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지는 핏빛 노을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울부짖는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칼날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다가, 앞쪽에서 달려드는 자를 벤다. 그리고는 다시 허공을 가른다.
이번엔 좌측.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아래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칼날이, 다시금 물러섰다가 간극을 베고, 또 베어나간다. 피는 흐르지 않는다. 힘겹게 적들의 목을 가르는 자의 땀방울만이 흘러내릴 뿐.
적들은 너무나 많다.
끄트머리에 초서체로 「痘」가 새겨져 있는 검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여 우측의 적을 쓸어내린다. 그리곤 칼자루로 뒤의 적의 얼굴을 찍어버리고, 검을 크게 휘둘러 목을 가른다.
목을 흩어낼 때마다 진동하는 생의 마지막 고동. 그 진동은 이따금 칼을 타고 올라가 손목을 뒤흔든다.
그러나 지금은 이에 어떠한 애도도 추모도 불가능하다. 죽음과 죽음 사이에서 칼날은 번뜩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칼 쥔 자가 살 수 있다. 그것이 칼 쥔 자의 생의 방식이다. 살(殺)과 생(生)이 다르지 않음을 그는 안다.
지금은 더더욱.
이빨을 드러내며 더운 피가 꿈틀대는 살을 향해 덤벼드는 입을, 몸을 돌려 피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속도를 못 이겨 엎어지는 그것의 목을 베어낸다.
칼날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허공을 겨눈다. 검은 공(空)을 겨누면서 동시에 공을 겨누지 않는다.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을 되뇌면서, 그는 칼등으로 적을 밀쳐내면서 날아드는 적의 목을 찌르고 물러선다.
검신 끄트머리에서 일렁이는 잔상이 환영처럼 시야를 어지럽힌다.
끝은 보이지 않는다.
니카호 아리노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정비했다. 벌써 열 명 남짓의 목을 베었음에도 공격자들은 너무나 많다. 어디서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이 자들의 무수한 적의를 마주할 때마다 어떤 병원체가 순진한 촌민을 이다지도 변이케 하였는지,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은 오로지,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인다면 죽으리란 사실이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모든 것을 끝마쳐야 한다.
아리노부는 가까이 덤벼드는 촌민의 이마를 팔꿈치로 쳐내고는 뒤로 물러섰다. 놈들은 느렸지만 수가 많았고,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산 중턱 같은 곳에서는 더더욱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방에서 조여들어 오는 포위망을 바라보며 불안하게 침을 삼켰다. 싸움을 지속할수록, 통제력과 같은 감각이 몸속 깊은 곳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가워진 손발을 애써 추스르며, 아리노부는 검을 꼬나들었다. 이제 시야에 들어오는 적들은 다섯 명. 나이와 성별은 전부 제각각이었다. 공통점은 한 가지였다. 살과 피에 대한 열망.
그의 시야에 피로 얼룩진 기모노를 질질 끌고 오는 여인이 들어왔다. 왼팔이 거의 떨어져 나가 흰 뼈가 보였다. 아마 그곳에 수십 명이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옷 사이사이로 보이는 수많은 잇자국을 아리노부는 확인할 수 있었다.
고통과 죽음의 흔적이었다. 평범한 자라면 과다출혈로 죽고 말았을 상처. 허나 여인은 계속하여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죽은 채로.
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리노부는 이를 악물고 좌우의 적의 정강이를 벤 후, 넘어지는 그들의 뒷목에 칼을 꽂아넣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몸을 날려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신음 소리가 귀로 파고들었다. 텅빈 눈구멍이 그의 얼굴을 찌르는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 소리, 그 음성에 섞인 것은 고통도 비탄도 아니었다. 강렬한 갈망, 피를 향한. 그의 목숨을 향한. 그의 살덩이를 향한 갈증.
젊은 검객은 여인의 머리를 잡고 한 번의 칼질로 몸통과 분리시켰다.
난도질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나고 말았다. 아리노부는 목과 몸이 분리된 시신들을 한데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간 적들은 더 이상의 움직임 없이 그저 땅바닥에서 흙먼지를 묻힐 뿐이었다.
대충 구덩이를 파고 시신들을 던져둔 그는 다시 흙을 덮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끝났다는 것이 후련하기도 하고, 어딘가 찝찝하기도 한 감각이 일었다.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형제자매들에게 도움 하나 요청하지 아니하고 금방 달려온 이곳이다.
그가 독자적으로 일을 수행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형님, 누님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일을 해결할 정도로 성숙해진 자신을 입증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일은 놀랄 만큼 잘 끝났다. 아리노부 자신도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아리노부는 산을 둘러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덧 일몰이 다 되어가는 노을의 핏빛 자락은 산을 타넘고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뒷목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면서 턱에 힘이 들어갔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느낌.
산등성이가 바람에 일렁였다.
그는 한참이나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뒷머리가 쉬이 형용할 수 없는 긴장에 젖어들고 있었다.
왜 지금, 갑자기 이런 감각이 이는 걸까. 아리노부는 칼자루의 끝에 손을 올렸다. 본능적인 기시감이 목덜미를 타고 올랐다. 홍적세에서부터 인간 의식에 끊임없이 기생해 온 인간 본연의 방어 기제. 그 경보음이 그의 뇌 내에서 쉴 새 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 근원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으므로, 목적 없는 경보는 더욱 거세게 비명을 질러댔다.
놓친 게 뭘까. 그의 시선이 흙무덤으로 향했다가, 다시 깊은 수풀 저 아득한 곳으로 떠나갔다.
