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인원: 반월영, 사가민
비고: 변칙 효과 노출 시간 총 45분 59초, 본 기록은 아스카리 염사카메라로 녹화되었다.
사가민: 아마 여기일 거야. 환상의 최심부.
반월영: 몇 분 지났냐?
사가민: 30분. 예상보다는 접속 과정이 짧게 걸렸지만 서둘러야 해.
초록색 유리 나발 안에서 나의 숨이 껄떡거린다
반월영: …방금 들었어?
사가민: 뭐가… 껄떡거린다고 했지? 제대로 찾아온 거 같네. 그나저나 이 노래는 뭐야? 이거 나만 들리는 거 아니지?
반월영: 어, 나도 들려. …퍼플 헤이즈? 같은데.
오늘 나는 여기서 락스타처럼 죽는 걸까…?
반월영: 야, 저거 보여?
사가민: 어, 보여. 1210-KO. 처음 발견됐던 그 모습 그대로 보여.
좋은 날이었지…
하지만 다 끝났어.
반월영: 그렇다면, 이 목소리 주인이 이 컴퓨터 주인일 가능성이 높겠네.
…모기지, 그게 내 모가지도…
반월영: 사정은 몰라도, 존나 딱한 새끼네. 여러 의미로.
…뭐…?
사가민: 야…!
반월영: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방금… 누가 나한테…
반월영: 저기, 감정이 워낙 내몰려서 청승맞게 찡찡대는 걸 방해해서 미안한데, 당신한테 잠깐 볼 일이 있어서 그렇거든? 그렇게 목소리만 내면서 일방적으로 들어달라는 식으로 중얼대지 말고, 잠깐 얼굴 좀 비춰줄래?
…누구야?
…이건 기억에…
사가민: 당신인 거죠? 기억의 주인. 미안해요, 얘가 원래 좀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얘라서.
반월영: 뭐야?
사가민: 아가리 좀 제발 닥치고 있어 봐. 저기, 그러니까.
누구야.
사가민: 선생님을 만나뵈러 온 사람들입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또 너희들이지, 은행 대출 부서.
반월영: 뭔 부서?
꺼지란 말이야!!!
반월영: 저 구석탱이에 소주병 굴러다니는 거 보고 대충 짐작은 했는데, 에휴. 완전 진상 새끼네, 이거.
너희들, 이번에는 또 뭐하러 온 거야! 아직도 뜯어갈 게 남은 거야?
반월영: 저기, 이름 모를 아저씨. 그래요, 은행 대출 부서에서 나왔다고 칩시다. 뭐 여기서 더 빨간 딱지 붙일 건 없고요, 잠시 우리 진득한 이야기를 한 번 나눠보죠. 당신이 지금 이러고 있는 거, 솔직히 얼굴 안 비춰도 대충 감이 와요. 그래요, 우리 탓이겠죠. 알아요.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요, 아저씨. 저희가 구제 방안을 하나 마련해드릴게요.
구제…? 지금 너희들은 여기 이 모양, 이 꼬라지를 보고도…!
반월영: 모를 리가요. 죄다 압류 딱지 붙어 있고, 불은 스위치 켜도 들어오지도 않고, 몇 달째 밀린 청구서에 독촉장에, 여기 이 책상에 있는 대출 관련 서류까지. 법정관리 신청을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서 순식간에 부도나버린 회사의 대표님, 내지는 재무과장님이시겠죠. 그런데 그래서요? 이 꼬라지를 보고,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제한되어 있고,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예요. 아저씨. 아저씨는 대체 지금 뭘 할 수 있죠? 아저씨, 저는 지금 아저씨가 이 회사에 대한 애사심이 대단했다는 건… 저기 소주병 쌓여 있는 책장에 오롯이, 깨끗이 놓여 있는 감사패와 기념패들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지금 그렇게 소주나 쳐마셔대고 찡찡대요?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니신 거 같으신데요?
그런데, 그럼, 너희들은 그걸 알면서도, 왜!
반월영: 자본주의 시장에서 은행 돈은 화수분이 아니라는 건 사회인이셨다면 잘 알고 계실텐데요. 저희도 돈을 빌려드릴려고 해도 신용등급이 D등급 이하로 쳐박힌 중소기업에 대해서, 저희가 당신들을 믿을 이유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미안하지만,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만약 제가 지금 여기서 대출을 크게 한 방 땡겨줘서, 회사 빚을 다 갚게 해준다고 해도, 다시 한 번 여쭙겠습니다. 지금 아저씨, 아니, 선생님께서는 뭘 할 수 있죠?
뭐라고?
반월영: 선생님은 지금, 본인의 진짜 처지를 이해하고 계신지에 대해 여쭤본 겁니다. 아까 전처럼 청승맞게 찡찡대시던 거, 저희가 개입하니까 뭐라고 하셨죠? 기억에 없다고 하셨죠? 이제 말 그만 돌리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선생님의 문제는 더 이상 부도난 회사도, 대출도, 빚도, 돈도 아닙니다. 선생님의 영혼의 안식이죠.
…
사가민: 선생님. 선생님의 얼굴도, 이름도, 저희는 알지 못합니다. 인수인계에 미비한 점은 사과드립니다. 사후약방문을 한 점도요. 네, 진짜 사후네요.
…아니야, 아니라고.
사가민: 선생님.
아니야!
사가민: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다는 거, 저희는 알 수 있습니다.
반월영: 여기 있는 이 문서들, 회생계획안 초안 문서에, 산업은행 대출상담 자료, 세무자료랑… 최근 5년간의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현금흐름표가 정리된 재무제표. 이건 자금조달 계획서고… 담보물 명세서에, 신용평가서… 거래처 채권·채무 정리표에 계약 내역, 고용인원 명부도 있네요. 저기 보이는 USB랑 외장하드는 아마도 회계 데이터 백업본일 거고요. 명함도 뭐가 많고… 수첩이랑 다이어리도 빽빽해요. 지금 여기에 이만큼의 정신 나간 분량의 자료들이 저희가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다. 그건 그만큼 이때의 상황에 한이 맺혔다는 뜻이겠죠. 그건 우리도 알 수 있어요. 하지만 반대로 또.
사가민: 죽어서도 못 잊는다는 뜻이겠지. 그렇지 않나요, 선생님, 아니 사장님?
…계속 얘기해 봐.
사가민: 저희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별 거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긴 이야기도 아니고요.
그게 뭔데?
사가민: 그동안 외로이,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
반월영: 외람된 얘기지만, 선생님 기억을 저희가 좀 훑어봤거든요. 그 기억들, 지금 이 기억과는 다르게, 꽤 재밌었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그만 놓을 건 다 놓으시고, 재밌던 그때로 되돌아가봐요.
사가민: 네, 매몰되더라도 예전 그때의 좋은 기억에 매몰된다. 이게 저희의 제안 조건입니다.
그것만으로, 정말 괜찮은 거야?
반월영: 안 될 거 없죠.
사가민: 네, 물론이죠. 이제는 푹 쉬세요, 사장님.
(목소리의 형태가 그림자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반월영: 오, 나타났다.
SCP-1210-KO-1:…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네.
<접속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