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1989. 10. 4.
추적 대상: POI-0813.
본명 고토 난스이. 일본계. 잘 알려진 가명으로는 허남수가 있다. 본래의 성을 호처럼 자칭해서 "후등"으로도 흔히 불렸다. 일제 조사국 중역 출신으로, 1979년까지 중정 10국의 막후 실세로 군림하다 해체 직전 잠적하여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몇 가지 특이 동향 때문에 SCP-1813-KO가 녀석의 예비 일련번호로 배정되어 있지만 정식 지정된 것은 아니다.
녀석에겐 받아야 할 빚이 있다.
나의 목표는 녀석을 SCP-1813-KO로 정식 등재하고, 재단 탐색자산을 동원해서 그 개자식을 잡아내는 것이다.
갈 길은 멀다. 오늘을 1일차로 삼도록 하자.
"여어, 모략가."
구석진 다방에서 김권구가 멀끔한 신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신사가 눈살을 찌뿌렸다.
"부대명으로 부르지 마. 그래서, 원하는 정보는 있었나?"
"전혀. 이게 전부인 건 아니겠지?"
김권구의 질문에 모략가의 잠입요원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모르는 건 정부도 모른다. 중정 10국에 대해선 폐국 후 남은 자료를 전부 우리가 인수했고, 나머지는 폐국 전에 이미 파기됐거나 도주자들이 가져갔지. 애당초 후등의 신상 정보는 10국에서도 확보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고."
"지랄하지 말라고 그래. 여든이 다 된 노인이 대한민국에서 신분증도 없이 멀쩡히 도주생활을 하고 있다고? 후등이 무슨 판자촌에라도 살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그럴 수가 없어. 분명 10국을 통해 위장 신원을 만들었을 거다."
"그건 합리적인 추론이다만… 없는 건 없는 거다."
요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계속할 셈이냐?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이제 없는데 말이야."
"이러다 보면 뭔가 나오지 않겠어. 바쁜데 와줘서 고마웠다."
"별 말씀을. 보고 난 자료는 철저히 폐기할 것. 최종 열람자는 너로 되어있으니 괜히 트러블에 말려들지 마라."
"명심하지."
요원을 배웅하고 다시 자리에 앉은 김권구는 남겨진 자료를 슬쩍 들춰보았다. 고토 난스이. 그들이 아는 한 대한민국 현대 초상정치사에서 가장 중대한 거물이지만, 그에 대해 그들이 아는 것은 극히 적었다.
재단과 정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금부터는 지루한 탐문 수사가 될 것이다.
김권구는 다방 구석에서 수상하리만치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벽난로에 서류를 던져버렸다. 서류는 순식간에 형체를 잃고 재가 되어, 벽난로 뒤쪽의 흡입구를 타고 사라졌다. 제1052K 관측소를 나서는 김권구의 왼손은 코트 주머니 안의 작은 일지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일자: 1990. 12. 22.
접촉 대상: 곽미애.
전 10국 특수과장. 10국 내 요직 중의 요직인 특수과장을 해먹다가 제일 먼저 재단에 협력자로 붙어서 알뜰살뜰 얻어갈 것 다 얻어가고 자유의 몸이 된 웃기는 여자다. 재단 요원까지 해가면서 연명하고 있는 내가 할 말도 아니지만. 여하간 아직 줄이 닿는 10국 간부 중에는 제일 유력한 정보원이다.
바뀐 입장을 적절히 들이밀어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끌어내도록 하자.
"오랜만입니다, 과장님."
"우리 김 요원님, 당신 얼굴은 언제 봐도 흙빛이네."
"누구 때문에 온 건진 아실 겁니다."
"대꾸도 쉽게 안 해주는군. 옛 정은 없는 건가?"
곽미애는 응접실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한숨을 쉬었다.
"중정 시절에는 당신은 특수과장, 나는 정보과 일개 말단이었는데 정은 무슨 정입니까."
"정보과 보고가 다 특수과로 왔는데 뭘. 나랑 독대도 종종 했잖은가."
슬슬 상하관계를 잡으려는 수작… 김권구는 턱을 괴며 자세를 앞으로 숙여앉았다.
"9년만에 보는 마당에 쓸데없는 신변잡기와 옛날이야기에 쏟을 시간은 없습니다."
"…그래, 결국 후등을 잡아보겠다 이 얘기를 하러 온 거지?"
"빨리 끝내는 편이 서로에게 좋겠지요."
"퇴물 된 지 오래인 뒷방 늙은이를 이제 와서 잡겠다고… 재단도 영 할 일이 없나 보군."
"잡담이 길어집니다?"
김권구가 홀스트에서 권총을 뽑아 응접실 탁자에 턱 올려두었다.
"진심인가?"
"진심이지요."
"이제 와서… 후등에게 그만큼 가치가 있다고 재단은 판단하고 있냐는 말이야."
"당신의 판단은 묻지 않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정보 뿐이죠."
한동안 방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미세하게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서로에게 들릴 만큼. 김권구가 권총에 대고 검지손가락을 툭툭 두드리기 시작하자, 곽미애는 눈살을 가늘게 찡그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나 당신이나, 후등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지. 조사국 출신이라는 것, 안영훈과 함께 왔다는 것, 우리 중 누구보다 먼저 10국에 관여해왔다는 것… 그리고 우리 중 누구보다 먼저 10국에서 사라졌다는 것. 그정도 아니겠어."
"1979년 8월 9일."
"진짜 눈치도 징하게 빠른 노인네라니까."
"과장급 중에선 당신이 가장 빨랐잖습니까."
"나 잡으러 온 거 아니잖아, 후등에 집중해."
"나는 집중하고 있습니다. 당신이나 계속 하세요."
"…하. …이런 데 휘말리기 싫어서 은퇴했는데."
곽미애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가짜 신분. 당신도 예상했겠지만 가져갔어."
"그 신분, 알고 있습니까?"
"안영훈이 직접 발급했다는 것만 알아."
김권구가 왼손으로 턱을 주무르며 생각에 빠지자, 곽미애가 첨언했다.
"안영훈부터 잡아서 거슬러올라갈 생각이면 관둬."
"충고입니까?"
"후등은 원래부터 가진 게 많은 놈이지. 살아있다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숨은 장군 일족으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을 터. 그렇지만 안영훈 그자는 웃기는 놈이거든… 좆도 가진 것도 없는 놈이 어디선가 자꾸 운세가 트여서 살 길을 찾는단 말이야. 후등도 후등이지만 안영훈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뭐, '꼬마' 때문인가보죠."
"그런 거 믿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당신."