언뜻 보면 산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젊은이는 어떤 비틀린 것들이 저편에서 기어 다니고 있을 것을 본능으로 알았다. 아니, 그것은 본능이라기보다 그 자신의 적의라고 일컫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는 그의 적의로 그 미지의 것들의 적의를 감지할 수 있었다. 숨길 수 없는 적의와 악의가 수풀 저편에서 바람과 야생동물과 흙먼지와 개울의 형태로 수풀 바깥의 존재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아리노부는 먼 산으로 시선을 던지며 자신의 허리에 맨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 하나마저 생생히 느껴졌다. 감각의 모든 칼날이 심장 저편에서부터 일어서고 있는 지금.
산은 고요했다.
아리노부는 손을 쥐락펴락하며 숨을 들이켰다.
오판이었나.
그는 조용히 나뭇가지를 주워 흙무덤 위에 꽂아놓고는 돌아서서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흙이 밀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걸음이 멈췄다.
이윽고 아리노부는 자신의 검을 검집에서 뽑아냈다.
이제야 여태 바람에 밀려오던 것이 무슨 냄새인지 분간할 수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신음 소리.
아리노부는 도약하며 뒤로 돌아, 검을 내리쳤다.
끊어진 신음 소리와 함께 감염자의 머리가 날아갔다.
그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한 손을 바닥에 디디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왜 미처 알지 못한 걸까. 그는 이를 악물고 시야를 들어 올렸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건지—
아리노부는 숨을 멈췄다. 그의 동공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산등성이는 바람 때문에 흔들리던 것이 아니었다. 수십 명의 감염자가 그의 후방으로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아차."
아리노부는 입술을 깨물고 가장 가까이 덤벼드는 놈의 턱을 후려쳤다. 그리고는 손목에 힘을 주어 그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다른 감염자가 덤벼들자 아리노부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것의 가슴팍에 칼을 쑤셔 넣고 말았다.
감염자는 칼이 자신의 심장을 꿰뚫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계속 아리노부에게로 나아가고 있었다. 말라붙은 시신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젊은 검객을 향해 포효했다.
아리노부는 황급히 칼을 빼내려고 팔에 힘을 주고 당겼다. 그러나 어딘가에 걸린 듯 칼은 빠지지 않았다. 외려 감염자만 가까이 끌어당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빌어먹을!"
그는 겁이 가득 담긴 숨을 내뱉고 뒤로 주춤 물러섰다. 방도가 없었다. 감염자들은 점차로 불어나는 것만 같았다.
도망쳐야 한다.
그는 주춤거리다가 재빨리 등을 돌려 산 아래로 내달렸다. 산바람이 얼굴을 후려치고 지나갔다.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무슨 오기로 홀로 여기까지 온 건지. 아무리 숙련된 술자라 한들 역병 사태를 막으러 올 때엔 절대 홀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왜 잊었던 걸까.
그를 비난하는 듯한 바람 소리가 귀를 스쳤다. 빨리 돌아가야 한다. 빨리 본가에 이 사실을 알려야—
불현듯 발등에 아픔이 서렸다.
그리고 아리노부의 시야엔 어둑해져 가는 하늘이 보였다.
추락.
아리노부는 등판에서 전달되어 오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발목에서 오는 고통은 이를 웃돌았다. 그는 신음을 흘렸다. 도망치다가 바보처럼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낄 새는 없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되는 게 하나 없네."
아리노부는 나무 둥치를 잡고 일어섰다. 다행히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닌 듯했다. 금방은 아닐지라도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윽고 예의 그 신음 소리가 들렸다.
뭘 해보기도 전에 놈은 빠르게 덮쳐왔다. 재빨리 등을 돌려 무방비 상태로 물리는 것만은 막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뒤를 따라오다니. 낭패였다.
아리노부는 간신히 감염자의 목 아래에 팔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칼만 놓치지 않았어도…!
아리노부는 얼굴을 찌푸리며 간신히 놈의 얼굴을 막아냈다.
발악을 하며 그의 살을 물어뜯으려고 하는 놈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군데군데 물어뜯기고 썩어들어간 그 모습. 검푸른 시체의 빛깔을 띤 그 얼굴. 번들거리는 초점 없는 눈동자.
심장이 조여들었다.
"으, 으아아아악!"
감염자와 아리노부의 입에서 동시에 괴성이 흘러나왔다. 안간힘을 쓰고 밀쳐내려 했지만, 감염자는 오뚝이처럼 아리노부를 다시 내리눌렀다. 이미 몸은 지쳐버린 상태다. 팔은 점점 힘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하면 다른 것들마저 달려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버린다면…역병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갈 것이다.
퍽, 하고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감염자의 머리가 터져 우편으로 날아갔다.
아리노부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굳어 있다가, 머리가 사라진 시체를 옆으로 치워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한 남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노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스, 스승님?"
"오랜만이다, 아리노부."
얼핏 보면 아리노부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아 보이는 젊은 사내였다. 그는 붉은 기모노 위에 흰 하오리를 입고 있었고, 어두운 색조의 삿갓을 푹 눌러쓴 상태였다. 그의 손에는 철근으로 만들어진, 약 2촌 정도의 두 개의 곤봉이 들려 있었다.
아리노부는 그 삿갓 아래서 피어난 형형한 눈길과 굳은 입가를 볼 수 있었다.
"제, 제가 여기 있는 건 어찌 아셨습니까?"
사내는 대답 대신 어느새 가까이 기어오고 있는 두 명의 감염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시체들의 입에서 괴성이 발하고 있었다.
사내의 손에서 곤봉이 회전했다.
순식간에 제일 먼저 다가온 감염자의 머리가 터졌다. 뒤이어 두 번째 감염자의 다리가 부러졌고, 앞으로 엎어진 놈의 뒤통수에 곤봉이 박혔다.
모든 게 끝난 것은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일어나라, 아리노부."
사내가 고개를 돌려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젊은이에게 말했다.
