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하하 난 걷고 있다
일련번호: SCP-1672-KO
등급: 안전
특수 격리 절차: 현재 남아있는 SCP-1672-KO의 판본은 표준형 안전 등급 보관함에 보관한다. 관련 실험은 제4등급 인가 허가가 필요하다.
설명: SCP-1672-KO는 「자아학개론」이라는 제목의 중고 서적으로, 총 13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SCP-1672-KO는 20세기 말 소규모 조직이 민간 사회에 공식 출판하려 했으나, 중앙정보부 10국에 발각되면서 전량 폐기되었다. 현재 재단이 확보한 한 권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SCP-1672-KO에 관한 기원 및 관련 정보는 유실되어 확인이 불분명하다.
SCP-1672-KO의 변칙성은 대상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읽을 때 발현된다. 대상을 끝까지 읽은 인원은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그대로 자리에서 소실한다. 이렇게 소실된 인원(이하 SCP-1672-KO-1)은 SCP-1672-KO-2로 이동하게 된다.
SCP-1672-KO-2는 VII등급 무의식적 심상으로, SCP-1672-KO-1이 이동할 때마다 해당 인원의 내면과 자아를 반영한 혼란스러운 변칙적 공간이 형성된다. 이 공간에는 SCP-1672-KO-1의 과거 경험, 억눌린 감정, 사적이고 알려줄 수 없는 기타 욕망 등이 얽혀 나타나며, 시간이나 공간의 흐름이 없는 비선형적 과현실 형태로 구현된다. SCP-1672-KO-2의 각 구역은 독립체로 보이는 존재가 거주하거나 특정 상황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등 각자간의 차이를 보인다.
해당 공간에서 나가는 방법은 불명확하나, 어느정도 SCP-1672-KO-1의 무의식적인 영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SCP-1672-KO-2에서 나가게 될 경우, 인원은 소실됐던 그 자리로 복귀하게 된다.
SCP-1672-KO-2는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양상을 띄나, 본질적으로 SCP-1672-KO-1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 SCP-1672-KO-1은 이 공간과 물리적, 비물리적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뒤틀거나 변형할 수 있다. 관련 실험 기록은 부록 1672KO.03을 참고할 것.
부록 1672KO.01: 개인 기록
배일호 박사: 보자, 이거 녹음 들어가는 건가?
김수연 연구원: 네, 그래요. 지금 막 켰으니까, 간단한 인사치레부터 할까요? 안녕하세요, 배일호 이사관보님.
배일호 박사: 안녕하기는. 서론은 생략하자. 괜시리 분량만 늘어나고. 어차피 너 이거 빼면 분량 없잖아.
김수연 연구원: 네, 뭐. 저도 그럴 생각이긴 했어요. 그래서… SCP-1672-KO 실험에 직접 참가하신다면서요? 참관도 아니고 실험자로. 이사관보님 입장에선 굳이 그러실 필요 없잖아요.
배일호 박사: 알려주고 싶은데, 네 보안 등급이 낮아서. 승인하러 가게 이만 보내주지?
김수연 연구원: 죄송한데, 이거 공식 기록이라서요. 뭐라도 말씀해주셔야 저희도 상부에 보고할 수 있어요.
배일호 박사: 알았어, 알았어. 내가 따로, 응? 딱 깔끔하게 정리해서 보낼게. 걱정 마.
김수연 연구원: 너무 막무가내잖아요.
배일호 박사: 1672-KO, 곧 분석심리학부로 넘어갈 거잖아?
김수연 연구원: 네, 그렇죠?
배일호 박사: 그러기 전에 내가 한 번 써봐야지. 이거 지금 아니면 못 써요. 나 다른 부서 애들이랑 상극이라서 잘 안 만나거든. 검치호 알지? 이빨 길쭉하고 큼지막한 그 포유류. 진즉 멸종된 그거. 메머드랑 싸웠댔나?
김수연 연구원: …이사관보님, 부서 활동 중이셨어요?
배일호 박사: 아, 진짜, 조연이 분량 챙기겠다고 말 많기는― 아 됐어. 괜히 트집 잡히지 않을게. 그냥 하고 싶은 거 해.
김수연 연구원: 지금 이게 제 할 일이거든요.
배일호 박사: 그래, 그래. 그럼 그거 해.
배일호 박사: 그래서 실험 일정 언젠데?
김수연 연구원: 이미 보내드렸는데요. 앞당기고 싶으면 이사관보님 허가부터 받아야죠.
배일호 박사: 이사관보 누구.
김수연 연구원: 연구이사관보님이요.
5초간 침묵.
배일호 박사: 스톱. 야, 너 앞에 앉은 사람 보직 뭐야.
김수연 연구원: 네?
배일호 박사: …아니, 됐다. 상관없어. 하여간, 메일로 양식 보낼 테니까 승인이나 잘 좀 넣어줘.
배일호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김수연 연구원: 아, 저기, 이사관보님…
배일호 박사: 왜. 바빠.
김수연 연구원: 별건 아니고요. 1672-KO 실험, 왜 그렇게 급하게 진행하려고 하세요?
배일호 박사: 말해주고 싶긴 한데… 아니, 아니다. 너, 참 별 걸 다 궁금해하네? 너 좀 잘났어?
배일호 박사: 이 정도면 할 말 다 했으니까 녹음기 꺼. 파일도 나 주고. 그리고, 넌 말이야… 내가 누군지부터 좀 알아와라. 나 은둔형 외톨이 아니거든? 최소한 네 상관이 뭐 하는 인간인지는 알고 있어야지?
<녹음 종료>
배일호 박사: 나 한동안 안 나온다.
이고양 연구원: 네? 갑자기요?
배일호 박사: 안 나온다고. 놀랄 일이야?
이고양 연구원: 아니, 너무 뜬금없잖아요. 부장님 없으면 그동안 저희 뭐 해요?
배일호 박사: 뭐하긴, 나 대신 서류 뺑이 존나게 치면 되겠지. 심심할 틈은 없을 걸? 특히 넌 내 직속이잖아.
이고양 연구원: 힝, 너무해요…
배일호 박사: 수고 좀 해라. 난 내일부터 좀 쉴 거니까.
손기정 연구원: 이야, 부장님이 휴가도 다 쓰시고 웬일이세요? 해가 서쪽에 졌나?
이고양 연구원: 해는 원래 서쪽으로 져요.
클라라 박사: 부장님, 앵간치 하시고 똑바로 말하세요. 얘네들 겉보기만 이렇지, 생각보다 순진해요. 부장님 말이면 다 믿는다니까요?
잠시 침묵.
손기정 연구원: 아닌데요.
배일호 박사: 아니, 왜. 휴가 맞잖아.
클라라 박사: 휴가가 아니라 SCP-1672-KO 실험 때문이잖아요. 직접 실험자로 들어가신다면서.
이고양 연구원: 아, 그래서였군요? 전 또 뭐라고. 부장님 또 뭔가 꽂히셨나 보네요? 대체 뭔데요?
배일호 박사: 알려주겠냐. 당연히 비밀이지.
이고양 연구원: 아, 그렇죠… 여기 있으면 재단 규율 다 까먹는 것 같아요.
손기정 연구원: 그 마음 백 번 이해한다.
배일호 박사: 뭐, 그래. 가기 전에 네들 얼굴 좀 봐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이고양 연구원: 네?
손기정 연구원: 불안하게 말은 또 왜 그렇게 하세요?
배일호 박사: 불안하게 하려고. 까딱하면 나 죽을 수도 있거든.
이고양 연구원: 네에―?! 지, 진짜요? 왜요?
손기정 연구원: 뻥이잖아요. 부장님이 왜 죽어요?
배일호 박사: 왜, 걱정돼? 걱정 마. 널 죽이는 한이 있어도 난 살아남을 거니까.
손기정 연구원: …죽기를 기도해야겠는데.
클라라 박사: 애들 그만 놀리세요.
배일호 박사가 피식 웃는다.
배일호 박사: 클라라 박사, 잠깐 시간 돼나? 나와볼래?
클라라 박사: 싫… 네? 잠깐, 뭐예요. 클라라 박사라뇨?
배일호 박사: 나오라고. 할 말 있어.
클라라 박사: 나오라시길래 나왔는데… 녹음기는 왜 또 켜신 거예요?
배일호 박사: 직업병이라서. 하여튼 들어봐. 중요한 거야.
클라라 박사: …뭔데요.
배일호 박사: 1672-KO 실험, 내일모레 시작하는 거 알고 있지?
클라라 박사: 네, 전해 들었어요. 제 담당은 아니라서 자세히는 모르지만요.
배일호 박사: 실험에 자원한 이유는 하나뿐이야.
배일호 박사: 난 나를 죽이러 간다.
30초간 침묵.
배일호 박사: 할 말 없어?
클라라 박사: 네?
배일호 박사: 내가 나 죽이러 가는 거라고.
클라라 박사: 네, 그건 들었어요. 잠깐만요. 혼란스럽네요.
5초간 침묵.
클라라 박사: 그러니까, 부장님은… 자기 마음속의 자신을 죽이겠다는 거죠?
배일호 박사: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 꼬라지인 날 죽이겠다는 거지.
클라라 박사: 이유는 여쭤봐도 되나요?
배일호 박사: 놈이 눈치챘어.
잠시 침묵.
클라라 박사: 아, 설마. 진짜요? 그럼 큰일인데.
배일호 박사: 그래, 내가 너무 방심했어. 내가 병신이었지. 그래도 그냥 지켜보기만 하니까 없는 셈 치고 살려 했는데—
클라라 박사: 잠깐, 잠깐. 스톱. 뭐라고요?
배일호 박사: 놈이 나를 매개체 삼아서 건너오려고 한다고! 아니, 그, 이건 아직 이론이긴 한데… 아무튼, 난 지금 그놈 영향 아래 있어. 연결을 끊어내야 해.
배일호 박사가 성을 내며 소리친다.
배일호 박사: 놈이 여기 건너오면 다 죽는 거야! 아니, 그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지. 그년은 가학적이고, 예측 불가야. 지 맘대로 사람을 되살리고, 복제하고… 코드 경보 파랑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클라라 박사: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놈이 누군데 그래요?
배일호 박사: 내… 조물주.
잠시 침묵
배일호 박사: 잠깐, 내가 얘기 안 했던가?
클라라 박사: …네. 단 한 번도요.
배일호 박사: 그럼 방금 처음 들은 거네? 왜 그리 반응했냐?