"이 바닥에서 내가 믿고 안 믿고가 중요합니까?"
"맞는 말이군."
곽미애가 킬킬대며 웃었다. 김권구는 여전히 권총을 탁자에 올려놓은 채 물었다.
"후등이 숨은 장군… 그건 이미 예상하던 바입니다. 더 구체적인 것 없습니까?"
"알면 뭐 찾을 수 있을까봐?"
"찾는 건 내가 찾습니다."
"…연줄 끊긴 장군. 한 놈 알고 있는데."
김권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 사람, 누굽니까."
"알려는 주겠다만 진작에 말 안 꺼낸 이유가 있어. 내쳐진 지도 오래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이북에 있거든."
일자: 1993. 4. 28.
접촉 대상: 카에스틴 브롬, 정보국 특무부대원.
광역정보국 정보원을 거쳐 델타-9에서 복무하고 있는 정보국의 '엘리트' 양반이다. 10국 출신 딱지가 붙어 다니는 나와는 출신성분부터 다르지. 솔직하게 말해서 띠꺼운 상대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다시 말해서 내 커리어를 걸고 덤비기엔 너무 잘 나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촉이 영 좋지 않다.
그러나 북한 관련해서 내 권한으로는 사령부 정보를 열람할 수가 없다. 이 추적 작전은 큰 틀에선 재단 임무지만 세부적으론 오직 나의 독단이므로, 괜히 정규 채널을 건드렸다가 찍히는 꼴은 피해야 한다… 다행히 서로 건너건너 아는 사이인 최두익 박사와 함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정보원인 만큼, 여기서 반드시 정보를 얻어야만 한다.
"최 박사, 괜찮은 거 맞아요?"
카에스틴 브롬이 걱정어린 표정으로 묻자 최두익은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 배를 움켜쥐고 일어났다.
"내… 내 금방 다녀오리다. 둘이 이야기 하고 있어요."
"천천히 다녀 오시죠."
최두익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잠시 적막 속에서 서로 잔을 기울이던 두 사람은 슬며시 운을 떼기 시작했다.
"올라시 국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김 요원님."
"이사관님께요? 한국사령부 시절 얘기를 종종 하시는 모양입니다?"
"아뇨, 고토를 쫓는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김권구는 커피 잔을 꽉 움켜쥐었다. 이미 모두 간파당하고 있었다. 묘하게 느껴지던 불길한 직감은 빗나가지 않고 맞아들어가고야 말았다. 말 없는 김권구에게 딱히 눈길도 쏘아붙이지 않은 채 카에스틴 브롬은 별 일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가야지요. 최 박사님 잔에 탄 게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모르겠지만, 긴 시간은 아니지 않습니까?"
"…함정이었습니까?"
"아뇨, 무려 한국사령부 내부보안부 수사관을 끼고 만나자는 약속을 잡는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진 않습니다. 설마 그 수사관을 설사약으로 쫓아내고 독대 자리를 만들 줄은 상상 못하긴 했습니다만."
"…"
최두익이 내부보안부. 김권구는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 채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으며 마른 침을 삼켰다.
"당연히, 발설하시면 안됩니다?"
"…그러죠."
카에스틴 브롬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셨다. 그는 김권구가 무엇까지 알고 있는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정보국"의 사람이었다. 김권구가 닿지 못하는 그 자리의 사람. 위압감과 굴욕감은 압도적인 위치의 차이를 인식하자 오히려 사그라들었다. 차분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김권구에게 카에스틴이 귀띔했다.
"고토를 쫓고 싶은 건 정보국 본부도 매한가지입니다."
"다 망해 없어진 중정10국과 이상사례조사국의 인물일 뿐인데도 말입니까?"
"조사국, 이자메아가 동아시아 전체에 남긴 그림자는 여전히 짙습니다. 그들은 현역 조직입니다."
"숨은 장군…"
"고토는 한반도에서 가장 활동적이었던 숨은 장군입니다. 그리고… 세대교체기를 바라보고 있죠."
한 단어를 조심스레 입에 올리며 카에스틴 브롬은 비로소 표정을 바꾸었다.
"이자메아의 숨은 장군은 시대착오적인 종자들입니다. 사상 구조 자체가 어이없는 만큼 무엇을 할지 알 수가 없어요. 우스갯소리도 안 될 헛짓거리도 하지만, 중정 10국같은 교활한 계략을 획책하기도 합니다. 고토는 전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작자죠."
"제가 놈을 쫓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고토를 쫓을 단서를 직접 찾고 계셨지요? 북한에서 실마리를 찾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숨겨도 소용 없다는 듯한 카에스틴 브롬의 추궁에 김권구는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후등과 안영훈 모두 직접적인 단서는 일체 없는 것, 일전에 월북한 모 숨은 장군을 통해 후등의 위장 신분을 알아내려 한 것, 이를 위해 브롬으로부터 북한 내 재단 정보원을 어떻게든 소개받고자 한 것…
사정을 모두 들은 카에스틴 브롬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혼자 힘으로 최선을 다하셨군요. 제가 요원님 입장이었다면 이 자리까지는 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야 내부보안부와 델타-9을 동시에 속이려 드는 바보짓은… 안 하셨겠죠."
"하하하! 뭘 부끄러워하십니까? 덤비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필요한 건 조금 더 공교한 수법과 정교한 훈련일 뿐이죠. 요원님이 제 입장에서 훈련받았다면 저 정도는 쉽게 속이고 원하는 걸 취하셨을 겁니다."
김권구는 요식적인 칭찬 들으려 온 게 아니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커피만 마셨다.
그러자 카에스틴 브롬은 드디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북에서 쿠데타 시도가 있었습니다."
"…뭣!"
"소련 유학파들이죠. GRU-P와 끈끈한 북한 P국에서도 여럿 가담했습니다. 한동안 색출과 숙청이 이어지겠죠. P국은 사실상 공중분해 될겁니다."
"그렇다면 이상교화국이 사실상 김정일의 친위부대로 자리를 확고히 하겠군요."
"당연합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죠. 권력 싸움이 한 번 결착을 지었으니 낙오자들의 생존 투쟁이 뒤이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력을 갈아타는 자, 도주하는 자, 반격을 준비하는 자… 정보국에선 이들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할 나위 없는 고급 정보다. 김권구는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정보원과 접선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 요원님이 찾고 있는 숨은 장군도 있습니다. '하야시'. 북에선 임한배라는 이름으로 P국 중역을 맡고 있죠. 구소련과는 이렇다 할 연결점도 없으면서 P국 내 분위기에 휩쓸려 쿠데타 지지파에 가담한 모양입니다만… 뭐. 우리같은 사람이 일하려면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도 필요한 법이죠."