"이곳은 적절한 전장이 아니로구나."
어둠이 깔린 들판은 고요했다. 광활한 달빛 아래 시선을 던지면, 방금까지만 해도 사투를 벌였던 산이 그곳에 굳건하게 서 있었다.
아리노부와 사내는 들판 한가운데 서서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수숫대를 흔들었다. 서늘하고 냉담한 바람이었다.
둘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아리노부는 못내 불편한 심정으로 초조하게 목을 긁적이고 있었다. 스승이 무어라 말할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게 결코 친절한 말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간의 모든 일을 돌이켜보면, 지금 그의 옆에 서 있는 이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차라리 혼을 내면 모를까.
사내가 대뜸 입을 열었다.
"조에몬이 네 행방을 알려주었다. 근방의 산촌에서 촌민들이 역병에 걸린 것을 알고 나갔다면서."
"예? 예에… 그렇습니다."
"네가 보기에 이 역병의 특질은 어떠한 것 같으냐?"
"아…"
아리노부는 침을 삼켰다.
"이 병은 상당히 고약한 질병으로, 주로 신체 접촉으로 감염이 전파되는데, 이 병에 걸린 이들은 죽은 것처럼 보이나, 이내 되살아나 다른 이들을 공격함으로써 질병을 옮기려고 합니다. 이들은 상해를 입어도 개의치 않으며, 오로지 물어뜯고 할퀴는 데에만 집중합니다. 가족과 친우를 가리지 않습니다."
"감염 상황은 어떠하더냐?"
"산 깊숙한 곳의 마을들이 초토화되었고, 산 아래의 인근 세 마을에서 감염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비감염자를 가까이의 마을에 옮겨주고 금제를 걸었습니다. 허나… 감염자들을 다 처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뛰지 않더냐?"
"아뇨, 비록 그 위세가 강렬하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없는 듯합니다."
사내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다시 말을 꺼냈다.
"잘했구나."
아리노부의 얼굴이 멍해졌다.
"네? 가, 감사합니다, 스승님."
"네가 죽으리라 생각했다."
"네!?"
사내가 눈길을 던졌다.
"이 역질에 대해 안다. 창궐하는 곳마다 끔찍한 사상자를 내는, 그야말로 학살과도 같은 역질이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산을 노려보았다.
"나는 이 역질을 원 카라코룸에서 처음 보았는데, 숙련된 술자라 할지라도 방심하면 감염자가 되기 마련이었지. 노련한 니카호 가 사람이 이를 처리하러 왔다하여도 나는 그자의 목숨을 걱정했을 것이다. 하물며 너는 어떠하였겠느냐."
아리노부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욱이 이 역질은 근방의 신묘한 힘과 대응할 수 있어, 단순히 시체가 되살아나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음이다."
사내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
"화륜학도들 역시 비슷한 사태를 당해 상당한 해를 입었었지. 결국 그들, 그리고 나의 스승님들과 근방에 거주하던 육의 도를 거니는 자들이 힘을 모아서야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너는 시체에 박하를 멀리하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더냐? 그러한 이야기에는 다 이유가 있느니라."
아리노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여전히 입이 붙어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는 그를 보고 사내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한 번 맞춰볼까. 네가 이리 홀로 온 이유는, 네 동기들에게 짓눌리고 싶지 않음이 아니더냐?"
들켰다. 아리노부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녀석, 싱겁기는…"
사내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때가 되면 다 길을 찾을 것을… 이게 천연두나 단순한 역질도 아닌 걸 알면서도 그러했느냐… 너, 정말로 죽을 뻔한 게다. 명심하거라."
"네… 송구합니다, 스승님."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아리노부는 놀라 그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사내는 한 치의 동요도 보이질 않고 여전히 산만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 후 장년의 남성이 수수를 헤치고 그들이 서 있는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니카호 가의 하인, 조에몬이었다.
"아이고, 도련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조에몬, 여기까지 왜 온 거야?"
아리노부가 반가움을 드러내면서 되물었다.
"한노 주인님께서 부탁하신 일이 있어서요."
조에몬이 벙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여기 북과 징입니다."
"북과… 징? 스승님, 이것은 어찌…?"
사내는 아리노부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 조에몬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맙네, 조에몬. 신세졌네. 자네는 다시 본가로 돌아가 당주에게 이 일을 고하고 지원 병력을 끌고 오게. 수집원에도 연락하게 하고."
조에몬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 왔던 길로 뛰어갔다.
"이 역질의 감염자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이 무엇인지 아느냐?"
"네? 그것은…" 아리노부는 얼굴을 찡그렸다. "혹시 후각입니까?"
"아니다."
"사내가 그에게 북을 건넸다.
"분명 살을 탐하는 금수와도 같은 모습에 그리 느꼈겠지. 허나 그렇지 않다."
아리노부는 북을 받아들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청각입니까?"
"그래." 사내가 곤봉 하나를 건넸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느냐?"
"…이곳으로 유인한다…?"
"아리노부, 너 노래할 줄 아느냐?"
"…네? 그, 야마토우타는 조금 읊을 줄 아온데…"
"그럼 경이라도 외울까. 저들의 넋이라도 위로해야지."
사내는 이윽고 곤봉으로 징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리노부도 어서 박자에 맞추어 북을 두들겼다.
사내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목청을 돋웠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어리둥절해하던 아리노부는 사내가 지금 불경을 조선어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금일 영가(靈駕) 저 혼신은 혼이라도 오셨으면."
얼마간은 경과 북, 징 소리만이 벌판에 가득했다.
"만반진수(滿盤珍羞) 흠향(歆饗)을 하고 일배주로 감응을 하야."
아리노부는 일이 잘 되어가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 그들이 이곳으로 다가올까. 그전에 다른 촌민들이나 오는 것이 아닐까.
