습이 다 끝나면 생각해 보겠대."
"세계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언니분도 올바른 선택을 하실 거라 믿습니다. 이만 돌아가죠."
"벌써요? 정리를 도와주고 갈 생각인 줄 알았는데."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철수하도록 하세요."
그렇게 말하고 엄마는 제일 먼저 포탈 안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상당히 복잡한 가정사가 있나 보네요. 흐음····."
경박한 메이드 씨는 날 바라보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시간 나면 성목 아래 안트라스의 성채로 놀러 오세요. 거기서 반드시 죽여줄 거니까."
"죽는 건 너야, 천박하게 말하는 메이드 씨."
"아하하하! 자신감이 넘치네요! 좋아요!"
경박한 메이드 씨는 내 등을 두들겼다. 진짜 죽일까.
"그럼 머랭! 다음에 또 봬요!"
그래, 빨리 꺼져.
"·····."
마지막으로 나가는 건 여동생 씨였다.
"·····."
여동생 씨는 폐허가 되어버린 자기 마을을 한 번 둘러 보고는, 말없이 포탈로 걸어 나갔다.
"·····."
그리고 포탈이 닫혔다.
남은 건 우리와 폐허가 된 마을뿐.
"가 보실 건가요?"
개미 메이드 씨가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쫒아갈 수 있어요. 안트라스의 성채의 좌표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물론 갈 거야."
어머니를 족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자기가 그렇게 싫어했던 괴물의 입안에, 처넣어 버리겠어."
그래, 괴물은 괴물답게 행동해야지.
"낳아 준 어머니를 먹어 치우는 것보다 괴물다운 행동이 있을까. 그 전에·····."
"쉬고 가실 생각인가요?"
"응. 딱 하룻밤만."
학살자들과 싸운 것 때문에 어깨랑 다리가 뻐근하다. 뻐근한 상태로는 가 봐야 엄마는커녕 싸가지 없게 말하는 개미 메이드도 못 잡을 게 뻔했다.
휴식 장소도 잘 정해야겠지. 개미 메이드 씨도 나만큼 지쳐 있을 건데, 평소처럼 폐허 밑바닥에서 자는 걸로는 충분치 않을 거다. 역시 백상아리 씨에게 푹신한 잠자리를 빌려 달라 부탁해야·····.
"으아아아아아아!"
"·····."
"으아아아아아아!"
백상아리 씨가, 무대에 엎드려서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살아 남은 사람이 거의 없어요."
개미 메이드 씨의 말대로,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상어 인간들은 거의 없었다.
남자랑 여자, 어린애랑 노인 가리지 않고 학살자와 마주해 싸웠다.
보통 이럴 때는 노약자들은 어디 따로 안전한 곳에 숨기지 않나? 다들 숨지 않고 원수들에게 달려들었던 걸까?
"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어쨌거나 남은 거라고는 서른 명을 간신히 넘길 것 같은 생존자와, 폐허가 된 마을뿐.
"그 웃기게 생긴 놈들·····왠지 우리 엄마가 끌어들인 것 같아."
"네?"
"설득 어쩌고 하는 거 보니까 백상아리 씨를 포섭해야 할 이유가 있나 본데, 그 이유를 만들기 위해 여기를 알려 준 게 아닐까 싶어."
"설마·····그렇게까지 악랄한 수단을 동원하지는 않았겠죠."
"우리 엄마가 얼마나 거지 같은 인간인지 모르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자기 딸을 기꺼이 지옥에 처박아버린 엄마.
엄마의 상냥한 통제 아래, 난 끔찍한 괴물로 자라났다.
"·····들려 주시지 않을래요?"
"뭘."
"희아 님의 과거요."
개미 메이드 씨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나를 바라봤다.
"희아 님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어요."
"·····우리 아직 만난 지 하루도 안 지났다는 거 알아?"
"고작 오 분 만났을 뿐인데 남은 평생에 마법을 부려버린 관계들도 있기 마련이죠. 하루면 충분히 길다고 생각해요."
"·····뭐, 남기지 않으면 부족함도 없으니까."
과거 얘기를 하다 보면, 지끈거리는 두통이 나아질지도 모른다.
"별로 길진 않을 거야. 인생의 반은 재단이라는 곳에서 갇혀 살았고, 나머지 반은 여기서 시체처럼 살았거든."
그렇게 난 생전 처음으로 과거 얘기를 시작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남에게 해 보는, 내 얘기.
일련번호: SCP-1837-KO
등급: 유클리드 무효
특수 격리 절차: SCP-1837-KO를 대하는 모든 인원들은 격리 파기 방지를 위해 대상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하며, 의사소통을 할 때는 '괴물'이라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이를 어기는 인원에게는 징계를 내리며, 징계가 다섯 번 누적될 시 기지 이사관의 재량에 따라 처벌을 실시한다.
SCP-1837-KO의 격리 절차 시행은 연홍란 요원1의 주도하에 실시해야 한다.
또한 변칙성의 특성상 SCP-1837-KO에게는 의류가 필요치 않음으로, 예외 상황이 아닌 이상 지급하지 않는다.
*해당 특수 격리 절차는 윤리위원회의 검토 및 승인을 거쳤음을 알림
SCP-1837-KO가 사망한 관계로, 더 이상 격리 절차는 필요치 않다.
설명: SCP-1837-KO는 7 8 9 10 11 12 13 14 15세 연령의 제3종 생물체로, 인간 여아의 외형을 가지고 있으며 알려진 생물 19종의 유전자와 미확인 생물 4종의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본래 SCP-1837-KO는 재단 요원의 자녀로, 표피 및 진피 조직을 일반적인 의류와 비슷한 형태로 변형시킬 수 있는 변칙성을 보유한 탓에 2등급 주시 대상이었다. 허나 대상의 7세 생일 때 새로운 변칙성이 발현됐고, 심령체 포식 사건-████의 원인이 되어 격리 절차의 수립이 필요하다고 판단, 부모되는 재단 요원의 인솔하에 대상은 제202K기지에 격리되었다.
대상은 신체 일부2를 붉은색 촉수형 부속지로 변형 시킬 수 있다. 아래턱의 촉수는 구조상 두족류의 다리와 유사하며, 몸통의 촉수는 자포동물의 부속기와 유사하다. 부속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연구 문서-████참고.
처음에는 표준형 유아-청소년 관리 절차에 따라 격리를 수행했지만, SCP-1837-KO가 █건에 이르는 격리 파기 사건을 발생시키자 격리 절차의 개정 필요성을 실감했다. 상황 정황과 인과 관계를 면밀히 조사함에 따라 인격적인 모욕을 가하는 게 안정적인 격리에 유리하다는 게 밝혀졌고, 윤리위원회의 동의 및 부모 요원의 주도하에 현 격리 절차가 수립되었다.
대화 기록-1
장소: SCP-1837-KO 격리실
인원: SCP-1837-KO, 연홍란 4등급 요원3
SCP-1837-KO: 엄마?
연홍란 요원: 응, 엄마야. 많이 무서웠지?
SCP-1837-KO: 여기 어디야? 나 내일 학교 가야 되는데·····.
연홍란 요원: 괜찮아. 엄마가 선생님에게 말해 둘게. 그러니까 오늘은 편히 쉬어.
SCP-1837-KO: 엄마·····?
연홍란 요원: 순대 사줄까? 여기서도 팔려나 모르겠네·····.
SCP-1837-KO: 희아는, 괴물이야?
침묵
연홍란 요원: 누가 그랬어?
SCP-1837-KO: ·····어.
연홍란 요원: 누가 희아 보고 괴물이라고 했어?
SCP-1837-KO: 그·····하얀 가운 입은 사람들이·····수군거리는 걸 들었어.4 괴물이 아니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연홍란 요원: 희아는 괴물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SCP-1837-KO: ·····진짜지?
연홍란 요원: 그래! 엄마 희아 엄청 사랑하는 거 알지? 엄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 절대 안 해.
SCP-1837-KO: ·····응, 믿을게. 고마워 엄마.
연홍란 요원: 응응. 오늘은 그만 씻고 자자. 엄마가 도와줄까?
SCP-1837-KO: 리즈벨 보고 잘래.
연홍란 요원: 리즈벨? 아! 잠깐만, 엄마 폰 좀 꺼낼게.
연홍란 요원은 양복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SCP-1837-KO에게 건네준다.
SCP-1837-KO는 휴대전화를 들고 만화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연홍란 요원은 한숨을 내쉰다.
기록 종료
대화 기록-155
장소: 제202K기지 3층 휴게실
인원: SCP-1837-KO, 정지찬 연구원6, 심예은 연구원7
정지찬 연구원: 최근 격리된 변칙개체 애들은 어때?
심예은 연구원: 귀에 부적 단 애는 제법 괜찮은 것 같아요. 그 시꺼먼 놈은·····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히고요.
정지찬 연구원: 그놈은 나도 불쾌하더라고. 유청부 직원 자식들을 702KO 격리 절차에 투입한다는 얘기 들었어?
심예은 연구원: 저도 들었어요. 화가 나는 걸 넘어 그냥 어이가 없더라고요. D계급 인원은 뒀다가 국이라도 끓여 먹으려는 건가·····.
정지찬 연구원: 안 그래도 한국은 D계급 인원의 절대적인 수가 부족한데, 애는 더더욱 없겠지. 게다가 요즘은 D계급의 취급 개선 얘기도 나오고 있어 가지고 함부로 쓰기 좀 곤란해.
심예은 연구원: 범죄자 새끼들에게 무슨 취급 개선을·····.
정지찬 연구원: 얌마, 말 조심해. 선배가 D계급 가지고 말 잘못했다가 징계 먹은 거 잊었어?
심예은 연구원: 아무리 그래도 유아 D계급의 목숨이 재단 인원의 목숨보다 중요하겠어요? 이래서는 무서워서 애도 못 낳겠네·····.
심예은 연구원이 커피를 들이킨다.
심예은 연구원: 아, 근데 최근에 격리된 SCP·····무슨 촉수 괴물 있잖아요?
정지찬 연구원: 높으신 분 따님? 걔는 왜?
심예은 연구원: 걔 조상신 먹어 치웠다고 하지 않았어요? 신도 잡아먹는데 702KO라고 못 먹을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정지찬 연구원: 조상신은 이름과 다르게 평범한 심령 독립체에 가깝거든. 미친 고대신이라는 가설까지 나오고 있는 702KO랑 비교하면 진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난 702KO가 그냥 털어먹는다에 한 표 줄란다.
격리실에서 탈출한 SCP-1837-KO가 야구방망이를 든 채로 둘의 뒤쪽에 선다. 연구원들은 아직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예은 연구원: 왜요? 1837KO도 어린애라 702KO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잖아요? 방심한 사이에 촉수로 삼키면 이길 것 같은데·····.
정지찬 연구원: 애초에 얌마, 괴물 딱지들끼리 싸움 붙이는 건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SCP-1837-KO가 방망이로 정지찬 연구원의 머리를 내려친다. 정지찬 연구원의 머리는 그대로 함몰된다.
정지찬 연구원: [비명]
심예은 연구원: 이·····시발·····.
심예은 연구원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도주하려 하나, 매트를 잘못 밟고 넘어진다.
심예은 연구원: 니미·····누구 없어요? 시발 누구 없냐고요!
SCP-1837-KO: ·····괴물이 아니야.
SCP-1837-KO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심예은 연구원의 다리를 방망이로 내리친다.
심예은 연구원: [비명]
SCP-1837-KO: 그러니까, 뒤에서 그만 수군거려 줘·····.
SCP-1837-KO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SCP-1837-KO: 우리 엄마는 나보고 괴물이 아니라고
심예은 연구원: [비명]
SCP-1837-KO가 방망이로 심예은 연구원을 후려친다.
SCP-1837-KO: 자기 전에 꼭 말씀해 주시는데
심예은 연구원: [비명]
SCP-1837-KO가 방망이로 심예은 연구원을 후려친다.
SCP-1837-KO: 우리 엄마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심예은 연구원: [비명]
SCP-1837-KO가 방망이로 심예은 연구원을 후려친다.
SCP-1837-KO: 거짓말을 하는 건 너희들
심예은 연구원: [비명]
SCP-1837-KO가 방망이로 심예은 연구원을 후려친다.
SCP-1837-KO: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날 모멸하고 모욕하는 건 바로 너.
심예은 연구원: [비명]
SCP-1837-KO가 방망이로 심예은 연구원을 후려친다.
SCP-1837-KO: 그래, 괴물은 바로 너.
심예은 연구원: [비명]
SCP-1837-KO가 방망이로 심예은 연구원을 후려친다.
심예은 연구원: 우곡·····오고곡·····.SCP-1837-KO: 괴물들은 모조리
SCP-1837-KO: 죽어야 해
SCP-1837-KO: 끊임없는 허기 아래서, 모든 사상과 긍지는 허위로 추락했다.
SCP-1837-KO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안에서 촉수들이 튀어 나와 심예은 연구원을 감싼다.
심예은 연구원: 어·····잠깐만·····.
심예은 연구원: 싫어·····싫다고·····.
심예은 연구원: 안 돼! 잡아먹히기 싫어! 살려 줘! 살려 주세요! 이렇게 빌게요! 제발 놓아줘요! 잡아먹지 말아줘요!
심예은 연구원: 안 돼·····싫어·····하지 마·····하지 마! 싫어어어어·····!
SCP-1837-KO는 심예은 연구원을 포식한다.
영상 종료.
대화 기록-46
장소: 윤리위원회 회의실
인원: 연홍란 요원, [데이터 말소]
연홍란 요원: SCP-1837-KO에 대한 건입니다.
연홍란 요원: SCP-1837-KO는 수차례에 걸친 격리 파기를 일으켰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격리에 의한 스트레스로 인해 벌이는 짓인 줄 알았지만, 세 번째 격리 파기 즈음에는 '괴물'이라는 키워드에 광적인 집착을 한다는 걸 알아차렸죠.
연홍란 요원: 이후 유아청소년부의 꾸준한 연구 결과, SCP-1837-KO가 자기가 '괴물'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면 모종의 정신 착란 상태가 되어 격리 파기를 야기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연홍란 요원: 연구 및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SCP-1837-KO의 격리 절차의 개정을 제안하려 합니다. 허나 재단 윤리 강령에 어긋나는 사항이 다수 포함된 관계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윤리위원회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연홍란 요원: 그리고 개정된 격리 절차가 소용이 없을 경우를 대비하여, 통제 불능 고위험 인간형 변칙개체에게 실시하는 특수 격리에 대한 동의도 지금 받아두고 싶습니다.
연홍란 요원이 [데이터 말소]에게 문서를 건넨다. [데이터 말소]는 문서를 읽기 시작한다.