"역시 광역정보국에서도 하야시를 주시하고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카에스틴 브롬이 커피로 목을 축였다.
"하야시는 이북 출신 조선인으로 이자메아에 부역했다가, 종전 후 어영부영 합류한 남한의 숨은 장군 커뮤니티에서 입지를 잃고 80년대에 월북했습니다. 같은 이자메아 출신의 리철환은 진작 교화국으로 옮겨서 잘 나가는데 자신은 단물 다 빠진 P국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쿠데타 미수의 결과 스스로의 명줄부터 재촉하게 되었고요."
"현재 동향은 어떻다고 합니까?"
"탈북 브로커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아무래도 도주 쪽으로 가닥을 잡은 모양이죠. 그래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카에스틴 브롬의 표정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우리 측에서 위장 브로커를 투입할 겁니다."
"정보국이 직접?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통상 탈북 루트를 쓰도록 둘 수는 없습니다. 중국 공안이나 안기부에 넘겨주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죠."
그건 맞는 말이었다. 김권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카에스틴 브롬은 오늘 그를 만나러 온 본 목적을 슬쩍 꺼내어 내밀었다.
"이미 입북할 팀원들은 갖춰졌습니다. 다만, 현지 협력자와 기존 브로커들을 영입한 팀이라서 그들의 역할은 북중 국경을 빠져나오는 것에서 끝납니다. 이후 공안을 피해 한국사령부로 놈을 데려오려면 우리측 베테랑이 필요합니다."
"…오늘 저와 만나기로 하신 게 그러면?"
"네. 제가 김 요원님을 스카우트하러 온 겁니다."
일자: 1998. 7. 28.
접촉 대상: "하야시".
본명 임한배. 창씨명 하야시 나가하라. 실패라는 단어의 구현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인생을 살아온 남자다. 빛나는 20대를 1944년 이자메아 입대로 시작해, 해방 후 청산기에 재단에 흡수되지도 못하고, 재수없게 남한에 발이 묶여 이북의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했다. 이자메아 잔당조직에 몸을 담는 듯 했으나 겉돌다가 끝내 월북, 그러나 거기서도 쭉정이 취급 받다가 얼떨결에 쿠데타를 거들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고, 일단 숨은 장군으로 활동했던 과거는 분명하다. 그 밖에도 이 자의 신상에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가 꽤 있을 것이라고… 일단 정보국은 기대하고 있다. 자, 나도 상부의 눈에 띌 기회가 왔다. 여기서 후등의 단서와 정보국의 호감을 동시에 얻어내도록 하자.
제08K기지에서 비밀 땅굴을 통해 연결된 제8235K관측소. 그곳의 지하 심문실은 축축하고 어두컴컴했다. 빛이라곤 김권구가 한 모금 들이쉴 때마다 밝게 타오르는 담뱃불 하나 뿐이었다. 임한배가 늙은 몸뚱이를 덜컥이며 기침을 내뱉자, 김권구는 일부러 임한배 쪽으로 담배 연기를 길게 뿜고선 흘겨보며 물었다.
"왜, 못 견디겠나?"
"아… 아뇨. 어느 안전이라고 불평하겠습니까요."
"불평하고 싶다는 얘기잖아. 하여간… 일흔도 넘긴 노인네가 뭘 그리 비굴하게 구는지."
"…"
임한배는 대꾸 없이 수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럴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좋든 싫든 여기서 사흘은 더 뻐겨야 된다. 그동안은 내 자유심문 시간이라는 허락도 받았지. 입 다물고 있으면 당신이나 나나 손해가 막심해."
"…아는 게 있어야 말할 게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아는 숨은 장군 신원들만 줄줄 불면 된다니까."
"아시다시피… 제가 늙어서 기억이 잘…"
"다 늙은 영감탱이가 살아보겠다고 추잡하게 쿠데타에 탈북에 별 지랄을 다 하고 있으면서 이런 건 형편 좋게 까먹으시고, 편하게 사십니다 그려? 당신 생사는 이제 그놈들이 아니라 우리가 쥐고 있다니까, 아직도 모르겠나?"
"으… 저는 이럴 거라곤 못 들었단 말입니다. 어떻게 브로커라고 만난 게…"
"그래서 후회되나? 그냥 북에서 자리에 만족하고 여생을 흐릿하게 보낼 걸 그랬어? 아니면 쿠데타 사범으로 얌전히 처형될 걸 그랬지?"
"그렇다곤 안 했지요…"
"그러면 대답해!"
김권구가 책상을 쾅 내려치자 임한배는 두 손을 반사적으로 들어올리며 한껏 움츠러들었다.
"대, 대답하지요. 대답하고 말고요."
"알고 있는 숨은 장군은 몇 명이나 되지?"
"직접, 직접 접촉하던 사이는 다, 다섯이나 될까요."
"이름은?"
"미, 미, 미나미. 베린그. 코우. 데린쟈. 고토."
"고토 이 지랄하고 자빠졌네. 밖에서 대고 다니는 위장신분 말이야!"
"히익… 모릅니다! 모릅니다…"
임한배의 노구는 처연할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김권구는 더 화낼 기운도 없다는 듯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10여 분 동안의 불편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임한배 쪽이었다.
"…원하시는 게 결국, 그런 거지요?"
"말을 하다 마는 게 버릇인가?"
"그, 지금 남한에서 당장 찾을 수 있는 숨은 장군을 원하시는 게 아닙니까."
김권구는 대답하지 않고 왼손 검지로 테이블을 통통 퉁기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제가 정말,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제가 그쪽 고향을 아는 양반이 딱 한 명 있습죠."
"고향?"
"코우 장군, 창씨명이라서 그렇지 이게 홍씨입니다. 홍씨."
"그래서?"
되묻는 말에 임한배는 왜 모르는지 의아하다는 듯이 답했다.
"이 바닥에 이름난 홍씨가 더 있습니까? 율도국 왕가란 말입니다."
일자: 1998. 8. 7.
접촉 대상: 홍억 박사, 제19K구역 이사관.
하야시의 증언을 토대로 정보국을 설득한 결과, 재단 소속의 율도 홍씨 인물과 만날 수 있었다. 율도… 사실 나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섬이다. 듣자하니 섬이라기보단 이어도에 연결된 다른 차원의 공간이라는 모양인데, 홍씨 왕가가 대대로 다스리다가 이자메아 점령기를 거쳐 지금은 율도 전체가 재단 제19K구역이라고 한다.