"살다 남으신 명과 복록은 자손궁에 전하시고."
이상한 점을 눈치챈 것은 그때였다. 아리노부는 산기슭이 흔들리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무언가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기라도 하는 듯이.
"송경법사(誦經法師) 법문을 받아 모질 악 자 악심일랑 버리시고."
아리노부는 숨을 들이켰다.
"착할 선 자 선심을 돌려 풍화환란 제쳐놓고 재수소원 생겨주고."
이제 들판에는 멀찍이서 들려오는 괴성마저 섞여 울려 퍼지고 있었다.
"왕생극락을 들어가서 인도환생을 하옵소서."
수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바람 탓이 아니었다. 사내의 징 소리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괴성이 거세게 달아올랐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나무아미타불." 사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무아미타불!"
사내가 징을 옆으로 내던졌다. 땀방울이 맺혀 흐르는 그의 목이 파르르 떨렸다. 삿갓 아래로 보이는 선한 눈매가 아리노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아리노부는 어딘가 그가 즐거워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옛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느냐?"
"…예?"
"가짜 중 이야기 말이다, 쥐를 보고 가짜 불경을 읊은."
이제 사방의 수수는 전부 흔들리고 있었다.
"그 중이 이리 지껄이지."
괴성이 공기를 타고 흩날렸다.
"조르르, 조르르."
몇 대의 수수가 쓰러졌다.
"기어 나오려고 합니다."
신음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조르르, 조르르."
감염자 하나가 수수를 헤치고 들이닥쳤다. 사내는 오른손으로 곤봉을 잡고 턱을 후린 뒤, 쓰러진 자의 이마를 내리조겼다.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구멍에서 엿보고 있사옵니다."
사내는 등을 돌려 아리노부에게 눈짓했다. 감염자 하나가 다시 튀어나와 측면에서 다가왔다. 아리노부가 뭐라 경고하기도 전에, 사내의 곤봉이 그것의 머리를 내리쳤다.
"조르르, 조르르."
괴성이 한층 격해졌다.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사옵니다."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리노부에게로 다가왔다.
아리노부는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온몸이 떨렸다. 사방에서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짐승의 것과도 같은 소리가 공기를 진동시켰다.
이제 소리는 멀지 않았다.
"조르르, 조르르."
가슴팍에 검이 박힌, 한 감염자가 툭 튀어나왔다. 사내는 자연스럽게 곤봉으로 놈의 머리를 쳐 으깨버렸다. 거닐어 오던 속도 그대로, 감염자는 바닥에 쓰러졌다.
"나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수십 명의 감염자들이 수수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끔찍한 모습들이었다.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고약한 외양의 귀신들이 그곳에 실재로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오면서 자빠지기라도 했는지, 다리를 절거나 혹은 살갗이 찢어져 그 속에 든 근육을 온통 내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아리노부와 사내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괴성을 발했다.
"이거 네 검이냐?"
사내가 방금 엎어진 감염자에게서 검을 뽑으며 물었다.
"네? 네… 맞습니다."
"곤방은 어떻게 쓰는지 알겠지?"
"네, 스승님."
"자, 북을 두드리듯 치는 게다. 명심해라."
사내가 아리노부에게 자신의 곤봉을 던지자,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
이윽고 사내는 돌아서서 감염자들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바람이 일었다.
동시에 가장 가까이로 다가오던 감염자의 목이 날아갔다.
검광이 번뜩이더니 그 옆, 그리고 그 옆, 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던 감염자의 목덜미도 같은 방식으로 베이고 말았다. 머리와 몸을 잇던 경추가 잘리고만 감염자들은 금방 중심을 잃고 아래로 쓰러졌다.
날카로운 공세와 더불어 유연한 몸놀림이 바람처럼 적들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솜씨였다.
좌측으로 한없이 나아가던 사내는, 갑자기 방향을 돌려 우측의 적을 갈라냈다. 칼등과 칼날이 공진하며 우글거리는 적들의 머리께에서 춤을 추었다. 턱 아래를 깊숙히 찌른 그의 칼은, 세를 낮추었다가 부드럽게 나아가며 동시에 두 명의 목을 갈라 내렸다.
일본과 조선과 청, 그리고 아리노부가 알지 못하는 어떤 먼 나라의 검술이 혼재된 사내의 검법은 언제나 한 나라의 색채가 일어나면 다른 나라의 색채가 뒤를 이어서, 언제나 가늠할 수 없었고 언제나 종잡을 수 없었다.
잠시 세를 가다듬은 사내는 머리 위로 칼을 들어 올려 왼손의 엄지 위에 칼등을 놓았다. 그러다 적들이 충분히 모인 그 즉시 빠른 속도로 돌파하기 시작했다. 감염자 몇이 중심을 잃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사내는 그들이 다시 일어서기 전에 목을 뚫었다. 칼날이 썩어가는 피를 튀기며 살을 갈랐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그의 검광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사내는 아리노부가 일전에 보았던 그의 대인 전투 때와는 다르게 끝없는 공세를 내뿜고 있었다. 그는 농번기의 농부처럼 근면하게 감염자들의 목과 머리를 부쉈다. 검은 그저 찌르고 베는 것, 이라던 사내의 가르침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지금 사내는 그 말을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등 뒤에서 다가오던 적의 목젖에 칼날을 꽂은 그는, 이내 좌측에서 다가오는 또 다른 적의 가슴팍을 걷어차고 입을 벌린 그것의 머리를 칼자루로 후려쳤다. 그리고는 또다시 참수. 바닥으로 떨어진 머리들이 흙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아리노부는 넋을 놓고 있다가 자신의 측면에서도 들려오는 괴성에 퍼뜩 놀라 곤봉을 움켜쥐었다. 해가 거의 다 져가는 시점에서, 시야로 무언가를 파악하기란 너무나 어려웠다.
