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가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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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기록 095-KO-7 부록 제1호C█████ 요원(옛 감시 대상 095-KO-YF-274419) 채용 경위 보고서 부록 제3호

19██년 3월 8일
(전략)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 그러하듯이, 나에게도 상상속의 친구가 생겼다. 하지만 난 지금 21살인데다가, 이 친구는 내가 스스로 만든 존재가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는 나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이상한건, 나에게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그녀?)가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을 귀로 느끼고 있다. 그런데 나의 귀는 녀석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있다. 과제에 많이 시달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좀 피곤했나보다. 병원에 한번 가 봐야겠다.

19██년 3월 9일
(전략)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는 환각이 대화를 시도해도 절대 응답하지 마라고 했다. 그 순간 현실과의 경계가 깨질 것이라나. 환각임을 스스로 인지할 때 병원을 찾은것이 잘한 일이라며 치료는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후략)

19██년 3월 17일
그(그녀?)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결국 굴복하여 말을 걸었지만, 내가 미칠 거라는 의사의 걱정과는 달리 그저 일방적으로 나에게 아름다운 장면들을 계속해서 느끼게 해 줄 뿐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은 이런 아름다운 장면들을 정말로 공유한다면 어떨까? 어쩌면 그 방법을 나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의사가 걱정한대로 될 것 같아 걱정이다.
(중략)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준 장면을 몇 번이나 놓쳤는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고, 그 때 마다 그는 나까지 괜히 울적해질 만큼 매우 슬픈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 슬픔은 날이 갈수록 쌓이고 쌓이며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우울증에라도 걸릴 것 같았다. 내가 그 장면을 남겨서 내가 더 이상 그녀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 마음의 준비가 되는대로, 이 아가씨에게 내가 느끼는 장면을 표현할 수 있게끔 설명을 요구할 것이다.

19██년 3월 18일
(전략) 내가 저 녀석이 보여준 소리를, 아주 당연하다는듯이 똑같이 그려냈다. 내가 어떻게 소리를 보고, 그 소리를 이렇게 그렸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어쨋든 뭔가 뿌듯하다. 이 결과물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싶다는 마음까지도 생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병원도 계속 잘 다니자. (후략)

19██년 3월 21일
(전략) 내가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하루만에 나의 담당의가 바꼈다. 의사가 차트에 감염이 확인됐다고 적는걸 얼핏 본 것 같았지만, 나 혼자 긴장한 게 무색하게 의사는 주의만 좀 주고 따로 치료를 하거나 약을 처방하지는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의 차트였나보다. 그나저나, 정신과에서도 환자가 ‘감염’됐다고 할만한게 있었던가? (후략)

19██년 4월 2일
(전략) 의사의 걱정과 달리 현실과의 경계도 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만 볼 수 있는 이 친구덕에 등단은 물론 젊은 청년 작가가 받을 수 있는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며 성공했다. 오늘 옆집에 이사온 ██ ████라는 여자는 내 그림을 알고있는것도 모자라 나를 알아보기까지 했을만큼. (후략)

19██년 5월 28일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청년작가로서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을만큼 성공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잘 해낼 수 있을 것같은것이, 오늘은 나의 친구가 특별한 ‘냄새’를 ‘보여’주었다. 만약 정말로 내가 느끼고있는 이 느낌 그대로라면, 이 친구가 내게 알려주는 그림은 [데이터 말소].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획기적인 작품이 될 것임은 확실할것이다. 오늘은 바쁘니 내일부터 작업을 시작해야겠다.