[무관한 침묵 생략]
[데이터 말소]: 그러니까·····.
연홍란 요원: 네.
[데이터 말소]: 이거 엄마가 자식에게 넌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라 가스라이팅 주구장창 할 거라는 거 맞죠?
연홍란 요원: 네.
[데이터 말소]: 한창 인격이 형성되고 있는 어린애에게?
연홍란 요원: 네.
[데이터 말소]: 수틀리면 냉동고에 처박아 버릴 거고?
연홍란 요원: 네.
[데이터 말소]: 일말의 망설임도 없군요.
연홍란 요원: 전 재단과 세계에 충성합니다.
[데이터 말소]: 으음·····.
[데이터 말소]가 자기 자신의 여우 꼬리를 매만진다.
[데이터 말소]: 알겠습니다. 논의 주제로 올려보도록 하죠.
연홍란 요원: 감사합니다.
[데이터 말소]: 그리고 같은 부모로서 드릴 말이 하나 있습니다.
[데이터 말소]: 저 같았으면 귀찮은 격리 절차 개정 없이 바로 냉동고에 처박아 버렸을 겁니다.
[침묵]
[데이터 말소]: 어쭙잖은 모정을 행동 강령 삼아 움직이는 건 매우 위험한 짓이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연홍란 요원: ·····명심하겠습니다.
대화 종료.
대화 기록-47
장소: SCP-1837-KO 격리실
인원: SCP-1837-KO. 연홍란 요원
SCP-1837-KO: 어·····엄마?
연홍란 요원: 얘기는 들었지.
SCP-1837-KO: ·····응.
연홍란 요원: 너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연홍란 요원: 그중에는 엄마랑 친구인 사람도 있었다?
연홍란 요원: 희아에게 예쁜 인형을 사다 주려고 했었는데, 이제 희아 뱃속에 있는 덕에 인형은 영원히 못 사게 됐네.
SCP-1837-KO: 어·····어·····.
SCP-1837-KO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인다.
SCP-1837-KO: 죄·····죄송해요·····바로 꺼내 드릴 거니까·····.
연홍란 요원: 이미 다 소화돼서 곤죽으로 변해 버렸을 건데 꺼내서 뭐 하게?
SCP-1837-KO: ·····으으·····.
연홍란 요원: 잘 들어. 희아는 사실 괴물이야.
SCP-1837-KO: ·····네?
연홍란 요원: 괴물이라고, 괴물. 사람을 죽이고 잡아먹으면서 기쁨을 느끼는 괴물.
SCP-1837-KO: 엄마?
연홍란 요원: 엄마라고 부르지 마!
연홍란 요원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를 지른다.
연홍란 요원: 난 너 같은 괴물새끼 낳은 적 없으니까·····.
SCP-1837-KO: ·····엄마·····.
연홍란 요원: 부르지 말라고!
연홍란 요원: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열심히 살았어! 남편이 죽고 딸 하나 남았을 때도 열심히 살았어! 홀어머니나 과부라고 뒤에서 씨부렁거릴 때도 주늑들지 않고 열심히 살았어!
연홍란 요원: 딸이 자라서 어른이 되는 걸 보고 싶었어! 자기만의 진로를 찾아서 나아가고, 멋진 사람이랑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걸 보고 싶었어! 딸이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었다고!
연홍란 요원: 근데·····필사적으로 산 대가가·····소원을 품었던 대가가·····이거야?
연홍란 요원: 이 시발 사람 잡아 처먹는 괴물이냐고!
[침묵]
SCP-1837-KO: ·····죄송해요.
SCP-1837-KO가 울음을 터트린다.
SCP-1837-KO: ·····죄송해요·····정말 죄송해요·····죄송해요·····.
연홍란 요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SCP-1837-KO: 죄송해요·····죄송해요·····엄마·····.
촬영 종료.
대회 기록-55
장소: SCP-1837-KO의 격리실
인원: SCP-1837-KO, SCP-010-KO, D계급 아동 두 명, 인솔 교사
인솔 교사: 오늘도 평소에 하던 것처럼 괴물의 방에서 놀면 돼.
SCP-010-KO: 그냥 놀이방 가서 놀면 안 돼요?
아이 1: 맞아요. 쟤 뭔가 기분 나빠서 싫은데·····.
SCP-010-KO: 그리고 딱히 마음이 들어가 있지도 않는 나쁜 말 내뱉는 거 좆같이 힘든데,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아이 2: 뭔 소리야? 시키지 않아도 더더욱 열심히 해야지! 세계 평화를 위해!
아이 1: 넌 또 뭐가 그렇게 열심인데?
아이 2: 홍란 아줌마가 그랬어! 우리가 괴물에게 나쁜 말을 계속하는 건 세계 평화를 위한 막중한 임무래!
SCP-010-KO: 시발 그걸 진짜로 믿냐?
인솔 교사: 셋 다 입 닥쳐.
인솔 교사가 격리실의 문을 열고, 무장 경비원 두 명을 먼저 들여보낸다.
경비원: 문제없습니다.
인솔 교사: 좋아. 얘들아! 빨리 들어가!
아이 세 명이 인솔 교사를 따라 SCP-1837-KO의 격리실로 들어간다. SCP-1837-KO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이 2: 야, 괴물.
SCP-1837-KO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이 2: 잘 지냈냐? 너 같은 괴물딱지를 왜 살려 두는 건지 난 도무지 모르겠네.
SCP-010-KO: 아가리 닥치고 빨리 여기로 와.
SCP-010-KO와 아이 1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독서를 시작한다.
아이 2: 친구들이 부르네·····. 아, 친구가 뭔진 알아? 그런 거 하나도 없어가지고 모르려나·····.
SCP-010-KO: 시발 닥치고 좀 오라고!
SCP-1837-KO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이 2는 흥미를 잃고 무리로 돌아간다.
[무관한 대화 생략]
SCP-010-KO: 야.
아이 1이 SCP-1837-KO에게 동화책을 집어 던진다. 동화책은 SCP-1837-KO의 머리를 맞추고 침대 위에 떨어진다.
SCP-010-KO: 그냥 던져 봤어.
SCP-1837-KO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이 1: 웬일이래? 평소에는 관심도 안 주더니.
SCP-010-KO: 그냥 계속 가만히 있는 걸 보니·····뭔가 짜증 나서.
아이 2: 드디어 시월이도 재단에 대한 충성심에 눈을 떴구나!
SCP-010-KO: 입 닥쳐.
인솔 교사: 자, 슬슬 돌아가자! 빨리 나와!
아이 2: 그럼 안녕! 나중에는 좀 더 재밌는 반응 보여 줘! 괴물답게 말이야!
대면 종료
희아는 다시 혼자가 됐다.
희아를 괴물이라 매도하거나 투명 괴물 취급하는 애들이지만, 또래들이랑 같이 있는 건 희아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줬다.
무엇보다 이제 오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었으니까. 엄마가 온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희아는 괴물이야."
희아는 끌어안고 있는 베개를 세게 안으며 절대적인 진리를 중얼거렸다.
희아가 괴물이면 아무도 죽지 않는다.
희아가 저지른 끔찍한 학살과 포식은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두 번 다시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희아는 괴물이었고,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었다.
"·····."
괴물은 귀에 요상한 귀걸이를 달고 있던 여자애가 던졌던 동화책을 집어 들었다.
- 비변칙적 사본, 안전함
여기 와서 처음 읽은 동화책이었다. 행복을 쟁취해 평온을 얻은 여자애가 너무 부러워서 몇 번이나 읽었었다.
괴물은 결코 얻지 못할 행복과 평온을, 부러워했다.
"·····?"
생각 없이 책을 펼친 괴물은 종이 모퉁이가 살짝 접혀 있는 걸 발견했다.
괴물은 이번에도 생각 없이 모퉁이가 접힌 페이지를 펼쳤다.
"·····."
판권 정보를 담은 페이지에, 작은 손글씨가 써져 있었다.
힘내
"·····으으·····."
괴물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았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따스한 말.
"·····울면 안 돼·····."
울면 재단이 수상하게 생각할 거야.
"·····."
괴물은 따스한 말이 써져 있는 페이지를 계속 눈으로 읽었다.
힘내, 힘내, 힘내, 힘내, 힘내·····.
마음 같아서는 평생 간직하고 싶었지만
그러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우걱우걱."
손글씨가 써져 있는 페이지를 뜯어 입안에 쑤셔 넣고, 씹어 삼켰다.
종이에서는 그리 따뜻한 맛이 나지 않았다.
대화 기록-189
장소: SCP-1837-KO 격리실
인원: SCP-1837-KO, [데이터 말소]
[데이터 말소]: 당신이 연희아 양이군요. 실제로 만나 보는 건 처음이네요.
SCP-1837-KO: ·····여우잖아.
[데이터 말소]: 여우라고 부르는 건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싶네요. 저는 [데이터 말소]. 윤리위원회의 전령이죠.
SCP-1837-KO: 윤리위원회라·····.
SCP-1837-KO: 날 이런 지옥 구덩이에 처넣은 게 당신들이라고 들었는데.
[데이터 말소]: 그리고 오늘은 저희의 잘못을 만회하러 온 거죠.
SCP-1837-KO: 만회?
[데이터 말소]: 희아 양, 당신은 스스로를 괴물이라 생각하시나요?
SCP-1837-KO: 응.
[데이터 말소]: 즉답이시네요.
SCP-1837-KO: 그건 이제 고민할 거리도 없거든.
[데이터 말소]: 저희 윤리위원회는 이번에 필요 이상으로 가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인간형 개체들을 찾기 위한 전수조사를 실시했고, 찾아낸 대상 중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살펴보니 더 이상 이런 가혹한 특수 격리 절차를 실시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던데요.
SCP-1837-KO: 요즘은 그냥 찾아오는 사람이 없던데, 그거 보고 착각한 거 아냐?
[데이터 말소]: 물론 추가적인 면담이랑 테스트도 실시할 예정입니다. 어디 보자·····.
[데이터 말소]가 SCP-1837-KO에게 두꺼운 종이 뭉치와 볼펜을 건넨다.
[데이터 말소]: 지금 바로 시작해 주세요.
SCP-1837-KO: ·····겁나게 많은데?
[데이터 말소]: 4시간이면 다 끝납니다.
[생략]
SCP-1837-KO: 으엑·····.
[데이터 말소]: 3시간 49분, 그럭저럭 빠르네요.
SCP-1837-KO: 이제 다 끝난 거지·····?
[데이터 말소]: 아직 절차가 산더미같이 남아 있습니다. 최소 한 달간은 바쁘게 사셔야·····.
SCP-1837-KO: 아니 오늘 할 일은 다 끝났냐고·····.
[데이터 말소]: 그것도 노, 입니다. 좀 얘기를 나눠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SCP-1837-KO: ·····빨리 끝내.
[데이터 말소]: 희아 양은 어머님을 원망하시나요?
SCP-1837-KO: ·····원망한다고 하면 어쩌게?
[데이터 말소]: 저에게 그 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다면 꽁꽁 묶어서 희아 양에게 바쳤겠지만, 아쉽게도 없네요.
SCP-1837-KO: ·····노 코멘트 할래.
[데이터 말소]: 그렇습니까.
SCP-1837-KO: 이제 할 말 없지? 제발 좀 가라·····.
[데이터 말소]: 촉수 꺼낼 때 구호 외치는 거 말입니다만.
SCP-1837-KO: 그게 뭐.
[데이터 말소]: 왠지 마법소녀가 변신할 때 외치는 구호 같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침묵]
[데이터 말소]: 이상하네·····다들 이거 듣고 배꼽 빠지도록 웃었는데·····.
SCP-1837-KO: 더 할 말 있어?
[데이터 말소]: 네. 오늘은 이걸로 끝이네요. 그럼 한 사흘 있다가 다시 볼게요.
SCP-1837-KO: 그 때도 테스트 잔뜩 들고 올거야?
[데이터 말소]: 네. 그것도 몸으로 하는 걸로요.
SCP-1837-KO: 으엑·····.
시험 종료
"마법소녀라·····."
괴물은 침대에 누운 채로 오래전에 봤던 마법소녀 만화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리즈벨도 구호 외쳐서 변신했던 거 같은데·····몽롱한·····현실·····음·····기억 안 나·····."
"·····."
"·····조금 재밌을지도."
그리고 괴물은 잠에 빠져들었다.
급하게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대화 기록-190)4등급 미만 인원 접근 불가
장소: 제202K기지 2층 복도
인원: SCP-1837-KO, SCP-010-KO, 청소년 D계급 한 명, SCP-702-KO, 연홍란 요원
SCP-010-KO: 시발!
SCP-010-KO가 SCP-702-KO를 향해 권총을 발사한다. 대상의 미숙한 사격 실력 때문에 단 한발도 SCP-702-KO를 맞추지 못한다. SCP-702-KO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천천히 SCP-010-KO에게 접근한다.
청소년 1: 저놈 민철이는 그냥 찢어 죽이지 않았어? 왜 뜸 들이고 있는 거지?
SCP-010-KO: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SCP-010-KO가 권총을 바닥에 내던진다.
SCP-010-KO: 시발! 좆같이 쓸모없네!
청소년 1: 그냥 냅다 튀는 게 낫지 않을까? 저놈 우리에게 큰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SCP-010-KO: 지금 기지 전체가 개판 난 거 아냐? 뭐 그래도·····여기 있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SCP-702-KO가 포효를 한 번 내지르더니 SCP-010-KO를 향해 달려간다.
SCP-010-KO: 아니 씹!
SCP-702-KO가 손으로 SCP-010-KO를 찌르려고 하나, 옥색 보호막이 SCP-702-KO의 공격을 막아낸다. SCP-702-KO는 뒤로 물러난다.
SCP-010-KO: 시발·····십 년 감수했네·····.
SCP-702-KO가 포효를 내지르고 청소년 1을 향해 달려간다.
청소년 1: [비명]
청소년 1의 머리가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진다.
SCP-702-KO가 포효를 내지른다.
SCP-010-KO: 시발! 시바알!
SCP-010-KO는 SCP-702-KO를 피해 달리기 시작하나, 조금 전 집어 던진 권총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SCP-010-KO: [비명]
SCP-702-KO가 괴성을 내지르며 SCP-010-KO를 공격한다. 옥색 보호막에 금이 가며 파편이 튄다. SCP-010-KO 몸을 움츠린다.
SCP-1837-KO가 SCP-702-KO의 뒤쪽으로 슬금슬금 접근한다. SCP-702-KO는 인기척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리지만 행동을 취하기 전에 SCP-1837-KO가 SCP-702-KO의 몸통을 야구방망이로 가격한다. SCP-702-KO는 비명을 지르며 멀리 날아간다.