젠장…
"아리노부!"
"네, 네, 스승님!"
"놈들이 가장 취약한 감각은 시각이다! 네가 그들을 못 본다면, 그들 역시 너를 보지 못한다!"
사내가 감염자 하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앞으로 엎어지는 그것의 목은 눈 깜짝할 새 갈라지고 말았다.
"감각에 맡기고 어둠으로 들어가야 한다! 밤은 이 싸움에서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네!"
아리노부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공기가 폐 속을 메우는 감각과 동시에, 그는 주춤대며 어깨를 펴고 두 봉을 상체 높이로 들어 올리는 기본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섣불리 나서서 공격할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허공만 때리다가 일격을 당할 수도 있으므로.
그는 다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의 신경이 저릿하게 울려왔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사취.
지금이다.
오른팔의 모든 근육이 일순간 긴장했다가, 반원을 그리며 손에 든 곤봉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일격.
손목에 충격이 전달되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감염자의 몸뚱어리가 뒤로 쓰러지는 형태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리노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잽싸게 전진하여 그 근방으로 모여들고 있는 감염자의 무리에 접근했다.
쇠몽둥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들의 골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의 뇌 파편이 터질 때마다 곤봉은 섬뜩한 소리를 내며 크게 울어댔다.
어딘가 막혀 있던 심장의 혈이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만 같았다. 이게 그 말이었구나. 감각에 맡긴다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자유로이 날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
아리노부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덤벼드는 감염자의 목을 후려치는 동시에 다른 곤봉으로 그 꺾여진 목을 한 번 더 내리쳐 완전히 뜯어져 나가게 했다. 그리고는 그 뒤로 다가오고 있는 또 다른 덩치 큰 감염자의 복부를 강타했다. 흡사 대고를 두들기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놈의 몸뚱어리가 뒤로 쓰러지며 뒤이어 오던 여러 감염자를 깔아뭉개고 말았다.
젊은이는 쓰러진 적들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놓고는,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다른 곳으로 서둘러 뛰어나갔다.
더욱 깊어져 가는 어둠이었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스승과 함께여서일까. 지금의 투지는 아까 전의 투지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능숙하게 발현하고 있었다. 어떠한 책임감도 부채감도 걱정도 없는 순수한 투지.
아리노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내려앉았다.
이제 끝낼 수 있다. 완벽하게 일을 마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수풀 사이를 막 헤치고 나서는 인영에게 접근하여 곤봉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나 내려치지 못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주 작은 아이였다. 이제 갓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시치고산도 제대로 쇠지 못했을 것만 같은 작은 체구가 흔들리며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아리노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그곳에 멍하니 서 있었다. 곤봉을 들어 올린 채로. 쇠몽둥이의 무게가 팔에 전달되었다. 할 수 없었다. 그 존재를 차마 내려칠 수 없었다.
뒤이어 그 아이를 따라 거닐어오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중년의 여인. 살갗이 다 벗겨지고 뺨의 살덩이는 물어뜯긴 듯 떨어져 나가 있었다. 팔은 부러진 듯, 걸음에 따라 갈대처럼 흔들거렸다.
그 뒤를 세 명의 아이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피투성이에 마구잡이로 물어뜯겨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지막을 거의 기어오다시피 하고 있는 백발의 노인이 장식하고 있었다.
일가였다.
그것은 참으로 참혹한 일가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얼굴에 남아있는 서로 유사한 양태를 인지할 때마다 거친 칼날이 아리노부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 순간 그는 눈앞의 그들을 내리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한낱 감염자가 아니었다. 한때 인간이었던 자들이었다. 한때 그 자신과 같이 삶을 영위해나가던 자들이었다.
그 분명한 사실 앞에서 아리노부는 자신의 무력감을 한없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점차로 다가오고 있었다.
공격할 수 없었다. 아리노부는 뒷걸음질쳤다.
아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낮고 깊은, 인간이 아닌 것이 흘리는 신음이었다.
아리노부의 시야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여인이 괴성을 질렀다.
아리노부의 입에서 떨리는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저 멀리서 불화살이 날아와 아이의 이마에 꽂혔다.
아리노부는 잠에서 깨어나듯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뒤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횃불과 칼을 들고 거닐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선봉에 선 자가 그에게 엄한 시선을 던졌다.
말쑥한 차림에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 남자는 아리노부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또 사고 쳤구나, 노부."
"…형."
마지막 감염자를 쓰러트린 사내가 천천히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사내를 알아본 아리노부의 형, 니카호 히로토모가 머리를 숙였다.
"스승님."
"오냐, 히로토모."
사내가 무표정하게 검신에서 액체를 닦아내곤, 그때까지 텅빈 채로 아리노부의 허리춤에서 흔들리고 있던 검집에 검을 넣었다.
"오랜만이로구나."
"조선에서 오시자마자 바로 출타하셨다더니, 이 녀석의 뒤치다꺼리를 하시러 오셨군요. 면목없습니다."
"당치 않다. 아리노부가 아니더라도 난 그이를 도우러 갔을 것이니."
히로토모의 목소리에 섞인 아리노부에 대한 묘한 힐난기에, 사내는 방어적인 투로 대꾸했다.
"조에몬이 잘해주었군. 너희 아버지는?"
"지소에 계십니다. 절 대신 보내셨습니다."
"킨시치로도 고생이 많군." 사내가 아리노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곤방을 다오."
"앗, 네."
"우리 둘은 근처 술집에 가 있으마. 네게 마무리를 부탁하마, 히로토모."
