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킥교의 인류학적 접근 - 사례연구 05: 한반도의 세을가
사르킥교의 인류학적 접근
An Anthropological Approach to Sarkicism
인류학부 이묘영 박사Dr. Myo-yŏng Yi
서문:
지난 수십 년 사이 사르킥교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는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새로이 얻어진 정보들은, 처음 가정되었던 단일한 교리 가설과는 매우 다른 다양성과 패러다임 전환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제 사르킥 종교의 다양한 종파들과 문화적 전통에 관한 보다 넓고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사르킥 종파들은 여러 개로 갈라진 해석들의 산물이며, 고대의 사르킥교와는 피상적인 유사성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특히 본인을 비롯한 사르킥교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이 종교의 설립자들이 자애로운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한다. 재단이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경구일 것이다. 비록 우리 사이에는 영겁의 세월이 있지만, 우리는 결국 같은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므로.
그리고 고대의 아뒤툼인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사르킥교 역시 괴물딱지들 천지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시아 대륙에서의 변칙 종교 발흥에 대한 연구에 정통한 이묘영 박사는 모국인 대한민국에서의 낼캐 신앙을 발견함으로써 이 프로젝트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이 보고서는 그가 수집한 자료들과 세을가 사람들과 섞여 살며 얻게 된 정보를 집대성한 문건이다.
- 역사학부 종교적 GoI 위협분석 책임자문관 주디스 로우 박사Dr. Judith Low
사례연구 05: 한반도의 세을가
개요:
한반도에서는 예로부터 산에 신령스러운 힘이 깃들었다고 믿어왔고, 그것은 이 땅에 정착한 세을가(世乙加)Se-ŭl-ga인들에게도 다름이 없었다. 소백산맥 깊숙한 산골짜기에 거주하고 있는 사르킥 공동체인 세을가 사람들은 상당수의 사르킥 종파와는 다르게, 낼캐 디아스포라로 흘러들어온 아뒤툼의 유민이 아닌 순수한 한반도인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
소을촌(瘙乙村)So-ŭl Hamlet은 현재 세을가인들이 거주하는 마을로, 일종의 외부차원에 속해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여타 농촌처럼 밭을 일구고 가축을 기르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소을촌의 현 종교적 지도자는 세을진인 명현(明玄)Myŏng-hyŏn이다.
역사:
기원전 1200년경-기원전 1000년경의 사르킥 디아스포라 이후 발흥한 여느 종파들과는 달리, 세을가는 해당 사건의 영향이 비교적 크지 않은 편이다. 인근 국가들에서 상당한 정도의 사르킥 교단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한반도 역시 디아스포라의 영향권 내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여러 문헌에서 암시되는 정황상 초기 세을가의 신자 중 한반도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을가의 역사는 처용(處容)Chŏ-yong이라는 이름의 존재가 879년 후기 신라 때 울산 개운포에 당도하면서 시작되었다. 비변칙 역사서인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 따르면, 당시 신라의 군주였던 헌강왕이 개운포에 갔다가 구름과 안개 때문에 길을 잃었다. 천문을 담당하는 관리가 그것이 동해의 용이 일으킨 일이라고 이야기하자 왕은 용을 위해 절을 지었고, 이에 기뻐한 용은 자기의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들은 왕 앞에서 그의 덕을 칭송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추었는데, 이 중 아들 하나가 왕을 따라 신라의 수도로 갔다고 한다. 이 존재가 바로 처용이다. 왕은 처용에게 급간(級干) 벼슬을 주어 정사를 돕게 하였다.
역시 비변칙 세계에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왕이 처용의 마음을 얻기 위해 혼인을 주선했는데 아내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러자 역신(疫神)pox deity이 탐을 내어 사람으로 변신해 밤에 몰래 처용의 집에 들어가 간통했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운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는데, 전자를 처용가라고 하며 후자를 처용무라고 한다. 이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 처용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앞으로는 처용의 얼굴이 그려진 곳만 보아도 그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신라인들은 전염병을 막기 위해 처용의 얼굴을 문에 그려붙이곤 했다.
세을가인들은 이렇게 비변칙 세계에 잘 알려진 인물인 처용이 세을가를 처음으로 전파한 교조라고 여긴다. 세을가 기록에 따르면 처용이 온 후로 세을가가 신라 내로 퍼지기 시작했다고 하며, 설화에서 암시되듯 왕실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 성장했다. 고려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성장세는 줄어들었지만, 이러한 시기에도 불교 국가였던 고려가 세을가를 불교의 아류로 인지한 탓에 탄압이나 박해 등의 피해는 적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세을가 마을이 기록에서 등장한다.
마을을 일구며 살아가는 부류와 세상을 떠돌며 비교적 비변칙적 사회에 가까이 살아가는 부류로 나뉜 세을가는 조선대에 들어서면서 이전보다 더 강력한 난관을 겪었다. 숭유억불 체제로 불교와 덩달아 차별을 입었던 이들은 불어도감과 그 후신 이금위의 표적 중 하나가 되었다. 세을가 마을의 특성이기도 한 변칙적 방비는 바로 이 시기부터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세을가는 철저한 밀교가 되었고, 주로 하층민들 사이에서만 몰래 전파되는 양상을 취한다.
초상대응기관의 공격적 접근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었지만, 비변칙적인 부분의 문제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증가한 정권의 수탈과 부정으로 세을가인들 역시 당대 농민들이 겪던 여러 가지 고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조선이 개항되고 사회가 격변하자 이러한 일도 잠시 줄어들었지만, 1910년의 경술국치와 1912년의 소을촌 침탈사건으로 세을가의 고난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이 당시 소을촌은 지리산 정상에 위치하며 SCP-3855와 SCP-3440과 유사하게, 특정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만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과밈성 결계, 방어용으로 육종된 SK BIO 생명체들, 디보쉬의 우르마와 유사한 인발 등의 변칙적 방비가 구축되어 있었다. 나아가 처용이 처음으로 건설했다는 마을이라는 점에서 이곳은 세을가인들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자메아 문건에 따르면 1912년 4월 니카호 한노 소좌와 히라누마 신페이 소좌 휘하 5개 소대가 백택 계획 3호에 따라 이 마을을 습격하였고, 당시 소을촌의 진인이었던 파염播染을 포함한 주민 약간을 사살하였다. 이들에 의해 구속된 소을촌 주민 대다수는 이자메아 조선부 기지들로 끌려간 뒤 여러가지 생체 실험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을촌 내부에 있던 여러 성물과 유물 역시 빼앗기고 말았으며, 진압 과정에서 마을의 설비가 대다수 망가졌다. 이후 소을촌은 급속도로 황폐해지고 말았다. 이를 기점으로 세을가인들은 일제에 대한 철저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일부 세을가인은 조선의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행위를 취했다.
일제강점기 시기 다양한 고통 속에 놓였던 이들은 광복을 맞으며 다시 재건할 기회를 얻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이때 대부분의 세을가 마을이 망했고, 한반도가 반으로 분단되면서 이북에 남아있던 세을가인들과는 연락이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세을가인들은 현재의 소을촌을 재건설하면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문화, 전통, 그리고 오개념:
“세을가”는 발음상 “사르킥”과 유사하게 들리지만, 사실 전혀 관련이 없다. “세을가”는 “낼캐”를 이두(吏讀)로 옮긴 단어로, 이것이 이들 자체와 신앙적 지침의 명칭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세을가인들은 다른 종파를 지칭할 때에도 세을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들의 교리는 상당 부분 한국 불교에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자신들의 종교를 외부 사회에 위장하면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오염이 심한 부분은 이들의 법계로, 본래 사르킥 종파 간에 공유되는 계급명(카르시스트, 벌루타아르 등)은 세을가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법계의 구분은 엄격하지만 구체적인 권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법계들 사이의 관계는 마치 불교의 그것과 유사하다. 세을가인들의 법계는 다음과 같다.
- 법우(法友)Dharma Brethren: 평신도. 타 종파의 오린, 젠드에 대응.
