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경
클래식 바 "톨링 벨"
"이런 미친…"
효린이 이리저리 날아드는 유리잔과 고함 소리를 피해 테이블 아래로 숨으며 말했다. 오늘의 레퍼토리는 패싸움. "톨링 벨"은 어느새 이런 곳이 되어 있었다.
"저기요, 모두들 제발… 흐악!"
"톨링 벨"은 효린이 운영하는 고전 칵테일 바인데, 무려 대한제국 시절부터 4대째 내려오는 가업인 만큼 건전하고 점잖으며 프로페셔널한 운영을 추구해왔다. 지금은 매일같이 난장판이 펼쳐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 의자, 건드리면 — 아니, 젠장할…"
문제의 원인은 세월이 지나며 주변에 들어선 추잡한 유흥업소들이었다. 유흥업소의 손님들은 술과 함께 갖가지 불건전한 서비스들을 제공받았고, 톨링 벨에도 비슷한 혜택을 요구하곤 했다.
"그건 진짜 안 돼요. 그건 할아버지 때부터 — 진짜 미쳐버리겠네!"
심지어, 가끔씩 유흥업소를 운영하는 조폭들이 찾아와 깽판을 친 적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의자를 부수거나 유리잔을 깰 때마다, 매출은 뭉텅뭉텅 깎여나가곤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단골들 덕에 빚은 안 진다는 점이랄까.
'아 씨발 제발 좀 그만해요!' 라 외치며 카운터 아래 숨겨둔 야구방망이를 휘두를까 생각도 했지만, 혼자 날뛰어봤자 다굴만 맞고 입원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섰기에 행동에 옮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 저 젠장할 것들 누가 다 쳐죽여주면 안 되는 건가…?" 테이블 위로 고개를 내민 효린이 작게 중얼댔다. 신고하면 경찰이 잡아가겠다만, 그의 속마음은 더욱 가혹한 응징을 원했다.
"제가 해볼까요?"
카운터 가까이에 앉은 후드 쓴 여자가 대답했다. 조금 전 난리통에 휘말려 유리잔 속 액체를 뒤집어쓴 분이었는데, 앳돼 보이는 얼굴과 살짝 곱슬한 단발, 보라색에 가까운 진한 벽안이 꽤나 신비로운 인상을 주었다.
"뒷일은 제쳐두고… 어떻게 할 건데요?" 효린이 자신의 뿔테 안경을 고쳐쓰며 말했다.
"일단 전 창이라고 하고, 성씨는 따로 없어요. 제가 몇 가지 손재주를 쓸 줄 알아가지고요. 대신, 이따가 제 부탁 좀 들어줄 수 있어요?"
"음…"
밑져야 본전이다. 이미 최악이니 실패해도 더 나빠질 일은 없다는 생각에, 효린은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그럼, 약속한 거 잊으면 안 돼요?"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창이라는 소녀가 후드를 젖힌 뒤 때맞춰 날아오는 병을 깨뜨렸다. 효린은 그녀가 어떻게 병을 깨뜨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왼쪽 소매 속의 팔뚝이 어느새 기계적인 장치들과 육각형의 총열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 덤비게 욕설이라던가, 뭐 그런 거 좀 해보세요." 창이가 총성에 놀라 얼어붙은 군중들을 보고 효린에게 요청했다.
"그… 그러죠!" 효린은 잠시 뜸을 들이곤 대답했다.
"이… 이…! 처, 처 그만… 좀…"
안타깝게도, 효린의 입은 마음 속 육두문자를 내뱉을 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그의 혓바닥은 꼬였고, 입은 의미를 꺼내지 못한 채 도로 닫혀 버렸다.
"그냥 계속 숨어 있으세요. 제가 그냥 할게요."
창이가 곧바로 싸움판에 난입해 제일 큰 체격을 가진 남자의 어깨를 쏘았다. 어깨에서 피가 솟구치는 걸 본 남자는 답지 않게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상처를 부여잡은 채 종종걸음으로 현장을 벗어났다.
"다음 누구야!!!"
창이가 크게 소리치자, 깡패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무기를 든 사람은 없었지만, 깨진 병을 올려 보이거나 주먹을 쥐어 보이는 것이 화를 돋구었음은 확실해 보였다.
"씨발 이 조막만한 새끼가!!" 무리 중 가장 흉악해 보이는 자가 자존심 상한다는 듯 의자를 집어들고 달려들었다. 니코틴 묻은 셔츠와 그 아래 비쳐 보이는 문신들이 마치 나 사람 좀 죽여봤소 하고 외치는 것 같았다.
셔츠 조폭의 내려치기, 창이는 왼손의 쇠뭉치로 의자를 막아내곤 오른손의 집게 같은 도구 — 언제, 어떻게 꺼냈는지는 모르겠다만 — 로 남자의 목덜미를 집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쾅 하는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이 마치 총성처럼 들렸다.
"다음." 상대방의 리타이어를 확인한 창이가 또 다른 조폭에게 외쳤다. 단독행동 없이 순순히 달려드는 게, 아무래도 방금 박살냈던 놈이 보스고 패싸움은 그저 조직 내의 일시적인 다툼일 뿐이었던 듯했다.