곤봉에서 살 파편 따위를 닦아내며 사내가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만 수수밭 사이에 숨어있을 놈들의 살아있는 상체 따위의 것을 전부 색출해야 한다. 또한 문제의 산촌을 샅샅이 뒤져 남은 감염자를 모두 없애야 하고."
"받들겠습니다, 스승님."
평소라면 마을 촌민들로 북적였을 술집은 오후 나절부터 계속된 소란 탓인지 텅텅 비어 있었다.
아리노부와 사내는 한구석에 앉아 주문한 술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 동안 짙은 침묵이 둘 사이를 휘감았다.
"…너, 히로토모에게 무언가 잘못한 게 있느냐?" 사내가 대뜸 물었다.
"그런 것은… 없지만," 아리노부의 표정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왜 날이 서 있는지는 알아요."
"왜?"
"제가 스승님과 너무 친해서요."
아리노부는 침을 삼켰다.
"그래서 형은 제가 다음 당주로 내정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야에 누나나… 히데코 누나도."
"당주로 내정이 돼?"
사내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삐뚤어졌다. 무슨 이야기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는 듯했다.
"누가 내정을 한다는 이야기더냐?"
"당연히 스승님이죠."
아리노부는 죄라도 지은 듯 거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주를 내가… 결정한다고?"
"대부분 당주가 된 선조들은 다 스승님과 가깝지 않았습니까. 당장 저희 아버지도 그러셨고요. 어릴 때부터 스승님과 각별한 사이셨다고…"
"…허."
사내가 한숨을 흘렸다.
"너희가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구나. 어쩐지 나이를 먹더니 그렇게…"
아리노부가 얼떨떨한 눈치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네게만 관심을 보이는지 아느냐?"
"왜…요?"
"제일 못나서."
아리노부의 눈동자가 일순간 멍해졌다.
"…네?"
"농이다 녀석아."
전혀 농담인 것 같지 않은 무표정. 그러나 저런 가벼운 어조의 말은 사내치고는 장난기가 가득한 이야기임을 아리노부도 이제 안다.
"안 웃겨요…"
"내가 당주를 도대체 왜 정하지? 그건 너희 니카호 일족 사이에서 정할 일이 아니냐."
사내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난 어디까지나 객인(客人)이다. 니카호 가문의 손님. 손님이 주인댁 정사에 간섭해야 쓰겠느냐?"
"역시…"
아리노부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아쉬우냐?"
"아, 아쉽긴요. 당치도 않습니다."
젊은이가 손을 내저었다.
"전 아직 형이나 누나들에 비해선 어리고 나약합니다. 경험도 부족하고… 아까와 같은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하고요."
"그래도 들으니 너, 수집원의 정삼등 위사가 되었다고 하던데 말이다. 그 정도면 상당히 성숙한 게 아니더냐, 예전에 비하면."
사내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리노부는 그 어조에 좀 더 짖궃은 장난기가 가미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역병신을 처음으로 보고 울면서 집에 가고 싶다고 하거나, 갑자기 가부키 배우가 되겠다고 하지는 않지 않으니."
"언제적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아리노부가 얼굴이 새빨개져 소리쳤다. "일고여덟 살 때 이야기를…"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리노부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졌다.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전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들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를?"
"아까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감염자들을 말입니다." 아리노부가 나직히 대꾸했다. "어린아이들과… 여인, 그리고 노인."
"가족이었군."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처리할 수…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손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하게 쥐어져 있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허옇게 변해버린 손가락이 이따금 경련했다.
"…동생 같았습니다. 그 아이들 전부가 제 동생 같았습니다."
삿갓 아래서 건조하게 빛나던 사내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아리노부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았다. 아리노부의 어린 동생, 마사오미. 어린 나이에 천연두로 죽은 어린 마사오미. 두술사의 가문에서 천연두로 죽은 아이. 그 아이는 오 년 전에 죽었다.
아리노부가 그 아이를 각별히 여겼다는 사실을 알기에, 사내는 그날 이후로 마사오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리노부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전까지는.
"마사오미가… 보였습니다."
사내는 조용히 아리노부의 고백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 여인은 제 어머니처럼 보였습니다. 그 노인은 제 조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게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그 여인의 모정이 떠오르더군요. 실제로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지만, 분명 그랬으리라고 생각이 들어서… 사념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제가 겪지 않은 아이들의 행복한 순간들과, 부모에 대한 사랑과, 다가올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그리고 노인이 아이들을 보며 느꼈을 어떤 안정감과 기쁨까지도."
아리노부는 더듬거리고 낮아지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내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순식간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그들의 삶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한 삶이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을까 떠오르니까… 공격할 힘도 의지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내는 때마침 전달된 술을 아리노부의 술잔에 가득 부어주었다. 아리노부는 술잔을 단번에 비워내고는 말을 이었다.
"저도 압니다. 저도… 제가 그 순간의 정에 휩쓸려 그들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역병을 막아내지 못했겠지요. 형과 누이들은 끝까지 고뇌하지 않고 나아갔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허나…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리되었다 한들 그들은 한때 우리와 같이 삶을 살아내고 내일을 준비하였던 자들이라는 것이요. 우리가 그들처럼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 이렇게 생각하니… 괴롭습니다."
사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래서야."
"송구합니다, 스승님."
"네게 사과를 듣고자 함이 아니다." 사내가 천천히 말했다. "그저 안타까워 그러지."
아리노부가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스승으로서 말하자면, 지금 네 태도는 별로 권장하고 싶지는 않구나."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검이 그저 찌르고 베는 것이듯, 두술 또한 그러하다. 두술이란 물들이는 것이다. 역병을 다스려 인민에게 새로운 파동을 일으키게 함이 이 두술의 근본 동인(動因)임을, 잊었느냐?"