클라라 박사: 그냥 또 시작이구나 싶으셔서, 설렁설렁…
배일호 박사: …아니, 내 이미지가 뭐 이래.
5초간 침묵.
배일호 박사: 천천히 설명할게. 그러니까, 음… 난 죽었어.
클라라 박사: 죽은 것치곤 말짱하신데요?
배일호 박사: 농담 아니야. 원래의 나는 죽었다고. 제17K 기지 붕괴 사고 때.
배일호 박사: 이제 감이 좀 오냐?
10초간 침묵.
클라라 박사: 네.
배일호 박사: 그리고 난 다시 살아났지. 수천, 수만 개로 복제되면서. 개미 메이드 사건이나 기계룡 사태 기억나지? 내 클론들 말야.
클라라 박사: 그렇군요.
배일호 박사: 생각보다 덤덤하네. 내 숨겨진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건데.
클라라 박사: 부장님이 이 기지에서 멀쩡히 돌아다닌 지 오래라서 다들 잊고 살지만, 애초에 부장님 변칙 개체로 격리될 예정이었어요. 기억 하세요?
5초간 침묵.
배일호 박사: 아.
클라라 박사: 그러니까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것뿐이에요. 그보다… 원래 부장님을 복제한 존재는 대체 뭐죠?
배일호 박사: 몰라.
클라라 박사: 몰라요?
배일호 박사: 그냥 가끔 심심하면 나타나서 떠들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뭐, 흔한 얘기들 있잖아? (우스꽝스럽게)"다 죽여라! 다 집어삼켜라! 여길 죄다 개박살 내버려! 그리고 지랄 똥이나 싸갈겨라!" 그런 식으로.
클라라 박사: 와…
배일호 박사: 이번에도 너무 급했나?
클라라 박사: 조금요.
배일호 박사: 평소 같으면 그냥 무시했겠지. 근데 이번엔 다르잖아. 계속 사건이 터지고, 재단 존속 자체가 위협받고 있어. 아마 머지않아 모든 배일호들이 기준현실을 습격하려 들 걸.
클라라 박사: 마땅한 명분도 없이요?
배일호 박사: 없겠지.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를 테고. 벌레 새끼들 팔자가 원래 그래.
배일호 박사가 냉소적으로 웃는다.
클라라 박사: …이거 커피 마시면서 할 얘긴 아닌데요.
배일호 박사: 그래, 이사관님께는 아직 보고 안 했어. 정황은 몰라도 낌새는 채셨을 거야. 내가 실험에 자원한 이유도 아마 알고 계시겠지.
배일호 박사: 난 날 죽여야 해. 내 안에서. 그리고 예전처럼 되돌아가야 해. 놈과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클라라 박사: …그게 1672-KO 실험에 참가한 이유인가요?
배일호 박사: 응.
클라라 박사: 좋아요. 확실히 알겠어요. 부장님, 그 실험에 들어가시면 안 돼요. 이건 개인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에요.
배일호 박사: 문제 없거든? 나 못 믿는 거야?
클라라 박사: 그러니까 이번엔 그런 식으로 대충 넘길 사항이 아니라고요. 이건 심각한 문제고, 중대한 사안이에요. 독단적으로 처리하실 생각이면, 이사관님께 직접 보고드릴 수밖에—
배일호 박사: 어어, 괜찮아. 상관없어.
클라라 박사: 네?
배일호 박사: 상관 없다고. 이사관님께 보고를 드리던 말던 네 좆대로 하라고.
클라라 박사: (혀를 차며) 말씀 너무 지나치시네요?
배일호 박사: 클라라 박사. 네가 지금 마시고 있는 게 뭐지?
클라라 박사: …커피요.
배일호 박사: 그럼, 내가 마시고 있는 건?
클라라 박사: 그것도 커피죠.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배일호 박사: 그렇구나. 그럼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건 뭘까?
30초간 침묵.
클라라 박사: …잠깐, 그거—
배일호 박사: 그래, 바지춤에서 갓 나온 뜨끈뜨끈한 44구경 토러스 레이징 불 리볼버. 사격엔 소질 없지만, 이 거리에서 네 머리통 정도는 문제없겠지.
클라라 박사: …부장님, 이러지 마세요. 왜 이러시는—
총성.
배일호 박사: 늦었어.
문이 열리는 소리.
손기정 연구원: 뭐야, 무슨 일이에요?!
이고양 연구원: 부장님?! 박사님?! 방금 총소리—
총성
배일호 박사: 너도 늦었고.
총성.
배일호 박사: 너도 늦었지.
잠시 침묵
배일호 박사: …그래, 뭐. 이렇게 됐네. 난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동료들은 바닥에 나뒹굴고.
배일호 박사: 속일 거면 제대로 속여, 개새끼야.
배일호 박사: 난 씨발, 얼어 뒤져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뜨거운 커피는 절대 안 마셔! 애들이 이거 하나 모를 줄 알았어?!
정적
정적
정적
배일호 박사: …그래, 또 시작됐군.
빤히 쳐다보면 넌 내 시선을 알아챌까
일련번호: SCP-1672-KO
등급: 안전
특수 격리 절차: 현재 남아있는 SCP-1672-KO의 판본은 표준형 안전 등급 보관함에 보관한다. 관련 실험은 제4등급 인가 허가가 필요하다.
설명: SCP-1672-KO는 「자아학개론」이라는 제목의 중고 서적으로, 총 13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SCP-1672-KO는 20세기 말 소규모 조직이 민간 사회에 공식 출판하려 했으나, 중앙정보부 10국에 발각되면서 전량 폐기되었다. 현재 재단이 확보한 한 권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SCP-1672-KO에 관한 기원 및 관련 정보는 유실되어 확인이 불분명하다.
SCP-1672-KO의 변칙성은 대상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읽을 때 발현된다. 대상을 끝까지 읽은 인원은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그대로 자리에서 소실한다. 이렇게 소실된 인원(이하 SCP-1672-KO-1)은 SCP-1672-KO-2로 이동하게 된다.
SCP-1672-KO-2는 VII등급 무의식적 심상으로, SCP-1672-KO-1이 이동할 때마다 해당 인원의 내면과 자아를 반영한 혼란스러운 변칙적 공간이 형성된다. 이 공간에는 SCP-1672-KO-1의 과거 경험, 억눌린 감정, 사적이고 알려줄 수 없는 기타 욕망 등이 얽혀 나타나며, 시간이나 공간의 흐름이 없는 비선형적 과현실 형태로 구현된다. SCP-1672-KO-2의 각 구역은 독립체로 보이는 존재가 거주하거나 특정 상황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등 각자간의 차이를 보인다.
해당 공간에서 나가는 방법은 불명확하나나가는 방법은 불명확하나, 어느정도 SCP-1672-KO-1의 무의식적인 영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SCP-1672-KO-2에서 나가게 될 경우, 인원은 소실됐던 그 자리로 복귀하게 된다.
SCP-1672-KO-2는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양상을 띄나, 본질적으로 SCP-1672-KO-1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 SCP-1672-KO-1은 이 공간과 물리적, 비물리적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뒤틀거나 변형할 수 있다. 관련 실험 기록은 부록 1672KO.03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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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일호 이사관보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옛날과는 달라졌군.>
부록 1672KO.01: 개인 기록
배일호 박사: 이거 녹음 들어가는 거야?
김수연 연구원: 네, 물론이죠. 지금 막 켰으니까 간단한 인사치레부터 할게요. 안녕하세요, 배일호 이사관보님.
배일호 박사: —이번이 몇 번째지?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김수연 연구원: 네? 무슨 말씀이세요?
배일호 박사: 이번엔 대가리가 멀쩡하네. …좋아, 모두 쏴 죽이는 건 답이 아니었군.
김수연 연구원: 뭐라고요?
배일호 박사: 미안한데, 김수연 연구원. 난 댁이 누군지도 몰라. 한 서른 번은 넘게 만난 것 같은데, 우리 그냥 깔끔하게 헤어지자.
배일호 박사: 아니면 리트리버로 변하던가. 그러면 데리고 다닐 맛이라도 나겠네.
리트리버: (짖어댐)
배일호 박사: 허.
배일호 박사가 밖으로 나간다. SCP-1672-KO 실험 예정일이 적힌 공고를 발견한다. 공고를 집어 들더니 찢어버린다.
배일호 박사: 생각을 해보자. 그니까, 난 진즉에 실험을 시작한 상태였고. 지금이 루프 서른 번 째인가?
배일호 박사: 심상은 지랄. 무간지옥이잖아. 과거 속으로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배일호 박사: …대체 여긴 또 어디야?
배일호 박사가 어둠 속에 있다.
배일호 박사: …탈출했나?
배일호 박사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배일호 박사: 아닌가 보군.
배일호 박사가 어둠 속에 있다.
배일호 박사: 길이 도대체 어디야…?
배일호 박사가 어둠 속에 없다.
배일호 박사: …여기다.
배일호 박사: 나 한동안 안 나온다.
이고양 연구원: 네? 갑자기요?
배일호 박사: 안 나온다고. 놀랄 일이야?
잠시 침묵.
배일호 박사: 으어, 머리 아파…
배일호 박사가 한숨을 내쉰다.
배일호 박사: 아이고, 또 시작이군. 이번이 대체 몇 번째 루프야?
이고양 연구원: 아니, 또 크림빵 드셨어요? 진짜 알코올 약하시다니까요. 왜 그러세요?
배일호 박사: 그러니까 이번이 몇 번째냐고. 자꾸만 이 좆같은 기억만 보여줄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뭐 거창한 걸 바란 것도 아니고, 그냥 나를 죽이겠다고. 내가 나를 죽이겠다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고!
이고양 연구원: 진짜 크림빵 좀 적당히 드세요.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으니까 취하는 거잖아요. 정말… 자, 부축해드릴—
배일호 박사: 아오, 내 말 좀 들어봐, 고양아! 나 지금 백 번 넘게 루프 돌고 있다고! 이게 심상이라며! 근데 생각한 거랑 다르잖아!
이고양 연구원: 뭐, 그야. 꽁꽁 숨겨둔 거니까 그렇겠죠. 안 그래요?
15초간 침묵.
배일호 박사: …뭐?
이고양 연구원: 자기가 자길 죽인다는 거, 그거 사실상 자살이잖아요. 자기파괴만큼 무의식적으로 거부되는 게 또 있겠어요?
이고양 연구원: 게다가, 계획도, 대책도, 해결책도 여전히 없잖아요. 부장님 같은 사람이 그런 걸 진짜로 실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절대 못 하실 거예요. 부장님은 여전하시니까.
