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와 즈소
점심시간이 되자 건물 곳곳에 있는 사무실과 실험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직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미소를 지으며 점심 식사를 만족스럽게 마치고 그들만의 여가 공간으로 향해 게임을 즐기거나, 다른 직원들과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제27K기지가 이전부터 이렇게 직원 복지에 신경을 쓰고 휴식과 여가가 보장되는 거의 유일한 기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2014년, 제27K기지는 다른 기지들처럼 칙칙하고 사무적인 분위기로, 연구원들은 새로 들어온 SCP들을 분석하고, 요원들은 요주의 단체와 교전하고 그들을 구금하여 조사했으며, 기지 이사관은 이런 활동들을 전부 보고받으며 승인과 반려의 여부를 결정 내렸다.
그날도 제27K기지 이사관 샐리 메이블은 다른 날과 같이 책상 위에 얹어진 거대한 서류 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펜은 바삐 움직였고, 사인된 서류는 누군가에겐 거절의 아픔을, 누군가에겐 통과의 기쁨을, 누군가에겐 미뤄진 평가로 인한 짜증을 안겨주었다.
어느덧 일흔다섯 번째… 혹은 일흔여섯이었을지도 모른다. 면도를 하지 않은 수염이 하루 만에 자라나듯 책상 위에 자라난 서류 더미를 절반가량 치웠을 때 샐리 메이블은 무력감을 느꼈다.
'나도,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데 말이야.'
제27K기지의 꼭대기 층, 가장 안쪽 방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서류 더미를 바라보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몇십 년 동안 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녀 본인이 한 기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기지의 하나의 부품 따위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사관이 아닌 더 낮은 계급의 인원들은 그것을 더욱 크게 느낄 것이 당연했다. 그녀는 일상의 반복과 그 반복에서 기인된 우울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생각을 마친 뒤에도 그녀의 앞에는 여전히 서류 더미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일흔여섯, 혹은 일흔일곱 번째 서류를 넘겨 보았다.
'제27K기지 지하 공간 활용에 대한 안'
제27K기지의 지하 공간은 단순하고, 버려져 있었다.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통해 지하 1층에 내려갔을 때 처음 보이는 것은 그 드높은 층고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엔 충분했다. 지하 공간에 방문한 사람이 두 번째로 느끼는 감정은 의구심으로, 어떻게 이렇게 넓은 공간이 기지 안에서 방치되어 있었는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넓은 공간을 지나면 기계실이나 보일러실과 같은 기지의 인프라를 담당하는 시설이 모여있고, 그 뒤로는 정말 길고 아무것도 없는 복도가 이어진다.
그 순간 그녀는 그 복도에서 오른쪽으로 꺾었을 때 보이는, 보안 인가 4등급이 걸린 문 뒤의 존재를 기억해 냈다. 그곳은 그 기지 안에서 오로지 그녀만이 진입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을뿐더러, 눈에 띄었다 하더라도 문 앞에 걸린 삼엄한 보안과 '보안 인가 4등급 필요' 라고 적힌 문구에 관심을 금방 잃게 되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글 밑 사인하는 칸 중 '보류'에 그녀의 서명을 적어 넣었다.
정해진 퇴근 시간인 5시 30분 이후로도 기지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해가 지평선을 넘어가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계절인 탓도 있었지만, 실질적인 직원들의 퇴근이 정해진 시간보다 훨씬 늦다는 이유였다. 연구원들은 계속해서 실험했고, 직원들은 계속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사무를 보고 있었다.
샐리 메이블은 5시 30분에 알람이 울리자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하로 향하는 비상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를 탔다가는 '이사관님, 어디 가시나요?' 와 같은 질문 세례를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제27K기지의 지하를 방문하는 것은 정말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그녀가 제27K기지에 발을 들인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지하를 방문한 일은 정말 드물었다. 그녀가 이 공간에 대해 마지막으로 가진 기억이 5년 전에 지하 창고를 살펴본 일이었기 때문에, 문을 찾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복도를 지나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꺾었을 때, 적외선 장비와 철창으로 덮인 철로 된 문 하나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노란색 경고 문구에는 '보안 인가 4등급 필요. 허가 없이 진입 시 사살 당할 수 있음.'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문 옆에 달린 쌍안경같이 생긴 도구에 눈을 들이밀고 또박또박 말했다.