SCP-1837-KO: 나는 포식의 마법소녀 로커스트 하츠 희아.
SCP-1837-KO가 자세를 가다듬는다.
SCP-1837-KO: 힘없는 어린애를 괴롭히는 악한은, 내가 용서하지 않아.
SCP-1837-KO가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SCP-1837-KO: ·····입으로 말하니까 겁나 부끄럽네·····역시 이건 아닌가.
SCP-702-KO가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격당한 곳을 중심으로 몸의 형체가 일부분 뒤틀려 있다.
SCP-1837-KO: 아직 멀쩡하네? 두 번 다시는 못 일어날 줄 알았는데.
SCP-1837-KO가 방망이를 고쳐 잡는다.
SCP-1837-KO: 와 봐.
SCP-702-KO와 SCP-1837-KO가 격돌한다. 둘은 합을 주고받지만, SCP-1837-KO가 완력에서 밀리기 시작한다.
SCP-1837-KO: 젠장·····오랜만에 싸우니까 엄청나게 힘드네.
SCP-1837-KO: ·····꺼낼 수밖에 없나·····.
SCP-1837-KO의 몸이 갈라져 피가 뿜어져 나온다. SCP-702-KO는 양 팔을 X자로 교차해 피가 얼굴에 튀지 않게 막아낸다.
SCP-1837-KO: 끊임없는 허기 아래서, 모든 사상과 긍지는 허위로 추락했다.
갈라진 몸의 틈에서 촉수들이 튀어 나와 SCP-702-KO를 붙잡는다. SCP-702-KO는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SCP-1837-KO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4분 뒤 간신히 촉수를 찢고 탈출한다. SCP-702-KO는 다시 SCP-1837-KO에게 돌진하려고 하나, SCP-1837-KO의 턱이 촉수로 갈라지는 걸 보고 망설이다 도주한다.
SCP-1837-KO: 후우·····.
SCP-1837-KO가 SCP-010-KO를 향해 몸을 돌린다. 촉수는 아직 집어넣지 않았다.
SCP-1837-KO: 괜찮아?
SCP-010-KO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SCP-1837-KO: 다행이네.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난리가 났다고 방송이 울리는 거야. 마침 격리실 문도 열려 버려서 밖으로 나갔는데·····구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
SCP-010-KO: ·····몸에 불붙었어!
SCP-1837-KO: 뜬금없이 무슨 소리·····어?
SCP-1837-KO는 자신의 어깨에 불이 붙은 걸 알아차린다.
SCP-1837-KO: 어·····어?
불길은 순식간에 SCP-1837-KO를 집어삼킨다.
SCP-1837-KO: 뜨·····뜨거워! 아아아아악!
불타고 있는 SCP-1837-KO로부터 연기가 피어오르지만, 연기는 스프링클러의 감지 센서에 닿지 않는다.
SCP-1837-KO: 으아아아악! 살려줘어어어!
SCP-010-KO: 잠깐만!
SCP-010-KO는 근처에 있는 소화기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가려 하나, 소화기에 불이 붙는 걸 보고 멈칫한다.
SCP-010-KO는 두리번거리다가 멀지 않은 거리에서 기적술을 구사하고 있는 연홍란 요원을 발견한다. SCP-1837-KO도 비슷한 타이밍에 연홍란 요원을 발견한다.
SCP-1837-KO: ·····엄·····마.
SCP-1837-KO가 연홍란 요원을 향해 걸어간다.
SCP-1837-KO: 이제·····그만·····너무·····아파·····.
연홍란 요원은 멈추지 않는다.
SCP-1837-KO: 뜨거·····워.
SCP-1837-KO의 촉수들이 불타 잿더미로 무너져 내린다.
얼마 안 가 SCP-1837-KO도 무너져 쓰러진다.
연홍란 요원이 기적술 구사를 멈춘다.
스프링클러가 작동해 불을 끈다.
소각 종료
갱신-████
████년 ██월 █일에 벌어진 제202K기지 대규모 격리 파기 사건 도중, SCP-1837-KO는 연홍란 요원에 의해 무효화됐다.
현재 재단 인사부와 윤리위원회는 해당 무효화에 정당성이 없었다고 판단했고, 연홍란 요원에 대한 수사가 예정되어 있다.
SCP-1837-KO의 불탄 시신은 검시 결과 변칙성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고, 장례식 없이 제202K기지 납골당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갱신-████
SCP-1837-KO가 무효화 된 지 20시간 후, 제202K기지의 격리동 옥상에서의 SCP-1917-JP 발현이 확인되었다. SCP-1917-JP의 외형은 무효화된 SCP-1837-KO와 동일하며, 격리 절차에 따라 SCP-1917-JP의 무력화를 위해 친족인 연홍란 요원이 투입되었다.
대화 기록-완
장소: 제202K기지 옥상
인원: SCP-1917-JP, 연홍란 요원
연홍란 요원: ·····참 잔혹하기도 하지.
SCP-1917-JP: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쁘지 않아?
연홍란 요원: 아니. 전혀.
SCP-1917-JP: 새벽을 더 이상 마주할 수 없게 되어서, 기쁘지 않아?
연홍란 요원: 내 딸은 세상에 큰 위협이 되는 염병할 괴물이었다. 넌 그 괴물의 조악한 모조품일 뿐.
연홍란 요원이 기적술을 이용해 양손에 불을 붙인다.
연홍란 요원: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아.
SCP-1917-JP: 아쉽네. 좀 더 춤추고 싶었는데. 새벽이 결코 오지 않을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는데.
연홍란 요원: ·····변하지, 않는다고·····.
SCP-1917-JP: 멋진 어른으로 자라는 걸 꿈꿨어.
연홍란 요원: [무언]
SCP-1917-JP: 나에게 딱 맞는 진로를 찾아 멋진 직업을 갖고, 소중한 사람이랑 결혼해 예쁜 가정을 꾸리고 싶었어.
SCP-1917-JP: 행복해지고 싶었어.
연홍란 요원: ·····그래서, 원망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SCP-1917-JP: 원망하지 않아. 엄마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노력한 거잖아. 괴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어.
SCP-1917-JP: 그리고 지금은 춤추면서 아침을 기다리는 게, 너무 행복해.
연홍란 요원: ·····내 딸은·····.
연홍란 요원이 손을 들어 올려 SCP-1917-JP를 향해 불을 조준한다.
연홍란 요원: ·····8살 생일날 이후로·····.
SCP-1917-JP: 죽은 거야.
불길이 SCP-1917-JP를 덮친다.
종료
갱신-████
연홍란 요원이 구류 중이던 202K기지 구치소를 탈출했다.
현재 수색 작업 중에 있다.
홍란의 딸은 세 번 세례를 받았다.
첫 번째 세례는 딸이 찢어 죽인 조상신들의 피로
두 번째와 세 번째 세례는 눈부시고 뜨거운 화염으로
"██와 █를 제물로 원하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데, 해볼 생각 있어?"
그리고 이젠
홍란이 세례를 받을 차례였다.
백상아리 씨는 우리에게 집 하나를 통째로 줬다.
"집 주인은 오늘 죽었거든. 뭐라 할 사람은 없으니 부담 가지지 말고 이용해 줘."
·····조금 찝찝한 말을 듣긴 했지만, 개미 메이드 씨를 돌바닥에서 재우는 것보다야 훨 낫겠지.
"·····."
방 하나짜리 작은 집이었지만, 그래도 커다란 침대는 있었다. 내가 알던 침대가 아니라 풀과 솜을 엮어서 만든 요상한 물건이었지만 푹신하긴 했다.
침대는 둘이 누워도 문제없을 정도로 컸다.
"·····좀 놓으라고·····."
"절대 안 놓을 거예요·····흐어어어엉·····."
·····한 명이 겨우 누울 정도로 작았으면 좋았을 건데.
"평생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다가 이제 인생 피려던 찰나에 어머니의 손에 불타 죽다니·····어지간한 비극보다 더 슬퍼요·····."
개미 메이드 씨는 내 인생사를 듣고 난 뒤로 쭉 이 상태다. 흐엑·····.
"숨 막혀 죽겠으니까·····그만 풀어 줘·····."
"싫어요! 절대 안 놓을 거라고요! 후에에에엥·····."
"주인의 이름으로 명해도?"
"네! 델미나 님이 명령해도 안 놓을 거예요!"
슬슬 진짜 숨 막히는데·····.
·····.
·····.
·····.
아무래도 밤을 이 상태로 지새워야 할 것 같다.
·····.
·····.
·····.
그래도, 이렇게 안겨 있으니·····.
·····.
·····.
·····.
조금 좋을지도.
·····.
·····.
·····.
"저, 짐작 가는 게 하나 있어요."
"뭐가."
"희아 님의 어머니가 하시려는 거요. 그리고 내가, 세상의 부조리를 모조리 불태워 버릴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었죠?"
분명 그랬지. 그때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불태운다는 걸 듣자마자, 그게 바로 생각났죠."
"그거?"
"델미나의 불."
그건 또 뭐야?
"표면상으로는 신들의 전쟁의 판도를 바꿀 신병기. 실제로는 생명을 거두고 영혼을 마력으로 전환해 풀무에 바람을 공급하는 도구."
"델미나 님은 재창조의 대장간을 이용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하셨어요."
"죽은 여동생과 단둘이서만, 오직 둘만이 살 수 있는 세계를."
"·····미안. 하나도 못 알아먹겠어."
뭔가 축약이 엄청나게 심한 거 같은데.
"그냥 끔찍한 일이 일어날 뻔했다는 것만 알아 두시면 돼요."
"저 나무도 그 끔찍한 일 때문에 불타버린 거야?"
"네. 델미나 님이 저것도 연료로 써 버리겠다고, 직접 태우셨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렸어야 했는데, 전 너무 겁을 먹은 탓에 델미나 님이 나무를 불태우는 걸 보고만 있었어요."
"델미나 님은 미친 듯이 웃고 춤추면서 불타는 나무를 바라봤어요. 곧 자기 꿈이 현실이 된다는 게 너무나도 기뻤던 걸까요."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린 전·····델미나 님을·····델미나 님을·····푹 찔렀어요."
침묵이 감돈다.
"죽인 거야?"
"아뇨. 신님을 꼴랑 창 한 자루로 죽이는 건 불가능해요."
개미 메이드 씨의 텐션은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다.
"전 델미나 님의 분노로부터 도망쳐 온 거에요. 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로 도망쳤죠.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다가·····죄송해요. 저 너무·····두서 없이 말하고 있죠."
개미 메이드 씨는 여전히 자신의 주인을 섬기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죽이려고 했고, 나중에는 개미 메이드 씨를 죽이려고 한 신을.
"죄송해요·····죄송해요·····."
이건 누구에게 하는 사과일까.
"다 지나간 일인걸."
그렇다. 다 지나간 일이다.
과거가 아직도 우리 둘을 죽이려고 하고 있지만 아무튼 지나간 일이다.
"·····희아 님의 어머님은, 델미나 님의 하얀 불을 다루고 있었어요."
"이상하다 했어. 우리 엄마가 쓰는 불은 생긴 것만 보면 평범한 불이랑 다를 게 없었거든."
"안트라스가 완전히 소각당하지 않은 걸 보면 델미나 님의 계획은 실패한 게 틀림없어요. 만약 희아 님의 어머니와 손을 잡은 거라면·····분명 세계 창조를 다시 시도하시려는 거겠죠."
"·····."
"풀무의 연료로 쓰기 위해 태우는 건 희아 님의 세계가 될지도 몰라요."
·····.
내 세계라.
솔직히 좋은 기억은 별로 없다.
불타 버려도 별로 아쉽지 않을 정도.
"솔직히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는 별다른 애정 없거든."
"네."
"근데, 엄마가 계획 성공하고 신날 꼬라지를 보니, 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말이야."
"·····?"
"더더욱 죽여야 할 이유가 생긴 것 같지 않아?"
"·····제가 델미나 님을, 죽일 수 있을까요·····."
"걔는 지금 죽었는지도 살았는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엄마에게 모든 힘을 넘기고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랬으면·····좋겠네요. 델미나 님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어요·····."
"이만 자자. 내일 가려면 일찍 일어나야지."
"·····네. 안녕히 주무세요."
개미 메이드 씨는 드디어 나를 풀어 주고 똑바로 누웠다. 잠은 편하게 잘 수 있겠구나·····.
"근데 희아 님."
"왜."
"저도 그 여우 분이랑 똑같은 생각 했었거든요."
"뭐가."
"희아 님 뭔가 마법소녀 같다는 거요."
"후엑."
얘 또 왜 이러냐·····.
"맞잖아요. 구호 외치면서 변신하고, 사람 도와주고 다니고. 영락없는 마법소녀 아니에요?
"너 뭐 잘못 먹었냐·····."
"왜요. 괴물보다는 마법소녀가 더 긍정적이고 좋구만. 그거 계속 밀고 가는 거 어때요?"
"·····싫어."
"어째서요?"
"·····무진장 창피하다고."
"포식의 마법소녀 로커스트 하츠 희아·····."
"으아 시끄러!"
그렇게 밤은 저물었다.
내일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일 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롭게.
*
아침이 밝았다.
그 많던 시체는 모조리 사라지고 없었다. 전부 다 매장해 준 걸까.
"이거 받아."
백상아리 씨가 우리에게 작은 보따리 하나를 건넸다.
"이건·····."
"도시락. 학살자들이 식량 저장고는 손대지 않았더라고. 제일 좋은 재료만 선발해서 만들었어."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개미 메이드 씨가 보따리를 받아 허리춤에 매단 가방 안에 넣었다.
"희아 씨."
"응."
"거기로 가는 거야?"
"어디까지 알고 계세요?"
"·····원래 살던 세상을 불태워서, 우리 사미오말리에가 편하게 살 수 있을 새 세상을 만들려는 건 알아."
역시 한 통속이었구나. 재수 없는 개미 메이드 씨도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하는 걸까.
"부디 내 여동생이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도와줘."
"·····겸사겸사 해보지 뭐."
우린 백상아리 씨와 한때 마을이었던 폐허를 뒤로 하고 해변가로 나아갔다.
"덱스, 인퀴나. 아름다운 안트라스의 궁전이여."
개미 메이드 씨가 주문을 외우자 공간이 찢어지며 새빨간 포탈이 열렸다.
"저 포탈들·····모조리 빨간색이야?"
"네. 적어도 전 다른 색의 이동 포탈을 본 적이 없네요."
"헤에·····."
내가 여는 것만 붉은색인 줄 알았는데.
"안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
"위험한 거면 내가 먼저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아?"
"적어도 성채에 살아본 적이 있는 제가 가는 게 조금이나마 좋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
개미 메이드 씨가 먼저 들어간 뒤, 나도 따라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마주한 것은·····.