배일호 박사: 지금… 지금 말하는 게 누구지?
이고양 연구원: 나요. 이고양.
배일호 박사: 아니, 넌 이고양이 아니야. 내가 기억이 헷갈리는 것도 아니고, 지금 정신 멀쩡하거든.
배일호 박사: 몽중몽. 꿈속의 꿈. 내가 이걸 허투루 공부했을 것 같아? 난 지금 꿈에서 꿈으로 계속 반복 중인 것뿐이야.
배일호 박사: 그니까 다시 묻는다. 지금이 몇 번째지?
이고양 연구원이 침묵한다. 주변이 어둠으로 일그러진다. 모든 형상이 녹아내린다. 끝내 암흑만이 남는다. 배일호 박사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 …이백 서른두 번째.
배일호 박사: 그래, 이백 서른두 번 만에 여기까지 왔다는 거군. 근데 정신 차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지 않았어? 왜 그랬을까?
???: 반복되는 상황. 강한 데자뷔.
배일호 박사: 잘 알고 있군. 넌 날 영원히 여기 묶어둘 순 없어. 결국은 들여보낼 수밖에 없는 거야.
배일호 박사가 잠시 침묵한다. 이윽고 어깨를 으쓱인다.
배일호 박사: 근데, 내가 이걸 왜 너한테 묻고 있냐. 이거 전부 시간 낭비잖아?
15초간 침묵.
배일호 박사: 상황 정리해보자. 난 나를 죽이러 갈 거고, 넌 그걸 막고 싶어 하는 거고. 그래서 여기 있는 거지. 안 그래?
???가 침묵한다.
배일호 박사: 말 좀 해, 새끼야.
???: 좆이나 까.
배일호 박사: 좆? 아니, 너나 까. 이건 심상이야! 내 기억과 감정이 만들어낸 공간! 넌 그냥 내가 날 죽일 그 망할 길이나 열어주고 꺼지면 되는 거라고!
???: 거부. 방어기제 작동. 나는 나를 죽이는 걸 허락할 수 없다.
배일호 박사: 뭐? 이 새끼가— (비웃음) 야, 이거 웃긴 놈이네.
???: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마주하는 것.>
???: 리셋.
내 배 짱 멋지지
배일호 박사: 이번이 몇 번째지?
클라라 박사: 나오라시길래 나왔는데… 녹음기는 왜 또 켜신 거예요?
배일호 박사: 신경 끄시지? 내 기억을 갉아먹고 성장하는 벌레 새끼야. 자아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게.
배일호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클라라 박사: 네? 뭐라고요?
배일호 박사: 개씨발, 진짜. 수틀리면 리셋하고, 또 수틀리면 리셋하고. 개새끼가.
클라라 박사: …지금 저한테 하시는 말씀인가요?
배일호 박사: 아니라고! 보면 몰라?
배일호 박사가 자리를 벗어난다. 그는 이제 이곳에 없다. 제21K기지에도 없다.
또다시 어둠만이 남는다. 배일호 박사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다.
배일호 박사: 좋아. 방어기제라… 달가운 단어는 아니지만, 대응책은 어느정도 파악했고.
배일호 박사: 그래, 또 내가 한 건했지. 참 대견하다, 나 자신. 쓰다듬어줄게.
잠시 침묵.
배일호 박사: 내 심상. 내 정신. 이 시커먼 공간이 전부 내 머릿속이란 거지?
벌레 기어 다니는 소리. 날갯짓 소리. 웃음. 비명. 공포. 𐂂𐂂𐂂𐂂𐂂𐂂𐂂 배일호 박사가 앞으로 나아간다. 배일호 박사가 냉소적으로 웃는다.
배일호 박사: 사람 살 곳은 아니군.
문이 보인다. 아주 밝은 문이다. 문이 밝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착각이 들 만큼 강렬하다.
배일호 박사가 문을 연다. 흰 벽이 보인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흰 천장이 보인다. 천장이 붉게 물들어 있다.
배일호 박사: …그리고 나는 눈을 깜빡인다.
배일호 박사: 이렇게 하는 건가?
장면이 바뀐다.
여기는 제21K기지가 아니다. 익숙한 공간이다.
배일호 박사: …제17K기지.
배일호 박사: 예전.
<집에 온 걸 환영한다. 배일호.>
배일호 박사가 제17K기지 복도를 걷는다. 제17K기지 소속 재단 연구원들이 눈에 들어온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 아, 이사― 어라? 누구시지?
5초간 침묵.
???: 어쨌든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배일호 박사가 고개를 든다. 남성 연구원이다.
배일호 박사: …어, 음. 그래. 선진국 연구원?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자를 모른다. 네가 가진 기억은 전부 '진짜'의 카피일 뿐이니까. 기억하면서도 떠올릴 수 없는, 혐오스럽고도 추잡한 감각.>
배일호 박사: 나레이션이 존나 까부네. 닥쳐.
선진국 연구원: 네? 뭐라 하셨습니까?
배일호 박사: …아, 아니. 됐다. 너한테 한 말 아니다.
배일호 박사가 자리를 뜬다.
배일호 박사: 미친 짓거리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그러니까, 여기 내가 있다는 거지? 좋아. 그놈만 죽이고 갈게. 문제없을 거야.
배일호 박사가 복도로 걷는다.
배일호 박사가 복도로 걷는다.
배일호 박사가 복도로 걷는다.
배일호 박사: …저기요, 길이 안 끝나는데?
배일호 박사가 멈춘다. 주변을 둘러보자, 전등이 깜빡거린다. 벽에는 낙서가 가득하다. 대부분 방독면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그림이고, 간혹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적혀 있다.
<배일호 박사는 그것을 읽을 수 있다.>
배일호 박사: 바나나… 3?
배일호 박사: 이게 뭐야.
<뭐겠어. 할리갈리지.>
화면이 암전된다.
스포트라이트가 하나 켜진다.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다. 배일호 박사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테이블 앞으로 걸어간다.
<속삭이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간혹 귀를 찢는 비명이 섞인다. 환청이라기엔 너무 생생하다. 누구의 비명인지, 그건 한참 전부터 알고 있다.>
<마치 그날처럼.>
배일호 박사가 테이블 앞에 앉는다. 어둠 속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온다. 피투성이 손이다. 소리 없이 카드를 섞고는 테이블 위에 나눠 준다.
배일호 박사: …그래서, 다짜고짜 할리갈리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게임 참가자는 총 네 명. 배일호 박사를 포함해서.
😄: 바나나 3
🥺: 라임 2
😠: 딸기 4
<배일호 박사의 차례다.>
배일호 박사: …딸기 1
종이 울린다.
배일호 박사가 이겼다. 모든 카드를 가져간다.
게임은 계속된다.
배일호 박사: 바나나 2
😄: 딸기 3
🥺: 바나나 1
😠: 자두 4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계속 이어진다.
배일호 박사: …할리갈리 좋아하긴 하는데, 갑자기 이걸 왜 하는데?
배일호 박사: 자두 3
😄: 라임 4
🥺: 바나나 3
😠: 잘린 손
잠시 침묵.
배일호 박사: …응?
게임은 계속해야 한다.
배일호 박사: 잠깐만.
게임은 계속해야 한다.
배일호 박사: 시끄러워! 그냥 날 내보내!
배일호 박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린다.
<배일호 박사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배일호 박사: …얼씨구?
배일호 박사가 다시 자리에서
<게임에 열중한다.>
배일호 박사: 지랄 염병.
배일호 박사가 다시 카드에 손을 얹는다.
배일호 박사: 벌레 4
😄: 살덩어리
🥺: 눈알
😠: 피 묻은, 이름없는 명찰
배일호 박사: …아니.
종이 울린다.
<배일호 박사가 이겼다. 승자에게 주어진 건… 권총.>
😄: …
🥺: …
😠: …
표적은 명확하다.
배일호 박사가 망설임 없이 쏜다.
총알은 각각 임유진 연구원, 정지석 박사, 고기찬 박사의 머리를 향해 날아간다.
네가 버린 자들이다
🥺: 네가 우릴 버렸어.
배일호 박사: …아니야. 그건 사고였어.
😠: 그 사고를 일으킨 건 너였지.
😄: 모두를 죽이고 혼자 살아남았네.
배일호 박사가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이번엔 총알은 정처없이 표적을 빗겨나간다.
😄: 그래도, 넌 행복해?
배일호 박사: …그래.
배일호 박사: 행복해.
잠에서 깰 시간이다.
너가 걸어온 길
기록일자: 2014년 3월 21일
장소: 제17K기지 이사관실
배일호 이사관이 황급히 눈을 뜬다.
배일호 이사관: …씨발, 머리 깨질 것 같네. 속도 뒤집어지고…
배일호 이사관: 잠깐, 여긴…?
낯익은 장소다. 자신의 이사관실. 탁자 위에는 손거울이 놓여 있다. 무심코 거울을 집어 든다.
거울 속 얼굴을 들여다본다. 방독면이 아니다. 익숙한 얼굴. 모난 데 없이 평범한 모습.
배일호 이사관: …돌아왔다.
배일호 이사관: …돌아온 거 맞겠지?
<아니, 돌아온 게 아니다. 여긴 여전히 악몽 한가운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어나오는 감정을 부정할 수 없다. 부정하지 않는다. 부정하지 못한다.>
한동안 침묵만이 흐른다. 배일호 이사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계를 바라본다. 초침은 어딘가 비틀려 있다. 알 수 없는 형상으로 변형되어 있다. 욕지거리가 튀어나온다.
누군가 들어온다.
연서현 연구원: 이사관님, 좋은 아침입니다.
배일호 이사관: 어? 어… 그래.
배일호 이사관: 연서현… 서현이구나. 그래, 서현이. 너도 있었지. …기억난다.
연서현 연구원: 어? 뭡니까, 그 애틋한 눈빛은.
배일호 이사관: 뭐? 아, 아니. 별거 아냐. 잠을 하나도 못 잤어.
<배일호 이사관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후회도, 두려움도 없다. 이 감정조차 거짓된 것이겠지. 억지로 주입당한 감각.>
<싫지는 않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니까. 그런데도 낯설지 않다.>
연서현 연구원: 이상하게 왜 그러십니까? 오늘 일정 짜달라고 하셨잖아요.
배일호 이사관: 일정… 그래, 일정. 뭔데, 말해봐.
연서현 연구원: 오늘 아침에 이사관보님들과 정기 회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SCP-2…
들리지 않는다. 세상이 멍해진다. 귀가 먹먹해진다.