존재도 처음 들은 시설의 이사관을 대뜸 면담하겠다는 요청이 이렇게 흔쾌하게 수락될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이상하기도 하다. 구역 이사관쯤 되는 인물을 내가 전혀 모르는 게 말이 되나? 19K구역에서만 커리어를 쌓으면서 외부에 전혀 나서지 않은 걸까? 이 시점에서 속단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이 사람이 '코우 장군'과 후등을 찾을 실마리를 갖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앉으시죠. 면담 요청에 대한 이야기는 미리 들었습니다."
김권구에게 소파를 권하는 홍억 박사는 김권구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젊은 청년이었다. 서른? 아니, 그보다도 아래일 것이다. 물론 재단에 젊은 천재나 항노화 체질은 드물지 않았으므로 심각하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김권구가 당황하고 있는 점은 홍억이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 명백하게 경험이 적은 보통의 청년으로 보였다는 것이었다.
"…"
"압니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많겠죠. 저도 많거든요."
"구역 이사관으로 재직하신 건 얼마나 되셨습니까?"
"역시 그것부터 물어보시는군요."
홍억은 컵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4년째입니다. 재단 근무도 올해로 4년째고요."
"첫 임지가 여기 이사관이었던 건가요?"
"사실 처음엔 제777K기지 연구원이었습니다. 부임하자마자 제대로 업무 배치도 받기 전에 재발령됐죠."
"어째서?"
"어차피 오늘 저를 보겠다 하신 이유가 이유이니만큼… 사정을 차근차근 설명드리는 게 낫겠습니다. 저로서도 가끔은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니까요."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홍억의 표정은 몹시 허무해보였다.
"LoI-919K, 율도는 긴 세월 동안 여러 사람들이 모여든 땅입니다. 심한 풍랑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이차원의 섬이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만 단위의 인구가 정착해서 원주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죠. 그리고 후대에 한반도에서 도래한 집단이 율도국이라는 왕국을 세워 지배 계급으로 군림했고, 그 왕족이 홍씨였습니다."
"홍씨의 율도국…이라니, 그건…"
"우스운 이야기죠? 저희 족보대로라면 초대 임금이 그 홍길동이란 모양입니다."
"여러모로 놀랍긴 하군요. 실제 인물이 존재하는 건 알았습니다만."
김권구의 반응이 이해된다는 듯 홍억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뭐, 홍길동전이 검열되지 않은 것도 워낙 허무맹랑한 이야기라서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그렇게 홍씨가 400여년간 율도를 통치하는 동안 왕통에서 벗어난 일부 방계가 율도를 떠나 조선에 귀환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런 방계의 후손이고… 홍태구 또한 그랬습니다. 저의 종증조부 되시는 분으로, 김 요원님이 찾고 계신 '코우 장군'입니다."
"방계라."
"사실 내륙으로 돌아와 남양 홍씨로 다시 정착한 저희로선 율도의 기억도 왕가의 방계라는 인식도 희미해진지 오래였다 합니다마는… 족보와 함께 율도로 가는 방법 정도만 알음알음 전수되어오던 것에, 종증조부는 무척 집착했다고 합니다. 이자메아에 입대하고, 길을 안내해서 율도를 점령하고, 율도국의 4대 왕을 폐위시킨 것도 다 자신이 율도의 왕이 되겠다는 야망 때문이었다고…"
"잠시만요, 4대 왕? 방금 홍씨 왕조는 400년 동안 유지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권구가 질문으로 이야기를 끊었다.
"그렇죠. 율도 왕가는 수명을 늘리는 비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모양입니다. 종증조부가 원했던 것도 이것이겠죠."
"당신이나 코우는 그 비술을 몰랐습니까?"
"국왕의 적통 후계자에게만 전수되어 방계에겐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정식 전수자가 사라져 공식적으로는 실전되었습니다만… 단 한 명이 알고 있죠. 종증조부가 몰래 훔쳤다고 하니까요."
홍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넌더리를 쳤다.
"이자메아가 율도국을 아예 없애고 율도를 일제에 편입해버린 건 종증조부의 생각 밖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혼자 이자메아를 다시 몰아내서 왕위를 얻을 방법은 없었으니 장생의 비술만 훔쳐내서 복고의 기회를 노린 거겠죠. 그렇지만 이자메아가 패망한 뒤에는 이렇게 재단이 율도를 확보했으니 헛물만 켠 셈입니다. 어쩌면 지금도 제 목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농담이라기엔 많이 부담스러운 이야기였지만 홍억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대화를 잠시 곱씹던 김권구는 손가락을 허공에 휘휘 저어가며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홍억은 그가 질문할 때까지 기다렸다. 김권구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이사관님은 그러면, 이 구역에… 자발적으로 오신 게 아닙니까?"
"잘 이해하셨군요. 저는 율도나 제 핏줄에 대해 아무 관심도 흥미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이상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여기 발령된 것도 아니고, 다른 근무지에서 경력을 쌓다가 온 것도 아니고, 재단 연구원으로 입사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구역 이사관으로 임명되었다는 게 멀쩡한 인사는 아니죠."
홍억은 남은 물을 벌컥 들이켰다.
"물론 제가 어려서부터 장막 너머를 알고 있던 게 홍씨였기 때문이란 점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냥 순수하게 변칙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죠. 하지만 재단은 저보단… 저의 핏줄을 필요로 했습니다."
창 밖을 슬쩍 손으로 가리키며 홍억이 물었다.
"처음에 율도의 원주민들을 이야기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저 밖의 민가는 그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모두 살면서 율도를 벗어나본 적도 없고 앞으로 벗어날 일도 없는, 지금은 재단의 장막 안에서 살아가는 고용인들이죠. 저들 대부분은 아무 변칙성도 혈통적 특성도 없고 단지 율도에서 태어났을 뿐인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불쌍해하길 바라십니까?"
"아뇨, 저부터도 별 감정이 없는 걸요. 그저 재단이 제19K구역을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 저들이 갖는 중요성을 이해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율도는 지상에서 멀리 떨어진데다 입구가 한정되어 있어 제대로 된 외부 보급을 기대하기 어렵죠. 율도인들은 자급자족에 준하는 농경 활동을 유지함으로써 제19K구역을 부양하고, 많은 수가 시설 잡부로 고용되어 구역 내 각종 노동 현장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순종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재단에게 큰 이익이 되는 상황이란 겁니다."
"그래서, 홍씨 왕가를 내세워야 했다."
김권구가 내놓은 답에 홍억은 쓸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살아있는 상징물입니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일천한 일개 박사후연구원이 갑자기 거대 구역의 이사관을 맡는다고 크게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습니까? 모든 실무는 이사관보들이 처리하고 저는 결재만 남길 뿐, 그리고 종종 마을을 돌면서 민심을 다독일 뿐… 그게 전부입니다. 요원님이 존대할 만한 상대조차 안되는, 보이는 그대로의 애송이입니다."