"지금, 천년왕국의 도래를 선언하리라!"
·····뭔데?
*
니드호그 작전은 우려와 달리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여기는 찌르레기, 상당수의 적성체가 현재 우릴 추적 중이다."
"이대로 도심지에서 평원으로 후퇴하겠다."
양동을 담당한 기동특무부대 클라우지우스의 검은 성공적으로 성채에 머물고 있는 병력들을 유인했다. 악마학과가 개발해 처음으로 전장에 투입된, 대 타르타로스 독립체 지뢰들이 잔뜩 매설된 곳으로.
자신들이 성스러운 불길에 휩싸여 무너져 내리는 걸 보고 추적자들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여긴 비늘두더지. PoI-2510-BE를 복직시켰다. 현재 PoI-2510-BE는 남은 세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중. 이상."
김현석 요원을 필두로 한 고유무기대응부의 특공대는 가짜 베르나르 엥엘베르트를 처단하고 진짜를 복직시켰다. BE는 진정한 지도자를 되찾았으니, 이제 세포들은 면역 작용을 통해 병원균과 싸워 서로 소멸하리라.
"중앙통제실을 점거 완료!"
"예정대로 테루루 씨랑 여기 머물면서 열심히 서포트 할게요!"
도로시 클락을 포함한 브륀힐드의 비탄 선봉대가 어수선한 틈을 타 성채의 중앙통제실을 완전히 점거했고, 미리 잠입해 있던 타격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져."
박시월 및 악마학과 쪽 지원군들이 다수 포진한 제1기동타격대의 목표는 이번 작전의 핵심 중 하나, 델미나의 불 생산 설비를 점거 및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전방에 적 셋 탐지! 전부 다 타르타로스 LD 독립체예요!"
타격대가 숨어 있던 창고 방에서 나오자마자 맞이해 준 건, 이전에는 BE 대원이었을 좀비들이었다.
좀비들의 눈은 주인에게서 하사받은 마력과 비슷한 색인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전신의 갈라진 틈에서도 비슷한 색조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괴성을 지르며 총기를 들어 올리는 그 모습에서, 인간이었던 시절의 지성과 총명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존나 시끄럽네."
시월은 선두에 있던 좀비의 머리에 권총을 연달아 발사했다. 신학부의 축정을 받은 탄환은 좀비의 두개골을 매우 손쉽게 뚫고 들어갔고, 치지직 소리와 함께 남아 있는 뇌를 태웠다.
"·····."
남은 좀비들이 시월에게 들고 있는 소총을 발포했지만, 착용한 귀걸이가 생성한 옥색 보호막에 가로막혀 시월에게 닿지 않았다.
한때는 SCP-010-KO로서 박시월의 운명을 구속했지만, 지금은 온 힘을 다해 시월을 지키는 어머니의 유품.
"타르타로스 복합-리빙 데드 독립체, 지금 바로 사살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배치 변경으로 우나은 요원 대신 투입된 악마학과의 로봇 병기, I-I3LL은 시월의 우려와 달리 상당히 잘 싸웠다. 가끔씩 보이는 비무장 사미오말리에 인원들을 제외하면 상대가 모조리 타르타로스 독립체거나 그 EVE에 오염된 존재들이라 로봇과 상성이 매우 좋았다.
"씹! 간신히 피했네. 저까지 썰어 넘길 작정이신가요?"
"해당 공격 경로가 제일 빠릅니다. 그리고 박시월 요원님이 생성하는 보호막의 내구도는 상당한 수준으로, 제 공격에 스치는 정도로는 타격이 거의 가지 않습니다."
특유의 싸가지 없는 성격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거기서 왼쪽으로 도세요! 잠긴 문은 크랭크를 돌리면 열려요!"
"후방에 열 마리가량의 타르타로스 리빙 데드·····아니 그냥 좀비들과 악마가 접근하고 있어요! 길은 일자니까 타격대를 나눠 주세요 시월 씨!"
"거기 여섯은 진영 짜서 몰려오는 떨거지들 쏴 죽여! 나머지는 중간에 서서 대기! 거기 넌 나랑 같이 이 염병할 크랭크 돌려!"
시월은 도로시의 오퍼레이팅을 바탕으로 한 빠른 판단으로 타격대를 나눴다.
"시발·····좆같은·····크랭크·····!"
성채 내부는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공포 게임에 나올법한 고성처럼 음침하고 불편했다. 군데군데에 옛 BE가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감시카메라 등의 시설물이 보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부속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으윽! 시발!"
시월이 욕설을 중얼거리며 크랭크를 돌릴 때마다 길을 막고 있는 문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바이올렛계 생명 파장 감지! 개미 메이드예요!"
타르타로스 독립체들은 타격대 전원이 축성 무기로 무장하고 있어 그야말로 '녹아내렸지만', 개미 메이드는 당연하게도 타르타로스 독립체가 아니었기에 위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개미 메이드다! 다들 로봇 뒤로 빠져!"
시월은 크랭크를 돌리면서 공격을 방어하고 있는 타격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성소로 향하고 있는 필멸자 발견!"
"사살하라! 델미나 님의 이름으로!"
다가오고 있는 개미 메이드들은 두 명으로 한 명은 제식 소총, 다른 한 명은 양손 장착형 파워 피스트로 무장했다. 둘은 타격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외치며 달려들었다.
"먹어라!"
제식 소총을 든 개미 메이드가 허리춤에서 연막탄으로 보이는 걸 꺼내 핀을 뽑고 던졌다.
"연막탄 확인. 미리 요격하겠습니다. 모두 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I-I3LL이 먼저 사격을 통해 날아오고 있는 연막탄을 요격했고, 명중한 연막탄은 폭발하며 짙은 회색 연기를 흩뿌렸다.
"위험. 연막의 범위가 상당히 넓음."
"돌입!"
"필멸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개미 메이드들은 연막 속에서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성가실 것 같은 로봇을 무시하고 후방의 타격대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악!"
"뭐야! 아아악!"
개미 메이드들은 자신들의 무장으로 요원들을 각자 한 명씩 사살했다. 총성과 주먹에 맞아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큭!"
다행히 타격대의 멤버 중에는 연막 안을 볼 수 있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넌!"
"전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아라는 소총을 들고 있던 메이드의 심장을 뽑아내면서 거짓말을 했다.
"역겨운 배신자!"
방금 요원 한 명을 더 죽인 개미 메이드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아라를 향해 돌렸고
"컥!"
"사살 완료."
I-I3LL에게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더 오고 있어요! 빨리 이동해요!"
"빨리 들어가요! 뒈지기 싫으면 움직여요!"
순식간에 멤버 세 명을 잃은 타격대는 시월의 명령에 따라 문 너머로 들어갔고
"지뢰! 가지고 있는 놈들은 스위치 켜 놓고 던져 놔요!"
대 타르타로스 지뢰를 가지고 있는 요원들은 미리 훈련받은 대로 간격을 두고 지뢰를 투척했다.
"추적하고 있던 좀비랑 악마들이 멈춰 섰어요! 지뢰 효과 엄청나게 좋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도로시의 말에 대충 대답한 시월은 계속해서 달렸다.
"여기만 넘어 가면 바로 고유 무기 생산 공장이에요."
타격대는 육중한 문 앞에 멈춰 섰다.
"잠겼네·····그래도 이놈은 시발놈의 크랭크로 여닫는 건 아니라 다행인가."
박시월 요원은 비교적 최근에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단말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열까요?"
"어."
"안에 타르타로스 반응이 우글거리는데, 정면 돌파 하실 거예요?"
"얼마나 있는데? 구성은?"
"진짜 많아요! 악마는 하나, 나머지는 모조리 좀비예요."
"거기 깡통 새끼·····."
"I-I3LL은 깡통 새끼가 아니라····."
"좀만 덜 싸가지 없었으면 친절하게 본명으로 불러 줬을 거예요. 보호막이나 전개하세요."
"본기에 탑재된 보호막 기능은 타르타로스 독립체들의 기적술을 막아내는 데 특화되어 있죠. 훌륭하신 선택입니다."
"이제 와서 아부해봤자 소용없어요. 닥치고 빨리 옆에 서세요."
시월은 그렇게 말하고 정신을 집중해 옥색 보호막을 넓게 펴서 정면에 전개했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 시월은 귀걸이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고, 이제 시월 혼자 말고 더 많은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다.
"보호막 위에 덧씌우는 형태로 전개하면 되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I-I3LL은 양팔을 앞으로 내밀어 자신의 보호막을 전개해 시월의 옥색 보호막에 씌웠다.
"열어."
"네. 다들 조심하세요!"
도로시는 중앙통제실의 중앙 컴퓨터를 조작해 문을 열었다. 육중하고 거대한 문은 기이익 소리를 내며 양옆으로 천천히 열렸다.
"시발!"
그리고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안에서 황금빛의 마탄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시발 이럴 줄 알았다!"
"제 보호막 용량은 아직 여유롭습니다. 시월 요원님은 괜찮습니까?"
"저도 괜찮으니 빨리 밀고 들어가기나 하세요!"
"분부대로."
보호막을 전개한 둘이 먼저 안으로 돌입했고, 그 뒤를 나머지 요원들이 따랐다.
"젠장·····역시 악명 높은 악마학과 여러분 아니랄까 봐·····바퀴벌레처럼 끈질기사와요."
거대한 방 안에 들어오자 제일 먼저 시월의 눈에 들어온 건, 황금빛 날개를 가진 악마였다.
악마는 날개와 뿔을 제외하면 용모 면에서 인간의 여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천사와도 비슷하게 보였다.
"비프론스. LD 소생 독립체 사역에 특화된 악마."
박시월 요원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들면서 말했다.
"한마디로 좀비 새끼들의 여왕."
"어라, 악마학과 여러분만 있는 게 아니와요? 그 파렴치들의 얼굴은 다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악마는 들고 있는 낫을 고쳐 쥐며 땅으로 내려왔다.
"기동특무부대 '브륜휠드의 비탄'소속 박시월 요원입니다."
"권총을 들이댄 채로 자기소개를 하시는 거와요?"
"네년도 그 흉물들 잔뜩 데리고 주절거리고 있으니, 쌤쌤으로 치시죠."
악마의 뒤쪽에는 수많은 좀비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삶에 대한 모독의 결정체들.
"후후, 아름다운 분이시네요."
악마는 건방지게 웃으면서 시월을 노려봤다.
"즉은 뒤에 살려내서 가지고 노는 재미가 있겠사와요. 걱정하지 마시와요, 상냥하게 다뤄 줄 거니까."
"유감이네요. 전 댁의 시체를 돼지우리에 던져 버리려고 했는데."
"농담 따먹기는 그만하시고, 후방에도 뭔가 잔뜩 오고 있으니까 대비를 하셔야 해요. 시월 씨."
"오면서 미리 짜 놨던 조들은 뒤에서 오는 놈들을 막아! 특히 아라 씨가 개미 메이드들 오면 집중 마킹 좀 해 주세요! 깡통 넌 나랑 같이 저 시발년을 조지고요! 나머지는 앞쪽좀비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지 못하게 견제해!"
"분부대로."
"비프론스의 이름을 걸고, 당신들은 한 명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을 약속하겠사와요!"
악마는 낫을 들어 올려 시월을 가리켰고
"다들, 찢어 죽이사와요!"
좀비들은 괴성을 지르며 주인의 명령에 복종했다.
"전지찬 학과장님이 그러는데, 비프론스만 해치우면 나머지 좀비들은 알아서 행동을 정지할 거래요! 이브 어쩌구 하던데 쓸데없이 복잡하니 얘기는 안 할게요!"
"정말 퍽이나 고맙다!"
시월은 악마에게 권총을 발사하며 소리쳤다.
"소용 없사와요!"
악마는 낫으로 총알들을 모조리 튕겨냈고
"파고들겠습니다."
I-I3LL이 그 틈을 노려 축성된 단검으로 악마의 등을 찔렀다.
"키에에엑! 크아아아악!"
"잠시만요! 피해요!"
악마는 물리적인 저주가 담긴 비명을 내질렀고, 저주에 말려든 요원 몇 명이 휘말렸다.
시월과 I-I3LL은 저주를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요원들은 순식간에 쓰러져 죽었고·····다시 일어났다.
눈에 황금빛 광채와 광기를 품은 채로.
"순간적으로 엄청난 양의 타르타로스 에너지가 감지됐어요! 시월 씨! 괜찮아요?"
"난 괜찮은데·····네 명 더 당했어."
"크아아악! 크아아아아악! 이 역겨운 깡통 새끼가아아아아!"
악마는 방금 전까지 쓰던 아가씨 말투를 버리고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I-I3LL에게 낫을 휘두르고, 마탄을 발사하고, 저주를 내뱉었다.
"되먹지 못한! 추잡한 피조물 주제에! 어딜 나대는 거야!"
"언어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단어 감지."
I-I3LL은 악마의 몸에서 단검을 뽑은 뒤
"무시하겠습니다."
그대로 악마의 안면에다 꽂아 넣었다.
"크아아악! 뜨거워어어어!"
악마는 계속해서 저주를 내뱉으며 I-I3LL을 피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프론스의 타르타로스 배열 안정성이 상당히 흐트러졌어요! 계속 뱉어 대는 저주만 없었어도 우리가 엄청 유리한 상황이었을 건데!"
"저주는 그냥 피하면 그만이야! 문제는 이 시발! 좆같은!"
시월은 한때 같이 싸운 전우였던 좀비의 머리에 총알을 먹이며 소리 질렀다.
"좀비 새끼들이지!"
좀비들은 주인이 위기에 처하자 아까보다 배로 격렬하게 타격대에게 달려들어 주인을 지켰다.
덕분에 악마는 재정비할 시간을 잠깐이나마 벌 수 있었다.
"아아아악! 뜨거워! 역겨운 야훼 추종자 새끼들!"
악마는 자신의 오른쪽 안구에 박힌 단검을 빼내 바닥에 던졌다. 텅 빈 안와에서는 피와 부서진 안구가 흘러나왔고, 연기도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소용없다! 아직 난 건재하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네 야훼의 개들은 물론이고 스올의 겁쟁이 새끼들도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막을 수 없을 거다!"
"그딴 병신 같은 몰골로 그딴 소리하면 별로 설득력이 없거든요!"
시월은 공중에 떠 있는 악마를 향해 권총을 몇 발 발포했지만, 악마에게 닿지 않았다.
"위치 확인. 이 자리에서 도약하면 회피를 염두에 두더라도 바로 찔러 죽일 수 있습·····."
"안녕, 잘 있었어요?"
공중으로 점프해 악마를 사살하려던 I-3LL의 등이, 날카로운 검 두 자루에 의해 꿰뚫렸다.