- 대덕(大德)Bhadanta: 벌루타아르에 대응. 차기 진인이 되기 위해 수학하는 자들이 이 법계를 받지만, 모두가 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세을진인(世乙眞人)Se-ŭl-Jin-in: 카르시스트에 대응. 줄여서 “진인”이라고 한다.
- 존자(尊者)Arhat: 클라비가르에 대응.
- 천인교사(天人教師)Śāstāmanusyānāṃ: 오즈르목에 대응.
세을가인들은 이온이 언젠가 재림하여 이 땅의 억조창생을 제도하고, 이쿠나안으로 이끌 것이라 믿는다. 현재 이온은 도솔천(兜率天)Tuṣita에 기거하며, 여섯 마라(魔羅)Māra와 그 우두머리인 타화자재천왕(他化自在天王)Paranimmitavaśavatti 파순(波旬)Pāpīyās과 끝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재림하여 이상향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미륵 사상과 형태적 유사성을 보이는데, 실제로 한반도 내 정세가 좋지 않을 때마다 이온을 미륵(彌勒)Maitreya과 동일시하는 사상이 대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을가 주류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아니하며, 근래에 와서는 그저 역사 속에 존재하는 주장 하나로만 남아있다.
모든 존재는 이쿠나안에 갈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수도해야 한다는 것이 세을가의 중심 교리다. 모든 생명체에게는 이미 승천의 근본 요소가 충족되어 있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승천의 시작이라는 격언도 주목할 만한 사상이다. 이를 통해 누구나 이온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지만, 그것이 이온을 뛰어넘는 더 지덕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님을 경고하는 격언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사상들은 세을가 소속 종족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을가에서는 요호나 성성이 등의 비인간 종족 역시 포용하고 신자로 받아들인다.
한편, 마지막 격언은 “지나침의 죄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 개념은 세을가 교리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로, 모든 지나침은 다시금 번뇌(煩惱)Klesa를 불러일으키며 이는 곧 죄악이라는 것이 해당 개념의 설명이다. 세을가인들은 이온 역시 이 지나침의 죄악을 범하였다고 본다. 제국을 건설하여 전쟁의 업화 속으로 민중을 몰아넣음은 그들이 보기에 그릇된 짓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세을가인들은 이온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번뇌와 죄악을 참회하기 위해 마라들과 끝없는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본다.
세을가와 타 사르킥 종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불멸에 대한 태도이다. 대부분의 사르킥 종파에서, 필멸은 소거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을가 사람들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이들에게 불멸 역시 지나친 것으로 간주된다. 세을가 경전인 『세을유책언해』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지나친 욕망, 지나친 증오, 지나친 권력과 같이 지나친 고통은 죄악이다. 지나친 것은 썩기 마련이고 본래의 성질을 잃고 만다. 주어진 삶 이상의 것을 바라며 무리하게 제 육(肉)을 변형시키니, 본래의 정신마저 희미해지고 곧 마라와 같은 형상이 된다. 어찌 고통이 아니랴.”
이에 대응하듯 세을가인들의 전통적인 육공예는 가축과 대인 의료에 특화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사르킥 육공예가 발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정상사회에 관여치 않는 이들의 특성상 자주 쓰일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네 클라비가르와 오즈르목의 명칭에 대한 것 역시 시간이 지나며 달라졌다. 이는 그들의 이름을 이두로 음역했다가 한(漢)화하면서 발생한 일이다. 나독스는 내도지(奈度只), 오로크는 오을지(烏乙只), 로바타아르는 노아대을(魯阿大乙), 사아른은 사을은(沙乙隱)이라고 불린다. 이온의 이름 표기는 불분명하다. 세을가인들은 이온을 오직 천인교사나 세존 등의 존칭으로 부른다.
소을촌은 그 전체가 외부차원에 위치해 있으며, 소백산맥 어딘가의 통로로 드나들 수 있다. 이 마을의 소재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0년대 이후로 세을가는 재단과 세계 오컬트 연합 등 정상성 유지기관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전에 소을촌에 위치하고 있었던 지리산 근처를 수색했으나 당연하게도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가장 큰 발견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1976년 『신민속학논총』 통권 제13호에 실린 라우노 내래넨 교수의 논문에는 세을가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져 있다. 내래넨 교수는 1974년 대학원생 퀼리키 뉘캐넨과 함께 이곳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고 썼다. “소을촌 사람들은 순박하고 정이 많다. 바깥 사회에 휘몰아치는 현대화의 물결에도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옛 풍속을 지키며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외촌(外村)과 수확량이 크게 다르지 않다.” 내래넨 교수의 서술 덕에 세을가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소을촌으로 직결되는 입장권 역할을 해주지는 못했다. 유일한 단서는 그가 세을가인들을 만난 곳으로 지목한 함평우시장이었다.
시장에서 세을가와 소을촌을 탐문하던 중, 이틀째 되던 날에 세을가인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을 박융朴融이라고 소개한 그 남자는 소을촌을 방문하게 해달라는 나의 요청을 약간의 고민 후에 받아들였다. 하루 뒤에 다시 오라고 한 그의 말을 수락했고, 다음 날 소을촌에서 왔다는 두 남자와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소을촌 토박이로, 축산업 종사자였다. 그들의 차를 타고 소을촌으로 갈 수 있었다. 이때 나는 GPS 등의 기기를 사용하여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재단에 전송하려고 하였으나, 어느 순간 기기가 전혀 작동하지 않았고, 이는 휴대전화나 노트북도 마찬가지였다. 휴대전화와 노트북은 마을 내로 진입하였을 때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위치 정보를 전송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소을촌에는 약 70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다른 농촌과는 달리 청년층 인구도 상당하다. 가업을 이어받아 소을촌에서 축산업을 하거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자리를 찾아 다른 도시로 떠나기 때문에 세을가인들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이들과 바깥 세상과의 관계는 상당히 놀라웠다. 교리상 세을가는 원사르킥에 해당하지만, 역사를 통틀어 바깥의 접촉이 없었던 시기가 있었던 시기보다 훨씬 적었다. 마을을 일구며 살아간 세을가인들조차 그 마을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흔히 외침(外侵) 때마다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역사 탓인지 현대의 세을가도 바깥과의 접촉을 금기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외부인이 소을촌에 진입하는 것은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약 9일간 체류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소을촌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사르킥적 색채는 분류된 바 없는 SK-BIO 생물체들이 우경(牛耕)에 동원되는 모습이었다. 나를 마을로 데려다 준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해당 생물체들은 소(Bos taurus)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했다. 소을촌 내에 비변칙적인 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부리는 SK-BIO는 비변칙적인 소를 그들의 육술로 변이시킨 생명체로, 이들이 새끼를 낳으면 그중 가장 약한 새끼를 성장시키면서 점차 SK-BIO 생물체로 변이시켜간다. 이렇게 만들어낸 생물체는 온순하고 고분고분하며, 능률이 매우 높다.
소을촌의 입구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 몽은사(朦誾寺)Mong-ŭn Temple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세을가 사찰인 이곳은 총 6개의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대웅전, 대적광전, 극락전, 원통전, 약사전, 진인전이다. 이 사찰은 마을 어린이들에게는 세을가 교리를 가르치는 학당 구실을 하며, 마을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연회장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몽은사에 거주하는 이는 진인과 그의 직계 제자들인 대덕들로 제한되어 있다. 현재 몽은사의 주민들은 진인 명현과 대덕 관조(觀照)Gwan-jo, 시명(是名)Si-myŏng이다.