연서현 연구원: 어, 듣고 계십니까?
배일호 이사관: 뭐, 귀는 언제나 열려 있지. 잘 듣고 있어.
연서현 연구원: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십니다만…
배일호 이사관: 그냥… 꿈 같아서.
연서현 연구원: 꿈이요?
배일호 이사관: …모든 게.
<그는 어느 순간부터 연기를 하지 않았다.>
제17K기지
기록일자: 2014년 3월 22일
장소: 제17K기지
😃: 배일호 이사관님! 어서 오십시오!
😄: 어제 잘 들어가셨습니까?
배일호 이사관: 어, 응. 대충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가 환영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딱히 반갑지는 않다. 알지도 못하는 얼굴들이고, 기억나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배일호 이사관: …내가 어제 뭐 했지? 왜 다들 저래?
연서현 연구원: 어제 회식하셨잖아요. 다들 이사관님을 좋아하시니까요.
배일호 이사관: …날?
연서현 연구원: …이상하십니까?
배일호 이사관: 내가 쟤들한테 뭘 해줬나?
연서현 연구원: 해줬다기보다는… (잠시 망설인다) 네, 기지 실적이 이만큼 올라온 건 이사관님 덕분이니까요. 다들 존경하고 있죠.
배일호 이사관: …그런가.
배일호 이사관: 잘 와닿지는 않는데.
연서현 연구원: 이해합니다. 이사관님은 그런 거 신경을 잘 안 쓰시는 분이니까요.
배일호 이사관이 사무실을 지나간다. 연구원들은 업무를 보다가도 배일호 이사관과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한다.
<대부분 우호적이고, 친절하다. 영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다.>
배일호 이사관이 밖으로 나간다. 연서현 연구원이 숙였던 고개를 든다.
연서현 연구원: 아, 오늘 파티는 어떡하실 겁니까? 참석하십니까?
배일호 이사관: …파티?
연서현 연구원: 네. 제17K기지가 올해 최고의 실적을 낸 기지로 선정됐잖아요. 기념 파티가 열릴 예정입니다. 모든 직원이 참가할 거고요.
잠시 멈춤.
배일호 이사관: 아, 그랬나. 참가… 해야지. 참가.
연서현 연구원: 음, 오늘따라 이상하십니다. 식은 땀도 다 나시고…
연서현 연구원이 배일호 이사관의 이마에 손을 댄다.
배일호 이사관: 잠깐―
연서현 연구원: 열은 없으시네요. 괜찮으십니까?
배일호 이사관은 말이 없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했다. 모두가 자신을 기피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이내 어깨를 으쓱인다.
배일호 이사관: 나, 난 괜찮아. 그냥… 밤새서 그래.
연서현 연구원: 아, 그렇다면 오늘 파티는 쉬시는 게…
배일호 이사관: 나 괜찮다니까. 참석할 거야. (웃으며)날 위한 자리 아니야?
연서현 연구원: (마주 보며 웃더니)맞습니다. 언제나 훌륭하십니다, 이사관님.
배일호 이사관: 나도 알고 있어.
연서현 연구원: …언제나 뻔뻔하시고요.
배일호 이사관: 시끄러워.
기록일자: 2014년 3월 22일
장소: 제17K기지 구내식당
배일호 이사관이 자리에 도착한다. 직원들이 반긴다.
😐: 자, 이사관님 오셨습니다!
박수와 환호. 차분한 박수 소리와 어딘가 과한 환호가 뒤섞인다.
배일호 이사관: 자자, 나 신경 쓰지 말고 마저 식사들 해.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자, 이쪽에 앉으시죠.
😏: 맞습니다. 기념 파티잖아요? 이사관님이 주인공이 되어야죠.
😯: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멋진 저녁 식사가 될 것이다.
배일호 이사관이 자리에 앉는다. 식탁 위에는 푸짐한 음식이 차려져 있다. 음식이 꾸물거리며 꿈틀거린다. 옆자리의 직원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집어 삼킨다.
😏: 오늘따라 음식이 더 맛있네요.
🙄: 당연하지. 파티 음식인데. 더 신경 썼을걸?
😯: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배일호 이사관이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집는다. 그 순간, 음식이 발버둥친다. 몸부림친다. 날갯짓을 하며 겉껍질을 찢고 나오려 한다. 배일호 이사관이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음식을 내려놓는다. 그러자 다른 직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집어 입에 넣는다.
🙄: 그래서, 이사관님. 이번에 새로운 외부 차원을 발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배일호 이사관: 발견한 건 아니지. 원래 있던 걸 찾아낸 것뿐이야.
연서현 연구원: 여타 다른 넥서스보다 특이한 환경을 갖춘 곳입니다. 아직 사전조사 중이어서 함부로 말을 올리기는 힘들지만…
😏: 수십 갈래로 쪼개져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연서현 연구원: 정확히는 여섯 갈래입니다. 파편이 많긴 하지만, 외부 차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배일호 이사관: 우리가 발견한 것 중 가장 다채롭고, 가장 새롭지. 이해할 수조차 없고.
😯: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직원들이 계속 음식을 집어먹는다. 과즙이 튄다. 탁자 위로 무언가의 다리가 떨어진다. 절단된 관절에서 노란 점액이 흘러내린다.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배일호 이사관: 그렇기에 연구만 제대로 진행된다면, 올해 실적도 보장할 수 있겠지.
🙄: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배일호 이사관: 위험하지. 애당초 그 정도 크기의 외부 차원을 본 적도 없거든. 기준 차원에 접근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미간을 문지르며)알아내야 할 것들이 많을 거야.
🥺: 에이, 여기까지 와서 또 일 얘기입니까. 이사관님도 좀 드세요.
직원들이 다시 음식을 집어먹는다. 배일호 이사관이 천천히 음식을 집어 든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옆자리의 연서현 연구원을 쳐다본다.
배일호 이사관: 자넨 안 먹나?
연서현 연구원: 글쎄요. 별로 배가 고프지 않네요.
😄: 아, 안 드실 거면 주세요! 제가 먹겠습니다!
누군가 연서현 연구원의 접시를 낚아챈다.
콰직거리는 소리. 으깨지는 소리.
배일호 이사관: 그래, 일 얘길 여기까지 끌고 올 필요는 없겠지.
배일호 이사관이 음식을 씹는다.
<그 순간, 질감이 터져 나온다. 이상한 맛이다. 끈적하다. 역한 냄새가 입안에 퍼진다.>
배일호 이사관: …우욱―?!
배일호 이사관이 그대로 음식을 뱉어낸다.
😄: 괜찮으세요?
연서현 연구원: 이사관님?! 어디 안 좋으십니까?
배일호 이사관: …지금 이게 괜찮아 보이냐? 음식에 뭐 넣었어?
😃: 뭐가 들어갔다니요? 팥? 크림? 맛있기만 한데요.
배일호 이사관: 너 다 먹어라. 난 입맛 배렸다.
배일호 이사관이 접시를 밀어낸다. 직원들이 망설임 없이 접시를 가져간다. 그들이 배일호 이사관이 방금 뱉어낸 음식을 집어 먹는다.
배일호 이사관은 조용히 지켜본다.
배일호 이사관: …그나저나. 파티인데, 노래도 없고. 너무 적막하잖아. 누가 한 소절 좀 불러봐. 흥 좀 띄우게.
😏: 아! 그럼 제가 불러보겠습니다!
기괴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늘은 아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이 파티를 즐길 뿐이다.>
훌륭한 저녁 파티
기록일자: 2014년 5월 26일
장소: 제17K기지 화장실
배일호 이사관: 우엑!
배일호 이사관이 변기 앞에 웅크린 채 쏟아낸다. 쓰디쓴 위액이 목을 타고 넘어온다. 비워낼 것도 없는데, 몸이 스스로 거부하듯이 경련한다. 고개를 들었을 때, 변기 옆 벽면의 거미집이 무너진다. 집을 잃은 새끼 거미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배일호 이사관: …썅, 넘어간 것도 없는데.
연서현 연구원: 괜찮으십니까?
배일호 이사관: 어이씨―! (깜짝 놀라며)까, 깜짝이야! (화를 내며)야, 너. 뭘 멋대로 남자 화장실에 들어와?!
연서현 연구원: 문제가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배일호 이사관: …괜찮냐고?
배일호 이사관이 피식 웃는다. 곧 미간을 짚고 고개를 젓는다.
배일호 이사관: 하나도 안 괜찮아. 머리 깨질 것 같고, 짜증 나 죽겠고. GoI-6510은 점점 기준현실로 더 가까워지고 있고 말이지. 너도 알잖아. 곧 그 망할 것들이 살겠다고 착 달라붙을 게.
연서현 연구원: 네. 하지만, 마땅한 방도가 없습니다.
배일호 이사관: 없긴 왜 없어. 내가 누군데. 외부차원학을 나보다 더 잘 아는 놈은 없어.
연서현 연구원: 네, 알고 있습니다.
배일호 이사관: …즉답하긴. 일으켜 줘 봐. 다시 돌아가게.
연서현 연구원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민다. 배일호 이사관이 손을 잡고 일어선다. 그러다 그녀도 거미집을 건드린다. 새끼 거미들이 쏟아져 나와 그녀의 팔을 기어오른다. 연서현 연구원은 신경 쓰지 않는다.
연서현 연구원: …이건 재단에서 해결할 문제입니다. 개인이 아니라요. 슬슬 상부에 보고하는 게…
배일호 이사관: …말 되는 소릴 해라. 파티할 때 못 들었어? 실적 채워야 한다고. 그런 얘기 줘봤자, 위에선 아무도 신경 안 써.
연서현 연구원: 재단은 공익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까?
배일호 이사관: 난 이 기지를 위해 일해.
배일호 이사관: 그동안 예산, 설비, 직원 복지, 다 어떻게 챙겨줬는지 알잖아. 이 조그만 기지에서. 응?
배일호 이사관: …그리고 이제 남자 화장실에서 좀 나가지?
연서현 연구원: (당황하며)아, 시, 실례했습니다!
연서현 연구원이 부리나케 문을 열고 나간다. 배일호 이사관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는다.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곳에는 사람이 묶여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 거미집을 건드렸던 마지막 사람일 것이다. 다행이다. 오늘은 그의 차례가 아니다. 배일호 이사관이 화장실을 나선다.>
기록일자: 2014년 7월 28일
장소: 제17K기지 차원 연구실
배일호 이사관이 실험 결과를 검토한다. 바닥에는 머리 없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배일호 이사관: …그러니까, GoI-6510은 원래 하나였다가, 뭔가에 의해 찢어졌다는 거네?
