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련번호: SCP-1005-KO
등급: 유클리드 해명
특수 격리 절차: SCP-1005-KO의 원본은 3형 표준 격리실에 격리한다. 대상의 복사본은 모두 발견 즉시 소각 혹은 삭제하여야 하며, 기동특무부대 에타-10("비례물시")과 Exulansis.aic가 이를 감시한다.
또한, SCP-1005-KO의 모든 격리 과정에는 공감능력 적성 평가에서 15점 이하의 점수를 받은 인원들만을 동원하며, 공감능력 적성 평가에서 20점 이상을 받은 인원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상 혹은 대상의 복사본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러한 인원이 대상과 접촉하였을 경우에는 C급 기억소거제를 투여하고 3일간 경과를 관찰하여야 한다.
20██/01/01부로 대상은 해명 등급으로 재지정되었다.
설명: SCP-1005-KO는 소가죽 재질의 1150페이지 양장본 서적이다. 대상의 앞표지에는 "곡괭이질하는 사나이"라는 제목이 각인되어 있으며, 저자명이나 출판사명은 기록되어있지 않다. 대상은 1900년대 중반 강원도에서 광부로 일하는 한 가장의 인생을 묘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SCP-1005-KO는 20██/12/31에 대한민국 세종특별자치시 ██동의 다세대주택에서 발견되었다. 대상의 당시 소유주는 해당 가구의 입주자 김██으로, 특수청소업자로 근무하던 때, 20██/11/29에 심근경색으로 인해 고독사한 박██의 자택에서 발견한 서적을 유가족의 동의 하에 양도받았다고 진술하였다. 당시 재단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신종 밈 서적이 인터넷과 중고서점 등을 통해 유포되어 이를 확보하기 위해 조사중이었으며, 온라인에 이를 유포한 이용자를 추적한 끝에 최초 유포자가 김██임을 밝혀내었다.
SCP-1005-KO와 그 복사본은 인간이 이를 식별하고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대상은 공감능력 적성 평가에서 23점 이상의 점수를 받은 인간이 이를 읽었을 경우에 큰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며, 대상에 대한 정보를 약 10% 이상 습득할 경우 대상과 대상을 작성한 작가의 열렬한 추종자임을 자처한다. 대상의 영향을 받은 인원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해당 서적을 읽기를 권유하며, 자신이 가진 서적을 복제하여 유포하거나 폭력을 사용하여 강요하는 행위 또한 보고되었다. 다음은 대상에게 영향을 받은 인원들이 남긴 평가들 중 일부로, 변칙성을 띄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건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와 비견되거나, 더 뛰어난 걸작입니다. 이걸 한 번만 읽어보시면, 자기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공기조차도 푸근하고 달콤한 기분이랄까요. - █████대학 선하솔 교수
인간이 다른 이를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스승과도 같은 책. 죽기 전에 이걸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 이백 작가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딜런 토마스의 시인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의 한 구절입니다. 이 책은 황혼으로 밀려나가는 한 인간이 분노하고, 저항하다가, 결국에는 쓰러지게 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몸부림쳤고, 자기 자신을 끝까지 지켜내고 한 인간으로써 죽었습니다. 그는 어떤 위업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인간다웠습니다. - 백윤설 연구원
또한 대상은 밈 예방접종이나 바할라스 재인식법, MK.5 셀레네 등의 각종 정신재해적 방호 수단을 전부 무시한다. 대상에 대한 효과적인 방호수단이 연구중이다.
(20██/01/01 개정됨) 밈학부의 지속적인 연구 결과, SCP-1005-KO로부터 어떠한 변칙적인 정보도 발견되지 않았다. 대상은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고 독자의 공감대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를 여럿 설치하여 몰입을 유도하는 비변칙적 소설로 판명되었으며, 이에 따라 등급이 유클리드Euclid에서 해명Explained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대상은 재단의 위장기업인 슬라빅 카빈 출판사Slavic Carbine Publishing에서 번역 및 출판하여 현지 요원의 활동비를 충당하는 것에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부록 1005
머릿말
나의 최후의 작품을 읽을 이에게
나는 이제 갓 마흔을 넘긴 직장인이자 이름없는 소설가이다. 먼저 나의 소설을 알아주는 당신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당신이 이 책을 사랑해 준다면, 나는 내가 죽음의 심연에 있을지라도 충분히 행복하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이 좋았고, 친구들이 조롱하고 가족들이 비난하더라도 글이 좋았기에 글을 썼다. 남들이 시험 성적을 내기 위해 펜을 잡을 때에도 글을 쓰기 위해 펜을 잡았고, 남들이 모여앉아서 술을 마실 때에도 나는 책상에 앉아서 글을 썼다.
물론 성적은 좋지 않았기에 남들이 업신여기는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나는 글을 쓸 수 있었기에 기꺼이 모욕을 감내할 수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쓴 원고들을 수많은 출판사에 제출했지만 빈번히 거절당했을 때에도 나는 글을 쓸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종말의 때는 찾아왔다. 홀로 남은 아버지께서 과로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내 손으로 아버지의 유골을 뿌릴 때, 나의 희망도 흩뿌리듯이 날라갔다. 그 때부터 나는 글을 쓰는 대신 변변찮은 직장을 구해 매일 무의미하고 혹독한 업무의 숲을 해쳐나갔다.
그러다 나의 동기가 쓴 책을 우연히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 항목에서 본 날, 나의 꿈이 다시 타올랐다. 닳을 대로 닳은 몸과 삭을 대로 삭은 정신에 형언할 수 없이 뜨거운 열망이 다시 타올랐다. 나는 내가 일하는 틈틈이 글을 쓰고 퇴고하며 때로는 퇴근하고 나서도 잘 시간까지 아껴가며 글을 써내려갔다.
몇 년 간의 작업 끝에 이 글을 완성했을 때, 나는 그제야 비로소 소설가로써의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나는 글이 좋았고, 글이 쓰고 싶었고, 글을 쓰다 죽고 싶었다. 그러나 가련하고 무지한 소설가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곡괭이질하는 사나이"는 나의 최후의 작품이다. 꺼져가는 잿더미 속 자그마한 불씨가 꺼지기 직전에 더 선명하게 빛을 내뿜는 것처럼, 이 작품을 써내려갔다. 비록 사그라든 불씨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내 희망만은 꺼지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겠지.
-20██/11/27, 소설가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