진인의 말에 따르면 대웅전 전각은 명현 이전의 진인이었던 세을진인 원광(圓光)Wŏn-gwang의 육체로 빚어졌다. 대체로 진인이나 존경받는 이의 육체는 전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는 듯했다. 진인은 다른 전각들은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로 빚어졌다고 덧붙였다. 전각 내에는 어떠한 현대적 설비도 없지만, 진인이 조작하면 창문이 열리고 실내가 밝아지는 것으로 보아 육공예로 그러한 기술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들은 다른 종파의 SK-BIO 005형 사용례에서 관측된 것과는 달리, 생물학적으로 사망했다. 진인은 이에 대해 건축물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은 단적으로 “지나친 처사”임을 피력했다. 만일 자신의 몸을 공양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기다렸다가 임종 직전부터 시작한다. 완벽히 변형이 끝난 뒤에는 편히 사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가축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그 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만큼 진인 개개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지는 못한 편이다. 타 종파와 비교해 봤을 때, 세을가 진인들은 한 종파를 이끄는 수장이라기보다 한 절을 이끄는 주지 정도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만난 세을가인들 대다수는 진인을 공경하고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다음, 그리고 동시대에 존재하는 다른 진인에게도 보일 모습이라는 것에 자연스럽게 동의했다. 이러한 생각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며, 불충으로 해석되지도 않는다.
전통적인 재단의 시각에서 정의해볼 때, 세을가는 복수의 카르시스트들과 벌루타아르들이 집단지도하는 공동체 양상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미루어볼 때 세을진인 처용이 세을가를 이끄는 '유일한' 카르시스트이며 이외의 진인들은 사실상 벌루타아르에 해당된다는 의견이 제기된 적 있었다. 그러나 세을가의 카르시스트 계급인 진인과 벌루타아르 계급인 대덕의 차이는 완연하며, 소위 “대진인(大眞人)Greater Jin-in”이라고 불리며 주민들의 존경을 받는 교조 세을진인 처용과 다른 진인들의 종교적 위치에서의 차이 역시 두드러지지 않는다.
녹음 기록 녹취록
녹음일자: 2017/05/30 @ 19:00
면담자: 이묘영 박사
피면담자: 진인 명현
머리말: 마을에 오고 한 여섯 시간이 지났을까, 저녁을 대접받고 나서 진인과의 면담을 허락받았다. 내 쪽에서 먼저 요청한 것이기는 하나 마을 사람들 역시 면담에 별다른 저항이나 경계가 없었다. 소을촌 내에서 제일 높은 종교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진인은 소을촌의 절 몽은사 대웅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녹취록 시작]
이묘영 박사: 안녕하세요, 세을진인 명현. 명현 진인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진인 명현: (웃음) 그냥 스님이면 감사하겠습니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이 박사: 더할 나위 없이요. 제게 보여주신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또, 이렇게 선뜻 면담을 허락해 주신 것도요. 외부인에게 소을촌 출입을 허락해주신 것도 힘든 결정이셨을 텐데. 솔직히 처음에는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 마을이니만큼 훨씬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실 줄 알았습니다.
진인 명현: (잔잔하게 웃음) 소을촌은 비밀의 마을이 아닙니다. 단지 대한민국 지방자치단체에 귀속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요. 그대 말고도 이 마을에 찾아온 이들은 간혹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갔지요. 대진인 역시 처음에는 이방인의 신분이었으니, 세을가 사람들은 감히 그런 나그네들을 배척하지 않는답니다.
이 박사: 그렇군요. 아, 마침 그 '대진인'에 대해 질문드리려고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말씀을 들어보니, 이곳의 문화에서는 그 대진인이라는 존재가 아주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존재, 그러니까…… 이 분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까요, 이 분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진인 명현: 그러지요. (잠시 침묵) 대진인께서는 이 땅에 세을가를 처음으로 전파한 분으로, 세간 사람들에게는 처용이라는 이름이 유명합니다. 그분은 세존(世尊)Bhagavat의 제자로 제바국(提婆國) 시절 네 존자와 위대한 법우들과 함께 세을가의 도를 깨우쳤지요. 그러나 세존께서는 한때 법륜(法輪)Dharmachakra을 잃고 금륜(金輪)Suvarnachakra을 들어 전륜성왕(轉輪聖王)Suvarnachakravarti이 되셨고, 끝없는 간과(干戈)에 응하여 업화 속으로 거니시자 처용께서는 탄식하며 그분을 떠났습니다. 이후 귀산성(貴山城)에 거처하다가 대덕 한 분과 두 법우를 대동하여 신라 땅에 당도하셨지요. 그것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처용랑의 모습입니다.
이 박사: 그렇다면 『삼국유사』의 처용 설화에 대한 것도 모두 사실이란 말씀입니까? 거기서는 망해사를 짓자 용이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데리고 등장했는데, 그 막내 아들인 처용이 헌덕왕을 따라갔다고 했죠. 또, 처용의 아내와 역신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요.
진인 명현: 모든 설화는 역사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조상(彫像)입니다. 대진인의 설화 역시 마찬가지지요. 단지 상징과 비유에 가려진 몇 가지 진실이 있을 뿐입니다. 진인의 아내와 역신 이야기를 예로 들어볼까요. 『삼국유사』에서는 처용랑의 아내를 빼앗은 역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두 다리는 내 것인데, 두 다리는 누구의 것인가”하는 노래를 부르자 역신이 감복하여 처용의 얼굴 형상이 그려진 곳에는 출입지 않겠다 하였고, 그것이 후세에 전달되어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상징으로 남았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 박사: 자세하시군요.
진인 명현: (웃음) 어릴 적부터 들어온 이야기니까요. 이 이야기에는 몇 가지 중대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처용의 아내는 실제로 진인의 아내가 아니라, 진인을 따라온 대덕이었다는 것이라든지.
이 박사: 대덕이요? 그렇다면…… 그 대덕이 전염병에 걸린 건가요?
진인 명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실제로 역신과 사통했죠. 그분의 존함은 대덕 나크사티하르Nahksatihaar. 녹족부인(鹿足婦人)Deer-legged Lady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요. 대진인의 가장 고귀한 조언자…… 교리에 대한 이해와 학식이 풍부했고 병자들과 천인을 자애로 감싸주는 분이셨다지요. 허나…… 역신이 그분을 홀려, 한때 진인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처용께서는 그 역신과 그녀가 거느리던 무리를 물리치시고 대덕을 되찾았다고 하더군요.
이 박사: 역신이라… 그러니까 요컨대 귀신 같은 존재인가요? 괜찮으시다면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인 명현: [잠시 사이] 제바국의 대군장을 필두로 한 무리였지요. 고국에서 추방당한 제바국의 귀족 세 명과 신라인 한 명으로 이루어진 자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동북아시아 전역을 유랑하며 역병을 퍼트렸다고 합니다. 아직도 이 나라엔 그들을 숭배하는 굿이 남아있지요.
아주 격렬한 싸움이었습니다. 역신의 무리는 강고했고 제바국의 삿된 암상으로 말미암아 정도(正道)Āryāmārga를 걷지 아니하였지요. 대진인께서는 경고하셨습니다…… 세을가에 귀의할 때에는 그저 그 계율(戒律)Sila and Vinaya과 선인(先人)의 가르침만을 따를 것이 아니라 승천과 탈번뇌의 길을 바로 걸어감이 옳은 것이라고. 그 무리는 그러하지 못했지요……
이 박사: 잠시만요, 그 역신 무리가 세을가를 믿었단 말씀이신가요?
진인 명현: 우리의 것과 다른 것이었지만, 네. [긴 사이] 노파심에 하는 말입니다만, 마을의 다른 곳에선 역신 무리에 대해 묻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박사: 어째서요?
진인 명현: [잠시 사이] 전 박사님이 다치지 않길 바랍니다.
이 박사: 그렇…군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건가요? 동해의 용, 그리고 일곱 아들이라니……
진인 명현: [잠시 침묵] 그분의 기나긴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떨쳐내지 못할 핏줄의 아픔…… 빚음당한 자의 고뇌…… 이는 그분의 아픔입니다. 저흰…… 사사로이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그에 대해선…… [길게 침묵한다]
이 박사: 이거 실례했습니다. 진인 처용은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설화 이후로 대진인의 기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만……
진인 명현: [옅게 웃음] 대진인께서 어찌 돌아가신단 말입니까. 그분은 세존께서 직접 가르친 분입니다. 죽음은 그분께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한숨] 그러나 그것이 그분께 이전보다 더한 번뇌를 불러일으켰지요. 필멸을 제(除)하는 것은 굴레를 끊어냄이 아닌 새로운 굴레에 갇히는 것임을 깨달으신 겁니다. 산 채로 부패해가는 수많은 농군(農軍)들…… 대진인은 그 모든 것을 보았고 슬퍼하셨습니다.