"샐리, 메이블. 폭풍이 불어오는 밤엔 고요한 그믐달이 뜬다."
이윽고 철로 된 문이 그 육중한 몸을 반 바퀴 돌려 열렸다. 그 안쪽은 너무 환해서 그녀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녀의 눈이 명순응할 때까지 기다릴 겨를이 없었기에 그저 앞으로 걸어갔다. 몇 미터 앞으로 걸어가자 뒤에 놓인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지만 이사관은 그것에 신경 쓰지 않고 걸어 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앞에 놓여있던 5cm 정도의 턱을 볼 수 없었기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
그 순간 그녀의 눈이 명순응 과정을 마치고, 그녀의 시야에는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장비와 용매로 보이는 액체들을 바삐 나르는 파이프들, 그리고 거대한 원통형 수조가 놓여있었다.
"SCP-2000?"
이 장비는 그녀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속을 헤엄치다가 발견한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아마 이름이 브라이트/자티온…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수조의 가운데에는 태아로 보이는 작은 형체가 보였고, 정교한 바늘들이 형체에 꽂혀 있었다. 시선을 수조 아래로 옮긴 샐리 메이블 이사관은 거대한 계기판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기지에 부임한 이후로는 누구도 이곳에 들어온 일이 없었기에, 이곳은 적어도 수십 년 전의 기계들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기판에는 수십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현대적인 디자인의 화면이 그녀를 반겨주고 있었다.
JSO.aic: 환영합니다. 샐리 메이블 이사관님.
이사관은 몇 초간 벙쪄 있는 채로 서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샐리 메이블: 너는 누구지? 이곳은 정확히 뭘 하는 곳이지?
JSO.aic: 저는 JSO(Junior Supervising Operator)입니다. 제27K기지 내 데이터베이스의 최적화 및 기밀 관리, 기타 다양한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샐리 메이블: 이곳이 어떤 역할을 하는 공간인지 설명해줄래?
JSO.aic: 이곳은 SCP 재단의 '특별한 연구원/요원'을 양성해내기 위한 시설입니다.
샐리 메이블: 특별한 연구원이나 요원이라니?
JSO.aic: 특별한 연구원/요원이란 초상세계에서 SCP 재단으로 투입되는 인원으로, 일반인과는 다른 흄 준위를 가지고 있으며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일컫습니다.
샐리 메이블: 그러니까… 변칙 능력을 가진 특수요원을 이 수조 안에서 길러낸다는 말이지?
JSO.aic: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장치는 RAISA에 의하여 사용이 제한되는 장치로, '초상세계 내 SCP 재단에 우호적인 단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신규 채용된 3등급 이상 인원이 매년 1명 이하인 상태가 5년 이상 지속되었을 때' 내려지는 '제네시스-아포칼립스 프로토콜' 발동 시에 전 인원에게 관련 서류가 공지됩니다.
샐리 메이블: 그럼 내가 여태까지 이 기지 지하에 이게 있는지는 왜 몰랐던 거지?
JSO.aic: 그야 5등급 기밀이니까요.
샐리 메이블: 그러면 너는 어떻게 접근권한이 있는 거지?
JSO.aic: 저에게는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저는 이 장치의 존재와 쓰임새를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방금 말씀드린 프로토콜과 기계의 쓰임새 또한 이사관님이 이곳을 방문하셨기에 코딩된 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샐리 메이블: 나에게 이 장치를 사용할 권한이 있니?
JSO.aic: 네, 하지만 이사관님이 장치를 작동시켰을 시에 RAISA와 O5 평의회에 이사관님의 출입 기록과 장치의 사용 기록이 전달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곳을 출입할 수 있는 인가가 4등급 이상인 이유입니다.
샐리 메이블, 제27K기지 이사관은 잠시 고민했다. 확연히 이 공간을 그녀가 방문한 적 없는 이유를 알게 되자 그녀는 묘한 호기심에 빠져들었다.
샐리 메이블: 연구 목적으로의 사용은 감안 가능하지 않을까?
JSO.aic: 이사관님의 자유입니다.
샐리 메이블: JSO, 장치를 작동시켜 줘.
JSO.aic: 네, 알겠습니다.