"기동·····불능·····."
검을 빼내자 I-I3LL은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체다아!"
악마는 쓰러진 I-I3LL을 내려다보고 있는 개미 메이드에게 소리를 질렀다.
"뭐하다가 이제 처 오는 거냐! 처 죽여 버린다!"
"헤에, 드디어 가면을 벗었군요."
체다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 번 더 검을 꽂아 넣어 확인사살을 했다. 내장되어 있던 성수와 악령의 잔해가 뿜어져 나오며 개미 메이드를 덮쳤지만, 델미나의 축성을 받은 몸에겐 둘 다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위에서 할 일이 다 끝났거든요. 그래서 조금 도와주려 왔지요."
"다 끝났다니·····앞으로 2년은 더 모아야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뭔가 조급해졌는지 헬라가 지금 가동시키자고 하더라고요. 사실 풀무의 연료는 가동할 수 있을 정도로 다 모은 지 오래에요. 확실하게 하기 위해 계속 모으고 있었던 거지."
"뭐라 씨부리는 거야!"
시월은 난입한 개미 메이드에게 총을 발포했지만, 체다는 실실 웃으면서 총알을 모조리 피했다.
"다시 말해, 너희 인류는 끝장났다는 거예요. 이제 더 싸울 필요도 없을지도?"
"그러니까 시발 대체·····."
"창밖을 보세요."
"·····."
하얀 불꽃.
창 밖의 세계에는 그것 말고 하나도 없었다.
"시월 씨!"
도로시가 다급한 목소리로 시월에게 소리쳤다.
"사령부와의 연락이 끊겼어요! 그것도 엄청난 비명 소리를 끝으로!"
"·····아니 뭔·····."
"당황하셨네요. 이제 그쪽도 상황을 알아차린 걸까요?"
체다는 검 끝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여기에 한 세상이나 그에 준하는 걸 연료 삼아 새로운 세상을 가동시키는 설비가 있거든요? 그 설비가 연료로 삼은 게 댁과 우리의 세계라는 이 말씀."
"·····?"
"연료는 보통 불을 붙일 때 쓰곤 하죠?"
"·····이런 씹·····!"
시월은 그제서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눈치챘다.
"당신들은, 처음부터 졌던 거예요."
체다는 하늘로 날아올라 쌍검으로 시월을 내려쳤지만, 옥색 보호막에 가로막혔다.
"쳇·····. 귀찮은 게 있네요."
"더 귀찮게 해 드리죠."
"어머?"
다시 검을 내려치려던 체다를, 아라가 주먹을 휘두르며 방해했다.
"개미 메이드? 오르트의 권속을 아직 따르고 있는 메이드가 아직 하나 있다고는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저입니다."
"저기, 당장 배신하고 델미나 님 쪽으로 오는 거 어때요? 네 무구한 세대 친구들은 모조리 전향했는데·····."
"거절합니다."
"왜?"
"당신들이 좆같기 때문입니다."
즉답이었다.
"훌륭한 말솜씨네요! 더러운 배신자만 아니었어도, 나름 델미나 님에게 총애를 받았을지도 모르겠어요."
"배신이라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전 처음부터 당신의 카텟에 소속된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두 메이드가 격돌했다.
"푸후후·····우하하하하!"
악마는 얼굴의 절반이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아래를 내려다보며 폭소했다.
"기존의 세계는 소각되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니, 이는 우리 악마가 본래의 야성을 되찾아 고뇌하고 포식하는 삶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지금, 천년왕국의 도래를 선언하리라!"
악마는 스올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거부했던 구세대의 망령들 중 하나였고
대부분 숨어 지내기 시작한 망령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스올을 상대로 파괴를 저지르고 다녔다.
스올을 거부한 이유는 새것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 단순하지만 명쾌한 동기였다.
사탄의 새로운 계율과 질서는 악마를 구속하지 못했다. 애초에 속하지 않는 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악마의 파괴 행위는 하얀 불을 다루는 외신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절정에 도달했고, 델미나의 불을 이용해 수많은 악마들의 혼을 대장간의 풀무와 화로에 처넣었다.
이제, 악마가 바라던 회귀가 머지 않았다. 세계의 소각이 끝나는 대로 외신은 계약대로 자신을 제물로 바쳐 대장간을 가동 시킬 것이고 두 번 다시는 이런 거지 같은 규율이 악마를 지배하지 않을 세계가
"에잇!"
를 악마가 목도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으억? 크어어억!"
무언가 단단한 거에 얻어맞은 악마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우으으으으·····우에?"
악마가 얻어맞은 곳은 골반. 엉덩이를 중심으로 넓은 부위가 노이즈가 낀 것마냥 지지직거리고 있었다.
"뭐냐·····이거·····."
"개미 메이드 씨에게 얘길 들어보니, 그쪽에선 '신비 파쇄'라 부르는 거더라. 뭔진 잘 모르겠지만·····너 같은 마법 쓰는 괴물딱지들에게는 효과가 참 좋데."
벽에 처박힌 악마에게, 불청객이 천천히 다가왔다.
주인의 위기를 느낀 좀비들이 불청객에게 달려들었지만, 전부 다 불청객의 등 뒤에서 날아 온 창에 몸이 꿰뚫리는 탓에 실패했다. 불청객은 유유히 방망이를 바닥에 끌며 악마에게 다가왔다.
"으힉·····."
악마는 바닥에 끌리는 방망이를 보고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
불청객은 악마 앞에 멈춰 서서, 말없이 악마를 내려다봤다.
"못 움직이겠어·····네놈·····대체 무슨 짓을·····."
"나도 잘 몰라. 근데 알 바는 아니지."
그리고, 야구 방망이를 높이 들어 올렸고
"그만·····."
"잘 가."
황금의 날개를, 완전히 꺾어 버렸다.
*
"시월 씨? 시월 씨?"
시월은, 불청객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쪽에서 타르타로스 반응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이긴 건가요? 시월 씨?"
잊을래도 잊을 수 없을,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마법소녀.
"너·····."
분명히 자기 어머니에게 타 죽었을 건데
"희아·····맞지?"
왜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거지
"·····."
불청객은 천천히 자기의 이름을 부른 시월을 향해 몸을 돌렸고
"·····어?"
마찬가지로, 놀라움에 잠겼다.
*
재수 없는 메이드 씨는 내가 악마를 처 죽이자마자 싸움을 대충 끝내고 도망쳐 버렸다.
상층에서 만나자, 라는 말만 하나 남기고.
재수 없는 개미 메이드 씨랑 싸우고 있던·····음·····침착한 개미 메이드 씨는 상대가 도망친 걸 보고 분통을 터트렸지만
"우와! 아라 씨가 입은 옷 엄청 이뻐요! 누가 디자인 해 준 거예요?"
"에·····음."
개미 메이드 씨의 질문 공세 때문에 더 이상 분통을 터트릴 틈이 없었다.
왜 저렇게 신난 건지 모르겠네. 평소에 질리도록 보고 다녔던 거 아니야?
"·····."
"·····."
그보다 지금 어색해서 미칠 것 같다.
옛날에 꼴사납게 마법소녀 행세하며 구해줬던 애랑 다시 만나게 되다니.
"·····."
"·····."
·····그리고 이 애는 은인이기도 하다.
모두가 날 보고 괴물이라 매도할 때, 유일하게 따스한 응원을 보냈던 착한 아이.
"그래서 시발·····."
·····말버릇은 별로 착한 것 같지 않지만.
"저기 위를 뒤집어 버리면, 모든 걸 다 원상태로 돌릴 수 있다는 거지?"
개미 메이드 씨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 둘에게 유리할 거짓말을 섞어 가며 설명했다.
"·····난 몰라."
"·····하아."
"시월 씨! 시월 씨!"
저 애가 무전기를 만져 시끄러운 목소리를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해 놨다.
다시 돌려놓으면 안되나, 진짜 무진장 시끄러운데·····.
"왜."
"3팀의 마지막 생존자가 방금 죽었어요. 이제 합류할 인력은 없어요."
"·····쳇, 죽을 거면 여기까지 오고 죽을 것이지·····."
그 애는 사이코패스 같은 말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가 착했던 애를 이따구로 만든 거지.
"그건 그렇고 시월 씨·····."
"또 뭐."
"아까부터 정겹게 이야기하는 애는 대체 누구예요?"
"설명했잖아. 그냥 202K기지에서 지낼 적에 인연이 있었던 애라고."
"인연? 인여어언? 그래요! 보통 인연이 아니겠죠! 시월 씨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인연이니! 저같이 아직 몇 년 되지도 않은 인연보다 훨씬 깊고 뜨겁겠죠! 밤마다 침대에 누워·····."
"뭐야? 시월이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거야?"
"아오 시발."
결국 화가 잔뜩 난 건지 무전기의 음성을 꺼 버렸다.
"곧 출발할 거라고 쟤에게 말해."
"다 모인 거야?"
저 애를 비롯한 여기 있는 모두는 개미 메이드 씨의 제안에 동의했다.
꼭대기에 있는 재창조의 대장간을 공격해 무력화시키자고.
덤으로 우리 엄마가 이 모든 일의 흑막이라는 것도 설명했다.
"뭐 이런 개떡 같은 악연이 다 있지·····하아."
그렇게 말하면서 착한 애는 텀블러를 들고 안에 있는 물을 모조리 들이켰다.
"그래도 잘됐네."
"뭐가."
"그날 이후로 개 시발년 면상에 나도 한 방 먹이고 싶었거든."
·····역시 착한 애야.
"자자! 다들 여기로 모여 주세요!"
개미 메이드 씨가 무슨 지하철 장사꾼마냥 손뼉을 치며 사람들을 모았다.
"아까 말했던 대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자살행위니, 포탈을 열어 여러분을 뼈의 회랑으로 바로 전송해 드릴 거예요! 거기서 좀만 가면 대장간의 통제실이 나와요! 제일 빠른 길이죠!"
"그리고 가는 길에는 타르타로스 독립체들과 개미 메이드들로 우글거리겠죠."
"정답이에요 아라 씨!"
"네·····그 말대로예요. 뭔가 엄청 많아요·····근데·····."
"왜 그래?"
"시체 비율이 너무 과할 정도로 커요. 일부러 시체를 거기에 쌓아 둔 것 같은 느낌·····."
"아마 여동생 백상아리 씨가 쓰려고 가져다 놓은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말로 설명해."
"걔도 좀비 만들 줄 알거든. 저기 엄청난 자세로 죽어 있는 악마 씨처럼."
시월은 굳이 처참하게 망가진 악마의 시체를 바라보지 않았다.
"다들 준비되셨나요? 지금 포탈을 열까요?"
전원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언어로 의사를 표했다.
"알겠어요. 모두 절 중심으로 모여 줘요! 덱스, 인퀴나. 델미나 님의 충실한 시종이 요청하오니·····."
개미 메이드 씨가 주문을 외우자,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을 목도할 길을 열어 주소서!"
마법진은 시뻘건 포탈로 변해 우리 모두를 삼켰다.
"·····."
그리고 뼈의 회랑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곳이었다. 거대한 홀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다양한 형태의 하얀 뼈로 장식되어 있었다. 원래 세계에도 이런 곳이 있었던 것 같은데·····거긴 기이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름답군요."
침착한 개미 메이드 씨의 말대로, 아름다웠다.
"저길 넘어가면 연회장이 나올 거예요."
개미 메이드 씨는 손가락으로 거대한 문을 가리켰다.
다양한 뼈로 장식된 문 양쪽에는 거대한 창을 든 개미 메이드 석상 한 쌍이 서 있었다. 이 둘만 특이하게도 뼈로 장식되어 있지 않았다.
"왜 저 둘은 뼈로 장식되지 않은 거지?"
착한 애도 나랑 똑같은 의문을 느낀 것 같았다. 그러게, 진짜 왜지·····.
"뼈들은 안트라스의 번영에 있어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장식된 거예요. 개미 메이드들은 이 희생의 선봉장에 서 있으니 굳이 장식하지 않았다·····라고 델미나 님이 그러셨죠."
"헤에."
뭔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어.
"저거 움직이거나 그러지는 않는 거죠?"
"안심하세요. 그냥 장식이니까요."
개미 메이드 씨는 웃으면서 문을 열었다. 문은 아무런 저항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
음
차라리 석상이 움직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시발·····."
착한 애가 연회장의 꼬라지를 보고 욕설을 내뱉었다.
시체.
시체.
시체.
연회장은 시체로 가득했다.
사람 시체도 있었지만, 상어 인간의 시체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
내 발치에 있던 시체의 얼굴이 익숙했다.
조금 자세히 보니 개미 메이드 씨에게 호박을 건네줬던, 호박 조각 장인 소년이었다. 턱이 하도 처참하게 부서져 있어서 처음에는 못 알아봤다.
"·····."
사람의 시체는 대부분 앞서 죽였던 학살자들의 시체들이었다. 저 무거운 슈트를 입힌 채로 어떻게 옮긴 거지.
"·····악취미군요."
그래, 악취미다.
이게 단순한 장식이었다면 말이지.
"읏!"
갑자기 무대 전등이 켜지더니, 연회장 한가운데의 원형 무대를 비췄다.
무대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동생 백상아리 씨. 얘는 당연히 있을 줄 알았다. 우리 엄마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 같았으니.
악단 상어 인간. 조금 의외였다. 동생 백상아리 씨에게 선동당해서 따라온 걸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
"·····당신이, 왜 거기에?"
엄청나게 당황한 개미 메이드 씨와 다르게, 난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너희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어."
언니 백상아리 씨가 손에 쥔 비수를 우리 쪽으로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백상아리 자매 씨들은 춤을 추는 동안 전혀 무방비하지 않았다. 멋모르고 다가오는 섬의 맹수들은 전부 다 춤을 추면서 휘두르는 비수들에 난도질을 당했다.
"진심으로, 당신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동생 백상아리 씨도 비수를 들어 올렸다.
"·····."
무대 뒤쪽에는 위층으로 이어지는 것 같은 문이 있었다. 저길 지나가려면, 무대를 꼭 지나가야 했다.
"·····아는 사이야?"
"응. 한때는 나름 친하게 지내기도 했어."
"·····시발."
남의 고통에 공감해 아파해 주다니, 역시 착한 애야.
"하지만, 저 소나 아미나."
"그리고 파올라 아미나."
"죽여할 때를 모르지는 않기에."
"당신들과 기꺼이 싸우겠습니다."
·····역시, 진심으로 싸우려고 하는구나.
도시락을 건네줄 때만 해도 언니 쪽은 아침에는 괜찮아 보였는데. 눈속임이었나.
"괜찮아."
나는 방망이를 들어 올리면서 언니 백상아리에게 말을 걸었다.