불편한 침묵이 응접실을 맴돌았다. 그러나 곧 홍억이 화제를 돌리면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래서 보통 저는 율도국이든 이자메아든 홍씨 과거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기 이사관으로 부임하면서 강제로 허울 뿐인 율도 홍씨의 종손이 되었으니… 가문 쪽으로 오는 문서들도 제가 받아보게 되어 있거든요. 그 중에 요원님이 필요로 하는 것도 하나 있더란 말입니다."
"그건?"
"종증조부가 버리고 떠난 은신처로 발송된 겁니다. …직접 보시는 게 좋겠군요. 여기, 수신자의 이름은 제가 아는 한 종증조부가 쓴 것으로 알려져있는 마지막 가명입니다."
홍억이 내미는 봉투를 받아든 김권구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손으로 그 내용물을 꺼내어 읽었다.
"이홍재 귀하. …부친께서 별세하시어 삼가 알려드립니다. 1991년 9월 1일. 허종회 배상."
일자: 1998. 9. 1.
접촉 대상: 허종회. 아마도, 후등의 아들이라고 생각된다.
이 친구를 찾아서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부친 일은 유감이라고 인사할 건가? '고토 장군'을 내놓으라 닦달할 건가? 그렇지만 이제 와서 죽었나보다 지레짐작하고 멈추기엔 나아온 길이 너무 멀다…
이 일지를 적기 시작한 지 어느새 8년 11개월.
일단 만나자. 만나서 모든 걸 확인하고… 이제 끝내고 싶다.
허종회는 중학생이었다. 오랜 현장 요원 경력에서 재단도 장막도 전혀 모르는 민간인들조차 밥 먹듯이 취조해왔던 김권구였지만 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한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선택한 것이 고인에 대한 가족 인터뷰. 그들이 후등의 가족인지도, 스스로 후등에 대해 무엇을 듣고 싶은 건지도 이제 잘 알 수 없게 된 김권구가 고른 가장 비겁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것이었다.
김효정 여사와 허종회 군은 슬프기보단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거실에서 김권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례를 치른 지도 벌써 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망자에 대해 물으러 찾아온 기자를 맞이하는 이들이라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질문을 기다리는 그들 앞에서 김권구는, 분노로 방 안을 다 때려부숴버리고 싶은 충동과, 부끄러움으로 당장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 사이에서 무표정을 연기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김권구가 겨우 입을 연 것은 보리차 한 잔을 거의 다 비워갈 무렵이었다.
"고인께선 두 분께 어떤 남편이자 아버지셨습니까?"
"먼저 말씀드리렴."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집에 계실 땐 주로 서재에 계셨고, 종종 외출하실 때 현관에서 중절모를 건네드렸다는 기억 정도가 전부예요."
"이 아이에겐 아무래도 그럴 거에요. 그래도 종회를 얻고 그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하나 뿐인 아들이라고 그렇게 아꼈으면서 표현이 서툴렀죠. 은퇴까지 한 나이에도 어디서 자꾸 일을 얻어와서 매일 바쁘다 야단이더니 결국 가족이랑 충분히 시간도 못 보내고… 그렇게 가버린게 야속하면서도 불쌍해요."
김효정은 여전히 남편을 생각하면 아련한 심정이 앞서는 듯 했다.
"실례가 되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만, 결혼하시기 전의 고인에 대해 알고 계시는 게 있습니까?"
"도로 설계 쪽 전문가였어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도 참여했고, 은퇴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후배들이 자문을 구할 정도로 유능했던 모양이에요. 같이 차를 타고 다닐 때면 항상 지나는 도로에 대해서 한 마디씩 이야기해주곤 했어요. 자기가 어딜 설계했다거나, 어느 후배가 어딜 지었다거나…"
후등이 제3공화국에 접근한 건 1968년. 경부고속도로의 착공 연도. 그때부터 이 신원을 내세워 개인 커리어를 만들고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렇다면 10국에서 안영훈이 발급해준 신분은 그걸 그대로 주민등록상에 편입시켜준 것이겠지. 그렇지만 김권구는 자신이 아는 그 후등이 이렇게 직업인으로서나 가장으로서 충실한 삶을 연기했다는 것이 너무나 어색해서 더이상 그에 대해 상상하는 것도 꺼림칙해하고 있었다.
김권구는 더 동요하는 것을 보이지 말자고 다잡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김효정은 차근차근 답변했고, 허종회는 어머니 옆에서 좀이 쑤신다는 듯 꼼지락거리며 앉아 있었다.
"고인께선 다른 가족은 없으셨습니까?"
"그이는 전쟁으로 가족과 모두 헤어졌어요. 그이랑 처음 만난 것도 한국방송에서 이산가족 방송이 한창일 때 여의도 공원에서 만났고요. 저는 그때 그이가 도와줘서 삼촌을 찾았는데, 그이는 결국 가족을 아무도 찾지 못해서… 너무 안쓰러워서 마음이 쓰였죠. 그때부터 만남을 이어가다가 어느새 부부의 연까지 맺게 됐죠. 그이에게 기댈 수 있는 가족이 되어주고 싶었어요."
1983년. 후등이 가짜 신분을 가지고 도주한 지 4년이 되는 시점… 확실히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면 아무 연고도 가족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세상에 나타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최적의 배경이다. 적당히 그럴싸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연을 지어내고, 적당한 여성에게 사연을 어필하든지 사람 찾기를 돕든지 하면서 관계를 맺는다면 위장 가정을 꾸릴 수 있으리란 계산이 있었겠지. 더구나 이미 그 시점에 70대였던 후등으로선 아무리 SCP-987-KO의 힘으로 노화를 늦춰왔다 한들 아무나와 연애로 결혼하기는 힘들었을테니, 공통점을 자연스럽게 어필하고 동정심을 유발하는 이 방법이 비교적 성공률이 높았을 것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소름끼치게 머리가 좋은 인간이다— 김권구는 치를 떨었다. 그리고 태연작약하게 다음 질문으로 화제를 돌렸다.
"고인의 생애에서 특별하게 술회할 만한 일은 없었나요?"