사내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두술은 변혁이며 다시금 파동이다. 니카호 일족이 큰손님들의 본의와 달리 활인의 대업을 짊어지었으나, 그 큰 마음은 다른 게 없음이야."
그의 짙은 시선이 아리노부를 향했다.
"우리는 물들이며, 모으며, 치료한다. 역귀와 역신을 막아내고 물러나게 함으로, 진정한 화(和)를 일구는 것이 대업의 목적함이다. 그리하려고 우리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한 음절 한 음절이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아리노부는 꼭 부모님께 혼이 나는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역신과 마주하기 위해 스스로 병에 걸리고, 죽음과 삶의 경계선 위에서 고통을 택하는 것이 바로 그것임이라. 헌데 너는 지금, 대업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서 소지(小志)에 얽매여 있음이 아니냐?"
"며, 면목없습니다, 스승님."
아리노부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한평생 신원을 네게 의지할 사람, 즉 네 숙부가 되었다가, 형이 되었다가, 장차 네 동생이 되었다가, 조카가 되었다가, 손자가 될 사람으로 말하자면,"
사내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내가 다른 녀석들보다 네게 더 관심을 보이는 게다."
"방금 제일 못나서라고…"
"농담이라니까."
사내가 대꾸했다.
"그래. 네 말대로 네 형제자매는 그 상황에서 주저하지 않았을 게다. 오해하지는 마라. 그 녀석들이 감정도 없는 비정한 이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책무를 진지하게 그리고…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것이지."
사내가 잠시 뜸을 들이다,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스승이신 가모장, 야카르엔처럼."
아리노부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물론 그도 니카호 일족이 호소 일족이었을 때에 일족의 스승이 된 도래인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도래인들 중 유일하게 니카호 가와 연을 맺고 있는 자는, 오직 아리노부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이 사내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다른 이들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고국인 대한(大汗)의 나라, 그분들의 어휘로 말하자면, 다에바에서 추방당하신 가모장께서는 스승님 세 분 중 가장 열렬하게 자신의 의무에 몰두하신 분이셨지."
사내의 목소리에 어떤 향수, 그리고 깊은 감정이 배어 나왔다. 아리노부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어쩌면 증오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허나 그분은 사람을 보지 못하셨다. 실제 살아가는 백성들을 보지 못하셨어."
사내가 다시 술잔을 비웠다.
"네가 방금 한 말 말이다."
아리노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내가 나의 아비의 죄로 스승님들께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으로 두술을 행할 때…"
사내의 시선은 텅 빈 술잔에 붙박여 있었다. 그의 눈은 술잔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그때 내가 그분들께 했던 이야기와 놀랍도록 같구나."
"정말요?"
"나도 내가 죽여야 할 사람들이 자꾸만 내 가족처럼 느껴졌거든."
"…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지옥 같은 침묵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나도 같이 죽였지. 그때까지 스승님들 손에 죽지 않았던 내 안의 마지막 사람을 없앴다."
아리노부의 표정이 조금씩 새파래져 갔다.
"…"
"나는 너의 형제자매들이 그리될까 두렵다. 사람은 사람만이 도울 수 있는 거다. 책무와 정당성 사이에서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버리는 것은 대업으로 가는 길에서조차 벗어나 버리는 것이며, 실제의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활인하나 그 활인의 대상이 되는 실제의 백성은 보지 못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불러오겠느냐?"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허나 너는 그렇게 되지 않고도 할 수 있겠지."
"…과, 과찬이십니다."
"너는 장차 무얼 하고 싶으냐?"
"네?"
"단순히 수집원에서 삼등, 이등, 일등 위사가 되는 것이 너의 목적은 아닐 것 아니냐."
사내가 물었다.
"너는 어느 쪽으로 걸음을 옮길 테냐."
어느 쪽으로 걸음을 옮겨야 하는가.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젊은이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문득 생각에 잠겼다. 하고 싶은 일, 나아가고 싶은 방향. 생각이 오만 곳에서 터져 나왔다가 흩어지고 부딪히고 분산되었다.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아리노부는 입을 꾹 다물고 잠시 생각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의외로 답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어린 시절부터의 꿈. 시대가 그에게 시키는 길.
그는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변혁을 일으키고 싶습니다."
"변혁이라." 사내의 시선은 아리노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떤 변혁 말이냐."
"아실지 모르겠으나… 저번 달에 안세이 5개국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아리노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위험은 이제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일본은 지금 밤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밤입니다. 열강은 점점 동양으로 다가오고, 이럴 때에 변혁이 없음은 곧 멸망을 의미할 것이 아닙니까."
처음 말을 꺼낼 때에는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지만, 점차 말을 이어나갈 때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한때 이 동아시아에서 대국의 위치를 점하던 청마저 손쉽게 무너져 가는 이 즈음에, 일본은 생사의 기로에 서서 멸망과 부흥 중 하나로 걸음을 옮기려 하고 있습니다."
아리노부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다면 저는 변혁의 파도 위에 서겠습니다. 휩쓸리기보다 이끌겠습니다. 끌려다니기보다 끌고 다니겠습니다. 그게 제가 걸음을 옮길 방향입니다. 여명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뜻있는 자들이 할 일이니까요."
사내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조금 뒤 그는 입을 열었다.
"너는 당주가 되기 싫으냐?"
다른 종류의 충격이 전신을 타고 흘러들었다. 창문에서 밤이 떨어져 깊은 어둠을 품고 세상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 사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손님은 주인댁의 정사에 관여할 수 없다고. 하지만 집안 모두가 스승으로 여기는 손님의 말은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그 말만큼이나 사실인 진리였다.