순간적으로 수조 안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샐리 메이블은 놀라 뒤로 잠시 물러섰다. 이내 사방에 있던 기계 장치들이 작동되고 색색의 액체들이 수조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계기판의 포맷이 바뀌더니 이내 새로운 입력창이 제시되었다. 샐리 메이블은 계기판 앞으로 다가갔다.
JSO.aic: 인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샐리 메이블은 잠시 '제27K기지에 필요한 인원은 어떤 사람일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일단 뛰어난 연구원이었으면 좋겠어.
그녀는 상상을 하며 그녀가 꿈꿔왔던 그녀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웃음을 주는 존재였으면 좋겠고,
힘들어하고,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무엇보다 완벽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일을 누구보다 빠르게 수행하고, 거기에 정확하기까지 한 완벽주의에 만능주의자.
JSO.aic: 잘 알겠습니다, 샐리 메이블 이사관님.
"아니 잠시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금 스파크가 튀어 오르더니 이번엔 수조 안이 탁해질 정도로 많은 양의 액체들이 섞여 꼭 진흙 같은 질감처럼 변했다. 수조 안의 형체와 연결된 바늘에 달린 파이프에는 적색의 액체가 투여되고 있었다. 이윽고 형체가 배구공만 해지더니 그림자를 알아볼 수 있게 변하였다.
어느덧 5분이 지나고 검은 형체는 찰흙덩이 같은 모양에서 사지와 머리가 구분 가능한 형태로 변하였다. 샐리 메이블 이사관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수조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사관 직책을 가진 이후로 이렇게 신이 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작은 변화에도 즐거워했다. 사지와 머리가 점점 사람의 형체를 갖추며 수조 안 또한 혼탁한 상태에서 점점 원래의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실눈을 뜨고 바라본 수조 안에서는 이제 머리카락과 손가락까지도 구분할 수 있었고, 이는 새로운 연구원이자 이사관의 피조물이 탄생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10분이 지나, 수조에 가득 차 있던 액체가 바닥에 연결된 파이프를 통해 빠져나가고 피조물은 이제 공기와 직접 맞닿아 있었다. 액체가 모두 빠지자 수조에 달린 문이 열리면서 피조물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JSO.aic: 연구원의 이름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이사관은 앞선 몇십 분 동안 벌어진 광경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그래, 즈소야. 이 친구의 이름을 뭘로 하면 좋을까…"
JSO.aic: "즈소"로 하시겠습니까?
말귀를 너무 잘 알아들어서 탈인 이 인공지능 징집병과의 대화를 빠르게 마무리 짓고 싶었던 이사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색 긴 생머리, 파란 눈의 20대 정도 외형의 동양인 여성. 즈소 연구원의 외형을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SCP 재단에 온 걸 환영하네, 즈소 연구원."
"반갑습니다, 이사관님! 좋은 저녁이에요!"
즈소 연구원이 제27K기지에 들어온 이후, 많은 것이 변화됐다.
우선 즈소 연구원이 매우 뛰어난 성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빠른 승진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예견하고 있었을 정도로 당연했다. 처음에는 그녀를 시샘하거나 그녀의 과거, 혹은 출신을 파헤치고자 인원 문서를 찾아보려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모두 말소되어 있었을뿐더러 이사관의 명령에 의해 이런 행위들이 금지되고 난 이후로는 즈소 연구원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제27K기지의 분위기도 삭막하고 평범한 기지에서 활기차고 즐거운 기지로 바뀌었다. 이것 또한 즈소 연구원이 승진한 이후 샐리 메이블 이사관에게 끝없는 건의를 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물이었다.
샐리 메이블 이사관은 여전히 제27K기지의 맨 위층 복도 끝에 있는 방에서 자신의 업무를 하고 있다.
그녀는 넓게 뚫린 통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예전에는 이 자리에서 이런 풍경이 보이는지도 몰랐는데 말이야.'
그녀의 업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그녀에게 생긴 확실한 변화는 있었다. 바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서류 더미를 헤쳐보며 사인을 하는 일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이제는 업무 끝에 어떤 즐거운 일이 펼쳐질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모든 변화를 지하실에 다녀온 단 하루의 일과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다.
재단 기록정보보안행정처(RAISA)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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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ISA 이사관 마리아 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