19██년 6월 22일
거의 한달을 걸려 나의 친구가 알려준 그림을 완성했다. 그런데, 세상에, 이 그림, 정말로 [데이터 말소]! 아마 옛날 사람들이 마법이나 주술이라고 부르던게 이런 것이었나보다. 처음에는 의사가 경고했던대로 드디어 내가 미친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건 진짜 [데이터 말소], 사람들은 열광했다. 내가, 예술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에 어떤 과정을 통해 이 그림을 완성했는지 기록해왔으니 적절히 응용하면 더욱 놀라운 일도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19██년 6월 23일
요 한달정도 하는 것도 없이 바빴다.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딱히 작품활동도 하지 않았는데 붓은 한달쯤 쉬지않고 계속 사용한 것 마냥 까칠하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나의 고마운 친구도 좀 이상했다. 하루종일 슬프고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창밖의 어딘가를 노려본다. 그러고보니 이거, 얼마 전에 이사온 ██ ████네 집 방향이군. 팔을 다쳐 은퇴한 전직 경찰이라고했던가. 첫인상도 좋고 굉장히 귀여운 아가씨던데 의외로 무서운 일을 했나보다. (후략)

20██년 9월 17일
얼마 전 대학도 졸업했고, 생활도 안정될만큼 그럭저럭 작가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잘 해낼 수 있을 것같은것이, 오늘은 나의 친구가 특별한 ‘냄새’를 ‘보여’주었다. 만약 정말로 내가 느끼고있는 이 느낌 그대로라면, 이 친구가 내게 알려주는 그림은 [데이터 말소].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획기적인 작품이 될 것임은 확실할것이다. 오늘은 바쁘니 내일부터 작업을 시작해야겠다.

20██년 9월 22일
보름 조금 넘게 걸려 드디어 나의 친구가 알려준 그림을 완성했다. 그런데, 세상에, 이 그림, 정말로 [데이터 말소]! 아마 옛날 사람들이 마법이나 주술이라고 부르던게 이런 것이었나보다. 처음에는 드디어 내가 미친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건 진짜 [데이터 말소], 사람들은 열광했다. 내가, 예술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에 어떤 과정을 통해 이 그림을 완성했는지 기록해왔으니 적절히 응용하면 더욱 놀라운 일도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년 9월 23일
요 보름정도 하는 것도 없이 바빴다.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딱히 작품활동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화판에는 지우개 가루가 잔뜩 쌓여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나의 고마운 친구도 좀 이상했다. 하루종일 슬프고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창밖의 어딘가를 노려본다. 2~3년 전쯤에 이사온 ██ ████네 집 방향이다. 참 신기한건, ██ ████에게서 이 친구에게서 느껴지는것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함께 있다보면 뭔가 어색하긴 했지만, 어쨋든 그녀도 나의 활동에 작게나마 꾸준히 도움을 주고있어 매번 고맙다. 그러고보니 내일 점심 때 약속도 있었는데. 환상이 질투 같은걸 할 리는 없을테고, 여자에 신경쓰느라 창작 활동을 소홀히 할지도 모른다고 내가 혼자 무의식중에 좀 걱정하나 보다. (후략)

20██년 4월 5일
좋아.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만 하자. 나는 재능있는 화가야. 인정받았다고. 앞으로도 계속 잘 해낼 수 있을 것같은것이, 오늘은 나의 친구가 특별한 ‘냄새’를 ‘보여’주었다. 만약 정말로 내가 느끼고있는 이 느낌 그대로라면, 이 친구가 내게 알려주는 그림은 [데이터 말소].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획기적인 작품이 될 것임은 확실할것이다. 오늘은 바쁘니 내일부터 작업을 시작해야겠다.