"몇 년의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는데, 무너질 만해. 그러니까·····. 반드시 죽여 줄게. 얌마!"
"흐엑?"
아직도 멍하니 있는 개미 메이드 씨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있는 힘껏 후려쳤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움직여."
"하·····하지만·····."
"우릴 진심으로 죽이려고 하는데, 그 마음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어?"
"·····정말, 희아 님은·····."
"괴물 그 자체라고?"
"아뇨, 마법소녀 그 자체라고요."
"헤에."
"디오스 쿠루이, 앙툴 나르헤므·····."
개미 메이드 씨는 마도서를 들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도 해야 할 걸 해야지.
"거기! 시월아!"
"·····."
"우리 둘이 저 둘을 해치울게! 너희들이 좀비들 좀 막아 줘!"
"·····왠지 제일 힘든 걸 떠넘기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무조건 다리랑 팔을 노려! 그래야지 다시 들러붙는 시간이 줄어드니까!"
"나도 알아."
악단은 연주를 시작했고
자매도 춤을 추기 시작했으니
"주문 영창 완료! 희아 님! 준비 다 됐어요!"
"응."
무대로 뛰어들 시간이야!
*
"어·····엄청난 양의 EVE 에너지가 감지돼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도로시! 그 쪽은 괜찮아?"
"좀비들이 몰려들고 있긴 한데 아직 허용 범위 내예요·····악! 잠깐!"
"뭔데!"
"개미 메이드들이 대거 난입했어요! 전에 말씀하셨던 쌍검을 든 메이드도·····!"
"그년이 제일 위험해! 걔 지금 뭐 하고 있어!"
"안 그래도 테루루 씨가 적극적으로 마킹하고 있어요! 악! 오지 마!"
"도로시!"
"괜찮아요! 이보다 더한 것들과도 싸워 봤다고요! 에잇! 잠시만요! 상황이 나아지면 오퍼레이팅 계속할게요!"
"·····시발·····."
시월은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의 보호막을 물어뜯으려 하는 좀비를 발로 걷어찼다.
희아가 말한 대로, 좀비들은 하층에서 싸웠던 악마 빙의 좀비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끈질겼다.
악마 좀비들은 뇌가 파괴당하면 그대로 멈췄다. 반면 이놈들은 뇌를 파괴하는 건 별다른 효력이 없었고, 팔다리를 끊어 놔도 부서진 시체들끼리 들러붙어 온전한 형태를 이뤄 다시 일어났다.
"시발! 음악도 쓸데없이 흥겨워서 더 좆같네!"
"시월 님!"
아라가 시월의 뒤에 달라붙으려던 좀비를 주먹으로 해체하며 다가왔다.
"전 괜찮으니 냅둬도 된다고 했잖아요!"
"보호막의 용량이 무한은 아닐 거 아닙니까. 그리고·····."
목을 물어뜯으려던 좀비를, 아라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격퇴했다.
"이제 도와줄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초반 대응에는 완전히 실패했고, 그나마 오래 버틸 수 있는 시월과 아라를 중심으로 한 진영을 구축해 여섯 명이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 명은 죽은 동료들이 상어 인간들의 시체와 융합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소총구를 입에 물고 그대로 쏴 버리기도 했다. 희아가 봤다면 남기지 않으면 부족함도 없다고 조롱할 광경이었다.
아마 이번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도, 평범한 요원들은 모조리 죽어서 함께할 수 없을 것이다.
성채 말고 온 세상이 불타고 있는 지금은 적절한 인적 지원을 받을 수 없을 거고.
그나마 상황이 장기전이 아니라 추가 보급품이 필요하지 않다는 건 다행이었다. 있는 걸 다 쓰기도 전에 죽을 판국이니.
"상어 죽빵 센터에 의해 멸망해, 개체수가 상당히 줄어든 종족."
"응?"
시월은 아라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걸 보고 당황했다.
"어쩌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저렇게 필사적으로 막아내려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희망을 바라는 자들의 꿈을 짓밟는 시발새끼들이라는 뜻인가요?"
"아뇨."
아라와 시월이 동시에 공격해 거대한 좀비를 박살 냈다.
"이 세상에 명확한 정의와 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뿐."
"·····좀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시네요. 개소리긴 하지만."
"감사합니다."
*
"큿!"
비수가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부를 뒤집어 출혈은 막았지만, 아프다.
"처음 봤을 때부터, 괴물이라 생각했어."
동생 백상아리 씨는 비수를 들고 춤을 추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피부를 뒤집어 원하는 옷으로 위장하고, 몸을 갈라 안에서 촉수를 꺼내는 괴물."
"그래. 괴물인 건 맞아."
"아니야."
"·····."
"당신은 괴물이라 불리기에는 고귀한 사람."
"·····설마 엄마에게 나 괴물인 거 부정하기 시작하면·····."
"헬라는 당신에 대해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아."
이번에는 얼굴이 긁혔다. 뒤집으면 된다지만 아픈 건 아픈 거다.
"당신은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돼."
"그러면 춤추는 것 좀 멈춰 줄래?"
"대신 우리랑 함께 하자. 함께 완벽한 세상을 만들자."
"꺼져."
"어째서?"
"왜냐하면 그걸 주도하는 엄마가 진짜 싫거든."
패 죽여 버릴 거야.
"·····힘들 때의 우리를 구해준 건 고마워."
"그리고 우리 엄마가 너희를 학살한 놈들을 보내 나랑 너, 네 언니가 함께 이룬 성과를 박살 내 버렸지."
"·····."
감사에 반응하지 않고, 바로 돌직구를 던졌다.
"진짜 우리 엄마가 보낸 거야?"
"·····난·····난·····반대했는데·····."
"이상을 위해 결국 모른 척했다고?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지상낙원 하나 때문에?"
"·····닥쳐!"
"무고한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많이 죽인 거야? 그것도 트라우마를 극도로 자극하는 수단으로?"
"·····우리에게는, 변혁이 필요 했어!"
"허튼소리."
여동생 백상아리 씨가 많이 흐트러졌다.
기회다.
"가만히 숨어 있으면 결국 모두 다 죽을 뿐이라고·····우웁!"
궤변을 토하는 여동생 백상아리 씨의 머리와 목을, 얼굴의 촉수로 감쌌다.
"그래, 착하지."
"우웁! 우우웁!"
여동생 백상아리 씨는 연거푸 비수로 내 몸을 찔렀지만, 문제없다. 이 정도 고통쯤은 참을 수 있어.
"부담감을 내려놔도 괜찮아. 다 잘될 거야."
"우웁! 우우웁! 우웁!"
여동생 백상아리 씨의 숨결이 점점 희미해졌다. 몸의 버둥거림도 줄어 들었다.
"으아아아아아! 파올라아아아아!"
한창 개미 메이드 씨와 싸우고 있던 언니 쪽이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왔다.
"크헉!"
"빈틈을 보이지 말았어야죠!"
틈을 포착한 개미 메이드 씨는 얼음창으로 언니 백상아리 씨의 등을 뚫어 버렸다.
"우읍·····."
"괜찮아, 괜찮아."
여동생 백상아리 씨의 동공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이제 풀어줘도 괜찮겠지.
"파올라아아아아!"
"으헉?"
출혈이 상당해 보이는데도 백상아리 씨는 비수를 계속 나에게 휘둘렀다. 개미 메이드 씨도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내 여동생을, 내 가족을 잘도! 잘도오오오!"
"·····."
"잘도오오오!"
·····역시 무리였나 보다. 비수를 휘두르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희아 님!"
"괜찮아."
"하지만·····."
"진짜 괜찮데도."
"·····."
결국 언니 백상아리 씨는 움직임을 멈췄고,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내가 붙잡았다.
"·····아."
언니 백상아리 씨의 손에서 비수가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더 이상 쥐고 있을 힘이 없나 보다.
"·····."
둘 모두가 춤을 멈추자, 좀비들도 움직임을 멈추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남은 건 나랑 개미 메이드 씨를 제외하면·····착한 애랑 침착한 개미 메이드 씨밖에 없네. 처참한걸·····.
"·····나."
"응."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
"모두를·····그리고 여동생을 행복하게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 없을 줄 알았어."
"댁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
"단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그것뿐이었을 뿐."
"·····"
"잔혹한 세상이야."
그래.
세상은 이토록 잔혹하다.
비극을 벗어날 수 있을 선택지가 많은 것처럼 보여도, 결국 모든 선택지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것도 최악 중의 최악인 비극으로.
"이 창 좀 소환 해제해 줘."
"네? 뭐 하시려고요?"
"눕히게."
나는 언니 백상아리 씨를 여동생 백상아리 씨 옆에 눕힌 다음, 여동생 백상아리 씨의 자세를 똑바로 한 뒤 눈을 감겨 줬다.
"·····있잖아, 영웅 씨."
"듣고 있어."
"·····미안해."
"·····응."
언니 백상아리 씨는 그 말을 끝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눈을 감은 덕에 내가 감겨줄 필요는 없었다.
"시발·····죽다 살았네·····응?"
착한 애는 평온하게 누워 있는 백상아리 자매를 보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 병신 같은 짓이야 저게?"
"조금만 쉬게 둬."
"·····하아."
시월은 아주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염병할 좀비 새끼들 때문에 살아 남은 사람이 없어. 밑에서 지원을 와 줬으면 좋겠는데·····."
"시월 씨! 시월 씨!"
"아오 시발 깜짝야!"
"여길 공격하고 있던 개미 메이드들이 모조리 물러났어요! 쌍검 든 개미 메이드도 같이요!"
"그럼 좋은 소식 아니야? 왜 그렇게 귀청이 떨어지라 소리를 지르는 건데!"
"뭔 개소리에요! 당연히 그쪽으로 가고 있죠! 저희도 빨리 올라갈 거니까 버텨줘요!"
"희아 님, 바닥이에요!"
"·····!"
·····바닥을 뚫고 나오는 쌍검을 간신히 피했다. 감상에 젖어 있다가 완전히 죽을 뻔했네·····.
"어림없다!"
"·····좀 꺼져!"
재수 없는 개미 메이드 씨는 계속해서 날 검으로 공격했다.
"진짜 찌꺼기 주제에 제법이네요! 이렇게 재밌는 상황을 만들다니!"
주변에 개미 메이드들이 더 나타났다. 아래층을 공격하고 있던 놈들이 다 모인 건가? 엄청 많아!
"하지만 괜찮아요. 비프론스의 의지도, 강령술사 자매의 의지도 내가 이어받았으니까요! 대장간에는 한 발짝도 못 들이게 해 줄게요!"
"입 닥쳐!"
방금 착한 애가 몸으로 막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 거다.
"야! 넌 그 메이드 데리고 빨리 올라가!"
"갑자기 뭔 소리야!"
착한 애가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한다.
"다 죽이고 느긋하게 처 올라가기에는 너무 많잖아!"
"·····그렇긴 한데·····."
여기 버리고 갈 수는 없어.
이 많은 숫자를 상대하겠다고? 십중팔구, 너희가 죽을 건데.
"괜찮으니까 빨리 가 주세요."
침착해 보이는 개미 메이드 씨도 설득에 합류했다.
"전 위층에 계실 당신 어머님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는걸요. 굳이 거기서 싸우고 싶진 않습니다. 여기면 족해요."
"난 그 시발년 면상에 주먹 좀 먹여주고 싶긴 한데·····우선권은 너에게 있으니까."
"·····젠장."
"빨리 가세요! 그리고 이길 때까지 돌아오지 마세요!"
"·····다들, 고마워. 야!"
"희아 님!"
모든 걸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개미 메이드 씨가 달려왔다.
"다 들었지?"
"네."
"그럼 빨리 가자!"
"제가 길을 뚫을게요!"
다가오는 개미 메이드들을 찍어 누르며, 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모두의 희생을·····뒤로 하고.
*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아직 쌩쌩합니다. 평생 싸울 수 있을 정도로요."
"다행이네. 난 아무래도 보호막 잔량이 다 떨어져 가는 것 같거든."
"솔직하셔서 좋군요. 사실 저도 앞으로 오 분이 한계일 것 같습니다. 당장이라도 쓰러져서 죽고 싶습니다."
"안 그러는 이유는?"
"글쎄요. 그냥 이 좆같은 것들에게 한 방 먹이고 싶어서일지도."
"·····뭐, 그 정도면 동기로 충분하지."
"도로시 씨·····그분이 제때 도착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지."
"다들 괜찮으세요? 지금 다 올라왔어요! 여기 엘리베이터 무지막지하게 빠르네요!"
"·····것 봐."
"브륀휠드의 비탄 여러분은 다들 유능하시군요."
"너도 그럭저럭 유능해."
"칭찬 감사합니다."
"·····."
나와 개미 메이드 씨는 말없이 나선 계단을 올랐다.
흰색 불빛을 내뿜는 양초들이 계단을 비추고 있긴 했지만, 희미하기 짝이 없었기에 어두컴컴한 계단을 오르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걷느라 올라가는 속도는 엄청나게 느렸다.
"다들·····무사하셨으면 좋겠네요."
계단 아래쪽 연회장에서는 착한 애와 침착한 개미 메이드 씨 등등이 필사적으로 개미 메이드 군단을 막아내고 있다.
"·····힘들지 않을까."
"역시 그렇겠죠. ·····희아 님! 우리 빨리 올라가요!"
"·····그래."
우리는 계단을 더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고
"헥·····."
"허억·····허억·····."
꼭대기에 올라왔을 즈음에는 둘 다 미친 듯이 헐떡거리고 있었다.
"·····여기가."
"네. 대장간의 통제실이에요."
내가 상상한 대장간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달랐다.
거대한 클래식 공연장 같은 돔과 벽
악기와 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기계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수정.
수정에서는 불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게 바로 타들어 가고 있는 우리 세계일까.
"뭔가·····활기가 넘치네."
"델미나 님, 더 나아가 성목이 탄생하기 전부터 있던 곳이에요."
"·····."
"저흰 그걸 더 잘 쓸 수 있을 높은 곳으로 옮겨 놓기만 했고요."
"·····."
"저기 계시네요."
개미 메이드 씨는 수정 앞에 서 있는 엄마를 가리켰다.
"하."
저게 엄마라고?
해변에서 만날 때까지만 해도 기억 속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건만
지금은
"영락없는, 괴물이네."
"필요 없는 걸 덜어냈을 뿐이다."
"·····푸하하하!"
"·····."
"푸하하하! 아하하하하하!"
비웃음이, 멈추지가 않았다.
"미안, 미안해. 방금 한 말도 정말 엄마다워서 말이야."
엄마는 각종 핑계를 대며 많은 걸 덜어내곤 했다. 공공의 선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혹은 그냥 귀찮아서.