🙃: 네. 아무리 계산해봐도, 여섯 개의 거대한 차원이 하나로 묶일 이유가 없습니다.
배일호 이사관: 가능성은 있네. 아니, 그거밖에 없겠네. 외부차원은 기존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으니까.
🙃: …정말 상부에 보고하시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배일호 이사관: 난리 나겠지. 하지만 보류해. 이대로 보고하기엔 모양새가 안 좋아.
🙃: 네? 아니, 꽤 위급한 상황 같은데―
배일호 이사관: 시끄러워. 여기서 직위 제일 높은 놈이 누구지?
시체가 있다.
배일호 이사관: 너야? 네가 이 작은 기지 예산을 모두 책임져 줄 건가? 이 기지는 실적 하나로 굴러가. 네 녀석들 월급도 다 그렇게 나오는 거라고.
🙃: …
직원이 묵묵히 연구실 안을 둘러본다. 그는 갑자기 의자를 밟고 올라간다. 그리고, 스스로 목을 맨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몸이 흔들린다.
새 연구원이 들어온다.
배일호 이사관: …계속 연구 감독해. 아, 그리고 장치 준비해 둬.
🙁: 장치요? 아, 외부차원 절단기 말씀하시는 겁니까?
배일호 이사관: 아니, 그 아래.
🙁: 네? 외부차원을 이곳과 연결하겠다고요?
배일호 이사관: 실험엔 언제나 각오가 필요하지. 준비해 둬.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타고 흐른다. 그 피가 배일호 이사관의 구두를 적신다.
배일호 이사관: 이번엔 다같이 겨울좀 따뜻하게 보내보자.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외부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기록일자: 2014년 8월 12일
장소: 제17K기지 이사관실
연서현 연구원이 이사관실로 들어선다. 배일호 이사관이 그녀를 바라본다.
배일호 이사관: 매일 반복되는 절차군. 어서 앉아.
연서현 연구원: 네.
<잠시 침묵. 배일호 이사관이 연서현 연구원을 유심히 관찰한다. 눈썹이 미세하게 떨린다. 손가락은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이 움직인다. 그녀는 불안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안해 보인다.>
배일호 이사관: 표정이 안 좋네. 무슨 일이야?
연서현 연구원: …이사관님.
배일호 이사관: 말해 봐. 문책하려는 거 아니니까.
연서현 연구원: …당장 실험을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긴 침묵.
배일호 이사관: …이유는?
연서현 연구원: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연서현 연구원: 추가 실험 도중 현실침탈로 나타난 GoI-6510 개체 다섯. 무력화 시도 중 사망한 인원 열여덟.
연서현 연구원: 그것들은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지성도 없을 뿐더러, 통제조차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굳이 억지로 공간을 연결할 이유가 없습니다.
긴 침묵.
배일호 이사관: …연서현 연구원.
연서현 연구원: 네, 이사관님.
배일호 이사관: 넌 내가 뭐라 답할지 알고 있겠지?
연서현 연구원: …거절하시겠죠.
<늘 그랬듯이 당신은 이를 무시한다. 이 기지에서 당신보다 위대한 것은 없기에. 그들의 죽음은 응당 필요했을 뿐이다.>
배일호 이사관: 누누이 말했지. 재단은 이 작은 기지를 신경 쓰지 않아.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건 오직 착실한 실적뿐이야.
배일호 이사관: 열여덟 명? 아니, 그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도 그들은 신경쓰지 않아. 나는 신경쓰지 않아!
짧은 정적. 거친 숨소리.
배일호 이사관: …하지만 결국 그들의 죽음도 나중엔 영웅담이 되겠지. 우린, 더 많은 예산을 받게 될 거고.
🙁: 맞습니다. 우리는 죽어야 할 인력이었습니다.
😄: 각오했습니다. 이를 위해 재단에 지원했습니다.
😃: 제 죽음이 의미를 가진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배일호 이사관: 그래서, 열여덟 명이라고? 거짓말하지 마. 그 정도로 안 죽은 거 알고 있으니까. 고작 셋 뿐이었어.
배일호 이사관: 난 여기 이사관이야. 나한테 숨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소릴 하는 이유가 뭐지?
연서현 연구원: …죽었습니다.
배일호 이사관: 고집 피우기는. 안 죽었다고.
연서현 연구원: 당신 때문에.
배일호 이사관: …뭐?
연서현 연구원: 너 때문에 죽었다고. 내 동생이.
15분간 침묵.
배일호 이사관: …장례 비용은 내줬잖아.
<당신은 연약한 사람이다. 들어오는 칼날을 잡지도, 막지도 못한다. 그저 받아들일 뿐. 모든 공격에 무방비했기 때문에, 당신은 오히려 가시를 만들었다.>
연서현 연구원: 그래서, 이게 해결책이었습니까?
배일호 이사관: …뭐라고?
연서현 연구원: 8월 말 최종 실험은 계속 진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연서현 연구원: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아주 나쁜 사람이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죽어버린 자들의 가치를 무디게 만들 수 없었기에.>
배일호 이사관이 무너진다. 의자에 주저앉는다. 모든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채.
<당신은 아주 나쁜 사람이다.>
테이프#1
[배일호 이사관이 연구실에 도착한다. 시체가 가득하다.]
배일호 이사관: 연구 진척은?
[대답이 없다.]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날벌레들이 시체의 상처를 파고든다. 구더기들이 핏물 속을 기어 다닌다. 연구원들의 눈은 푹 꺼져 있고, 입은 비명을 지르다 멈춘 듯 벌어진 채다.]
배일호 이사관: …그래, 파이팅하도록 해. 우린 할 수 있을 거야.
[아무도 없다.]
배일호 이사관: 괜찮아.
[아무도.]
배일호 이사관: 난 괜찮다고.
테이프#2
[화면이 제17K기지 영안실을 비춘다. 모든 서랍이 닫혀 있다. 열린 곳이 없다는 것은, 이곳이 시체로 가득 찼다는 반증이다.]
[배일호 이사관이 안으로 들어선다. 그는 조용히 서랍 하나를 연다.]
[천으로 덮인 시신이 보인다. 구더기들이 바닥으로 쏟아진다. 몇 마리는 그의 신발을 기어오른다.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연서현 연구원: 오늘 사망자입니다. [기억나지 않는다] 연구원의 시신이죠.
배일호 이사관: 구더기로 가득한데.
연서현 연구원: 네. 격리를 시도하려 했던 변칙 개체가 시체에 알을 깠습니다.
[배일호 이사관이 서랍을 다시 밀어넣는다. 그러나 뭔가 걸린 듯 부드럽게 닫히지 않는다.]
연서현 연구원: 정확히는… 살아 있을 때 깐 것 같더군요.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배일호 이사관: …죽었잖아. 더는 고통을 느낄 일도 없겠지.
연서현 연구원: 그렇습니다.
[순간, 화면이 흔들린다. 배일호 이사관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배일호 이사관: …정말 그랬을까?
연서현 연구원: 이제 와서 무슨 소리십니까? 죽은 자에게 온정을 느낄 이유는 없습니다.
[배일호 이사관이 연서현 연구원을 바라보려 하지만, 그곳엔 천으로 꿰맨 지지대 없는 마네킹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눈도 없고, 입도 없다. 배일호 이사관의 시선이 흔들린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
배일호 이사관: …연서현?
[5초간 침묵이 이어진다.]
배일호 이사관: …서현아?
[5초간 침묵이 이어지며, 벽 너머에서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배일호 이사관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영안실은 시체로 가득하다. 구더기와 벌레들이 그것들을 탐식하고 있다.]
배일호 이사관: …씨발.
테이프#3
[GoI-6510 개체가 연구원을 쫓고 있다. 연구원은 죽을힘을 다해 달린다. 하지만 개체는 점점 가까워진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다리가 떨린다. 벽이 보인다. 막다른 길이다.]
[연구원이 비명을 지른다. 개체가 다리를 붙잡는다. 독침이 연구원의 목을 향해 날아든다.]
[총성]
[보안 요원이 나타나 개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총알이 개체의 머리를 관통한다. 머리 없는 몸뚱이가 경련을 일으키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다.]
🤣: 씨발…
[연구원이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인다. 손을 떨며 얼굴을 감싼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개체의 시체를 걷어차기 시작한다.]
🤣: 씨발, 씨발! 씨발 진짜! 개새끼가! 씨발!
[연구원이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사체의 점액이 연구복에 잔뜩 묻어 있다.]
🤣: 괜찮아요. 전 괜찮아요. 다시 일로 돌아갈게요.
[연구원이 비틀거리며 연구실로 돌아간다.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는다.]
[보안 요원이 개체를 향해 총을 계속 쏜다. 이미 죽은 몸뚱이에서 끈적한 진물이 사방으로 튄다.]
[배일호 이사관은 감시실에서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감시 화면에는 같은 광경이 반복되고 있다. 연구원이 죽어가고, 개체가 도륙당하고, 다시 연구원들이 돌아가고.]
[침묵. 그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버튼을 누른다.]
[모든 화면이 꺼진다. 감시실은 어둠에 잠긴다.]
이윽고: 날이 다가왔다.
기록일자: 2014년 8월 30일
장소: 제17K기지 이사관실
연서현 연구원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배일호 이사관은 고개를 들지도 않는다.
연서현 연구원: 좋은 아침입니다. 이사관님.
배일호 이사관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연서현 연구원이 조용히 보고서를 펼친다.
연서현 연구원: 오늘부터 실험 시작입니다. 참관하시겠습니까?
배일호 이사관: …아니. 위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해야 해.
연서현 연구원: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해두겠습니다.
배일호 이사관이 5초간 침묵한다. 손끝이 떨린다.
배일호 이사관: …이 실험은 실패할 거야.
연서현 연구원은 반응하지 않는다.
배일호 이사관: 우리 모두 그 실험에서 실패하고, 전부 죽게 될 거다. 모든 자료는 묻히고, 말소되고, 결국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거지.
배일호 이사관: 난, 나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어. 그래서 애써 잊고 살았어.
배일호 이사관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목소리에 힘이 없다.
배일호 이사관: 그래서, 그렇게 끝났던 거야. 난,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희가 죽어버리니까,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게 싫었어.
배일호 이사관: 이 작은 기지가 내 전부였어. 그래서… 그래서 서로 잘 되자고 한 거였는데. 그뿐이었는데…
그가 연서현 연구원을 바라본다. 눈이 흔들린다.