이 박사: 그렇다면 처용 진인께서는 아직도 생존하고 계시단 이야기가 되겠군요.
진인 명현: 그분은 다른 진인들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생은…… 세을가를 지키기 위해 주어진…… 멍에니까요.
이 박사: 실례되는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대진인과 다른 진인, 그러니까 세을가 성립 이후의 진인들과의 차이점이 그뿐인가요?
진인 명현: 어떤 분야에서 말씀이십니까?
이 박사: 그러니까……. 위치라던지요. 대진인께서 이 종단을 이끄시는 것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진인 명현: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보살과 구도자의 관계. [짧은 사이] 대진인은 이 땅의 중생을 모두 구원하여 다 함께 이쿠나안으로 가기 위한 대원을 상정하셨고, 그로 인해 저와 같은 진인들이 양성되었지요. 허나 대진인께서는 그 시발점으로 축원 받을 뿐, 달리 그분의 말이 더욱 존중받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눈먼 믿음은 모두를 번뇌로 끌고 가는 목줄”이라는 말이 있지요.
이 박사: 혹시 대진인 이후의 진인 중에서도 영생을 한, 혹은 영생을 추구한 진인이 계십니까?
진인 명현: 시도한 자들은 꽤 있으나…… 필연적으로 죽기 마련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조금 오래 살았으나 진실로 인간으로 살지 못하니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모두 마라와 같은 형상이 되었고… 종내엔 인간의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피와 목숨을 탐하는 괴물이 되기도 했고, 마라와 통하여 그들의 힘을 부리려고도 한 자들도 있었지요.
이 박사: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진인 명현: [옅게 웃음] 욕심에 눈 먼 자들은 모두에게 해악을 끼칩니다. 세을가인이었던 자의 죄악으로 고통케 할 수 없으니, 다시 순환으로 돌려보낼 뿐입니다.
꼬리말: 때마침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나는 감사를 표하며 대웅전에서 물러 나왔다. 이번 면담으로 얻어낸 처용의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소을촌에 흐르는 특유의 안온한 분위기가 어디에서 근원하였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또한 비변칙적 역사에 어디까지 개입되었는가를 유추할 수 있는 상징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에 얻은 정보는 영생과 권능을 경시하는 세을가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탈자들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아르콘과 접촉해서 더 큰 힘을 얻어내려 하는 자들은 모든 사르킥 종파에서 공유되는 존재들인 것일까. 한편, “순환으로 돌려보낸다”는 말의 정확한 뜻을 물어보았지만 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기존 재단의 관념에 어긋나는 결론이기는 하나, 전통적인 개념의 카르시스트인 처용과 그 외의 진인을 구별하는 것은 세을가의 체제를 적확히 보여주지 못하는 선택으로 생각된다. 세을가의 특수성은 확실히 논란의 소지를 불러올 수 있지만, 내부의 권력 구조는 다른 사르킥 종파와 확연히 다른 점을 시사한다. 이에 따라 기존에 재단이 가졌던 인식 구조로 세을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오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처용의 역병신 설화와 관련된, 세을가 특유의 인발술art of sigil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설화에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인발술은 방어와 퇴척에 특화되었다.
세을가 인발술의 가장 기본적인 양태는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 첫째: 종이와 피, 붓을 준비한다. 이때 준비한 피는 어떠한 동물의 것이라도 상관없었다고 하는데, 주로 구사자 본인이나 소, 닭, 돼지 등의 피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종이에 처용의 얼굴을 피로 그린다. 이때 중요한 점은 처용의 얼굴을 그림에 있어 그의 얼굴이 지닌 상서로움을 제대로 구현해 냄이다. 현대어로 풀이해보자면 기적학적 벽사 알고리듬의 구현을 중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그려낸 종이를 문에다 붙인 후, 피로 그 상부를 칠한다.
현재 세간에 알려진 처용의 얼굴은 그 형태가 상당히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세을가인들이 구사한 인발술을 일반인이 독자적으로 따라 하려다가 변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공교롭게도 이 인발술은 혈술에 그 근간을 두고 있기에 오로지 세을가인만이 구사할 수 있다. 해당 인발술이 사용된 사례는 전근대에서도 관측된 바 있다. 조선에서 벌어진 가장 큰 기근인 1670년 경신대기근 당시 역병이 심하게 돌았는데, 이때 세을가인들이 민간에 처용의 진짜 초상화를 그려 붙이면서 역병을 물리치려고 시도했다는 사료가 다수 발견된다.
소을촌은 별도의 사르킥 세시를 지키지 않고, 한국 전통 명절을 쇤다. 단지 한 가지 명절이 더 추가되었을 뿐인데, 음력 5월 11일을 진인도래일(眞人到來日)이라고 한다. 구정, 추석과 더불어 세을가인들의 최대 명절인 이날은 처용이 신라에 처음으로 도달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세을가인들은 대략 일주일 전부터 이 명절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하고, 이 기간 동안 전국에 흩어져 있던 세을가인들이 귀향하는 모습도 보인다. 나는 마침 준비가 시작된 지 하루 뒤에 소을촌에 오게 된 덕에 이 행사를 관찰할 수 있었다.
진인도래일의 행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이어진다. 아침부터 점심까지는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은 뒤 몽은사에서 실시하는 법회에 참석하게 된다. 이를 “진인도량(眞人道場)Jin-in Bodhimaṇḍa”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경전을 해설하는 내용이 주된다. 법회가 끝나면 다 같이 마을 중앙에 모여 갖가지 전통 행사를 즐긴다.
저녁을 먹고 나면 마을 사람들은 다시 몽은사에 모인다. 약 오후 7시부터 새벽 12시까지 진행되는 이 시간은 “수계법회”(受戒法會)Upasampadā Dharmasaṃgīti라고 불린다. 이 행사는 세을가인의 성인식이자 정식 신도로 인정받는 계기로, 주로 성인이 되는 세을가인들이 주축이 된다.
촬영기록 0145E-1024
촬영 일자: 2017/06/05 @ 21:00
촬영자: 이묘영 박사
머리말: 진인도래일 행사 막바지.
[기록 시작]
대웅전 계단 앞에 네 사람이 꿇어앉아 있다. 이들은 올해 성인이 된 마을 사람들이다. 본래 수계법회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은 70년대까지만 해도 약 열두 명에서 스무 명까지로 많았다고 하나, 올해 열린 수계법회에서는 오직 이 네 사람뿐이다.
수계법회가 벌어지고 있는 마당 주위는 마을 사람들로 빼곡하다. 진인도래일을 맞아 사람들이 귀향하면서 더욱 그 수가 불어났는데, 화면 우측에 자리한 무리 가운데 한복을 입고 있는 늙은 남자가 보인다. 그가 세을진인 지천이다. 진인 지천의 후방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 넷이 직립해 있는데, 이는 진인의 할코스트로 추정된다. 수계법회를 보기 위해 모인 마을 주민들은 할코스트들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일종의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곧 의식이 시작되었다.
진인 명현: 먼저 행사에 참여해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법회는 올해로 하여금 성년이 된 마을 청년들을 위한 자리입니다. 박종신 법우과 김명숙 법우의 아들 박태현, 안상진 법우와 이희정 법우의 딸 안유라, 최진원 법우와 강미혜 법우의 아들 최지훈, 박종헌 법우와 강윤희 법우의 딸 박혜윤입니다. 박수로 격려해주십시오.
네 사람이 일어서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인사한다. 이들은 전부 한복을 입었으며, 남녀불문 머리를 바싹 깎았다. 한복의 재질은 흔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르킥 의복의 그것과 비슷하다. 의식 집전자 중 한 사람의 소매에 핏줄이 꿈틀대는 것이 보인다.