20██년 4월 17일
1주일 조금 넘게 걸려 드디어 나의 친구가 알려준 그림을 완성했다. 그런데, 세상에, 이 그림, 정말로 [데이터 말소]! 아마 옛날 사람들이 마법이나 주술이라고 부르던게 이런 것이었나보다. 처음에는 드디어 내가 미친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건 진짜 [데이터 말소], 사람들은 열광했다. 내가, 예술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에 어떤 과정을 통해 이 그림을 완성했는지 기록해왔으니 적절히 응용하면 더욱 놀라운 일도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년 4월 18일
이번주는 하는 것도 없이 바빴다.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딱히 작품활동도 하지 않았는데 화판에는 무언가 작업을 한 것 처럼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나의 고마운 친구도 좀 이상했다. 하루종일 슬프고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창밖의 어딘가를 노려본다. ██ ████네 집 방향이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 ██ ████를 굉장히 싫어한다. 설마 그녀와 좀 잘되면 내가 창작활동에 소홀해질까봐 그러는건가? 나의 환상이니, 내가 무의식중에 저런 비슷한 고민을 하고있는 것이 반영된 듯 하다. 어느정도 주의해야겠다.
아, 이런. 그러고보니 내일 저녁 초대받았는데, 이거야 원, 죄다 작업복이니 무슨 옷을 입고 가야할지 모르겠군. ██ ████네 집에서 식사를 하는건 처음인데. (후략)

20██년 12월 24일
스스로 이런 표현을 하기엔 낯부끄럽지만, 제법 성공한 화가로서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잘 해낼 수 있을 것같은것이, 오늘은 ██ ████에게서 특별한 ‘냄새’를 ‘볼’ 수 있었다. 만약 정말로 내가 느끼고있는 이 느낌 그대로라면, 그녀가 내게 알려주는 그림은 [데이터 말소].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획기적인 작품이 될 것임은 확실할것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는 꼭 ██ ████와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으니,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작업에 들어가야겠다.

20██년 1월 9일
1주일만에 ██ ████에게서 느낀 것을 표현한 그림을 완성했다. 그런데, 세상에, 이 그림, 정말로 [데이터 말소]! 아마 옛날 사람들이 마법이나 주술이라고 부르던게 이런 것이었나보다. 처음에는 드디어 내가 미친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건 진짜 [데이터 말소], ██ ████가 직접 확인했다.
(중략)
그 분의 후원만큼이나 특별한 일도 있었다. ██ ████가 나의 그림을 확인하고 돌아가자, 한동안 보이지 않던 나의 친구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지금까지의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을 주는것이 아니라, 정말로 나에게 ‘평범한 대화’를 시도했고, 나는 당연히 이에 응했다.

20██년 1월 10일
친구의 설명에 따라 어제 완성한 그림을 살짝 고쳤다. 나는 [데이터 말소]. 모든 것이 기억났다. 왜 나의 친구가 그토록 ██ ████를 싫어했는지도, 왜 항상 ██ ████에게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불편한 기분이 느껴졌는지도 알게되었다. 나는 이 친구를 통해 똑같은 그림을 ███번이나 찍어냈지만, 매번 빼앗겼다. 이제 곧 재단이라 부르는, 나의 이 그림과 같은, 세상의 보편적인 법칙을 깨뜨리는 이상한 존재를 격리하고 관리하는 곳에서 나를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중인 그녀가 화랑으로 찾아올것이다. 그녀는 매번 다음에 격리해야할 그림이 [데이터 말소] 하지 않기를 빌며 나의 기억을 지웠고, 매번 똑같은 그림이 나오기 때문에 내가 안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 모르게 그림을 고쳤고, 언젠가 내 기억을 지우면서 무심결에 이야기 했던 “p-6”인지 뭔지 하는 것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이야기했던 [데이터 말소].

20██년 1월 11일
방금 전, 부탁할 것이 있으니 함께 갈 곳이 있다고 ██ ████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에는 집에 찾아와서 주사를 놓더니. 아, 이번에는 지난 ███번에 걸쳐 계속 그린 그림과는 다르지. 이번 그림을 떼어내려면 기억을 잃지 않은 내가 필요할 것이니 불러낼 수 밖에.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재단인지 뭔지 하는 곳이 마냥 사악하기만 한 곳은 아니니만큼, 이 그림에 확실한 안전장치가 걸려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나를 죽이지는 않을것이다. 부탁이래봤자 그림 좀 떼어달라는 거겠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부탁이지만, 난 아마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든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나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상에 어느 정신 나간 그림쟁이가 감히 자신의 뮤즈를 거역하겠어?

그나저나, 나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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