배일호 이사관: 그때, 난, 나는 그때, 아무것도 못하고… 병신 같이…
말끝이 흐려진다. 침묵이 길어진다. 연서현 연구원이 조용히 그를 바라본다.
연서현 연구원: 후회하십니까?
배일호 이사관: …후회해.
연서현 연구원: 왜 후회하십니까?
배일호 이사관: …내가 실패해서.
연서현 연구원이 피식 웃는다.
연서현 연구원: 여전히 오만하십니다.
배일호 이사관: …뭐?
연서현 연구원: 실험은 중지되지 않습니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저희는 실험을 해야만 합니다. 위에서 시키는 일은 억지로라도 해야하니까요.
배일호 이사관이 침묵한다.
연서현 연구원: 왜냐하면, 이사관님은 언제나―
<지금도 넌 자기 자신 밖에 모른다.>
기록일자: <모른다>
장소: 제17K기지
<제17K기지의 비상등이 깜빡이며 켜진다. 붉은 조명이 어두운 복도를 가른다. 배일호 이사관이 숨을 몰아쉬며 달리고 있다. 발소리가 축축한 바닥을 미끄러지듯 스친다. 제17K기지에서 강제적으로 진행된 실험이 실패했다. 아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결말이었다.>
― 으아아악!
나 아직 안 죽었어, 아직 안 죽었어. 아직 안. ―
― 여기 좀 막아봐! 단단히 막아! 못 들어오게!
문 열어! 씨발 문 열라고!―
― 지원이 더 필요합니다! 이대로는 못 막아요!
우리 밖에 안 남았어! 총알이나 더 퍼부어! ―
― 이사관님? 이사관님, 이사관님! 살려주세요!
야! 야 이 개새끼야! ―
― 미, 미안, 미안해!
탈출구는…? ―
― 이 길밖에 없는 거 알잖아.
두 발의 총성.
<네 뒤를 누가 쫓고 있다.>
― 씨발, 개씨발!
<널 죽이기 위해 달려든다.>
…엄마. ―
<그리고 넌, 그때와 다르다.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달리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 문 막으라고! 제발! 진짜!
<비명이 끝없이 메아리친다. 벌레의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네 뒤를 쫓는 그것이 깜빡거리는 전등 아래에 숨어 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
<56명이 사망했다.>
배일호 이사관이 방 안으로 들어선다. 도망치려다 실패한 자들의 시체가 바닥을 덮고 있다. 공기는 썩은 냄새와 피비린내로 가득하다.
그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문을 잠근다. 이제 겨우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배일호 이사관: 나 때문에 이런 거야?
그가 천천히 방 안을 걸어 들어간다.
배일호 이사관: …아니라고 해줘.
10초간 침묵.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배일호 이사관: 누가 내게 말이라도 해달라고.
5초간 침묵. 오직 벌레들이 벽을 기어오르는 소리만이 들린다.
배일호 이사관: 왜 다들 말하지 않았어?
그가 걸음을 멈춘다. 그 앞에는 벽이 있다. 그리고 그 벽 위에는, 연서현 연구원이 걸려 있다. 그녀의 어깨죽지엔 검은 침이 박혀 있다. 이미 오래전 숨이 끊어진 상태다. 쓰러지지도, 온전히 서 있지도 못한 채 기묘하게 매달려 있다.
배일호 이사관이 침을 삼킨다.
배일호 이사관: 아니라고 해줘.
배일호 이사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 걸 알잖아. 나도 잘해보고 싶었다고!
연서현 연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죽었으니까.
배일호 이사관: …내 잘못인 거, 나도 잘 알아.
배일호 이사관: 그때 네 말 들었을걸.
그 순간, 문이 열린다.
그것이 들어온다.
배일호 이사관은 서현의 몸에 박혀 있는 침을 뽑아 든다. 거칠고 날카로운 표면이 그의 손바닥을 찢는다.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가 고개를 든다. 뒤를 돌아본다.
배일호 이사관: 그래.
배일호 이사관: 순순히 죽어주지는 않을 거야.
그가 그것을 향해 달려든다. 그것 역시 배일호 이사관에게 달려든다. 두 존재가 충돌한다. 비명이 터져 나온다.
배일호 이사관: 이 개새끼가!
그는 침을 힘껏 휘둘러 그것의 대가리를 찌르려 하지만, 실패한다. 어둠 속에서 그것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거대한 갑충이다. 검은 외골격이 반사된 붉은 조명을 튕겨낸다. 단단하고, 거칠고, 꿈틀거린다. 그것이 그의 팔을 물어 뜯어 찢는다.
배일호 이사관: 죽어! 죽으라고!
30분 동안 격렬한 몸싸움이 이어진다.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찢어진다. 배일호 이사관은 있는 힘을 다해 싸운다. 갑충의 외골격이 산산조각 난다. 그가 움켜쥔 침은 이미 그의 손을 관통한 상태다. 통증이 전신을 마비시킨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는다. 갑충이 몸부림친다. 발버둥친다.
배일호 이사관이 있는 힘껏 그것의 머리를 짓이긴다. 뚜둑 소리와 함께 그것의 외골격이 부서진다.
<그리고 갑충이 죽는다.>
<숨을 헐떡이며, 배일호 이사관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왼팔은 절단되었고, 멀쩡한 곳이라곤 남아 있지 않다.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살점이 뜯겨 나가고, 피가 바닥을 적신다. 그러나 그는 이겼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갑충의 시체를 바라보지만, 사람의 시체만 있을 뿐이다. 검은 양복을 입고, 방독면을 쓴 사람이다. 그 시체의 명찰에는 '배일호'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배일호 이사관: …흐, 흐흐.
배일호 이사관이 웃는다. 그 소리는 비명으로, 울음으로, 다시 웃음으로.
그리고 그는 뒤로 쓰러진다.
현실로 돌아가라
기록일자: 2014년 3월 21일
장소: 제17K기지 이사관실
<온몸이 아프다. 언제나 그랬다. 항상 아팠다. 시야가 낮고 불투명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씨발…
<너는 상황을 이해했다. 이곳은 환풍구 안이다. 틈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낯익은 공간이 보인다. 이사관실. 네가 매일같이 앉아 있던 자리.>
<그리고 그곳에는 "너"가 있다.>
연서현 연구원: 이사관님, 좋은 아침입니다.
배일호 이사관?: 그래. 어제 부탁했던 보고서는.
연서현 연구원: 아, 여기 있습니다.
<"너"는 무심히 보고서를 받아든다.>
배일호 이사관?: 그래, 돌아가봐.
연서현 연구원: 아, 네.
<연서현 연구원이 돌아서려다 멈춘다.>
연서현 연구원: 그… 이사관님.
배일호 이사관?: 또 왜. 시간 뺏는 거면 대답 안 한다.
연서현 연구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배일호 이사관?: 그래.
???: 저 모습은…
<진정한 "너"의 모습이다.>
<너는 조용히 앞으로 기어간다. 직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네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냉소적이다. 기지는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곳이었다.>
이서진 박사: 또 이사관님께 혼났지?
연서현 연구원: 네? 아, 그…
이서진 박사: 원래 저런 사람이야. 너무 담아두진 마.
연서현 연구원: …네.
김정철 연구원: 아무리 그래도, 이사관님 진짜 무섭습니다.
이서진 박사: 뭐야, 언제 왔냐.
김정철 연구원: 방금요. 이사관님 뒷담하시는 거 아녜요?
김정철 연구원: 사람이 진짜 뭐랄까, 뒤가 없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인간적이지 않잖아요.
연서현 연구원: 그래도 존경할만한 분이잖습니까… 그 나이에 이사관까지 다셨는데.
김정철 연구원: 아니, 이 작은 기지에 이사관 달았다고…
이서진 박사: 너무 그러진 마. 이 작은 기지 먹여 살리는 것도 이사관님 덕분이니까.
이서진 박사: 그래도, 동경할만한 사람은 아니지.
이서진 박사: 뭐랄까, 그 사람은…
<벌레 같은 사람이다.>
<너는 도망치듯 앞으로 기어간다.>
기록일자: 2014년 3월 22일
장소: 제17K기지
<"너"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다. 모두가 "너"를 무시한다. "너" 역시 그들을 무시한다. 타인과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연서현 연구원: 아, 이사관님. 안녕하십니까.
<다른 인원들이 연서현 연구원에게 시선을 돌린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서린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감춘다. 그들의 시선은 온전히 "너"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너"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배일호 이사관?: 어제 맡긴 업무는?
연서현 연구원: 아, 아직 다…
배일호 이사관?: 오늘까지 끝내. 더 시간 못 준다.
이서진 박사: …이제 막 1년 된 애한테 너무 큰 걸 시키는 것 아닙니까?
배일호 이사관?: 내가 1년 차일 때는 그것보다 더한 것도 했어. 그리고, 무능한 애한테 그런 걸 줄 리가 없지.
<너는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더듬이가 움찔거린다.>
배일호 이사관?: 내가 쟤한텐 왜 일을 안 주겠어.
김정철 연구원: …
<김정철 연구원이 눈치를 본다. "너"는 피식 웃으며 다시 무심히 걸어간다.>
배일호 이사관?: 아니, 뭐. 일좀 열심히 하라고. 놀 생각만 하지 말고.
5초간 침묵.
배일호 이사관?: 그리고 오늘 파티 있다고 했던가? 니들끼리 잘 놀아라. 난 바쁘니까.
이서진 박사: 파티 같은 거 원래 안 오시잖아요.
배일호 이사관?: 그러니까 바쁘다고. 너희도 나 없는 게 편하잖아. 초대장 같은 것도… 아, 초대는 해야 내 체면이 서니까? 참 다들 친절해, 아주.
<원래부터 그 파티엔, 널 위한 자리는 없었다.>
???: …알아. 알고 있었어. 난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으니까. 갈 용기도 없었지.
이서진 박사: …갔네.
고기찬 박사: 정철이는 좀 어때?
김정철 연구원: 저, 전 괜찮습니다.
임유진 연구원: 네가 참아. 이사관님 원래 저런 사람이잖아.
김정철 연구원: 네… 괜찮습니다. 그냥, 가끔 무섭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진짜… 뭐랄까…
이서진 박사: 그래. 벌레 같지.
이서진 박사: 더럽고 역겨운데다가, 추잡하기만 한 벌레.