진인 명현의 할코스트들이 의식 집전자들에게 진충주 를 담은 잔을 건넨다. 그들은 이를 한 번에 들이키고는, 이내 다시 꿇어앉는다.
진인 명현: 그대들은 세을가의 도리와, 육(肉)의 이치와, 깨달음에 대한 의지를 끊임없이 갈고 닦을 수 있겠는가?
의식 집전자들: 내가 그리할 것을 진인께서 아십니다.
진인 명현: 육(肉)의 농군들이여! 그대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짊어질 수 있는가? 인간의 깊은 내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마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그리하여 육의 고(苦)Duḥkha, 행(行)Samskara, 명(明)Vidya, 퇴(退)Nivartanīya가 다르지 않느니, 고로 말미암아 행이 촉발되고, 행으로 말미암아 명이 나타나며, 명으로 말미암아 퇴가 등장한다. 다시 퇴로 말미암아 고가 탄생한다. 우치자(愚癡者)는 이를 두고 연속되었다 칭하나, 목우자(牧牛者)는 이를 두고 한 가지라 말한다. 그대들은 이를 받들고 지킬 수 있겠는가?
의식 집전자들: 내가 그리할 것을 노아대을 존자께서 아십니다.
진인 명현: 어린 행자들이여! 집착은 다시금 타락과 저주의 길이니, 제바국이 이로써 망했고, 대제국이 이로써 망했노라. 그대들은 그대의 육(肉)이 가리키는 지나침의 죄악을 직시할 수 있는가? 인세의 무한한 가능성 옆에 둥지를 튼 작은 마라의 속삭임을 떨쳐낼 수 있는가?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나니 모든 존재가 정토로 갈 수 있음을 잊지 말라. 그대들은 이를 받들고 지킬 수 있겠는가?
의식 집전자들: 내가 그리할 것을 내도지 존자께서 아십니다.
진인 명현: 사랑하는 제자들이여! 눈먼 믿음은 모두를 번뇌로 끌고 가는 목줄임을 마땅히 알라! 금석(金石) 같은 율법과 굳건해 보이는 울타리의 참모습을 바로 보라. 먼저 된 자의 욕심과 죄악을 율법으로 칭하는 무리를 경계하라. 우리의 육(肉)이 옛 것의 염오(染汚)Saṃkleśa를 비워낼 것이니, 단정의 늪은 그 속이 깊을지라! 그대들은 이를 받들고 지킬 수 있겠는가?
의식 집전자들: 내가 그리할 것을 오을지 존자께서 아십니다.
진인 명현: 나아갈 벗들이여! 뭇 중생들을 타락케 하고 번뇌에 빠뜨리는 저 마라들을 바라보라. 천인교사께서 중생을 교화시킬 제에도 그것들은 여러 모습으로 화(化)하였더니라. 그대들은 우리 가운데 숨어 있는 삿된 것들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네 주위의 사람들을 완연한 기쁨의 세상으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고통은 마라의 먹이니, 환난과 위험 속에서 마라를 응시할 제에 마라가 그대가 되지 않도록 하라. 그대들은 이를 받들고 지킬 수 있겠는가?
의식 집전자들: 내가 그리할 것을 사을은 존자께서 아십니다.
이때 의식 집전자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경하는 마을 사람들 가운데서 “잊지 않겠다!”와 “기억하겠다!”가 반복되어 외쳐지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나는 주변인들에게 이 모든 소란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식에 참여한 이들은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진인 명현: 그대들이 받아들인 모든 다짐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수행하겠는가? 진리를 찾고 중생과 함께 정토에 나아갈 수 있도록 수도하겠는가?
의식 집전자들: 내가 그리할 것을 천인교사께서 아십니다!
대덕들이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서 진충주를 담은 항아리들을 들고 다시 나온다. 항아리는 사람 수에 맞추어 네 개이다. 한 사람씩 앞으로 나아가 각자의 항아리를 들고, 마신다. 이 순서는 사전에 미리 협의된 듯하다. 의식 집전자들은 이를 통해 아쿨로트를 체내에 주입하게 된다. 이렇게 투입된 아쿨로트는 체내에 들어가는 즉시 활성화된다.
진인 명현: [큰 소리로] 세존을 축원하라! 처용가를 염하라!
의식 집전자들은 대웅전 좌측으로 사라지고, 미리 준비된 전통악기들로 처용가가 연주된다. 악기에는 장구, 거문고, 북, 꽹과리, 징, 대금 등이 사용된다. 대다수의 악기는 비변칙적으로 보이나 장구와 거문고는 그 형태로 미루어보아 육공예의 산물으로 추정된다. 그 악기들은 세을가 내에서 “오랜 유산”이라고 여겨진다. 본래는 비변칙적인 악기들 역시 육공예로 만들어 낸 것이나, 대금은 이자메아가 강탈했고 다른 악기들은 한국전쟁 때 모두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부르는 처용가는 동명의 고려 가요를 원안으로 두고 있다. 고려 가요 처용가는 앞서 서술한 처용 설화를 기반으로 형성된 노래로, 주술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세을가에서 처용가는 의례 때 자주 불러지는 제악 중 하나라고 한다.
노래가 거의 다 끝나가자 어느덧 의식 집전자 네 사람이 다시 등장한다. 카메라가 그들에게로 클로즈업한다. 이들은 아까 입었던 옷 위에 단의(緞衣)를 오방에 맞추어 입고 오른손에는 거대한 탈을 들고 있다. 처용탈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옷은 세을가의 리하쿠트악lihakut'ak으로 만들어낸 것이 분명했다. 처용의 탈 역시 그러한 듯했다. 마을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 탈은 착용자의 얼굴에 정확히 맞추어지는 경향성이 있다고 한다. 또한 탈 자체의 의식과 착용자가 연결되는 경우도 빈번하게 일어난다고도 했다. 이러한 이유 탓에 탈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이들은 마당 정중앙에 선다. 대덕 시명이 같은 옷으로 환복해서 무리에 합류한다. 머릿수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의식 집전자들이 일제히 탈을 쓴다. 이내 의식 집전자들은 처용무를 추기 시작한다. 처용무는 처용가와 함께 전승된 춤으로, 조선에서는 궁중 무용의 한 갈래로 전해내려왔다. 기록에 남아 있는 처용무와 비교할 때, 세을가의 처용무는 더욱 격렬하고 역동적인 춤사위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 이는 그들의 혈술 사용에 기반한다. 영상에는 의식 집전자들의 다양한 육공예 시연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 중 대다수는 타 사르킥 종파에서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춤이 끝나자 마을 주민 모두가 큰 소리로 축하의 말을 전한다. 의식 집전자들은 주민들에게 큰절을 올린다.
본래 수계법회의 끝은 이와 같지 않았다. 의식 집전자들은 처용무 시연 후 휴식을 취하고, 자정이 되었을 때 마을 밖으로 나가 배정된 각자의 구역에서 역병신을 사냥해야 했다. 그렇게 사냥한 역병신은 세을가에서 자체적으로 고안한 원시적 영혼 덫을 사용하여 마을로 끌고 왔고, 봉인하거나 아예 소멸케 하였다고 한다. 수계법회 행사의 마지막 절차가 생략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즈음이었다. 이미 1960년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천연두가 발생하지 않았고, 여러 전염병도 의료가 발달하면서 점차 줄어가는 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역병신들 역시 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이들을 나서서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근래에도 이따금 역병신 사냥을 즐기는 경우가 있지만, 빈번하지는 않다고 한다.
수계법회를 포함한 세을가 의식에 쓰이는 물품들을 보관하는 전각인 이물당에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곳에서 마지막 절차 때 사용하던 무기를 관찰할 수 있었다. 사르킥 방식으로 생성하고 제련한 무기들은 단순한 환도뿐만 아니라 활, 편곤, 철퇴 등 그 종류가 다양했다. 수계법회의 절차에서 폐지된 지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비공식적으로 역병신 사냥은 시행되고 있다는 말을 뒷받침하듯, 이러한 물품들은 보관 상태가 매우 좋았다. 관리한 지 일주일이 채 넘지 않은 듯했다.