엄마가 날 덜어낸 이유는 세 가지 중 뭘까? 전부 다?
"델미나 님은·····살아 계시나요?"
개미 메이드 씨가 엄마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델미나·····그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운명의 가시덤불을 쫓아 이 잿더미 성채로 찾아왔을 때, 입구에서부터 끝없이 말을 걸었죠."
"너는 실패자, 하지만 실패를 뒤집을 힘이 있다. 자, 꼭대기로 올라오너라."
"수많은 잿가루 괴물들과 미쳐버린 개미들을 불태우면서 올라와 보니"
"그 말대로 실패를 뒤집을 힘이 있더군요."
"·····저기요?"
엄마가 갑자기 목소리를 내리깔면서 미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음. 그래야지. 이래야 엄마다워.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위험한 광인. 그게 바로 엄마다.
"여신의 유해. 하지만 아직 살아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을 겁니다. 자길 먹어 치우고 세례를 받으랍니다."
"제 딸은 세 번 세례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세례는 딸이 찢어 죽인 조상신들의 피로"
"두 번째와 세 번째 세례는 눈부시고 뜨거운 화염으로"
"그리고 이젠"
"제가 세례를 받을 차례였습니다·····!"
"앗! 희아 씨!"
"쳇!"
신나게 떠드는 동안 해치우려고 했는데, 엄마는 잽싸게 화염을 둘러 내 공격을 막아냈다.
뜨겁다. 붉은 불길보다 더 뜨거운 것 같다. 살짝 닿았을 뿐인데 살이 타들어 가는 게 느껴진다.
"난,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이딴 일을 벌였는지, 엄마의 사연은 뭔지, 그런 거 하나도 관심 없거든."
알 바냐. 그을리고 타들어 간 피부는 뒤집으면 된다. 공격이 막히면 먹힐 때까지 계속 두들기면 된다.
"그냥 엄마를 죽도록 패고 싶을 뿐·····."
될 때까지 되게 하라. 낭비하지 않으면 부족함도 없다. 이게 바로 괴물 마법소녀의 사고방식.
"·····아니, 죽여버릴 거야."
·····불과 이틀 전만 해도 시체나 다름없던 나에게 의지를 불어 넣어 준 건 엄마일까, 아님 개미 메이드 씨일까.
"죽여버릴 거야!"
땅을 박차고, 다시 엄마에게 달려든다.
오래전, 내가 처음으로 죽었을 때처럼 몸에 불이 붙었다. 뜨겁다, 괴롭다. 그래도 멈추지 않아.
"베니스 투르스모, 엘다 아르모도·····."
지금은 믿을 수 있는 동료가 있으니까!
"·····아스트라페!"
차가운 물이 위에서 떨어져 몸에 붙은 불을 꺼버렸다.
"서포트 고마워!"
"별말씀을요!"
개미 메이드 씨도 바위로 만들어진 창을 들고 엄마를 향해 달려갔다.
"델미나 님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요."
"이젠 델미나 님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슬프지 않아요."
"지금 제가 믿고 따르는 건 오직 희아님 뿐."
하얀 불꽃을 다루는 엄마는, 우리 둘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상대하기 역부족이었다. 공격할 틈은 하나도 주지 않는 주제에 자긴 마구 공격을 퍼부었다.
개미 메이드 씨에게 불을 순식간에 꺼버릴 수 있는 마법이 없었다면 진작에 타 죽었을지도.
"너는 나와 하나 되어 살아간다. 이는 속세의 불씨로 맺은 인연이니, 틀림없는 진리다."
"하나라도 없으면 불완전하기에, 다시 함께할 날을 꿈꿨다."
"내 손으로 태워 죽이고, 한발 늦어 구하지 못한 너를."
"내 딸아이야, 내 동생아, 내 하나뿐인 혈육아."
"곧 올바른 질서가 통용되는 행복한 세상이 오리라."
"이는 혈육을 두 번이나 불태워 죽인 어미의 의지가 아니며, 혈육을 되살리고자 수많은 만행을 벌였던 언니의 의지가 아니노라."
"운명의 의지로다."
"무슨 수를 써도 절대 거스를 수 없을, 가시나무로 감싼 수레바퀴."
엄마는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다. 당최 알아먹을 수 없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해변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꽤 멀쩡하게 말했던 거 같은데, 왜?
"앗! 희아 님!"
개미 메이드 씨가 경악한 표정으로 내 뒤쪽을 바라봤다.
"뒤에 수정! 조심해요!"
"으아흑?"
개미 메이드 씨가 소리치지 않았다면 수정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에 타 죽을 뻔했다. 엄마 손보다 훨씬 격렬해!
"으흑!"
"특이한 행동을 보이는 어미에게 매혹당해, 뒤쪽의 진정한 위협에는 아무런 눈길을 주지 못했구나."
뒤쪽에서 엄청난 열기가 느껴진다. 여기에 있으면 분명히·····타 죽을 건데·····.
"대장간의 예열은 끝났다. 델미나의 불은 알맞은 화력이 되어 줄 것이다."
·····피하는 걸, 어떻게 해야·····.
"그리고 이제, 새로운 질서가 나의 희생으로 인해 세워질 것이다. 헬라는 희생을 위해 태어난 신이니, 신세대를 혐오한 악마와 구세대를 그리워한 시종, 그리고 그저 살아가고 싶었던 상어들의 소원은 이 고귀한 희생을 통해 이루어 지리라."
불길이 덮쳐온다. 피할 수가 없·····.
"그리고 아아, 사랑하는 여동생이여·····."
"내가 없어도 부디 너만큼은 행복하기를!"
"희아 님!"
·····불길이, 닿지 않았어?
"으아아아아아아아!"
·····개미 메이드 씨가, 돔 같은 보호막으로 사방에서 몰아치는 불길을 막고 있다.
"똑같은 보호막을 희아 님에게 걸어 드릴게요!"
"넌 어쩌고!"
"저도 죽을 생각은 없어요! 딱 5초밖에 유지 못 해 드리니까 빨리! 쿠헉!"
개미 메이드 씨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좋아."
엄마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니, 엄마라고 부르는 게 맞는 걸까. 아무래도 개미 메이드 씨가 믿는 신과 뒤섞여서 뭔가 존나 이상한 게 되어 버린 거 같은데.
"·····."
상관없다.
"·····흐읍!"
돔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악! 뜨거워!"
날 둘러싼 보호막은 5초는커녕 1초도 버티지 못했다. 열기가 그대로 나에게 전해졌고, 뜨거운 불길이 날 집어삼켜·····.
"아스트라페!"
·····바로 새로운 보호막을 걸어줬다. 엄마 쪽에서 날아온 화염구들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쿠억! 아아아악!"
개미 메이드 씨가 피를 토하면서 주저앉았다. 돔도 아까보다 희미해졌다.
·····무리하고 있는 거구나.
나를, 위해서.
"·····으아아아아아!"
불길의 열기를 뚫고,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화염 속을 뚫고 엄마를 향해 날아갔다.
"이·····개시발년아아아아아아!"
엄마가 아까처럼 화염 방벽으로 날 튕겨 내려고 하지만, 망설이지 않고 야구 방망이로 방벽을 내려친다.
"오늘 반드시이이이이이이!"
흐트러졌다! 화염이 흐트러졌다!
"처 죽여 버린다아아아아!"
그대로
저 징그러운 얼굴을
날려 버리겠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쾅.
"·····."
명중했다.
머리에, 정통으로.
"아·····아아·····아아아아·····."
엄마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무지갯빛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좋아! 효과가 있어!
불길도 희미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이야! 지금이라고!
"으아아아아아!"
이건 빼앗긴 청춘의 몫!
"으아아아아아!"
이건 빼앗긴 미식의 몫!
"으아아아아아!"
이건 빼앗긴 우정의 몫!
"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그리고, 이건·····!
"죽어버려 이 개시발년아아아아아!"
모든 행복을 네년에게 빼앗긴 내 몫이다아아아아아아!
"끊임없는 허기 아래서, 모든 사상과 긍지는 허위로 추락했다!"
한때 엄마였던 뒤틀린 형체를, 몸을 가르고 나온 촉수들이 덮쳤다.
촉수는 아무런 문제 없이 엄마를 감쌌다. 천천히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
어느새 얼굴은 인간이었던 시절로 돌아와 있었다. 이것도 '신비 파쇄'를 열심히 한 덕분인가.
"·····으으·····."
"·····."
엄마의 입이 조금씩 떨리면서 움직였다.
말을 하려는 걸까.
"·····역겨운·····괴물 년·····."
"·····."
내가 왜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예상 하나도 안 했는지 알겠지
"그래."
그래봐야 의미가 없으니까.
"이래야 우리 엄마 답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 엄마는 살려 달라고 빌지도 않았다. 모녀간의 극적인 용서와 관계 회복도 없었다.
엄마는 증오로 가득한 눈으로 날 올려다봤고, 나도 비슷한 눈빛으로 엄마를 내려다봤다.
"·····."
엄마를 완전히 삼키고 몸을 닫을 때까지, 우린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후우."
촉수들이 먹은 걸 어떻게 소화 시키는지는 잘 모른다. 어쨌든 무진장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네.
"희아 님·····."
"오·····."
개미 메이드 씨가 터벅터벅 힘없는 발걸음으로 걸어왔다. 머리에는 검댕이 잔뜩 묻은 데다 옷도 반쯤 불타버려서 완전 거지꼴이다.
·····조금만 잘 보면 보일 것 같은데·····.
"살아 있었구나."
"제가 무조건 살아 남는다고 했잖아요. 후우·····."
"거기 앉을 거야?"
"재투성이인 게 좀 걸리긴 하지만, 앉을 만한 곳이 죄다 이런 꼴이니 어쩔 수 없죠. 희아 님도 앉으세요."
"그래."
나는 개미 메이드 씨 바로 옆에 앉았다.
"·····."
조용하다.
"·····희아 님은·····."
"왜."
"이제 뭐 하실 거예요? 인생 목표였던 어머니 살해도 깔끔하게 이루셨잖아요?"
"글쎄."
"·····하긴, 여기 성채 말고 몽땅 불타고 있는 세상에서 할 게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어요."
"·····."
진짜 모르겠네.
뭐 해야 되지.
"·····."
그래도·····공허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복수를 끝내고 삶에 허무함을 느끼는 클리셰·····그딴 건 모조리 지랄인 게 분명하다. 지금 뛸 듯이 기뻐서 미치겠는걸.
그래도·····.
"·····."
뭘 해야 될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밑에 사람들 무사한지 보고 오실래요? 아님·····."
"응? 어엇?"
개미 메이드 씨가
"·····이러고, 있을래요?"
갑자기 날 껴안았다.
"·····."
"·····델미나 님, 용서해 주세요."
"·····."
"·····결국은 당신을, 완전히 배신해 버렸어요."
"·····."
"·····하지만 전 희아 님이 너무 좋은걸요."
"·····."
나도 개미 메이드 씨를 껴안았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몸이, 참 따뜻하다.
·····따뜻해서, 좋아.
·····.
아직 우리 만난 지 사흘밖에 안 지났지.
이제 더 이상 위험한 건 없으니까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겠지.
·····둘만이서 천천히, 우정을 쌓아 올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하!"
그리고 이 온기는
"아예 둘이서 방을 잡지 그러세요?"
계단을 올라온 불청객 때문에 끊어졌다.
"응? 시발!"
불청객이 우리에게 뭔갈 내던졌다.
"·····."
머리다.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어 누구 머리인지는 모르겠다. 착한 애 머리일까? 그러기에는 좀 큰데·····상어 인간 머리일지도.
"·····체다."
개미 메이드 씨가 불청객의 이름을 불렀다.
"·····."
재수 없는 개미 메이드 씨도 그리 양호해 보이지는 않았다.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 건 기본이요, 자기 검이 배 한복판에 박혀 있는 데다 왼팔은 완전히 잘려 나갔고, 옷을 대충 찢어서 만든 것 같은 붕대가 목을 압박하고 있었다.
붕대에서는 피가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잘려 나갈 뻔했던 걸 억지로 붙인 걸까?
"헬라·····죽었네요. 델미나 님의 힘을 받은 주제에·····이런·····잡것들에게·····."
"·····우헉! 쿨럭! 뭐, 됐어. 내가 제물이 되면 그만이니까요."
"다시 안트라스를·····평화롭게·····모두를·····."
"저기, 부적을 주지 않을래요? 한 손바닥만 한·····커헉·····둥근·····아무튼·····헬라가 가지고 있던 건데·····."
"·····어."
그런 거 없는데.
"·····줘. 그게 있어야·····안트라스를·····."
"·····구할 수·····."
"·····있는데."
"·····난 사라져도, 괜찮으니까·····."
"·····다시는 안트라스를 못 보게 되어도 좋으니까·····."
"·····제발요·····."
털썩.
"·····."
재수 없는 개미 메이드 씨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뭐, 아쉽게 된 거지. 부적인가 뭔가 하는 건 아마 우리가 싸우다가 엄마가 태워 먹지·····"
"여기 있어요."
"·····에."
개미 메이드 씨가 가방에서 흰색 돌덩이를 꺼냈다.
"사실 그때 찌르고 바로 도망친 게 아니에요. 부적도 같이 훔쳤죠."
"·····."
"이게 델미나 님의 수중에 있는 이상, 그분의 소원은 언제든지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
"·····."
"왜 델미나 님은 부적이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겼던 걸까요?"
"·····."
"혹시 제가 다시 돌아올 걸 알고 계셨던 걸까요?"
"·····."
"우리 도시락 먹을래요?"
"도시락?"
"네. 소나 씨가 주셨던 거요."
"아·····."
"자, 아 해요."
개미 메이드 씨가 보따리를 풀고 안에 있던 야채튀김을 건넸다.
먹음직스러워 보여. 근데·····.
"·····먹으면 토할 것 같은데."
"트라우마의 원흉이었던 어머님을 직접 척살하셨으니, 이제 괜찮지 않을까요?"
"안 먹어."
"에이, 그러지 말고요."
"너 나 토하는 동안 저거 써 버리려고 저러지."
손가락으로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
"·····."
침묵이 감돈다.
"·····."
"·····."
"·····제물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사라져요.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세계에 존재할 수 없어요."
"·····밑에 다른 사람들이 살아 있지 않을까?"
"있다고 해도, 순순히 제물이 되어 줄까요?"
"·····그것도 그런데·····. 아니, 너 말고도 고귀한 희생정신을 지닌 사람이 더 있을 수도 있잖아?"
"이건 제 손으로 끝내야 해요."
"·····."