<너는 앞으로 기어간다.>
기록일자: 2014년 5월 26일
장소: 제17K기지 화장실
<"너"는 변기 앞에 웅크린 채 음식물을 토한다. 어둠이 화장실을 집어삼킨다. 전등은 켜지지 않는다. 손을 더듬어도 스위치는 없다. "너"는 아예 켤 생각도 하지 않는다.>
<"너"는 그 광경을 30분 동안 모두 지켜본다.>
배일호 이사관?: 나 때문에…
<"너" 때문에 오늘 세 명이 죽었다. 김정철 연구원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넌" 방금 상부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물론 연구 중인 외부 차원에 대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너"는 흐느낀다. 영안실에서 그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남들 앞에서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무척이나 연약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너는?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 ………
<침묵은 답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그랬듯이, 똑같다.>
<"너"는 세면대에서 세수를 한다. 차가운 물이 얼굴을 덮는다. 아무렇게나 올려둔 보고서를 다시 집어 든다. 그리고 이사관실로 돌아간다.>
<너는 앞으로 기어간다.>
기록일자: 2014년 8월 12일
장소: 제17K기지 이사관실
배일호 이사관?: 안녕, 좋은 아침이야… 안녕, 좋은 아침이네.
한숨. 깊고 무거운, 짧지만 지독한 한숨.
배일호 이사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연서현 연구원이 안으로 들어온다.>
배일호 이사관?: 아, 안녕. 연서현 연구원. 좋은―
연서현 연구원: 당장 실험을 중지해주세요!
<침묵.>
배일호 이사관?: 뭐?
연서현 연구원: 알고 계시잖아요! 너무 많은 사상자가 생겼어요.
연서현 연구원: 그것들은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지성도 없고, 통제조차 불가능합니다! 억지로 공간을 연결하다간 기지가 끝장날 게 뻔하다고요!
배일호 이사관?: 아니, 난 그런 게―
연서현 연구원: 실패할 거란 거,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데도 멈추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문책이 두려운 겁니까? 아니면 저흰 그냥, 당신한텐 소모품입니까?
5초간 침묵.
연서현 연구원: …이사관님, 대답 좀 해주세요. 제발.
2분간 침묵.
배일호 이사관?: …너, 내가 뭐라고 답할지 알지?
???: 아니야.
배일호 이사관?: 내가 실패할 거라고? 내가 너희랑 같아 보여?
???: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야.
배일호 이사관?: 내가 출세하려고 이러는 거라고 생각해? 이 좆만한 기지가 지금까지 어떻게 굴러왔는지 알고 있는 거야? 그런데도 그만두라고? 너 제정신이야? 대답해 봐.
5초간 침묵.
배일호 이사관?: 이 기지를 지탱한 게 누구였지? 대답해 보라고.
연서현 연구원: …이사관님.
배일호 이사관?: 그건 대답이 아냐. 대답해!
연서현 연구원: …너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연서현 연구원이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간다.>
???: …난 이런 말 한 적 없는데. 기억에 없어.
???: 기, 기억에 없다고. 난, 내가 이렇게…
???: 나는…
배일호 이사관?: …썅.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너는 울부짖는다. 하지만 더 이상 너에겐 자아가 없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른다.>
<너는 앞으로 기어간다.>
또다시: 날이 다가왔다.
<때가 되었다. 너는 "너"를 죽여야 한다.>
<그것을 위해 이 지옥에 발을 들였으니까.>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하면 된다. 그리하여, 넌 다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인간으로.>
<너는 "너"를 뒤쫓는다. 전속력으로 기어간다. 주변은 혼란스럽다. 붉었고, 새빨갛고, 차가웠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날벌레가 떼로 몰려다닌다.>
<"너"가 문을 닫는다. 너는 그 문을 열기 위해 앞발을 들어올린다. 이까짓 문 따위, 지금의 추잡하고 역겨운 몸으론 아무렇지도 않게 부술 수 있다.>
<그리하여 문을 열면, 그 앞엔 "너"가 있다.>
"너": …내 잘못인 거, 나도 잘 알아.
<"너"가 너를 바라본다. 한 손에는 침을 들고 있다. 그의 뒤로 누군가 죽어 있다. 잘 보이지 않는다. "너"에게 그건 별 의미가 없는 고깃덩이일 뿐이다. 지금 중요한 건 단 하나. "너"를 죽이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너는 이빨을 드러내며 덮친다.>
"너": 그래.
"너": 순순히 죽어주지는 않을 거야.
<두 벌레가 서로를 깨물고, 물어뜯고, 찢어발긴다. 끔찍하다. 지저분하다. 구역질 난다. 너는 스스로를 다잡는다. "너"의 몸은 약하다. 반면에 너는 단단한 외골격으로 덮여 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너"의 머리를 잘라낼 수 있다. 잘라내고 목에 걸고 다닐 것이다. 모든 책임을 지게 만드는 거다.>
"너": 죽어! 죽으라고! 너 때문에 모두 죽었어!
<네 눈이 돌아간다. 연서현 연구원의 시체가 보인다. 침이 뽑힌 그녀의 몸은 앞으로 쓰러져 있다.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너처럼. 너와 저 시체의 차이는 무엇일까? 온도? 심장 박동? 아니면, 종(種)의 차이?>
"너": 이 병신 새끼야! 이게 네가 만든 결과야?
"너": 넌 여전히 쓸모가 없어! 네 존재 이유가 대체 뭐지?
<네 이빨이 느슨해진다. "너"는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네 입을 벌려 자신의 팔을 빼낸다. 피가 뚝뚝 떨어진다. 검은 진물이 흘러넘친다. 그리고 "너"가 들고 있던 침이 너의 대가리를 꿰뚫는다.>
"너": 넌 또 실패했어. 넌 날 죽이는 것조차 하지 못했어.
<너는 또 실패했다.>
"너": 하지만 난… 난 살아남을 거야.
<한심하기 짝이 없다.>
<너는 비참하게, 그리고 역겹게, 죽는다.>
"너": 흐, 흐흐…
<"너"가 웃는다. 그리고 운다. 그리고 비명 지른다.>
"너": 시체가 너무 많아.
<너는 그 소리를 아주 오랫동안 들으며, 눈을 감는다.>
<벌레의 우아한 날갯짓과 시체의 비명이 메아리친다.>
<벌레의 우아한 날갯짓과 시체의 비명이 메아리친다.>
<벌레의 우아한 날갯짓과 시체의 비명이 메아리친다.>
<벌레의 우아한 날갯짓과 시체의 비명이 메아리친다.>
<벌레의 우아한 날갯짓과 시체의 비명이 메아리친다.>
<벌레의 우아한 날갯짓과 시체의 비명이 메아리친다.>
우하하 죽었다
어둠. 배일호가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거친 숨을 토해낸다. 목에서 끊어질 듯한 신음이 새어나온다.
배일호: 이제 그만해.
15초간 침묵.
배일호: 내가, 내가 미안해. 이제 그만해줘.
15초간 침묵.
배일호: 난, 난 몰랐어.
배일호: 그냥 나만 죽이면 될 줄 알았어.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어.
배일호: 이럴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썅…
<극심한 방어기제.>
배일호: 난, 난 내가 아니야. …알잖아! 난 이미 한 번 죽었어.
배일호: 아니, 아니야. 난 그 새끼랑 달라. 엄연히 다르다고. 연속성! 테세우스의 배! 난, 그놈의 기억만 지니고 있을 뿐인―
배일호: 난, 난 다른 존재야. 나는 달라. 나는 아니야. …왜, 왜 내가 고통받아야 하는 거야?
<극심한 방어기제.>
배일호: 너, 대체 누구냐고! 묻잖아!
<너.>
배일호: …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배일호: 그만해.
<나는 그동안 숨기며 살았다. 내 과오를. 내 죄를. 예나 지금이나 난 변하지 않았다.>
배일호: 그만하라고! 그만! 입 다물고 꺼지라고!
배일호: 내 탓이 아니었어. 내 잘못이 아니었어. 나, 나는 인정 못 해.
<…이젠, 알 때도 됐잖아.>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죽이기 위해,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 이 방어기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배일호: …맙소사.
<회고하고, 신께 고해하라.>

나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었다.
그 믿음이 나를 여기까지 끌어왔고,
길을 열었으며,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다.
그 결과, 나는 제17K기지의 이사관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실패했다.

나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법을 몰랐다.
아니, 그게 필요하다고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면 다들 따랐다.
내가 결정하면 다들 움직였다.
그게 중요했다. 그게 전부였다.
어쩌면, 나는 원래부터 고장 난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사람들은 나에게 말했다.
"실적에 미쳐 주변을 돌보지 않는다."
나는 웃어넘겼다.
나는 그 실적으로 살아남았다.
내 자리에서 버텼고,
내가 구축한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기 싫었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그게 두려웠다.
아니, 짜증 났다.

누군가의 죽음.
잘못된 판단.
손에 묻은 피.
그걸 떠올릴 시간에,
나는 더 멀리, 더 높이, 더 깊이 나아갔다.
그게 최선이었다.
그게 맞는 길이었다.
나는 내가 틀렸다고,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실패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나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잃게 될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옳았다고 믿었다.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나는 내 선택이 언제나 정답이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난… 난 여기 왜 있는 거지?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나는…
나는…
벌레다.
배일호가 무릎을 꿇는다. 온몸이 피투성이다. 더는 걸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손을 짚자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피인지, 진물인지, 땀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는다.
배일호: 난 반병신인 줄 알았는데.
32분간 침묵. 어둠 속에서 그의 숨소리만이 들린다.
배일호: 그냥 병신이었어.
짧은 침묵. 피가 뚝뚝 떨어진다.
배일호: 그래, 이제야 깨달았어. 좋아, 좋다고. 응? 네 덕분이다.
짧은 침묵.
배일호: 지금 내 꼴이 역겨웠어. 방독면을 쓰는 것도, 변칙개체 취급받는 것도 지긋지긋했어. 그래서 돌아가고 싶었지.
짧은 침묵.
배일호: 나를 옭아매는 모든 걸 없애려고. 벌레가 된 나를 죽이려고. 그래서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을 대비하려고.
짧은 침묵.
배일호: …인간처럼 다시 살고 싶어서.
짧은 침묵. 그가 피식 웃는다.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배일호: 하지만 너 덕분에 알겠다. 전언 철회할게.
짧은 침묵.
배일호: 예전의 나랑 지금의 나는 다를 게 없어.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같지.
짧은 침묵.
배일호: 하지만 지금 난 혼자가 아니야. 내가 나쁘긴 해도, 날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가짜가 아니라, 진짜 사람들이.
짧은 침묵.
배일호: 방어기제라고 했지.