한편 세을가 마을에 머무르면서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설화를 수집할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어미 용과 일곱 아들」 설화다. 소을촌의 어린아이들이 주로 듣는 이 설화는 동화 형식으로 구전되고 있으며 세을가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설화로 보인다. 이들이 소장한 버전의 발크차론에서 이 설화가 처음으로 기록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현대 세을가인들이 알고 있는 설화와 비교했을 때 변이된 정도가 극히 적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아주 먼 옛날, 까마득한 하늘 위에 용 한 마리가 살았다. 용은 아주 오래 살았고, 거대했으며, 사악했다. 용은 지상 세계를 내려다보며 온종일 인간들을 어떻게 골려주고 잡아먹을지를 고민했다.
용에게는 일곱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맏이부터 여섯째까지는 그 어미를 닮아 아주 세고 강했다. 게다가 신묘한 재주를 부릴 수도 있었다. 성질은 더욱 제 어미를 꼭 빼닮아서, 이들 역시 인간들을 미워하고 잡아먹으려고 들었다.
일곱째는 유달리 약한 자식이었다. 물론 그 성질은 어미를 닮아서 역시 사악하고 인간들을 미워했지만, 제 형들과는 달리 지상에 내려가 그들에게 해코지를 할 수도 없었고, 무슨 모략을 꾸며내어 인간들 사이에 나쁜 마음을 심을 수도 없었다. 때문에 일곱째는 그저 하늘 위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일곱째는 아주 오랫동안 하늘 위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랑하고, 늙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고통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도 보았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과, 서로 혐오하는 적들의 모습도 보았다. 삶과 늙음과 병과 죽음의 굴레도 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그곳에서 사람들을 지켜보아서 세간에 나서지 못하자 용의 자식은 모두 여섯이라는 인식이 뿌리 박힐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사를 지켜보던 일곱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한 줄기 선한 생각이 깃든 것이었다. 인간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살고 싶다, 그 생명력과 같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아주 교묘하고 은밀히 깃들어, 일곱째 자신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느낌을 전혀 깨닫지 못할 정도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미 용이 갑자기 일곱째를 불렀다. 어미 용은 말했다. “네가 유약하여 내 곁에서 지낸 지 수백 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제는 너도 장성하여 스스로 인간 세상에서 악행을 일삼을 때가 되었구나. 자, 내 힘을 네게 주마. 지상으로 내려가거라.”
이는 일곱째 역시 바라던 바라, 일곱째는 아주 감사히 이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일곱째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저어진 것이다. 어미 용은 격분하여 소리쳤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 내 힘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지상으로 내려가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일곱째가 입을 열었다. 이때 일곱째의 정신은 어느새 몸집을 불린 선한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아니요, 어머니. 저는 지상으로 내려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악한 일은 저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인간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일곱째는 자신이 본 것들을 말했다.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온갖 신묘한 것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희노애락애오욕의 감정들.
일곱째는 말하면서 더욱 강해지고, 활력이 넘치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지상 세계를 치어다보며 인간들을 골려주는 형제들을 부러워할 때의 그가 더이상 아님을 깨달았다. 일곱째는 진정으로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어미 용의 분노를 억누르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어미 용은 일곱째에게 주려던 바로 그 힘으로 일곱째를 밀쳐버렸고, 그는 하염없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침내 일곱째가 지상에 추락하자, 그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말았다.
용과 일곱 아들이 어떤 것의 메타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것이 처용랑망해사에 수록된 같은 존재들이라는 추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마을 주민들과 진인, 대덕들에게 질문했으나 대부분 모호하게 말하거나 대답을 피해버렸다.
결국 뚜렷한 답을 얻지 못하고 진인도래일 사흘 뒤에 약속한 기한에 맞추어 소을촌을 나가게 되었다. 아래의 면담은 그 중요성을 고려하여 보고서에 기입한다.
녹음 기록 녹취록
녹음일자: 2017/06/08 @ 10:02
면담자: 이묘영 박사
피면담자: 법우 박융
머리말: 마을을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법론적인 부분에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심정적인 부분에서였다. 며칠 동안 소을촌에 정도 많이 들었거니와 아직 처용의 정체를 제대로 밝혀낸 바가 없다는 미련이 컸다. 소을촌 주민들은 외지인인 내가 떠남에도 마을 사람이 떠나는 것처럼 서운해하고 아쉬워했다.
묵었던 집에 작별 인사를 하고 몽은사에 돌아감을 고했다. 마을 사람들 중 타향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의 차를 얻어타기로 했다. 그때 내가 처음으로 만난 세을가인, 박융을 만났다.
[기록 시작]
법우 박융: 아이고, 이제 가십니까?
이묘영 박사: 예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짧은 사이] 저, 진인도래일 행사 때 통 못 뵌 것 같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았는지……
법우 박: 아뇨, 정말로 가질 않았으니 말요. 원체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
이 박사: 아……
법우 박: 인제 선생님 가시는데, 이거 어째 쓰시는 보고서에 도움이 되었을까 모르겠습니다. [웃음] 이것도 인연인데 아직도 구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어디 제게 구해보십시오.
이 박사: 아뇨, 괜찮습니다. 궁금한 건 다 알았는걸요. [긴 사이] 아, 그럼 하나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용과 일곱 아들이 도대체 무얼 이야기하는 건지 알고 계십니까?
법우 박: 처용 설화서요?
이 박사: 처용 설화에서도 나오지만 소을촌 전래동화서도 나오지 않습니까. 구조 자체가 너무 유사한데…… 다들 이에 대해선 함구하던 눈치더군요. 그렇지만 다들 그 진상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법우 박: 내가 그걸 알고 있으리라고 여기시는구먼요.
이 박사: 법우님뿐 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제게 유일하게 남은 밧줄이 법우님 밖에는 없습니다.
법우 박: [크게 웃음] 그게 질 좋은 밧줄이어야 할 텐데요.
이 박사: 이보다 더 좋은 밧줄이 어딨으려고요.
법우 박: 아이고, 알겠어, 알겠어. 비행기 태우지 마십쇼. [잠시 사이] 에…… 용과 일곱 아들이요? 뭘 말씀드릴까, 정체?
이 박사: 처용과 이 상징들이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네, 그리고 정체도요. 도대체 무얼 암시하는 존재들인지..
법우 박: 암시라고 하면 조금 애매하지. 그건 그대로 이해해야 하는 거요. 용과 일곱 아들.
이 박사: 그럼 처용이 정말 용의 아들이라는 말씀이세요?
법우 박: 하하, 이를 어찌 말해야 할까…… [긴 사이] 하의 핏줄을 타고난 자들은 어미 용을 여와라고 부른다지.
이 박사: 네……? 그게 무슨—
법우 박: 그러니까 그 용이 파순이다, 이런 말입죠. 아들놈들은 마라를 지칭한 것이고.
이 박사: 그렇다면 처용이 아르콘, 그러니까 마라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만 동화에서는 분명 일곱째 마라가 용에 의해서 낙사했다고……
법우 박: 낙사, 낙사라! [크게 웃음] 그런 생각이 들게 하기는 하외다. 허나 그런 결말이 어찌 마라에게 주어지겠는가. 불멸이라는 굴레에 매인 몸들이 아니오?
이 박사: 말투가……
법우 박: 아, 미안합니다. 선생님 말하시는 것이 퍽 재미납니다. [사이] 그 일곱째 마라는 죽지 않았습죠. 그 동화는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올시다. 설화마냥 뭉뚱그려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죠. 그건 선생 몸 속에서 혈액이 순환하는 것만큼이나 그대로 사실이라오.
이 박사: 무슨 말씀이신지—
법우 박: 동화의 뒷부분은 잘려나갔소. 일곱째 자식은 지상에 추락해서 산산조각이 났지. 허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소. 놈의 조각들은 저 스스로를 빚어내 새로운 형상을 취하게 된 거요. 녀석에 깃든 선한 마음은 그중 가장 큰 조각을 차지했지.