"델미나 님은 크나큰 죄를 저지르고 돌아가셨어요. 이제 죄를 참회하실 수 없죠. 참회는 마지막으로 남은 시종이자 델미나 님에게 죄를 지었던 저의 몫, 저 머랭의 희생으로 이루어져야 해요."
"뭔 개소리야!"
대체 뭐냐고!
"그딴 게 어디 있는데!"
화가 난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제서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개미 메이드 씨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나보고,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 했었지?"
"·····."
"그래. 이제 행복해지고 싶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
"예전처럼 시체 같은 삶으로 돌아가기 싫어! 스스로를 계속 괴물이라 자기 합리화하며 억누르며 살기 싫어!"
"·····희아 님."
"행복해지고 싶어! 행복해지고 싶어!"
"·····."
"그러니까·····."
머리가, 희미해진다.
먼 옛날에, 재단에 격리되어 있을 때처럼.
"·····난 괴물이 아니야."
"·····."
"난, 마법소녀."
"·····."
"행복해지고 싶은 마법소녀, 로커스트 하츠 희아."
"·····."
"마법소녀의 행복은 머랭이 제물로 바쳐지면 성립될 수 없어."
"·····아아, 그런가요."
개미 메이드 씨가, 창을 만들어 내서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대신 제물이 되어 주겠어."
·····.
우리는 동시에 똑같은 말을 했다.
"그게 본심이야?"
"그래요."
행복해지는 길은, 내가 대신 희생하는 것.
·····정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자애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어쩌면, 이게.
"운명일지도 모르겠네."
"운명일지도 모르죠."
"·····."
"·····아."
그게 머랭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
만신창이가 됐다. 나도, 머랭도.
서로 진심으로 죽이려고 했으니,당연한가.
"·····하아·····."
거칠게 숨을 내쉬며, 머랭이 대충 재수 없는 개미 메이드 씨 옆으로 던져 놨던 돌을 집어 들었다.
"·····근데 뭘 어떻게 해야 되지."
생각해 보니 이거 쓰는 방법 하나도 모른다. 그냥 하늘 높이 들고 내가 제물이 된다고 말하면 되는 건가?
"으음·····."
젠장, 상상도 못 한 곳에서 막혔다. 이거 때문에 앞으로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는 존재를 패 죽였는데.
"그것이 운명이랍니다."
"·····!"
목소리가 난 쪽으로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극도로 정교한 수레바퀴. 아무도 수레바퀴의 움직임을 거스를 수 없어요."
·····여자애다.
물론 여기서 나타난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평범한 여자애는 아니다.
평범한 여자애가 발목에 가시나무를 감아 놓고 피를 질질 흘리고 다닐 리는 없잖아.
"넌 또 뭔데·····."
"으음·····."
여자애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참, 대장간의 사용법이 궁금하지 않아요?"
"네 이름부터 알려 주지 않는 이상 들을 생각 없어."
"저 커다란 수정에 팔을 대고 원하는 세상을 짠 다음, 부적을 들고 자기 이름을 세 번 중얼거리면 끝이에요. 아, 세상을 짜실 때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원만 반영하셔야 해요! 뭐 전쟁이 없다던가, 아무도 굶지 않는다던가 그런 소원은 안 돼요! 완벽하게 무시되거든요!"
"무시한다고?"
"앞선 제물은 이렇게 쉬운 걸 왜 끝까지 망설였던 걸까요."
"·····야."
"사실 그것도 운명이라서 그래요! 홍란 씨랑 델미나 씨 둘 다 결국은 처참하게 실패할 운명이었죠! 아아, 저 둘에게 행복은 절대 없으리!"
"·····."
틀렸다. 이 여자애, 자기 할 말만 열심히 한다.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해.
"대장간을 쓰기 전에, 한 가지만 기억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운명은 거스를 수 없어요."
"아무리 환상적인 유토피아를 만들더라도 분쟁과 살인은 피할 수 없는 법."
"델미나의 불이 그랬죠. 몇천 번에 걸친 칼파 속에서 항상 등장해 사람들을 죽이고 새로운 세상의 기틀을 마련했어요!"
"사실 칼파에서 달라지는 게 거의 없긴 해요. 희아 씨가 방금 죽인 개미 메이드분, 이름이 머랭이었죠?"
"그분은 항상 주인을 배신하는 길을 걸어왔던 거 알고 계세요? 주인이랑 배신 동기는 조금씩 달라졌어도, 배신을 한다라는 운명 자체는 거스르지 않았죠."
"그래요 희아 씨. 운명이에요. 운명은 절대 거스를 수 없어요."
"머랭 씨가 배신이라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처럼, 세상은 운명을 거스를 수 없어요."
"서로를 죽이고 울게 만들고 슬프게 만들고 죽이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절망시키고 죽이고 후회하게 만들고 증오하고 죽이고 무디게 만들고 배신하고 죽이고 모멸하고 멸시하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죽이고·····."
"먹어 치우고."
"·····저리 꺼져."
못 알아먹을 말만 하는 여자애를 뒤로 하고, 수정을 향해 걸어갔다.
"그래도, 당신은·····."
"·····."
"이번 칼파에서 엄청난 성과를 보여 드렸네요. 그동안은 맨날 어머님에게 불타 죽는 걸로 칼파에서 퇴장하셨는데."
"·····."
"운명, 아이르가흐는 안정적인 종말을 위해 힘써 주신 로커스트 하츠 희아 양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
"·····."
"·····."
"·····."
됐어, 꺼져.
해야 되는 일을 할 거야.
"·····후우."
먼저 수정에 손을 대고 원하는 세상을 상상하라고 했지.
원하는 세상이라·····일차적인 건 당연히 머랭이 행복한 세상이고·····.
·····그거 말고는·····.
"·····."
없다.
"·····자·····."
이제 돌을 들고 이름을 외칠 시간이다.
"·····희아. 희아. 희아."
"·····."
·····.
불길.
하얀 불길이 내 몸에 붙었다.
뜨겁진 않다. 머랭의 품만큼 따뜻하다.
나는, 이렇게 사라지는 걸까.
내 소원이 반영된 세상인데 정작 내가 있을 곳은 없다니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없지"
"이거 만든 게 어디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희대의 사이코인 게, 분명해.
"·····."
불길이 내 몸을 좀먹는다. 이제 보이는 것도 거의 없다.
고통도 없다. 슬픔도 없다.
"·····."
저 멀리, 나를 보고 있는 여자애가 보인다. 표정까진 안 보인다. 비웃고 있는 걸까, 아님 진심으로 희생에 감탄을 표하고 있는 걸까.
"·····."
머랭의 시체도 눈에 들어왔다. 다음 칼파·····시발 말버릇이 옮았네. 암튼 다음 세상에서는 머랭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까.
"머랭 씨가 배신이라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처럼·····."
"괜찮아."
나는 마법소녀니까
머랭을 구하기로 마음먹은 마법소녀니까
"·····운명을 거스를 수 있게 도와줄게."
그리고 난 불타고, 불타고 불타고
"머랭 씨."
"흐얏!"
바위에 기대앉아 쉬고 있던 머랭은 자길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어디 아프신가요?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아뇨! 델미나 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좀 피곤해서요."
"하긴, 어제도 남은 잔당들을 열심히 처형하셨으니까요."
델미나는 그렇게 말하고 머랭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델미나 님·····?"
"왜 굳이 여기까지 나와서 주무시고 계신 건지 알겠어요. 시원한 바람이 참 기분 좋네요. 나도 모르게 잠들 것 같아·····."
"아하하·····."
"그나저나 잘 끝나서 다행이네요."
"·····."
주신 델미나 알 미라지의 변심 및 회개 덕분에, 성목 살해파는 끝내 패배를 맞이했다.
여동생의 죽음, 불에 타들어 가는 세상·····. 이는 주신의 의지를 꺾어 놓기에 충분했고, 델미나는 성목을 태우는 불꽃을 자신의 손으로 꺼 버렸다.
더 이상 무의미하게 생명이 희생당하게 두지 않겠다. 델미나 알 미라지는 모든 신 앞에서 그렇게 선언했고, 이는 유의미한 생명의 희생은 망설임 없이 이행하겠다는, 참으로 굳건한 의지를 드러내는 연설이었다.
"·····너무 많은 신님들이 죽었어요."
"필요한 희생이었어요."
방금 전까지도 신을 죽이고 온 델미나가 말했다.
"성목을 죽이고 그 권능을 모두의 것으로 하자니, 불경하기 짝이 없는 망상이었죠. 그런 망상에 찬동했다는 게 너무 부끄러워요."
"·····용납 못 할 발상이긴 했어요."
"아마 여동생이 살해당했다고 정신이 나가버린 거겠죠. 머랭이 절 설득하지 않았으면 그 광기를 끝까지 이어 나갈 뻔했네요. 정말 고마워요."
"·····에헤헤."
설득은 너무 거창한 표현이었다. 성목에 불을 붙이려고 하는 델미나 님의 다리에 매달려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펑펑 운 게 다였는데, 이걸 과연 설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그렇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던 걸까. 평소의 머랭이었으면 아무것도 못 하고 델미나 님이 불을 붙이는 걸 보고만 있었을 건데.
"·····용기를 내라고 했었어·····."
"방금 뭐라 하셨나요?"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누군가 머랭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했었다.
아주 머나먼, 머랭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말이다.
"그런가요·····. 죄송하지만 내일에도 시간 되시나요?"
"델미나 님을 위해서라면 없는 시간도 쥐어짤 수 있죠!"
"다행이네요. 내일은 동생을 죽이는 데 기여한 성목 수호파 신이랑 권속들을 숙청할 생각이거든요? 거의 다 후방에 숨어 있던 겁쟁이들이라, 숫자가 상당히 많아요."
"·····."
일반적으로 전쟁에 패배한 신의 권속들은 잘 죽이지 않는다.
권속들은 어디까지나 신의 도구. 도구에게 책임을 묻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델미나 님은 권속들도 하나의 제대로 된 인격체로 대우했다. 사랑과 책임감을 권속들에게 하사했다.
그래, 권속들은 신에 못지않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니 신처럼 죽을 수 있게 하자. 대가 없는 사랑은 없으니까.
이게 바로 델미나 님의 자애였다.
"이걸로 동생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죠."
"그렇죠! 델미나 님은 정말 친절하세요!"
머랭은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공포를 억지로 묻어버리면서 웃었다.
"나중에는 미루고 미루던 이웃 세계에 대한 침략을 개시해야 될지도 모르겠네요. 분노의 화살을 외부로 돌리는 건 매우 좋은 방법이죠."
"·····."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머랭 씨도 어두워지기 전에 들어오세요."
"아, 네! 나중에 다시 봬요!"
델미나 님은 떠나갔다.
"·····."
푸른 하늘에 눈부신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밤이 찾아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델미나 님의 망념이 결실을 맺었다면, 하늘은 성목의 시꺼먼 재로 뒤덮였을 것이다. 해도, 구름도 보이지 않는 잔혹한 하늘을 상상하니 머랭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나도 가야지."
더 이상 자고 싶지 않았다. 임시 신전으로 돌아가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기에 잠은 이제 낭비에 불과했다.
"낭비하지 않으면 부족함도 없는 법이죠·····응?"
머랭의 입에서 낯선 격언이 튀어나왔다.
어디서 읽어 본 적도 없다. 신님들이 자주 쓰는 말도 아니었다.
어쩌다가 알게 된 건지, 머랭은 모른다.
"·····누가 쓰던 말이었지."
사용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모르겠네·····."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기분이 들었지만
"·····."
머랭은 그게 뭔지 몰랐다.
"·····."
떠올릴 수도 없었다.
세계마법소녀가 그걸 바라지 않았으니까.
"좋아!"
머랭은 양쪽 볼을 찰싹 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차차! 깜박할 뻔했네!"
하마터면 마도서를 여기에 놓고 갈 뻔했다. 잊은 물건을 찾으러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건 그야말로 낭비·····.
"·····."
머랭은 기대를 살짝 품고 마도서를 펼쳐서 페이지를 넘겼다.
"역시 없네·····하아."
마도서에는 마법 촉매로 쓰이는 무의미한 흑색 문자들만 잔뜩 적혀 있었다. 머랭이 잊어버린 걸 알려주는 비밀스런 쪽지 따윈 없었다.
"중요한 거라면 언젠가 생각나겠죠."
머랭은 그렇게 말하고 책을 덮었다.
"·····."
그건 그렇고 정말 좋은 장소였다.
하늘과 바다가 아름답게 맞닿는 수평선, 그리고 위풍당당한 성목 안트라스가 그대로 보이는 경치. 기분 좋을 정도로 시원한 바닷바람. 여차하면 안에 들어가서 쉴 수 있는 산장까지.
가능하다면 여기서 평생을 살고 싶었다. 어제 머랭이 처형한 신의 영지였으니, 델미나 님에게 잘 말씀드리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머랭은 갑자기 밀려오는 그리움을 묻어두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머랭이 걷는 길은 끊임없는 포식 위에 세워졌다.
살기 위해 먹고 죽기 위해 먹히는, 이 세계를 이루는 비극적 순환의 띠.
이 비극 끝에 평화가 올 일이 있는 걸까
머랭의 마음속에서는 의심이 조금씩 자라났고
·····.
"·····어?"
누군가 머랭을 불렀다.
"·····."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델미나 님은 이미 오래전에 가 버렸다.
"누구세요?"
·····.
대답은 없다.
"·····잘못 들었나."
바람의 장난이겠지. 머랭은 그렇게 생각하고 갈 길을 가려 했지만·····.
·····머랭·····.
"·····."
이번에는 분명히 들렸다.
"누구세요? 어디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
대답은 없다.
"드러낼 모습이라는 게 있다면, 당장 나와 주세요. 저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어요!"
·····.
대답은 없다.
"·····아니야."
아주 머나먼, 머랭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저편에서.
누군가 머랭을 부르려고 필사적으로, 움직일 리 없는 입과 성대를 움직이려 노력하고 있었다.
아니, '누군가'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맞을까.
"·····기다릴게요!"
머랭은 머나먼 곳에 있는 존재에게 닫아 달라고 소망하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대답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게요!"
·····.
·····.
·····.
·····.
·····.
·····.
·····.
·····.
·····.
"·····."
·····.
"·····네."
한줄기 눈물이, 머랭의 눈에서 흘러나왔다.
"저도, ██해요."
떠올리려고 해도 떠올릴 수 없는
당신.
"·····."
부드러운 바람이 머랭의 눈물을 털어 냈다.
"·····."
잠시 가만히 서서 바람을 느끼던 머랭은, 몸을 돌려 바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完)
세상은 그렇게 오늘도 포식을 반복한다
약한 자도 강한 자도 공평하게 먹히는 아름다운 세상
그렇다고 절망하지 말아 줘
머랭을 ██하는 █가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