아리노부는 지금 이 질문이 그의 현재와 미래를 완전히 바꿀 수 있을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다. 어쩌면 이로써 그가 생각하지도 못한 곳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단지 이 질문에 답하는 것만으로도.
"싫은데요."
사내가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 단호한 거 아니냐."
"전… 하기 싫습니다."
아리노부는 고개를 숙였다.
"정녕 스승님께서 그리 좋게 보아주신다 한들 그 자리는 제게 맞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선 그 변혁이 가능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자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리노부가 담담히 대답했다. "앉은 이의 문제죠."
"앉은 이라."
"제게 적은 헛된 인습에 휩싸여 변하지 않는 자들이면 충분합니다." 그가 씁쓸히 웃었다. "제 가족들마저 적으로 돌리는 건… 솔직히 너무 버겁습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사내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삿갓을 벗었다. 조선식 상투가 달빛을 받아 빛을 내었다. 언제 보아도 특이한 기법이었다.
"아직 안 푸셨군요."
"아마 앞으로도 안 풀 게다."
"왜…요?"
"2주 뒤에 나는 다시 조선으로 갈 것이다."
"얼마나 오래 가 계실 예정이십니까? 전처럼 이십 년 가까이 체류하실 예정이라면…"
"아니다."
"그럼 설마 그 이상이나 계실 겁니까…?"
"지나치다, 인석아. 에도 막부 이전에나 그리 오래 다녔었지, 요새는 그럴 일도 없지 않으냐?"
사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딱 오 년, 오 년만."
그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이 밤이라 하였지. 조선 역시 밤이다. 어찌 보면 더 짙은 밤이지. 새로운 정보를 얻어 많은 부분에 쇄신을 일으킨 타국과는 달리, 처음 성리학적 신념은 다 버리고 단지 그릇된 구조를 고집하여 무능과 부패로 찌들어가고만 있으니… 그리고 60년간 왕이 세 명이나 바뀌면서 밤은 점점 절정으로 치달아가고 있다."
그가 술잔을 채워 다시 들이켰다.
"조선이야 망하든 말든 상관없다. 허나 그 땅 위의 백성들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사내가 아리노부에게 시선을 던졌다.
"5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한다. 조선을 밤에서 끌어내기 위한 모든 것을. 다행히도 조선에는 너처럼 뜻있는 자들이 많고, 그들과 함께한다면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겠지."
그의 입가엔 쓴웃음이 걸려 있었다.
"허나 그리하여도 그대로라면, 나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설사 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어찌 되시는 겁니까? 조선은 스승님의 조국이 아닙니까?"
"신라가 내 조국이다. 이미 천 년 전에 망한 그 나라."
사내가 재밌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조선은 단지 내 고향 땅 위에 세워진 또 하나의 나라일 따름이야. 흥(興)의 시간도…망(亡)의 시간도 겪을 수 있는 일개의 국가일 뿐이지."
사내는 자신의 잔을 비워냈다.
"나는 너와 달리 구닥다리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늙은이라, 가히 가능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그가 건조히 말했다. "입내내듯 변혁이라니, 우습기도 하나…"
"당치도 않습니다."
아리노부가 강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걱정이 담긴 투로 그가 말을 이었다.
"만일… 실패하신다면 정녕…"
"만일 운명이 그리 정해진다면 별수 있겠느냐?"
잔이 탁자 위에 툭 올려졌다. 술잔이 월광을 받아 빛났다.
"더는 김철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일이 없을 뿐이다. 단지 니카호 한노만이 남을 뿐이고."
아리노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잠시 먼 공간을 바라보는 듯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기억 속 무언가를 찾아내는 듯한 그의 눈빛은 달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쁠 게…" 그가 멍하니 말을 이었다. "뭐가 있겠느냐. 아깝긴 하겠다만."
그가 술병을 기울여 자신과 아리노부의 술잔을 가득 채우고는, 아리노부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을 다오."
조금 어리둥절한 채로, 아리노부는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사내, 한노는 그 검을 조심스럽게 검집에서 뽑아내었다. 그리고는 검면에 쓰인 글자에 손을 갖다 대었다. 아리노부는 그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활한 살기를 맡을 수 있었다.
"무덤 사이를 배회하며 시신을 거두네彷塋間収屍 어진 물결을 밟고 이름을 지키리跆仁浪保名"
한노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직접 지은 검명이지."
"네, 스승님."
"너도 알다시피, 이 검은 조선의 수신도인들에게 직접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거다. 쇠와 기계를 숭상하는 이들이니, 실력은 말할 것도 없으며…"
한노는 검을 가만히 들어 보였다.
"한 가지 고백하마. 네가 검술을 배우고 진검을 처음으로 잡았을 때, 이 검을 네게 선물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나는 확신하지 못했다."
아리노부는 조용히 스승의 말을 경청했다.
"오늘에 와서야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걸 알겠구나."
한노가 빙그레 웃으며 검을 다시 검집 속으로 집어넣었다.
"태구련이 이 검을 꼭 큰 사람에게 주라 일렀는데… 너야말로 큰 사람이다. 앞으로 나아갈 줄 아는 진정으로 어른인 자구나."
아리노부는 입을 벌렸다가 입을 닫았다.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머리를 다시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스승님."
"너나 나나 네 검명처럼 각자의 이름을 지킬 수 있게 노력하자꾸나. 그리고 둘 다 서양의 이름을 가지게 되는 일은 될 수 있다면 피하고."
그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는 다시 아리노부만이 알 수 있는 웃음기가 섞여들어 있었다.
"원 스승님도…" 아리노부 역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네 스승님… 받들겠습니다."
달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치고 나서고 있었다. 노오란 광채가 어둑한 하늘을 메우기 시작했다. 빛이 파도처럼 물결치는 가운데, 달은 다가오는 여명의 색채를 기다리듯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