이 박사: 잠시만요, 그렇다면…… 처용이 정말 아르콘이…… 아니 마라가…… 맞다는 말씀입니까?
법우 박: [작게 웃음] 이거 보시오, 선생. 내가 그대로 이해하라고 하지 않았소.
이 박사: 하, 하지만— 지금껏 아르콘이 일곱이라는 이야기는 전혀 듣질 못했습니다.
법우 박: 동화에서 나오질 않았소. 일곱째는 그 전부터 잊힌 존재였지. 마치 암덩어리가 전이되기 전까지는 그 낌새도 내비치지 않는 것처럼…… [잠시 사이] 아주 통쾌한 양성 반응이 아니오? 제 어미에게 반역하는 아들의 모습이라니. 파순이 얼마나 놀랐겠소?
이 박사: 지금까지 다른 낼캐 종단에서 기록된 문건을 살펴봤을 때에도 그런 이야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법우님 말씀대로 아르콘이 이 땅에 내려와 자신들에게 반하는 무리에 가입하다니요. 그건……
법우 박: 학자들은 논증을 좋아하지. 나 역시 그를 싫어하지 않소. 먼저 된 자의 욕심과 죄악을 율법으로 칭하는 무리를 경계하라…… 그대들의 방식과 우리의 방식은 다르지 않소. 그래, 마라의 행위에 대한 이유가 궁금하시구료.
이 박사: 그렇습니다.
법우 박: 이 역시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해주고 싶으나, 그리하면 강요하는 우스운 꼴이 되니 내 성의껏 답해 드리리다.
[잠시 사이] 아까 말했던 것 기억이 나오? 지상에 낙하해 으스러진 마라의 육체. 산산조각이 났는데 이전과 힘이 같겠소? 게다가 일곱째는 약한 마라— 그대들 말로 하자면 약한 아르콘이었소. 우리는 의식 저편을 되짚어가면서 그 잔혹할 정도로 나약해진 육체 안에서 몸부림쳤을 선한 생각의 존재를 깨달아야 하오.
천운이라고 할 수 있을 거요. 그렇게 사나운 시대, 나약한 몸으로 세상에 날 제에 운 좋게 세존을 만난 것은. 세존은 저 먼 제바국에서 진리를 강론하고 있었지. 이온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진정으로 인간들을 구원하고 제 사악한 형제와 어미를 물리칠 방도라고 여긴 그는 천인교사를 따르게 된 게요.
우리의 핏줄에는 반역의 힘이 흐르고 있소. 나는 그걸 저항이라고 부른다오. 모든 악업과 번뇌에 저항하는 힘을 우리는 가지고 있소. 그건 선생도, 진인도, 저 마을의 어린아이도 가지고 있다오. 그리고 우리는 가르칠 수 있는 능력도 갖췄지. 우리가 깨달은 바를 남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않소. 말로만 그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모습으로도 보여줄 수 있으니.
일곱째 아들은, 처용의 본체는 그러한 요소에 영향을 받은 거요. 나기를 마라로 났으나 감화되었고, 스스로를 새로이 빚어냈지. 옛것의 염오를 비워낼 새로운 육으로. 이제 아시겠소?
이 박사: 그렇다면 일곱째 마라의 다른 조각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들 역시 변화했습니까?
법우 박: [고개를 끄덕인다] 허나 그들에게는 처용처럼 선한 정신이 깃들 수 없었소. 악했을 때의 심성이 그대로 남아 있어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지. 역병신이 무엇이겠소? 게 역시 마라의 흩뿌려진 조각일 것이오. 허나 이들은 아주 작은 알갱이일 뿐이지. 큰 것들은 이보다 훨씬 더 강하고 사악하오.
이 박사: 그것들의 소재를 알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법우 박: 아무도.
이 박사: 실례되는 질문일 줄 압니다만, 그렇다면 대진인께서는 그러한 악한 심성이 남아 있지 않은 건가요?
법우 박: [작게 웃음] 실례가 아니니 괘념하지 마시오. [잠시 사이]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마라, 그대들 말로 아르콘이라는 것들의 특성이오. 그 마라는 분명 산산조각 났소. 헌데 그 마라 자체 역시 산산조각 났을 듯하시오? 어떻게 생각합니까 선생.
이 박사: 마라 자체요?
법우 박: 일곱째 마라 그 자체. 일곱째 아들, 일곱째 아르콘의 정신, 의식, — 그런 게 있다면 — 영혼. 그런 것들은 어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시오?
이 박사: 분열하면서 역시 갈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법우 박: 헛짚으셨군. 그렇지 않았소. 일곱째 마라 그 자체가 바로 처용이라는 이해는 그르오. 차라리 더 어울릴 말이 무엇이 있을까…… 화신(化神)Avatāra? 화신이라면 이해하시겠소?
이 박사: 조금 더 설명해주세요.
법우 박: 일곱째 마라의 존재는 갈라지지 않았소. 그것은 갈라진 조각들 모두의 심층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오. 그러면서 자신을 다시 긁어모으고 싶어하지. 파순에게 공격당한 자들의 공통적인 말로요. 파순의 진정한 본질은 갈라지고 부서지는 형질이니, 그로 말미암아 맞서는 자들은 그 형체가 부서지고 말지.
배반자인 일곱째 마라 역시 그러한 말로를 맞은 게요. 그리고 그자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소. 끊임없이 자기 몸을 돌려달라고 외쳐대며. 끊임없이,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며 주도권을 빼앗으려고 하지. 조각들이 한자리에 모일 제에는 더 그러하다오. 모이자고…… 합쳐서 옛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그런 충동이…… 마치 심장이 뛰어 피가 전신을 돌 듯 순식간에 들고 만다오.
아무리 선한 마음을 품었던들 마라는 마라요. 생물에게 내재된 신들의 본성이 그러하듯이. 깨달음을 얻었지만돈오(頓悟) 지속적으로 수행점수(漸修)]해야 한다는 지눌(知訥)Ji-nul의 말은 참으로 옳은 거요. 허나 선한 마음이 깃들지 않은 화신들에게는 악, 고통, 그리고 공허만이 존재하고 있소. 긁어내지 못한 제 본질을 그대로 담아낸 채.
하물며 처용 본인은 어떻겠소? 내가 아까 마라는 마라라고 했지. 그에게도 분명 본체의 여파는 존재하오. 아니, 다른 것들보다 더 심하오. 본성에 저항하는 선한 의식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리하여 대진인의 산철이 존재하는 것이외다. 자신의 분신들에 맞서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비롯된 자의 존재를 떨쳐버리기 위해.
이 박사: 그렇다면 지금 그의 부재도, 그런 이유 탓이라는 말씀입니까?
법우 박: 지난날에는 분신들을 처리하려 떠난 길이었으나 지금은 마라의 도래를 직감하고 떠난 것이오. 제 형제들이 나타나니 심장이 벌뜩벌뜩 뛰기 시작한 것이랄까. [웃음] 저도 딴엔 마라라는 것인지.
이 박사: 마, 마라가 도래……요?
법우 박: 두려워하지 마시오, 박사. 두려움은 그 자체만을 두려워해야 하는 법이오. 그리고 마라는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짐생이지. 그러니 개의치 않아도 좋소.
혹자는 행여 처용이 자신의 악한 부분에 감화되지는 않을까 걱정할 것이오. 옛 부속지를 회복하고 다시 하늘로 떠올라 검은 우주에 난 욕창 같은 여섯 개의 별 옆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까 봐. 그대의 상관들은 물론이요, 놋쇠 인간들과 몰이해성의 수호자들이 그러하겠지. 그러나 내 약속하리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그도 분투하고 있으니까.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좌망하고 있으니까…… 오로지 벗어나기 위해서.
이 박사: 법우님께서는……
법우 박: ……예전에 한 사람이 옛 소을촌에 온 적이 있었습죠. 선생님같이 앎을 구하여 온 자는 아니었으나…… 그러나 소을촌을 찾는 선생을 보자니 문득 그때 생각이 나더이다. 하여 오랜만에 이렇게 마중물 짓을 하여보았습니다. 나 때문에 늘 고생입니다, 이 사람들이…… 필요할 때 있어주지도 못하고. [사이]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분노하고 좌절하였지요. 이물당에서 물건들을 보았겠지요, 선생. 그곳에서 무얼 보았소?