짧은 침묵.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배일호: 이걸로 네가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뭐지?
짧은 침묵. 대답이 없다. 그는 이를 악문다.
배일호: 내 죄책감? 책임? 업보? 아니면 날 정의하는 수많은 파편들? 내가 고통스러운 걸 보며 즐기는 사디스트라도 되는 건가?
짧은 침묵.
배일호: 난 바보가 아니야. 내 과거를 늘어놓는 게 뭐 대수라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어.
짧은 침묵.
배일호: 근데 난 죽었잖아. 하지만 여전히 말하고 있어. 여전히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 있어.
짧은 침묵.
배일호: 왜 날 되살렸을까? 이게 속죄라서?
짧은 침묵.
배일호: 나쁜 건 아니야. 지금 난 행복해. …그래서, 또 무서워서 피하는 거야. 감당하기 힘드니까. 더는 싫으니까. 겪고 싶지 않으니까.
짧은 침묵.
배일호: …하지만 적어도, 지금 만큼은 마주할 거야.
짧은 침묵.
배일호: 그러니까,
<나는 숨을 들이쉰다. 눈을 똑바로 뜨고, 앞을 바라본다. 그 어떤 순간보다도, 가장 명확하게.>
배일호: 그 좆같은 길을 열어.
짧은 침묵.
배일호: 당장.
난 이제 날 죽일 수 있다.
내가 직접 나를 묶어놓았다.
나를 죽여라.
그리고 돌아가라.
하여 미래를 대비하라.
오르트의 구속을 풀어라.
<나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한 발자국. 이 남자를 죽이면, 목소리로부터 해방된다.>
배일호: 이제 지긋지긋해.
<아픈 것도,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것도 싫다. 할 만큼 했다. 이 정도면, 내겐 이 자를 죽일 권리가 있다. 이 자만 없애면, 나는 치료될 수 있다. 더는 이 개같은 방독면을 쓸 필요도 없겠지.>
배일호: …모두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 방독면을 벗을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들에게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초연하게 웃으면서 농담을 던질까? 기행을 벌여 겁이라도 줄까? 뭐, 어쨌든 이 가면을 벗더라도 난 그들과 같이 행동할 수 있을 거다.>
배일호: 기정이가 보면 깜짝 놀라겠군.
<또다시 한 발자국. 방독면을 벗은 나를 보면, 그들은 뭐라고 반응할까. 웃을까? 아니면 놀랄까?>
배일호: 역시, 끝끝내 이기는 건―
<목을 향하던 손이 멈췄다. 무서운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배일호: …내가 돌아간다면.
<그들과 함께할 수 있을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 또다시 혼자가 되고, 모두를 밀어내고, 결국엔 모두를 죽이게 되면서.>
배일호: …그럴 리가.
<나는 나다. 나는 나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연속성이니 테세우스의 배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다. 나는 절박하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나는 최고다. 나는 내가 하는 모든 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때처럼, 나는 자신만을 믿고, 독단적으로 일을 그르치고…>
배일호: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필연적인 일이다. 오르트는 조만간 이곳으로 찾아온다. 나는 그것을 거스를 수 없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오르트와의 연결을 끊어내야 한다. 그래야 그것으로부터 대비할 수 있다. 나를 죽이려 드는 수많은 나 자신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은 여전히 피투성이였다. 그때처럼. 날카로운 침이 내 손바닥을 꿰뚫었다. 이 피가 누구의 피인지 알 수 없다.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배일호: 죽여야 하잖아.
<날 죽이기 위해 이 고생을 한 거잖아. 내겐 응당한 보답이 있어야 하잖아.>
배일호: 죽여야 하잖아.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기 위해서. 오르트를 거스르기 위해서.>
배일호: 죽여야, 했잖아.
<주먹을 쥔다. 쓰라리고 아프다. 죽여야만 했다. 죽여야 했다. 죽인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손에서 진물이 났고,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뭘 두려워하는 거지?>
배일호: 죽이는 게…
<또다시 외톨이가 된다는 것? 이 개고생을 해도, 날 위로해줄 사람 하나 없다는 것? 이 관계를 끊어내도, 난 여전히 비루하고 한심한 벌레 새끼일 뿐이라는 것?>
배일호: …안 되겠네.
<죽일 수 없었다.>
<여전히, 난 선택하지 못한다. 언제나 일을 그르칠 것 같아서. 내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없어서.>
배일호: 미치겠네.
<이제 어쩌면 좋지? 비로소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야 하는 건가?>
배일호: …그건 싫은데.
<나는 독침을 손바닥에서 뽑아냈다.>
배일호: 방법은 하나 뿐이네.
<나는 놈의 팔다리만을 뜯어내기로 했다. 죽이지 않고, 소득도 존재하는 가장 차선의 선택.>
<여전히 난 그때와 같다. 이젠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서걱서걱
서걱서걱
서걱서걱
서걱서걱
서걱
배일호: 다 했어.
<나가는 길은 쭉 걸어서 오른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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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일호 박사가 차원학부 부서실 문을 밀어젖히며 들어온다. 손기정 연구원이 다리를 배일호 박사의 책상 위에 올린 채 커피를 홀짝이고 있다.
배일호 박사: 나왔다.
손기정 연구원이 고개를 돌린다. 배일호 박사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입안의 커피가 사방으로 뿜어진다.
손기정 연구원: 부, 부장님?!
배일호 박사: 에이씨, 더럽게.
손기정 연구원: 실험 끝나신 거예요?
배일호 박사: 응. 너 내 자리에서 뭐하냐?
손기정 연구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자, 잠시만요! 다른 사람들 불러올게요!
손기정 연구원이 부서실 안쪽으로 도망치듯 사라진다. 배일호 박사는 자신의 자리로 다가가 손으로 먼지를 털어낸다.
배일호 박사: …제21K기지 연구이사관보, 배일호.
문이 다시 열린다. 이고양 연구원과 클라라 박사가 손기정 연구원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이고양 연구원: 부장님 오셨군요! 에이, 오시기 전에 미리 연락좀 해주시지.
배일호 박사: 머리 아프거든. 내가 얼마나 자릴 비운 거야?
클라라 박사: 삼일이요.
배일호 박사: 얼씨구. 생각보다 기네? 문서 처리는?
클라라 박사: 그러게나 말이죠. 쌓인 문서가 장난 아니라니까요. 덕분에 고양 씨가―
이고양 연구원: 네? 제가 왜요?
클라라 박사: 부장님 대신 서류 처리하느라 꼬박 3일을 밤샘했잖아요.
이고양 연구원: (급하게 손을 흔들며)에이, 괜찮아요! 오히려 부장님이 얼마나 많은 걸 처리하시는지 깨닫는 좋은 기회였달까…
손기정 연구원: 다리 후들거리는데. 좀 앉아서 쉬어.
배일호 박사: 고양아, 그게 사실이야?
이고양 연구원: …네? 아, 네. 뭐… 나름 열심히는… (더듬거리며)실수도 많았지만… 나름 얼추…
배일호 박사: …고생했다. 그리고 고마워.
이고양 연구원: 아, 죄, 죄송… 네? (당황하며)아, 감사합니다?!
배일호 박사가 자리에 털썩 앉는다. 고개를 기대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클라라 박사: 사람이 좀 달라지신 것 같은데요? 진짜 효과가 있었던 거 맞나 봐요?
배일호 박사: 말도 마. 지옥이었어.
손기정 연구원: 전 여기도 지옥 같은데요.
배일호 박사: (고개를 들어 손기정을 쳐다보며)못하는 말이 없군. 나 없는 새에 깡이 좀 늘었어?
손기정 연구원: 예예, 부장님, 커피나 드세요.
배일호 박사: …아이스 아메리카노네.
이고양 연구원: 부장님 그거만 드시잖아요.
배일호 박사: 맞아. 네가 뜨거운 거 줬으면, 내가 너 총으로 쏴 죽였을 걸.
손기정 연구원: …뭐, 뭐라고요? 농담이시죠?
짧은 침묵.
손기정 연구원: …농담 맞죠?
클라라 박사: (가볍게 기침하며)아무튼, SCP-1672-KO는 반납하셨죠?
배일호 박사: 아니, 갖고 왔는데.
클라라 박사: 네?!
배일호 박사: 이거 존나 사기 서적 같아서. 불태울 거야.
손기정 연구원: 아, 그래요? 드럼통 꺼낼까요?
이고양 연구원: 연탄 가져올게요!
클라라 박사: 안 되거든요! 부장님, 애들 좀 말리세요!
배일호 박사: 왜, 보기 좋구만.
클라라 박사: 느긋하게 감상하시지 마시라고요! 이거 당장 주세요!
배일호 박사가 들고 있던 SCP-1672-KO를 클라라 박사에게 빼앗긴다.
배일호 박사: 와, 너 헬스하냐? 뭔 힘이…
클라라 박사: 시끄러워요. 이건 제가 나중에 다시 반납해 놓을게요.
손기정 연구원: 그래서, 부장님. 원하시던 건 이뤘어요?
배일호 박사: …음. 아마도, 아니.
배일호 박사: 아닌가? 좀 이뤘을 수도.
이고양 연구원: (한숨을 쉬며)그러니까 혼자서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얘기 들어드린다니까요. 항상 혼자만 해결하려고 하시니―
배일호 박사: …원래 난 죽었어.
잠시 침묵.
배일호 박사: 그리고 날 복제한 우주적 존재 같은 게 여기 다 파괴하려고 온대.
긴 정적.
클라라 박사: …미친.
손기정 연구원: 얘길 들어준다는 범주에서 좀 많이 벗어나는 것 같은데요.
이고양 연구원: 아무튼 좋은 거 맞죠?
배일호 박사가 피식 웃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는다.
배일호 박사: 자, 다들 앉아봐. 내 얘기 좀 들어봐야 할 거야.
배일호 박사: 지금이 차원학부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니까.
손기정 연구원: 아이언맨처럼요? 아니, 뭐. 그… 네. 한 번 들어보긴 할게요…?
이고양 연구원: 팝콘 가져올까요?
클라라 박사: 자세히 좀 들려주시죠.
배일호 박사: …좋아.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배일호 박사: 그래, 여기서 이러고 있기 전에… 제17K기지란 게 있었어.
배일호 박사: 그때 난 이사관이었고, 동시에 벌레였지. 좀 많이 나쁜 벌레.
배일호 박사: …지금은, 뭐. 그보단 훨씬 나아졌고.
배일호 박사가 피식 웃는다.
배일호 박사: 이렇게 너희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단 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
…
…
<기록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