"글쎄요… 방금도 말했지만 그이는 상당히 일 중독이었어요. 정년으로 은퇴한 뒤에도 계속 일을 받아올 정도로요. 서재에 작업실을 차려두고 도면을 들여다보거나 그리거나 하면서 열심이었죠. 작업 관계자들을 만나러 외출하는 일도 부지기수였고요. 그이의 그런 점을 좋아했지만 떠나버린 지금은 좀 더 함께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을까 생각도 해요. 이 아이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는 게 안타깝고… 그래도 그이가 좋아하는 일에 열성을 바치다 이름을 남기고 간 걸 스스로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보내줘야겠지요."
"…아버지는 훌륭한 건축가셨나보구나."
"그렇다고 하시더라고요."
"얘, 종회야. 말버릇이 그게 뭐니."
"…죄송해요."
허종회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퉁명스레 사과했다. 김권구는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이 가족은 고토 난스이의 위장 가족인가? 김효정은 속 검은 늙은이에게 홀랑 속아넘어가서 인생 절반을 내준 아낙인가? 허종회는 별 애정도 없는 아비에게 그저 으레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아이인가? 후등은 과연 겨우 조금 더 그럴싸한 위장을 위해 이만한 수고를 들여 이들에게 가장으로서의 기억을 남겨야 했을까? 김권구는 아무 관계도 없는 가족에게 개인적인 무례를 저지르며 후등을 놓치고 있는 것인가?
김권구의 고민을 끊은 것은 뜻밖에도 허종회였다.
"엄마, 그래서 홍재 아저씨 얘기는 언제 해요?"
"아 그래, 맞아. 기자님 원래 이홍재 선생님 관련해서 그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오신 거였지요?"
"…아, 그렇죠."
갑자기 '코우 장군'의 위장 신분 이름이 화제에 오르자 오히려 김권구가 당황하고 있었다. 원래는 곧장 후등에 대해 묻겠다고 쳐들어갈 수 없으니 부고장을 통해 친분 관계로 가정할 수 있는 코우 쪽을 빌미로 접근할 생각일 뿐이었지만, 생각해보면 후등에 대해 더 묻지 않고도 정체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아닌가.
"이홍재 선생과 고인은 어떤 관계였습니까?"
"절친한 동료 건축가였어요. 서로 집에도 곧잘 들렀고 그때마다 서재에서 일 얘기로 바빴죠."
한순간 김권구는 누군가 폐를 움켜쥐는 듯한 감각에 숨을 멈추어야만 했다.
이 사람은 무고한 도로 전문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코우는 그럴 수 없다.
코우의 동료로서 단 둘이 일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달리 없다.
김권구는 후등을 찾은 것이다.
POI-0813, 고토 난스이를, 후등 허남수를, 죽은 지 7년이 지난 허깨비를, 여태 쫓고 있었다는 걸 김권구는 알게 된 것이다.
"…하하하."
"…무슨 일이신가요, 기자님?"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터뷰는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정말요? 어머, 아직 얼마 얘기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됐어 엄마. 그냥 빨리 보내드리자."
"얘는.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자꾸 보챌 거면 이제 방 들어가."
"아뇨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두 분,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실례했습니다."
김권구가 일어나자 김효정은 이런저런 다과를 챙겨가라 권하며 따라 일어섰고, 허종회는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김권구를 슬며시 바라보고 있었다. 김권구는 얻을 정보를 다 얻었다 생각하며 정보국에 제출할 최종 보고서를 머릿속으로 미리 정리하고 있었다. 허종회와 시선이 마주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정황은 명확하다— 그러나 김권구는 그 시선에서 무언가 묘한 직감을 받고 있었다. 무언가 놓쳤다는 직감. 이 직감을 느꼈을 때 그건 틀린 적이 없다는 걸 김권구는 되새기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던 것은 실제론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김권구는 그 시간이 몇 분은 되는 것처럼 느꼈다. 머릿속에서 수없이 많은 계산이 오가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놓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는 후등일 수 밖에 없다. 그러한 후등의 1991년자 사망 신고는 분명 확인했다. 모든 것은 자명하게 밝혀졌다. 김권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찜찜함을 털어내려는 듯 바지를 정돈한 뒤, 코트를 챙기며 가볍게 목례하고 허씨 가족의 집을 나섰다. 원하던 결말은 아니지만 도달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몇 블록인가 걸어 나와 모퉁이로 돌아선 김권구는 일지 맨 뒷 장에 항상 끼우고 다니던 SCP-1813-KO의 정식 등재 신청서를 꺼냈다. 그리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서류는 순식간에 형체를 잃고 재가 되어, 골목 사이를 휘모는 가을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특수 격리 절차
기동특무부대 계호-8("실종신고")은 이하 특징에 해당하는 인물을 수색한다.
- 한국계-일본계 혼혈.
- 남성.
- 1984년생, 2023년 현재 기준 만 39세.
- 1차례 이상 주민등록을 위조한 정황.
- 구 일본제국 이상사례조사국(이하 이자메아)의 숨은 장군으로 활동 중. (추정)
- 기타 신체적 특이사항 없음.
SCP-1813-KO는 인원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변칙적 수단을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보 자산으로부터 도주하는 것에 비상한 재주를 보여오고 있으므로 추적시 주의가 필요하다.
설명
SCP-1813-KO는 현재 POI-0813-1로 지정되어 있는 요주의 인물이다.
재단이 파악하고 있는 SCP-1813-KO의 최초 신원은 1984년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에 출생 신고된 한국인 남성 '허종회'다. 대상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고토 난스이는 재단이 오랫동안 추적해온 POI-0813이며 허종회 가정이 발견된 시점에서 이미 사망한 후였다. 재단 정보국은 숨은 장군 가정의 후손인 대상을 POI-0813-1로 지정해 감시했지만, 2006년 '허종회' 신원에 대한 실종 신고가 경찰에 접수된 이후 행적이 묘연하다.
SCP-1813-KO는 POI-0813과 POI-0813-1에 대해 배정된 예비 일련번호였으며, 2018년 카에스틴 브롬 지역사령부 정보국장 지시로 정식 등재되었다.
보충: POI-0813 "고토 난스이"에 대하여
POI-0813 고토 난스이(後藤 南水)는 1911년 도쿄 태생의 일본인으로, 이자메아의 고위 관계자였던 고토 마사미쓰 박사의 아들이다. 1935년 경성제국대학 졸업 후 이자메아에 입대해 고속으로 승진했으며, 1942년 고토 마사미쓰 박사가 사망한 뒤 그 역할을 그대로 승계해 이자메아 조선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 당시 이미 재단 태평양사령부의 요주의 인물로 추적이 개시되었으나 일제 통치 지역에 머무르고 있어 직접적인 상호작용은 불가능했다.