이내 조폭들이 나란히 달려오자, 창이는 그 사이로 몸을 던져 한 명을 눕혀버린 뒤 그대로 뒤돌아 총알을 날렸다. 그냥 납탄이 아닌 산탄이었기에, 목숨을 빼앗기엔 부족해도 다수의 출혈을 강요할 순 있었다.
이제 조폭 무리는 정말 진심으로 분노한 것 같았다. 뒤돌아 창이를 보는 눈은 증오와 흑심으로 이글거렸고, 당한 바를 그대로 돌려주겠단 의지는 테이블 밑에 숨은 효린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째려볼 거면 말을 하든가!" 조폭들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창이는 그중 한 명을 잡아채 방금처럼 내리꽂곤 왼손의 총열을 휘둘러 턱주가리를 후려쳤다. 튀어오르는 누런 치아 조각을 보는 창이의 표정은 상당히 불쾌해 보였다.
다음 상대는 깨진 병을 든 얼굴에 흉터 있는 놈. 날카로운 유리날을 아슬하게 피하는 창이의 모습은 참으로 위태로워 보였으나, 그동안의 활약을 본 효린은 많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이내 창이는 병이 들린 손을 잡아챈 뒤, 발로 무릎 관절을 차 역방향으로 꺾어버리고는 명치에 박치기를 날려 그대로 쓰러뜨렸다.
"이제 나오셔도 될 것 같아요."
이내, 도망을 시도하던 마지막 조폭까지 쏘아 넘어뜨리게 된 창이가 효린이 숨은 테이블로 다가오며 말했다.
"흑!" 그러나, 창이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갑자기 유리병의 세례를 받고 쓰러져 버렸다. 초반에 바닥에 내리꽂았던 보스 놈이 아무도 모르게 받침대를 뽑아 찬장을 크게 기울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우으… 뭔 놈의 여자애가 이렇게 독해!" 조폭 보스가 외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창이를 끝장낼 도구를 찾는 것 같았다.
"찌르는 거, 베는 거, 패는 거… 다 좋으니 한번에 끝낼 수 있는 걸로 — " 보스의 시야에 야구 배트가 들어왔지만, 그것은 어느새 테이블 밑에서 빠져나온 효린의 손에 들린 것이었다. 휘둘러진 배트에 맞은 보스는 말도 맺지 못하고 침묵했다.
"괜찮아요?" 효린의 말에, 창이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두 손은 어느새 무기가 아닌 평범한 손바닥으로 돌아가 있었다.
"예… 난리친 건 미안해요. 방금 저 사람들에게 음료수 맞은 거 생각하니까 성질이 뻗쳐서… 성격이란 건 참 고치기 힘드네요."
"아니에요. 어차피 이어가기 힘든 장사였는데, 뭐 닫을 계기가 생긴 셈 치죠."
"…아, 부탁!"
창이가 잊었던 게 떠올랐다는 듯, 손바닥을 탁 하고 치며 말했다.
"정시영 씨의 4대손, 맞으시죠?"
"제 증조할아버지 이름은 어떻게 아세요?"
"어르신께서 찾아오라 하셨거든요. 제가 맞게 찾아왔나 보네요."
이내 창이는 코트에 묻은 유리 조각들을 털어낸 뒤,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말했다.
"제 소개를 다시 할게요. 전 창이라고 하고요, 정시영 씨의 친우셨던 강규택 어르신께서 생전에 아끼던 권총이에요."
"권총이라… 비유죠?"
"어… 놀랍게도 아니에요." 창이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흔히 말하는 에고 소드… 그런 거와 비슷한… 부류에요."
"그, 그렇군요. 근데 총은 사수가 쏴야 쏘아지는 것 아닌가요? 창이 씨는 스스로를 쏘아낼 수 있는 것 같지만…"
"제가 부탁하려는 게 그거에 대한 거에요." 창이가 효린의 손을 와락 잡으며 말했다. "잠시, 제 사수가 되어주실 수 있을까요?"
"예???"
이 말에 대해서만큼은 도저히 무덤덤할 수 없었던 효린이었다. 사실 "톨링 벨"은 뒷세계 사람들도 자주 들르는 곳이었으므로 에고 소드가 어쩌고란 말까진 그러려니 하고 넘겨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쥐어잡는다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아… 그렇게 부담되는 일은 아니에요. 사실 전 유산을 상속하러 왔어요. 앞에서 말한 규택 어르신 말이에요. 저를 위해 유산을 남기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유산의 단서가 정시영 씨와 그 자손에게 있다는 말도 하셨어요."
"유산의 단서라니, 전 금시초문인데요."
"시대가 꽤 지났으니, 직접 기억으로 전해내려오진 않았겠죠. 아마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에요. 아무튼, 유산 찾기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하지만, 가게가 — "
"만약 제가 유산을 상속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곳의 수리를 위해 유산의 4할을 양도할게요. 규택 어르신께서는 대한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셨으니, 아마 독립운동에 유용한 자금과 시대적인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많은 액수일 텐데, 이러면 구미가 가시려나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창이의 표정에 효린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었으니.
" — 네, 좋아요. 따라가 보도록 하죠."