이 박사: 거, 검하고…… 또 무기들하고, 의복…… 수계법회에 쓰이는 물품들이요.
법우 박: 근래에 쓰인 것 같지 않았소?
이 박사:분명 가끔 역병신을 사냥하기에 그렇다고—
법우 박: 그들은 선생께 바르게 말하지 않았소. [짧은 사이] 증오는 힘이 있소. 어떤 증오는 대를 이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오. 그 모든 참혹한 광경,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치욕스러운 경험이니까… 설사 그 마음이 혈전처럼 깊게 내려앉아 고통을 유발하더라도…… [긴 사이] 그 칼날, 그 둔기, 그 모든 병기는 역병신뿐만 아니라 소을촌을 침탈한 자들의 살에 가 닿고 있소. 벌써 많은 자들이 그 죗값을 치뤄내고 있지……
이 박사: 이자메아 소속이었던 사람들을 죽인다고요? 당신들은 분명 지나침의 죄악을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이건 너무 지나친 증오— 복수심이 아닙니까?
법우 박: 선생, 일살다생(一殺多生)이란 말을 아시오?
이 박사: 그건…… 일본의 옛 우익 단체인 혈맹단에서 사용한 구호 아닙니까?
법우 박: 본래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Yogācārabhūmiśāstra에 나온 말이었소. [짧은 사이] 하나를 죽여 그자가 해할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동시에 그자가 죄업을 쌓을 것을 막아주는 대자대비한 행위를 일컫는 말이외다.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오나…… 그들은 이자메아 사냥을 통해 그러한 일을 수행하는 것이오.
이 박사: 법우님, 그건…… 보복성 범죄일 뿐입니다.
법우 박: 아주 지독한 보복이지. 그러나 우린 그들의 순환을 끊어주지 않소. 다시 돌려보내지. 다시 가서…… 전생의 업보를 참회하리라 믿소. 그것이 우리의 야카Jaka요. [실소] 하, 그러한 일도 처용이 소을촌에 있어주었다면 어디 일어날 일이었겠소? 그가 자신의 제자들 옆에 있었다면 어디 그런 일이 일어났겠소. 어디 이 사람들 가슴에 그런 큰 멍이 있었겠소.
이 박사: 실례지만, 법우님—
법우 박: 자책은 끝이 없고 그건 사람을 미치게 한다오. 나나…… 정랑이나. 우리 둘은 너무도 비슷합니다. 닮지 말아야 할 것까지 닮고. [긴 사이] 그럼 난 이만 가보아야겠습니다. 질문은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해보십시요. 내게는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을 터이니. 그리고……
이 박사: 자, 잠시만요.
법우 박: 환난과 위험 속에서 마라를 응시할 제에 마라가 그대가 되지 않도록 하시오, 부디.
꼬리말: 이후 법우 박융은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렸고, 나는 마을 입구에서 약속한 가족과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여느 주민들과 같이 진인의 정체나 마라의 도래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답변했다. 숨기는 부분도 있는 듯했지만 대체로 정말 알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은 그러한 답변들이 아니었다. 목적지에 다 왔을 때에 의문이 들어 물어본 것이 있었다. 박융이란 사람에 대해 잘 아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들은 되물었다. 박융이 누구냐고.
소을촌에 박융이라는 사람은 없었다.
면담이 끝난 뒤 서울의 제21K기지로 돌아와서 갖가지 문건을 수집했다. 이 중 조선의 초상기관 이금위에서 간행한 이금록에서 유의미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이금위 소속은 아니었으나 그 증손자가 해당 기관에서 임직을 수행했던 벽오 이시발(1569년-1626년†)이 남긴 문집, 『벽오유고』에는 지리산의 소을촌에 방문했던 이야기가 남겨져 있었다. 이시발은 그곳에 기거하던 친우를 만나러 그곳으로 향했고, 소을촌 주민의 안내를 받았다고 서술되었다.
그리고 그 주민의 이름은 박융이었다.
하단에 이금위에서 소을촌에 대해 서술한 서식을 첨부한다. 내용에 따르면 이들은 자체적으로 그곳에 침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것으로 추정된다.
패란(悖亂) 계미(癸未) 제(第) 이호(二號)
상(詳) 두류산 심곡(深谷)에 존재하는 이물(異物)들의 마을
당(當) 이금위(異禁衛) 감찰관(監察官) 비사대부(批士大夫) 노바(怒貌)
결(結) 패란사가 마을에 돌입하려 하였으나 실패
현(現) 비록(秘錄)에 기록 후 종결(終結)
선비가 말한다.
두류산이라고도 하는 지리산 심경(深境)에는 소을촌(瘙乙村)이라고 하는 고을이 하나 있다. 이 고을은 본디 선인(仙人)들의 마을, 청학동(靑鶴洞)으로 알려진 바가 있으나 실상은 살[肉]과 뼈[骨]를 다루며 빚어내는 이들이 모여 사는 부락(部落)이다. 마을의 거류민(居留民)들의 외양은 매우 기이하여, 일찍이 충익공(忠翼公) 이시발의 글에 따르면 혈맥(血脈)과 살가죽, 신체 부속기(附屬器)가 범인(凡人)의 것과 개수나 모양이 다르다 하였다. 마을에는 촌장과 비슷하거나 상위의 위치에 존재하는 직계(職階)가 있는데, 이를 세을진인(世乙眞人)이라 한다. 불가(佛加)에 관련이 있다는 점 이외엔 이 직계의 정확한 정체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마을로 들어가는 법은 알려지지 않았다.
—[붙임] 패란사를 대동하여 이른 새벽부터 두류산을 등정하였다. 그렇게 꼬박 이틀을 돌아다녔으나 마을은커녕 민가 한 채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어느덧 패란사는 거진 피병장졸(疲病將卒)이 되고, 더는 주변 마을에 병식(兵食)을 의지할 수 없어 그만 중단하고 말았다.
소을촌을 떠나고 몇 달 후, SCP-████를 확보하기 위한 과정에서 ██산 중턱에 위치한 이전까지 보고되지 않았던 석굴의 존재가 보고되었다. 해당 석굴 내부에 진입하려는 시도는 SK-BIO 생명체로 추정되는 유기체들의 공격으로 실패하였고, 곧장 상부에 보고되었다. 해당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나는 제21K기지 연구원들과 함께 해당 장소에 답사할 계획을 세웠다.
자신을 박융으로 지칭했던 존재와의 면담에서 얻은 정보를 복기하자면, 필경 어딘가에 처용이 자신의 본성을 몰아내기 위해 기거하는 장소가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나는 그 장소가 분명 그러한 곳이라는 확신이 선다. 제01K기지의 허가를 받아 기동특무부대 을호-04("목구멍이 포도대장")과 함께 문제의 석굴로 향하기로 했다.
[데이터 말소]
[데이터 말소]
[데이터 말소]
사태 직후 탐사대원 중 기동특무부대 을호-04는 전원 사망, 연구원 두 명은 의식 불명 상태로 발견되었다. 나는 정신 착란을 일으킨 상태로 구출되었다. 해당 석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슨 존재를 만났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는 기억난다. 그곳에 처용은 없었다. 그는 이미 그곳을 떠난 것이다.
어쩌면 박융을 만난 것이 그에 대한 경고였을지 모른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든 자신의 거처를 찾아낼 것을 예견했을 것이다. 내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 지속해서 횡설수설하며 “나는 모든 곳에 있다”는 문장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분열과 갈라짐. 나는 어쩌면 얄다바오트에게 공격당한 일곱째 아르콘의 상태를 같이 겪었던 게 아닐까.
문제의 석굴은 이후 자연적으로 함몰되어 소멸했다. 마치 제 역할을 다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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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Author: Migueludeom
English translation: flux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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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Chongk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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