종전 이후 POI-0813은 이자메아에서 빼돌린 자금과 일부 변칙 물체를 가지고 도주했다. 측근으로는 POI-0814와 SCP-987-KO를 대동했다. 1960년대 말부터 POI-0813은 대한민국 정부와 결탁했으며, 각종 초상 기술과 정보를 제공해 중앙정보부 제10국의 창설 및 활동을 도운 대가로 여러 편의를 제공받았다. 그 일환으로 POI-0813은 재단 추적을 벗어난 국내 위장 신분을 다수 획득했다.
POI-0813은 1979년 중순 이미 행적을 감추어 정보국이 추적해왔다.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는 위장 신분 중 하나를 이용해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가장으로 행세해왔다. 해당 가정은 1991년 충청북도에 사망 호주승계 신고서를 제출한 것이 밝혀졌는데, 실제로 POI-0813의 신원 및 외견 정보와 일치하는 시신으로 장례를 치르고 매장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고령에 의해 POI-0813이 신체적으로 사망했을 개연성은 높다.
재단 대한민국 지역사령부는 POI-0813의 변칙성을 의심할 수 있는 단서들을 고려하여 SCP-1813-KO라는 예비 일련번호를 배정하고 조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대상의 신체적 사망으로 해당 일련번호는 아들인 POI-0813-1에게 이전되었다.
카에스틴 브롬의 메모
얼마 전, 김권구 요원의 명예퇴직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팀원끼리 조촐한 행사만 갖고, 기억소거 후 은퇴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 바닥에서 정보 요원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끝 중 하나다.
김 요원과는 제법 오래 알고 지냈다. 30년 전 고토 난스이를 쫓던 그와 협력했을 때 그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고 했다. 굳이 면전에서 묻지는 않았지만 이미 알고는 있었다. 10국 출신 전향자인 그의 정보는 광역정보국에서 상세히 꿰고 있었으니까.
당시의 그는 너무나 열정적이고 목표 의식에 충실했다. 정보국은 그의 독기를 고토 추적에 쓰고 싶어했고, 그 전달책이 나였다. 사실 이미 그가 나에게까지 도달했기에 자연스럽게 내가 투입된 것이지만. 그만큼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빠르게 돌파구를 찾는 수완이 좋았다. 재단 내에서도 뿔뿔이 흩어져 있던 고토 관련 정보 일부를 그에게 넘기고 권한을 부여하자 김 요원은 순식간에 추적해 파고들어… 5년만에 고토의 위장 가정을 찾아냈다.
기대 이상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고토는 이미 사망한 뒤였고, 그 아들을 요주의 인물로 추가한 뒤 고토에 대한 공식적 추적은 종료되었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어디까지나 노쇠한 정보직 간부가 동료의 은퇴를 맞아 아무렇게나 작성한 개인적 소회일 뿐이다.
김 요원이 제19K구역에 도달한 것은 의외였다. 임한배가 율도를 알고 있었을 줄이야. 19K는 그 존재의 중요성 때문이든, 추악함 때문이든 재단이 "덮어 둔" 시설이다. 보안상 고등급 기밀인 것은 아니지만 근무자를 제외한 인원들이 제19K구역을 인지하기 어렵게 의도적으로 조치해두고 있다는 뜻이다.
19K에서 정말로 고토를 찾을 실마리를 발견한 것도 의외였다. 홍억 이사관은 차출 이후 수동적으로 지시에만 따를 뿐 재단 방침에 충분히 협조적이지 않았기에 상부의 고민거리였다는데… 그가 단순히 묵은 불만을 털어내느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김 요원에게 도움을 줄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는 여전히 불명이다. 다만 장막 세계에 대한 환멸과 증오라는 점에서 나는 둘의 공통된 면모를 느낀다. 그들 역시 느꼈을지도.
그리고 하나 더, 고토의 단서가 코우로부터 나온 것이야말로 가장 의외였다. 코우는 이미 최고 수준의 요주의 대상으로 추적되어왔기에 — 그리고 1980년대 이후로 그의 행적은 거의 사라져있었기에 — 그에게서 나올 단서는 더이상 없을 것이라는 평가가 정보국의 중론이었던 터다. 부끄럽지만 홍 이사관이 가지고 있던 그 부고장도 이미 정보국 검열실에서 조회하고도 놓쳐버린 단서였다. 하지만 김 요원은 정보국 핵심에서 비켜나있던 탓에 도리어 드문 단서에 사활을 걸고 달려들었고, 하야시로부터 코우를 찾아내어, 끝내 코우로부터 고토를 찾아냈다.
고토의 아들을 찾은 날, 김 요원은 전에 본 적 없는 침울한 사람이 되어 최종 보고서를 가져왔다. 고토의 사망 추정 보고, 가족관계 보고, 그 아들 허종회의 POI 등재 신청… 그러나 그가 항상 벼르면서 품에 넣고 다니던 SCP-1813-KO 정식 등재 신청서는 없었다. 아마 그 날 그의 마음은 꺾여버렸다고 생각한다. 그 후 그는 과잉 심문으로 주의를 받는 일도 없어졌고, 뺀질나게 정보국 본청에 요청서를 보내는 일도 없어졌고, 업무적으로 나와 만나는 일도 없어졌다. 20세기 말 격렬하게 불타는 산불 같던 김권구는 사라지고, 목적 없이 주어진 시간을 그저 태워보내는 남자만이 남았다. 그와는 그저 예전에 같은 목표를 쫓았던 지인으로서 사적인 친교만을 근근히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20년 동안 나는 그와 교우하면서 하루도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본 적이 없다. 나는 항상 그의 능력과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혐오했으므로, 그가 고토로부터 손을 떼고 다른 사람이 된 것을 기꺼워해야 했을 터다. 결국 올라시 국장의 조언대로 그로부터 진실을 숨긴 것은 다름 아닌 나였기에 나는 그 선택을 조용히 저편에 묻어버리고 태연작약하게 그와 술을 마시며 떠들어야 했을 터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꺾여버린 한 인간의 추락을 날것으로 목도할 때마다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죽였다. 그리고… 한 마디만 건네면 당장이라도 살려낼 수 있다. 그것을 참는 것은 몹시나도 괴로웠다.
고토 일가는 19세기 말부터 일제의 대초상분야 업무에 관여해온 유서 깊은 명문가다. 그 2대인 고토 마사미쓰 박사는 재단과 이자메아의 협력기에 태평양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연구 교류에 참여한 이력도 있다. 그리고 당시 연구진에는 고토 마사미쓰 박사의 부친인 고토 나가히데와도 인연이 있었던, 후일 한국사령부 제3대 관리이사관을 역임하시는 델러노 워커 박사가 있었다. 여기선 워커 이사관의 수기를 인용해야 할 것 같다.
그는 동양학 공부로 일본에 유학하던 1902년 당시 고토 가문에 초빙되어 생전의 나가히데와 고등학생이던 마사미쓰를 만나 인연을 맺었고, 정확히 20년 후 태평양사령부에서 마사미쓰와 재회했다. 워커 박사는 마사미쓰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곧 무언가의 위화감을 느꼈다. 신체 건장한 청년이었던 마사미쓰는 왼손을 떠는 버릇이 붙어 있었고 이것은 그의 아버지의 버릇이었다. 그것만이라면 과연 부자는 사소한 구석까지 닮는 모양이라며 웃어넘겼을지 모르나, 워커 박사는 20년 전 마사미쓰가 왼손으로 글을 썼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왼손을 떠는 마사미쓰는 오른손잡이였다.
다시 20년이 지나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워커 박사는 기동특무부대 크시-8에서 동아시아 전공의 자문관으로 복무하면서 다시 고토 일가와 관계하게 되었다. 1942년 마사미쓰 사후 그 자리를 이어받은 아들 난스이가 SCP-987-KO 관계자로서 크시-8의 추적감시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크시-8은 대이자메아 첩보 활동 중에서도 한반도 방면을 맡았기에 권역의 주요 요주의 인물이던 난스이의 정보 또한 워커 박사에게 보고되었다. 처음에 워커 박사는 난스이가 이미 1935년부터 이자메아에 입대해 마사미쓰와 함께 연구해왔다는 정보를 미심쩍어했다. 그러나 목격 증언과 서류 증거들로 교차 검증되는 사실이었기에, 워커 박사는 과거 자신이 느낀 위화감이 잘못된 것일까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고토 난스이가 두 차례 쇼와 덴노를 예방했던 당시의 기록을 입수한 것이다. 이자메아 내 학위수여식을 치하하러 방문한 쇼와를 졸업생 대표로 영접한 1938년, 그리고 이자메아 조선부 대표보고자로 전시 어전회의에 참석한 1944년. 두 번째 만남에서 쇼와는 난스이를 질책하면서 명확하게 이런 말을 남겼다. "전에도 당신을 보았지만 그때는 총기가 영롱했는데, 어찌 몇 년 만에 사람이 바뀌었는가?"
분명 사소한 발언이다. 나빠져만 가는 전황 속에서 부정적인 보고를 받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워커 박사는 자신이 경험했던 미미한 불쾌함과 똑같은 감정을 거기서 느꼈다고 적었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 전후 창설된 한국사령부가 POI-0813 고토 난스이에게 예비 SCP 일련번호까지 등재해뒀던 유일한 이유였다.
김 요원은 마지막 순간 허종회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위화감을 내게 이야기했다. 나는 고토의 추적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 워커 이사관의 수기를 열람했고, 그 위화감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끔찍한 추측을 이미 알고 있었다. 김 요원까지 세 명의 증언이 모이고 말았을 때… 나는 그 추측을 내심 확신으로 바꾸어야 했다.
고토 일가의 정체는, 대대로 아들의 몸을 취하며 수명을 이어오고 있는 고토 나가히데라는 것이다.
장생종이 가명을 바꾸거나 정체를 숨겨가며 긴 시간 동안 살아오는 것은 종종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코우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고토 일가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 나가히데는 그 스스로가 장수하며 호적이나 신원을 위조한 게 아니다. 그의 주변에는 명백히 별개의 혈육이 존재했고 고토 일가의 남성들은 분명히 육체적 사망을 목격당해왔다.
워커 이사관의 가설에 따르면 그는 정말로 아들을 낳고 죽은 것이 맞을 것이다. 그저 때가 되면 자신의 육체와 아들의 인격을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수법으로 자신의 정신만을 이어가며 기막힌 영생을 누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워커 이사관은 고토 일가와 관련된 죽음을 사료에서 추적한 결과 이 과정에는 피를 이은 아들의 육체와 영적 능력이 있는 여인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추정했다.
1904년, 고토 나가히데는 19살의 아들 고토 마사미쓰와 가정부 요시다 사에를 이용했다. 1942년, 고토 마사미쓰는 31살의 아들 고토 난스이와 무당 최여옥을 이용했다. 1991년, 고토 난스이는 7살의 아들 허종회와 박혜숙 여사를 이용했다. 고토 난스이가 종적을 감춘 1979년 8월 9일 함께 실종된 박 여사는 김권구 요원의 모친이다.
나는 나가히데의 헛된 노욕에 희생당한 세 여인을 애도한다. 그저 필요한 조건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선택의 여지 없이 동원당하는 죽음이란 얼마나 비참한가. 그리고 고토 일가의 세 아들들도 동정한다. 그들이 서글픈 최후를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편하게 떠나갔기를 기도할 뿐이다. 강탈당하기 위해 태어난, 아비에 의해 부품으로써만 의도된 성장기 인생의 끝을 맞이하는 것이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나는 이것을 김 요원에게서 숨겼다. 그가 한창 고토를 쫓고 있을 때에도 숨겼다. 그가 죽은 고토를 찾고 상심했을 때도 숨겼다. 이 사실은 그에게 새롭게 동기를 부여하고 그 안의 불 같은 복수심을 되살렸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숨겼다. 사내 김권구가 죽기를 나는 바랐지만, 다 죽어 스러져있는 김권구 옆에서 영약을 머금은 채 입 다물고 그를 지켜보는 형벌은 내게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이제 경애하는 나의 친구 김권구 요원은 자신의 경력과 기억을 모두 내려놓고 민간인의 삶을 찾아갔다. 그가 찾은 자신의 답에 끝내 만족하고 떠나갔기를, 염치 없지만 나는 기도한다. 그가 재단에 있는 동안 고토가 SCP로 등재되어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에, 염치 없지만 나는 감사한다. 이제 지역사령부의 일원으로 착임한 내가 고토를 SCP-1813-KO로 삼으려는 것은, 염치 없지만 나의 작은 속죄다.
김권구 요원이 편히 잊혀지기를, 그의 모친이 안식을 갖기를, 나는 감히 기도한다.
2018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지역사령부 신임 정보국장 카에스틴 브롬은 이 기록을 데이터베이스에 첨부한 뒤 SCP-1813-KO를 정보국 직권으로 정식 등재했다. POI-0813-1, 즉 SCP-1813-KO 추적 임무는 제19K구역에 소재한 사령부 정보국 직속 POI 정보 추적 전문 특무부대 계호-8에게 할당되었다.
김권구 요원은 2020년 2월 29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장례는 민간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일부 재단 인원들의 근조품이 가명으로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